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주충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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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朱沖생몰년도 미상
서진 시기의 은사. 자는 거용(巨容). 옹주 남안군(南安郡) 출신.
2. 정사
어릴 때 고상한 품행을 가졌고 한가하고 조용하면서 욕심이 적었으며, 학문을 좋아했지만 가난해 항상 농사짓는 일을 했다.이웃 사람이 송아지를 잃어버리자 주충은 송아지가 돌아올 것을 알았으며, 후에 숲 아래에서 송아지를 얻자 크게 부끄러워 해 송아지를 데리고 오자 주충은 끝내 받지 않았다.
소가 곡식을 침범해 주충이 여러 차례 풀을 보내자 소는 한스러워하는 눈빛이 없었으며, 소의 주인은 부끄러워했고 더 이상 소는 사납지 않았다.
278년에 박사를 맡긴다는 조서를 내리자 주충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조서를 내려 동궁 관속으로 적합한 자는 지극히 훌륭한 행동을 실천하고 전적을 좋아하는 자이니 주충을 태자우서자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염찬이 양류와 함께 충성스럽고 청렴한 인물이라며 황태손의 스승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매번 조정에서 부를 때마다 번번이 도망가 깊은 산으로 들어갔고 당시 사람들은 양홍(梁鴻), 관녕(管寧)의 부류에 속한다고 여겼다.
주충은 오랑캐의 풍속과 가까워 강족과 융족이 주군처럼 모셨고 주충은 또 예를 갖춰 사양하면서 가르쳤으며, 읍과 리에서는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다. 마을에는 흉악한 사람이 없었으며, 독충, 맹수는 모두 해가 되지 않았고 천수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