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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5:13:59

샤를발랑탱 알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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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발랑탱 알캉
Charles-Valentin Alka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arles-Valentin_Alkan%2C_sitting.jpg
그의 두 사진 중 얼굴이 드러난 사진[1]
본명 샤를발랑탱 모랑주
Charles-Valentin Morhange
출생 1813년 11월 30일
프랑스 제1제국 파리
사망 1888년 3월 29일 (향년 74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직업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작곡가
사조 전기 낭만주의
서명 파일:Charles-Valentin_Alkan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3. 작곡 성향4. 평가5. 작품 목록
5.1. 작품 번호가 붙은 곡5.2. 작품 번호가 붙지 않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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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연주한 Op. 39 No. 10 한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3악장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쇼팽, 프란츠 리스트와 더불어 19세기의 대표적인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들 중 한 명이다.

2. 생애

1813년 프랑스 파리에서 아슈케나지 유대인인 아버지 '알캉 모랑주'와 어머니 '쥘리 모랑주'의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샤를발랑탱 모랑주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불과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당대 저명한 음악교사였던 피에르 치메르만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7살에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최초로 대중들 앞에서 연주했고, 14살이 되던 해에는 다니엘 슈타이벨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1[2]을 작곡했다. 그리고 올리비에 메시앙과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학생으로 명성이 자자해 파리 음악원을 졸업할 때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둬 프리미에 프리(1등상)를 수상했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난 바로 다음 해인 1831년부터 알캉은 국외로 나아가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특히 20대부터 리스트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비르투오소로 명성을 날렸다. 그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는데,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등과 만나 친분을 쌓았으며, 특히 프레데리크 쇼팽과는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알캉과 실내악 앙상블을 같이하던 첼리스트 오귀스트 프랑콤의 소개로 만났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1837년부터 알캉은 동시대의 예술가의 거장들이 많이 거주하는 스퀘어 도를레앙에서 거주했는데, 이 때 쇼팽도 여기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서로 음악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1838년 그가 25세가 되던 해에 그는 일생일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고, 연주회에 자주등장하여 자신의 기교를 뽐냈다. 리스트와 쇼팽의 연주회에 종종 참석하기도 했다. 1837년에는 파리에 있었던 리스트의 연주회에 14살의 세자르 프랑크, 요한 픽시스와 함께 참석하기도 했고, 1838년 3월 3일에는 자신을 포함하여, 친구였던 쇼팽, 스승이었던 치메르만, 그리고 쇼팽의 제자였던 아돌프 구트만과 함께 자신의 베토벤 교향곡 7번 피아노 채보버전을 2대의 피아노에서 같이 연주하기도 했다. 그 뒤 1839년 자신의 아들인 엘리 들라보르드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여 6년간 사적인 연구작업과 작곡활동을 잠시 그만두었고, 1844년에 비르투오소로써 연주회로 복귀했다. 이 때 Op. 27 철도에튀드, Op. 31 25개의 전주곡, Op. 33 30대 소나타(알캉 파우스트)등등 기교적, 예술적으로 뛰어난 명곡들을 작곡했다.

1848년에 알캉은 당시 파리 음악원장이었던 다니엘 오베르가, 앙투안 마르몽텔을 스승이었던 치메르만의 후임자로 지명한 것에 대해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여러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에 항의를 하고, 다니엘 오베르에게 직접적으로 항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1년 뒤인 1849년에 그의 친구 쇼팽이 요절함으로써 알캉은 의지와 동기를 잃어버리고 결국 이를 포기했다. 그 뒤로 모든 외부활동을 접어버리고 은둔하여 성서와 탈무드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었다.

약 30년 가량의 기나긴 은둔생활 동안의 그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많이 없지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번역 활동을 했다고 하며, 페르디낭 힐러 등과의 작곡가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은둔 기간 동안에, 세간에 잘 알려진 Op. 39 12개의 단조 연습곡집, Op. 63 48개의 스케치, 5개의 가곡집 등등이 작곡됐다.

그러던 1873년, 알캉은 길고 긴 은둔생활을 끝내고 대중들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왜 다시 연주회를 가지게 됐나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지만, 알캉의 아들 엘리 들라보르드가 1867년 파리로 복귀하여 활동을 이어나갔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작은 연주회에서 알캉과 그의 아들 들라보르드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알캉 그 자신이 지병으로 인해 건강이 안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미유 생상스, 오귀스트 프랑콤 등의 음악가들의 후원과 지지, 도움에 힘입어 1880년 또는 그 이후까지 6번 정도의 작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알캉은 1888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일각에서는 늙은 알캉이 책장 높이 꽂아둔 탈무드를 꺼내려고 하다가 책장이 무너져서 책에 압사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1909년에 알렉산드르 베르타의 기사에서 발단했으며 피아니스트겸 작곡가인 이시도르 필립이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과장됐다는 지적이 많다. 알캉이 탈무드를 꺼내려다 책장이 무너져 사망했다는 설은 이미 오래전에 거짓으로 밝혀졌다.

휴 맥도날드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알캉의 죽음은 프랑스 알캉학자 Jean-Yves Bras가 알캉이 사망한 지 며칠 뒤인 1888년 4월 4일 Marie-Antoinette Colas의 편지를 발견하면서 밝혀지게 된다. 말년의 알캉은 시간적으로 칼같이 일상생활을 보내는 날이 다반사였지만, Colas는 알캉이 3월 29일 오전 11시경 점심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 무렵 관리인이 알캉의 아파트에서 이상한 소리와 신음 소리를 들었고, 강제로 출입한 관리인은 알캉이 무거운 우산꽂이를 위에 올려 놓고 부엌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하려다 기절해 의식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인이 그를 침실로 데려갔지만 알캉은 오후 8시에 결국 사망 판정을 받고 말았다. 알캉은 현재 몽마르트 성당에 묻혀있으며, 그의 누이인 셀레스트 알캉도 이후 같은 묘지에 묻혔다.

3. 작곡 성향

작품 대다수는 피아노곡이고 한 곡의 교향곡과 일부의 실내악곡등이 있긴 하나 주요작품들은 모두 피아노곡이다. 전기에는 그가 비르투오소였던 만큼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며,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형 피아노 작품들을 주로 작곡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기교와 스케일 보다는 소품들 위주로, 피아노의 깊은 표현력을 탐구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런 변화에는 은둔시절 성서와 탈무드를 읽으면서 깊은 내적 성찰을 하게 된 것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3]

후기 음악에서는 유대교 회당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선법과 후대 현대음악을 연상시키는 반음계에 의한 무조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후대의 카이코스루 소랍지가 즐겨 쓰던 기교인 톤 클러스터(Tone Cluster)의 초기 형태도 엿보인다. 톤 클러스터 같은 경우는 메이저 에튀드 7번과 Op.55 Une fusee (로켓) 등에서도 적절히 사용됐다.

구노나 리스트처럼 당대에 발명된 페달 피아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페달 피아노는 피아노에 파이프 오르간의 다리건반같은 것을 단 피아노인데, 알캉은 생전에 대중들앞에서 페달 피아노를 시연해보이기도 했다. 유언으로 자신의 유산에서 800프랑씩을 기부해 페달 피아노를 위한 콩쿨 개최를 부탁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페달 피아노는 거의 잊혀진 악기가 되어버렸다.

알캉 곡의 특징 중 또 하나를 꼽자면 화성 전개가 낭만파 시대인 당시로서도 꽤 실험적인 곡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쇼팽처럼 클래식답지 않고 보다 영화음악 같이 극적인 효과를 주는 화성이나 기교를 많이 활용했다.[4][5] 따라서 역시 비슷한 시기의 극악의 기교를 쓴 작곡가로 평가받는 아메데 메로보다 여러 연주자에게 굉장히 음악적이라 평가받고, 역시나 극악의 기교로 유명한 모리스 라벨 같이 공부하긴 좋으나 대중들이 듣기에 난해한 음악들보단 낭만파 음악 특성상 대중들도 더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장치들이 많이 보인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알캉 곡을 볼 때 댓글을 보면 멜로디나 음악 자체는 좋다는 평도 많다. 그래서 곡 자체에 이러한 편한 접근성 때문에 본격적으로 발굴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알캉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꽤 많다.

4. 평가

알캉은 당대에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는 서서히 잊혔다. 그 이유는 알캉이 쇼팽 사후에 은둔해버린 것에도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시도르 필립이 작성한 문서에서 알캉은 작곡가로서 유명했지만 그의 곡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 걸로 보아 당대에도 그의 주요 곡들에 대한 충분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자코모 마이어베어는 알캉을 '가장 놀라운 예술가' 라고 칭하며 피아니스트로서 추대했다.

로베르트 슈만은 그의 3개의 소품(Op.15)에 대해서 "내용없고 외적으로도 형편없는 작품"으로 평했다. 그러나 슈만은 열두 달 모음곡(Op.74) 중 12월 [오페라]에 대해, "작곡가가 악기의 희귀한 효과를 잘 이해하고 있고, 오페라 음악에 대한 더 나은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거의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후에 알캉을 "프랑스 낭만주의의 극치"라고 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대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 않았다. 이시도르 필립은 모든 피아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 교수 및 아마추어들이 알캉의 작품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유익하다고 평했다. 또한 '12개의 장조 연습곡(Op.35)', '12개의 단조 연습곡(Op.39)', '13개의 기도'(Op.64), '행진곡들', '스케치집(Op.63)', '가곡집들'을 명작이라고 평가했으며, 알캉의 편곡이 리스트의 편곡보다 더욱 오케스트라적이라고 평한 바도 있다. 세사르 프랑크의 경우, 알캉에 대해 역사상 가장 시적인 음악가라고 극찬했고 페루치오 부조니는 역대 최고의 음악가들의 반열에 들어갈만하다고 높게 평가했다.[6] 이는 그의 작품 중에 '바닷가 미친 여자의 노래'나 '이웃동네의 화재'와 같이 독특하면서도 내용적으로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는 곡들이 많고, 당시까지 자주 쓰이지 않았던 '톤 클러스터(Tone Cluster)'[7]와 같은 연주법을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쇼팽의 표준 전기 작가로 명성이 높은 프레데릭 닉스는 '쇼팽보다 못한 음악가, 인위적이고 예술성을 찾아볼수 없는 음악가'로 평했다. 이런 이유는 알캉이 의도한 악상을 표현하기 위한 테크닉에 있다. 특히 Op. 17 기사 에튀드, Op. 27 철도 에튀드, Op.39 12개의 단조 에튀드 등은, '미친듯한 스피드와 연타, 도약' 그리고 '웅장한 스케일의 표현을 위한 화성의 연속'이, 완벽히 치기 난해한 곡[8]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테크닉에 대한 평가를 고려하면 아마도 그 자신은 실제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이코스루 소랍지에게 알캉은 그의 영감의 핵심 원천이었는데, 소랍지는 알캉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교향곡과 협주곡의 영향을 받아 일부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악기를 위한 알캉의 "오케스트라" 작사에 감탄했으며 알캉의 비르투오소적인 스타일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또한 소랍지는 1979년, 알캉 소사이어티의 명예 부회장이 되며 일생 동안 알캉의 음악을 옹호했다.

1970년대 이후로 알캉의 음악은 재평가의 흐름을 맞고 있다. 90년대 이전에는 에곤 페트리, 존 오그돈, 레이먼드 루엔탈, 로널드 스미스 정도의 소수의 피아니스트들이 알캉의 곡을 연주하여 음반을 냈는가 하면, 90년대부터는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잭 기븐스 두 거장이 알캉의 작품을 앞다투어 녹음하고 실황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스테파니 맥칼럼, 빈센초 말템포, 모리시타 유이, 마크 바이너 등 여러 피아니스트들이 알캉의 작품들을 녹음했고 2012년 4월에는 아테네에서 Zimmerman-Alkan 국제음악협회 주체로 알캉 음악을 연주회는 콩쿨이 개최되기도 했다.[9] 2013년에는 알캉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빈첸초 말템포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12개의 단조 연습곡 전곡을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나 리듬스타를 해본 사람이라면 악랄한 난이도로 이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10]

5. 작품 목록

알캉의 에튀드에 대해서는 이들만 따로 모아 서술한 항목이 존재하므로, 샤를발랑탱 알캉/에튀드 항목을 참고할 것.

5.1. 작품 번호가 붙은 곡

5.2. 작품 번호가 붙지 않은 곡



[1] 다른 한 장은 우산을 잡은 채 뒤돌아 선 모습이다. #[2] 참고로, 다니엘 슈타이벨트는 1800년에 베토벤과의 피아노 배틀에서 패한 인물이다.[3] Op.63 에스키스들이 대표적 작품이다.[4] 일례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마이너 에튀드 중 한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서 말 그대로 피아노 한 대로 마치 관현악 파트를 모두 다 살린 것 같은 실험적인 시도들이 보인다.[5] 이러한 화성이나 기교들은 사실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부터 나타나는 특징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완전히 극적인 시도를 한 것은 이즈음 리스트나 알캉 같은 성향의 작곡가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6] 베토벤 이후 피아노 작곡가 다섯명을 꼽는데 쇼팽, 리스트, 슈만, 브람스 그리고 알캉이 들어갔다.[7] 곡의 표현을 위해 서로 반음 차이가 나는 음들을 한꺼번에 연주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피아노에서 적용되는 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알캉은 상술했듯 '이웃동네의 화재(Op. 35, No. 7)'나 '로켓(Op. 55)' 등의 작품에서 사용했다. 후대에는 레오 오른스타인(Leo Ornstein), 헨리 코웰(Henry Cowell, 새로운 톤 클러스터 기보법 창시)과 같은 현대음악가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특히 1920년대 이후 버르토크 벨러에 의해 톤 클러스터가 주목을 받았다. 검은 악보의 클리셰인 마지막 부분 올프레스도 어찌 보면 톤 클러스터의 일종이다.[8] 그런데 유튜브에 보면 인템포 또는 그 이상으로 연주하는 괴물들이 간혹 있다.[9] 이는 현대의 연주자들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어 알캉의 어려운 곡들도 관심받게 됐기 때문이다.[10] 하필이면 Op. 17, Op. 27, Op. 35 No. 5, Op. 39 No. 10/12와 같이 빠르고 어려운 곡들만 수록한 까닭에 연주하기 극히 어려운 곡만 쓴 작곡가라는 편견이 생기는 역효과가 있기도 했다. 아래 작품들 중에는 상기 곡들보다는 연주하기 쉬우면서 음악성이 풍부한 곡들도 많다.[11] 피아노 5중주를 위한 곡이다. 실제 연주[실전] [13] 보통 세 곡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아래 Op.13 No.2의 실내악 버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 3번은 실전됐기 때문에 보통 나머지 2개만 취급한다. IMSLP에서는 피아노 파트보만 존재하며, 총보는 알캉 협회에서 구매를 요청할 수 있다.[14] 어쩌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는 알캉의 (엄밀한 의미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1994년 Hyperion Records에서 발매된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의 협주곡 음반에서 최초로 녹음됐다. 여담으로 이 음반이 아믈랭이 Hyperion Records에서 발매한 첫 음반으로, 이 이후부터는 이곳에서만 음반을 발매한다.[15] 이것이 위 주석에서 언급한 협주곡 제3번(?)의 원전이다. Hugh Macdonald가 이 곡을 베이스로 재복원해 냈다고 한다.[16] 악보 상에는 처음부터 화음 아르페지오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 전에 연주되는 미출판된 서주가 존재한다. 1997년 알캉 협회에서 올린 글에 알캉 자신의 자필악보가 첨부되어 있는데 IMSLP에서 조금 더 현대적이고 깔끔한 악보를 얻을 수 있다. Mark Viner가 2016년에 서주를 붙여 연주한 바 있다.[17] 비창 문서에도 보다시피 pathétique이라는 단어는 비창보다는 비장(悲壯)과 가깝다.[18] Op.39 No.1의 Comme Le Vent와는 다른 곡으로, 반음계로 바람을 나타낸 암울한 분위기의 곡이다.[19] Morte는 '죽음'의 뜻만 드러나는 여성명사로, 여성관사 "la"를 붙여야 하는 등의 문법적인 기능만 할 뿐이지 여자가 죽었다고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어에는 문법적 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0] 그레고리오 성가 Dies Irae의 선율이 인용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Aime-moi의 선율이 갑자기 삽입되어 마치 죽어가는 중 사랑을 나누던(?) 당시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효과를 선보인다.[21] 특유의 무지막지한 난이도 때문에 6분 중반에서 7분 언저리의 연주가 대다수이나, 자동피아노 나나사코프가 인체 구조상 인간이 달성하기 매우 어려운 템포로 연주한 녹음은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 트랙 길이가 5분 51초인 나나사코프 연주의 템포는 점2분음표=120 내외로 보는 것이 적당한데, 그 정도로 8분음표 옥타브를 연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22]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순례연보 제2년 보유편: 베네치아와 나폴리(S. 162)" 중 3번 '타란텔라'의 중반부에 수록된 곡조와 같다.[23] 네 손을 위한 곡이다.[24] 볼로도스와 유사한 그만의 스타일로 Igor Roma가 편곡한 연주 영상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바 있다.[25] 8번의 제목이 《바닷가 미친 여자의 노래》라는 특이한 이름과 악상으로 유명하다.[26] 1번부터 3번까지는 5박자, 4번은 7박자라는 특이한 박자를 지니고 있다.[27] 알캉의 곡들 중에서 최상위권 난이도를 자랑한다고 소문난 곡이며, 모리시타 유이의 연주 이전에는 이렇게 빠르고 정확한 연주가 없었다. 알캉 연주자 1세대에 속하는 로널드 스미스 또한 이 곡이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다고 한다.[28] 바스크어로 Zortziko라고 쓰며,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에서 유래한 5박자의 춤이다. 이 때문에 중간에 5/4로 박자가 바뀐다.[29] 초반의 음형 때문인지, 프리드리히 부르크뮐러의 25개 연습곡(Op. 100) 중 2번 '아라베스크'를 연상시킨다.[30] 작곡된 지 160년 동안 악보만 존재했고 제대로 된 연주 영상 자체가 없었다. 유튜브 시각으로 2019년 7월 28일이 돼서야 전체 MIDI 영상이 처음으로 업로드됐고 같은 해 11월 30일 NWC 연주 영상도 업로드됐으며(섬네일의 도라에몽은 전반적인 곡의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2022년 12월 드디어 실제 연주 영상이 올라왔다.[31] 대표적인 페달 피아노를 위한 곡. 페달 피아노가 없다면 피아노 2중주로 대신해도 무방하기는 하다.[32] 상술한 '시대를 앞서 톤 클러스터를 이용한 곡'이다. 비록 후반부 4번에 불과하지만, 50-60년 뒤에야 자주 쓰인 기법을 19세기 중반에 소개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33] Op.60이 부여된 곡은 두 개가 있는데 야상곡 4번은 그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34] 4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곡으로, 소나티네 치고는 상당히 길고 어렵다. 대중들이 모차르트의 KV.545가 소나타로 분류되어 있어도 쉽고 짧은 탓에 이 곡을 소나티네 취급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위 Op. 33이 대소나타인 탓으로 보인다.[35] 사실 49개가 수록되어있다.[36] 이 중 6번인 뱃노래(Barcarolle)는 이 곡집뿐만 아니라 알캉의 모든 뱃노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37] 원래는 1, 4, 5, 7, 8, 12번이 Op.8과 Op.16으로 출판됐다가 후에 12곡 전곡이 Op.74를 달고 출판됐다.[38] 작품번호 70번대 치고는 알캉의 초기 기교가 많이 드러나 매우 어려운데, 1839년에 작품번호 없이 출판됐다가, 1870년대 출판된 Op.75 이후, 다시 작품번호가 붙어서 출판된 사례다. 쇼팽 사후 출판된 Op.66, Op.69, Op.72 등과 비슷한 사례이다.[39] 1840년에 작곡됐으며, 푸가 두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1번의 경우 시대를 앞서나간 불협화음이 두드러진다.[40] 아래 수록된 곡들이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되어 있다.[41] '종달새'라는 부제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