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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9:23:49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93년 7월 26일
유형 CFIT, 기상악화, 조종사 과실
발생 위치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후산리 산176-1
기종 Boeing 737-5L9
운영사 아시아나항공
기체 등록번호 HL7229
출발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특별시 김포국제공항
도착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전라남도 영암군 목포공항
탑승인원 승객: 110명[1]
승무원: 6명
사망자 승객: 66명
승무원: 2명
생존자 승객: 44명
승무원: 4명

1. 개요2. 사고 이전3. 진행4. 원인5. 결과6. 여담7. 관련 문서8. 유사 사고

[clearfix]

1. 개요



1993년 7월 26일 오후 2시 20분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3시 15분 전남 영암군 삼호읍의 목포공항에 도착 예정인 아시아나항공의 OZ733편 B737-5L9 여객기(기체 등록번호: HL7229)(기장 황인기, 부기장 박태환)가 목포공항 착륙을 위해 접근 중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화원반도 야산(지령산 부근)에 추락한 사고다.

당시 KBS 뉴스 9 동영상 링크
당시 MBC 뉴스데스크 동영상 링크
MBC가 공개한 음성 녹음본 일부(20초부터)

2. 사고 이전

파일:45676675444.jpg
사고 2년 전, 머스크 항공[2] 시절 촬영된 사진.[3]
파일:HL7229.jpg
아시아나항공 도색으로 변경 이후
사고 8개월 전,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루프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사고 기체.[4]

3. 진행

추락 직전 CVR
(충돌 47초 전) 부기장: Landing Check List Completed Sir.
(충돌 46초 전) 기장: Thank you.
(충돌 31초 전) (GPWS: Terrain!)
(충돌 30초 전) (GPWS: Approaching Minimums!)
(충돌 29초 전) (GPWS: Minimums!)[5]
(충돌 26초 전) 기장: Flap 30, Green Light[6]
(충돌 25초 전) 부기장: Yes, Sir.
(충돌 24초 전) 기장: 다 지나갔어.[7]
(충돌 21초 전) 기장: Gear Down, Three Green[8] Flap...[9] MAXIMUM 브레이크에 놓아야지 되겠고..
(충돌 17초 전) 기장: 안 되겠다 활주로가 미끄럽겠지..
(충돌 16초 전) 부기장: 들어간 지 얼마... 지나간지 얼마 안 돼 가지고...
(충돌 13초 전) (Elevator Trim이 움직이는 소리)
(충돌 12초 전) 기장: OK..800...[10]
(충돌 6초 전) 기장: 오 맙![11]
(충돌 5초 전) 부기장: 어이구!
(충돌 4초 전) (오토쓰로틀 해제버튼 조작음)
(충돌 4초 전) (엔진 추력이 급격히 올라가는 소리)[12]
(충돌 0초 전) (폭발음)
End of recording (녹음 끝)
사고 당시 목포공항에는 강한 가 내리고 있었고 오후 3시 24분 사고기는 첫 번째 착륙 시도에 실패했다.[13] 이어서 4분 후인 3시 28분 2번째 착륙 시도를 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다시 10분 후인 3시 38분, 3번째 착륙 시도 역시 실패로 끝난다.[14]

3번째 착륙 시도를 하기 위해 접근하던 사고기는 3분 후인 3시 41분 광주공항의 관제 레이더에서 사라지면서 통신이 두절됐다. 충돌 타이밍에 사고기와 교신하고 있던 광주공항 관제탑에서 갱신된 기상정보를 통보하고자 교신을 시도하였으나 사고기에서 응답이 없었다. 레이더에서 사라지고 9분이 지난 3시 50분, 사고기는 목포공항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의 야산에 추락한 채 발견되었다.

4. 원인

악천후, 공항 시설의 부족, 기장무리한 착륙 시도를 꼽을 수 있다.[15]

특히 목포공항은 VOR/DME와 NDB만 설치되어 계기착륙장치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소규모 공항이었고 활주로 역시 1,500m로 민항 여객기가 취항하기엔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천후로 시야까지 제한되고[16] 파일럿들은 계속된 접근 실패에 조바심으로 서둘러 착륙 시도를 했었다. 당시 착륙 허가를 받지 않고 착륙 절차를 수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거듭된 접근 실패로 조바심이 난 기장은 다소 낮은 고도로 접근을 시도했다. 공식 조사 결과에서는 1.5마일 최종 경유지점을 비행컴퓨터(FMC)에 입력하지 않아 실제보다 1.5마일을 더 간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마지막 시도에서 모든 조작이 2마일 가량 일찍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국 활주로 접근선상에 있는 산을 뒤늦게 발견한 후[17] 충돌 4초 전 상승하려 했으나 당시 지상과 불과 110여 피트(33.53m)를 남겨놓고 날고 있었던 데다[18] 분당 1,000ft(304.8m)[19]로 하강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평지가 아닌 산 위를 날고 있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선 하강을 멈추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산의 경사보다 더 빨리 상승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4초 동안 하강을 멈추고 32피트(9.75m)를 상승하여 762피트(232.3m)까지 올라갔으나, 827피트(252.1m)의 봉우리를 넘지는 못했다.

당시 아시아나는 정시 이착륙 세계 1위라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때였는데 이를 사고의 한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즉 조종사가 이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착륙을 시도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정시 이착륙이 좋은 항공사를 평가하는 척도처럼 부각되는 데 대하여 우려 섞인 시선도 있다.[20]

5. 결과

탑승객 110명, 승무원 6명 중 68명이 사망했다. 당시 악천후로 인한 시야 제한으로 목포공항에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사고기 추락 현장에서 생존한 승객 2명이 기내에서 빠져나온 후 산 아래 마산리 마을까지 내려와 근처 파출소로 가서 신고하면서[21] 사고가 알려졌으며 이후 파출소에서 다시 관할 소방서목포소방서에 신고했는데[22] 목포소방서 해남소방파출소 소방차구급차들이 출동하고 목포소방서 119구조대도 출동하여 구조 작업에 착수했다.[23]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려던 대한민국 공군 예비역 소령 기장 황인기(당시 48세), 공군 예비역 중령 부기장 박태환(당시 39세) 모두 즉사했다. 나중에 드러난 결과에 의하면 황인기 기장은 여객기 운항 시간 자체는 3,022시간을 조종했으나,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당시 목포 노선 운행은 겨우 2번 한 것이 드러났다. 박태환 부기장은 더 문제였는데, 공군 조종 시간은 3,000시간에 달하지만 민간 여객기는 고작 24시간을 조종한 데 그친 초보 조종사였고 그도 목포 노선은 단 2번이 전부였다. 위험성이 큰 목포행 노선에 목포공항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만 두 명을 배치했으니 사실상의 인재(人災)이며 둘 중 한 명이라도 목포공항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조종사를 배치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전화위복이 된 점은 당시 해남 지역에 쏟아지며 착륙을 그렇게나 방해하던 비가 사고 발생 이후에는 추가 희생자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추락하면서 항공유가 누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 덕분에 2차 폭발이나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중에 추락하는 바람에 119 구급차가 접근할 수 없어서 목포공항에 전개하고 있던 대한민국 해군알루에트 III 대잠헬기가 긴급 투입되어 부상자를 수송했는데 문제는 알루에트 III은 경헬기라 기내에 들것을 놓을 자리가 없었고 구조 헬기가 아니라 들것도 없는 상황이어서 부상자들을 그냥 서 있는 채로 와이어에 매달아 수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척추를 다친 부상자들이 하반신 마비 등의 2차 부상까지 입는 일이 발생했다.

또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여성 부상자[24]를 와이어로 매달아 올리면서 원피스가 바람(항공풍)에 날려 위로 젖혀져 여성의 팬티와 브래지어가 노출된 장면을 뉴스에서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보도해 버리는 흑역사도 있었다. 특히 가장 먼저 내보낸 MBC는 사고 당일 뉴스데스크에선 모두 3번, 27일 9:40 뉴스 및 저녁 뉴스에서 각각 2번 나왔고 KBS도 사고 당일 1TV 23:45 뉴스 및 2TV 10:20 뉴스, 27일 1TV 9시 뉴스에서, SBS도 모두 4번을 각각 내보냈다. 신문에서도 사고 다음날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4개사가 해당 장면을 게재했으며 모 조간신문은 아예 사회면에서 선보였다. 위와 같이 TV 뉴스에서는 자극적인 해당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다가 27일 들어 지상파 3사는 방송위원회의 경고를 받고 사과방송을 하기도 하였으며, 28일에 KBS 9시 뉴스에서도 문제의 부분을 편집 방영했다.

팬티와 브래지어 노출 장면 외에도 언론의 선정적 보도는 여럿 있는데, 28일 KBS 9시 뉴스에선 위에 언급된 여성 부상자의 성명과 주소를 번지수만 뺀 채 여과 없이 내보냈고 사고 당일 뉴스데스크에선 부상의 쇼크로 몸을 떨던 어린이에게도 마이크를 들이대는 무신경과 무감정을 드러냈다. 게다가 사고 소식이 7월 31일 이후 급속히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냄비 저널리즘'의 문제점이 제기됐고 뉴스의 과잉 극화 경향, 동일 정보원을 반복 보도하는 '함께 저널리즘' 등도 도마 거리에 올랐다.[25]

그래도 이러한 언론의 추태와 달리 관할 소방서인 목포소방서 119구조대와 해남소방파출소 소방대원/의용소방대원들은 화재 진화 작업 및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했다. 그나마 전술했듯 비가 내려 화재가 대부분 진화되어 큰 규모의 불로는 번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당시 목포소방서에는 대불공단 등 공단지대가 있어 화학차가 한 대 있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항공기 사고에 대응하기에는 조금 모자라서 해군항공대 소방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만일 화재 규모가 커졌다면 광주광역시제1전투비행단 소속 공군 소방대의 도움이 불가피했을 것이었으며 해남소방파출소가 보유한 펌프차, 물탱크차는 항공기 화재를 진압하기엔 어림도 없었다.[26]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마천 마을의 주민들이 생존자 구조에 온 힘을 써서 언론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주민들에겐 워낙 충격적인 경험이라서 이후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을 행했다고 한다.# 당시 마을 주민 한 명이 4살 아이를 구출하고 급하게 해남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아이가 요절했는데 이후 집으로 돌아와 자기 손에서 생명이 사라졌다며 끝도 없이 울었다고 한다.[27]

이 사고는 아시아나항공의 최초 인명손실 항공사고이자 아시아나항공의 최악의 인사사고이며 첫번째 국내선 사고이다. 사고 이후 OZ733편은 한동안 결번으로 남아 있었지만 아시아나항공에서 편명 체계를 싹 갈아엎고 현재는 인천하노이행 노선의 편명으로 운행 중이다.

또한 이 사고로 인해 목포공항의 여러 문제점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이를 대체할 공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는 무안국제공항의 건설로 이어졌다. 무안국제공항의 개항 후 목포공항은 폐항되어 현재는 오로지 군 전용 비행장으로만 사용 중이다.

6. 여담

7. 관련 문서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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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colcolor=#000>사망사건명
2022년 10월 29일
159 이태원 압사 사고
2020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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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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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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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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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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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1993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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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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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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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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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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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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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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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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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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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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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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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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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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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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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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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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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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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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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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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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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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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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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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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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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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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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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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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사고
1968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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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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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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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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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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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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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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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참사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추돌사고
1945년 8월 24일
549​~� 이상
우키시마호 사건
}}} ||

8. 유사 사고

대한민국 조종사들의 전형적인 착륙 고집이나 권위주의(고압적 상하관계)가 영향을 끼친 사고.


[1] 일본인(3명), 미국인(2명)이 탑승했다.[2] 1969년 설립된 덴마크의 항공사이며, 해운회사인 머스크 계열에 속했다.2005년 스털링 항공에 인수되었으나 스털링 항공은 2008년 파산하였고 그 뒤를 이은 심버 스털링마저도 2012년에 망했다.[3] OY-MAB[4] 1992년 11월에 머스크 항공 측에서 항공기를 인도받고 아시아나 항공 도색을 한 뒤 한국으로 오기 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기종인 737-500은 코펜하겐까지 항속거리가 닿지 않기 때문.[5] 사고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착륙 결심 고도에 다다랐음을 의미하는 GPWS 신호로 이때 무리하게 접근하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생각했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6] 플랩이 정상적으로 30도 내려왔음을 확인[7] 후술하겠지만 이는 기장이 산을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비행기는 산을 지나지 않았고 결국 사고가 난 것이다.[8] 랜딩 기어 3개 정상 작동 확인[9] 방금 전 확인해서 생략한 것으로 보임[10] 고도 800ft(243.8m)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나 자동비행장치 설정 고도는 700ft(213.4m)로 추정된다.[11] 뉴스데스크와 같은 날짜에 방송했던 KBS 뉴스 9의 경우 "오 맙(소사)!!"라고 자막에 표기했다.[12] 이는 기체를 들어서 산과 충돌을 막기 위함이었다.[13] 착륙 접근 실패 자체는 요즘에도 흔한 일이다.[14] 요즘은 세 번이나 착륙에 실패하면 착륙을 포기하고 회항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는 기상 이변으로 회항하면 기장이 시말서를 써야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를 계기로 그 규정은 없어졌다. 2007년 이후에는 3번이나 착륙에 실패하고도 회항하지 않으면 감항 당국에서 보고서를 요구하도록 되어 있다. 참고로 KLM 네덜란드 항공은 (시간 지체 시) 기장에게 벌금까지 물리는 규정이 있었다. 비행기가 납치를 당해도! 심지어 해고까지 당할 수 있었는데 이런 규정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인 테네리페 참사를 일으키고 나서야 없어졌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의 대표적인 예시다.[15] 안전보다는 무리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려는 당시 군 출신 조종사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 게다가 733편 추락 사고의 패턴도 놀랍게도 4년 전인 1989년 7월 27일에 일어난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와 비슷한 패턴이었다.[16] 마지막 시도였던 3차 시도 당시 시정은 2,000m였다. 사고기 기종의 최저시정기준은 2,800m이다.[17] 충돌한 봉우리의 높이는 약 827ft(252.1m), 원래 이 산 상공에서 1,600ft(487.7m)를 유지해야 했으나 블랙박스에 의하면 730ft(약 225.2m)까지 내려간 상태였다.(충돌 직전 기장이 "오케이 800"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18] 봉우리보다 97피트(29.57m) 낮게 날고 있었다.[19] 초당 17피트(5.18m)[20] 그 외에도 기장이 그 달에 집에서 쉬었던 횟수도 단 3번밖에 없었다.[21] 당시에는 무선통신 기지국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휴대폰이나 삐삐조차 대중적으로 보급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이렇게 마을까지 직접 내려가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동사무소/면사무소나 파출소로 가서 신고하는 게 1990년대까지는 보편적이었다.[22] 해남군은 당시 목포소방서 관할이었으며 파출소에서는 목포소방서 지령실로 그리고 다시 해남소방파출소로 연결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시간이 좀 걸렸다.[23] 산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고도 마산리 마을까지 내려간 것으로 보아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승객이 직접 마을까지 내려가 파출소에 가서 신고한 만큼 사고 현장으로의 소방차 출동은 늦어졌다. 그리고 파출소-> 해남경찰서 보고-> 목포소방서 지령실-> 해남소방파출소로 여러 번 전화가 오가야 해서 여기서 시간도 많이 잡아먹혔다. 1990년대 초반에는 현재같이 경찰/소방관서 같이 통합된 시스템이 없어 이렇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야만 했다.[24] 이분도 들것 없이 매달리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이를 원망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구출에 참여한 사람들도 방법이 잘못된 것을 몰랐던 자신들의 무지가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히스토리 후 2011.03.22 방송분)[25] 출처: 한국언론연구원 <신문과방송> 1993년 10월호 보도검증: 항공기 추락사고인가 뉴스생산을 위한 건수인가(p62~67.)[26] 항공기 화재는 등유 화재인지라 일반적인 물이 아니라 화학약제를 써서 진화해야 한다. 가루 형태의 분말로 된 소화약제가 쓰인다. 활주로 상에선 어지간하면 물로 진화하는 화재가 날 일 자체가 없고 거의 기름과 관련된 불이 나는지라 일반 소방차는 대응이 힘들고 화학소방차가 와서 처리해야 한다. 괜히 공항소방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27] 출처: 2011.03.22 히스토리후 방송분[28] 창업주 운산 이용구의 막내아들이다.[29] <작은 창에 큰 빛이... 한국제분주식회사 50년에 얽힌 우리 현대사> - 한국제분. 2006. p160.[30] 아빠는 사망하고 엄마와 아이는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