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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4:45:24

이호연(기업인)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호연
Lee Ho-Yun
파일:/image/042/2010/03/04/alba04201003030937380.jpg
출생 1954년 1월 18일
대전광역시
사망 2018년 2월 14일 (향년 64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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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성균관대학교 (체육학부 / 학사)
경력 2008 ~ 2010 DSP미디어 대표이사
1991 ~ 2008 DSP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상훈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1. 개요2. 생애3. 기획사 사장으로서의 능력
3.1. 인맥, 감, 추진력3.2. SM과의 비교 및 최초로 시도한 사항들3.3. 사업확장과 실패, 그리고 재기3.4. 카라의 일본진출 성공
4. 안목과 캐스팅
4.1. 뽑즉데?
5. 한계6. 평판 및 유명인과의 관계7. DSP 소속가수와의 관계8. 젝스키스 팬덤과의 관계
8.1. 최악으로 치달은 관계 / 이후 계속된 욕설 및 루머유포8.2. 젝키 재결합 후 나온 DSP의 언플에 대해서
9. 경력
9.1. 약력9.2. 수상 경력9.3. 제작 드라마9.4. 제작 예능9.5. 제작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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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연예기획자.

DSP미디어의 설립자이자 초대 대표이며, 핑클, 젝스키스, 카라 등을 제작하며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DSP를 당대 촤고의 연예기획사 중 하나로 키워냈다.

2. 생애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체육교육과[1]에 입학한 그는 선후배들과의 교분을 통해 연예관계자들과도 교분을 쌓아왔다. 당시 체육과와 연예계는 서로 통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대전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2]를 하던 중 1981년 연예사업계에 자리잡은 선배인 양승국 한밭기획 사장의 권유로 매니지먼트계에 투신, 소방차, 유열, 심신 등을 발굴해 양 사장과 함께 매니지먼트를 했다. 이 중 한국 최초의 아이돌로 불리기도 하는[3] 소방차는 기획, 홍보 등에 있어 이호연 사장의 첫 작품으로 많은 연예 관계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이 당시 태진아매니저를 하기도 했는데, 이를 계기로 후에도 태진아와 친분을 유지했다.[4][5]

1991년에 독립하여 대성기획(후에 DSP미디어로 명칭 변경)을 설립했다. 소방차의 성공을 보고 한국에도 아이돌이 뜰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 살던 집을 털어 창업했다고 한다. 이후 ZAM, 젝스키스, 핑클, 이효리(솔로), 카라, SS501 등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을 배출했다. 잘 나가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는 젝스키스핑클SM엔터테인먼트H.O.T., S.E.S.라이벌 구도를 이룸으로써 1세대 아이돌계의 양대기획사로 군림했다.[6]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턴 2세대 아이돌이 급부상하면서 YGJYP 등 신흥 강자들에게[7] 밀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SS501카라 등으로 어떻게든 2010년대 초반까진 경쟁을 이어갔다.

2010년 3월, 지인과 술자리를 갖고 돌아가는 길에 뇌출혈[8] 쓰러졌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경영 일선으로 돌아올 정도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라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고,# 경영 일선에 복귀를 하지 못하고 병상에 있었으며, 의사소통은 가능하고 감정표현도 자연스러운 상태였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거동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별세하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에 참여한 아이돌은 레인보우이다.##[9]

DSP미디어는 사실상 이호연 사장의 카리스마와 인맥, 그리고 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2000년도 대학원 논문[10]을 보면 DSP에 대해 "대표자가 전 가수들을 총괄 기획하고 제작이나 각종 결정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 "모든 체계가 중앙집중적으로 편중되어 있어 전형적인 개인형 매니지먼트 구조"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 자세한 내용은 각주 참조.[11][12] 2000년대 중후반 이호연이 잠시 가수들한테서 손을 떼고 드라마에 빠져있을 때는 성적이 안 좋다가, 다시 돌아와 손을 본 U R ManPretty Girl이 대박을 쳤던 것을 보면 쓰러지기 직전에도 감은 여전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DSP도 쇠퇴했다. DSP의 대표 자리는 가정주부였던 부인 최미경이 맡게 됐다. 이호연은 50세가 넘은 나이에 최미경과 결혼했으며, 최미경은 재혼이었다. 최미경이 대표로 취임한 이후 기존 임원과 직원들을 내보내고 자신의 친인척과 친딸(최미경과 그녀의 전 남편 사이의 딸)을 임원 자리에 앉힌 점이 문제되기도 했다.[13] 이로 인해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이 발생하였고 카라 멤버들은 이호연 사장님은 믿지만 최미경의 DSP는 믿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당시 멤버들이 이호연 대표가 있는 병실로 찾아가려 했으나 회사 측은 병실 위치조차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2015년 10월,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30여년간 배출한 가수들과 한국 가요산업에 끼친 영향력을 보면 충분히 받을 만한 상이다.[기사원문] 표창은 카라 멤버 박규리와 한승연이 대리 수상했으며, 이날 시상식에는 레인보우, 에이젝스, APRIL이 출연하여 선배 가수들의 곡을 불렀다.

2016년 기사를 보면 감정 표현은 자연스럽지만 말을 못하고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니, 경영 일선에 돌아와 DSP를 재건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고 2018년 2월 14일, 약 8년간의 투병 끝에 향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는 클릭비의 오종혁이 상주를 자처했다.

부고가 전해지자 많은 추모 기사가 올라왔고, 조문이 이어졌다. DSP 출신 가수들이 SNS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조의를 표하기도 했으며, 윤종신 등 연예인들도 조의를 표했다.###### 옥주현은 장문의 글을 통해 이호연 사장과의 인연에 고마움을 표시했다.(전문)[15] 이외 소방차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는 홍성규 가요평론가는, 이호연 사장의 심미안을 인정하면서 그가 건재했으면 DSP가 오늘날 3대 대형 기획사의 한자리에 속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3. 기획사 사장으로서의 능력

3.1. 인맥, 감, 추진력

다트 기획이라는 비아냥을 들을지언정 인맥과 감이 뛰어나 소방차부터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이효리, SS501, 카라 등을 연이어 히트시켰던 스타제조기
한경뉴스'빅스타 산실 남편 쓰러진 후 ‘아내의 경영은’'
1981년 한밭기획 전무이사를 시작으로 30여년간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연예계에서 상당한 인맥과 파워를 자랑했다. 당장 DSP 아이돌의 흥행성적이나 자사 가수를 방송에 꽂아주는 능력을 보면,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과 후가 심하게 대비된다. 몇 년째 병상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었는데도 2015년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는데,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전술한 바와 같이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

그런 인맥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다. 경향신문 기자의 말에 따르면 1990년대 당시 이호연은 여의도 목욕탕에 기거하면서 ‘아침에 세 끼, 점심에 세 끼’를 먹었다고 한다. 한 시간 단위로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담당 PD들과 밥을 먹었다고 한다.#[16]

인터뷰 기사[17]를 보면 상당히 워커홀릭이었던 듯 하다. 연예계 일을 시작하고 20년 동안 새벽에 집에 들어가 새벽에 출근하는 생활이 많았다고 하며, 거의 날밤을 세웠다고 한다. 대성기획 초창기 때는 소자본 창업이라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소속 가수들이 떴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얼굴도 누렇게 떴다고.. CEO로서 한창 활동할 나이에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이호연이 다트사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트 던져 데뷔일이나 컨셉 등을 정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일부 사람들은 다트 던져 운빨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그러나 30여년간 히트시킨 가수들 숫자를 보면 그게 운빨이면 그 자체로 더 대단하다. 다트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맞추면 실력으로 봐야할 것이다.# SBS PD가 만든 웹툰 '아이돌 연구소'에 나온 말이다.

일단 인맥이 좋아서 곡빨 안무빨을 잘 끌어오고 방송에도 잘 꽂아줬으며, 성공한 사례들을 보면 일을 밀고나가는 추진력이나 방향성을 결정하는 감이 좋은 경우가 많았다. 2015년 핑클 멤버들이 모였을 때 옥주현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서 과거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 사장의 판단과 추진력이 크게 작용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아래 목차에서 보듯이 비쥬얼甲인 멤버들을 잘 뽑아왔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중략)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

참고로 경희대 논문을 보면 당시 DSP의 푸쉬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18]
같은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활동은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연 프로그램이나 음반활동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DSP> 소속의 젝스키스가 1998년 7월, 3집 앨범을 낼 때 핑클이 데뷔했고, 1999년 8월에 젝스키스 4집 앨범 발매와 맞추어 클릭B가 데뷔했다. 그리고 젝스키스의 경우도 데뷔 앨범은 1997년 5월 14일에 발매되었지만 첫 방송 출연은 그보다 한 달 전인 1997년 4월 15일에 있었고 1집 발매 직후부터는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젝스키스가 데뷔 전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당시 이 매니지먼트사에 MBC 라디오와 KBS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탤런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소현, 이본, 오현경은 연기와 MC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에 소속 가수들을 홍보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물론 실력도 없는 가수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출연시키면 말도 안되겠지만,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었다 싶을 때 다양한 홍보채널을 이용하고, 그랬을 때 이왕이면 같은 소속사 연예인이 진행하거나 출연하는 프로에 함께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방송가의 일종의 관행이기 때문이다."(DSP 사장)

이처럼 이미 다른 스타를 통해 방송가와 인맥을 쌓아 놓은 기존 매니지먼트사들은 그 회사의 신인을 홍보할 때 기존의 스타를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홍보방식은 방송사와 매니지먼트사 양측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방송사에서는 스타를 섭외해야 할 필요가 있고 매니지먼트사에서는 신인을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끼워팔기'라는 기존 스타를 활용한 홍보방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젝스키스는 데뷔 직후부터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였다고 하는데, 지상파 3사와 케이블 음악전문채널 2사가 채널의 전부이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푸쉬 능력이다.

3.2. SM과의 비교 및 최초로 시도한 사항들

일각에선 이호연이 90년대 SM엔터테인먼트의 성공을 보고 이를 따라하는 전략으로 성공했다는 비판도 한다. 실제 어느정도는 일리있는 말이고 때문에 이호연과 DSP는 이수만과 SM에 라이벌 구도긴 했지만 약간은 밀리는 포지션이긴 했다. 다만 단순히 따라가는 전략만 해서 성공할 순 없고, 그만큼 자사 가수들만의 강점과 특색을 살려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1999년 11월 3일자 한겨레 기사를 봐도 SM을 따라했지만 실패한 아이돌은 무수히 많았고, 그 중 DSP는 기획력 측면에서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19]

1997년도 조선일보 인터뷰를 보면, 이호연 본인도 SM과 이수만에 대해 크게 의식하고 있고 기사 논조도 이 둘을 라이벌로 보고 있다.기사 따라했다는 평에 대해서도 아닌 점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오늘날 돌이켜 보면, 차별점을 강조한 점들이 DSP 가수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호연이 이수만보다 한국에 먼저 도입한 것들도 알고보면 제법 있다. 우선 80년대 일본 아이돌 형태를 도입해 소방차ZAM을 히트시켰다. 이후 1995년 당시 14∼15세의 재미교포 중학생으로 구성된 듀오 IDOL을 배출하며 가수의 평균 연령을 대폭 낮췄다. 최초로 10대인 멤버에 해외파로 이루어진 아이돌로서, 이후 유행한 ‘교포가 낀 미소년 댄스팀’의 첫 모델이었다.# 그리고 젝스키스의 블랙키스와 화이트키스는 아이돌 유닛의 시초였다. 핑클은 4인 4색으로 아예 그룹내 색깔별로 맡은 타이틀이 있었고, 클릭비는 최초의 밴드형 아이돌이었다. 특히 핑클은 2000년대 넘어서는 멀티형 연예인을 바라는 시대적 트렌드에 따라 `따로 또 같이`라는 전략을 구사하며 핑클 멤버 4명의 개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개별 활동에 대한 주위의 반발이 컸지만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여 방송계에 만능 엔터테이너가 성공하는 새로운 주류를 만들어냈다.# SS501은 리얼리티쇼에서 데뷔하여 스타덤에 오른 최초의 사례였다. 그리고 SS501의 U R Man은 아이돌 유닛 최초로 1위를 달성한 곡이다.

2000년에 나온 경희대 대학원 논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20]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사전 홍보나 브이앱을 활용한 소통이 매우 활발한데, 당시 최초로 시도된 것이다.
경향신문에서 조사한 “국민가수”에 뽑힌 <DSP>의 젝스키스는, 음반을 내기도 전인 1997년 3월부터 각 통신망에 멤버들의 사진과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한 정보들이 제공됐다. 그로 인해 젝스키스는 매체에 출연하기도 전부터 10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데뷔 무대 때부터 팬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핑클의 경우도 데뷔 전에 이미 네티즌을 대상으로 그룹이름인 '핑클'을 정해 놓고 그룹의 이미지를 정한 다음 그에 맞는 멤버를 충원했다.
(중략)
기존의 가수들이 팬들과의 모임을 팬클럽 공식행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데 비해 <DSP> 소속가수인 클릭B와 핑클은 화상채팅을 통해 팬들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한다. 관전보드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개설된 4개의 방에서 각각 10명의 네티즌들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각 방마다 500명의 네티즌들이 관람하는 일종의 화상채팅쇼를 통해 가수를 알리는 방식이다.

배윤정의 야마앤핫칙스는 2000년대 후반~2010년대 크게 성공한 아이돌 안무 제작팀인데, 이 팀을 발견해 최초로 일을 의뢰한 곳이 DSP다. 카라의 데뷔 곡 브레이크 잇의 안무였는데, 그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하의 '샨티샨티' 안무를 한번 더 의뢰했고 여기서 반응이 왔다. 그래서 다시 카라의 안무 제작을 맡겼는데, 이게 그 유명한 Pretty Girl이다. 이 춤이 대박 나면서 성공 궤도에 올랐고, 이후 DSP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이돌의 히트 안무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안무 제작을 시작했나.▷전=댄서 일로는 돈이 안되니까 안무 의뢰가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했다. 처음에 카라의 '브레이크 잇'이 들어왔다. 처음 해보는 거였다. 의욕만 앞섰다. 멋있으면서 귀엽게 모든 안무를 다 넣고 싶었다. 욕심이 많다 보니 말도 안되는 안무가 나왔다. 역시 잘 안됐다.
―반전 계기는 무엇이었나.▷배=선하의 '샨티샨티' 안무 제작이었다. 연습생 중에 머리카락을 자주 꼬는 애가 있었다. '머리 좀 그만 만져!' 하고 야단치다가 머리 꼬는 안무를 생각해냈다. 노래가 엄청 히트한 건 아니지만 춤이 인기를 끌었다. 그게 업계에서 반응이 좋으면서 DSP엔터에서 카라 안무를 다시 제안했다. 카라의 '프리티걸'이었다. TV에서 김국진 씨가 일어서서 두 팔을 위로 올리고 흔들면서 "예~" 하는 장면을 봤다. 귀엽다 싶어서 그걸 넣었는데 터졌다. 그때 생각했다. 안무는 힘을 빼야 하는구나. 그때 자신감이 붙었다.#

기타 2010년대 탑급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올라선 서현승의 입봉작이 젝스키스의 로드파이터란 곡이다.

3.3. 사업확장과 실패, 그리고 재기

젝키, 핑클에 이어 이효리 솔로까지 크게 성공시킨 이호연 사장은, 2000년대 중반 사업을 크게 확장하기에 이른다. 2006년 3월 섬유원단 제조 업체인 호신섬유주식회사와의 인수합병을 통해 코스닥시장에 회사를 우회상장하였다.[21] 이 시절 DSP는 SM보다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DSP가 제작한 드라마 그 여자, 마이걸, 외과의사 봉달희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토지〉, 파리의 연인 등을 기획한 문정수 PD, 〈성녀와 마녀〉〈그 여자〉의 소현경 작가 등 전문 인력들을 DSP로 영입했다. 훗날 문정수 PD는 해를 품은 달, 각시탈 등 대박 작품을 만들어냈고, 소현경 작가도 찬란한 유산, 내 딸 서영이, 황금빛 내 인생 등 히트작을 쏟아냈다. 이것을 보면 이호연 대표의 안목있던 인재 영입이었다.기사

그러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22]을 투자한 드라마 연개소문이 망하면서 큰 손실을 봤다. 결국 2009년 4월에 3년만에 코스닥 시장에서 상장폐지되었다. 자연히 확장한 사업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호연이 드라마나 예능 제작에 눈을 돌렸을 때 DSP에서 배출한 아이돌들의 성적이 좋지 못했다.

이후 관련 사업들이 정리된 이호연이 다시 아이돌 파트에 뛰어들었는데, 뛰어난 감을 바탕으로 차례차례 히트를 시켰다. 카라의 경우 이호연의 입김이 컸던 구하라, 강지영 영입이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당시 별다른 실적이 없던 Sweetune에게 앨범의 곡 대부분을 맡긴 모험 역시 대성공이었다.[23] 전술한 바와 같이 별다른 실적이 없었던 배윤정에게 끝까지 안무를 맡긴 것도 성공 포인트였다. SS501의 경우도 이호연의 개인적 친분으로 발탁한 작곡가 한상원이 U R Man이라는 명곡을 만들어주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김현중이 출연한 것도 이호연의 인맥과 추진력이 상당히 작용했다. 당시 김현중은 미뤄진 앨범 내야하는데 뭔 소리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이호연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김현중은 한류스타로 큰 인기를 누려 회사에 많은 수입을 안겨다주었다.

이후 일본에서 카라한테 반응이 오자 일본 진출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카라의 일본 첫 쇼케이스 후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3.4. 카라의 일본진출 성공

DSP 역사상 최고로 돈을 많이 번 것은 카라의 일본진출 성공이다. 이를 두고 이호연 쓰러지고 나서 터진거니 이호연이 한게 없지 않냐는 반문이 있다. 그러나 이호연이 쓰러진 날짜가 2010년 3월 후순이고, 막 일본진출을 한 시점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대박날 기반을 다 닦아놓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일단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에 도쿄에서 첫 쇼케이스를 성황리에 치뤘고, 일본 거대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성사 직전인 상태였다.# 그냥 생뚱맞게 카라가 일본에 진출한 것이 아니다. 2006년에 이호연과 친분이 있던 高和彦(타카 카즈히코)씨를 대표로 선임해 DSP 일본법인을 설립했고, SS501을 일본에 진출시켰다. 이때의 高和彦씨의 인맥과 노하우가 카라의 일본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형성된 이미지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곡(미스터)과 안무(엉덩이 춤)로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즉, 국내에서 히트를 시켜놨으니 일본에서 통한 것이다. 이호연이 드라마에 눈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와서 손을 본 Pretty Girl이 히트를 치며 카라가 스타덤에 올랐다. 애당초 구하라, 강지영 등 멤버 구성에 있어 이호연 입김이 컸다. 카라한테 처음 반응이 오자 일본에서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국내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당시 회사가 100억대 부채로 휘청이던 상태여서 한푼이 급했겠지만 잘 선택한 판단이다. 훗날 이호연이 물러난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A-JAX를 국내 기반도 안 닦였는데 무리하게 진출시켰다가, 양국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과 비교되는 결정이다. 2009년 카라의 국내 기반이 제대로 닦이자 일본에서 스스로 알아서 반응이 일어나며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하게 된다. 게키단 히토리, 야구치 마리 등 톱연예인들이 자처해서 언급해줄 정도였다. 특히 2009년 국내활동을 하며 일본에서 히트를 친 결정적 요인인 명곡 "미스터"가 탄생됐다. 그게 안무가랑 작곡가가 만든거지 이호연이 만든거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는데, 그 작곡가랑 안무가를 인맥과 감으로 섭외하는게 소속사 사장 역할이다. 대표이사 바뀐 이후의 DSP가 자사 가수들, 특히 레인보우에게 줬던 곡과 안무 퀄리티를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카라 때의 DSP는 백억대 부채로 앞을 못 내다보는 상황이었고, 레인보우 때의 DSP는 카라가 벌어다 준 현금으로 풍족한 상태였던 것을 생각하면, 소속사 사장 역할이 엄청나게 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 카라가 성공하는데에는, 인기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가 방송에서 카라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준 덕택이 컸다.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2009년말부터 카라를 열렬히 홍보했다. 이렇게 홍보한데에 이호연 사장의 역할이 나름 중요했다. 게키단 히토리가 일본 방송에서 카라를 홍보할 때 감동받은 일이라며 자주 말하는 일화가, 카라가 일본 진출하기 훨씬 전에 사적으로 DSP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 포스터를 받아왔다는 이야기다.[24]영상 사무실 앞에 어떤 경비원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가 카라의 팬이라고 말하니 사무실로 친절하게 안내해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이 있는 포스터를 줬다고 한다. 사람 좋아보이는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도쿄 赤坂BLITZ에서 열린 카라의 라이브에 간 날 그 경비원 아저씨가 있길래 아는척 했더니, DSP 사장이었다고 한다. 즉 그 사람이 이호연이었던 것이다.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게다가 게키단 히토리가 누군지 알 리도 없으니[25],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적당히 응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이 직접 친절히 대접했고 그 결과 상상 이상의 홍보효과를 냈다.

참고로 이때 카라인도쿄 방송을 보면 이호연 사장이 일본까지 같이 가서 챙기고 있다. 그런데 안색이 그냥 보기에도 안 좋아, 이미 뇌출혈의 징조가 있었다. 윤흥관 이사(카라가 아빠라고 부르던 분)는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카라의 일본 첫 쇼케이스 날 뒤에서 울다가 이호연 사장님에게 들켜서 한동안 놀림 당했다고 말한 바 있다. 윤흥관 이사는 2013년 카라의 첫 도쿄돔 콘서트 전날 다음과 같은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다. 나가 이곳에서 공연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기쁘다. 눈물 날 정도로 ㅠㅠ 사장님께서 이걸 보셨음 많이 좋아하셨을텐데...."

4. 안목과 캐스팅

이호연을 말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이것이었다. 특유의 안목으로 자기가 뽑은 멤버들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DSP를 싫어하는 팬들도 인정할 정도다. 데뷔 시에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을 데려와서 데뷔시키기도 하고, 어디선가 불쑥 데려오기도 했는데, 데려온 멤버의 비쥬얼이나 기존 멤버들과의 조화도 매우 좋은 편이라 해당 그룹이 히트치는데 큰 역할을 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젝스키스의 멤버들, 오종혁, 유호석, 김현중, 구하라.

언론이나 방송에서 밝혀진 캐스팅 일화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효리의 캐스팅 비화를 보면, 이호연이 핑클 멤버 구성에 한참 신경을 쓰고 있을때, 강남역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이효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곧바로 달려가 버스를 타던 이효리를 설득해 사무실로 데려왔다. 하지만 당시 이효리는 다른 매니지먼트 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는 연습생 신분이었는데, 이호연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계약조건이 있어서 즉시 소속 매니지먼트사에 항의해 (위약금을 주고) 이효리를 데려왔다고 밝혔다.# 2012년 이효리가 힐링캠프에 출연해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대뜸 '나 이호연이요'라고 해서 누구지 싶었는데 그래도 만나자고 하니 자기도 나름 절박한 마음에 버스를 타고 강남역에 가서 만났더니 노래나 춤 하나도 안 시키고 얼굴만 보고 바로 뽑았다고 밝혔다. 이효리의 2집 앨범 땡스투에 "8년 동안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우리 사장님 '나 이호연이야!' 그 말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건강하세요.."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나 이호연이야'가 평소에 자주 하는 말버릇이었다고 보인다. 참고로 이날 방송에서는 DSP 측에서 한혜진 미모 포텐을 알아보고 핑클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한혜진 본인이 자긴 가수보단 연기자를 꿈꿔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에 참여한 레인보우의 경우[26], 멤버 지숙2014년 1월 25일 세바퀴에서 레인보우 멤버로 뽑힌 비화를 이야기했다. 당시 회사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아무도 없길래 소파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중후한 남성이 들어오더니 '너 뭐냐?'라고 해서 지숙이 '오디션 보러 왔는데요'라고 하자 '잠깐 들어와봐라'라고 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이어 그 남성이 '얘들아 나와봐'라고 하자 6명의 레인보우 멤버들이 나왔고, 그 사이에 서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대뜸 '너 다음 주부터 나와'라고 해서, 노래나 춤 오디션은 보지도 않은 채 합격했던 일화를 밝혔다. 그 남성이 이호연 사장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레인보우에 대한 세간 평가가 '멤버 개개인은 좋은데[27] 왜 못 뜨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레인보우가 1위 하기를 온 우주가 기원한다'는 반응이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멤버는 잘 뽑아서 데뷔시켰다고 보인다. 하지만 레인보우 데뷔 직후 이호연 대표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제대로 된 푸쉬를 못 받았다. 참고로 지숙의 경우 레인보우가 제대로 된 활동이 없어 대중에게 잊혀지려 했을 때, 혼자 힘으로 파워블로거 등의 길을 만들어 방송 출연을 뚫었었다. 이는 레인보우 생명력이 연장되는데 큰 역할을 했었다.

다른 DSP 가수들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일화들이 많다. 젝스키스고지용도 자서전에 나온 내용을 보면 그냥 얼굴을 보고 캐스팅 했다고 하며, 김재덕도 본인이 밝히길 사장이 처음 봤는데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바로 캐스팅 했다고 한다.[28] 장수원은 2차 오디션장에서 사장의 '잘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 클릭비오종혁은 2006년 라디오에서 밝히길, 오디션 보러 DSP 사무실에 갔을 때 어느 경비원같은 후줄근한 옷 입은 아저씨가 다가와서 '오디션 보러왔냐'고 묻길래 진짜 버릇없이 굴었다고 한다. 근데 그게 알고보니 이호연이었다.[29] 이외 카라강지영은 뽑아서 15일 연습시키고 데뷔시켰다.(...) 전술했듯이 이효리도 핑클 데뷔 한달 전에 춤, 노래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그냥 얼굴 보고 뽑았다는거 보면 참 본인 감을 대단히 믿는 사람이었던 모양.[30]

다만 이호연도 엄연히 가수를 키우는 제작자 입장에서 노래 실력을 안본건 아니라, 핑클옥주현만 해도 성악하겠다는 애 밥 사주고 젝키 콘서트 공짜로 보여주는 등 영입에 꽤나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핑클 멤버 영입에도 옥주현이 크게 관여한 것을 보면 결국 메인보컬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다른 멤버들의 노래 실력은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클릭비의 하현곤은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Q. 어떻게 클릭비 멤버가 됐나. 한 라디오 방송에서 노민혁 씨가 은인이라고 했는데.

민혁이와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민혁이 덕분에 드럼을 배우게 됐고, 부산에서 밴드를 하다가 서울에 올라오게 됐다. 평생 은인이다.

민혁이가 먼저 클릭비 합류가 결정됐고, 드러머로 나를 사장님께 소개해줬다. 그때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오디션 개념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고 사장님을 뵈었는데 ‘얼굴 깔끔하네. 민혁이랑 열심히 해’ 이게 끝이었고 오디션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데뷔했는데 정말 우연이었다.

이렇게 설렁설렁(?) 뽑은 멤버들이 이후 크게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보면, 감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수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초중반에 이본, 오현경, 이승연, 박소현[31] 등을 키워내기도 했다.(출처: #, #, #, #, #) 이들 모두 대성기획(현 DSP) 소속이었고 당시 인기가 매우 많았다. 오현경과 박소현은 2010년대 이후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외 이아현을 처음 발굴한 사람도 이호연이라고 한다.[32]

박소현의 말에 따르면 젝스키스 데뷔 전부터 이호연 사장님이 자기한테 젝스키스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장수원의 경우 친구 따라 오디션을 왔고 별 의지가 없었다고 한다. 근데 사장님이 무조건 잘된다고 하길래 저 친구의 어떤 모습을 보고 캐스팅 했을까 의아했었다고 밝혔다. 근데 정말 오랜 시간 지나도록 롱런하는거 보니, "사장님이 괜히 사장님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발언했다. 박소현 본인도 연예계 생활에 별로 의지가 없었는데, 사장님이 "너 5년 정도 일 해서 시집갈 밑천 벌어 결혼하면 되지 않겠냐."고 설득해서 일하게 됐다고 한다.영상 이후 박소현이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활약한 것을 생각하면 안목이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결혼 밑천을 벌고 있다

이혜영도 위와 같은 일화를 밝힌 바 있다. 2018년 3월 18일 JTBC 슈가맨2 방송에 출연한 이혜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0년대 당시 이혜영은 자신이 연예인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쪽 일을 그만두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전 작고하신 이호연 사장님이 자기한테 전화를 해서, ZAM의 윤현숙과 듀오를 해보자고 하여 연예계 일을 지속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듀오가 코코인데 당시 '요즘 우리는' 등으로 꽤 인기를 모았다. 이후 이혜영이 패션, 드라마, 예능 등에서 활약했던 것을 보면 안목이 있었다. 2010년 들어서는 연예계 활동이 뜸해졌지만, 전남편인 이상민이 예능에 활발히 나오면서 계속 언급되었다.

한편 젝스키스의 경우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강성훈이 밝힌 바에 의하면, 멤버 캐스팅에 강성훈이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듀엣에서 급작스럽게 6인조로 바뀌자 강성훈이 탈퇴하려 했고, 이에 이호연이 나머지 4명은 너가 OK 하는 사람들로 뽑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33] 그래서 오디션장에서 강성훈이 이호연 옆에 앉아 같이 결정했다고 한다. 방송된 내용은 각주와 같다.[34] 한마디로 정리하면, 김재덕은 강성훈이 뽑기 싫어했고, 이재진은 이호연이 싫어했으나 강성훈은 마음에 들어 했는데, 김재덕과 은지원이 회사를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 고지용, 장수원은 사장이랑 강성훈 둘다 마음에 들어했다고 보인다. 한편 당시 상황에 대해 컴백 자서전에 나와있는 내용은 이하와 같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한창 5명에서 6명 정도의 댄스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멤버의 수가 6 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사장님,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멤버가 그렇게 많은 그룹에서는 노래부르기 싫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배짱이 튀어나왔는지 겁도 없이 사장님께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수의 꿈을 접고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사장님은 나를 설득하시는 한편, 어머니를 만나 내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품은 가수의 꿈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나의 마음을 돌려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성훈아, 비록 어리지만 사장님과 이미 한 약속은 지켜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쉽게 네 꿈을 접을 수 있겠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어머니, 한번 해볼게요. 그 대신, 열심히 할 게요." 그리고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은 지금의 멤버들을 하나 둘 만나면서부터였다. 착하고 세련된 느낌의 수원이, 워낙 춤을 잘 추는 재덕이형과 재진이형을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한 지용이. 지용이는 전교10등 안에 들 정도로 모범생이었지만, 어릴때부터 나와 붙어다니던 춤꾼 중에 춤꾼이었다. 이렇게 여섯 명이 모이자,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잘해낼 자신감이 생겼다.

이호연을 싫어하는 젝키 팬들은 이 방송을 계기로 "젝키를 만든 것은 강성훈이지, 이호연은 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내막을 살펴보면 이호연의 공이 제일 크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친분이 있던 하와이 클럽 사장에게 소개 받아 직접 데리고 왔다.[35] 이외 4명이 문제인데 고지용 영입은 전적으로 강성훈의 친구였던 사실 덕분이지만, 나머지 3명은 강성훈 아니었으면 젝키 멤버로 뽑히지 않았을거라고 볼 수 없다. 장수원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장도 강성훈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직접 데려온 인물이다. 이주노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6] 김재덕의 경우 이날 방송의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이 사실 뽑기 싫어했다. 이재진의 경우 이호연이 코가 크다며 뽑기 싫어했는데, 기존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은지원과 김재덕이 이호연을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영상 14분부터

이호연의 과거 아이돌들을 보고, 멤버 뽑기만 잘하지 이후 소속사가 별로 해준게 없다는 평도 있는데, 아이돌 시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인물 뽑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잡혀있던 사람이었다고 보인다. 이 입장은 다음과 같다. 아이돌은 말 그대로 idol이다. 즉, 아이돌은 일반 대중에게 있어 우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일반 대중에게 우상이 되려면 뭔가 남다른 것을 '타고나야' 할텐데, 그것은 타고난 유전자/외모/근성/성장과정 같은, 후천적인 트레이닝이나 의술로 가질 수 있는 것과 구별되는 점들이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노래나 춤 실력을 길러내고 외모도 후천적인 성형으로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과 정반대의 방향이다. 이 입장이라면 거의 누구나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전술한 입장에서는 그런 경우 idol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37] 일반 대중이라도 그들의 눈은 바보가 아니다. 아이돌은 말 그대로 idol이어야지, 철저히 꾸며서 속인다 해도 어느 순간 한계를 드러낸다. 그 기준선을 감으로 잡아내서 idol이 될만한 인물을 뽑는 것이 DSP와 이호연의 역할이었다.

그냥 말이 나빠서 다트 기획이지, 저 정도의 흥행 타율이면 다트가 아니라 능력이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호연이 있을 당시에는 젝스키스, 핑클, 이효리, SS501, 카라 등이 연이어 대박을 쳤지만, 이호연이 데뷔시키고 바로 병으로 누워서 손을 써주지 못한 레인보우와 이후 데뷔한 에이프릴[38], A-JAX 등은 선배 가수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못했다.

4.1. 뽑즉데?

오늘날 K팝 산업 시스템과는 좀 차이가 나서,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이호연은 누군가를 캐스팅하면 아주 짧은 연습기간만 거친 뒤 바로 무대에 데뷔시키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아 일각에선 이른바 뽑은 즉시 데뷔(뽑즉데)란 말로 통하기도 했다. 핑클의 경우를 예로 들면, 핑클 멤버들 자체가 연습생 기간이 1년이 채 안되는 짧은 팀이긴 했으나, 그중에서도 핑클에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이효리의 경우 진짜 한달 전에 캐스팅한거라고 한다.[39] 장수원 역시 '할 줄 아는 게 뭐냐' 는 질문에 '아무것도 없는데요'(...) 라고 답하자, 솔직해서 좋다며 춤이나 노래도 전혀 보지 않고 바로 캐스팅한 뒤 얼마 안 가 데뷔시켰다. 클릭비나 카라 역시 이렇게 뽑히자마자 데뷔한 멤버들이 있다.[40] 이호연이 마지막으로 제작에 관여했던 레인보우 역시, 지숙의 경우 회사에 오디션 보러 간 그 날 바로 데뷔조로 캐스팅되어 얼마 안 가 데뷔했다. 즉, 이호연이 경영을 하는 동안은 이 '뽑즉데' 원칙이 생각보다 자주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다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기존 데뷔팀이 불안했다는 소리도 된다. 이효리도 핑클 4인조로 데뷔해야 된다고 찾다찾다 마지막에 진짜 발굴한거고, 강지영은 아예 카라가 데뷔한 이후 반응이 없자 1년도 지나서 투입된 새 멤버였다. 이는 아래의 한계와도 연관이 된다.

5. 한계

성공시킨 가수 숫자들을 보면 분명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인 감, 눈썰미, 인맥에 의존한 점은 한계였다. 2000년 관련 논문에서 DSP를 "모든 체계가 중앙집중적으로 편중되어 있어 전형적인 개인형 매니지먼트 구조"라고 분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41]

이는 본인이 잘못됐을 때 회사가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결국 2010년 3월 이호연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DSP는 2대 기획사 시절이 무색하게 내리막을 걷고 만다. 이호연이 쓰러지기 직전에 데뷔했던 레인보우는, 멤버들은 좋은데 왜 이렇게 못 뜨냐는 안타까운 반응을 받았다. 이후 쇠퇴를 거듭하다 2022년 RBW에 인수되었다.

해당 문제는 다른 연예기획사 역시 고민하는 문제다. JYP의 대표 박진영은 본인이 없어도 돌아가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시스템을 개혁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HYBE방시혁은 아예 멀티 레이블 체제로 프로듀싱 자체를 각 레이블에 일임하고 그곳 인물들이 해당 연예인들 기획과 홍보도 전담하고 있다.[42] 만약 DSP가 이런 준비를 시스템적으로 마친 상태였다면 이호연 한명이 쓰러졌다고 해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6. 평판 및 유명인과의 관계

젊었을 적 한 주먹 했다는 소문 등이 있으나,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실제 싸움 실력이나 어두운 세계와도 연관이 있었는지 등의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43], 태권도 선수 출신에 1980년대부터 싸움 좀 한다고 알려진건 사실이다. 이때 나온 연예신문 썰에 의하면, 주로 매니저(이호연)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웠을때 밤무대 운영 조폭들이 공연준비하러 온 소방차에게 약속과 다른 무리한 출연 요구를 해서 반발한 소방차와 대립했는데, 시간이 지나 매니저가 돌아와서 이를 못하게 거꾸로 조폭들을 협박하고 한방에 해결해서 연예인을 지켜줬다는 식의 이야기 종류였다. 건달들이 못 건드리는 연예인은 알고 보면 이호연 소속이다라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

그런데 매니저썰과 달리, 김광수 등 당시 대부분 연예 제작자가 밑바닥 로드매니저부터 밟고 올라오는 것과 달리, 시작은 1981년에 한밭기획 사장의 권유로 전무이사로 첫 발을 내딛었다. 나이도 만 27살이었으니 당시나 지금이나 이례적인 사례다. 심지어 당시에 대학도 나름 명문대를[44]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조폭들도 얼씬대던 어두웠던 연예업계 분위기 치고는 오히려 인텔리에 가까웠다. 아래 목차에서 DSP 가수들이 이호연을 좋게 말하는 경우도 많은 것을 보면, 터보 사례처럼 깡패 양아치 수준의 학대를 하는 사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00년대 초 연예계 비리가 만연하던 시절, 검찰이 연예계 비리를 때려잡는다고 2002년부터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간 결과 메이저 기획사 뿐 아니라 중소 기획사, 방송국 PD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SM 이수만, 김광수, 서세원이었다.# 김광수는 심하게 털렸고, 이수만도 횡령 혐의로 한동안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하는 볼썽사나운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때 DSP 이호연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당시 젝키 팬덤이 퍼뜨린 루머처럼 이호연이 만악의 근원이라면 이때 심하게 털렸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은 것.

루머와 달리 실제론 친절했다는 증언도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2009년 일본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와의 일화(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에서, 게키단 히토리의 아내이자 유명 탤런트인 오오사와 아카네는 이호연을 사람 좋아보이고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영상 1분25초부터. SS501 초창기 시절에는 어떤 일본 꼬마가 표를 잃어버려서 콘서트에 못 들어가고 있으니까, 왜 그러고 있냐며 대기실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꼬마랑 SS501이랑 밥도 같이 먹었다고.. 팬클럽 창단식 때는 팬들 700명이 밤새느라 밖에서 벌벌 떨고 있으니까, 이호연이 양해 구해서 안에 리허설 보게 도와주기도 했다.# SS501 공방 뛰러온 팬들한테 슬쩍 다가가서 "지금 하는거 재밌니?" 라든지 "현중이 왜 좋아해?", "쟤네 인기 어느 정도냐"라는 등 어슬렁 거리며 말을 건냈다고 한다. 심지어 멜론콘서트 때는 초록색 옷 입고 팬들이랑 같이 풍선 흔들고 있었다고..

말이 많은 젝스키스의 경우도, 결성 과정을 보면 멤버들 부모님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안심하고 맡기라고 말씀드리고 데려왔다. 강성훈 어머니는 아들이 갑자기 가수를 한다고 했을때 걱정했지만, 사장님을 보니 사람 좋아보여 맡기게 됐다고 말했다. 관련 내용은 각주와 같다.[45]

그렇더라도 연예계에서 무서운 이미지였다는 점은 맞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 단적으로 나온 방송이 2009년 12월 라디오스타SS501이 나왔던 편이다.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지기 얼마 전이다. 김구라, 윤종신, 신정환이 저럴 정도면 무서운 이미지가 유명했다고 보인다.
SS501이 내년에 재계약을 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 김구라가 여기저기서 영입 제안이 오냐고 물어봤다.

김현중: 그런 (제의를 해오는) 사람들이 없어요.

신정환: 왜 딜이 안 들어오는 줄 알아요?... 사장님이 무서워서 그래요.

김현중: 알고 있어요.

윤종신: 요즘은 안 무서우세요.

영상 4분10초부터
어떤 프로듀서가 표절곡으로 SS501한테 사기쳤던 이야기가 나왔는데, 윤종신이 돈 문제는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다.

김현중: 사장님한테 잡혀서요.. 다 뱉어냈어요.

김구라: 사장님이 그럴 때는 아주 뭐.. 대단하신 분입니다. 이 대표님.

윤종신: 사장님이 태권도 선수 출신인거 아시죠?

영상 4분45초부터

젝키 팬덤에게는 쌍욕을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DSP가 잘못한 점도 있긴 하지만, 사실 이상의 과장되거나 허위인 루머를 퍼뜨리며 욕하는 점이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밑에 따로 분리된 젝키 항목을 참조 바람.

SS501 팬덤의 경우를 보면, 초창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은 훈훈한 일화도 있었지만, 후반기에는 무리한 일본 진출을 했던 일, 제대로 활동을 시켜주지 않은 일 등으로 이호연에 대한 평판이 좋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는 회사 자체가 백억대의 부채 때문에 오늘 내일 하던 상황이긴 했다. SS501 막바지 상황은 젝키 해체 때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원래 이 무렵은 이호연이 뇌출혈로 사경을 헤메던 상태였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이호연이 있었으면 그룹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다는 아쉬운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외 2010년 1월 18일 전두환의 생일에 김현중이 참석한 일로 이호연이 욕을 많이 먹은 바 있다. 김현중은 자신은 사장님 생일에 참석한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생일이 1월 18일로 같다. 그렇다고 이호연 정치성향이 극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노무현 대통령 사망 당시 이명박 정권의 시퍼런 압박에 연예계도 눈치를 봐서 소극적으로 의사를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호연은 SS501을 조문하게 하고, 공항에서 출국할 때 멤버 전원 검은 양복을 입게 했다. 정치성향이 어떻다 보다, 그냥 별 생각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했다고 보인다. 한편 전두환 생일 참석 건을 가지고, 이호연이 김현중의 몸값을 떨어뜨려 DSP에서 못 나가게 하려는 수작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었다. 하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김현중이 무릎팍도사에서 직접 밝힌 바를 보면, 이호연은 김현중을 쿨하게 보내주면서 힘든 것 있으면 얘기하라며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 점을 봤을 때 음모론은 설득력이 매우 낮다. 당시 김현중 인기를 봤을 때 겨우 그 정도 사건 가지고 소속사를 못 찾을 수준이 아니기도 했다.

기타 유명인과의 관계나 일화 등을 보면 다음과 같다.

7. DSP 소속가수와의 관계

소속가수들이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이호연 사장에 대해 언급한 바 등을 보면 다음과 같다.

8. 젝스키스 팬덤과의 관계

8.1. 최악으로 치달은 관계 / 이후 계속된 욕설 및 루머유포

젝스키스 활동 당시에는 오빠들 가지고 번 돈을 젝키에게 안 주고 핑클에게 쏟는다는 말이 돌아 이호연 사장을 엄청 욕했고, 핑클에 대한 안티 활동도 심했다.#[61] 이후 젝스키스가 해체하면서 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훗날 멤버들 말에 따르면 강제해체는 아니고 해체 의향이 있는 멤버들이 다수였다. 다만 해체에 소속사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당시 팬들은 해체 전날 멤버들이 전화로 일방적으로 해체를 통보 받고 강제 해체 됐다고 굳게 믿었다. (심지어 오늘날도 그렇게 믿고 있는 팬들이 있다.)

그렇게 믿은 결과의 상징적인 예시가 조영구의 차를 박살낸 사건이다. 젝키가 해체한 날 팬들이 몰려가 조영구 차를 이호연 차로 생각하고 반파될 정도로 완전 부셔버렸다. 영원히 고통받는 조영구 차종이 그랜저 XG로, 산 지 보름도 안 된 것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차 안에 있던 조영구씨의 옷가지나 소지품 등도 도난당했다. 기사
파손된 차량 주인 SBS '한밤의 TV연예' 리포터 조영구씨는 "공연이 끝나자 정문 부근에 팬 1천여명이 몰려들어 '이호연(젝스키스 기획사 대표 이름) 죽여라' 를 연호하며 농성하다 갑자기 내 차를 보고 '이호연 차다, 부수자' 며 달려들었다" 며 "이들은 말리는 운전사와 진행요원들을 폭행, 밀쳐낸 뒤 차를 뒤집어 엎으려다 '애들이 다친다' 는 소리를 듣자 보도블록을 들고와 유리창을 깨고 보닛을 밟아 대파시켰다" 고 말했다.기사

이로 인해 현장에서 몇 명의 고교생 팬들이 경찰에 잡혀서 파출소로 연행되었을 때 조영구가 차마 학생들을 처벌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차비까지 줘가면서 집으로 보냈다고 훗날 토크쇼에서 밝혔고[62], 이후 팬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조영구에게 사과를 하고 조영구도 용서를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팬들이 십시일반으로 보상금을 모금하기도 했으나 모금한 인원이 20여명이었고,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모은 돈인지라 액수가 적어서 조영구 측에서 거절했고[63], 보상은 젝키 소속사 이호연 사장에게 받았다고 한다. 당시 수리비 견적이 1100만원이 나왔고, 1100만원 전액 이호연 사장이 보상했다고 밝혔다.기사.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급 차종이 반파됐는데 겨우 1100만원 보상하냐고 볼 수도 있는데, 당시 그랜져 XG의 신차가격이 2000만원 할 때다.기사 저 정도 수리비면 아예 다 갈아엎어 수리한 정도다. 그리고 저 정도 수리비면 새차 사다가 일주일 타고 중고차 시장에 매물로 내놓은 가격이기도 하다.

이외 당시 "미친 개호연 새끼 뒈지는 날 우리젝팬들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핀다."는 문구로 회사 사장 이름을 대놓고 욕하며 활보하고 다녔다.사진 그나마 이런 문구는 애교로 보일 정도인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있었다. "D.S.P 두고 보자 / 개좇십창 창녀 썅클 / 썅클은 창녀래요 / 뻑큐 씹탱 개호연 / 이호연 죽여라 / 창녀 핑클 / 이호연 너 나랑같이 죽자 / 이호연 너의 정력에 무릎을 꿇는다 / 이호연 제삿상에 옥돼지 머리 놔주마. / - 호연씨 사랑해요. 당신의 효리가 - / 이호연 너의 그녀들을 찾으려면 창녀촌으로 오너라 / 나는 개호연이다 나는 미친놈이다 나는 오늘 뒈졌다 속보 6월18일 2시 이호연 젝키팬에게 맞아 사망."# 당시에는 각주와 같은 경악할 수준의 루머를 퍼뜨리는 경우도 많았다.[64]

오늘날 이수만이나 방시혁, 박진영을 상대로 저런 행동을 하면 바로 경찰서 갈 각이다. 그리고 2000년 6월 8일 시사프로 피자의 아침 방송을 보면 당시 사무실 경호회사 직원이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고 있다. "18일..농성을 부리고 여기에다 계란 세례나 밀가루, 식초 이런 것들을... 난동을 부려가지고..."

2016년 젝키 재결합 이후 팬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호연에게 쌍욕하는 글도 다시 많아졌었다.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노인네가 갑자기 젝키 팬들에게 각종 쌍욕과 패드립을 엄청 먹었다. 젝키 데뷔때는 태어나지도 않거나 애기였던 신규 입덕 팬들도 올드팬들 말에 따라서 욕하며 움직였다. 그러나 과장과 허위 정보를 가지고 욕하는 부분이 많아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조. 오늘날 악플에 대한 고소와 처벌 사례를 비추어 봤을 때, 올라온 글들을 보면 빼박캔트 처벌 당할 수준이다.

전술한 수많은 소속 가수 및 관계자의 증언을 보면, 이호연이 젝키 팬덤의 주장과 같은 극악무도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언급이 다수 발견된다. 이외 정산 문제만 해도 과장과 허위가 심한데, 다른 그룹 얘기를 들어봐도 젝키 팬덤이 주장하는 수준의 악독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젝키의 선배 그룹인 ZAM의 윤현숙은 당시 돈을 다발로 받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같은 소속사인 박소현이 증언한 부분이다. 영상

8.2. 젝키 재결합 후 나온 DSP의 언플에 대해서

2016년 젝스키스의 재결합 후 YG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 소문이 돌자, 이호연 전 사장이 거동불가능한채 누워있는데 인사는 하러 왔어야 하지 않냐며 YG에 앞서 DSP에 연락했어야 한다는 언플 기사가 나왔다. 이에 대해 젝키 팬들이 몰려와서 해당기사 댓글은 악플 일색이다해당기사#. 6년째 거동불가능하고 말을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는 이호연이 기사를 냈을리는 없는데, 병상에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위 언플은 이호연 사장의 공로를 부각시키는 효과보다는, 대량의 악플과 허위 루머 유포 같은 부작용이 더 컸다. 최다추천 댓글 내용들을 보면 허위루머의 총집합 편일 정도다. 강제로 해체당했다, DSP 측이 젝키 상표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젝키로 소속사가 300억이나 벌었다, 밤무대 돌렸다, 술자리 불러냈다, 3000만원 행사 뛰고 80만원 받았다는 등의 내용인데,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최다추천에 박아놨으니, 이 기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이 그런 루머를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해당 언플 기사를 낸 DSP 또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젝키 시절 회사와 트러블이 심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젝스키스 팬덤이 이호연 사장에 대해 악플로 도배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특히 요즘 대중들은 저런 식의 기사를 "앞에 인사 얘기는 그냥 쓴 것이고 결국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거네"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도 그런 목적이 있었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왜냐하면 DSP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조차, 이호연 사장이 쓰러진 이후 회사가 쇠퇴하여 젝스키스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젝키 멤버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욕만 먹은 언플이다. 이호연 사장이 물러난 이후 각종 오판들로 쇠퇴한 경력을 봤을 때, 그런 오판들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보인다.

물론 이호연 사장이 젝키를 만들고 키웠으니,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장한테 병문안 좀 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저런 식으로 언플할 사안은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인 이호연이 기사에서 나오는 의견을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예 저런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다. 기사 대부분이 기자의 상상이거나 DSP 측의 의견일 것이다.

이 언플에 대해 젝키 팬들은 이호연 병문안이란 말을 꺼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반응으로 도배했다. 그러나 젝키 팬덤이 이호연과 최악의 관계지, 위 목차에 서술되어 있듯이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과 그런 최악의 사이는 아니다.

이외 팬들은 이호연과 소속사는 젝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고, 젝키 멤버 본인들 매력과 능력으로 뜬 것인데 뭔 염치없는 소리를 하냐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전혀 말이 안되는 억지다. 소속사가 키우는 것이 아이돌이다. SM과 비교해서 부족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DSP와 이호연 능력으로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멤버 뽑는 것, 유명 작곡가한테 좋은 노래 받아오는 것, 공개방송 출연을 조율하는 것 등 모두 소속사의 몫이다. 오히려 DSP가 아니었으면 당시 SM의 독주에 누가 제동을 걸었을지 의문이다.

우선 그 정도 수준되는 멤버들이 한 팀에 모인건 DSP와 이호연 역할이 컸다. 2016년 라디오스타 방송을 계기로 팬들은 강성훈이 젝키 멤버를 구성한 것이지 이호연은 젝키를 만든 것에 1도 한 것이 없다는 주장을 했는데,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전혀 아니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하와이에 가서 직접 데리고 왔다. 이호연 사장이 하와이의 클럽 사장과 친분이 있어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 참조)

장수원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장도 강성훈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직접 데려온 인물이다. 이호연이 이주노와 형 동생 하는 사이로 가까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65] 김재덕의 경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사실 강성훈이 뽑기 싫어했다. 즉, 강성훈이 젝키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비싸고 좋은 작곡가를 많이 섭외해서 겨우 3년 활동인데도 명곡들이 많다. 해체 후 16년이나 지나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지만 오늘날 들어도 좋은 노래가 많아 세트리스트를 충분히 채웠다.[66] 이에 대해 팬들은 작곡가가 곡을 만든거지, 소속사랑 사장이 한게 뭐냐고 욕하는데,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가 좋은 작곡가로부터 대박날 수 있는 곡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 능력 여부에 따라 아이돌의 성공이 결정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에게 블랙스완같은 희대의 망곡을 주면서 못 띄우는 것만 봐도, 소속사 사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외 이호연 까는 용도로 '젝스키스라는 이름 조차 MBC PD 은경표가 지어줬는데 이호연은 한게 뭐냐'는 말이 많은데, 그 MBC 은경표 PD가 이호연 인맥이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을 스카웃 했을 때, 이호연이 하와이에 간 이유가 은경표 PD랑 놀러간 것이었다. 사장이랑 친분이 두터우니 고민을 거듭해서 젝스키스라는 퀄리티 좋은 이름을 지어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름을 지어줄 리도 없었다.

애당초 데뷔하자마자 H.O.T.의 라이벌 포지션으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요 방송에 출연한 것은, DSP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의 DSP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다르다) 데뷔하자마자 무려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푸쉬를 받았다. 당시 지상파 3사가 전부고 케이블 방송이 거의 없었던 시절 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푸쉬 능력이다. 경희대 논문[67]을 보면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같은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활동은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연 프로그램이나 음반활동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DSP> 소속의 젝스키스가 1998년 7월, 3집 앨범을 낼 때 핑클이 데뷔했고, 1999년 8월에 젝스키스 4집 앨범 발매와 맞추어 클릭B가 데뷔했다. 그리고 젝스키스의 경우도 데뷔 앨범은 1997년 5월 14일에 발매되었지만 첫 방송 출연은 그보다 한 달 전인 1997년 4월 15일에 있었고 1집 발매 직후부터는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젝스키스가 데뷔 전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당시 이 매니지먼트사에 MBC 라디오와 KBS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탤런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소현, 이본, 오현경은 연기와 MC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에 소속 가수들을 홍보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물론 실력도 없는 가수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출연시키면 말도 안되겠지만,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었다 싶을 때 다양한 홍보채널을 이용하고, 그랬을 때 이왕이면 같은 소속사 연예인이 진행하거나 출연하는 프로에 함께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방송가의 일종의 관행이기 때문이다."(DSP 사장) 이처럼 이미 다른 스타를 통해 방송가와 인맥을 쌓아 놓은 기존 매니지먼트사들은 그 회사의 신인을 홍보할 때 기존의 스타를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홍보방식은 방송사와 매니지먼트사 양측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방송사에서는 스타를 섭외해야 할 필요가 있고 매니지먼트사에서는 신인을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끼워팔기'라는 기존 스타를 활용한 홍보방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 논문에 나온 다른 내용을 보면, "젝스키스가 음반을 내기도 전인 1997년 3월부터 각 통신망에 멤버들의 사진과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한 정보들이 제공됐다. 그로 인해 젝스키스는 매체에 출연하기도 전부터 10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데뷔 무대 때부터 팬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로서는 최초이자 혁명적인 방법이었다.

데뷔 이후에도 최고로 인기있던 프로그램들에 젝키가 무수히 많이 출연했는데, 소속사의 파워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스케줄을 매우 빡세게 돌려 원망을 들었지만, 그렇게 쉴 새 없이 앨범을 내며 몰아부쳐 H.O.T.를 따라잡았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2011년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이에 대한 증언이 나왔다. 영상의 6분 20초부터 나온다.

여기서 은지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여러 사람들이 H.O.T.와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데뷔초에는 인기 격차가 너무 커서 따라잡기가 너무 벅찼다. 콘서트를 하면 계란 후라이였다."고 한다.[68] 하지만 H.O.T.는 활동 후 휴식기가 길었던 반면, 젝스키스는 쉬지 않고 1년에 2~3장 씩 앨범을 내며 활동해서 팬을 늘려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69]

근본적으로 DSP 자체가 거의 이호연 사장의 카리스마, 인맥, 그리고 감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당시에는 이호연 대표가 건재할 때고, 그 덕분에 젝스키스 역시 성공하는데 큰 힘을 받았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70] 이런 의미에서 도의적으로 뇌출혈로 6년째 누워있는 사장한테 인사 좀 하러 오라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재결합시 DSP와 계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젝스키스 멤버들은 2016년 12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참고로 이호연은 명목상 대표로 되어 있을 뿐, 2010년 뇌출혈 이후 현재까지도 병상에 누워있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거동이 불가능하며 감정 표현 정도가 가능한 상태라고 알려져 있다.
“DSP미디어는 우리가 활동할 당시와 전혀 다른 회사였다.”

그룹 젝스키스가 재결합 활동을 데뷔 당시 소속사인 DSP미디어와 협의하지 않은 이유를 이 같이 밝혔다. 젝스키스는 1일 서울 마포구 YG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재결합을 하며 DSP미디어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면서도 “(과거) 대표님은 편찮으시고 매니저는 단 한명도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혀 다른 회사였다”고 말했다. 은지원과 제이워크로 활동했던 장수원, 김재덕은 과거 DSP미디어 가수들이 모두 출연한 패밀리 콘서트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과거 함께 일했던 매니저는 없었다고 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690448
과거 소속사였던 DSP미디어와의 연결점
“DSP는 우리가 알던 과거 소속사가 아니었어요. 이호연 대표님 말고는 우리가 아는 스태프는 아예 없죠. 다른 회사가 돼 있는 곳이라 교감할 수 없었어요.”(장수원 강성훈 은지원)
http://allets.com/bbs/board.php?bo_table=allets&wr_id=656&sca=STAR
과거 소속사 DSP미디어가 아닌 YG와 손을 잡게 된 이유도 솔직하게 전했다. 은지원은 "예전에 DSP 패밀리 콘서트에 갔는데 저희가 활동할 때 있던 분들이 단 한분도 없었다. 이호연 사장님 외에 다른 회사가 되어있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473169

이 말은 적당히 둘러댄 말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2011년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에서, 카라 측의 주장과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두 가수 모두 같은 내용의 인터뷰를 한 것은 신빙성을 높여준다.
현재 카라 측은 DSP의 매니지먼트 미숙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카라 매니지먼트를 총괄하는 DSP 이호연 사장의 부인이다.

작년,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사장 부인이 경영권을 쥐게 된 가운데, 그녀는 연예 소속사 관리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속사 경영을 시작, 그로 인해 많은 중역 간부들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들 중역 간부 또는 베테랑 직원들은 핑클, ss501 등의 매니지먼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매니지먼트 전문가들이었다.

또한 사장 부인은 카라의 매니지먼트를 함에 있어서도,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지지해 카라 멤버들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카라측의 주장이다.


요컨대, 이호연 사장이 자리를 비우고나서 DSP의 매니지먼트가 매우 부적절하고 미숙했고, 이것이 이번 계약 해지 소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변호사측은 “능력 있는 전문적인 소속사를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http://jpnews.kr/8368

9. 경력

9.1. 약력

9.2. 수상 경력

9.3. 제작 드라마

9.3.1. SBS

9.4. 제작 예능

9.4.1. KBS

9.5. 제작 음반


[1] 1997년에 교직과정을 없애고 스포츠과학과로 개편하여 비 사대로 전환되었다. 현재는 수원 이과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호연 사장이 재학하던 당시에는 서울 문과캠퍼스에 속해있었고, 1999년에 수원으로 이전했다.[2] 윤종신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과거에는 태권도 선수였다고도 한다. 사실 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연예계에서 한창 매니저 활동을 할때도 싸움을 상당히 잘하는 성격이 무서운 매니저라고 연예인들 사이에서 소문났던 인물이었다. 나이트클럽과 카바레 등의 밤무대를 운영하던 못된 조폭들도 그가 관리하는 가수들만은 못 건드린다고 소문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후대의 90년대말 ~ 2000년대초 젝키나 핑클 문제 등에서 그가 깡패사장이라는 루머가 퍼진 것도 이미 80년대부터 연예계 내에서는 그가 그쪽으로 매우 유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3] 물론 엄밀히 따지면 과도기적 형태의 그룹이긴 하다.[4]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이호연 부분 참조.[5] 훗날 2010년대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당시 태진아가 아픈 이호연 대신 나서서 중재를 도맡은 것도 알고 보면 태진아와 이호연의 친분에서 비롯되었다.[6] 당시 기사 원문: ‘SM기획’과 ‘대성기획’은 그중 단연 두드러지는 곳. SM기획(대표 이수만)은 H.O.T S.E.S 신화를, 대성기획(대표 이호연)은 젝스키스와 핑클을 배출해 가요 시장의 권력을 장악했다. 요즘 가요계를 ‘수만이와 호연이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다만 당시에도 JYP와 iHQ(싸이더스)가 합작한 god는 대히트했기 때문에 SM과 DSP만 당시 1세대 아이돌 시장을 장악하는 수준은 아니었다.[7] 사실 신흥 강자라고 하기엔 양현석이나 박진영도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성공한 프로듀서로 활동하긴 했다. , SE7EN, god, 원타임, 빅마마 등이 대표적. 그러다 대형 기획사로 발돋움한게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라고 보면 될 듯.[8] 뇌졸중과 함께 한방에서 흔히 중풍이라 부르는 중병이다. 보통 3년 정도의 투병생활을 하다 사망하며, 운좋게 회복된다고 해도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처럼 거동이 불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뇌출혈 또는 뇌졸중 = 사회생활 사형선고로 간주되어, 예나 지금이나 이 증상으로 쓰러진 사람에게는 문병의 발길조차 뜸한게 대부분이며, 같은 사람이 2번 이상 문병 오면 환자가 지난날 덕을 많이 쌓았다고 할 정도.[9] 멤버 한명 한명 잘 뽑아놓고 데뷔는 시켰었는데, 사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회사가 기울었다. 이후 멤버들 능력치에 비해 제대로 서포트를 못 받았다는 평이 많다. 레인보우에 대한 세간 평가가 '멤버 개개인은 좋은데 왜 안 뜨는지 모르겠다'며 '레인보우가 1위하길 온 우주가 기원한다'는 식이었는데, 괜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호연이 그렇게 갑자기 누워 버린 것이 레인보우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일지도 모른다.[10]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11]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19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19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12] 2015년에 핑클 멤버들이 모인 후 옥주현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을 때,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의 판단과 추진력이 크게 작용했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2016년 박근태 작곡가의 인터뷰를 보면,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의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13] 기사[기사원문] 이호연 대표는 국내 매니지먼트 1세대 출신으로서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SS501, 카라, 레인보우 등 대중들에게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은 뮤지션들을 기획, 제작하여 한국의 음악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카라의 경우 국내 걸그룹 최초로 첫 도쿄돔 단독 공연을 기획, 개최하는 등 한류열풍을 이끄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이호연 대표는 TV드라마 '마이걸', '연개소문', '외과의사 봉달희' 등을 제작.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미디어사업 분야에도 기여한 점이 이번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 수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15] 장례식에 누가 왔는지 안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례로 옥주현의 경우 장례식 기간 내내 아무 기사가 없었지만, 발인식 날 소속사 SNS에서 조문했다는 내용을 올려 알려졌다. 기사로 언급되거나 연예인 자신이 밝히지 않는 한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문객 취재는 언론 윤리 상 안하기로 합의가 되어있다#. 현실은 안 지켜지는 경우가 많지만...[16] 다만 해당 기사에서 카라 멤버들 입장은 잘못 서술되어 있다. 후술한 바와 같이 계약 분쟁에서 카라 멤버들은 "이호연 사장님은 믿지만 회사는 못 믿겠다"는 입장이었다. 이호연 사장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모든 문제가 시작됐다고 밝혔었다.[17] 출처: 스포츠조선 2000년 8월 3일 금요초대석#[18]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19] 기사.[20]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21] 당시 코스닥 종목코드는 016040[22] 수백억대로 알려져 있긴 한데 어디서는 200억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400억이라고 하는 등 정확한 금액은 알려져 있지 않다.[23] 이후 스윗튠은 수많은 명곡들을 써내 탑급 작곡가로 올라섰다.[24] 풋스마 20110308일자, 메렝게의 기분 20110204일자, How to モンキーベイビー!2009년 11월 방송 등[25] 당시 자신이 일본의 개그맨이라고 말은 했다지만,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은 상태고 한국에 유명한 일본 연예인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는게 보통일 것이다.[26] 데뷔하고 거의 곧바로 이호연 사장이 쓰러졌다. 데뷔는 시켜놨는데 관리는 전혀 못해준 셈이다.[27] 김재경은 연습생 당시에도 에이스라고 소문이 많이 퍼졌었다. 고우리는 지상파 드라마에 조연으로 활발히 출연했으며, 조현영도 남초 사이트에서 매우 흥했었다.[28] 그래서 김재덕 본인은 자기가 얼굴이 잘생겨 뽑힌줄 알았다고 한다.[29] 전술한 일본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와의 일화에서도 이호연을 경비원으로 착각한 것을 보면, 평소에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녔다고 보인다.[30] 이효리는 그래서 이후 DSP의 다른 프로듀서한테 노래 실력 점검차 노래방 오디션을 받았는데, 사장이 바로 OK했다는 소식에 옥주현을 능가하는 보컬이 들어왔나 싶어 한껏 기대하던 프로듀서가 자기 노래를 듣곤 실망했다고 예능에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31] 첫 매니저가 DSP의 길종화 이사였다.# 2016년 젝키가 재결합하며 강성훈이 박소현의 러브게임에 출연했는데, 연습생 시절 강성훈과 은지원이 원래 듀엣으로 데뷔하려던 모습도 다 알고 있었다.[32] 아궁이 160715일자 방송편.[33] 핑클도 사실상 이효리 빼곤 옥주현이 OK해서 죄다 캐스팅된 멤버들인거 보면, 메인보컬의 의견을 꽤나 신경썼던 것으로 보인다. 노래는 얘들이 다 할테니 다른 애들 노래 실력은 볼 필요 없다?[34] 장수원은 오디션 장에서 할 줄 아는게 없다고 말하는 순수함이 마음에 들어, 강성훈이 사장한테 귓속말로 "쟤 픽스 하시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 김재덕은 워낙 춤을 잘 추니 사장이 처음부터 OK 했다. 근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은 김재덕 얼굴을 보고 뽑기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강성훈이 해명하길, 얼굴이 아니라 사투리가 너무 쎄서 오해했다고 밝혔다. // 이재진은 강성훈 덕에 뽑힌 측면이 크다고 보인다. 강성훈 생각에 김재덕이 각기춤을 잘 추는 반면 이재진은 웨이브를 잘 춰서 조화가 맞아 보였다고 한다. 추가로 영입한 4명의 멤버 중 이호연이 반대한 멤버는 이재진이다. 1999년 서세원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해당영상 14분부터), 이호연은 이재진을 보고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과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 이호연 사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낸 유일한 멤버가 이재진인 것을 보면,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 고지용은 강성훈과 초등학교때 부터 친구인데, 강성훈의 추천으로 젝키에 합류하게 됐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호연이 처음 얼굴 보자마자 바로 OK 해서 멤버로 영입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날 강성훈의 고지용에 대한 발언은 부정확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지용이 강성훈한테 가수를 먼저 하고 싶다고 말했다'라는 것은 상당부분 전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편집상의 문제라고 보인다. 고지용은 자서전에서나 인터뷰에서나 늘상 원래는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언급해왔고 방송에서도 사업가가 꿈이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수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에도 '성훈이의 추천으로' 라고 대답했었다. 즉, 강성훈의 말에서 '고지용이 가수를 하고 싶어했다' 라는 것은 먼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자기 의견을 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강성훈의 제안을 거절하고 난 뒤 설득 끝에 승낙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35]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36]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이호연 부분 참조[37] 성공한 DSP 출신 연예인들을 보면 타고난 외모나 근성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 때 남들 눈치 안 보고 거리낌 없이 편하게 해도 보기 흉한 게 없는, 소위 구김 없는 면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타고난 것과 성장 과정이 받쳐주어야 하는 점들이다. 꼭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 과정이 그렇게 유복스럽지 않더라도 여전히 구김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애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스타로서의 근성을 뒷받침한다.[38] MAYDAY가 폭망하고 the Ruby 역시 초동 판매량이 1,500장에 그치는 등, 아예 최하위권 걸그룹으로 떨어지고 1년 6개월 동안 장기 공백기를 겪었다. 심지어 CLC도 2019년 2월에 No로 더 쇼 초이스를 2번이나 획득한 와중에, 에이프릴은 아직도 1위가 없다. 그나마 Da Capo 앨범으로 컴백하며 더 나은 모습을 보였지만, 또 다시 강적들을 만나는 바람에 1위에 실패했다.[39] 다만 이효리는 다른 소속사에 있을때 연습생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성유리나 이진보단 총 연습생 기간은 길 수도 있다. 옥주현의 경우 핑클 멤버 중에선 가장 먼저 캐스팅되기도 했고, 이미 그전부터 노래야 탁월했으니..[40] 카라 강지영의 경우, 김성희의 탈퇴로 팀에 공백이 생기자 이호연이 길종화의 추천으로 찾아내 캐스팅한 뒤 1달도 채 안되어 팀에 넣어 데뷔시켰다. 2008년 7월에 구하라와 강지영이 카라 새 멤버로 투입되었고, 본격적으로 그룹이 뜬게 Pretty Girl이 히트한 12월부터니 진짜 강지영은 6개월도 안되어 세상이 달라진 기분이긴 했을듯.[41]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42] 대표적인 사례가 NewJeans민희진이다.[43] 연예계 투신 전 고등학교 체육교사를 한거 보면 딱히 조폭계에 몸 담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44] 물론 성균관대학교가 오늘날만큼 명문대 취급받던 시절은 아니긴 했지만, 당시엔 대학을 나온다는 자체가 나름 엘리트였단 소리기도 했다. 다만 라이벌 취급받던 이수만은 서울대를 나온게 함정.[45] 컴백 자서전 강성훈 어머니 부분: "저 가수가 될래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화에 나는 몹시도 당황했었다. 한국에 있어도 불안했을 텐데, 미국에서 가수제의를 받았다는 말에 나는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늘 아들을 믿었던 나는 무작정 반대만을 할 수는 없었다. 성훈이에게 가수가 될 것을 제의했다는 기획사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걱정과는 달리 DSP는 평판이 좋은 기획사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꾼 것은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의 이호연 사장님을 만나면서였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훈이는 재능이 많은 아이입니다. 키워보고 싶습니다." 한시름 놓긴 했지만, 사실 성훈이의 첫방송을 보기 전까지 마음속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 김재덕 아버지 부분: 서울에 올라가서 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차마 말릴 수 없었다. 부모로서 특별히 잘해 준 게 없이 때문에 저 좋아서 하겠다는 데 말릴만한 명분이 없었다. 더욱이 사장님께서 함께 부산에 내려오셔서 "염려하지 마세요, 좋은 가수로 키우겠습니다"하는 바에야..[46] 풋스마 20110308일자, 메렝게의 기분 20110204일자, How to モンキーベイビー!2009년 11월 방송 등[47] 자신이 일본의 개그맨이라고 말은 했다지만,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은 상태고 한국에 유명한 일본 연예인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는게 보통일 것이다.[48] 그런데 박세리의 아버지는 그냥 건달도 아니고 '진짜로' 조직폭력배였다. 박세리 항목 참고. 이호연 사장이 한 주먹 한다는 루머가 퍼지는데 박세리의 아버지인 박준철과의 인연도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다.[49] 2011년 5월 18일자 방송[50] 2017년 6월 10일자 방송[51] 2014년 1월 25일자 방송[52]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176p[53] 이호연 사장 본인이 태권도 선수 출신이다.[54] 본 문서에 서술된 젝스키스 멤버의 영입 과정을 봐도, 부모님한테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허가를 받은 바 있다. 이런 방면으론 타고난듯.[55] 파일:유튜브 아이콘.svg[56] 윤종신, 故 이호연 사장 추모.."그립습니다"[57] 젝키 결성 당시 6명 중 유일하게 이호연이 탐탁치 않아했던 멤버가 이재진이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영상 14분부터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다.[58] 이효리가 이호연 애를 낙태해서 핑클한테 대상줬다는 식의, 오늘날 같으면 바로 고소미 먹을 수준의 글까지 보였다.# # # # # # # 뒤늦게 열람을 막아 놓은 링크의 당시 캡쳐본은 다음과 같다.파일:젝키 팬덤의 루머 유포.png[59]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60] 정선희가 2000년대 예능 여걸파이브에서 밝히기를, 사장이 당시 "물건이 들어왔는데 좀 커.."라고 했다고 한다.[61] 핑클멤버였던 성유리가 예전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활동 당시 자기가 화장실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젝키팬들이 입에 담지도 못할 더러운 쌍욕을 했다고 한다. 이 때매 성유리는 그때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 교복입은 여학생들만 봐도 식은땀이 흐른다고 밝혔었고 추가로 이효리도 한동안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한다.[62] 정식으로 보험처리를 하려면 일단 학생들을 처벌해야 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63] 조영구 본인이 놀러와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20명 밖에 모금을 안했다고 직접 말했다.#[64] 오늘날 보면 손발 오그라드는 수준의 주작 글을 올리며 핑클클릭비를 천하의 나쁜놈으로 몰아갔다.## 본 내용이 작성된 이후 일부 팬사이트가 글을 막아놨는데, 이전에 캡쳐한 화면은 다음과 같다.파일:젝키 팬덤의 루머 유포.png 이외 이효리가 이호연 애를 낙태해서 핑클한테 대상줬다는 등 오늘날 같으면 바로 고소 먹을 수준의 루머 글을 올렸다.# # # # # # #[65]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참조[66] 수록곡 중에서도 명곡들이 많다. 뫼비우스의 띠 같이 '이게 젝키 노래였어?'라고 하는 곡들도 상당수 있다.[67] 김정은,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68] 계란 후라이는 하얀색 H.O.T 팬들 사이에 둘러싸인 노란색 젝스키스 팬을 비유한 것이다.[69] 아무튼 팬들 입장에선 음악방송이며 각종 예능에서 거의 1년 내내 젝키를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에 익숙한 일부 올드팬들은 재결합 후 젝키의 신곡 활동이 2~3주란 소리를 듣고 적응 못하고 있다.[70]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