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총독 시절 주조된 화폐에 새겨진 초상과 그를 토대로 복원한 3차원 두상. |
1. 개요
Publius Quinctilius Varus(기원전 46년 ~ 기원후 9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인이자 군인. 그리고 역사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로 바루스 본인의 목숨은 물론이고 무려 3개 군단을 잃은,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퀸크틸리우스 가문은 전통적인 파트리키 귀족으로 공화정 초창기에 집정관을 배출했지만 이후 400년 이상 법무관 이하 관직으로 만족해야 했던 눈에 띄지 않는 가문이었다. 아버지인 섹스투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반대하는 정치인이었다. 카이사르에게 사면받았지만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고 추정되기도 하며, 필리피 전투 이후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아들인 바루스는 카이사르의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였고 특히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 마르켈라 아그리피나와 결혼하면서 옥타비아누스 세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2. 경력
바루스는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총독을 역임하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특히 시리아 총독 시절 헤롯 대왕이 사망하자 예루살렘을 점령해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2000명의 반란군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강경 진압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와 바루스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이후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1]가 체루스키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을 정복하고, 아우구스투스는 바루스가 난폭한 숙주민들의 진압을 잘 하는 것을 전해듣고 게르마니아를 통치하기 위해 총독에 임명되었다.
사실 게르마니아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가 여러 차례 정복사업을 펼쳐서 대다수의 게르만족 일파들이 복속을 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평정된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는 군사적으로 게르만족들을 복속시키고, 외교적 노력과 당근책을 이용해 친로마파 부족 포섭에 성공한 드루수스가 29살의 나이에 낙마사고로 요절해 국가 프로젝트를 담당한 핵심 멤버 중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2] 외엔 없었다. 다행이라면 카이사르, 아그리파 전례를 교과서로 활용해 게르만족들과 우호관계를 맺은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역시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복속 지역을 관리해 게르마니아 정복은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헌데,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가 평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게르마니아에서 활약하던 티베리우스를 발칸반도의 반란 진압에 파견하고, 그 후임으로 바루스를 밀어넣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느 정도 게르마니아 정복이 끝났다고 생각한, 고령의 아우구스투스가 차기 황제로 점찍은 아그리파, 드루수스가 모두 죽자, 후임으로 또 다른 양자 티베리우스를 선정해 급히 로마로 소환한 다음, 1년 뒤엔 현지 상황을 그나마 알고 있던 누나의 사위 아헤노바르부스마저 소환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되는데, 바루스는 군사적 재능이 없는 행정관료인 데다 현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조차 현저히 떨어졌다.
더 큰 불행은 바루스가 부임할 당시의 게르마니아 상황이었다.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 일리리아 반란을 진압하고 후계자 문제로 로마로 소환된 뒤, 그 뒤를 맡은 아헤노바르부스는 뛰어난 장군이고 시리아, 소아시아 일대에서 뛰어난 행정능력과 외교술을 선보인 젊은 행정가였다. 그런데 오랜 게르마니아 전쟁 경험에도 게르만족 사회의 복잡한 특수성과 현지 사정으로, 아헤노바르부스는 이 문제로 상당히 고전해 애를 먹고 있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였던 아헤노바르부스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1년 내내 꾸준히 승리를 거두는 성과를 낸 인재였다. 그런데 바루스보다 몇 배 이상 능력 있던 그마저도 로마인들의 사고로 게르만족들과 로마화 작업을 진행하다가 서로 오해가 쌓여,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가 노력해 쌓아 놓은 성과를 말아먹을 위기에 봉착했다. 즉, 로마가 조심스럽게 게르만족들을 로마화하려고 노력해도, 게르마니아 정복은 난이도가 상당했다.
헌데 바루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능한 행정관료답게 행동하겠다며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모두 살얼음 위를 걷듯 행동한 게르만족 포섭에서 대형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대화와 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입장에서 게르만족의 로마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때문에 로마가 기존 게르만 족장들을 모두 내쫓고 직접 다스리려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전임자 아헤노바르부스조차 현지 사정을 알고 있어, 다른 속주 총독을 하던 시절처럼 업무를 하다가 곧 방법을 바꿔 몸을 사렸는데, 바루스는 한술 더 떠서 시리아에서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하면서 반항하면 더 크게 응징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게르만 족장들은 점점 바루스의 통치방식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과거 로마 장군들과 달리 자신들을 존중해주지 않는 바루스는 증오의 대상이 됐다. 게다가 바루스는 시리아 총독을 역임하던 시절처럼 게르만족에게 금과 귀금속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하였다.
문제는 게르마니아 지역은 금과 귀금속이 나올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세금에 큰 부담을 느낀 게르만족의 불만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3][4] 결국 이러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게르마니아에서 반란이 터지게 되고, 바루스는 게르마니아의 총독으로서 17, 18, 19군단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
3. 토이토부르크 전투
바루스가 무슨 이유에서 게르마니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단을 거느리고 출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번 기회를 본보기로 삼아 로마의 강대한 힘을 가능한 철저하게 보여주겠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바루스는 체루스키 족장 아르미니우스에게 길 안내를 맡겼다. 아르미니우스의 친척들과 아르미니우스의 장인이면서도 친로마파였던 세게스테스는 아르미니우스의 반란 징후를 경고하였으나 아르미니우스를 철석 같이 믿은 바루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말 그대로 전 병력과 함께 숲 속으로 진군한다. 이는 상당히 멍청하고 오만한 행동이었는데, 전술상 로마군은 개활지 전투와 참호 구축을 통한 방어전에는 능했지만 숲 속같이 좁아터진 지역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이미 당대에도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군 사령관들은 웬만하면 불리한 곳에서 싸우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용병술에 최선을 다했으나 바루스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스스로 조장해버렸다. 또한, 만일을 대비해 후방에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원부대를 배치하거나 긴급 연락선을 구축하기는 커녕,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으나 숲에서는 쓸모없는 기병대까지 죄다 끌고 들어가는 엄청난 실책을 범했다.
깊숙한 곳까지 로마군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아르미니우스는 이후 자기 친구들을 불러오겠다며 사라졌다가 곧 수많은 반란군과 함께 나타났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에게 속아 3개 군단, 2만여명의 병력을 아무런 의심없이 지옥 한 가운데로 인도한 바루스는 이틀 동안 게르만족의 포위를 풀기 위해 발버둥쳤으나 오히려 더욱 더 깊은 무저갱으로 빠지는 꼴이 되었고, 마침내는 공포에 질린 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측근 장교들과 함께 칼 손잡이를 땅위에 놓고 칼 위에 뛰어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렸다. 지휘부가 한 순간에 증발해버리자 그를 따르던 3개 군단 역시 순식간에 궤멸되고 만다.
4.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식민지에 대한 강경적인 대응이 주류인 바루스가 이스라엘에서 부임중이었는데, 여기서 난폭한 숙주민들의 진압을 잘 하는 것을 전해듣고 일부러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부임시켜놓고도, 그 이후에 일리리아 대반란 때에 8개 군단이나 빼가고 꼴랑 3개 군단만 남겨놓은 것이며,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최악의 인사 조치를 취한 것이다.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가 데리고 온 두 양자 중 후계자로 점찍은 드루수스 요절 이후 열린 드루수스 장례식에서, "아버지로서 아들의 유지를 받아 반드시 게르마니아를 로마 땅으로 만들겠다"고 연설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바루스가 게르마니아에서 3개 군단을 잃고 목숨마저 잃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옷을 찢고 머리도 깎지 않으면서 몇 달간 이따금씩 기둥에 머리를 박으면서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Quintili Vare, legiones redde!)"라고 울부짖었다는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책에 기록되어있다.
당시 로마는 28개 군단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그중 3개 군단 상실과 패배의 여파로 라인 강 너머 확장한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이 손실을 복구하는 데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200년가량 걸렸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로마의 국력을 고려해 봤을 때 현실성 없는 주장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을 끝낼 당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무려 60개의 군단이 존재했었다. 단지 정치력이 뛰어났던 아우구스투스가 쓸데없이 군단을 늘려 국방비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28개 군단으로 감축했고 3개 군단의 복원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분노한 것은 이 전투 이후 게르만족은 로마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당시 로마가 얻을게 딱히 없던 게르마니아 지역을 점령하거나, 대규모 군단을 편성해 이곳을 공략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게르마니아를 속주화할 수 있었다면 국경을 확장하고 게르만 족을 통제함으로써 로마 제국 영토 내의 치안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나자마자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표현한 친구이자 복심 아그리파를 갈리아 안정화 총책임자로 맡길 당시부터, 그와 그 일가 남성 황족들이 게르마니아 정복에 나선 이유도 이런 목적이 컸다.
이런 기회가 사라졌으니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선 뼈아픈 실수였다. 만약 로마가 총력을 기울였다면 군세를 확장하고 점령하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실질적으로 국력을 크게 악화시키고 얻는 것은 크게 없는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국경이 넓은 로마가 이 지역에만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어리석은 선택이고, 당시 이미 장기화된 게르만 정벌과 국력 소모로 로마 내에서 비판 목소리도 높았다. 또한 서로 죽고 죽이는 총력전을 벌이면서 상호간 감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평화로운 공존이나 속주화는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이라, 무력으로 점령해도 치안을 유지하려면 거대병력을 상주시켜야하기 때문에 영토를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결국 게르만족이 로마의 영향력 밖으로 벗어나면서 이들은 자체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의 트라우마가 그의 말년까지 남아있었는지, 야사에 따르면 죽는 순간까지도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와 주변 사람들에게 "그거 내 탓 아니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5]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뒤,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인 게르마니쿠스를 보내 재차 게르마니아를 침공한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만족에게 큰 타격을 주며,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패배를 갚아주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국경을 엘베 강으로 확장시키지 않고 라인 강 전선에 고정시킴으로써 향후 300년간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5. 미디어
아르미니우스를 주인공으로 영상화한 넷플릭스 독일 드라마 바바리안에서 주요인물로 나온다. 의외로 드라마에서 버프를 받았는데, 먼저 아르미니우스와의 관계가 사실상 부자관계에 가까워 바루스의 맹목적일만큼 굳건했던 그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더 마련했으며, 나름 냉철한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 아르미니우스가 나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당신한테 배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실제 역사와 달리 꽤나 군재가 있는 인물로 설정된 듯.
그의 성격도 어린 아르미니우스 형제를 양자로 거두면서 배려심 있고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다 장성해서도 이민족인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면서 친아들처럼 대우해주면서도 속주 부족들은 자기가 총독으로 있을 때 로마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어야 나중에 후임 총독대에서는 반항하지 않을 것이란 그만의 철칙에 따라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대하는 등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를 '교육받은 야만인으로서 게르만족을 통제하고 이간시켜 부족간 통합을 방해할 수 있는 있는 도구'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고, 이를 알아챈 아르미니우스는 그에 대한 배신감과 더불어 비록 자신이 로마물을 먹긴 했으나 로마를 위해 동포를 억압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결행하게 된다.
배우는 시칠리아 출신 배우인 '가에타노 아로니카(Gaetano Aronica)'가 맡아서 매우 유창한 라틴어로 대사를 한다.
토탈 워: 로마2에서 역사적 전투인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바루스가 지휘관으로 등장해 직접 조종해볼수 있다. 다만 1차 전투가 끝나면 이벤트 컷신이 뜨면서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기병대를 보고 겁먹어서 근위대를 끌고 도망가버리는 탓에(...) 유저를 벙찌게 한다. 이후 전투가 끝나면 혼자 도망다니다 아르미니우스에게 잡혀 죽는, 자살했던 원역사와는 다른 최후를 맞는다.
[1]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들로, 재혼녀였던 아내 리비아와 그 전 남편의 아들들.[2] 폭군으로 유명한 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3] 조세량 자체의 부담보다도, 장기간에 걸쳐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던 시리아에서는 금속 화폐가 흔하게 유통되었던 것과는 달리 부족 중심의 사회인 게르마니아 지방의 경제는 귀금속 화폐가 아닌 현물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바루스가 요구하는 대로 금 등의 귀금속으로 세금을 내려면 내부의 생산물을 외부에 내다 팔아서 귀금속 화폐를 구해 올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 현물을 내다 팔아 귀금속을 마련하고, 그것을 다시 세금으로 내야 하니 단순히 계산해도 조세 부담이 2배 이상 폭증하게 될 것이고, 공업과 상업이 덜 발달했던 게르만족의 입장에서 외부에 내다 팔아 귀금속과 바꿀 수 있는 생산물이 대체 뭐가 있겠는가? 식량이나 미가공 상태의 천연자원 정도밖에 없는데 이런 품목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큰 이익을 내기 힘든 교역품이지만 운송 / 교역 기술의 부족으로 원거리 교역의 주축을 주로 사치품이 차지하던 시대에는 더욱 교역하기 어려운 품목이다.[4] 당시 게르마니아는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울창한 숲이 전 국토를 뒤덮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미개척지가 많은 지형이었다는 소리고 농토에서 나오는 생산량이 부족한데다가 험지로 인해 교역도 부족하니 경제력 자체가 훨씬 적었을 것이다. 반면 시리아 지역은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 가장 강대한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제국의 영역에 속했었고, 당시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한 지역 중 하나인 데다가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였으니 조세로 낼 금이나 귀금속을 얼마든 구할 수 있었다. 애초에 로마 입장에서 로마보다도 더욱 발전한 지역인 시리아에선 부를 뜯어내고, 훨씬 덜 발달한 게르마니아 지역은 국경을 안정화하고 우호적인 속주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음에도 멍청한 선택을 한 것이다. 사실 당시 가장 발달된 지역이던 아프리카와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그를 전혀 다른 환경인 게르마니아 지역에 배치한 것 자체가 실수다. 게르마니아 지역에 필요한 총독은 군사/외교 전문가였지 행정가가 아니었다.[5] 일단 정사라고 할 수 있는 역사책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은 "연극은 끝났으니, 내가 내 역할을 잘 한 것 같다면 박수를 쳐주게" 정도로 기록되어 있긴 하다. 앗! 시리즈의 '혁명이 후끈후끈'에서는 야사와 정사를 적당히 섞었는지, "난 그래도 꽤 잘 한 편이지?"라고 하는데 그 뉘앙스가 '바루스가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말아먹긴 했지만, 그래도 난 잘한 편이지?'라는 느낌이 나게끔 나온다. 옆에서 유언을 들은 신하의 답변은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