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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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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곤 사토시
Kon Satoshi
파일:곤-사토시.jpg
본명 [ruby(今, ruby=こん)][ruby(敏, ruby=さとし)]
출생 1963년 10월 12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사망 2010년 8월 24일 (향년 46세)
일본 도쿄도 무사시노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애니메이션 감독, 만화가
가족 콘 츠요시(형)[1]
학력 무사시노미술대학 조형학부 (시각전달디자인학과 / 졸업)
소속 일본 애니메이터 연출 협회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생애3. 특징4. 콘티5. 인간 관계6. 기타7. 작품 목록
7.1. 애니메이션
7.1.1. 감독 작품7.1.2. 참여 작품
7.2. 만화

[clearfix]

1. 개요

일본만화가, 애니메이터, 애니메이션 감독/영화 감독.

원래는 콘 사토시인데 애니메이션 감독이 아닌 영화 감독으로서 먼저 언론에 정식으로 소개되었기에 발음표기법에 따른 곤 사토시로 표기가 정착되었다. 매드하우스 전속으로 활약했다. 오너캐토끼인 듯. (천년여우 제작과정을 다룬 책의 표지에 토끼가 등장하는데, 곤 사토시 감독의 외모와 유사하다.)

2. 생애

홋카이도 삿포로시 태생으로 아버지의 전근으로 어린 시절과 중·고등학교생 시절을 쿠시로시삿포로시를 이사하면서 오고가며 보냈다.

어릴 적에 철완 아톰, 정글대제 등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랐고, 그 원작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찾아읽으면서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화를 직접 그리게 된 계기는 오토모 카츠히로의 [동몽](1980년작)을 읽고나서다.[2] 중·고딩시절에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불편해하는 성격 때문에 혼자서 일할 수 있는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TV에서 틀어주는 은하철도 999기동전사 건담, 미야자키 하야오미래소년 코난과 극장판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등 애니메이션도 즐겨보곤 했는데, 이때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해야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직업을 가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이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해 디자인 그래픽을 전공했고 일단 졸업했다.[3]

1984년, 대학 재학중에 영 매거진(강담사)에 〈虜 -とりこ-〉라는 만화를 응모해 제10회 치바 테츠야상 우수신인상을 받으며 만화가로 데뷔했다. [영 매거진]에 응모한 것도 오토모 카츠히로가 《AKIRA》를 연재중이라서 일부러 이 잡지를 택했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신인상 축하파티에서 오토모 카츠히로를 만나서 인사를 나눴고, 그로부터 얼마 안가서 오토모가 바빠서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고 하자 편집부가 소개해서 도우미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생 신분이라서 학교 생활을 하면서 정식 어시스턴트는 아니었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AKIRA》단행본 4권에서 5권사이의 분량을 도왔다고 한다. 오토모가 기억하기론, 그림을 잘 그렸고, 자기 작품을 하고싶어서 구상도 많이해서 함께 술집에 가서 만화론에 관한 대화도 나누었고, 또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잘 부르기도 해서 가라오케(노래방)에 자주 갔다고 한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하고, 초기에는 오토모의 원안을 한 만화[4]를 그리는 등 만화가로 활동했다. 이후 오토모 카츠히로가 관여하는 《노인 Z》(1991)에서 미술설정·레이아웃·원화로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가하게 된다. 본인은 애니메이션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제작팀이 그의 만화를 읽고 미술설정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꼬셨다고 한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흔쾌히 승락했다고 한다. 애니메이터 출신이 아니라 움직이는 걸 그리는 건 영 기술이 없었기에 곤 사토시가 했던 작화는 연출 담당 혼타니 토시아키가 왕창 수정했다고 한다. 작가로서 자존심이 크게 상했지만 그 덕분에 애니메이션에 대해 배운 게 많다며 자신의 애니메이션 스승은 혼타니 토시아키라고 한다. 다만 배운 게 있다는 거지 크게 존경하고 그러진 않는 것 같다. 곤 사토시는 노인 Z의 멤버와 이후로도 같이 작업했지만 혼타니하곤 이후로는 같이 작업한 적이 없으며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걸 제외하면 특별히 다시 만난 적도 없다고 한다.

혼타니 토시아키는 "노인 Z 때의 곤 사토시는 레이아웃을 자로 댄 것처럼 칼각으로 잡는 병이 있었다. 레이아웃이란 미장센을 아름답게 배치하는 작업이지 칼각을 재는 작업이 아니다. 그걸 고쳐주려고 내가 레이아웃을 전부 뒤틀어버렸다. 그랬더니 곤 사토시도 깨달은 게 있는지 레이아웃이 변했다." 라고 하였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2》(1993)에서 레이아웃, 《죠죠의 기묘한 모험(1993년 애니메이션)》1기(1993)(2화 원화, 5화 시나리오·그림 콘티·연출, 6화 구성협력)을 거쳐, 오토모 감수의 옴니버스 영화 《메모리즈》(1995)에서 '그녀의 추억'편에서 각본·미술설정·레이아웃으로 참가했고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이메지네이션과 현실의 융합"이라는 테마를 다루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OVA1에서 연출한 에피소드 12편 〈DIOの世界 -花京院 結界の死闘-〉를 본 매드하우스마루야마 마사오 프로듀서가 애니메이션 감독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의뢰가 와서 별 고민없이 좋다고 응한 것이 《퍼펙트 블루》(1997)이다. 원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다보니 캐릭터 디자인, 중요한 명장면 작화를 아예 직접 담당할 정도의 실력이 있었고 연출도 잘해서 한 번에 명작이 탄생했다.

그리고 퍼펙트 블루는 일약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을 해 차세대 일본 애니메이션 주자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천년여우》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대상을, 시체스 카탈로니아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아시아 작품상을 수상했고 《도쿄 갓파더즈》로 같은 시체스 카탈로니아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 영화 관객상을 수상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말에 의하면, 퍼펙트 블루는 작품성은 휼륭했지만, 비디오 판매실적은 부진했고, 그래서 한 번 더 해보자고 하고 만든 것이 천년여우였는데, 이 역시 예술적인 문예 작품으로는 높게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콘 사토시가 좀 더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한 것이 도쿄 갓파더즈였다. 그러나 이것도 흥행에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2006년작 《파프리카》는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하기도 했으며[5],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인셉션》을 미리 예고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라 《인셉션》 개봉이후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서구권에서는 오시이 마모루와 더불어 포스트 미야자키의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반열로 오를것으로 예상하며 그에게 주목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췌장암 투병으로 2010년 8월 23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46세. 평소 술·담배·커피를 너무 즐긴 것이 원인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차세대 거장을 잃은 셈이 됐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 유언장이 공개되어 팬들을 또 한번 눈시울을 울리게 했다.(유언장)

2021년 파스칼알렉스 뱅상이 감독한 회고 다큐멘터리 《콘 사토시: 꿈속의 마법사(Satoshi Kon, l'illusionniste)》가 2021년 칸 영화제 칸 클래식 부문에서 상영된다. # 대런 애러노프스키, 오시이 마모루, 호소다 마모루, 마루야마 마사오, 로드니 로스먼, 제레미 클라핀, 무라이 사다유키, 안도 마사시, 츠츠이 야스타카, 하야시바라 메구미, 이와오 준코, 스자키 아야 등이 출연한다. 같은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도 상영되었다.

3. 특징

그의 작품에서 배경은 철저하게 현대 일본이며(혹은 근대) 리얼한 일상 속에 환상이 끼어든다는 작품상의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도입부의 배경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일상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나중에는 환상이 일상에 들어오게 된다. 어디까지가 일상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독특한 연출 기법. 천년여우는 액자 밖과 액자 안이 구별되지 않으며, 파프리카는 아예 꿈이 현실에 개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면에서 장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매우 유기적이면서도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적인 효과도 큰 편.

연출은 영화 연출에 가깝다. 본인이 밝히길 영화광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 영화를 좋아했는데, 큰 영향을 받은 감독과 작품으로 조지 로이 힐[6] 감독의 제5도살장 (커트 보니것의 소설을 영화화했다.)와 가프를 꼽았다. 이외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존 포드3인의 대부을 재해석한 작품이라 밝히기도 했다. 자국 영화도 좋아했는지 천년여우는 대놓고 클래식 일본 영화 오마주로 가득하다.

배경 미술과 미장센을 굉장히 중시해서 배경이 뛰어나다. 만화가 어시 시절부터 노인 Z 시절까지 그가 담당하던 건 배경을 그려내는 배경 설계와 미장센을 담당하는 화면 설계였다. 이 경험이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배경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

촬영 효과는 잘 안넣는다. 아예 안넣는 것은 아니지만, 매드하우스 후배 아라키 테츠로에 따르면 곤 사토시는 화려하게 꾸미듯이 촬영 넣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현실적으로 그 장면을 찍는 카메라에 담길 법한 조명 효과만을 넣는다고 한다. 촬영 효과를 안넣지만 넣은 것 처럼 멋진 영상을 만든다는 점에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 곤 사토시의 제자 히라오 타카유키도 똑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을 원래부터 잘 그렸다. 그의 작품의 그림체는 다른 애니메이터의 것도 아니고 곤 사토시 자신의 그림체다. 그의 작품 포스터의 그림도 직접 그린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작화 수정을 직접 하기도 했다.

4. 콘티

파일:곤 사토시 콘티.jpg

콘티를 놀랍도록 잘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콘티가 이미 만화책으로 내도 될 정도로 고수준이다. 이거만 대고 그려도 애니메이션이 나올 정도로 인물과 배경을 꼼꼼하게 다 그렸다. 그래서 캐릭터 디자이너가 따로 있어도 그의 작품은 그의 그림체가 되는 것이다. 콘티에 글로 쓰는 지시사항도 정확했다. 이 정도의 콘티를 그릴 수 있는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오오토모 카츠히로 정도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정도로 세세하게 지정해주니 좋은 작품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작화는 최고의 애니메이터를 섭외해 최고의 작화를 선보였다. 모든 작품이 단 한 번도 작화에서 혹평을 받은 적이 없다. 표현력이 뛰어난 애니메이터를 기용해서 작화 매수를 적게 사용해도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리얼하다. 다만 지나치게 리얼함을 추구해서 미소녀, 미소년이라 할만한 트랜드에 맞춘 그림체의 캐릭터는 그의 작품에 나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른바 오타쿠 취향의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그림체가 못 생겼다고 배척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경우에도 그림체를 중시하는 애니메이션 시청자가 많아 이런 점에서 저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오히려 영화 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교하자면 미야자키가 스스로 다 하려는 성향이 있다면 곤 사토시는 다른 애니메이터들의 성향을 존중하면서 작품을 이어나가는 타입이었다. 콘티도 잘 그리고 작화수정까지 가능하고 인성과 리더십까지 갖춘 애니메이션 감독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가진 다재다능의 귀중한 인재였는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제자 마츠오 코우 말로는 곤 사토시는 화질이 너무 좋으면 영상이 차가워진다며 따뜻한 느낌을 내기 위해 일부러 구식 필름을 써서 작업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곤 사토시 사후에 화질 복원을 한 작품이 대부분이라 그의 의향이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곤 사토시의 작품은 DVD로 볼 것을 권장한다고 한다.

5. 인간 관계

생전에 인성이 좋기로도 유명했다. 그의 작품의 작화가 뛰어난 것도 그와 작업하려고 하는 천재 애니메이터가 줄을 섰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게 공동 창작이라 자존심 강한 크리에이터와 충돌하기도 하고 추구하는 영상을 구현하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해야하는 경우도 있어 싸우고 화해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곤 사토시는 오직 "그는 착하고 대단했다." 라는 미담만 나오는 희귀한 인물이다.

한동안 토에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지브리의 실력파 애니메이터들이 곤 사토시에게 몰려가서 두 회사가 곤욕을 치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주변인들이 그를 회상할 때 늘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고, 히라사와 스스무가 병문안을 갔을 때 발작이 오자 미칠듯한 고통에 발악을 하면서도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정도였다.

칭찬을 잘 했다고 한다. 어떤 스태프가 일을 잘 해내면 반드시 "정말 잘 했다."라고 칭찬하고 "이런 것까지 파악하고 해냈구나. 당신은 굉장한 사람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와 일하면 보람이 느껴진다고. 그러면서도 문제점을 지적할 때는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히구치 신지는 "콘 사토시가 살아있을 때는 그가 가장 사랑받았다. 아쉬운 사람을 잃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카미야마 켄지, 하라 케이이치, 호소다 마모루에 나까지 네 명이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네 명이 공통적으로 한 이야기가 콘 사토시가 없으면 실력있는 애니메이터들을 확보할 수 있어 내 작품도 퀄리티를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거였다. 원래 만화가로 시작한 분이라 '만화의 나라로 돌아가 버려' 같은 말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콘 사토시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워낙 매력적이라 모두가 그의 일을 하고 싶어했다. 실력 좋은 애니메이터가 자기 일은 안 맡아주는 게 다들 고민이었다."라고 한 적이 있다.[7]

주로 작업하던 애니메이터로는 안도 마사시, 하마스 히데키, 코니시 켄이치, 야마시타 타카아키, 이노우에 토시유키, 미하라 미치오, 혼다 타케시, 아라이 코이치, 오오츠카 신지, 하시모토 신지, 이타즈 요시미, 하야마 준이치, 오키우라 히로유키, 모리타 히로유키, 에구치 히사시, 미야자와 야스노리, 스즈키 미치요(鈴木美千代)가 있다. 특히 하마스 히데키와 스즈키 미치요를 자신의 팔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좋아했다.

오키우라 히로유키는 신인 시절부터 작업을 같이하면서 친해진 절친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노인 Z죠죠의 기묘한 모험 때 같이 일한 키타쿠보 히로유키 말로는 그는 항상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며 곤 사토시가 진짜 마음을 연 친구는 손에 꼽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곤 사토시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한다. 암에 걸렸을 때도 마루야마 마사오 등 극히 일부의 지인 외에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로는 히라오 타카유키, 마츠오 코우가 있다. 아라키 테츠로, 타치카와 유즈루는 본인이 제자라고 자칭을 안 하지만 곤 사토시를 존경하며, 친분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애니메이터와 친했으나 연출면에서는 완벽 주의라 그와 같이 일한 연출가나 제작진행하고는 그렇게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곤 사토시는 애니메이터와 관계가 좋았지만 연출가와 제작진행을 갈궈서 작품 질을 올리는 감독이었다고 하기도 했다. 오시이가 아는 선에선 곤 사토시는 애니메이터도 갈궜었다고 하며 그는 알려진 것처럼 완전한 군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오시이는 곤 사토시 작품의 뛰어난 퀄리티는 누군가를 갈구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다만 성격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고 완벽주의라 그러는 것이고 작품이 뛰어나서 다들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성향 탓인지 당시 젊은 신인 연출가들은 곤 사토시를 따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드물게 20살의 막 입사한 청년 히라오 타카유키가 자신의 팬이라며, 따르자 제작진행으로 직접 고용해서 이것 저것 알려주고, 애니메이션과 영화에 대해 직접 알려주고, 연출로도 기용해주면서 알려줬다고 한다. 히라오가 매드하우스를 퇴사 할 때도, 퇴사한 후에도 꾸준히 찾아와서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퇴사 후 까지도 자신을 찾아오는 20대 연출가는 히라오 타카유키가 유일했다고 한다. 스승이 하는 걸 보고 배운 건지 히라오도 스태프를 갈궜다는 후문이 꽤 있는 감독이다.

마츠오 코우에 대해서는 자신이 들어갔던 스튜디오에서 어떤 작화감독이 F1 모형을 가져와 책상 위에 두었는데, 그걸 마츠오가 발견하고 "누군가 F1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라고 물었던 게 인상에 남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마츠오를 이성적인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 때부터 인연을 트고 죽을 때까지 함께 활동했다.

음악으로는 히라사와 스스무의 팬으로, 천년여우 이후 협업하기 시작해 여러 작품에서 그와 찰떡궁합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에게 영화음악을 맡기고 결과물이 나오면, 음악이 너무 맘에 들어서 감독이라는 것을 잊고 팬모드로 돌입해서 굉장하다는 소리만 연발했다고 한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했는지 퍼펙트 블루 당시에도 앰비언트 음악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의 실력을 알아보고 감독으로 계속 지원해준 마루야마 마사오는 은인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꾸준하게 그의 작품의 제작비를 마련해 주고 지원했다. 콘 사토시의 사후 제작된 다큐 영화 《콘 사토시: 꿈속의 마법사(Satoshi Kon, l'illusionniste)》의 인터뷰에서는 '콘 사토시의 작품은 일부의 애니메이션팬들한테는 '색다른(変わった)'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호평을 받았지만, 일반 대중한테는 대부분의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해서 제작비 회수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자 마츠오 코우 말로는 곤 사토시는 토미노 요시유키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특히 전설거신 이데온의 광팬이었다고.

6. 기타

일본인으로는 희귀한, 두 자짜리 이름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기도.[8] 덤으로 이름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금민'이 된다.

기혼으로 스튜디오 세션이자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콘 츠요시의 동생이다.

생전 모습이 오오츠카 아키오하고 닮았다. 재미있게도 오오츠카 아키오는 도쿄 갓파더즈 이후로 꾸준히 캐스팅되어왔다.

파프리카 이후로 꿈꾸는 기계를 감독하는 도중 사망하여 작품이 중단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어떻게든 작품을 완성시키겠다고 병상의 곤 사토시와 약속했고 작화감독을 담당하고 있던 이타즈 요시미가 이어받아 작품을 진행했으나 절반정도 제작하다 중단되었다. 부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초청된 프로듀서 말에 따르면, 콘 사토시는 대체 불가능한 감독인데, 그가 없는 지금에 와서 영화를 만들어봤자 콘 사토시가 없는 콘 사토시 영화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후로도 만들 생각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의 작품은 헐리웃 영화들에도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은 인물은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 레퀴엠(2001)에서 주인공이 욕조에서 웅크리고 몸을 담그고 소리치는 장면 등은 곤 사토시 감독작 퍼펙트 블루와 유사하다. 곤 사토시 감독의 블로그()에 따르면 곤 사토시 감독이 이에 대해 물어보자 대런은 오마쥬라고 답했다 한다. 당시에 대런은 퍼펙트 블루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려다 결렬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블랙 스완에서 퍼펙트 블루와 유사한 시퀀스가 많고 다루고 있는 주제도 비슷하여 많이 참고한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는데 이때 대런은 "유사성은 있지만 영향을 받진 않았다"고 부인했다. 사실 애러노프스키는 이런 레퍼선스나 특정 시퀀스적인 부분에서는 곤 사토시의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영상 연출이나 화술은 곤 사토시보다는 곤 사토시의 후배 연출가인 아라키 테츠로와 더 유사하다. 그 외에 감독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영화 인셉션에서 사용된 일부 장면이 파프리카와 유사하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영감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되고 있다.[9]

캐나다에서 주최하는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는 그 해의 최고의 애니메이션에 주는 상의 이름에 곤 사토시의 이름을 붙여 '곤 사토시 상'이라고 부른다. 정작 모국 일본에는 이런 상이 없다.

7. 작품 목록

7.1. 애니메이션

7.1.1. 감독 작품

곤 사토시 감독 애니메이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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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블루
1997년
천년여우
2001년
도쿄 갓파더즈
2003년
망상대리인
2004년
파프리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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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블루와 파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전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다.

7.1.2. 참여 작품

7.2. 만화



[1] 기타리스트다.[2] 이 전까지의 만화는 리얼한 묘사라고 해도 만화체의 그림의 연장에서 보다 정교하게 그린 극화였는데, 오토모의 그림은 실제로 주변 사람을 보고 묘사한 것같은 리얼리즘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3] 대학생 시절 오토모의 어시스턴트를 하면서 만화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대학 수업이 지루하게(つまらない) 느껴졌지만, 그래도 일단 졸업을 했는데 나중에 한 10년쯤 지난 후에 대학생활에서 미술 이론같은 것을 배워둔 것은 도움이 되었다면서 그래도 졸업하길 잘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4] 이 때 내놓은 만화들은 절판 상태였다가 사망 후 복간되었다.[5] 참고로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 3대 국제 영화제 경쟁 초청 받은 감독은 손에 꼽는다. 콘 사토시 이외엔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 말고는 없을 정도. 콘 사토시는 심지어 데뷔 10년만에 초청받았을 정도로 이례적으로 성장과 주목받는 속도가 빨랐다.[6] 내일을 향해 쏴라스팅 감독.[7] 곤 사토시가 죽은 뒤로 곤 사토시 밑에서 일하던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미야자키 하야오호소다 마모루가 데려갔다.[8] 또 유명한 사람으로는 게임 제작자 타쿠미 슈,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던 하라 다카시가 있다.[9] 다만 이로인해 한때 인셉션 때문에 파프리카의 실사화가 무산되었다는 루머도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것으로 확인되었다. 참조[10] 마루야마 마사오 말로는 이 영화가 총 1500컷인데 600컷이나 만든 상태로 접어야 했다고 한다. 3분의 1 이상은 만든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