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만의 현역 시절 모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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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이자 친정팀이었던 한화 시절 | 현대로 이적한 후의 모습 | 히어로즈에서의 말년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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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화 이글스
우측은 이승엽. |
서흥초등학교, 동산중학교, 동산고등학교, 인하대학교를 졸업한 인천 토박이였지만[1] 정작 고향팀 현대 유니콘스로부터 외면을 받았고[2] 결국 1996년 한화 이글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1억 2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송지만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한화 구단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금액을 줄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렇다 할 국가대표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계약금을 많이 준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1996년 당시 박찬호의 MLB 진출을 필두로 하여 해외 진출을 노리는 유망주들이 제법 있었고, 실업팀임에도 제2리그 운운하던 현대 피닉스 등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계약금이 올랐음을 감안해야 한다.
1996년에 입단한 뒤 당시 강병철 감독의 눈에 들어 같이 데뷔한 입단 동기 이영우, 홍원기, 임수민과 함께 1년차부터 맹활약하며 신인 4인방이라 불렸다. 실제로 개막전부터 1번타자로 나섰으며 이영우와 홍원기가 2, 3번타자였다. 드래프트 순위는 당시 국가대표 주전 내야수였던 홍원기가 더 높았으나 4명 중 가장 좋은 성적을 찍은 것은 송지만이었다. 1996년에는 이 신인 4명이 모두 기회를 받아 1군에서 풀타임으로 뛰었지만, 이후 홍원기, 이영우, 임수민은 비중이 다시 낮아졌지만[3][4] 송지만은 꾸준히 풀타임 주전으로 나왔다. 한 때 홈런 3위안에 들기도 했다.
이후 그럭저럭 인정받을 정도의 성적을 내다가 1999년에 처음으로 3할, 20-20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한화 이글스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인 2000년에 32개의 홈런을 치며 처음으로 30홈런을 넘겼고, 여기에 20도루를 기록해 2년 연속 20-20을 달성하며 한화 팬들로부터 장종훈의 후계자가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5] 올스타전 MVP 수상은 덤이고 커리어 첫 골든글러브도 수상할 정도로 이 시즌은 송지만은 리그 최고의 타자로 각성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해 막판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출전을 위해 연습경기에 나섰다가 오른발목 복합골절이라는 중상을 입고 그대로 시즌아웃이 되어버렸다.[6]
지금이야 워낙 국대 경기가 많아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지만, 당시에는 프로 선수가 올림픽 대표로 출장하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리그 최고의 타자가 올림픽에 제대로 나가 보지도 못하고 부상으로 중도 하차할 수 밖에 없다는 게 선수 본인이나 팬들에게나 참으로 속상한 일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 부상으로 인해 20도루를 기록할 정도로 좋았던 주루능력이 많아도 10개 정도밖에 기록하지 못할 정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부상을 입었던 박재홍의 대타로 나가게 되었다.
2002년에는 38홈런과 104타점을 기록하며 두 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해를 장식하여 한화의 중심이 여전히 자신임을 과시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내내 꾸준한 활약을 펼쳤으나 2003년 손목 부상으로 인한 부진으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2003년 당시 9홈런을 치면서 2011년 다시 9홈런으로 두 자리수 홈런 달성에 실패할 때까지 자신의 프로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두 자리수 홈런을 치지 못한다. 어쨌든 한화 이글스에서 송지만은 황금 독수리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1.1. 트레이드
2003년 시즌 종료 후, 투수 권준헌과 1:1 맞트레이드되며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다.물론 한화 팬들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는 야구 팬덤이 발달하지 못한 때라 대체적으로 별다른 반향 없이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어쨌든 너무 갑작스러운 트레이드 소식에 팬들 사이에서는 송지만과 한화 구단 사이가 안 좋아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실제로 송지만이 구단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2000 시즌이 끝나고 KBO에 연봉조정 신청까지 하는 등, 구단과의 감정의 골은 있었던 상황. 연봉조정 판결에서 구단이 승리하면서 더더욱 그랬다. 공교롭게도 이듬해인 2001년에 부상과 연봉조정 신청으로 인한 훈련 부족으로 성적이 다소 추락하면서 연봉도 동결되는 등, 성적에 비해 연봉은 저평가받는 선수로 여겨졌다. 이외에 이전 해에 당한 부상 때문에 송지만이 예전 기량이 찾기 힘들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박동희의 칼럼에서 유승안 감독과의 불화 때문에 직접 본인이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독과의 불화 이에 한화 구단은 불안한 불펜진도 보강할 겸 송지만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놓게 되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LG 트윈스에 가고 싶다고 하였고, 실제로 LG가 손지환과 투수 한 명을[7] 내주는 조건으로 트레이드 카드를 맞추었으나 중간에 삼성 라이온즈까지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 후 삼성에서 내놓은 카드가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노장진이었다.[8] 이 당시 삼성은 마침 이승엽의 일본 진출, 마해영, 브리또의 이적 등으로 인해 약해진 타선을 보강할 겸, FA를 앞둔 송지만에게 미리 다년 계약을 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화도 노장진을 데려와 약점이던 불펜을 보강하고, 트레이드가 성사되는가 싶었으나,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이 노장진을 다시 마무리로 쓰기로 해서[9] 막판에 틀어졌고, 삼성과 트레이드 딜이 파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현대 유니콘스가 권준헌 카드를 내밀며 접근, 결국 딜이 성사되었다.
어쨌든 양 팀 감독인 김재박과 유승안이 주도해서 이뤄진 트레이드였고, 한화나 현대 양측 모두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
- 한화 측 입장
- 전 해인 2003년에 김태균이 31홈런을 치며 대폭발. 나이 젊고 스타성 있는 김태균 위주로 팀을 재구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게다가 송지만은 한화의 연고지인 충청권 출신이 아니었던 데 반해 김태균은 천안시 출신으로 프랜차이즈 스타.
- 송지만의 빈 자리는 2003년 대한민국을 잠시 떠나 있었던 제이 데이비스로 채울 계획이었다. 게다가 당시 백업 외야수로 삼성에서 데려온 임재철[10], 김수연과 같은 발빠르고 수비되는 선수가 존재했으니 송지만의 빈자리는 크지 않다고 봤던 것.
- 게다가 송지만 기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도 있었다. 당시는 극악한 타고투저 시대로 이런 괴물이나 저런 괴물이 50홈런을 빵빵 치던 시절이었고, 30홈런은 기본으로 넘겨야 나름대로 홈런 타자라고 명함 내밀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
- 당시 송지만은 FA 자격 취득을 앞두고 있었던 상태였는데, 한화 이글스는 이미 2002년에 송진우의 FA로 18억. 일본에서 복귀한 정민철에게 1년 연봉 4억을 안긴 상태였다. 게다가 입단 동기인 이영우 또한 송지만과 같은 해에 FA를 앞두고 있었으니.[11] 한화 이글스는 당시 선수 육성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필요한데에 돈을 안 쓰던 구단으로 악명이 높았다.
- 588689 시절과 마찬가지로, 당시도 한화는 불펜이 처참한 상태였다. 팀내 마무리는 15세이브의 37살 외국인 레닌 피코타로 시즌 내내 팬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더니 기어이 9월달에 웨이버 공시. 이후 마무리는 38살의 송진우가 투잡을 뛰는 지경에 이르렀다.
- 권준헌은 이름값에서 밀릴 뿐 당시 최고의 구원 투수 중 한명이었다. 비록 2년 전 혜성처럼 나타난 조용준에 밀려 팀 내 마무리는 아니었지만, 2002~2003년에 셋업맨으로 흐믓한 활약을 해주었고 다른 팀에서는 충분히 마무리 투수로 뛸 수 있을 것라는 평가. 게다가 권준헌은 '핫코너'인 3루수 출신으로 뒤늦게 투수로 전향했기 때문에 어깨도 비교적 싱싱하다는 평가도 있었다.[12][13]
결론적으로 당시 한화 이글스는 아주 끝내주는 타선과 베테랑 선발진,[14] 그리고 시궁창 불펜진(…)을 갖춘 상태였다. 따라서 마무리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 송지만을 보내는 정도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무브였다. 또한 어차피 같은 해 FA를 맞이하는 이영우와 송지만 둘 다 잡기 힘들다면, 이왕이면 좌타자인데다가 02~03 시즌 성적에서 더 우위에 있는 이영우가 낫다는 심산이었다. 거기에 우타로는 떠오르는 태양 김태균이 있으니까...
- 현대 측 입장
- 일단 현대는 연고지 문제, 모기업 재정난으로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15][16] 이로 인해 주축 선수들 대부분의 FA 재계약이 쉽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미 2002년 겨울에 박경완을 떠나보내야 했던데다가[17] 이 해 겨울에는 박종호도 놓쳤다. 이런 상황에 4번 타자였던 심정수가 이듬해인 2004년 말에 FA로 풀릴 예정이었다. 누가 봐도 연봉 대폭발이 예상되는 심정수를 현대 유니콘스가 잡을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18], 향후 심정수보다는 싼 가격으로 중심타선을 맡아 줄 보험이 필요했다.
- 트레이드 직후인 2004 시즌만 놓고 보면 심정수 - 클리프 브룸바 - ? 으로 중심타선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는 주로 이숭용이 클린업에 들어갔다. 이숭용이 교타자형 1루수이지만 02~03년에는 20홈런에 근접한 성적을 냈기 때문.[19] 게다가 중심타선 중 브룸바는 2003년 시즌 중반에 영입된 타자로, 2004년에도 좋은 활약을 보여줄 지 미지수인 상태였다.
- 투수 쪽에선 해가 갈수록 약해지고 있긴 했지만 전통의 투수왕국다운 면모가 남아 있었다. 당시 한국의 레오 마조니라 불리던 김시진 투수코치는 매해 젊은 투수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불안감이 있긴 했지만, 불펜만 놓고 보면 마무리 조용준이 든든한 가운데 신철인, 오재영, 송신영, 이상열, 전준호(투수) 등 젊은 투수들이 쏠쏠하게 불펜진과 선발진을 채우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팬들의 반응은
- 현대 팬들: 대체로 송지만의 영입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03년 시즌 부상으로 실력이 옛날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나뉘기도 했었다. 당시 외야수 자리는 많았지만, 2루수 공백이 컸다는 점에서 왜 외야수 거포 선수를 영입했는지에 대해 의아했던 이들도 있었다. 당시 현대에는 2루수 박종호가 FA를 선언하여 삼성에 이적하는 바람에 당시 빈공백이 큰 자리는 2루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외야수보다는 2루수 영입을 바랬던 이들이 꽤나 있었다.[20][21] 하지만, 어쨌든간에 호타준족형 선수를 영입했다는것에 대해 당시 팬들은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 한화 팬들: 부정적인 입장이 주류였긴 한데, 구단 게시판을 도배하거나 집단적으로 트레이드 반대 운동을 벌이는 등의 행동으로 나서진 않았다. 골수팬들 역시 불펜의 보강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그게 왜 하필이면 권준헌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트레이드 당시 권준헌의 나이가 만 33살로 이미 노장이었기 때문. 따라서 어차피 트레이드할 거라면 나이 많은 권준헌보다 신철인이나 송신영 같은[22] 젊은 투수를 받았어야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23]
1.1.1. 트레이드 이후
송지만은 어느새 KBO의 레전드 반열에 올랐고, 약간 노쇠의 기미는 보여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반면 권준헌은 1년 뛰고 1년 드러눕고를 반복하다 2008년에 은퇴했다.단기적으로 볼 때는 한화에서 권준헌을 기대치대로 잘 써먹었긴 했다. 문제는 제대로 써먹은 게 달랑 2년 반이라는 점. 일단 이적 첫해인 2004년에는 42⅔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2.11, 17세이브로 기대치를 해 줬다. 그런데 이듬해인 2005년에는 부상으로 단 1경기도 못 나왔고, 2006년에는 평균자책점 5점대의 아쉬워서 쓰는 불펜 투수, 2007년에는 평균자책점 1.98을 찍으며 부활하나 싶더니, 너무 무리해서 복귀한 탓에 부상이 도져 2008년 시즌이 끝난 이후 그대로 방출. 그리고 송지만 대신 남긴 이영우는... 자세한 상황은 프로야구 병풍 사건과 이영우 항목 참조.
반면 송지만은 트레이드 첫해인 2004년에 타율은 낮긴 하지만 홈런 22개를 쳤고, 그 후에도 장타력이 전성기보다 줄긴 했지만 매년 2할 중후반대 타율과 두자릿수의 홈런을 치고 있다.
만약 송지만이 한화 이글스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2010년의 폭망한 타선을 최진행, 김태완과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2. 현대 유니콘스
송지만은 2004년, 재기에 성공했다. 2003년 9개쳤던 홈런을 단숨에 13개를 더해 홈런 22개를 만들었다. 선구안은 다소 떨어졌지만, 트레이드 첫해 풀 타임으로 .265 홈런 22개 74타점으로 쏠쏠한 활약을 하면서 외야수 선발, 백업 구분없이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많이 받으며 맹활약했다. 중심 타선에 서기도 했지만, 의외로 출루율이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전준호를 2번으로 밀어내고 1번 타자로 출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히어로즈로 바뀌고서도 종종 있다.[24] 현대가 2004년 9차전 접전 끝에 삼성을 누르고 우승하면서 송지만은 생애 2번째 우승반지를 끼게 되는 경험도 누렸다.
심정수와 박진만이 이적한 후에는 팀 타선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팀은 이런 전력 공백을 완전히 메우지 못하고, 2005년 7위와 2006년 3위, 2007년 6위 식으로 널뛰기를 반복했지만 송지만은 꾸준한 활약을 선보였다. 다만, 전성기의 30홈런을 기대하던 팬들에게는 약간 아쉬웠을 수도 있긴 했다. 그리고 득점권 타율이 다소 좋지 않았고 후술하는 연봉 외 다른 이유들이 겹쳐 현대 팬들에게 의외로 욕을 좀 먹었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수준의 타자로 활약했고, 2006년 WBC를 통해 생애 첫 국가대표도 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미국전에서 선발출장해 2타수 1안타로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구단에 송지만이 섭섭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2005년 시즌 후 FA 대상자였는데 하필 현대 유니콘스가 모기업의 사정으로 인해 재정악화가 되면서, FA 신청을 한 후 현대 유니콘스로부터 3년 18억원이라는 평범한 계약을 제시받았다. 결국 현대와 협상이 결렬되며 시장에 나와 다른 팀에 가려고 마음 먹었지만, 이 해 FA 시장은 전년도와 다르게 흉년이었던 데다가[25] 삼성과 LG는 무관심, 롯데는 현대보다 못한 제안으로 송지만을 실망시켰다.[26] 저평가된 레전드의 비애일까? 결국 FA 우선협상 당시 제시받았던 3년 18억에 현대와 재계약했지만, 넉넉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27]
그리고 이런 돈과 관련한 불운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된 뒤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는 과정에서 히어로즈 측은 송지만과 현대가 맺은 FA 계약은 현대가 해체됐기 때문에 무효이며, 새로 계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당초 2008 시즌 연봉은 5억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새로 협상을 진행하며 대폭 삭감된 2억 2000만원에 히어로즈와 연봉 계약을 마쳤다.[28][29] 2009년 시즌에는 4억으로 연봉이 인상되며 과거 현대 시절 연봉은 아니더라도 나름 팀 내에서 고액 연봉자에 속하며 어느 정도 회복했으나, 2010년 시즌이 끝난 후에도 또 다시 연봉이 2억 5000만원으로 대폭 삭감되는 수모를 경험해야 했다. 2012년에는 부상으로 1군 14경기에 그쳐 2억 5,000만 원에서 8,000만 원으로 무려 68% 삭감되었다.[30]
3.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연봉 삭감같은 수모는 둘째치고, 온갖 선수와 관련해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히어로즈 프랜차이즈 선수 중에서 장타를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다. 2012년 넥센의 이른바 LPG 타선이라는 화끈한 중심 타선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택근과 더불어 팀에서 장타를 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선수였다.[31]
3.1. 2008~2010 시즌
우리 히어로즈 창단 첫 해부터 주장을 맡음과 동시에 팀 내 고참으로써 선수단 리더의 역할도 했다. 또한 팀내 야수 중에서 가장 많은 118경기에 출전했으며 브룸바와 더불어 13홈런(62타점 기록)을 치며 팀 내 최다홈런을 기록했다. 2009년이 되자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면서 대폭 깎였던 연봉도 2009년부터 다시 4억까지 오르기도 했고 브룸바, 이택근, 강정호, 덕 클락과 더불어 팀 내에서 20홈런 이상을 치면서 중심타자로 활동했다. 타율도 0.289로 준수한데다가 115경기에 나왔으니 나이를 생각하면 준수한 모습. 그래서 공로를 인정받아 연봉도 동결되었다. 2010년에는 타율이 0.291로 소폭 올랐고, 17홈런과 63타점으로 팀내 홈런 1위/타점 2위를 기록했다. 7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이라는 대기록도 세워갔다. 그러나 4억원이라는 고액의 연봉을 생각하면 부족한 것은 사실. 당시 구단은 송지만에게 연봉 50% 삭감을 제시했으나, 결국 1억 5천만원을 삭감한 2억 5천만원에 협상을 마쳤다. 여하간 히어로즈의 타선을 항상 지킨 타자이자, 이택근이 잠시 LG 트윈스로 이적한 후에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클럽하우스 리더 역할도 맡았다.3.2. 2011 시즌
2011년은 팀 사정이 그야말로 막장이었던 해이자, 본인도 다소 부진했지만 9개의 홈런을 치면서 꾸준한 활약은 이어갔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활약은 2011년 5월 15일 LG전, 상대 선발 투수 벤자민 주키치에게 노히트 노런을 허용할 뻔한 상황에서 8회말 안타로 노히트를 깼다! 또, 2011년 6월 2일 사직 롯데전, 9회초 2아웃 마무리로 등판한 강영식에게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렸으나 쓰리볼 풀카운트까지 끌고 가며 끝내 역전 2점 홈런을 날렸다.꾸준한 활약으로 인해 많은 KBO의 기록 고지를 점령하기도 했다. 넥센의 젊은 타자들이 영 성장세가 좋지 않은 관계로 꾸준히 지명타자로서는 경쟁력을 보여줄 기세. 다만 주전 외야수는 유한준의 성장과 이택근의 복귀로 인해 쉽지는 않을 듯 하다. 그리고 나이 때문인지 확실히 예전보다 손목 등의 부상이 빨리 회복되지는 않는 모습. 구단에서는 연봉 2억 5천만원을 동결시켜 주었다.
3.3. 2012 시즌
2012 시즌에는 시범 경기에서 쾌조의 컨디션을 보이면서 팬들에게 기대를 안겨줬다. 그런데 개막 후 2번째 경기에서 이혜천의 투구에 발등을 맞아 타박상을 입어 엔트리에서 빠지더니, 휴식을 마치고 복귀를 위해 경기 감각을 조절하던 2군 경기에서 주루 도중 발목 골절을 당하면서 전반기 아웃이 되었다. 그리고 이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면서 커리어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말았다. 지못미. 물론 40살의 베테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노쇠화는 피할 수 없던 모양이다. 다행히 재계약 대상자에 올랐고, 자신도 현역 의지를 보여 재계약했다.[32]92학번 동기인 박찬호와 박재홍이 2012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자 황금의 92학번 세대 중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3.4. 2013 시즌
개막 엔트리에는 들어갔으나 바로 2군에서 잠시 머물렀다. 2군에서 홈런을 친 다음 날 1군으로 콜업되었다. 유한준의 거듭된 부진을 그가 보완해 주어야 했다. 교체된 선수는 박헌도.4월 14일 시즌 첫 경기에서 오승환의 공을 밀어 넘겨 시즌 첫 안타를 첫 홈런으로 장식하였다.
4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교체 후 두번째 타석에서 2타점 적시타를 쳐 팀의 승리에 쐐기를 꽂으며 자신의 클래스를 입증하였다.
그러나 젊은 선수를 중시하는 염경엽 감독의 기용방침 때문에 1군에 거의 오르지 못하고 있다. 유한준, 장기영이 부진할 때는 송지만을 좀 써야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도 있었으나
9월 5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7회 말 장기영의 어이없는 실책으로 1점을 내주는 바람에 11회 연장까지 이어진 상황. 11회 초 선두타자로 나와 기습번트를 치고 이 악물고 뛰는 주루플레이로 출루에 성공한다. 곧바로 유재신으로 교체되고 김민성의 적시타로 팀은 승리했다.
포스트시즌 경험이 있는 선수가 적고[33] 젊은 선수가 많은 넥센의 특성상 그의 경험이 필요했기에 2013년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됐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앞선 10월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3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스코어 3:3이던 14회말 무사 1, 3루에서 이원석의 우전안타 타구를 잡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홈으로 송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34] 포구를 포기하고 퇴근본능을 발동한 17년 후배 박동원과는 매우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박동원은 송지만의 전력 수비에 비교되는 어이없는 꼬락서니를 보여 줌으로써 장기영의 총검술과 함께 세트로 묶여 당연히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팀이 처음으로 올라간 포스트 시즌에서, 그것도 대선배는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후배란 놈이 경기를 포기해버렸으니 선수고 팬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35] 더욱이 이 패배 이후로 넥센 히어로즈는 4, 5차전을 연달아 내주고 두산 베어스에게 리버스 스윕을 당했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은 대가를 팀 전체가 톡톡히 치르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송지만은 2013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 2, 4차전은 결장하고 3차전은 대수비, 5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2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2연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3.5. 2014 시즌
2014년 시즌에도 현역 타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송지만은 최동수, 박경완이 은퇴함에 따라 한국프로야구 현역 최고령 타자가 되었다. 2013년 시즌 들어 은퇴 또는 플레잉 코치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이장석 사장과 염경엽 감독의 설득으로 현역 활동을 연장하기로 결정한 것. 송지만 본인은 이 1년이란 시간을 베테랑으로써 모범을 보이고, 지도자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삼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물론 FA 자격이 다시 들어왔지만 포기했다. 연봉 8,000만원에서 2,000만원 오른 1억원에 2014시즌 재계약을 마치면서 본인도 계약서도 보지 않고 싸인하는 배려의 모습을 보였고, 구단 프런트에서도 노장에 대한 예우를 다 하면서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2014 시즌 개막일인 3월 29일 이성열, 비니 로티노, 문우람, 이택근, 유한준 등에 밀려 1군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6월 1일 까지 퓨처스리그에서 62타수 14안타 3홈런으로 그럭저럭 활약하고 있었으나 1군의 부름을 받지 못했고,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고 밝혔다.
화성 히어로즈의 경기를 직관한 팬의 말에 의하면, 부상으로 2군 경기도 쉬고 있다고 한다. 경기에 나서지 않고 주로 2군 후배들에게 타격코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주며 사실상 플레잉코치라고 봐도 될 듯. 팬들은 시즌 후반 엔트리 확장 때 1군에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결국 2014년 10월 7일, 명예롭게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동영상. 은퇴 후 화성 히어로즈 타격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다고 한다.
송지만의 은퇴로 대한민국 야구의 황금 세대였던 "92학번" 선수들이 모두 현역 무대에서 퇴장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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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은퇴식
은퇴식은 2015년 10월 1일, 자신이 데뷔한 친정팀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하게 되었다. 오전 중에 날씨가 좋지 않아 팬들의 마음을 아쉽게 할 뻔했지만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게임이 진행되어 은퇴식도 진행되었다.그의 최고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팀과 자신의 은퇴까지 몸담은 팀의 축하를 받으며 은퇴식을 하였다. 이날 참석한 그가 모신 감독들만 해도 김학용(동산고), 주성노(인하대), 강병철, 이희수, 이광환, 유승안(이상 한화), 김시진, 염경엽(이상 넥센) 감독[36] 등 송지만의 은사들이 모두 모인 셈. 예외로 현대 시절 감독이었던 김재박 전 감독은 경기감독관으로 이날 광주에 내려가 오질 못했다.
프런트의 농간으로 팬들의 축하 대신에 훌리건들만의 축하를 받게 된 것은 아쉬운 점. 자세한 건 넥센 히어로즈 특정 팬덤 지원 논란 참조. 넥센 히어로즈 갤러리의 한 팬이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글도 유명하다.
[1] 출생은 전라북도 전주시지만 어린 시절 인천광역시로 이주해 성장했고, 초중고를 거쳐 대학까지 모두 인천에서 보냈다.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고향을 인천이라고 몇 번 언급하거나 당시 인천 연고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를 고향팀이라고 하는 등 사실상 인천을 고향으로 여기는 듯 하다.[2] 사실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그렇게 주목 받지 못했던 선수였기에 고향팀의 지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현대는 3라운드(한화 바로 앞 순번이었다.)에서 송지만을 뽑지 않고 다른 외야수 1명을 뽑게 된다. 그 선수는 훗날 현대의 후신격 팀인 키움 히어로즈 감독이 되는 장정석이다. 장정석이 프로 커리어 내내 그저 그런 선수로 머물렀고 송지만은 첫 해부터 맹활약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당시 현대 스카우터들의 선수 선구안이 나빴음을 알 수 있다.[3] 이후 홍원기는 1999년에 한화의 고질점인 중간계투 요원의 부족이라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전상렬과 묶여 두산 베어스에 김경원을 상대로 트레이드 되었다.[4] 임수민은 주전 2루수가 되었지만 평범한 수준이었다. 이후 군 복무 이후 수비력이 떨어지더니 김인식으로 감독이 바뀌면서 한상훈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은퇴했다. 이영우는 1999년부터 준수한 타격을 보여주며 다시 주전이 되었고 좌익수와 지명타자로 꾸준히 나왔다. 2004년까지는.[5] 김태균이 등장하기 전이었으니 포지션과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이 송지만을 장종훈의 후계자로 여겼다.[6] 그 대신 출전한 SK의 이승호가 병역 혜택을 입었다.[7] 장문석이었다는 말이 있다.[8] 노장진은 원래 한화 출신이다. 만약 이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면 다시 친정팀 한화로 돌아가는 셈.[9] 하지만 막상 2004년 삼성의 마무리는 임창용이 맡았고, 노장진은 선발 전향을 하였으나 그해 초 고지행과 무단이탈 파문을 일으켜 롯데로 트레이드되었다.[10] 더군다나 임재철은 천안북일고 출신으로 계획이 잘 이뤄졌다면 연고지 프랜차이즈 선수로 키울 수 있었다.[11] 하지만 이영우는 FA 직전이었던 2004년 막판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33세의 나이에 공익근무로 군 복무를 하는 바람에 제대 후 기량이 떨어지며 FA 신청도 하지 못했다.[12] 물론 늦게 시작했으니 어깨가 싱싱할 거라는 건 구시대적인 생각으로, 오히려 뒤늦게 투수로 전향한 경우 어깨 부상을 당할 위험성이 높은 편이다.[13] 사실 권준헌은 타자로서는 1995년 3할을 친 것 빼고 보여준 것이 없으나, 어깨가 상당히 좋기로 유명했고 투수로 전환한 이유도 훈련 중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 그의 강한 어깨를 알아본 김시진 코치가 투수 전향을 권유했기 때문이다.[14] 송진우, 정민철, 문동환이라는 검증된 선발투수진이 있었고, 여기에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00년 1차 지명자 조규수, 03년 1차 지명자 안영명, 04년 1차 지명자 김창훈의 젊은 피가 가세된 데다가 1년만 더 있으면 06년 1차 지명으로 감독의 아들이자 초특급 유망주가 입단할 상태였으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꿈은 산산히 흩어지고...[15] 2000년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이 쪼개지면서 현대 유니콘스는 5남 정몽헌 회장이 경영하던 현대그룹의 계열사 현대전자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현대전자가 경영부실로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 하이닉스반도체로 분사되어 채권단의 공동관리로 들어가면서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은 붕 뜨게 된다. 한 푼이라도 빚을 회수하고자 했던 채권단 입장에서 프로야구단은 돈먹는 하마로 여겨졌고,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 단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특히 정몽헌 구단주가 2003년 대북송금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투신 자살한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16] 그래서 2001년에는 당시 일본에 가 있었던 정민태 임대료 + 조웅천, 조규제 이적료로 운영하였고, 그 후엔 현대자동차, KCC,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백화점 등 범 현대일가 계열사에서 약간씩 모아서 지원했지만 여타 구단에 비해선 그닥 풍족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현대자동차는 이미 KIA 타이거즈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1리그 2팀이라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2006년을 마지막으로 현대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이 지원을 끊었고 2007년에는 KBO 기금 + 현대해상 + 현대백화점의 운영비 지원으로 겨우 연명하다가 마지막을 맞게 된다.[17] 다만 박경완이 그 해에 저조한 성적을 기록한 면과 높은 금액을 부른 것도 있긴 하다.[18] 결국 심정수는 옵션을 포함해 4년 60억을 제시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다. 당시 삼성은 이승엽의 NPB 진출과 마해영의 KIA 이적으로 인해 양준혁과 진갑용이 클린업 트리오를 맡으며 중심타자 하나가 더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19] 외국인 선수는 타자 1명, 투수 1명으로 뽑았는데 투수에 비해 타자는 잘 뽑지 못하다 2003 시즌 중 대체선수로 합류한 브룸바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재계약한 상황.[20] 실제로 2004년 현대의 2루수 자리는 당시 막강했던 현대 타선의 최대 약점이라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김민우, 서한규, 채종국 등이 돌아가며 나왔으나 박종호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한참 부족했다.[21] 그러나 한화 입장에서는 딱히 줄 만한 2루수 자원이 없던 것은 사실. 임수민과 백재호가 2루수와 유격수를 맡았고, 심지어 공격력 강화를 명목으로 이범호가 유격수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한상훈이나 황우구를 받아오기에는 권준헌의 성적을 보았을 때 전혀 급이 맞지 않았다.[22] 이상열도 괜찮았지만 이미 한화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되었으므로 논외로 한다.[23] 신철인은 셋업과 마무리로 기용이 가능한 선수였고, 송신영은 4점대 평균자책점을 올리던 선수였지만 제법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둘 다 20대였다.[24] 최근 몇 년간 기록을 보면 1번 타자일 때 가장 잘 친다! 1번 송지만, 2번 전준호로 잘 써먹었다.[25] 전년도인 2004년에 삼성 라이온즈가 심정수, 박진만에게 각각 60억과 39억이라는 대박 계약을 안겨주는 등 FA 시장을 뜨겁게 달궈놨던 것과 다르게 2005년 스토브리그는 그에 비해 시장이 얼어붙었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당시 최대어였던 장성호가 시장에 나오지 않고 일찌감치 KIA 타이거즈에 잔류한 데다가 빅마켓인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는 FA 시장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그 중 타 팀으로 이적한 FA 선수는 SK 와이번스와 협상이 결렬되어 한화 이글스로 옮긴 내야수 김민재 1명 뿐이었으며 그마저도 4년 14억이라는 소규모 계약이었다. 송지만의 경우 FA 시장 개시 전까지만 해도 30억 정도의 계약까지 가능할 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해 또 다른 FA 대어였던 박재홍 역시 초기만 해도 40억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평가와는 다르게 FA 미아가 될 뻔했다가 마감 직전에 예상가보다 훨씬 낮은 4년 30억에 SK와 재계약하기도 했다.[26] 송지만을 신인 시절부터 잘 챙겨주고 주전으로 기용한 강병철 감독이 당시 롯데 감독으로 취임하자 강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롯데와 협상 테이블을 차렸으나 롯데는 마이너스 옵션 4억을 포함해 4년 최대 21억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일단 롯데는 돈 안 쓰는 구단으로 유명했던데다가 펠릭스 호세와 정수근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이승화, 손인호, 최경환 등의 백업선수들로 남은 한 자리를 채우던 상황. 그리고 사실 2005년 시즌 후 스토브리그에서 롯데의 목표는 오직 장성호 하나여서 장성호가 기아 잔류를 결정하자 곧바로 FA시장에서 철수했다.[27] 그런데 자세한 계약조건을 살펴보면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당시 현대는 계약금을 주지 않는 대신 연봉만 총 16억(2006년 5억, 2007년 6억, 2008년 5억), 옵션 2억 이렇게 주기로 하였다. 다른 FA 대어들과 다르게 계약금을 주지 않았다는게 너무 크지만, 순수 연봉만 보면 KBO 내에서 최상급으로 받았다. 이렇게 특이하게 계약을 한 이유는 구단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딴 팀에서 가져가지 않도록 일부러 이런 식으로 계약을 맺었다.[28] 즉, FA로 다년 계약을 맺었음에도 그 돈을 전부 받지 못한 것. 사실 이 주장대로면 기존 구단 해체 후 웨이버로 공시된 구 현대 선수들이 전부 타 팀과도 자유롭게 계약이 가능한 상태여야 했으나, 겨우겨우 찾은 8구단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전원 고용승계하는 조건으로 어찌저찌 넘어갔고, 송지만을 포함한 이숭용, 전준호, 김동수, 김수경 등 팀 내 고액 연봉자들만 삭감의 칼바람을 맞게 되었다.[29] 팀 후배였던 조용훈에 의하면 현대에서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는 과정에서 주장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어수선했던 구단 분위기, 연봉 협상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꽤나 받았는지 평소 입에도 안 대던 술을 마셨을 정도라고 한다.[30] 그래도 5억원에서 5,000만원으로 무려 90% 삭감된 박명환보다 양호했다.[31] 나머지 한 자리는 브룸바가 클린업 트리오로서 활동했다.[32] 물론 연봉은 8,000만 원으로 무려 68% 삭감되었다.[33] 준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든 선수 중에서는 이택근, 이정훈, 이성열, 송신영, 오재영, 김민성 정도가 있었다.[34] 끝났다 생각하고 덕아웃에서 뛰쳐나오는 두산 선수들을 멈칫하게 만들 정도의 좋은 송구였다.[35] 박동원은 그 다음 시즌인 14년 각성하며 허도환을 밀어내기 전까지 죽어라 까이게 된다.[36] "염경엽 감독은 왜 나와?" 할 텐데, 송지만이 은퇴한 시점에서의 감독은 공식적으로 염경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