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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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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공 1987년 2월 28일 (1단계)
2002년 9월 30일 (2단계)
완공 1989년 5월 27일 (1단계)
2005년 10월 19일 (2단계) [1]
관리기관 한국수자원공사 평화의댐 지사
유형 홍수 조절
하천 북한강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1. 개요2. 역사
2.1. 건설 배경2.2. 부풀려진 200억 톤 수공설2.3. 건설 과정과 그 이후 드러난 진실2.4. 완공 후2.5. 증축
3. 금강산댐의 현황4. 교통5. 매체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북한강 최북단 민간인 출입통제선 경계에 위치한 댐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8.15 광복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화천군 화천면 수하리[2][3] 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저수량 26억 3,000만t으로 대한민국 내의 모든 댐 가운데 3위의 규모이다. 1989년에 준공되었으며 2004년, 2012년 2회에 걸쳐 증축되었다.

2. 역사

2.1. 건설 배경

이 댐이 지어지기 시작한 1986년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타오르던 때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4]을 건설해 무려 200억 톤의 수공을 펼쳐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고 과장되게 발표했다. 건설부 장관이 10월 30일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날은 건국대학교에서 발생한 점거농성이 진압되기 전날이었다.

파일:금강산댐 수공.jpg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63빌딩이 절반이나 물에 잠기는 것을 비롯해서 서울특별시의 주요 건축물이 물에 잠기는 모형을 보여주었고 평화의 댐이 있으면 수공을 막을 수 있고 보조댐까지 지으면 역공격도 가능하다는 쇼도 했다. 유명한 대학 교수들[5]이 출연하여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 모형이라는것도 실로 조악해서, 서울 시내 모형을 수조 안에 넣고 수조에 계속 물을 넣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기업과 국민들에게서 성금을 거의 반강제로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국민학생들도 저금통이나 용돈을 털어 평화의 댐 건설에 보태는 일까지 벌어졌다.[6]1986년 평화의 댐 건설 성금을 낸 사람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이나 해외에 살던 교포들한테까지도 성금을 걷었다. 심지어 TV 쇼 프로그램까지 동원하여 홍보에 앞장서기도 했다.링크(대한뉴스)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반공 분위기로 얼어붙는 바람에 줄기차게 개헌을 요구하던 야당과 국민의 여론,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전두환이 이것을 노렸다는 것이 정설인데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세동과 제2차장 이학봉이 주도하여 '시나리오'를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대표적인 실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외에 이기백 국방부장관도 이 일과 관련이 있다.

더불어민주당배재정 의원이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2.2. 부풀려진 200억 톤 수공설


21세기 같았으면 검색 한 방에 논파됐을 떡밥들 투성이지만 당시의 언론통제 수준과 그 용이성을 잘 알 수 있는 사례에도 해당된다. 물론 당시는 이런 논파를 시도했다간 빨갱이 소리는 기본에 고문의 위험까지도 존재했을 시대였다. 따라서 200억 톤 수공설이 허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그냥 입 꾹 다물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15]

2.3. 건설 과정과 그 이후 드러난 진실

총 공사비는 1,700억 원이었으며 이 중 639억여 원[16]은 반 년 동안 모은 국민 성금으로 충당되었다. 1987년 2월 28일 착공하여 1989년에 1단계가 완공되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에 들어서야 국정감사를 받으면서 진실이 드러났다.[17] 북한의 금강산댐의 저수량은 최대 59.4억 톤에 불과하므로 그 위협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이며 이를 대비하기 위한 평화의 댐의 필요성도 엄청나게 부풀려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3년 댐 완공 뒤 정보당국이 항공사진으로 판독한 결과 그 절반 수준인 26억 2,000만 톤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법처리는 없었고, 심지어 사죄 한 마디도 없이 유야무야 넘어갔다.[18]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부에 속은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게다가 평화의 댐은 이름은 댐이지만 '발전 기능과 용수 공급 기능이 없는 댐'이라서 비용에 비해 정말 하는 것이 없는 댐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도 떠안게 되었다. 아예 평상시에는 물이 없는 건류댐이기 때문이다. 보통 댐이라면 인위적인 배수량 조절, 홍수 조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댐은 비상시 대량방류를 할 수 있는 수문이 따로 없으며 대신 댐 옆에 설치된 여수로 몇 개가 작은 수문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바보댐이란 별명도 붙었다.

2.4. 완공 후

그래도 댐은 댐이니 완전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02년, 2005년 북한 측에서 예고없이 금강산댐을 수억 톤 방류했을 때는 물론, 1995년, 1996년, 2010년에 일어난 강원 북부 지역의 집중호우에 대처 및 방어하는 효과를 보았다. 결과론적으로 북한강 유역의 수위를 안정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는 상태이다.

파일:attachment/d0133024_4eeb9c8c5fbd2_(1).jpg

2.5. 증축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2년에 북한의 수공이 아닌 금강산댐 자체의 노후화로 인한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와 금강산댐 방류 사건 당시의 경험으로 인해 댐의 높이를 좀 더 올리는(80m→125m) 등 2단계 공사(1단계 보강공사)가 시행되어 2005년 완공되었다. 들어간 예산은 약 3,995억 원.[19]

사실 평화의 댐은 1단계 완공 후 금강산댐의 공사상황을 고려하여 2단계 공사를 하는 것이 원래 공사 목표였다. 하지만 희대의 사기극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후 잠정중단되었다가 정부의 평화의 댐 보강은 북한의 무단 방류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대기 중의 수증기가 모두 다 물로 변했을 때의 극한 상황을 가정하여 저수량을 대폭 높이는 방향으로 공사, 완공하였다.

2012년 6월 10일 국토해양부는 댐 치수능력 증대사업의 일환으로 2014년까지 평화의 댐 남쪽 사면을 콘크리트로 덧대는 3차 보강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2012년 9월 착공하였다. 목표는 '금강산댐이 붕괴'됨과 동시에 '극한강우', 즉 대기 중의 수증기가 모두 비가 되는 상상 가능한 최대 폭우가 내려도 견딜 수 있는 기준이 적용된다.[20] 이 공사에는 1,650억원을 투입하고 2014년 상반기 말 준공 예정이었으나 2018년에 완공되었다.

이후로도 심심치 않게 북한의 댐 무단방류 시 수해를 방어한다. 임진강에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군남댐이 있다.

3. 금강산댐의 현황

금강산댐의 수공을 막으려고 지은 평화의 댐은 1988년에 일찍이 완공되었지만, 정작 금강산댐(임남댐)은 1986년 건설 발표를 하고서 17년이 지난 2003년에 비로소 완공되었다.

폭 710미터, 높이 121.5m, 저수용량은 최대 26억 2,000만 톤으로 추정되며 실제로도 충주댐 급의 매우 큰 댐인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이 댐은 인위적으로 일정 수준 이하로 수위를 낮출 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고의든 사고든 간에 한 번 댐이 넘치게 되면 중간에 있는 댐들(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청평댐, 팔당댐, 저수량이 적은편)이 완충을 하더라도 서울특별시 등 한강 하류에 위험이 되는 것이다.

4. 교통

파일:attachment/평화의 댐/99.jpg
카카오맵 로드뷰[21]
460번 지방도를 통해 갈 수 있다. 99구배의 멀미가 걱정이라면 한묵령로를 이용해서도 갈 수 있지만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넘게 되어 주간에만 여러 제한 조건 하에 차량이나 자전거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길 이름이 말하듯이 멀미를 잘 안 하는 체질이라고 해도 멀미약을 꼭 챙길 것.[22] 내비를 찍어 보면 드래곤 커브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구불구불함을 확인할 수 있다.[23]

저 표지판으로부터 평화의 댐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 가량. 한묵령로를 이용하면 20분 가량이다.[24] 그러나 굽이굽이 도는 길이어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느낌인 데다 가는 길이다 보니 차가 없다. 좀 무섭다. 직접 방문하면 아흔아홉 굽잇길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옛 미시령길은 애교처럼 느껴지는 수준. 단, 매우 구불구불한 데 비해 미시령길만큼 가파르지는 않고 완만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과 완만한 경사가 묘한 상승효과를 일으켜 사람을 졸리게 하니 주의할 것. 이런 특이한 도로 덕분에 자동차나 바이크의 좋은 와인딩 장소로 입소문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일요일 오전에 평화의 댐에 가면 스포츠카나 미들급 이상의 대형 바이크들을 찾아보기 쉽다고 한다.

해산령을 동에서 서로 갈 때, 즉 평화의 댐에서 화천읍 방향으로 내려갈때는 브레이크 시스템이 안 좋은 차라면 금방 과열이 발생하기 쉬우므로 주의하자. 브레이크 페달의 감각이 이상해짐을 느꼈다면 엔진브레이크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페이스를 낮출 것.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갈 때, 즉 평화의 댐으로 갈 때는 오르막이라 기어를 낮추고 엔진을 돌리면 무난하게 가속할 수 있다. 이 구간은 제한속도 40km 구간이고 특히 해산령을 지나 해산터널을 지난 뒤에는 고저차는 없으나 낙석등으로 인한 공사 구간이 자주 존재하고 노면에도 낙석으로 인한 모래등이 제법 있으므로 주의할 것.

평화의 댐으로 올 때 통신장애가 자주 일어나니 스마트폰 내비를 쓰는 사람은 데이터를 다운받거나 순정 내비를 이용하자.

해산령을 나오자마자 저 아흔아홉구빗길 표지판 근처에 식당이 하나 있는데 오지마을에 있는 것치고 괜찮은 가격에 괜찮은 맛의 식사가 나온다. 어찌나 산골인지 한여름에 가도 선풍기 하나 필요 없을 정도로 선선하다.

댐 자체는 별로 볼 것 없지만 가는 길에 '두타연' 등 명소가 많으며 자연 경관이 정말 멋지고 깨끗하다. 한 번쯤 여행해 볼 만한 곳이다. 수자원공사에서 관리하는 전시관, 평화의 종, 비목공원, 캠핑장, 깨끗한 화장실 등이 잘 조성되어 있어 한 번쯤 둘러보기 나쁘지 않다. 식당과 매점도 있다! 평화의 댐 자체의 전경은 꽤 아름다운 편이지만, 엄청나게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을 기억할 것. 또한 댐 자체는 과속방지턱을 천만배 쯤 확대해 놓은 것 같은 형상이고 후술하듯 상수도와 발전을 위해 물을 가둬둔 저수댐이 아니기에 저수댐을 생각하고 갔다간 바닥까지 비워 둔 기이한 모습에 당황할 수도 있다.

한 번 구경해 보고 싶다면

5. 매체

서브컬처 쪽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대표적인 예제가 바로 따개비 한문숙어. 에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여기에 할애할 만큼 당시로서는 큰 이슈였다.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브릭스 요새는 최전방에 댐 형상으로 축조되어서 성격이 비슷하다.

6. 여담

7. 관련 문서


[1] 이후 3단계 공사까지 진행하려고 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2] 해당 리의 소멸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6.25 전쟁 이후 동촌리로 병합되고 나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광복 이전에는 수상리, 수하리로 분리가 된 것은 지역 토박이에 의해 명약관화하게 밝혀졌다.[3] 화천군 - 양구군 군계는 댐 옆의 능선이다.[4] 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른다. 이 댐 때문에 금강산선의 일부 구간이 수몰되어 버렸다.[5] 대표적으로 서울대 토목공학과의 교수였던 선우중호전두환의 구미에 맞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학문적으로 전두환의 사기질을 도왔으나 사기극이 드러난 후에도 별다른 타격 없이 지내다가 1995년에는 서울대 총장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딸을 고액과외 시킨 것이 드러나 자진사퇴했다. 이후 명지대 총장을 지냈고 광주과학기술원의 총장으로 있었다가 2012년 퇴임하였다. 여담이지만 이 양반이 명지대 총장을 지내던 시절에는 국가정보원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여 두고두고 명지대의 흑역사로 남았다.[6] 국민학교에 찾아와서 전교생에게 빈 봉투를 나눠주고 모금함에 집어넣는 장면을 찍어서 TV에서 방송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국민학교에서는 교사 주도로 성금을 내지 않는 학생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따돌림을 유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또 절대 열외는 존재하지 않아서 최저생계비를 받고 사는 학생에게도 100~500원을 요구했다. 1980년대에 국민학생에게 500원이라면 상당히 큰 돈이었다. 그때는 10원짜리 풍선껌이나 90원짜리 라면도 있었고 성인 시내버스 요금이 100원이었다.[7] 정확히는 동양 최대의 사력댐이다. 2023년 기준으로 중국싼샤 댐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이다.[8] 실제로 개성평양간 고속도로의 어느 다리 공사에서 인력과 장비를 억지로 밀어넣었다가 교각이 붕괴되어 수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전력이 있었다. 관련 링크[9] 정황상 안기부 소속 간부인지, 그 분야 전문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200억 톤 물폭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똑부러지게 설파한다.[10] 라스푸티차를 생각해보면 된다. 독소전쟁 당시 매년마다 라스푸티차 때문에 소련군독일 국방군의 진격이 느려지거나 막혔고 그나마 독일군은 어떻게든 진격 자체는 했지만 소련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이는 21세기에도 다르지 않아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가 우월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우크라이나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11] 1986년 3월 평양을 방문한 쿠바피델 카스트로 수상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이와 같은 연설을 하였다.[12] 물론 북한은 실제로 이런 상황 속에도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의 지속적인 테러 공작을 벌였다.[13] 이미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이후 여러 국가로부터 외교적으로 기피 대상이 되긴 했다. 아웅 산 묘소 테러 이후 북한은 잇다른 테러 공작과 삽질로 인해 탈냉전 이후에는 완벽히 외교적으로 고립됐다.[14] 당시 안기부장 김덕은 평화의 댐에 대한 비판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한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 7월 국회에 출석해서 "높이 200m 댐이 무너지면 수도권은 해발 44.8m에서 50.7m까지 침수될 것이라고 미 육군 공병수로국이 판단하였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15] 당시 온라인 매체는 없었고 PC통신의 태동기였으며 그나마도 소수의 컴덕들만 접근하는 정도였다. 전화선을 사용하는 PC통신은 1997년 야간정액제에 가입되어 있지 않거나 시내/시회전화로 접속해 조금만 오래 써도 전화비 폭탄을 맞을 정도로 요금이 비쌌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겨레 신문 정도 되는 논조의 오프라인 매체도 없었다.[16] 2015년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 환산 액수 1254억원[17] 평화의 댐 감사 결과 발표문 요지 #[18] 그나마 당시 언론에 나와 위험성이 심각하다고 주장하던 어느 대학교수는 2000년대에 쓴 책에서 당시 왜곡했다고 인정하면서 글로써나마 사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고 문제는 현재에 와서도 실무담당 공무원을 처벌할 법조항은 있어도 단체장, 장관, 대통령 등을 처벌할 법조항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책 실명제가 논의되고 있다.[19] 그래서 이 증축을 두고 전두환이 한 건 나쁘고 김대중이 한 건 괜찮냐 운운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애초에 평화의 댐은 4~10배에 가까운 과장이 문제였던 것이다.[20] 16년 1월 2일 기준으로 두께 1m, 높이 수m를 높인다고 평화의 댐에 위치한 공사 현황판에 명시되어 있다.[21] 사진은 화천쪽에서 진입해 해산터널을 나오자마자 있는 간판. 터널 전 해산령을 올라가는 길도 상당히 험하다. 평화의 댐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양구군쪽 길도 험하기는 마찬가지. 참고로 모자이크 된 부분은 군사 시설 관련 문구가 적혀 있다.[22] 상당히 심한 커브길의 연속이라 기존에 멀미를 하지 않았던 사람도 이곳에서는 멀미를 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굉장히 구배가 심한 도로이므로 뱅드롱이나 이지롱, 아네론 등의 멀미약을 반드시 챙기는 게 좋다.[23] 물론 이에 못지않은 도로가 인근 양구군에도 있었다. 양구와 춘천 인근에서 살아온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거의 차량이 다니지 않지만 직선화가 되어 상당히 많이 좋아진 46번 옛 국도이다. 그때는 터널이 없다 보니 강원운수 버스를 타고 다니면 검은 비닐봉지에다가 멀미를 하는 일은 상당한 다반사였다고 한다. 아울러 배후령터널과 추곡터널이 없었을 시기와 수인리, 웅진리 도로가 직선화가 안 되었을 때에는 춘천에서 양구까지 1시간 40분 이상 소요되었다고 한다. 상당한 급커브를 자랑하며 멀미를 심하게 유발하는 꼬부랑길로 굉장히 악명 높았다. 해당 도로는 2021년 기준으로 소양호로로 지정되어 있다.[24] 다만 한묵령을 넘어간 후 헤어핀 커브가 한 군데 있으니 그곳만큼은 조심하도록 하자. 사고 위험이 크다.[25] 정 모르겠으면 7사단 신교대 가는 표지판 따라 가면 된다. 사실 군사시설임에도 입영자들 편의를 위해 표지판이 곳곳에 있다.[26] 1986년 당시 5천원이면 2023년 기준 18000원을 웃도는 돈이다. 초등학생이 2만원 가까운 돈을 그런 데 기부할 정도라면... 다만 고등학생 시절에는 집안이 어려운 모습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 전에 모종의 사건이 있어서 집안이 몰락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