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즉위 이전
현 북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에서 동남쪽 20여 km 떨어진 지방 도시 타우레시움(Tauresium) 출신의 일리리아/트라키아계 집안에서, 비길라티나, 사바티우스 부부의 아들로 482년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였고, 7살 밑으로 여동생 비길란티아(490년생)가 있었다. 여동생 비길란티아는 후일 둘키시무스(둘키디오)와 결혼해 세 아이를 뒀는데, 그중 첫째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유스티누스 2세다.어느 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근위대 장교로 있던 외삼촌 유스티누스가 본인과 아내 사이에 자식이 없어 가문을 이을 사람이 없다고 하여, 양자로 보내지면서 운명이 바뀐다. 외삼촌 유스티누스 1세는 아내 에우페미아와 결혼기간이 상당함에도 자녀가 없어, 근위대 장교가 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 자리를 받아 귀족 반열이 된 이후 대개의 무자녀 로마 귀족들처럼 가장 가까운 혈연을 양자로 데리고 왔다. 이때 그는 아내와 자신의 아들로 점찍고 사람을 보내 데리고 오게 한 소년이, 여동생의 아들, 즉 외조카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였다. 외삼촌 유스티누스는 여동생 부부에게 사정을 말하고, 어린 조카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러,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을 주고 본인과 에우페미아의 양자로 정식 입적해 아들이자 가문 후계자로 키웠다.
외삼촌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을 거쳐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근위대장이 되는 동안, 수도로 간 유스티니아누스는 역사, 법학, 철학 등을 배우고 기독교 신학까지 섭렵해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다가 518년 고령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근위대장인 유스티누스가 황제로 옹립된다. 이때 유스티누스는 자신의 학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양자이자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황제가 된 자신을 보좌케 했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는 518년 7월부터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가 이룬 업적으로는 아카키오스 분열 종식, 귀천상혼 금지법 폐지 등이 있다. 그 공으로 521년 집정관 겸 군사령관으로 재직해 공식 직책상으로도 2인자가 된다. 그리고 525년, 앞서 폐지된 귀천상혼 금지법 폐지 덕에 서커스 단원 출신 테오도라와 혼인한다.[1] 그리고 2년 후 유스티누스 1세가 사망하자 단독 황제로 즉위한다.
2. 치세
치세 초기의 솔리두스 금화 |
2.1. 로마법 대전 편찬
자세한 내용은 로마법 대전 문서 참고하십시오.법학에 관심이 많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한세기 이전에 편찬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대신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1200년 분량의 판례를 집대성한 법전을 편찬한다. 이 작업의 책임자로는 트리보니아누스(Tribonianus)란 사람이 임명된다. 법전의 초안은 529년 4월 7일에 공개되었고, 고토 수복 전쟁이 한창이던 534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편찬된 로마법 대전[2]은 7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이 사산 제국과 이슬람 제국 및 슬라브족, 불가르족 침공 등의 혼란을 겪으며 후대의 실정에 맞게 에클로가 등의 법령집이 발간되기도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이 중흥기에 들어선 9세기에는 바실리카 법전이 편찬되었지만 여전히 그 핵심은 변하지 않아 유럽, 더 나아가 세계의 법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2.2. 이베리아 전쟁 (vs 이란)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였던 524/525년경, 사산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인 이베리아[3]의 주민들에게 조로아스터교로 강제 개종을 명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 측은 같은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묵인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동로마 측을 자극하기 싫었던 사산 왕조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동로마 측에 한 세기 전의 선례[4]를 들어 자신의 아들 호스로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찬성 의사를 보였으나, 대신이었던 프로쿨루스가 반대하는 등 여론이 나쁘게 흐르자 거부 의사를 나타내어 결국은 양국 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다만, 유스티누스 1세가 재위하는 527년까지는 양 제국 간의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다.당시 중근동 세계를 주름잡던 두 제국 간의 격돌은 530년 이전까지는 대리전의 성격으로 치러졌다. 525년, 동로마 제국의 홍해 함대는 에티오피아의 친로마 동맹국인 악숨 왕국의 군대를 바브 알 만다브 해협의 건너편 아라비아로 이동시켰다. 악숨 군대는 현재 예멘 일대에 있던 사산 제국의 동맹국인 히미야르 왕국을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반격으로, 525/526년에 친이란 부족국가인 라흠 왕국[5]군이 동로마 제국의 국경 일대[6]를 습격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 직후인 527년까지 이베리아인들의 반 이란 봉기는 진압되었고, 반란을 이끌던 이베리아의 전임 군주 고르제누스는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에 동로마군은 페르시아 측의 니시비스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당하였다. 게다가 시리아 동부의 요새인 탄누리스에 파견된 로마 측의 지원군마저 차단되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의 경호원으로 두각을 드러내었던 벨리사리우스를 동방 군단의 사령관[7]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528년, 이란군이 이베리아를 넘어 라지카 해안까지 공격해 오자, 벨리사리우스는 가산 왕국군과 연합하여 탄누리스로 출정, 그곳을 요새화하는 일꾼들을 보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의 대군은 동로마 측의 방어선을 돌파해냈고, 요새는 폐허가 되었다. 그 결과 로마 측 지휘관 2명이 전사, 3명이 페르시아 측에 포로가 되었고, 가산 왕국의 군주였던 자발라흐 4세[8]도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거대 요새인 다라로 후퇴하였는데, 행군 중에 수백여 명이 기갈로 죽었다고 한다. 한편, 승리한 페르시아 측도 많은 병력을 잃어서 후퇴하였는데, 전사자 중에는 근위대인 불사 부대 5백여 명도 포함되어 사령관 크세르크세스는 샤한샤 카바드 1세에게 문책을 들었다고 한다.(탄누리스 전투, 페르시아 측의 피로스의 승리.)
529년, 사산 제국의 속국인 라흠 왕국이 시리아 동부를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들의 라이벌인 가산 왕국의 중앙집권화를 돕는 한편, 동방 군단을 재편성하여 아르메니아 방면으로는 시타스,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는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였다. 그 사이에 동로마 제국 수뇌부는 페르시아 측에 평화 협상을 제안하며 재정비된 군대가 전선으로 이동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2.2.1. 다라 전투와 평화 조약
자세한 내용은 다라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530년, 다라 요새에 집결한 벨리사리우스의 병력 2만 5천은 참호를 파고 5만의 이란 군대와 대치하였다. 수적 우세와 벨리사리우스의 기만 전술에 속은 이란군은 동로마 제국 측 매복조의 역습에 흔들렸다. 그리고 이미 깊숙히 들어온 이란 군대는 로마 궁병대의 화살 세례를 받았고, 결국 기병대와 보병대를 분리하여 각개격파하는 벨리사리우스의 전술에 말려들어 사령관 중 한 명인 바레스마나스를 포함한 8천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다라 전투)
같은 시기, 현재 조지아 일대를 점령한 이란 군대는 로마령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점령하고 로마의 군단 기지였던 사탈라를 포위하였다. 그곳의 사령관 시타스는 군대 대부분을 성 안에 두고 자신은 성 밖 언덕에 주둔하였는데, 먼지를 피워 대군으로 위장하였다. 이에 페르시아의 대군이 언덕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후방을 성 안에 있던 동로마 군대가 공격하여 그들을 포위하였다. 그러한 역경에도 이란 군대는 잘 버텨내었으나 플로렌티우스라는 로마 장교가 분견대를 이끌고 돌진하여 페르시아의 대장기를 뺏었다. 비록 그는 곧 전사하였지만, 군기를 상실한 이란 군대는 퇴각하였고, 압도적인 적군에게 승리를 거둔 동로마 측도 추격하지 않았다.(사탈라 전투)
이 전투로 사산 제국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였고, 오히려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의 몇몇 부락은 동로마 측에 붙어 국경이 동로마에 더 유리하게 바뀌게 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다라 전투에 못지 않은 쾌거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고 시타스 본인의 인지도가 떨어져서 묻히는 경향이 있다. 한편, 사탈라 전투 이후로 양국 간의 휴전 협상이 논의되었는데, 이어진 칼리니쿰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이 승리하며 무산되었다.
다라 전투의 패배에도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포기하지 않고 2만여의 군대를 안티오키아 방면으로 보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들 앞에 나타났고, 그러자 페르시아 군대는 철수하였다. 동로마군은 이를 추격했는데, 현재 시리아의 라카인 칼리니쿰에서 따라잡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원래 페르시아 군대를 국경 밖으로만 쫓아내려 하였으나, 다라 전투를 기억하는 병사들은 전투를 요구하였고, 통제에 실패한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전투를 하게 되었다.[9] 531년 4월, 양 진영 간 팽팽한 전투가 벌어지던 중, 페르시아 측의 사령관 아자레테스는 벨리사리우스의 눈에 띄지 않게 중앙의 병력 중 다수를 몰래 좌익으로 이동시켰고, 라흠 왕국 출신 아랍 기병대의 돌격과 함께 진격하여 동맹국 군대로 구성되어 있던 로마 측의 우익을 무너뜨렸다.[10] 좌익이 견디며 시간을 버는 동안 동로마군 대부분은 퇴각에 철수하였지만, 우익과 중앙의 사령관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선박으로 잔존 병력을 후퇴시켰다. 다만 페르시아 측의 피해도 상당한 편이어서, 그들 역시 시리아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11]
칼리니쿰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사령관 직에서 해임당했으나, 군대 운용 능력을 눈여겨 본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에게 재정복 원정을 맡기게 된다. 531년 9월에 카바드 1세가 죽었고, 고토 수복 원정을 준비하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새로 샤한샤로 즉위한 호스로 1세와의 협상을 지속하여 결국 532년 9월에 '영원한 평화 조약(ἀπέραντος εἰρήνη)'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의 내용은 페르시아 측이 라지카에서 철수 하는 등 국경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고, 동로마 측은 일시불로 110 센테나리아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로마 측으로 피신온 이베리아인들의 거취는 그들 자율에 맡기며(로마에 남든지 페르시아령 이베리아로 돌아오든지), 로마로 귀순한 아르메니아의 부족들도 거취를 자율에 맡긴다.
다라 전투에서 나타난 벨리사리우스의 전략과 무용담의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2.3. 5대 총대교구 설정
라틴어로는 Pentarchia, 그리스어로는 Πενταρχία, 영어로는 Pentarchy라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처음으로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주교들만을 찝어서 '총대주교'(Patriarchs)라고 부르며 교회 위계상 다른 모든 주교들의 위에 놓았다고 한다.[12] 5곳의 순서도 언급한 것과 같다. 그리고 Pentarchia라는 표현이 법적으로 처음 쓰인 것은 신칙법(Novellae)의 131권에서라고 한다.[13]당시 5대 총대교구의 각 영역은 아래 지도와 같다.
로마 총대교구는 구 서로마 제국 전체에 동로마 제국의 다키아 관구[14] 및 마케도니아 관구[15]에 이르는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다. 고대 로마 후기의 15개 관구 기준으로, 이 시대 지도에 대입하면 14개 기준으로(호노리우스 시절 410년에 자진해서 철수했어서 그런지, 브리타니아가 아예 빠져 있다.) 9개의 관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 주교가 주교 서열상 1위라 면적이 가장 넓었을 수도 있으며, 한편 구 서로마 지역이 5세기의 혼란기 이전에도 인구밀도가 동로마보다 다소 낮았는데 5·6세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더 줄었기 때문에 겉보기에 면적은 넓지만 관리해야 할 주교와 신자 수가 적었던 것일 수도 있다. 눈여겨보이는 점은 당시 제국 밖의 구 서로마 영역에 자리잡은 외국인 프랑크, 서고트, 무어-로마 왕국에도 마치 서로마 멸망 전과 같이 교구를 설정했다는 점이다. 제국이 명목상으로나마 기독교 세계 전체의 종주국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정교회를 통상 그리스 정교회라고 하지만 740년에 레온 3세가 로마 교황과의 충돌에 대한 보복조치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 소속으로 옮기기 전까지 재미있게도 현대 그리스의 대부분은 로마 총대교구에 속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는 트라키아, 아시아나, 폰토스 3개의 관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행정구역상 동방 관구는 팔레스타인 주변의 예루살렘 총대교구와 그 밖의 안티오키아 총대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교구는 키레나이카를 포함한 이집트 관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2.4. 니카의 난 진압과 전제군주화
사산 제국과의 평화 협상이 한창이던 532년의 새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삼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전차 경기가 열리던 동로마 제국의 히포드롬은 고대 로마의 포룸이나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내세울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장소를 장악한 청색당, 녹색당의 두 당파는 현대와 비교하면 정당과도 같은 존재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전자인 청색당은 칼케돈파, 즉 정통 교리를 따르며 대토지를 소유하였던 고위 귀족들의 비호를 받던 보수 세력[16]이었고 후자인 녹색당은 단성론을 따르며 상공업계와 궁정관료들의 지지를 받던 세력[17]이었다.
보통의 경우, 양 당 중 한 당이 정부의 비호를 받고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 당은 반정부적인 기류를 형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당이 공동 전선을 펴는 경우도 있었는데, 중앙권력의 전제적인 지배가 나타나려 할 때 양 당은 손을 잡고 정부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도 했다. 양 당은 모두 자유 시민의 전통을 이어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가 재위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지지를 받던 녹색당 대신 청색당을 비호하던 인물이었고, 청색당은 그런 황제에게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르게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와 함께 양 당 모두를 강력하게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양 당은 강력한 형사적 처벌 조치와 탄압을 받았고, 이는 양 당의 불만을 동시에 촉발시키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으로 대표되는 대사업은 필연적으로 제국의 시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역에서 황제에 대한 반발심이 들끓고 있었다. 양 당은 서로 연대하여 황제의 절대권력에 대항할 것을 선포했다. 여기에는 전제적이고 귀족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던 황제를 싫어하는 유력 원로원 의원들의 책동도 있었다. 이 원로원 의원들은 자기네들 중에서 새 황제를 세우고 싶어했다.[18]
532년 1월, 양 당은 자신들의 근거지이자 정치적 의사를 전통적으로 표출해 온 히포드롬에 집결했고, 거대한 외침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자비로운 녹색당과 청색당이여, 부디 영속하라!
반란의 기세는 뜨거웠다. 제국의 수도는 화염에 휩싸였고, 양 당은 유스티니아누스의 폐위와 새 황제의 즉위를 선포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인 히파티우스[19]가 새 황제로 선포되는 지경에 이르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떠나 도망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로막은 것이 황후 테오도라였다. 그녀는 이때 '보라색 옷은 가장 좋은 수의'라고 말하며, 제위를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테오도라의 단호한 만류에 정신을 다잡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란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주어진 두 칼이 있었다. 바로 제국 제일의 명장 자리를 놓고 겨룰 수 있던 장수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있었던 것이다.
우선 나르세스가 노회한 책략가다운 면모를 확실히 발휘했다. 나르세스는 반란 세력의 연대를 해체하는 게 선결과제라고 보았고, 청색당의 지도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의 공동통치기에 청색당에 베풀어진 은혜를 상기시킨 나르세스는 청색당의 지도부와 담판을 짓는 데 성공했고, 강력한 연대를 이루고 있던 두 당은 결국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점에 제국 최고의 용장이자 전술가라고 할 수 있을 벨리사리우스가 나섰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던 병력들을 지휘하여 반란의 진원지였던 히포드롬으로 진격했다. 공격은 신속하고 기습적이었다. 허를 찔린 봉기자들은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감당하지 못했고, 전해지기로는 약 3만 명이 이 공격에서 학살당했다. 배후의 원로원 의원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원로원 의사당을 황궁의 접견 홀로 용도변경했다.[20]
최종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유 시민의 전통을 확실히 꺾고,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반란의 와중에 불타오른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손에 의해 재건되었고,[21] 그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 했다고 전해진다. 절대적인 황제로 자리매김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2.5.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자세한 내용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39년에 이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20년간 지속된 숙업이다.
2.6.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문서 참고하십시오.2.7. 라지카 전쟁 (548 ~ 557년)
536년에 동로마 제국은 라지카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령관을 파견하였고, 그는 국왕 구바제 2세의 왕권을 제한하며 라지카의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던 무역 역시 자신의 허가 하에 두었다. 이에 라지카인들은 분노하였고, 결국 541년에 티오키아가 함락되자 반로마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실권을 잃은 구바제 2세는 호스로 1세에게 밀사를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란군이 출정하였고, 이로써 라지카 전쟁 (541 ~ 562년)이 발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토착민의 지지에 힘입어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주요 거점인 페트라마저 함락하며 라지카를 사산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후 호스로 1세는 태도를 바꾸어 이란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는 등 라지카에 대한 직접 지배를 하려 하였고, 열정적인 조로아스터교 포교 활동은 20여년간 기독교를 믿어왔던 라지카 인들의 분노를 유발하였다. 게다가 국왕 구바제 2세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일어나자, 라지카인들은 이번에는 반페르시아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구바제 2세는 동로마 제국과 알란인, 그리고 사비르인 등 북방 유목민에게도 구원을 요청하였다.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장군 다기스테우스 휘하의 7천의 동로마군과 1천의 콜키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548년 말, 다기스테우스는 우선 주요 항구 도시인 페트라를 포위하였는데, 호스로 1세도 이에 질세라 미흐로에 장군 휘하의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미흐로에는 라지카 동부 산악지대의 고갯길을 지키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페트라에 입성, 3천의 정예병을 뽑아 성을 지키게 하였고 5천의 군대로 반란을 일으킨 라지카 지역을 유린하게 지시한 후,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였다. 라지카 일대를 약탈하던 5천의 이란 군대는 549년, 파시스 강 전투에서 다기스테우스의 동로마군에 괴멸되었고 호리아네스가 이끈 이란 군대도 히피스 강 전투에서 호리아네스 본인이 전사하며 괴멸되었다. 550년 경에 콜키스의 동로마 주둔군 사령관은 이탈리아에서도 활약한 바 있는 베사스로 교체되었는데, 그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압하지야의 부족인 아바스기 부족이 일으킨 친페르시아 봉기를 진압하였고 페트라를 다시 포위하였다. 551년 봄, 6천의 사비르 족 동맹군의 도움을 얻은 로마군은 페트라를 함락시켰다. 소수의 이란 군대가 요새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베사스는 그곳에 불을 질러버렸다. 페트라의 상실에 충격을 받은 미흐로에가 아르메니아에서 복귀하여 라지카의 수도인 아르카에오폴리스 앞에서 동로마 군대와 회전을 치렀으나 대패하였고, 라지카 대부분은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551년)
다만 이란 군대는 여전히 라지카 동북부의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수도인 아르카에오폴리스를 굽어볼 수 있었다. 또한, 승리에 자만한 베사스는 군사 활동을 중지하였고 아예 폰토스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한편, 시간을 번 미흐로에는 그동안 군세를 재정비 하였고, 552년에 호스로 1세는 라지카에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미흐로에는 폰투스와 콜키스를 잇는 주요 도로의 요충지 몇 곳을 장악하여 동로마군의 교통을 방해하였다. 폰토스에서 편안한 은퇴 생활을 하던 베사스는 554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마르티누스, 유스티누스 등의 장군과 악화된 라지카 전선에 복귀하였다. 복수의 칼날을 갈던 미흐로에는 555년, 텔레피스 전투에서 라지카 - 동로마 연합군을 대패시키며 그들을 남부의 네소스로 몰아내는 쾌거를 올렸고 아르카에오폴리스 서편에 있는 위성도시인 오노구리스도 함락하였으나 아르카에오폴리스 자체의 함락은 실패하였다.
한편, 페르시아의 명장 미흐로에는 그 해에 병사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나코라간이 부임하였다. 555년 봄, 나코라간은 6만 대군을 이끌고 흑해안의 파시스를 포위하였고, 이에 동로마 제국 - 라지카 연합군은 수비 병력이 줄어들은 오노구리스 탈환에 나섰는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전황을 지켜보던 라지카의 군주 구바제 2세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어 장군들의 무능함을 고발했는데, 이에 베사스는 직위해제 됨과 동시에 재산이 몰수되어 압하지야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일개 속국의 왕이 제국의 사령관을 해직시켜 버린 것에 두려움과 분노를 느낀 장군 마르티누스와 루스티쿠스는 구바제 2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황제에게 구바제가 이란 진영과 내통하였다고 모함하였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직접 심문하고자 필요하다면 무력 사용을 허가하며, 체포할 것을 명하였다. 명분을 얻은 두 장군은 555년 가을, 구바제에게 포위된 페르시아 측 요새에 대한 공성전을 함께 지휘하자며 그를 초청하였고, 순진하게도 초청에 응한 구바제 2세는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되었다. 그가 막사로 접근하자 루스티쿠스의 동생 요한이 왕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었고, 고통스러워 하며 낙마한 그를 대기하고 있던 루스티쿠스의 하인들이 숨통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황제에게는 그가 체포에 반발하였다고 보고한 것은 예상되었던 수순. 이에 로마의 동맹군으로 종군하던 라지카 '인들은 종군을 거부하였고, 오노구리스 탈환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동로마군은 철수하였고, 이틈을 노린 나코라간의 이란 군대는 아르카에오폴리스에 입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라지카인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탄원서를 보내어 구바제 2세 암살 사건과 반역 혐의에 대한 진상규명 및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볼모로 있던 그의 동생 차트흐를 왕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 중 평이 자자한 아타나시우스를 수사 담당관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구바제 2세의 무고함을 확인하였다.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루스티쿠스와 그의 동생 요한은 처형되었고, 마르티누스는 그간의 공로 덕에 직위해제에 그쳤다. 라지카의 신임 국왕 차트흐 2세는 다시금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확고히 하였고, 라지카 인들도 연합 작전에 다시 종군하였다. 사건이 어느 정도 재규명되고 마무리된 556년, 동로마 - 라지카 연합군은 아르카에오폴리스를 탈환하였고, 포위되어 있던 파시스 구원에 나섰다.
555년 봄부터 개시된 파시스 포위전은, 나코라간이 이끈 6만의 이란 군대와 마르티누스, 유스티누스[22]가 지휘한 2만이 되지 않는 동로마 군대 사이의 공성전으로 전개되었다. 파시스는 목조 성채로서 화공에 취약하였지만 서쪽은 흑해, 동쪽과 북쪽은 파시스 강으로 보호받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나마 공격에 용이한 남쪽은 깊은 해자로 방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란 군대는 수일간의 노력으로 해자를 메우는 데에 성공하였고, 강에도 다리와 배를 띄워 삼면으로 도시를 포위하였다. 계속된 공격들은 결국 격퇴당하였지만 수비대의 사기는 매우 낮아져 있었는데, 이에 사령관 마르티누스가 꾀를 내어 사기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하인을 황제의 칙사로 변장시킨 다음, 병사들을 모아 지원군이 오고 있으며, 황제는 그들 모두에게 큰 포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연설하게 하였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결사대를 모집, 밤중에 요새를 빠져나가 근처의 성당에 은신하였고 다음 날 페르시아 군대가 파시스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할 시에 그들의 배후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작전에 양 진영은 모두 동로마 측이 지원군을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고, 나코라간은 철수를 결심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데일럼 지역 출신의 동맹군을 시간을 끌어줄 방패막이로 성 앞에 놓아두고 후퇴하려 하였는데, 동로마군은 그들을 분쇄하고 노도와 같이 이란 군대를 공격, 그들의 좌익을 무너뜨렸다. 페르시아인들은 반격을 하려 하였으나, 우익에 배치되었던 전투 코끼리 중 하나가 두려움에 등을 돌리면서 진영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란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패주하였다. 해가 지자, 하루 종일 이어진 전투에서 사산 제국은 1만명을 잃었고 로마군은 2백여 명의 희생만을 기록하였다. 한편, 로마인들은 이란 측의 공성 기계에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도시가 함락된 표식으로 오인한 페르시아의 운반병들이 밤중에 도시로 돌격하였다가 2천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가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556년 여름)
556년 가을, 동로마군은 동부 산악지대의 미시미아 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고 겨울까지 사산 제국군을 라지카 영내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한편, 겨울에 나코라간은 이베리아로 패주하였는데, 호스로 1세는 6만의 대군 중 반 이상을 상실한 그에 분노하여 책형을 내렸고, 그의 가죽은 경고의 뜻으로 전시되었다. 557년, 양대 제국 간의 협약이 체결되어 적대행위가 종결되었고, 이후 5년간 협상이 이어진 후, 562년에 다라에서 '50년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20여 년간 지속된 라지카 귀속 문제는 최종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사산 제국에게 연공으로 3만 노미스마타의 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처음 7년치는 일시불로 562년에 지급되었다. 그 대가로 동로마 제국의 라지카 영유가 확정되었고 라지카 북부 산간지방인 수아니아 지역에 대한 귀속 문제는 결정되지 못하였지만, 어찌되었건 이란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조로아스터교 국교화 정책으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한 박해는 80여 년 후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서 오히려 풀리게 된다.
하지만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후 즉위한 유스티누스 2세가 재정 적자 문제와 자존심을 내세우며 연공을 중지하였고, 그리하여 벌어진 572 ~ 591년간의 전쟁에서 동로마 제국은 패배를 거듭하며 다라를 상실하게 된다.
2.8. 말년의 황제와 자연재해
540년에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멘 이후 황제의 기력이 쇠하였고 극도로 의심이 많아졌다. 거기에 심적으로 의존하였고, 또 정치적인 부담을 나누던 황후 테오도라가 죽은 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성당 건축, 영토 확장, 법전 편찬에도 시민들의 지지도는 낮았다. 불필요한 곳에 예산만 축낸 황제라는, 또 페르시아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황제라는 인식이 퍼져 그가 병에 시달리다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환호하였다.그 외에도 551년의 레바논 대지진으로 베이루트에서만 3만여명이 희생되고 고대 도시 페트라가 버려지기도 하였다.
2.8.1. 쿠트리구르족의 습격과 연공 납부
549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국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고관들을 이끌고 칼케돈에 틀어박힌 교황 비질리오를 설득하러 간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대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은거한 영웅을 다시 전선에 복귀시킨 것은 바로 야만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위협이었다.라틴, 게르만 할 것 없이 전 유럽을 충격과 공포에 삐뜨렸던 훈족은 453년에 아틸라가 급사한 이후 와해되었다. 남은 훈족의 일부는 쿠트리구르와 우투르구르 족으로 나뉘어[23] 다뉴브 강 ~ 카스피해 북안까지 펼쳐진 스텝 지역에 잔존하였다.[24] 그들은 로마 측 사료에는 레오 1세 때부터 등장한다. 551년, 1만 2천의 쿠트리구르족은 아조프 해의 서쪽을 떠나 랑고바르드족과 싸우던 게피드 족을 지원하였다. 이후 둘은 동로마 제국을 침공, 트라키아 일대를 약탈하였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뇌물과 외교를 통해 형제 부족이었던 쿠트리구르와 우투르구르를 이간질시켜 싸우게 하는 전통적인 이이제이 전략을 씀으로서 이 두 훈족의 후예들을 끊임없이 싸우게 만들었다. 산딜릭의 우투르구르족은 쿠트리구르족을 격파하고 그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이후 쿠트리구르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2천여명의 남녀가 족장 신니온[25]의 인솔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허가 하에 트라키아 지방에 정착하였다.(558년 초) 하지만 새로 칸에 등극한 자베르간이 쿠트리구르 훈족에 그 예하 부족까지 합친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 제국을 침공한 것이다.
558년 겨울, 훈족의 후예이자 불가르족의 전신인 쿠트리구르 족의 칸 자베르간이 이끄는 튀르크 - 슬라브 혼성부대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넜다. 원인은 아바르족의 압박 혹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란 중 하나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전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키아의 동로마 방위선을 뚫고 병력을 삼분하여 진격하였다. 1로군은 테살리아를 약탈하며 테르모필레까지 진출하였고 2로군은 칼리오폴리스 일대를 약탈하였다. 그리고 559년 봄, 7천의 기병으로 구성된 자베르간의 본대는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넘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 30km 부근까지 도달하며 황제와 신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출정을 꺼리는 가운데 황제는 노장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호출하였다. 10년의 은퇴 생활 후 다시 지휘봉을 잡게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수도에는 불과 수백의 근위대 만이 있었다. 7천의 훈족 기병을 상대하게 된 벨리사리우스는 3백 명의 겁에 질린 군대를 이끌고 출전해야 했다. 쿠트리구르족은 멜렌티오스에 기지를 차렸고 벨리사리우스는 그보다 북쪽으로 수 km 떨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으로부터 30km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자베르간은 숙영지에 2천을 남기고 동로마군을 기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계획을 파악한 벨리사리우스는 매복을 통해 쿠트리구르족의 선봉 4백여 명을 전사시켰고,[26] 자베르간은 적장이 벨리사리우스라는 사실을 알자 곧 후퇴하였다. 이것이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마지막 활약이었다. (멜란티아스 전투, 559년)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쿠트리구르를 추격하려 하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를 저지하였다. 그들은 다뉴브 강 너머로 가기 전에 트라키아 일대를 다시 약탈하였다. 노황제는 벨리사리우스를 무시한 채 자신이 개선식을 거행하였고 쿠트리구르에게 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늙고 병든 황제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은 영토나 인구상으로나 당대 세계의 최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과 쿠트리구르족에게 연공을 납부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사산 왕조와 쿠트리구르 등 이민족들을 매수하여 평화를 샀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이후의 유스티누스 2세 치세인 572년에 연공 납부를 거절하자 이란과 다시 전쟁이 발발,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던 선택으로 보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후의 쿠트리구르 부족은 쇠퇴하고 신흥 유목 제국인 아바르 칸국에 의해 흡수되거나 추방당하게 된다. 568년, 아바르 칸국의 바얀 1세의 명령으로 남은 쿠트리구르족 1만명은 사바 강을 건너 동로마령 일리리아에 정착하였다. 남은 쿠트리구르도 튀르크 세력(불가르족)을 피해 아바르 측에 귀순하였다. (569년) 한편, 동쪽의 우투르구르는 스텝 지역에 잔존해 있다가 튀르크족에 흡수되었다.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시리아인' 미하일에 따르면 그들의 잔존 세력은 마우리키우스 황제(582 ~ 602년) 시절에 다키아로 귀순하였다고도 한다. 586년에 클로마론 요새에서 아바르족에 대항해 싸운 동로마 제국 장수 자베르간이 그와 동일 인물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2.8.2. 죽음
56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시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다만 세간에는 잠시나마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그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내뱉었으며 일부 귀족들은 제위 계승자인 유스티누스 2세 대신 벨리사리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 소식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귀에 들어갔고 대노한 황제는 모반자들을 체포, 고문하였는데 그들이 벨리사리우스도 모의를 알고 있어 연관이 있다고 실토, 결국 벨리사리우스를 체포하였다. 그는 이전까지의 공로를 감안하여 삭탈 관직과 불명예 제대되는 굴욕에 가까운 처벌을 받았다.이 내용은 중세시대에 의심많은 황제가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눈을 뽑아버리고 추방하여 거지로 살다가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와전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비판론자들이 이것을 진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래 처럼 거지몰골이 된 벨리사리우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8개월 후, 벨리사리우스의 무혐의가 밝혀져 빼앗겼던 명예와 관직도 모두 복권되었지만, 이미 그는 지쳐버렸다. 은둔의 세월이 흐른 후 565년 3월, 명장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8개월이 흐른 11월 14일, 로마 제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향년 83세로, 40대에 즉위했는데도 38년이나 재위했을 정도로 장수한 군주이다.
[1] 말이 서커스 단원이지 사실은 그녀의 어머니와 같은 술집 무희였고 스트립쇼에 가끔 매춘까지 하는 천민 출신이었으나, 그 미모와 총명함이 굉장했다.[2] '로마법 대전'이라는 명칭은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붙인 것이 아니고, 후대의 법학자인 디오뉘시우스 고토프레두스(Dionysius Gothofredus)가 '교회법대전'(Corpus Iuris Canonici)의 명칭을 모방하여 붙인 것이다.[3] 흔히 알려진 스페인 일대가 아니라 캅카스에 위치한 국가인 조지아 동부 일대의 고대 지명이다. 현재 조지아의 동부 일대. 서부 해안 일대는 콜키스(현재 압하지아 등지)라고 부른다.(라틴어 명은 라지카) 두 지역 모두 기독교를 믿었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의 일관된 보호령이었던 콜키스 (라지카)와는 달리 이베리아는 로마와 이란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오다가 결국 523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이란의 직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4] 408년경, 당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아르카디우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테오도시우스의 후견인으로 당시 사산 제국의 황제였던 야즈데게르드 1세를 지목하였다. 그 결정에 놀란 야즈데게르드는 그 약속을 지켜 자신의 치세 (399 ~ 421년) 동안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로마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게 호평을 받았다.[5] 이라크 서부에 위치했던 아랍계 기독교 국가.(300년경 ~ 633년) 이란의 속국이었다.[6] 현재 요르단, 시리아 동부 일대[7] 정확히 말하면 대규모 요새인 다라의 방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실상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정식으로는 530년에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8] 자블라흐 4세 이븐 알 하리스 (جبلة بن الحارث, 재위 518 ~ 528년). 아부 샴마르 (أبو شمر), 가발라스 (Γαβαλᾶς)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9] 명장인데도 부하 통제를 잘 못했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정 시기의 명장 루쿨루스와 비교되기도 한다.[10] 마침 바람의 방향도 로마 진영을 향해 불어와 페르시아 측에 유리하였다.[11] 승장 아자레테스는 병력의 큰 손실 때문에 카바드 1세에 의해 해임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직위 해제 당하며 불명예 제대까지 당했다.[12] 영어 위키백과 Pentarchy 중, 'Justinian was the first to use (in 531) the title of "patriarch" to designate exclusively the bishops of Rome, Constantinople, Alexandria, Antioch, and Jerusalem, setting the bishops of these five sees on a level superior to that of metropolitans.'[13] 영어 위키백과 Pentarchy 중, 'The pentarchy was first legally expressed in the legislation of Emperor Justinian I, particularly in Novella 131.'[14] Serdica, 즉 現 불가리아 소피아 주변[15] 다키아 관구 이남의 그리스, 알바니아 지역.[16] 고대 로마(제국 전체로는 서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의 정당이었다.[17] 오리엔트(시리아, 이집트) 일대에서 상업을 통해 세력을 키운 신흥 세력[18] 'Lars Brownworth'라는 미국의 교사 출신 역사 저술가의 블로그에는 'In 532 they participated in the Nika Riots hoping to replace Justinian with one of their own members.'라는 대목이 있다.[19] 진압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를 살려두고자 했지만 테오도라 황후가 죽이라고 촉구해서 결국 죽였다고 한다.[20] 마찬가지로 위의 각주의 블로그에 'Justinian repaid them by confiscating the Senate House and turning it into a reception hall for the Great Palace.'라는 대목이 있다.[21] 532년 2월 23일에 시작된 재건 공사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현 터키의 아이딘)의 안테미우스의 지휘로 537년 12월 27일에 축성식이 거행되며 완공되었다.[22]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촌이자 카르타고의 군단병 반란을 진압한 게르마누스의 아들.[23]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키메르인의 부족장이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는데 두 아들이 세력을 양분하며 그들의 이름을 딴 두 부족이 형성된 것 이라고 한다. 우투르구르 족의 수장 산딜릭의 말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우리 형제의 부족(쿠트리구르)을 절멸시키는 것은 공정하지도, 옳지도 않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언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며 같은 의복과 생활방식을 갖춘다. 비록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활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친척이다.'[24] 크림 반도를 경계로 서쪽의 돈 강과 몰다비아 일대는 쿠트리구르, 동쪽 볼가 강 일대는 우투르구르 족의 영역. 여담으로 동로마 제국 역사가들은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을 13개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그들 외에도 오노구르, 위구르, 사비르, 불가르, 에프탈 등이 있었다.[25] 대표적인 친로마 파였던 그는 반달 전쟁의 아드 데키움 전투 (533년)에서 600명의 마사게타이/훈족 궁기병대를 이끌고 동로마군에서 활약하였다.[26] 역사가 아가티우스에 의하면 벨리사리우스는 근처의 농민들에게 부탁하여 나무를 때려 숲에 먼지를 일으키게 하였다. 따라서 쿠트리구르 족에게 동로마군의 수를 부풀리게 하였다. 근처를 지나던 훈족이 먼지를 보고 동요하는 사이에 습격하여 4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