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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21:32:47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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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려
2.1. 상산 임씨 일가2.2. 왕실2.3. 정윤파2.4. 충주파2.5. 조정 대신2.6. 군부2.7. 기타 호족
3. 후백제4. 신라5. 화엄종(華嚴宗)6. 발해7. 정안국8. 말갈(여진)9. 거란(요나라)10. 후진11. 기타

1. 개요

웹소설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의 등장인물을 정리한 문서.

2. 고려

2.1. 상산 임씨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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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작의 주인공.

2.2. 왕실

2.3. 정윤파

2.4. 충주파

2.5. 조정 대신

2.6. 군부

2.7. 기타 호족

3. 후백제

4. 신라

5. 화엄종(華嚴宗)

의상대사가 신라에 널리 퍼뜨린 교종의 주요 분파 중 하나. 통일신라시대까지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후삼국시대 선종이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과거보다 세가 많이 약해져 고민하고 있다. 이 와중에 후삼국의 정세 문제와 교리 논란으로 현 시점에서 고려를 지지하던 북악파와 후백제를 지지하던 남악파가 나뉘어 갈등하고 있어 더 고생 중이다. 그래도 후삼국 통일 뒤 원 역사대로 고승 균여가 화엄종을 통합했고, 주인공 임연우가 화엄종과 친해서 후원을 해주었다는 후대 기록이 있으므로 원 역사보다는 처지가 나았을 듯하다.

6. 발해

7. 정안국

8. 말갈(여진)

백두산의 대분화 이후, 고려와 합심해서 거란에 대항한다. 작중 고려사의 언급에 따르면 고려가 발해령 대부분을 정복하고 칭제건원한 뒤 여진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신인(神人)으로 여겨진 임연우를 따랐다고 하므로 청나라는 몰라도 금나라 건국은 없었을 듯하다.

9. 거란(요나라)

10. 후진

11. 기타


정체
왕노인의 정체는 실종되었다 알려진 신라삼최 중 1명, 최치원이었다. 이전부터 왕노인의 비범함을 의심하던 연우는 팔관회에서 왕노인이 자신이 읊은 이규보의 시를 정확히 평가하자 해인사 얘기를 꺼내 왕노인을 떠보면서 그가 최치원임을 얼추 확신하고 필요한 때 써먹기 위해 계속해서 이규보의 시를 종종 거론하며 붙들다가 때가 되자 그의 정체를 폭로해 고려에 귀의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런 연우의 계책에 넘어갔음을 깨달은 최치원은 정체를 들킨 시점에서 빨리 떠났어야 했다며 가볍게 탄식하면서도 고려에 남기로 결심한다. 다만 본인은 조국인 신라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며 출사를 거부했으며 이후에는 상산저에서 손님으로 머무르게 된다.

신라 말 명성을 떨친 신라삼최 중 으뜸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다 정체를 가장 먼저 간파한 것도 연우다 보니 연우에게 학문과 식견을 가르친 스승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최치원 본인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소리인지라 이를 부정하지만 워낙 세상일과 손을 뗀 인물이라 그런지 주위에서는 세상일에 관여한 게 들키기 싫어서 둘러댄 거라고 받아들이고 있고 연우 역시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역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기에 침묵을 유지하며 학벌사기를 치는 중이다. 이후 임연우에게 종종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면서 조언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왕건은 최치원의 명성을 알기에 출사시키고 싶어했지만 최치원은 그것만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연우의 글씨 트릭을 보고 임연우의 정체를 어렴풋이 간파해 "이게 별로 좋은 현상 같지 않다"며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똑같은 트릭이 가능한지 시험해 보라 조언하고, 임연우도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 이전과 달리 김선우의 정체성이 아니라 임연우의 정체성이 우선시되었음을 글씨 트릭으로 깨닫고 왕무와 합방하게 된다.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며칠 뒤 사망한다.[105] 임연우에게는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어 대업을 이루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최치원도 신라의 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부가 고려에 항복했을 때 왕건이 보인 관대한 조치를 보고 안도했다고 한다.[106]

죽기 직전 임연우와 대화하면서 임연우가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믿냐"고 묻자 "신라인들은 김유신이 33천(이세계)에서 온 사람이라 믿으며 내가 볼 때 임연우도 그런 사람 같다"고 긍정한다.[107] 최언위와 잠깐 대화하고 얼마 뒤, 최치원이 곧 죽는다는 말을 듣고 개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왔으며 김부도 최치원을 문병했다고 한다.[108] 신라의 멸망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신라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던 최치원에게 있어 6두품을 만나러 신라왕이 직접 들른다는 건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본인도 나름 기쁘기는 했을 거라고 한다.

유긍달의 수국 스파이 수법을 일찍 간파했지만 직접 말하지는 않고 수국에 대해 적은 책을 통해 임연우에게 간접적으로 암시하였다. 이 때문에 최치원 사후에 임연우가 알고 이를 이용해 충주파를 와해시킬 수 있었다.

[1] 왕건이 임희의 젊은 시절 외모가 자신과 달리 근엄하기만 하고 평범했다고 디스하는 장면이 있다.[2] 설정상 911년생인 임연우가 10살일 때 약혼했다고 한다.[3] 왕건의 아들을 낳은 왕후들 중에 임희 본인이 감당 못해내는 대호족을 아버지로 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정윤과 이 결혼하면 이들과 대결을 하면서 정윤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충주 왕후의 아버지인 유긍달과 황주 왕후의 아버지인 황보제공을 도저히 적이 된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4] 특히 요나라에게 발해가 멸망할 거라 예언한 것이 결정타였다고 한다.[5] 임연우의 생각에 따르면 조선시대와 달리 후삼국시대 때는 신라의 영향으로 고위층 여성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6] 둘이 사이가 나쁜 건 삼한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어 둘이 초대 병부령 순군부령을 각각 맡았어도 특정 가문의 병권 독점을 우려하지 않았을 정도이고, 서로의 영지가 맞붙어 있는데, 서로를 경계하여 접경지대에 사병을 각각 배치해 놓았다.[7] 원 역사에서 임희와 임명필은 둘 다 진천 임씨에 속하는 호족 출신이지만, 임명필이 왕무가 아니라 왕요의 편에 든 것에서 사이 나쁜 친척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8] 정작 이때까지도 남자였던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던 임연우는 그냥 결혼을 안 하려고 해서 다른 혼인도 피하려고 했다.[9] 이후 왕건과 임연우와의 대화에서 삼국통일할 때까지는 호족들이 자신의 외손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다는 꿈을 유지해야 자신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다는 이유로 일부러 애매한 집안인 상산 임씨를 왕무에게 붙여주었다고 언급된다. 단 왕건은 삼국통일을 하면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고, 원 역사에서도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걸 성공하기는 했다. 결국 불안정한 기반을 해결하지 못해 왕무-왕요-왕소의 3연속 즉위와 왕소의 대숙청이라는 결과를 부르지만.[10] 작중 언급을 보면 877년생인 왕건과 나이가 가까워 보이는데, 870년대 후반생이라면 947년 당시 70세 정도였을 것이다.[11] 정사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12] 당시에는 책을 만들려면 필사를 해야 해서 책값이 매우 비쌌다.[13] 아직 고려가 건국된 지 오래되지 않아 예법이 정착되지 않아 그런 것 같다. 친정 아버지인 임희도 딸이 정윤비가 되고 나서도 역시 말을 놓는다.[14] 왕건이 호족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 운영비용이 많이 드는 격구단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이 격구단이 사병의 규모와 무장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는 개경에서 유사시에 쓸 수 있는 기병 20~25명 정도를 추가로 얻게 되는 것이라 호족들이 왕건의 의도를 알면서도 만들 수밖에 없다.[15] 930년 기준 2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나이로 이 시대 남자들 치고는 늦게 결혼한 거지만, 여동생의 결혼으로 인해 대호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비슷한 수준의 가문들이 혼사를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연우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다[16] 정윤의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임희가 "연우가 파혼되고 나서 새로운 혼처를 구하는데 4~5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하자, 연우가 20살도 넘어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걱정했지만, 전생에 남자였던(...) 임연우는 그냥 혼인 자체를 안 하려고 해서 개의치 않았다.[17] 정확한 시기는 나오지 않으나, 936년 후삼국시대 종결로부터 몇 년 안 가 태어났고 왕현이 태어난 이후에 940년 백두산 폭발 예언을 왕건에게 하기 때문에 936~939년 사이에 태어났다. 정황상 937~938년 사이에 태어났을 듯하다.[18] 이 때문에 대호족들은 왕건 사후 왕무가 즉위했을 때까지도 임연우가 아들을 못 낳으면 왕요를 왕태제로 삼으면 안 되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당대 호족들은 건장한 왕무가 죽을 때까지 오래 기다릴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왕요가 왕태제가 되었으면 바로 죽이고 왕요를 왕위에 앉혔을 거라고 한다.[19] 임연우는 고려시대 혜종의 피휘로 흔하디 흔한 글자인 무(武)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20] 피휘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는 작중에서 묘사되지 않아 불명이다. 왕건(建)과 왕무(武)의 피휘 건도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묘사되지 않는다.[21] 정종(定宗)은 923년생으로 912년생인 혜종의 11살 연하이다.[22] 원래 왕요는 견훤의 외손녀인 박영규의 딸 문공왕후문성왕후, 청주 김씨인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과 혼인하였는데 유긍달이 실각했을 당시 둘째 남동생인 왕정이 9~10세의 나이로 문혜왕후와 약혼하려다 일어난 사건임을 고려하면 박영규의 딸과 약혼했다 파혼당하고 그저 그런 집안과 혼인한 모양이다.[23] 왕요와 왕소의 부인이 원 역사와 달리 유력 호족가가 아니라는 것과 대목왕후의 외조부인 황보제공이 유긍달의 배신에 매우 크게 화를 내 절연했음을 고려하면 대목왕후와 파혼하고 그저 그런 집안과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24] 역사 개변으로 양자가 안 되었을 수도 있고, 양자가 되었다가 유긍달의 간첩 논란으로 파양당하고 충주원에 돌아갔을 수도 있다.[25] 장보고가 841/846년에 사망하였고 청해진이 851년에 없어진 것을 고려하면 850년대에 해당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26] 이 과정에서 청해진의 생존자들을 지하실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를 통해 당나라로 탈출시키기도 했다. 여담으로 비밀통로에 있는 각종 그림과 조각들은 청해진 생존자들이 대기 중에 심심해서 만들었다.[27] 왕평달의 말에 따르면 어릴 때 어머니가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아버지는 끝까지 어머니의 행방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섣불리 신라 조정에 원한을 가졌다가 김헌창장보고의 전례를 밟을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고.[28] 저민의를 서해 용왕의 딸로 비유한 이유는 저민의가 바다의 용처럼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29] 원종·애노의 난이 889년이기 때문에 889~890년에 사망한 것 같다. 930~940년대 초에 10대의 나이로 저민의와 혼인했다는 설정이니 사망 당시 60~7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0] 이후 저민의의 유골과 묘비명은 회수되어 절에 봉안되었다고 하며, 작제건이 회고록과 함께 두은점과 저민의의 가문 족보도 따로 남겼다고 한다. 에필로그에서 본편 세계에서도 고려사가 있다고 언급되는 만큼 본작의 고려사에는 해당 에피소드가 전부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1] 수수께끼를 풀면 어릴 적 갑자기 실종된 어머니의 행방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32] 왕건의 부인으로서의 연우의 시어머니는 29명이지만, 남편인 왕무의 친모로서의 시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이다.[33] 다른 왕후나 부인들은 친정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참고로 유금필도 본인의 세력은 미약하나 그 딸인 동양원부인이 기거하는 동양원이 나주원보다는 사정이 낫다.[34] 은광을 갖고 있어 집안의 돈줄인 며느리가 다치면 안될 일이기도 하고 왕무가 고창성에서 가마솥 뚜껑 들다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35] 원 역사에서는 장화왕후의 자식으로 혜종 1명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본작의 오리지널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 초 왕족들의 기록은 실전된 기록이 많고, 왕건도 몇몇 자녀들이 누락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장화왕후의 딸이라는 설정이 마냥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36] 이걸 들은 연우는 기겁한다.[37] 진짜 이유는 따로 있으나 왕건이 이유를 아는 사람들에게 어명으로 입막음을 했다.[38] 연우가 동양원부인에게 호감을 많이 느껴서 흐지부지 넘어가긴 했어도 이 건은 동양원부인이 연우와 상산 임씨 일가를 왕위쟁탈전으로 꼼짝없이 끌어들인 일인데, 친정아버지와의 상의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으며, 상의도 없이 했다면 더더욱 비판을 받아야 할 문제이다. 이렇게 슬쩍 넘어가는 것도 정치력이다[39] 왕무가 연우 일편단심이라도 왕무의 직위와 현 입장상 정략결혼으로 싫어도 연우 외의 부인을 들이게 될 확률이 높다.[40] 고창 전투때 유금필이 자신의 작전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패서 호족들의 반감을 크게 살 행동을 했다.[41] 유긍달이 나주원뿐만 아니라 자신과 연합하던 모든 호족 부인들이 소재한 원(院)에다 스파이를 심어놓고 수국을 메신저로 이용한 사건. 생전 최치원이 눈치채서 임연우에게 간접적으로 수국을 찾아보라 일렀고, 최치원 사후 임연우가 눈치채서 폭로하였다. 정주원도 수국 게이트에서 예외는 아니었다.[42] 원 역사에서 문혜왕후문원대왕과의 사이에서 천추전군경종 제2왕후 헌의왕후를 낳았다.[43] 3남 원장태자, 차녀 선의왕후, 3녀 의성부원대군의 부인은 본작에서는 누구와 혼인하였는지는 언급되지 않아 불명이나, 만약 문혜왕후가 원장태자, 선의왕후보다 먼저 혼인했을 경우 선의왕후는 그렇다 쳐도 원장태자는 다른 사람과 혼인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선의왕후의 남편 대종신정왕후 황보씨의 아들로 작중 후반부에는 왕무파와 그럭저럭 사이가 원만해지지만, 원장태자의 처 흥방궁주신명순성왕후의 딸이라서 수국 스캔으로 신뢰도가 박살난 유긍달의 외손녀에게 시집 보낼 가능성은 낮다.[44] 배수현이 밥상을 차려와서 박술희한테 가져왔는데, 박술희가 개미가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다시 차려오라 하는거부터 해서 식사 자리에서 박술희가 배수현의 밥그릇에 곤충을 얹어주는 등(...).[45] 사서에 나오는 왕순식의 아들 왕렴(王廉)의 본명이 장명(長命)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으로 추정된다. 원 역사와 달리 왕렴이라는 이름을 받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야반도주 문제 때문인 듯.[46] 정확히는 김순식계 한정. 대명주원부인의 아버지 김예는 별개였다. 정목부인의 아버지 김관경(왕경)은 왕순식의 부관 출신으로 김순식계다.[47] 원 역사에서는 사성 왕씨로만 나와 정확한 성씨가 불명이며, 여러 정황상 원래는 강릉 김씨 또는 강릉 최씨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여기서는 강릉 김씨 설을 따른 모양.[48] 다만 임연우는 오지수와 김장명이 서로 반할 거라는 것은 계산 못 했다.[49] 웹툰에 나오는 외모가 딱 귀엽고 청순한 척하는 하라구로 외형의 전형이다.(...)[50] 이미 황보인혜하고 각각 선역 악역을 맡기로 공모를 했었다.[51] 그래도 어린 외형을 한 낙랑공주가 언니라고 명시하기는 했다.[52] 이후 왕요와 왕소가 원 역사와 달리 그저 그런 집안과 혼인했다는 언급을 보아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에 유긍달의 스캔으로 원래 약혼자와 파혼당했을 가능성이 높다.[53] 이후 유긍달이 풀려날 때까지 충주 유씨는 호족들에게 제대로 찍혀서 숨죽이고 살았고, 왕요와 왕소도 충주원에서 은둔했다.[54] 단 임연우의 평에 따르면 왕무가 작정하고 호족들을 대숙청하려 했으면 무사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신생 왕조인 데다 삼국통일을 한 지 10년도 안 된 상태에서 고려라는 나라 전체가 공중분해당할 수 있어 나라의 안정을 위해 일찍부터 권력다툼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 더 컸다고 한다.[55] 웹툰에서 유설란은 겉보기에는 청순하고 귀여운 하라구로상이지만, 황보인혜는 딱 봐도 날카로운 인상의 전형적인 악역영애 외모다.(...)[56] 낙랑공주는 935년에 경순왕과 혼인했기 때문에 시대상 915~920년 사이에 태어났다.[57] 아니면 대목왕후 본인이 아니라 91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대목왕후의 언니일 수도 있다. 원 역사에서 장화왕후의 아들은 혜종 하나만 기록되어 있지만 작중에서는 오지수라는 딸도 설정했기 때문. 신정왕후의 아들인 대종문원대왕(920년대 후반)보다 어리고 차남 성종이 961년생이라(헌애왕후헌정왕후는 성종보다 어리다) 930년 전후에 태어났으리라 추정됨을 고려하면 910년대 후반~920년대 초반에 태어난 자식을 더 설정해도 부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작중에서 왕건은 궁예 시절부터 여자를 밝혀 부인이 많았다는 설정이 있다.[58] 원 역사와 달리 왕소의 부인이 유력 호족이 아니라는 것을 보아 유긍달이 스파이 문제로 실각했을 때 절연하고 왕소와 파혼한 것으로 추정된다.[59] 백두산이 폭발해 개경까지 뒤집어지자 혼자 허둥지둥거리면서 하늘이 노했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헛소리해서 임연우가 속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60] 후대에는 둘 다 진천 임씨(鎭川 林氏)로 분류된다.[61] 고려시대 명예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녹봉을 지급하지 않았다.[62] 만약에 연우가 그런 발언을 했으면 남악파와 북악파간의 대립이 더 심해질 뿐더러 견훤의 성격상 희랑이 무사할 보장을 하기 힘들 수도 있어서 그런거로 추정된다. 그리고 진실을 말해서 자신의 예언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서도 있고.[63] 현재 고려의 군사기밀로 지정되 있는 연우의 트릭에 대해 왕건한테 들었다.[64] 만약 북벌 과정에서 왕무와 임연우가 죽으면 왕현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야 하는데, 아무리 장성한 왕건의 아들들을 데려갔다 해도 왕현이 위험할 게 뻔해서 유학자로서 왕현을 지지할 김악을 믿고 맡긴 것이다. 결국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잘 풀렸지만.[65] 이는 공산 전투 직후 최승우가 적은 고려 입장에서는 매우 모욕적인 국서의 내용때문이다.[66] 여기서 임연객이 여동생이 해서 자신을 통해서 전달해주었다고 솔직히 말한다. 본인이 고안할 능력도 없는데 그걸 했다고 말하면 추후에 감당 못할 일이 닥칠 거라는 거를 알아서.[67]경상북도 안동시. 고창 전투 참조.[68] 신숭겸,홍유,배현경,복지겸[69]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70] 왕건은 나이가 많은 중요한 호족들에게 상보라 불렀다. 상보는 아버지라는 뜻인데 왕건은 선필이 처음 도와줬을 때 '아빠'라고 불렀다(...)[71] 원신라 호족들은 그 특성상 서로 잘 아는 사이라서 손순의 후손을 무리해서 죽일 의지가 없었다. 상주 호족 친위대 출신임에도 백제왕을 자칭하고 서라벌 기습이라는 충공깽스러운 사건을 벌인 견훤에게 불만이 많았던 원신라 호족들은 내심 손긍훈에게 공감하고 있었다.[72] 발석차,운제[73] 견훤을 싫어하는 이들이 견훤을 토룡의 후예라 불렀다[74] 작중 중반까지 함규였다가 후반부에 왕건에게 왕씨를 사성받으면서 왕규로 개명한다.[75] 한산주의 치소가 광주에 있어 고려가 건국하기 전에는 패서 호족들이 굽신거렸으나, 고려 건국 이후에는 반대가 되었다.[76] 왕규의 딸인 소광주원부인의 아들. 소광주원부인의 언니인 광주원부인의 자식은 확인되지 않는다.[77] 원 역사에서도 광주원군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78] 이를 보아 작중에서는 92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79] 유금필의 기병돌격이 결정타가 되었다 한다.[80] 원 역사에서도 현대 남아있는 견훤의 후손인 황간 견씨, 전주 견씨는 정황상 능예의 후손으로 추정된다.[81] 병사들이 자신과 왕무를 부부사기단이라 지칭하는데는 연우가 화를 냈지만, 같이 들려오는 왕건,궁예의 사이비 집단을 토벌하자는 외침은 납득(...)을 한다.[82] 견훤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죄를 하겠다고는 했으나 끝내 종정에 오르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83] 이 와중에도 견훤과 후백제군이 서라벌에서 저지른 만행에 분노한 최언위에게 방벌이라 불가피한 일이었다 주장한다.[84] 주인공의 독백에 따르면 보통 사람은 자기 이름을 쓰는 법부터 익히기 때문에 서예가 미숙한 시절부터 많이 써온 자신의 이름은 필체가 뇌리에 박혀 거의 개선되지 않으며 이때문에 를 즐겨 쓴다고 한다. 이때문에 최승우는 자신의 관직은 뛰어난 필체로 써냈으나 이름은 악필이였던 반면, 주인공은 자신을 김선우라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임연우라는 이름을 자신의 신분과 균일한 필체로 쓸 수 있었다.[85] 명망높은 고승의 면전에서 "우리가 이 무차대회를 위해 얼마나 쓴지 아냐"고 윽박지르면서 고함을 지르는 등의 행위[86] 연우는 이후 있을 견훤의 망명을 위해 이들을 살려서 개경으로 압송하자고 왕건에게 말한다.[87] 이때 왕건은 박영규의 내통은 임연우에게도 숨겨 임연우는 왕건이 자신을 신뢰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거나 돕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다.[88] 원 역사와 달리 작중에서는 중립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그래도 임연우가 박영규와 유긍달의 연계를 우려한 것과 문원대왕의 혼담에 가서야 수국 게이트를 연 것을 고려하면 문성왕후는 몰라도 문공왕후는 혼인 가능성이 적지 않다.[89] 이 와중에 황보제공은 저들 입장에서 역적인 견훤이 세운 왕이니 퇴위시키고, 고려와 친하게 지냈던 박씨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 주장한다.[90] 최치원은 김부의 외조부인 헌강왕의 여동생 진성여왕 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인데, 최치원이 신라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개혁정책을 진골들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후삼국시대가 열렸고 그 결과 최치원 생전에 신라가 멸망하였으니 김부의 입장에서 복잡한 기분이었을 것이다.[91] 원 역사에서는 낙랑공주가 혼인한 시기가 경순왕의 항복 이전이었다. 같은 이유로 신성왕후와 왕건의 결혼도 항복 이후에 이루어졌다.[92] 경순왕은 낙랑공주 외에도 평산 박씨 성무부인의 딸도 부인으로 맞이했으나(자식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단 후세 기록에서 낙랑공주의 자식으로 오기되었을 수는 있다) 본작에서는 성무부인의 딸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안 한 것으로 보인다.[93] 원 역사에서는 천사옥대를 재깍 바쳤다고 기록된 것과 달리 본작에서는 역사 개변의 여파인지 경순왕이 손 쓰기도 전에 황룡사 9층 목탑에 천사옥대가 넘어가서는 황룡사를 관리하던 진골 출신 고승들이 경순왕에게 열이 받아서 안 주고 버티다가(이 승려들은 산중에서 은둔 수행하다 견훤의 서라벌 기습 소식에 놀라 서라벌로 돌아왔다. 특히 박씨와 석씨 진골들이 이를 갈았다고...) 임연우가 장기 대결을 벌여 승리하고 받아냈다. 이때 여론을 띄우려고 열기구를 만들어 하늘로 올리기도 했는데 훗날 거란과의 전쟁에서도 신호 및 사기용으로 잘 써먹었다.[94] 균여는 923년생이기 때문에 938~939년에 해당 사건이 일어났다. 원 역사에서는 937년에 경순왕이 항복할 때 천사옥대를 바쳤는데 본작에서는 역사 개변의 나비효과로 경순왕도 모르는 사이에 황룡사 9층 목탑에 넘어가서 이 사단이 난 것.[95] 원 역사에서도 굉장히 머리가 좋아 학식이 풍부하고 설법에 능해서 하나하나 승복시켜 가며 화엄종을 통합시켰다고 한다.[96] 이 때문에 본작 21세기 역사학계에서는 임연우의 화엄종 예언을 두고 "일단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어낸 다음 균여를 후원해서 해결했다"고 여기고 있다.[97] 그런데 임연우는 대광현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왕무와 혼인한 뒤였다. 즉, 유부녀에게 호감을 가진 것...[98] 화병 걸려 원 역사보다 몇 달 빨리 죽은 건 작중에서 명시되지만 사신을 죽인 건은 작중 요사에 나온다.[99] 후일 연운 16주 너머 개봉에 원정중인 거란군이 5만으로 밝혀진다. 퇴각손실을 합쳐도 현 거란 총력의 4할에 달하는 셈.[100] 그마저도 연우가 부석을 깎고 날붙이를 꽂아 흘려보내서 제대로 도하도 못했다.[101] 단 왕무 사후 공격한 군주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야율이호가 아닐 수도 있다. 작중 고려사에서 왕무는 40년을 재위했다고 하는데, 왕무는 943년에 즉위했기 때문에 사망 당시 983년 전후였을 것이다. 983년 당시 요나라 황제는 요 성종 야율문수노였다.[102] 이를 들은 연우는 속으로 크게 놀라고, 같이 들은 왕건은 '소녀'라는 단어를 외국인이 발음을 잘못 말한 거로 보고 별일 아닌 듯이 넘어간다.[103] 사실 강황 문서에서 보듯 일반인이 시판 카레와 비슷한 물건을 향신료 조합으로 만들기는 굉장히 어렵다. 본작에서도 수없이 많은 실험과 실패를 했다고 나온다.[104] 이 말을 들은 왕건은 놀라면서 예를 더욱 갖춰 대한다.[105]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한 날은 936년 1월 13일이며, 본작에서도 삼국통일까지 주요 사건의 타임라인은 동일하기 때문에 여기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최치원은 857년생이므로 78~79세까지 산 것이 되는데, 시대를 고려하면 굉장히 장수했다.[106] 본작의 최치원은 김씨 왕조 친위대 출신 반역자수도를 불태우고 왕을 죽였으며 왕비를 겁탈한 사건까지 다 들은 사람이라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107] 신라의 멸망을 바라지 않았으면서 임연우의 대업을 보고 싶어 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108] 최치원이 개경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한 번쯤은 만나고 싶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김부의 외조부 헌강왕의 여동생 진성여왕 때 주로 활동한 인물이며,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막고자 최치원이 내놓은 개혁정책을 진골들이 끝내 거부한 대가로 최치원 생전에 신라가 멸망했으니 경순왕 입장에서도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