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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0:37:58

손민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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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롯데 자이언츠
2.1. 1997 시즌2.2. 1998 시즌2.3. 1999 시즌2.4. 2000 시즌2.5. 2001 시즌2.6. 2002 시즌2.7. 2003 시즌2.8. 2004 시즌2.9. 2005 시즌2.10. 2006 시즌2.11. 2007 시즌2.12. 2008 시즌2.13. 2009 시즌2.14. 2010 시즌2.15. 2011 시즌
3. NC 다이노스
3.1. 2013 시즌3.2. 2014 시즌3.3. 2015 시즌3.4. 은퇴
4. 국가대표 경력

1. 개요

롯데 자이언츠, NC 다이노스 소속 우완 투수 손민한의 선수 경력을 모아 놓은 문서.

2.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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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시절.

최동원 - 윤학길 - 염종석 - 주형광을 잇는 롯데의 에이스로, 2000년대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FA 먹튀 논란, 재활 태업, 선수협, 은퇴식 발언 등의 각종 논란으로 인해 롯데 팬들과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헤어지게 되었다.

2.1. 1997 시즌

부산고-고려대 졸업후 1997년 롯데에 지명되면서 프로에 입단한다. 소위 5억 트리오의 막내인 셈이다. 다른 일원은 문동환차명주. 손민한과 더불어서 10여년간 배터리를 이뤘던 괴물포수 진갑용 둘 중 하나를 지명했어야 했지만 바로 그 전 해에 롯데에 지명됐었던 차명주가 다분히 먹튀성 기색[1]을 보였기 때문에 롯데에서는 투수진 보강차원에서 손민한을 지명하게 된다.

지명 직후 그간 오랜 부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져 당분간 재활 과정을 병행하면서 구원투수로만 등판할 것이라고 알려져 롯데 팬들은 시즌 시작하기도 전에 '이번에도 또 먹튀 신인이냐'라면서 좌절, 또 좌절. 1997년 광주구장에서 해태와의 개막전 때 8회말부터 구원등판해서 좋은 투구내용을 보였으나 연장전 11회말에서 끝내기 폭투를 범해 데뷔전에서 패전투수가 된다.[2] 이후로도 몇 차례 등판했으나 점점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시즌아웃되고 수술대에 오른다. 데뷔시즌 성적은 1승 3패 1세이브 4.80의 평균자책점.

2.2. 1998 시즌

전년도 수술 덕택에 장장 2년을 개점휴업했다.

2.3. 1999 시즌

후반기부터 다시 1군무대에 복귀했다. 그해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포함되었으며 1999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펠릭스 호세의 역전 끝내기 3점 홈런 덕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구원등판했다가 불을 지르며 패전투수가 되기도 했다.

2.4. 2000 시즌

애초에 파워 피처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프로에서 보여준 그의 투구 내용은 아마 때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타고난 포텐셜이 있었기 때문에 김명성 감독 하에서 2000년에 12승과 3.20의 평균자책점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시드니올림픽 멤버로 병역혜택까지 받았다.

2.5. 2001 시즌

15승으로 신윤호와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KBO 역사상 유일무이한 꼴찌팀 다승왕이기도 하다.[3] 다만 이 시즌의 평균자책점은 4.21로 다소 높았는데 2001 시즌이 역사상 손꼽히는 타고투저 시즌이라는 점도 감안해야한다.

2.6. 2002 시즌

과거에 승수가 우대받던 시절에는 '2001년 다승왕 손민한은 백골퍼를 만난 이후 2년간 단 7승에 그쳤다'고 2003년과 같이 더불어 까이지만, 진짜 객관적으로 봐도 부진한 2003년과 달리 2002년은 제 몫은 했지만 지독하게도 승운이 없는 시즌이었다. 오히려 ERA는 다승왕 시즌인 2001년보다도 낮았다. 2001년에는 4점대였지만 2002년에는 141이닝에 3점대 중반을 기록했다. 그러나 손민한의 승수는 2001년 15승에서 2002년 단 4승으로 수직하락했다. 이유는 팀 전력이 완전히 막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2.7. 2003 시즌

급기야 2003년에는 의욕 저하까지 겹치며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서인지 백인천 감독이 손민한을 포수전향을 시도했다는 낭설이 돌기도 했고[4] 타팀과의 트레이드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5]

8888577 중에서도 최악의 시즌이 2002년, 2003년이기 때문에 2003년 당시 손민한은 '경기에 나오면 득점지원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패배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회고했으며 이로 인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투구 내용도 망가졌다고 회고했다.

2.8. 2004 시즌

신임 양상문 감독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마무리투수로 전업하여 시즌을 시작한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마무리가 안 맞는 스타일이었던데다 4년 연속 꼴찌로 치닫고 있던 팀 사정상 등판 기회도 없어 전반기에 고작 8세이브를 올리는 데 그쳤다. 시즌 중 노장진을 트레이드해온 덕택에 후반기부터는 선발투수로 다시 전업하는데 4년 연속 꼴찌를 기록한 물타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반기 2달 동안에만 8승 1패에 1점대 평균자책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올리며 클래스를 뽐냈다. WHIP이 MVP시즌보다도 더 좋았을 정도.

2.9. 200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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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2005)

2005년은 두말이 필요없는 손민한의 커리어 하이. 시즌 초반 상위권을 달리던 팀과 더불어 손민한도 지난 시즌 후반기의 좋았던 폼을 그대로 이어가며 그 해 전반기에만 무려 14승을 쓸어담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였다. 20승 달성이 유력해 보였던 그였으나 시즌 중반까지 치열하게 4강 싸움을 하던 팀 사정과 맞물려 중간계투 혹은 마무리까지 마구잡이로 투입되다보니 결국 후반기에 페이스가 뚝 떨어져 4승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시즌 최종 성적은 18승 7패 1세이브 2.46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승 1위와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다. 비록 2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4년 연속 꼴찌팀을 5등까지 끌어올린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그해 프로야구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에서 MVP가 배출된 것은 손민한이 역대 최초.[6] 손민한은 MVP 수상 소감으로 할 수만 있다면 이 MVP 트로피와 우승반지를 바꾸고 싶다는 말을 남기며 우승에 대한 열망을 보이기도 했다.

2.10. 2006 시즌

그 이후 3년 간 매년 두 자리 승수와 2점대의 평균자책점의 성적을 올리며 확고부동한 롯데의 에이스임은 물론, 전국구 에이스로 이름을 날리며 배영수, 박명환과 더불어 우완 3인방 트로이카를 형성하기도 했다. 팀은 늘 하위권을 전전했지만 손민한이 선발등판하는 경기만은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해서 민한신이라는 별명도 그즈음 생겨났을 정도.

2.11. 2007 시즌

30경기에 등판해 13승 10패 ERA 3.34 194이닝 95K를 기록했다.

2.12. 2008 시즌

5월까지 패가 없을 정도로 시즌 전반기에는 최고의 전성기때인 05 시즌만큼이나 정말로 눈부신 피칭을 했다. FA로이드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7월 이후로는 패스트볼 구위가 하락하고 페이스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결국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5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당했다.

12승 4패, 평균자책점 2.97, WHIP 1.25로 롯데의 에이스다운 피칭을 했다. 허나 FA로이드에 후반기엔 결국 체력이 다해 순위싸움 제일 치열하던 후반기에는 많이 부진했다. 사실 후반기에 강팀 상대로 팀의 에이스를 등판시키는 바보감독은 없다. 에이스는 약팀과 상대하게 하여 확실히 팀의 승수를 챙겨야하기 때문.

비록 시즌 마무리는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완 선발투수 중에서는 최고였기에 FA 최대어로 꼽혔고, 소속팀과의 우선협상 마지막 날 밤 극적으로 롯데와 계약금 8억, 연봉 7억에 1년짜리 FA 계약을 맺었다.[7][8]

여담으로 전준호에게 KBO 통산 2000안타를 허용했다. 기사

2.13. 2009 시즌

그러나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주장으로 선출되고도 단 한경기도 출장하지 못하며 우려를 낳더니, 결국 개막 엔트리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사유는 어깨 통증.

WBC 때도 출전하지 못했지만, 시즌 개막후에도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아 6월초까지 등판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FA로이드 후유증.

6월 7일 두산전에서 복귀하여 6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어깨부상 전만큼 구속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경기운영이 돋보였다. 실제로 1회말 1~2번타자에겐 아리랑볼을 던져대며 우려를 낳았으나 3번 김현수를 상대하면서부터 140Km대의 코너워크가 되는 패스트볼을 팡팡 꽂아넣는 등... 본인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아프지 않아 안심이다'고 인터뷰를 했지만 결국 얼마 못가 다시 통증을 겪게 된다.

6월 26일 대전 한화전에 등판해서 5이닝 3실점 2삼진 4피안타 5볼넷으로 마운드를 내려온 손민한은 그날 타선의 도움으로 마침내 롯데에서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9][10] 역대 20번째.

6월 복귀 이후 8월말까지 석달간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며 등판했다. 6~7월에도 구속은 느렸지만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버텼으나, 8월 들어서 어깨가 나갔고 그 탓에 계속 조기강판당하면서 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8월 4일 마산 두산전 이후 내리 3경기서 채 5이닝을 버티지 못하고 대량 실점을 하며 3연패를 당했다. 21일 부산 LG전에선 6이닝까지 버텼으나 4실점(3자책)하여 다소 살아나는가 했는데, 8월 29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며 시즌아웃 선언을 받았다. 결국 8월 27일 삼성전이 손민한이 롯데서 등판한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8월 31일 서울에서 MRI를 찍어서 LA의 저명한 프랭크 조브 박사에게 보내 진단을 받았고, 결국 10월 2일 미국 LA에서 조브 박사에게 오른쪽 어깨 근육 부위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결국 부상 때문에 6승 5패, 평균자책점 5.19, WHIP 1.66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6승은 모두 6~7월에 거둔 것이다. WHIP에 비해 평균자책점이 매우 낮다. 물론 "상대적"으로 말이다. 위기관리 능력과 로케이션은 여전히 받쳐주지만, 구위 자체가 떨어진 것을 반증하는 결과.

결국 2009년을 어깨부상으로 그르쳤다. 6월부터 1군 엔트리에 복귀했지만 부상을 안아 직구 평균구속이 140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뚝 떨어진 구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제구력으로 위태위태하게 버티며 6승을 거뒀다. 결국 더 이상 공을 던지지 못할 정도로 어깨부상이 악화되며 시즌아웃. 이것이 롯데에서는 마지막이었다.

2.14. 2010 시즌

관절경 수술은 기존에 언론에 알려진 거보다 큰 수술로서 수술을 한 조브 클리닉 쪽에서는 2010년 11월은 되어야 제대로 던질 수 있으리라고 봤다고 한다.

7월 현재 재활중이며, 8월 1일 LG 트윈스전에서 복귀할 계획의 일환으로, 7월 14일 2군 넥센전에서 첫 실전 피칭을 하였다. 이 경기는 2이닝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특히 8월 1일이라는 날짜는 제리 로이스터가 손민한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정한 날짜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통증이 재발하여 사실상 2010 시즌은 끝났다. 애초에 수술한 쪽에서도 잘해야 2010년 10월~11월에 나올 수 있다고 봤었는데 10년 후반기에 복귀시점을 맞춘 거 자체가 무리한 도박... 물론 본인의 선수 생활 자체가 얼마 안남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이해는 가지만.

설사 재기한다 해도 본래 튼튼하지 못한 몸에 어깨가 한번 박살난 상태에서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재활이 필요하며 본인의 강한 의지와 운까지 따라줘야 하는 상황인데 쉽지 않을듯해 보인다. 사실 지금까지 모습만 보면 전형적인 FA로이드의 부작용으로 40억이라는 FA 몸값을 고려하면 먹튀소리 들어도 크게 할 말 없다.

다른 선수 같았으면 죽도록 까일 상황이지만 암흑기 동안 팀의 1선발로 활약한 노고와 쌓아둔 이미지가 워낙 좋아서 아직까지 팬들의 지지도는 높은 편이다. 참고로 롯데의 FA중 홍성흔 다음으로 성공적이었던 이상목(손민한의 마무리 전환 가능, 포크볼 전파, 팀내 다승 순위권 안에 듬)은 04시즌과 07시즌을 말아먹은 탓인지 아직까지 롯데 팬들에게 먹튀 소리를 듣고 있다.

미래를 위해 손민한의 짐을 내려주고 진작에 차세대 에이스 자원을 육성해야 했던 롯데 코칭스태프는 당장 급하다는 이유로 조정훈의 어깨와 팔꿈치를 모두 망가뜨렸고 장원준송승준의 실시간 롤러코스터를 끝내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롯데 에이스의 자리는 비었고 전형적인 3선발 이후 투수들, 맞아가면서도 꾸역꾸역 이닝 먹고 어느정도 막아내긴 하지만 한 경기를 믿고 맡길 순 없는 투수들로 이루어진 선발진을 보유하게 되었다.

2.15. 2011 시즌

일단 양승호 감독 부임 후 전력외 판정을 받은 걸로 봐서는 구단에선 사실상 재기 불가로 판단한 듯하다. 본인은 아직 이렇다할 말이 없는데 이대로 재활한다며 돈 먹으면서 버티면 구단 입장에선 무척이나 열 받는 상황이다. 일단 11시즌 대비 전지 훈련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래도 현재 순조롭게 재활 중이며 재활이 제대로 끝난다면 6월쯤에는 합류가 가능할 것이라고.

그러다가 전 롯데팬들을 꼴레발 떨게 만드는 기사가 나왔다. '230일만의 실전 피칭' 손민한, 감 좋다! 비록 대학팀과의 경기이긴 하나 직구 구속이 141km까지 나왔고 무엇보다 통증이 없다고 한다!!! 또 SK와의 연습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142km까지 나왔다. 강민호는 이를 보고 손민한 선배에게서 후광이 보인다고 말할 정도.

3월 16일 사직구장에서 두산과의 시범경기에 출전, 2이닝을 퍼펙트(두 개의 플라이볼과 네 개의 땅볼처리)로 막았다. "140km대 안팎의 구속과 뛰어난 제구를 뽐냈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최고 구속이 144km까 긴 것이다. 단, 제구력은 여전히 언터처블. 시범경기 동안 계속 주의깊게 관심을 가져야 할 듯.

3월 26일 대구 삼성전에 등판했으나 공을 10개도 채 던지지 못하고 강판되었는데, 3월 30일 서울 건국대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은 결과 관절낭과 주변 어깨 근육 손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최소 3개월 동안은 마운드에서 볼 수 없을 전망. 그에 대해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국내야구 갤러리 등지의 롯데 팬들은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박명환만도 못한 희대의 먹튀운운하며 까고 있다.

애초에 양승호 감독이 6월달에나 선발로 뛸 것이라고 했으니 크게 예상을 빗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부상 이후 올라오는 재활 선수들마다 이런 걸 보면 롯데 구단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9월 중순이 넘어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11 시즌에도 못 보게 되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6월말 1군 복귀 준비 직전 재발한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결국 구단과 합의하에 FA 자유계약 선수로 풀려났다. 구단에서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본인은 선수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신청하게 됐다고.

이런 가운데 전력보강이 절실한 NC 다이노스가 영입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NC측에선 조심스런 상황이다. 손민한의 기량이 가장 문제라는 전제를 달고 있기 때문에 손민한의 몸상태가 변수가 될 전망으로 12월 16일자 기사에 의하면 일단 코치진이 보는 앞에서는 무사히 통과하고 메디컬 테스트만 통과하면 재계약을 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전력투구는 아직 무리고 하프피칭 수준까지는 올라왔다고...70~80%정도 수준이라고 한다. 12월 22일 메디컬 테스트를 실시하였고 무사히 통과하였고 1월 11일까지 계약을 성사시킬 것으로 보인다. 손민한, 메디컬테스트 통과… NC 입단 유력 그러나 이후 프로야구 선수 협회 비리 관련으로 좋지 않은 기사들이 나오면서 NC에서도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2012년 말 다시 NC에 입단테스트를 타진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가 떴다.손민한의 복귀를 보는 두 가지 시선.

3. NC 다이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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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NC 다이노스와 계약금 없이 연봉 5천만원에 신고선수로 계약했다. # [11]

입단 당시만 하더라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느냐는 물음표가 있었으나 이호준과 함께 신생팀 NC 다이노스의 기반을 다지는 데 공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나름 성공적인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3.1. 2013 시즌

4월 26일 경찰 야구단과의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첫 실전 등판을 가졌다.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최고 구속 143km/h를 찍으며 부활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5월 23일 두산 베어스와의 퓨처스 리그 경기에서 선발 등판하여 7이닝 10피안타 3실점(2자책) 4탈삼진 무사사구로 호투하였다. 피안타가 좀 많았지만 공백기간이 상당히 있었음에도 7이닝(투구수 100개)이라는 긴 이닝을 던졌다는 점과 사사구가 단 한 개도 없었다는 점에서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1군에서는 선발로 기용한다고 한다. 원래는 김경문 감독이 불펜투수로 기용할 생각이었으나, 연투가 불가능한 몸 상태 등 이유로 서로 면담 후에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오랜 경험을 쌓은 투수인 만큼 투수진에 무게감을 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NC의 선발진이 상당히 안정감이 있는 만큼 이 결정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는 알 수 없는 상태. 정확히는 손민한이 선발에 합류하는 대신 토종 선발인 이재학, 이태양 중 한명이 마무리로 이동할 가능성을 김경문 감독이 언급했기 때문. 물론 이 모든건 손민한이 1군 첫 선발등판에서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털리면 선발이고 뭐고 바로 롱릴리프행으로 갈수도 있는 것.

원래 입단할 때는 54번을 달았으나, 정식선수로 등록되면서 61번을 달고 있던 윤형배와 번호를 맞바꿨다.

6월 5일 SK 와이번스와의 시즌 첫 1군 선발등판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6월 15일 삼성 라이온즈전에 선발 등판해 최고구속이 146km/h까지 찍히며 5⅓이닝 무실점으로 또다시 승리를 챙겼다.

6월 21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최고구속이 146km/h까지 찍히며(꾸준하다.) 7이닝 투구수 83개 1실점으로 시즌 3승을 챙기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7월들어 체력적인 문제로 선발로서 등판이 힘들어지자 후반기 이후부터는 불펜으로 등판하고 있다.

7월 30일 SK전에서 에릭 해커의 뒤를 이어 7회에 등판, ⅔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이후 콜드게임이 선언되면서 4:2 승리. 2628일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8월 13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는 1⅔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시즌 두 번째 세이브 달성. 9회 초 프로 데뷔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섰다.[12]

현재 NC에서의 손민한의 평가는 돌아온 민한신. 특히 불펜으로 등판한 뒤부터 NC의 불펜이 전반기의 불쑈에서 벗어나 상당히 탄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후반기의 고춧가루 부대 역할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호준과 함께 팀내 최고참 선수로서의 경험으로 주는 조언 역시 무시 못할 수준. 롯데 팬들은 롯데 있던시절에 마무리 돌렸을 때는 태업하더니 NC 가선 마당쇠 노릇한다고 복장터져 하는 중이다.

9월 7일 SK전에서도 이현곤의 실책에 힘입어 주자를 2루에 출루시키고 번트 후 1사 3루 상황에서 최정박정권을 둘다 걸러버리고 만루 작전을 하려 했지만 포수의 사인을 연거푸 3번이나 거절하다가 본인이 던지고 싶은 대로 던졌고 결국 김강민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9월 25일 넥센전에서 9회 말 1:0으로 리드하는 상황에 등판하여 선두타자 강정호를 출루시켰지만, 장기영의 번트 타구를 재치있게 막아내며 병살 처리. 이어서 서동욱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주긴 했지만 오윤을 중견수 플라이로 돌려세우면서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시즌 7세이브를 해냈다.

2013년 기준에 대한 평가는 아주 엑셀런트였다. 사실 나이도 많고 전성기때에 비해 노쇠화된 선수라며 NC팬들은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하며 후배 투수들이 대부분 롤모델로 꼽을 정도였다.[13]

3.2.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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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KIA전에서 8회 말 0:0으로 양팀 투수들이 호투한 상황에 등판, 선두타자 김선빈을 뜬공으로 잡았지만 이후 2루수 송구 실책으로 이대형이 출루하고 김주찬에게 안타를 맞으며 1사 1,3루가 되었다. 그리고 이범호가 투수 앞으로 떨어지는 내야 땅볼을 쳤는데 손민한이 공을 놓쳤다가 다시 주워서 홈으로 송구하는 바람에 1실점하였다. 이후 볼넷으로 만루까지 갔으나 삼진과 뜬공으로 마무리. 하지만 타선 득점이 없어서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다.

4월 12일 LG전에서 8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 타자 정성훈삼진아웃으로 처리하여 노련함을 보여줬다. 팀의 실점위기를 넘기고 투수 이재학의 승리까지 지켜냈던 계기가 되었다.

5월 13일 KIA전 9회초에 등판하여 승리투수가 되면서 역대 5번째로 110승을 달성했다.

2014 시즌 최종평은 이호준과 같이 투수조 쪽에서 맏형의 소임을 다하여 NC의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큰 힘이 되었다.

3.3. 2015 시즌

이제 만으로도 불혹이 되었음에도 다시 선발투수로 낙점되었다. 3월 29일 잠실에서 열리는 두산과의 개막 시리즈 2차전에 선발로 등판한다, 그런데 상대선발은 하필 장원준, 경기 자체는 6회까지 1실점으로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7회에 양의지에게 투런홈런을 맞으며 7회를 넘기지 못하고 6 ⅔이닝 3실점으로 분루를 삼켜야 했다. 팀 역시 장원준에게 안타는 많이 때려냈지만 1득점에 그쳤고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다.

4월 5일,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1년 9개월 14일 만에 선발승을 거뒀다! 일수로는 653일 만의 선발승. 이는 KBO리그 역대 최고령 선발승 3위 기록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6이닝 동안 무사사구 1실점(비자책) 퀄리티 스타트였다는 점. 구속은 전성기보다 떨어졌지만 다양한 변화구로 노련하게 한화 타자들을 요리했다.

5월 22일 현재 손민한의 성적은 5승 3패 평균자책점 4.06. 다승은 공동 4위, 평균자책점은 13위에 올라 있다. 넥센전에서 손민한은 77개의 공만 던지고 6.2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승리투수가 됐다. NC 벤치는 손민한의 나이와 몸상태를 고려해 투구수를 조절해주고 있지만, 손민한은 제한된 투구수로도 최대한의 이닝을 소화하며 NC 마운드에 큰 힘을 불어넣고 있다. 인터뷰에서는 "감독님이 배려 차원에서 투구수, 이닝을 관리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더 던지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며 "팀 승리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 뿐"이라고 답했다.

5월 25일 SBS Sports '주간 야구'의 코너중 하나인 '구와 숫자들' 에서 투수의 삼진, 볼넷 비율에 관한 통계를 소개하면서 손민한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바로 현재 리그에서 가장 볼넷 비율이 낮은 투수라는 것, 174타자 상대해서 단 5개의 볼넷을 내줘 볼넷 비율이 2.9%를 기록하고 있다. 아직 시즌 초이지만 이는 규정이닝 투수중 가장 낮은 볼넷비율을 기록한 1991년 선동열의 3.8%보다 더 낮은 기록이다.

5월 28일 마산구장에서 두산을 상대로 손민한은 82구 6이닝 5피안타 1탈삼진 1볼넷 무실점으로 최상의 투구내용을 보여주었으며 남은 3이닝을 임정호-최금강-임창민이 이어 던지며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함과 동시에 자신은 시즌 6승(3패)째를 거뒀다. 이 경기에서 4회 무사1루 상황에서 김현수를 상대로 '개인통산 7000타자'를 채웠다. 결과는 1루 땅볼 아웃. 이날 경기 전까지 6988타자를 상대했던 손민한은 4회 만에 프로 17번째 금자탑을 쌓았다. 1997년 롯데에서 데뷔한 손민한은 2007년 797타자를 상대하는 등 7000타자를 채우는 데 15년이 걸렸다.

6월 18일 수원 kt wiz와의 경기에서 1,700이닝을 돌파했다.

6월 24일 마산 KIA와의 경기에서 5이닝 5피안타 2사사구(1볼넷) 2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8승 통산 120승을 거두었다. 이날 양팀 선발 투수 손민한(40세 5개월 22일)과 서재응(38세 1개월) 두 선수 나이의 합은 78세 6개월 22일로 KBO 역대 두 선수 나이 합계 최고령 선발 대결이었다.

7월 5일 대전 한화전에 선발 등판하였는데, 폭우가 오락가락하며 우천 서스펜드가 두 번이나 걸리는 최악의 그라운드 상황에서 1회에만 8안타를 뒤집어쓰며 5실점, 2이닝 5실점으로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비가 더 많이 내리면서 노 게임이 선언되어 한숨을 돌렸다.

8월 12일 넥센전에서 선발 이태양이 넥센 타선의 무게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기강판되고, 손민한은 3회 급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3회 2루타 4개를 맞으면서 흔들렸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마운드를 지배했다. 4이닝 4안타 2실점으로 구원 승을 따내며 시즌 9승째(5패)를 따냈다. 특히 4회부터 6회까지 3이닝을 연속 삼자범퇴로 틀어막았다.

그 이후 그간 부진하다가 9월 11일 넥센전에서 선발 등판해 5이닝 5피안타(1피홈런) 2실점 단 67구를 던져 시즌 10승을 거뒀다. 이 10승은 의미가 있는것이 그의 나이 만 40세 8개월 9일의 기록으로 'KBO 역대 최초의 40대 10승 투수이자 역대 최고령 10승 투수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것 이다.

9월 30일 두산전 손민한은 이날 5⅓이닝 3피안타 2볼넷 4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를 펼치면서 시즌 11승째를 챙겼다. 이날 총 79개의 공을 던진 손민한은 최고 143km/h의 직구(38개)를 중심으로 투심(19개), 포크(13개), 슬라이더(9개)를 적절히 섞었다. 4회 들어서 갑자기 볼질하기도 했지만, 결국 6회 1아웃까지 막아놓았다. 1실점도 주자가 1명 나간 상황에서 김경문이 지친 최금강올려서...

2015 시즌 최종 성적은 26경기 19선발 105이닝 11승 6패 122피안타 8피홈런 15볼넷 50K ERA 4.89.

10월 21일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5이닝까지 호투했으나 6회 손가락 살이 벗겨지는 부상을 입고 강판됐다. 5이닝 2실점. 팀이 두산을 16:2로 대파한 덕에 자신의 첫 포스트시즌 선발 승리를 챙겼다. 더불어 포스트시즌 최고령 선발투수와 통산 최고령(40세 9개월 19일) 선발 승리 투수[14]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1월 12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4. 은퇴

파일:손민한박명환이혜천은퇴식 (1).jpg
2016년 7월 6일 박명환, 이혜천과 함께 가진 은퇴식

손민한의 은퇴식 및 NC HONORS CLUB 가입식은[15] 공교롭게도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진행되었다. 이에 롯데 관련 커뮤니티들의 반응은 엇갈렸는데, 은퇴식을 함께 진행하는 이혜천이나 박명환이 과거 두산에서 맹활약을 했던 선수들이기 때문에 두산 베어스전에서 진행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롯데전에 은퇴식을 치르냐는 것.

이후 손민한이 이후 인터뷰에서 과거 팀보다는 NC에 마음이 가고 감사하다. 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롯데 팬들의 화를 돋구기도 했다.

4. 국가대표 경력

고3 때 이미 청소년대표에 발탁되었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대학 4년 내내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그리고 프로에 입단한 후에도 국가대표로써의 활약은 이어진다.

마에삼에 가려졌지만, 사실 손민한은 아마시절부터 국제대회에 강한 투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2번의 올림픽과 2번의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부진한 투구를 보였다.[16]

대신 국내 대학리그에서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대학 3학년 때인 1995년에는 문동환, 임선동, 조성민 등을 모두 제치고 아마야구 MVP에 선정되기도 한다.기사.

4.1. 1992 멕시코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고3 신분으로써 참가한 대회이다. 당시 대표팀동료였던 선수로는 노장진, 주형광, 장성국, 진갑용 등이 있다.

예선 온두라스전, 이탈리아전, 니카라과전에 등판했고, 팀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준결승 대만전에도 선발등판했지만, 경기초반에 2점홈런 허용 포함 3실점했고, 결국 팀도 2대3으로 패배하게 된다.

4.2. 1993 스페인 대륙간컵

예선 쿠바전에 구원등판하지만 부진한 투구를 선보인다.기사.[17]

예선 일본전에 선발등판해 7이닝 1실점의 호투를 펼치지만 패전투수가 된다.기사. 참고로 이 경기에서의 손민한의 호투는, 훗날인 2009년 마해영이 발간한 야구본색에서도 간략히 언급된다.[18]

4.3. 1994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예선 스웨덴전에 선발등판해 승리투수가 된다.기사.

4.4.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준결승 중국전에 구원등판해 노히트 노런 승리에 힘을 보탠다.기사.

4.5. 1995 후쿠오카 하계 유니버시아드

결승 쿠바전에 선발등판하지만 1실점 패전투수가 된다.기사. 참고로 손민한의 후속투수로 등판한 투수가 고려대 1년선배인 조성민이다.

이 대회 당시 임선동, 조성민과 함께 일본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스카웃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는데, 만약 1995년 가을 임선동다이에 호크스 입단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면, 손민한 또한 일본프로야구 진출을 노려봄직할 만도 했다. 그렇지만 임선동 사태 이후 일본프로야구계에서는 한국 아마야구 선수에 대한 스카웃 자제령이 내려지게 되고, 손민한의 일본진출 꿈은 자연스레 흐지부지된다.

4.6. 1995 구라시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하는 대회였다. 아시아에 배정된 올림픽티켓은 2장.

예선 대만전에 선발 임선동에 이어 구원등판했다.기사.

그렇지만 결선리그 대만전은 문동환-조성민-차명주-임선동 계투,기사. 결선리그 일본전은 문동환-임선동 계투로만 이어졌기에,기사. 실제로 손민한은 빅경기에 중용받지 못한다.[19] 한편, 한국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아시아 2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올림픽 본선티켓 자체는 획득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대회 일주일 후에 열린 정기 고연전에서 손민한은 1년선배 조성민에 이어 후속투수로 등판한다.영상 6분 40초부터.[20][21]

4.7. 1995 쿠바 대륙간컵

예선 멕시코전에 구원등판해서 팀승리에 힘을 보탠다.기사. 이후 결승 쿠바전에서 연장 10회에 구원등판하지만 패전투수가 된다.기사.

4.8.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사실 손민한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흑역사 시절이다. (투수진 기준) 92학번의 조성민, 차명주, 전병호가 프로에 진출했고, 또다른 92학번인 임선동이 당시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손민한은 문동환과 함께 대표팀 원투펀치를 맡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경기인 미국전, 일본전에 연달아 등판하지만, 미국전 7이닝 6실점(4자책) 패전,기사. 일본전 1.1이닝 4실점 패전기사.의 부진한 투구를 보였고, 팀도 1승 6패로 최하위를 기록한다.

4.9.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1999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이 대회에 손민한은 팀의 투수로서 선발되며 커리어 첫 A대표팀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손민한의 올림픽 첫 등판은 예선리그 1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였다. 당시 대한민국이 10:2로 크게 리드중인 9회 등판하여 1이닝을 삼자범퇴, 무실점으로 깔끔히 막아냈다.

이후 호주전 휴식을 취한 손민한은 예선리그 3차전 쿠바와의 경기에서 8회 구원등판했다. 당시 5:5로 대치중인 상황이었지만 만리케[22]에게 솔로홈런을 맞으며 역전을 허용했다. 이후 9회 1사까지 범타로 막아냈지만 경기가 5:6으로 끝나며 패전투수로 기록되었다.

쿠바전 패전이후 3경기 휴식을 취한 손민한은 대회 최약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예선리그 7차전에 다시 구원등판했다. 이 경기에서도 홈런을 허용하며 2이닝 2K 2실점으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선발투수 이승호가 5이닝을 채우지 못하며 어부지리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후 경기에서 손민한은 더 이상 등판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을 잡고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거머쥐게 되었고, 덩달아 손민한도 병역을 면제를 받게 되었다.

최종성적: 3경기 4⅓이닝 3실점, 1승 1패, ERA 6.23

4.10.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5 시즌 KBO리그에서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손민한은 유일한 메이저 국제대회인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당연히 선발되었다. 하지만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 김선우 등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들에 밀려 주로 비주류 경기에 등판할 것이 예상되었다.

그 예상대로 손민한은 1라운드 2차전, 대회 최약체로 평가받는 중국과의 경기에 선발등판했다. 이 경기에서 손민한은 한 수 아래 중국을 상대로 4이닝 3K 0실점 완벽투를 펼쳐 승리투수가 되었다. 4이닝 동안 단 2번의 출루(안타1-볼넷1)밖에 허용하지 않는 짠물투를 펼첬다.

이후 손민한은 2라운드 2차전, 대회 최강이자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중무장한 미국과의 경기에 다시 선발등판했다. 이런 강팀과의 경기에 메이저리거들을 제치고 선발등판한 이유는 당시 김인식호가 미국전을 포기하고 일본, 멕시코와의 경기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가 무색하게 손민한은 미국 타선을 상대로 3이닝 2K 1실점의 호투를 펼치며 승리투수까지 차지하였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3회초 2아웃 상황에서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23] 체인지업[24] 을 똑같은 곳에다 똑같이 집어넣어서 삼구삼진을 잡았다. 박명환야구TV에서 박명환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당시, 감기몸살에 걸려서 경기 직전까지 자고 있다가 동료들이 겨우 찾았고, 경기 10분 전에 캐치볼만 하고 등판했다고 한다. 또 윤지웅이 푼 썰에 의하면 홍성무가 손민한에게 직접 이 때의 비결을 묻자 대답이 "모린다~ 뜬지다 보이까 삼진이드라~ 존X 쫄았다~"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농담이겠지만 그만큼 손민한 본인도 예상을 하지 못했고 얼떨떨한 일이었던 듯 하다.[25]

이후 손민한은 일본과의 4강전에 등판했다. 이번에는 선발이 아니라 구원등판이었다. 하지만 이미 물이 오를대로 오른 일본의 강타선은 손민한이 아웃카운트 한개를 잡을동안 무려 3안타를 때려내며 그를 강판시켰다. 결국 손민한은 최종전에서 ⅓이닝 3피안타 1실점의 부진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최종성적: 3경기 7⅓이닝 2실점, 2승 0패, ERA 2.45

4.11.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손민한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위 후광을 등에 업고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역시 선발되었다. 본래 아시안게임은 박찬호, 서재응 등의 메이저리거들 없이 KBO리그 선수들로만 출전한다. 따라서 손민한은 당시 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류현진과 함께 대표팀 원투펀치를 이룰 것으로 기대받았다.

이러한 기대를 바탕으로 손민한은 가장 중요한 경기라 할 수 있는 대만과의 경기에 선발등판했다. 일본은 아시안게임에 드림팀이 아닌 실업야구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꾸리기 때문에 사실상 대만전 선발투수가 팀의 에이스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

손민한은 4회 1사까지 대만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기량을 뽐냈다. 하지만 이후 선제 솔로포를 맞은 것을 시작으로 2루타-단타를 허용하며 2실점을 허용했다. 5회에 다시 마운드에 오른 손민한은 또 다시 선두타자에게 솔로포를 맞았고, 더 이상 여유가 없던 김재박 감독은 그를 강판시켰다.

결국 경기종료까지 역전에 실패한 대한민국은 2:4로 패하게 됐고, 손민한 역시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후 일본과의 경기까지 패한 대표팀은 대회 3연패에 실패한 채 동메달에 만족해야만 했다.

최종성적: 1경기 4이닝 3실점, 0승 1패, ERA 6.75

4.12. 2008 베이징 올림픽 플레이오프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에 실패한 대한민국은 대륙별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림픽 티켓을 노려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 플레이오프에는 남아공, 호주. 멕시코. 스페인, 독일, 캐나다, 대만이 출전에 상위 3개팀만이 올림픽에 진출할 수 있었다.

손민한은 대회 첫경기 남아공전에 선발등판했다. 남아공은 프로야구도 재대로 갖추지 못한 몇 수 아래의 팀이었기에 대표팀의 낙승이 예상됐다. 손민한은 세간의 예상대로 6이닝 무실점 완벽투를 펼치며 팀의 5:0 완승에 앞장섰다.

이후 4일을 쉰 손민한은 독일과의 경기에 다시 선발등판했다. 독일은 이전의 남아공보다도 객관적 전력이 뒤진 대회 최약체로 평가받는 팀이었다. 비록 2회 솔로포를 허용했지만 이후 6이닝 동안 실점을 내주지 않으며 팀의 12:1 콜드게임 승리에 기여했다.

4.13.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분명히 뽑히긴 했는데(심지어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단 한 번도 등판을 안 했다. 이것에 대해 온갖 소문들이 난무하기도 했다. 결국 결승전에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손민한이 펫코파크에서 팝콘을 팔아 대박치고 다저스타디움까지 가서 팔았다나, 뭐라나...

그래서 현재 손민한이 WBC 준우승 멤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 손민한은 WBC시작 당시 감기 몸살(운동선수는 감기 하루만 걸려도 컨디션을 되찾는데 1주일 이상 걸린다.)에다가 오버페이스. 나오면 소위 말해 털렸을 컨디션.

근데 일단 국대에는 뽑힌지라 결승전 때 무슨 파이널 보스급으로 일본에 알려진 2ch 번역 스레드의 짤방이 돌기도 했다. 물론 한국인이 만들어놓은 자작극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どうやら韓?の?さは本物らしいな?
한국 투수들 웰케 잘해?
どうですか解?の名無しさん:2009/03/22(日) 13:12:31.88 ID:iWfRJCtT
ったわけじゃないのか
大??初から言われていた
근데 무서운 건 아직까지 한번도 출전하지 않는 한국 투수가 있대
이 자식이 최종 보스인가봐
どうですか解?の名無しさん:2009/03/22(日) 13:13:39.78 ID:A+DpSZkQ
?やってんのかと疑うくらい勢いがやばい
그 자식은 적어도 마쓰자카급이겠군

하지만 손민한의 등판여부와 상관없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준우승을 거두며 역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최고성적을 기록했다.


[1] 차명주는 중지가 벗겨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2] 이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시 개막전이 열린 광주구장이 조명탑 보수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가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개막전이 오후 2시부터 열렸기 때문에 별 일이야 있겠나 싶어 경기를 개시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경기가 연장에 접어들었고... 연장에서도 한 점씩 주고받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자 해태 프런트 직원들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고 한다. 심지어 광주시내에서 파는 모든 손전등을 구해와 관중들에게 나눠줄 생각까지 했다고. 이런 대위기에서 손민한이 11회말 끝내기 폭투로 경기를 종료시키자 해태 프런트 직원들은 손민한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3] 신윤호는 김성근의 지도 하에 1군 70경기(2위) 144⅓이닝 15승 6패 18세이브(4위) 32세이브포인트, 평균자책점 3.12(2위) 등 대약진을 이뤄낸 해였다. 신윤호가 스톡킹에서 술회하기를 손민한이 15승으로 1위였고 신윤호가 14승으로 2위였을 무렵 손민한이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승리 요건을 갖추고 내려갔으나 중간계투 박석진이 승리를 날려먹었고 그 경기에서 신윤호가 중간계투로 등판하여 15승에 성공하며 공동 다승왕이 됐다고 했다.[4] 당시 손민한을 포수로 개조하려는 병크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럼 손민한을 포수로 바꿔야 하나?라는 말이 와전된 듯 하고 당시 수석코치였던 김용철은 포수 전환은 들은 바 없다고 밝혔다.[5] 당시 이상구 단장은 트레이드 협상을 차일피일 뒤로 미뤘다고. 이후 백인천 감독이 경질되면서 이 모든 트레이드는 중단되었다.[6] 이후로도 2012년 박병호밖에 없을 정도로 하위권 팀 선수의 MVP 수상은 힘들다.[7] 당시 FA는 서류상으로는 무조건 1년 계약만 인정이 되었다. FA 재취득 기간이 4년 후이므로 실제로는 4년 계약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이에 따르면 연봉 7억을 4년간 그대로 지급한다고 가정할 때 손민한의 실제 FA 계약은 4년 36억이 된다.[8] 참고로 LG 트윈스가 롯데보다 더 많은 돈을 책정하고 우선협상 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손민한이 우선협상 마지막날 롯데와 계약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9] 롯데에서 통산 100승을 기록한 투수는 윤학길과 손민한, 송승준 3명이다.[10] 최동원도 통산 103승이지만 롯데에서 96승, 삼성에서 7승을 거뒀다. 포스트시즌은 개인성적에 포함되지 않지만, 어거지로 끼워맞춘다면 최동원도 롯데에서 100승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해서 롯데를 우승시켰으니까 말이다.[11] NC에 입단하기로 한 후에 그의 친구이자 前 롯데 선수인 고성범(임수혁 돕기 행사를 진행하는 고깃집인 고성범 연탄구이의 주인맞다. 1993년에 입단했으나 프로에서는 별 활약없이 일찍 은퇴했다.)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신생팀이라서 힘들지 않겠느냐며 만류하는 고성범의 말에 "이번이 선수생활 마지막이다. 한번 열심히 해볼란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것을 본 고성범은 손민한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12] 지명타자 이호준이 교체돼서 대주자 이상호가 올라왔으나 2루수로 보직 변경, 지명타자가 소멸되었다. 김혁민을 상대로 볼 1개를 골라냈지만 4구 삼진으로 물러났다.[13] 타자 측에서는 이호준을 롤모델로 많이 택했다.[14] 이전 기록은 송진우가 가지고 있었다.[15] NC에서 새로 만든 NC 출신 선수들의 OB회이며, 어린 선수들의 멘토격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한다.[16] 단,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는 중요경기에 아예 등판자체를 못 했다.[17] 단, 당시 쿠바는 알루미늄배트를 사용하는 아마야구 세계최강의 팀이었기에, 쿠바전 부진 자체는 큰 흠결이 될 수 없다. 당시 쿠바 상대로는 임선동조성민도 대표팀 시절 내내 고전했다[18] 1993년 대륙간컵 당시 마해영도 국가대표였다.[19] 이는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김충남 감독이 연세대 야구감독이었던 영향도 있다.[20] 고려대는 5대9로 연세대에 패배.[21] 이 경기는 손민한에게도 마지막 고연전으로 남게 된다. 손민한이 대학 4학년이 되던 1996년 고연전은, 당시 연세대 한총련사태 여파로 취소되었기에.[22] 포수.[23] 13분 57초부터[24] 포크볼이며 손민한 본인은 체인지업이라고 부른다[25] 한 야구교실 수강생이 같은 질문을 했을때는 자기도 잡을 줄 몰랐다. 변화구 위주로 최대한 안 맞으려고 뺐는데 에이로드가 공격적이게 나왔다. 인생의 영광이다.라고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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