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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13:27:05

백제/역사귀속과 계승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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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2. 계승
2.1. 현대 이전
2.1.1. 한국
2.1.1.1. 통일신라2.1.1.2. 발해2.1.1.3. 후백제2.1.1.4. 고려2.1.1.5. 조선
2.1.2. 일본
2.1.2.1. 아스카 시대
2.2. 현대
2.2.1. 남북한
2.2.1.1. 남한2.2.1.2. 북한
2.2.2. 일본

[clearfix]

1. 기원

백제인은 북방에 위치한 부여나 고구려와 같은 계통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시조인 온조왕의 설화도 부여, 고구려와 연관이 있다.

백제 초대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두 가지 전승을 싣고 있다. 첫 번째 전승은 졸본부여 왕의 차녀가 고주몽과 결혼하여 낳은 차남이 온조라는 것, 두 번째 전승은 그 형제인 비류를 소개하면서 두 형제가 우태[1]소서노[2]의 아들로 소서노가 과부가 됐다가 주몽과 재혼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 작으로 백제 멸망과 500년의 간극이 있다보니 여러 설을 같은 책에 한꺼번에 기록했다.

첫 번째 전승의 경우 온조왕은 주몽의 3남으로 이복 형인 고구려 2대 왕 유리와 친형 비류를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전승은 부여 왕가와 혈연이 되고 고구려와의 관계는 간접적으로 한 단계 떨어진다.

한편 외국 기록인 《위서》 <백제전>, 《북사》 <백제전>, 《속일본기》에서도 백제와 부여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북사》나 《속일본기》에서는 첫 번째 전승을 소개하면서 동명(東明=도모)을 언급하는데 이게 <연남산 묘지명>의 내용처럼 고구려 동명성왕과 부여 동명왕이 엄격하게 구분된 별개 인물인지 동일 인물인지 확실치 않다.

현대 사학자들 중에는 별개 인물로 당시에도 인식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삼국사기》의 첫 번째 전승이 당대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통일신라 시기 김대문의 《한산기》 계통의 자료가 <백제본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3]

즉 백제 건국세력의 계통이 넓은 의미에서 부여계임은 공통이지만, 도중에 고구려를 거쳤는지 아니면 부여계 우태에서 바로 분화한 것인지는 두 설이 모두 기록에 있는 상황이다. 여러가지 설들을 장황하게 설명해 분량이 늘어나는 것을 꺼리는 교과서에서는 그냥 주몽의 아들이라며 전자로 거의 단정해 서술하고 있지만, 후자를 지지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아서 이미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우태설을 지지했고[4] 신채호도 안정복의 주장을 지지했다.

아무튼 백제가 고구려와 내내 사이가 나빴던 점, 성왕이 남부여라고 백제를 개명한 점, 중국과 일본의 기록 등을 미루어 볼 때 부여의 후손으로서 근원은 고구려와 같은 계통으로 여겨지지만 백제가 고구려에서 파생된 역사성이 떨어지는 나라는 아니라고 주장했고, 두 나라끼리 부여의 정당한 후손이 누군지를 두고 정통성 싸움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는 둘 다 부여의 후예라는 계승의식과 별개로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삼국통일전쟁 막판의 여제동맹 구도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한 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는 엄밀히 보면 멸망 이전 몇십년 정도에 한정된 관계였고, 왕조 존속기간 수백년을 통틀어 보면 이들이 신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기간보다 여제가 서로 원수지간이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5] 현대 남북한관계도 그렇듯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실제 외교에서도 친밀함을 담보하진 않았다.

백제에서는 고구려를 박적(狛賊)이라고 멸칭했는데, 외관에서 알 수 있듯이 박(狛)= 맥(貊)에서 유래했으며 곰이라는 뜻이었다. 고구려도 고조선처럼 곰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고조선과의 친연성을 풀 수 있는 열쇠인 셈이다.[6]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백제의 경우 웅진을 《일본서기》에서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7]에 드날렸다.
<부여융 묘지명>, 682년

백제 왕자 부여융의 묘지명을 보면 당대인들은 백제와 고구려를 예맥족에서 기원한 하나의 부류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최근 고고학적 발굴로 볼 때 고구려와 백제의 연관성은 그럭저럭 입증되지만 부여와 백제가 고구려를 제외하고 직접 연관되는 부분은 거의 없는 걸로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가 백제의 이런 부여 직계 운운하는 주장을 시종일관 아예 상대하지도 않았던 일관된 태도가 여기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즉, 백제가 고구려와 대등한 부여의 후계국이란 주장은 고고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인데 고구려 또한 대외적으로는 본인들이 부여의 모체인 북부여(=고리국)의 후계니 부여와 대등하다고 주장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고구려는 북부여와는 관련이 1도 없고 금와와 대소의 바로 그 부여하고만 관계 있는 걸로 나타난다. 마찬가지 논리로 부여 또한 고구려의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상대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병먹금으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문헌 사료에 몇 개 남은 백제 왕실의 일방적인 주장만 취신해서 백제의 기원을 추적하는 건 이 대목에서 큰 의미가 없다. 백제의 건국 세력은 고구려에게서 나왔으나 훗날 고구려와 국가 대 국가로 경쟁하게 되자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면 이데올리기에서 밀리게 되니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요약하면 되겠다. 상술한 대로 고구려 또한 모체인 부여와 경쟁하면서 이러한 행동을 한 바 있다.

2. 계승

2.1. 현대 이전

2.1.1. 한국

2.1.1.1. 통일신라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8]

최치원,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삼국통일 직후 삼한일통을 내세우며 백제 역시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2.1.1.2. 발해
요동의 건안성에 옮겨졌던 웅진도독부를 최종적으로 흡수해 소멸시킨 게 다름아닌 고왕 대조영이다. 고구려의 후신 보덕국이 신라에게 흡수되었다면, 백제의 후신 웅진도독부는 발해에게 흡수된 모양새가 되었다.[9] 이 웅진도독부는 다름 아니라 당군이 사비성을 함락시켰을 때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해간 바로 그 사람들이었는데, 의자왕 직계를 비롯한 소수를 빼면 이 당시 압송된 자들의 대부분은 웅진도독부와 함께 건안성 일대로 옮겨졌다. 이들은 궁극적으로는 안동도호부에 종속된 형태였기에 대조영의 고구려 부흥 세력 진압에 동원되었다가 참패한 후 발해에 흡수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자세한 부분은 웅진도독부 문서 참조.
2.1.1.3. 후백제
후삼국시대견훤은 현재의 전주와 광주 일원인 전라도 지역에서 거병하며 의자왕의 한을 풀어 주겠다는 명분으로 백제를 다시 세웠다. 후백제는 10세기에 건국된 백제를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서 따로 부르는 명칭이다. 여기서 관직과 제도를 기존 백제가 아니라 신라의 것을 썼다고 하는 얘기가 있으나, 부활하는 모든 나라는 심지어 대한민국도 포함해서 그 전 나라 것을 쓰는 게 아니라 해당 시대에 가장 적합한 제도를 쓴다. 파르티아의 페르시아성을 부정한 사산조 페르시아도 정작 제도는 초기엔 파르티아 것이었고, 앗시리아에게서 독립한 이집트도 모든 제도는 앗시리아 것을 썼다. 발해와 고려도 정작 모든 제도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제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게 되는 것이고. 약간 특이한 부분이라면 견훤이 원신라 지역 출신이라는 건데 이것도 부활하는 나라의 정체성과는 무관하다.
2.1.1.4. 고려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를 통해 백제를 신라, 고구려와 동등한 '<본기>'로 서술해 고려의 옛 조상 중 하나로서 인식했다. 물론 조상인 고구려나 정치적 전임자인 신라에 비해서는 많이 언급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고려왕조가 공식적으로 고구려나 신라보다 백제의 격을 낮추지는 않았다. 당연히 백제 멸망 이후에도 그 영토에서 살던 수많은 백제인들이 갑자기 증발해버린 게 아니었기에 백제 문화는 생활문화로서는 고려시대까지도 유지되면서 전체적인 한국 문화에 통합되었으며, 계승의식도 남아 후백제가 건국될 정도였기에 고려 조정에서도 백제계는 전체 인구에서 무시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10] 또한 만월대 내 별궁에는 "부여궁"이라는 궁전도 있었는데 고구려 북부의 부여국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지만 어느 정도는 백제를 의미할 수도 있다[11]. 또한 3경 중 가장 늦었지만 백제의 고도 한성에도 남경을 설치했다. 고려 남경=백제 한성이라는 인식은 당대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12] 물론 남경이 설치된 한양 지역(강북)은 백제의 한성이 있던 강남 지역과는 다르지만, 강을 끼고 구분이 될 뿐 큰 범주에서 보면 백제 한성 지역이라고 볼 수는 있다.[13]

전라도에서 일어난 이연년 형제의 난은 백제 부흥을 기치로 내세워 이때까지도 백제의 유민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1.5. 조선
조선근초고왕대 백제의 고도에 한성부가 자리잡고 있다는 인식을 하였으며 초기 위례성(남한산)으로 인식한 광주시의 남한산성에도 8전 중 하나인 숭렬전을 지어 온조왕을 모셨다.[14] 본류는 신라로 여기는 경향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제를 포함한 삼국 모두의 계승의식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사가 있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 3월 13일

실제로 조선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시조들에게 모두 똑같이 제사를 지냈었다. 아래는 백제의 건국 시조인 온조왕(溫祚王) 즉, 온조에 대한 조선측의 제사 관련 기록들이다.
충청감사 유근(柳根)이 백제(百濟)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분묘를 직산(稷山) 땅에 세우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충청감사 유근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분묘를 직산에 세우기를 청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온조(溫祚)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 사람은 군사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城隍)에도 이미 사전(祀典)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예조가 온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아뢰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溫王廟)[15]를 세워 이서를 배향(配享)하도록 명하였다.
- 완풍부원군 이서의 졸기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온조왕(溫祚王)의 도사(禱祀)를 행할 때 엉겁결에 구차하게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미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날짜를 가려 중신(重臣)을 파견해서 경건하게 정성껏 치제(致祭)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궁해지면 근본을 생각하게 되고 병이 들어 아프면 부모를 부르게 마련입니다. 숭은전(崇恩殿)의 수용(睟容)을 방금 성 안의 사찰에 봉안하였으니, 상께서 친히 제사를 지내어 명명(冥冥)한 가운데 신의 가호(加護)를 비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예조가 온조왕의 제사를 다시 지낼 것을 청하다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워 온조왕(溫祚王)을 제사하고 위판(位版)을 고쳐 써서 ‘백제시조왕(百濟始祖王)’이라 칭하였다.

예조에서 ‘우리나라의 사서(史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모두 온조왕(溫祚王)으로 썼는데, 세대가 멀어져서 명호 및 시호를 분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거하여 위판에 쓰자고 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온조는 이름인 듯한데, 위판에 바로 쓰는 것이 어떠할지?"

했다. 예조가 ‘백제시조(百濟始祖)’라고 쓰기를 청하니, 상이 ‘왕(王)’자를 더 써 넣도록 명하였다.
-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워 ’백제시조왕’이란 위판을 만들게 하다[16]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뜸을 떴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장차 능에 거둥하실 때에 남한산성에서 유숙해야 되겠는데, 성안에 온조왕의 사당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셔야 할 것 같고, 험천(險川)과 쌍령(雙嶺) 모두가 병자년에 전쟁한 곳이니 거가(車駕)가 지날 때에 또한 제사를 지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유사에게 말하라."

하였다.
- 우상 김수흥이 영릉 참배 때 병자년 전적지에서 제사지낼 것을 청하다
임금이 산성(山城)은 바로 온조왕(溫祚王)이 나라를 개창(開創)한 땅인데,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성(城)과 못[池]을 수선(修繕)한 공이 있다고 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서는 일찍부터 이미 온조왕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 완풍부원군 이서에게 치제케 하다
승지를 보내어 남한(南漢)에 있는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 온조왕의 묘를 봉심하게 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광주부윤 김응순(金應淳)에게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중수(重修)하라고 명하였다.
-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다. 온조왕의 묘를 중수하라고 명하다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왕은 지난 시대 왕조들에 대해 덕 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는 일이면 더욱 그를 못 잊어하여 수로왕(首露王)의 능을 비롯해서 신라 여러 왕의 능에다 잔을 올리고, 삼성사(三聖祠) 제례의식을 다시 정했으며, 온조왕(溫祚王)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하고, 고려사태사(四太師)[17] 사우(祠宇)에는 사액(賜額)을 하였다.
- 정조 대왕 행장(行狀)
또 전교하기를,

"온조왕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에도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고(故) 영의정(領議政) 상진(尙震)의 묘(墓)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묘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고 고(故)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 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묘에 광주판관(廣州判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등의 묘에 종신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다

2.1.2. 일본

2.1.2.1. 아스카 시대
소가씨([ruby(蘇我氏, ruby=そがうじ)]) 같은 친백제 정치인들이 있었고[18] 백제에서 유래된 지명 등이 있어 국가적으로는 아니지만 개인이나 집단별로는 백제의 계승의식을 나타낸 예가 있었다.

2.2. 현대

2.2.1. 남북한

2.2.1.1. 남한
지역적으로는 각각 신라, 가야에 계승의식을 갖는 경상북도, 경상남도와 대비되어 충청남도, 전라도가 계승의식을 갖고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 경기도에서도 향토사의 시작인 백제의 역사를 중시한다. 다만 여기서 얘기하는 현대의 계승의식은 어디까지나 향토사의 관점에서 고향에 위치한 고대 국가에 애착을 갖는다 정도이지 그 나라만을 계승하고 다른 나라는 조상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편협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애초에 대혼돈의 현대 한국 정치판에서도 별다른 정치이슈감도 되지 않을 정도다.

전체적으로 삼국시대 내 백제가 차지하는 위상은 굉장히 모호하다. 고구려처럼 강력한 국력을 떨쳐서 국뽕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라처럼 삼국의 최종 승자가 되어 남북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등 역사 흐름의 주도권을 잡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비록 삼국 간의 쟁투에선 승리하지 못했으나 역시 남북국시대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한 성공적인 후계국인 발해를 남기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가장 성공한 후계국인 고려후삼국의 최종 승자가 되어 이후 조선 왕조까지 천 년이 넘게 이어진 한반도 통일국가라는 국체를 마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강대국이었던 점을 떠나서도 삼국시대에 실패한 걸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강력한 임팩트를 남길 수 있었다.

물론 국뽕 중에서는 백제가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주었기 때문에 문화 강대국으로서의 백제의 면모를 띄워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강대국인 수나라를 골로 보내버리고 차후에 통일국가 고려로 이어진 고구려의 임팩트에 비할 바는 아니며, 고구려, 신라 모두 백제처럼 뛰어난 문화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들이었고,[19] 무엇보다도 위 두 나라는 지역적 정체성 또한 확고하기에 백제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서 기록 또한 삼국 중에서 가장 부족한 편이라 이렇다 할 연구 성과가 두드러지는 편도 아니다.[20] 그나마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열었다는 이미지는 있지만 이것 역시 기억에서 흐려지기 좋은 너무 이른 시기였던 데다 전성기의 임팩트도 가장 약하기 때문에 갖다 붙힌 감이 없지 않다.

이렇게 백제에 대한 인식이 애매한 모습을 보이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백제는 천도를 할 뻔한 부수도까지 합치면 중심지가 서울, 공주, 부여, 익산으로 4개나 된다는 점도 있다. 물론 고구려도 역대 수도가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의 3개에다 부수도인 한성까지 있긴 하지만 졸본성은 초기 잠깐의 수도에 불과했던데다 국내성이 수도이던 시절에도 명백한 제1의 대도시는 단연 평양이었고, 이후 질서정연하게 국부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천도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성곽 유적=요동반도, 옛 왕릉 유적=지안시, 명백한 중심지 유적=평양시로 딱 정리가 되는 모양새다. 신라는 대표 중심지라 하면 단연 경주시 하나이기에 유물과 유적지 또한 몰빵되어 있고, 소백산맥 이남 세계에서 형성된 독특한 국가라는 지리문화적 정체성 또한 매우 강하다. 가야는 물론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지 못했기에 여기저기 산재한 유적지가 많긴 하지만 그나마 금관국이 위치했던 김해시가 가장 주목을 받고 있고, 무엇보다도 애초에 중앙집권국가도 아니었던데다 지역 자체도 한정적이라 경상남도 지역의 공동 문화유산이란 의미로 정리가 되는 모양새다. 그런데 백제는 역사상의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점에 더불어 장수왕의 침공으로 인한 예기치 못한 큰 후퇴 때문에 일단 유적지의 분포마저도 한성시대의 수도권 지역 유적과 웅진, 사비시대의 충청, 전라 지역 유적으로 크게 나뉘게 되었고, 고구려의 평양과 신라의 경주는 후대에도 여전히 대도시로 명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백제의 경우는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는 쇠락하게 되고, 오히려 세 수도 중 가장 입지가 애매했던 공주가 지역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다.[21] 서울은 물론 고려시대에 남경이란 부수도가 될 정도로 다시 대도시에 등극하긴 하지만 이때쯤 가면 백제의 이미지가 많이 흐려지기도 했고, 고구려의 유산을 계승해 한반도 중부지역을 중심지로 삼은 고려의 이미지가 또 덮어씌워지고, 그게 조선시대에도 이어지면서 이중으로 백제물이 빠지게 된다. 우연인지 백제가 자리잡은 지리의 특성상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22] 상황이 이러했다 보니 마치 딱히 중심지 없이 여기저기서 번영했던 가야에 대한 인식이 결국은 큰형님 신라에 종속된 것만 같은 모양새를 띠는 것처럼, 백제에 대한 인식은 삼국의 일익을 담당했던 국가임에도 결국은 큰형님 고구려-고려에 종속된 듯한 모양새를 띠게 된 것이다.

그래도 현대에 들어 무령왕릉, 금동대향로,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와 무왕릉 등이 발굴되고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면서 현재 한국의 서부 문화권(경기, 충청, 전라도 권역)을 상징하는 토속적인 역사유산으로서는 자리잡은 편이다.[23]

또한 고고학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한성백제 유적의 발굴과 수도권 과밀화의 나비효과로 예상치 못한 수혜 혹은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더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사건 사고도 더 많고 그만큼 주목을 더 받을 수밖에 없다 보니 이전보다 유적이나 유물 등의 발굴 이슈가 더 활발해지는가 하면, 재건축이나 재개발 등에 더불어 역사유적 파괴와 같은 안 좋은 이슈로도 더 많이 언급되게 되는 등, 일정 정도 향토사의 범위를 벗어나 고려나 조선처럼 한반도의 공통문화유산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이 백제사의 새로운 일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2.1.2. 북한
북한은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신라보다도 연관성이 떨어지는 백제에 대한 계승의식은 없지는 않으나 희박하다. 백제를 그저 고구려 중심 역사의 한 곁가지 정도로만 여긴다.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는데, 왕위를 이을 수 없어 고구려를 떠났지만 고구려의 선진적인 정치체제와 문화, 기술을 바탕으로 마한 소국에서 독립된 봉건국가로 탈바꿈 하였다 주장하는 등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구려 영향을 강조하는 편이다. 남한에서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백제가 고구려 유이민 외에도 토돈분구묘제를 사용하는 서해안 해양세력도 그 건국에 이바지 했다며 초기 지배계층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분명 초기 백제를 논할 때 고구려를 빼고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북한은 백제 왕조가 주몽을 시조로 여기면서도 고씨가 아닌 부여씨를 국성으로 삼아 해모수부여 계승권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냥 모든 것이 우월한 천하제일 고구려 형님이 있고 약간 덜떨어진 동생 백제가 있다 수준의 인식이다. 일례로 의자왕은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신라를 호되게 응징하였지만 '고구려의 힘만 믿고 국방에 소홀해진 채'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 평한다.

그 외에도 일찍이 고구려 덕분에 농업과 축산업, 잠업이 발전하였고 때문에 재련기술도 탁월하여 칠지도 같은 검이나 명광개 같은 갑옷을 곧 잘 만들었고 타국에서도 이를 보물로 여겼다 서술한다. 하지만 정작 이 기술을 위시한 백제가 어째서 야마토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었고 또 어떻게 그 우호 지속하였는가에 대한 자료와 언급은 찾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이 없는 게 남한에서도 백제는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친선국가다 보니[24] 반일정서를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북한 사회기조 상 사학계가 나서서 백제-야마토 둘의 끈끈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백제가 주변국과의 선진적인 문화예술 교류를 통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나섰다 평하는 남한과 달리 북한은 기초 산업이 잘 발전했다는 투의 평만 짧게 남기고 있다.

그나마 고구려, 백제 양국 모두 나당연합에 멸망했다는 동병상련 때문인지 다른 남한계 왕조들보다는 백제에 조금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편이긴 하다. 특히 계백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전사들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의 아주 훌륭한 예시로 곧잘 사용된다고 한다. 물론 그래봤자 고구려 미만잡인 북한인지라 비중이 공기에 가깝지만...

2.2.2. 일본

한•일 양국의 주류사학계에서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한 쪽이 먼저 고개 숙이며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백제와 왜 양측은 서로에게 문명 전수와 군사 지원을 각각 제공하던 혈연 동맹국의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 주류학계 및 민간에서는 초기 일본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백제를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중시한다.

아무래도 많은 백제인들이 왜국으로 건너가 정치, 기술, 문화 분야에서 활동해 왔던 만큼 그들의 후손이 일본 역사와 설화, 민담에서 자주 얼굴을 비추기도 한다. 모모타로 설화의 우라(오니)가 백제인이라는 설이 있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마츠리 중 하나인 시와스마츠리의 주인공 정가왕은 백제 왕족이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정가왕은 전쟁을 피해 지금의 미야자키현에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미야자키현에는 쿠다라노사토(백제 마을)라는 곳이 남아 정가왕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백제에 대한 애착을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야자키현 방언과 고대 한국어와의 연관성을 찾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자세한 것은 미야자키현 문서 참고바람. 이외에도 일본 곳곳에 백제인을 모신 신사가 남아있으며 아스카 시대 이전의 건축물은 대개 백제의 영향을 받은 만큼 흔적이 남아있다.

백제 멸망 이후 일본 천황가로 편입된 쿠다라노코니키시씨는 천황의 외척가문으로 역사서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었다. 결국 어머니 타카노노 니이가사무령왕계 후손이었던 간무 덴노가 등극하면서 한반도의 해모수/주몽 설화가 열도로 전해지기도 했고, 아키히토가 이를 근거로 한국과의 연을 느낀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현재 쿠다라노코니키시씨는 대가 끊긴 것으로 보이지만 오래 전부터 백제 성왕의 아들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는 오우치 가문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 중 임성태자 45세손 오우치 기미오씨는 자발적으로 한국의 백제 관련 행사에 꾸준히 참여하였고, 덕분에 한국인들이 오우치 가문의 기원과 업적을 알게 하는데 일조했다.

[1] 우태: 북부여해부루의 서손[2] 소서노: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3] 강종훈,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사료 계통과 그 성격>[4] 안정복은 백제가 고구려계가 아닌 이유로 백제가 고구려의 고씨 성을 따르지 않고 부여씨라 했으며, 개로왕이 북위에 올린 표를 보면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즉 부여-고구려-백제 순으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둘 다 부여에서 대등하게 갈라져나온 것)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증거라고 논증하였다.[5] 두 나라가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게 된 관산성 전투 이후로도 위덕왕, 무왕은 결코 고구려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의자왕 초기까지도 백제는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를 저울질하는 입장이었다. 당나라와 백제가 완전히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멸망까지 불과 10년도 남지 않은 650년대의 일이었다.[6] 이는 사실 고고학적으로도 고구려가 초기부터 고조선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기 때문에 설명이 꽤 되어 있다. 고조선-부여 관계 항목 참조.[7] 두 맥족이라는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의미함[8] 고구려 영토가 훨씬 큰데 무슨 소리냐 할 수 있지만 고구려의 실질 통치 영토에 대해선 논란이 존재한다. 다만 <남제서>에서 북위가 남제 사신단과 고구려 사신단을 나란히 앉혔다는 서술이 있는 등, 여러 사서들을 볼 때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조그마한 세나라로 묶여질 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는데, 최치원의 신라인다운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보여진다.[9] 다만 고구려는 당나라측 괴뢰기구까지 더하면 안동도호부 또한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 요동으로 진출한 발해에 흡수되다 폐지되었거나 적어도 유목민족과 발해에게 양 사이드로 두들겨 맞으며 약화되다가 폐지된 걸로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758년에 안사의 난이 일어난 직후 폐지되었다.[10] 사실 삼국통일 이전, 백제 후기에 마한 통합을 완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 핵심지들을 최초로 통합시켰던 국가이자 가장 먼저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고 약 700년을 존속했으니 그 향수가 적을 수가 없었다.[11] 고려시대에도 지금의 부여군은 "부여"로 불렸고, 그 어원은 성왕 때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데에서 기원한다. 동시에 백제 왕조의 국성인 부여씨 역시 고구려의 전신이었던 부여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중의성을 가지고 그리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12] 다만 남경의 경우 백제의 계승이라는 명분보다는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13] 강북 지역도 근초고왕 대에 일시적으로 '한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도로 삼기도 했다. 현대에는 대표적인 하남위례성뿐만 아니라 하북위례성, 한산성까지 싸잡아 대충 한성이라 불리고 있다.[14] 참고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백제의 초기 도읍으로 한성부와 광주와 직산을 비정했는데 정작 하단에 있는 세종 때 대화에서 왜 백제의 고도를 전주라고 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후백제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긴 한데 고려시대 이래 후백제는 백제와 다르게 인식했기에 무슨 연유로 아래와 같은 대화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단순히 후백제와 헷갈린 예조판서 신상의 무지였을 가능성이 큰데 현대에도 종종 있지만 전근대에는 정보의 미비로 잘못된 지식을 갖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당장 평양이 조선 영내에 있었음에도 고구려의 수도가 어디였는지 모르겠다고 발언하고 있다(...).[15] 온왕묘(溫王廟)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16] 삼국시대 초기에는 묘호나 시호는 물론, 피휘의 관습도 없었기 때문에 휘호가 그대로 왕호로 쓰였는데 그러한 관습이 생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따라 적는 게 옳은지 논하다가 결국 백제시조왕이라 적기로 정한 내용이다.[17] 사태사(四太師) :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을 이름. 《고려사》(高麗史)[18] 이들은 백제계 도래인이라는 가설도 존재하지만 백제계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적어도 다른 한국계 도래인이었거나 도래계와 매우 친밀했던 걸로는 본다.[19] 거기에 일본과의 교류는 당장 가야도 삼국시대에 엄청나게 많이 했고, 남북국시대에는 신라도 굉장히 많이 했다.[20] 사실 이건 고대사에서 공통된 부분이라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고고학의 비중도 매우 크기 때문에 백제사만의 엄청난 문제는 아니긴 하다. 한국사에서 기록이 대폭 늘어나는 건 고려시대부터이다. 특히 고고학 부문에 있어서는 발굴지가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는 고구려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21] 아마 교통망의 문제 때문으로 추정된다. 백제 이후로는 딱히 부여가 물류의 중심지가 될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22] 한반도 서부는 소백산맥 같은 분명한 지리적 경계가 없어서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쭉 연속체적인 특성을 띤다.[23] 호남권의 경우는 여기서 더 나아가 향토사로서 건마국이나 침미다례 같은 마한 문화를 중시하기도 한다. 특히 부수도 금마저가 위치해 백제 유적이 익산시에도 많이 남은 전북특별자치도보다는 백제의 중심지도 없었고 침미다례가 자리한 전라남도에서 더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편. 다만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괴리가 큰데, 침미다례는 고작 1년도 못 되어서 근초고왕에게 굴복한 이래로는 더 이상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했고 영역만으로도 전남 전체가 아닌 서남부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실상이 그러한데 전남이 침미다례를 마한 그 자체로 여기며 침미다례에 역사적 근원을 소급하는 건 상당히 역사적으로 무리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충청권의 목지국이 마한연맹의 가장 대표적인 맹주로서 백제와 더욱 가열차게 30년 넘게 투쟁했던 바가 있다. 또한 호남 동부는 가야권에도 포섭되며, 가야권의 맹주였던 반파국(대가야)까지 끌어들어 십수 년 동안 백제와 전면전을 벌인 바 있다. 따라서 전남권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현대에 들어 지역경제와 문화가 발달하고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새롭게 생긴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독일의 인식이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시대에 따라 꽤 변천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의식이 변해가는 것 자체는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상기한대로 지역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역사적 연원을 어디서 끌어다 쓰려 해도 정작 가장 강성했던 침미다례조차도 마한 전체는커녕 전남 자체도 석권한 적이 없으니 대표성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마한을 끌어다 쓰기에는 역시 마한은 경기와 충청권까지 포섭하는 광범위한 연맹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도권~충청권은 백제의 이미지가 이미 강하다 보니(백제 역시 엄연히 마한에 포섭되었음과는 별개로) 남들이 가져가고 남은 잔반을 챙기는 격으로 마한의 이미지를 모두 스틸(...)해버리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24] 과거의 인식도 다르지 않아서 후백제 견훤도 이전 백제와 야마토와의 친선관계를 근거로 들며 일본과의 우호증진을 꾀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견훤은 과거 백제가 그러했듯이 다방면으로 해외 외교를 많이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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