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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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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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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후작
<colcolor=#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의양군 | 義陽君
파일:이재각.jpg
봉호 <colbgcolor=#fff,#191919>의양군(義陽君)
성명 이재각(李載覺)[1]
윤명(允明)
출생 1874년 4월 4일
한성부 계동 은전궁
사망 1935년 5월 11일 (향년 61세)
경기도 경성부 자택
비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대한제국기 활동2.2. 일제강점기의 행적
3. 여담4.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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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관료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도세자의 서3남 은전군의 양증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손자로 아버지는 완평군이다.

2. 생애

파일:2017-12-08 06-27-12.jpg
<colbgcolor=#29176e> 전통 관복을 입은 의양군 이재각
1874년(고종 11년) 한성부 계동 은전궁에서 완평군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항렬로는 조선 헌종, 고종의 동생 뻘이나, 나이는 조카 뻘인 순종과 동갑이었다.

1891년(고종 28년) 당시로서도 꽤 이른 나이였던 18세에 증광시[2]에서 진사에 급제하고, 1년 뒤 문과별시[3]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좌비서랑[4]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10월 명성황후의 장례를 책임질 종척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아관파천 당시 물밑에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을 도왔다.

2.1. 대한제국기 활동

다른 종친들보다 나이가 비교적 어려서 그런지 조선국 시절보다는 대한제국 시기에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898년(광무 2년)에는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전작례[5]와 작헌례[6] 때 축문을 읽어 을 받았고 1899년(광무 3년) 8월, 시강원 부첨사[7] 역임 중에는 일본황족이 한국을 방문할 때 맞이했다.

1899년(광무 3년) 9월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장조로 추존받았다. 황제의 4대손은 황족의 지위를 받는다는 예에 따라 의양도정(義陽都正)에 봉해졌다가 2달 뒤 다시 의양군(義陽君)으로 승격했다. 11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해 이 후에도 여러 번 맡는다. 1901년(광무 5년)에는 3월 명헌태후[8]궁 대부에 임용되어 칙임관에 4등에 서임한다. 이는 훗날 1등까지 올라간다.
파일:1495447593915.jpg
<colbgcolor=#29176e> 에드워드 7세 즉위식에 간 한국 사절단. 앞 줄 가운데 사람이 의양군 이재각.
또한 한국 황족 최초로 유럽에 간 기록을 세웠다. 1902년 영국에드워드 7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특명 영국 대사에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영국 런던을 방문하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거쳤던 것이다.

이 때 영국 왕실의 배려로 한국인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했다. 다들 거대하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은 어찌나 놀랐던지 기념 시까지 남기기도 했다.[9] 1903년(광무 7년) 1월에는 전선사 제조[10]를 겸임하였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는 훈 1등에 서훈되어 태극장을 하사받았으며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거쳐 최종적으로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까지 수여받는다. 같은 해 9월에는 군부에서 포를 다루는 부서의 국장을 지냈다.

1905년(광무 9년) 2월에는 종정원경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 특파 대사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5월에는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했고 7월에는 이 무렵 세워진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후임은 의친왕 이강이었고 1907년(광무 11년) 4월에 다시 의양군이 맡았다.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년(융희 3년) 7월에 일본이 대한적십자사를 강제로 폐지하면서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파일:Sunjong_&_Yoshihito_in_Korea_1907.jpg
<colbgcolor=#29176e> 뒷 줄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완순군|{{{#ffd800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 이준용.
앞 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ffd800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황제 이척}}}]], [[다이쇼 덴노|{{{#ffd800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ffd800 의민태자 이은}}}]].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
<colbgcolor=#29176e> [[1909년|{{{#ffd800 1909년}}}]]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이 순행에서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ffd800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은 순종. 오른쪽으로 의양군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 순종의 뒤는 이병무, 윤덕영. 순종의 왼쪽으로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
이후 육군 참장(陸軍參將)과 민간 단체인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회장을 맡았으며 1908년(융희 2년)에는 계산학교 교장 직을 역임했다. 1909년(융희 3년) 1월에 순종대구, 부산, 마산 등을 시찰할 때 옆에서 모셨다. 1910년(융희 4년) 8월에 종1품에 가자되었으나 얼마 뒤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그도 황족의 지위를 잃는다.

2.2. 일제강점기의 행적

파일:2017-12-08 06-26-49.jpg
<colbgcolor=#29176e>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전부 [[친일인명사전|{{{#ffd800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다.
이후 이재각은 다른 왕족들처럼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는다.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후작(侯爵) 작위와 은사 공채 16만 8천원을 받았으며 일본은 이재각에게 특별히 일본군 육군 소장 대우를 하여 제복과 호위 무관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후에 다른 왕족들처럼 이왕가(李王家) 내의 많은 행사들[11]에 참여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는데 말년에는 도박으로 재산을 거의 다 잃고 가난하게 보냈다. 그러다 1935년 5월 11일 경성부 자택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3. 여담

파일:진주 뒤벼리 입구 안내판.jpg}}} ||
<colbgcolor=#29176e> 진주 뒤벼리 암벽 앞에 있는, 이재각, 이재현, 성기운이 친일파임을 알리는 안내판
파일:2017-12-08 06-45-43.jpg}}} ||
<colbgcolor=#29176e> 이재각 별장에서 일어난 사고를 다룬
1923년 5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4. 후손

군부인 유씨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50살이라는 지금으로써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이름을 모르는 후처 사이에서 아들 이덕용(李德鎔) 하나만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덕용 문서 참조.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그의 후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이덕용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1]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 청안군은 '재순(載)'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 완순군은 '재완(載)', 완영군은 '재긍(載)', 흥친왕은 '재면(載)', 완은군은 '재선(載)', 인양군은 '재근(載)', 의양군은 '재각(載)', 예양정은 '재규(載)'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 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였다.[2]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열리던 임시 과거.[3] 文科別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 별시 문과.[4] 조선 말기의 궁내부 소속 비서감 · 비서원의 관직.[5] 奠酌禮, 임금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예.[6] 酌獻禮, 왕이나 왕비의 조상이나 문묘(文廟)에 모신 공자의 신위에 왕이 직접 예로써 제사지내던 예.[7] 侍講院副詹事, 시강원은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이며 부첨사는 시강원의 관리 책임자이다.[8]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 참고로 대한제국의 유일한 태후였다. 흔히 윤대비라 부르는 순정효황후는 나라 망한 뒤 허울 뿐인 이왕대비였을 뿐.[9] 이 사실은 1910년 이후 잊혀졌다가 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한을 맞아 사절단 중 한 명이었던 이종응의 증손녀 이해남과 남동생 이해석이 오랫동안 집에서 보관해오던 수행 기록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10] 典膳司. 조선 후기 궁내부에 딸린 관청으로 1895년 기존의 사옹원(司饔院)을 개편한 것이 전선사이다. 제조는 총책임자.[11] 선원전 봉사나 왕릉 제사 등[12] 진주 8경 중 하나이다.[13] 안내판에 적힌 이재현의 한자 이름이 '李載現'으로 되어있는데 이재각의 친형과 이름이 같다. 그 사람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4] 다만 없애지는 않은 대신 가려놓았다.[15] 요즘 기준으로는 나이 차이가 나면 친구 먹는 게 어색하지만 당시만 해도 2살 차이 정도는 친구로 지내는 게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