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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7:38

현릉(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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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278
등재연도 2013년
등재기준 (ii)[1], (iii)[2]
파일:external/www.kyeongin.com/484693_117623_2513.jpg
<colbgcolor=#fedc89> 현릉의 현재 모습.[3]
파일:태조 현릉.jpg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1916년의 모습.

1. 개요2. 위치3. 능호4. 역사5. 구성
5.1. 내부
6. 여담7. 둘러보기

1. 개요

고려 왕조의 초대 임금인 태조 왕건이 안장되어 있는 왕릉. 태조 왕건과 그의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으로, 실제 즉위한 고려 국왕의 왕릉 중 최초로 지어진 고려왕릉이다.

북한의 국보 제179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 일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위치

송악(松嶽)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 권2, 고려사 세가 권제2 태조(太祖) 26년(943) 5월
고려사 태조 세가 기록엔 송악(松嶽)의 서쪽 언덕(西麓)에 능을 조성했다고 한다. 현재 현릉이 있는 주소는 북한개성시 해선리. 예전 주소는 경기도 개풍군 토성면 여릉리였다. 개성 시가지의 서쪽에 있으며 공민왕이 묻힌 현정릉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3. 능호

능호인 '顯'은 한자의 뜻 자체는 '나타나다'라는 의미를 지녔고 시법에 따르면 '명성이 내외로 떨쳐지다'란 뜻이다.[4] 혼란스러웠던 후삼국시대 중, 두각을 드러내 수많은 호족들을 포섭하고 제압해 결국 백제신라를 흡수하고 발해의 유민까지 받아들여 고려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 왕조 시대를 연 태조에게 걸맞은 능호라 할 수 있다.

4. 역사

태조음력 943년 5월 29일 본궐 신덕전에서 붕어했다. 신혜왕후의 사망일은 미상이다. 정윤[5] 혜종이 즉위하고 태조는 같은 해 6월 26일에 현릉에 묻혔다. 고려사 기록으로 송악산 서쪽에 왕릉이 조성되었고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이 이루어졌다.

5. 구성

파일:CS_201312_66-1024x677.jpg
현재 개건된 현릉의 모습[6]
지형이나 구성을 보면 조선왕릉과 유사성이 있다. 완만한 구릉에 봉분이 있고 석물의 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앞에는 정자각과 비석이 있다. 봉분은 마치 신라왕릉과 같아 다른 고려왕릉들에 비해 매우 큰 편인데 태조로서 특별하게 예우를 받은 듯하다.

현릉은 당연히 태조가 죽은 뒤에 바로 조성되었지만 이후 거란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태조의 유골은 강화도 등지로 여러 번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7] 그 과정에서 능이 새로이 조성되면서 점점 그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보이며 또한 조선 후기인 1867년도에도 대대적으로 보수를 했기에 더욱 조선 왕릉과 형태적으로 비슷해진 것일 수도 있다.

5.1. 내부

파일:NISI20200115_0015981037_web.jpg
무덤 내부 사진
현릉에는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연도가 남향으로 나있다. 이 연도를 따라 들어가면 재궁(梓宮)[8]과 부장품을 안치한 현실(玄室)에 도착한다. 현실은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으며 현실 내부 중앙엔 재궁을 올려둘 석판이 있고 입구가 있는 남쪽을 제외한 세 방향의 벽엔 부장품을 올려둘 돌 선반이 있다. 벽과 천장엔 고구려무덤처럼 벽화를 그렸다.

동벽엔 대나무매화나무, 청룡[9]을 그렸다. 서벽엔 소나무매화나무, 백호[10]를 그렸다. 북벽은 그림이 크게 훼손돼 그림 흔적만 약간 남았을 뿐이라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합리적으로 추정해보면 북방의 상징인 현무가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쪽에도 현재는 벽화가 확인되지 않지만 주작 그림이 있었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천장에는 매화나무별자리를 그렸다.

현릉의 북쪽을 공사하던 중 140cm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해당 청동상이 태조 왕건을 표현한 청동상이며 본래 고려 왕실의 제례에 사용되던 것이며 조선세종대왕 때 현릉 옆에 묻었다고 한다. 나체인 청동상이 쓴 통천관[11]에는 도금 흔적이 확인되며 신체 주위엔 천 조각, 옥 조각이 나왔다. 청동상은 고대 삼국에서 전래된 전통숭배신앙이며 나체에 실제 옷을 입히는 것은 고구려의 전통신앙이다. 왕릉의 벽화도 그렇고 청동상도 그렇고 태조의 능은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은 흔적이 많다.

6. 여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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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현재의 모습은 북한에 의해 개건된 모습이다.[4] 고려의 중흥 군주 현종의 묘호도 나타날 현(顯)이다.[5] 고려 초에만 사용하던 용어로 고려의 왕태자를 뜻한다.[6] 문서 상단에 있는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과 비교해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앞으로 계단과 문을 지었고 제단도 다시 쌓은 모습이다. 그 외에 석물들도 새롭게 만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7] 고구려고국원왕시절 모용선비에게 국내성이 함락되고 그의 부왕이었던 미천왕의 시신이 도굴 당해 수레에 실려간 굴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8] 임금의 을 높여 부르는 말.[9] 현재 청룡 그림은 꼬리만 남아있다.[10] 현재 백호 그림은 흐릿하지만 남아있다.[11] 천자만이 쓸 수 있는 관이다.[12] 사실 현릉과 현정릉을 제외한 고려왕릉은 대부분 도굴 등으로 이미 훼손된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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