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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10:16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의 배경3. 전개4. 논란
4.1. 필체 감정 논란4.2. 강기훈, 김형영을 허위 감정 혐의로 고발4.3. 당시 국과수 필적 감정한 김형영의 토지 사기건
5. 진실화해위 심사 및 법원 재심확정6. 법원 재심 결과7. 재심 이후의 논란8. 여담9. 참고/관련 자료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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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자살 사주, 이른바 자살방조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 가운데 실제로 죄가 인정된 유일한 판례였으나[1] 결국 무죄로 판명된 사건.[2] 재심을 통한 대법원 무죄 판결 이전까지는 이 문서의 제목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었지만 최종 무죄가 나온 시점에 지금과 같이 변경되었다.

2. 사건의 배경

1990년 3당 합당 직후 성립된 여당인 민주자유당6월 항쟁 이후의 개혁적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은 보수적 정치격변이었는데 이에 대해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재야세력, 야당(평화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심지어 당시 대학가에서는 80년대식의 거리시위가 재연되기까지 하였는데 1991년 4월 26일 명지대강경대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으며 이로부터 두 달간 연쇄적으로 분신자살이 일어났다.[3]

이렇게 계속 분신자살이 일어나자 당시 서강대학교 총장이었던 박홍 루카 신부는 서강대 메리홀 기자회견에서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어 그는 그 배후세력을 '전염병 같은 이들'이라 규정한 뒤 "이들은 그늘에서도 엄청난 힘을 갖고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물귀신 공법으로 물 마시듯 폭력을 전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5월 8일 오전 7시 30분에 정부는 삼청동 안가에서 정해창 대통령비서실장의 주재 하에 서동권 안기부장, 최병렬 노동부장관 등을 모아 '치안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분신자살 사건에 대한 배후 수사를 결정했고, 정구영 검찰총장도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조직적 배후세력이 있다고 보고 전국 검찰에 수사를 지시했다.

3. 전개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 7분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연합(통칭 전민련, 한국진보연대의 전신) 사회부장이 서강대학교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는 분신 3일 전인 5월 5일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아리 '소리새벽' 회원 이XX, 송XX에게 분신 의사를 처음 표명한 후 7일 오후 7시 30분경에 여자친구 홍XX을 만나 분신 결의를 밝히면서 수첩을 건네주었다. 그날 밤 9시 30분에 이XX은 대책회의 관계자에게 김기설의 분신 결의를 전하자 곧바로 전민련 관계자들이 김기설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임XX는 서울 북가좌동에 있는 자취방에서 김기설을 만난 후 대책회의 상황실에서 이**을 보내 김기설에게 분신 계획을 만류하며 보호를 시도했고 전민련도 연세대에 사람을 보내 그의 분신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운명의 5월 8일이 밝았고 김기설은 아침 6시 30분에 여자친구 홍씨에게 전화를 걸어 "열심히 살아라"며 자신이 신촌 부근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8시 7분에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했고 홍씨는 12시에 연세대 대책회의 사무실에 김기설의 수첩을 전달했다. 이에 전재기 서울지방검찰청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강신욱 강력부 부장검사 등 6명으로 전담 조사반을 짜서 수사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11일에 전민련은 검찰의 요구에 따라 김기설의 필적이 담긴 사회국 업무일지를 전달했다.

13일에는 남기춘 등 검사 2명은 김기설이 복무했던 군부대에 가서 감정의뢰 없이 필적을 입수했고[4] 오후 10시에 여자친구였던 홍씨의 집을 수색하고 그녀를 불법 연행하여 4일 간 약 100시간 동안 수사했으며 공판 하루 전인 17일에 증거보전 절차를 마쳤다.

15일에 검찰은 동 단체 총무부장 강기훈(姜基勳)이 1985년에 쓴 진술서를 필적감정 의뢰하도록 한 뒤 16일에 강기훈의 대학 후배였던 이##(당시 속셈학원 강사)를 강제 연행하고 강기훈의 집을 수색했다. 18일 검찰은 김기설의 유서와 자필 노트 필적이 서로 다르다고 본 후 강기훈과 이씨의 필적과 동일한지의 여부를 조사하고자 했다.

이렇게 되자 강기훈은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혐의를 받았다. 위에서 설명하듯 검찰은 바로 강기훈에 대해 유서대필 등 자살방조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강기훈의 필적을 입수하는 등 강기훈을 자살방조 피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를 진행했으며 검사 및 검찰 직원은 관례와 달리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해 필적 감정문건에 대해 설명했고 국과수 직원은 "어떠한 감정을 원하느냐?"라고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이에 강기훈 측은 당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고 강경대 열사 살인폭력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5] 측의 농성투쟁에 참여했고 19일 전민련 측은 김기설의 수첩을 대책회의 자료함에서 찾아 20일 해당 수첩 및 강기훈의 옥중 편지를 공개한 후 검찰에 보냈다. 21일에는 숭의여전 학생이 4월 18일 당시 김기설이 쓴 자필 메모를 공개했고 '성남 터사랑 청년회' 측은 김기설이 '한정덕'이라고 가명을 쓴 방명록을 공개했다. 22일 전교조 강원지부 측이 3월 23일 원주지회 개소식 당시 김기설의 필적이 담긴 방명록을, 24일 전민련도 김기설이 쓴 성남 민청련 활동일지까지 공개했다.[6]

이에 5월 21일 검찰은 김기설의 수첩을 공개하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하며 수첩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윤석만 검사는 <한겨레신문>이 필적을 의뢰한 중앙인영필적감정원을 압수수색했다. 2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검찰에 공개수사를 요청했으나 25일 검찰은 국과수 감정결과를 토대로 김기설의 수첩이 조작되었다고 밝혔다. 26일 신상규 주임검사가 강기훈을 자살방조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김전종 판사 측이 영장을 발부하자 30일 KNCC 인권위 측은 '김기설씨 분신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6월 7일 강기훈이 결백을 주장하며 김수환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자 12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평위가 자진출두를 권유했고 15일에 김 추기경이 명동성당에 경찰력을 투입해선 안 된다고 강력히 표명했으며 KNCC 인권위가 강기훈이 대필하지 않았다는 심증을 다룬 1차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18일 <한겨레신문> 취재진이 경기도 성남에서 홍씨의 은거지를 찾아냈으나 경찰에 연행되었고, 그 사이 홍씨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24일 강기훈은 "피고인이 아닌 검찰의 부도덕함과 타락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법정에 서겠다"며 자진 출두하여 7월 12일 기소되었다. 이 공으로 강신욱은 형사1부장까지 올랐다.(당시 공소사실 요지, 검찰 수사발표문, 강신욱 부장검사 인터뷰)

한편 그해 6월 29일에는 강기훈의 결백을 주장해 온 서준식 전민련 인권위원장이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7월 2일 검찰은 유서대필 배후 관련 참고인 14명에 대해 전국 수배령을 내리고 같은 시기 업무일지를 3명이 작성한 걸 알고 임무영 전민련 사회부장을 새로운 대필 혐의자로 추적, 6일 임무영을 연행하여 조사한 결과 대필 혐의가 없자 집시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그해 7월 14일 '강기훈 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20일 변호인단이 강기훈의 보석을 신청했으나 8월 2일 기각되었고, 21일 검찰이 강기훈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28일 1차 공판에서 변호인은 모두진술에서 일시/장소가 특정되지 않았음을 들어 형사소송법상 기본 원칙이 무시되었기에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강기훈도 "유서대필 혐의자로 몰린 지난 3개월 간은 본인에게 어려운 시기"라며 "이 사건은 본인을 희생양삼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현 정권의 비열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10월 9일 ~ 23일 4, 5차 공판에서 김형영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이 증인 신문했고 11월 6일 6차 공판에서 홍씨가 증인 출두를 거부한 상태에서 김기설 및 홍씨 2명이 동일 노트에 쓴 <동우전문대 학내 폭력사건 녹취록> 및 분신 당시 수첩 복사본을 제출했다. 다음날 7차 공판에서 홍씨는 검찰 측의 요구로 비공개로 진행하는 와중에 자신의 수첩에 쓰여진 메모가 강기훈이 쓰지 않은 게 분명하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20일 8차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김기설이 3백만원을 빌리고 써준 각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11월 27~28일 9, 10차 공판에서 일본인 감정인 오니시 요시오가 강기훈의 필적이 유서와 다르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12월 4일 검찰은 강기훈에게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이에 변호인단이 장문의 변론요지서를 통해 강기훈의 결백을 주장했음에도 12월 20일 12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항소 후인 1992년 2월 9일 MBC 뉴스를 통해 김형영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의 뇌물수수 및 허위감정 정황이 폭로되었다.# 이에 김형영 측은 11일 최창봉 MBC 사장, 이양길 보도국장, 홍순관 기자 등을 고소했으나 17일 김형영이 검찰에 구속되었다. 단 검찰 측은 허위 감정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1992년 2월 11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열린 계약서 인장위조사건 재판에서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배척한 첫 판결이 내려져 반전의 가능성이라도 보이기 시작했다.# 27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 12개 재야단체들이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강기훈공대위)'를 결성했고 3월 27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3차 공판에서 국과수 문서감정에 대해 검증을 실시했으며 30일 4차 공판에서 구속 상태인 김형영이 증인 신문했다. 그러나 4월 2일 홍씨가 불출석한 상태에서[7] 4차 공판이 열리고 9일 5차 공판에서 검찰이 1심과 같은 형을 구형하자 4월 15일 강기훈공대위가 명동성당 앞에서 '강기훈의 무죄석방과 검찰의 필적은폐 규탄 집회'를 열고 16일 박형규 목사 등 각계인사 400여명이 '강기훈 무죄석방을 위한 4백인 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시기 김수환 추기경 등 23명이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는 서한을 항소심 재판부에 전달하는 등 갖은 노력을 했으나 20일 재판부는 1심과 같은 형을 선고했다.

이에 강기훈은 상고했으며 7월 20일 김대중 민주당 대표, 장을병 성균관대학교 총장, 김승훈 신부 등 각계 인사 213명이 공정재판 촉구 서한을 대법원에 냈고, 2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목회자들이 '공정재판을 위한 금식기도회'를 열었지만 24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1993년 1월 19일과 27일, 2월 6일 총 3회에 걸쳐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인권위원회, KNCC 인권위원회 등이 각각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강기훈의 사면을 청원했으나 그는 3월 6일 대사면, 4월 15일 석가탄신일 특별사면, 12월 24일 성탄절 특별사면 대상에서 각각 제외되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선 연속되던 분신자살에 '사정은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저렇게 극단적으로까지 해야 하나'는 회의론이 돌던 것도 사실이었는데 마침 뉴스에서 학생이 친구를 도와 자살을 방조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자 운동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으며 결국 국민들이 등을 돌린 학생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났다면 그냥 운동권의 흑역사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4. 논란

4.1. 필체 감정 논란

국과수 감정과는 달리, 피고인 측이 제시한 제3기관의 문서감정 결과는 필체가 다르다고 결론내렸다. 분신한 金基卨씨의 유서를 감정했던 일본인 감정인 오니시 요시오(大西芳雄)씨는 22일하오 도쿄都내 日本기독교교회협의회(JNCC)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金씨의 유서는 姜基勳씨의 필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밝히고 『韓國법정에서 요청이 있으면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에 대해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획수,필법 등에 대해 감정이 잘못됐다며 오니시씨를 집요하게 추궁, 오니시씨로부터 "한글을 몰라 감정 당시 재일한국인의 도움을 받았으며 특정 자음이나 모음의 수를 잘못 계산했음을 인정한다"는 진술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역시 필적이었다. 대한민국에는 필적감정인들이 극소수였기 때문에 공정한 감정소견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국가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에서 소신있는 감정을 하다가 자칫하면 업계에서 퇴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일본인 감정인에게 필적감정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일본인 감정인은 강기훈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내놓았는데 법원은 그 감정결과를 배척하고 도리어 일본인 감정인을 호통쳤다. 그 이유는 한글을 모르는 일본인의 감정은 신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법원이 강기훈의 혐의를 너무 빨리 예단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4.2. 강기훈, 김형영을 허위 감정 혐의로 고발

그로 인해 감옥에 갔다가 명예를 잃고 출소한 강기훈은 그를 허위 감정으로 고발했는데 이유는 독재 정권의 주구가 되어서 유서를 허위로 감정했다는 것이었다.

국과수 前문서분석실장 金炯永씨 피소(1995년 1월 29일)

그렇지만 국과수 간부 김형영은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사실 이것은 어느정도 예상되어 있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검찰이 자신들의 주장을 허물어뜨릴 수도 있는 국과수 증인을 유죄로 판단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검찰,김형영(金炯永)前국과수실장 무혐의 결정(1995년 6월 2일), 前(전)국과수 문서실장 검찰 무혐의처리(1995년 6월 4일).
서울지검 형사 6부 유국현 부장검사는 3일 지난 91년 발생한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에서 허위로 문서를 감정한 혐의로 고발된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씨(60)를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은 결정문에서 "관련기록과 증인들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김씨가 감정서를 허위로 작성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4.3. 당시 국과수 필적 감정한 김형영의 토지 사기건

훗날 김형영은 토지 사기 사건 당시 토지문서를 허위로 감정해 줬다고 콩밥을 먹었다. 강기훈은 '김형영은 사기꾼들과 짜고 허위감정을 하는 나쁜 사람이다. 그래서 유서 사건도 허위로 감정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재심을 청구했다.

유서대필 사건 姜基勳씨, "재심 청구"(1998년 2월 11일)
姜基勳씨(35.큐빅테크 직원)는 11일 前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 金炯永씨가 사기범들과 짜고 토지문서를 허위감정해준 혐의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유서대필사건 당시부터 이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서대필 사건 당시 필적감정을 맡은 金씨의 증언으로 유죄가 확정돼 3년여에 걸친 감옥살이를 했던 姜씨는 "당시 재판과정에서 金씨가 대규모 토지브로커들과 연계했던 사실이 일부 드러나기도 했지만 사법기관은 국가 공신력의 훼손을 위해 결국 金씨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형영은 그 토지 사건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토지사기 연루 전國科搜실장(강기훈 필적 감정한) 무죄(1998년 7월 3일)

5. 진실화해위 심사 및 법원 재심확정

잊혀질 줄 알았던 사건은 2000년대에야 빛을 보았다. 2002년 4월 2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91년 5월, 죽음의 배후'[8] 편을 통해 그간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해 오던 김기설의 부친이 문제의 유서가 김기설의 자필 유서였다고 증언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프로에서 제작진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의 사설감정인에게 의뢰한 결과 필체가 김기설의 것이라는 소견을 이끌어냈다.#

2004년 11월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해당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고 2005년 각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결성되어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재조명해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재의뢰했다. 국과수는 이 사건을 맡아 5명의 감정인으로 재감정했고 동년 11월 이들은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내어 1991년 당시의 감정을 뒤집었으며 진실화해위에 출석한 1991년의 김형영 감정인도 "감정인에 따라 판정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간접 시인했다.

진실화해위에서는 강기훈이 무죄를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고 2009년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이강원)는 강씨가 낸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서울고검은 다음날 즉각 항고했으나 2012년 대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6. 법원 재심 결과

2012년 12월 20일부로 재심이 시작되었으나# 강기훈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재심 청구 와중에 부모님이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신도 암투병 중이었다. 일요신문 그래서 인터뷰도 꺼리는 편이었다. 경향신문[9]

2013년 12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유서의 필적은 김기설 본인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기사

2014년 2월 13일 서울고등법원의 재심에서 강기훈은 유서 조작 및 자살 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를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속내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마침내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에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24년 만에 강기훈의 유서 조작 및 자살 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기사(대법원 재심 판결문(2014도2946))

이후 변호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금 청구와 국가배상 청구 등과 관련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 5월 30일에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10] 그리고 2주 전 "팟캐스트방송 이이제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재조명되었는데 강기훈은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고 마지막 남은 생을 조용히 마감하고 싶다고 밝혔으며 강기훈과 함께한 가족, 강기훈의 주치의, 변호인들을 비롯한 여러 법조인들이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취재하기도 했다. 강기훈의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강기훈은 계속되는 재판으로 트라우마를 반복해서 겪고 있었다고 하며 당시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서 사과는커녕 '1:1 비겼다'는 말을 했다.

아직도 검찰은 이 사건에서 강기훈이 유서를 조작하지 않았을 뿐 유서가 조작된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서조작이 사실이라면 진범을 찾지 못한 사건일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아직도 검찰의 민주화에 갈 길이 멀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찌됐든 애꿎은 사람 하나 잡은 셈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여담으로 본 유서대필 조작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이다.

2017년 7월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강기훈에게 6억원의 국가배상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5가합569037 다만 당시 고문을 저지르고 사건을 조작한 검사들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지나서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당시 수사검사는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곽상도, 윤석만, 박경순 검사 등 9명이다. 이 중에 강신욱 검사는 후에 대법관을 역임했으며 곽상도 검사는 이후 대구 중구·남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들에게도 이 사건은 흑역사이기 때문에 강 검사(대법관 임명제청 당시 서울고검장)는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으며[11] 곽 의원은 2017년 9월 12일 김명수 대법원장후보자 인사청문회 중 본 사건이 언급되자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기도 했다. # 안종택 검사는 당시 공안부 수석검사로 유서대필 자살방조 수사에는 관여하지 않고, 그 사건이 기소된 후에 경찰에서 송치된 강기훈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추가기소하였다. 강기훈은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2014년 2월 13일 무죄 판결이 나온 재심 결과는 강기훈의 자살방조죄에 대한 것이었고, 안종택 검사의 추가기소 부분은 뒤집히지 않은 셈이다. 2014년 2월 14일 오마이뉴스 기사 참고

위 제1심 판결에 대해 수행청인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사뭇 이례적이게도[12] 항소를 하지 않기로 했으나# 강기훈은 일부 패소 부분(검사들에게 배상을 청구한 부분)에 불복하여 항소하기로 하였다.# 항소심 판결문은 서울고등법원 2018. 5. 31. 선고 2017나2046920 판결 참고.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오경미)는, 1991년 발생한 이른바 강○○ 유서대필 사건으로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강○○ 및 그 가족들이 대한민국과 당시 담당 공무원인 검사 및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속 감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구한 사건에서, ① 대한민국을 상대로 수사과정의 개별 불법행위(수사기관의 한계를 넘은 위법한 피의자조사,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 침해, 피의사실 공표)를 이유로 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조 제1항 제4호의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조작의혹사건에서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입은 손해에 관한 국가배상청구에 해당하므로 헌법재판소 2014헌바148 등 결정에 따라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와 달리 장기소멸시효(불법행위 성립일로부터 5년)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여 청구를 배척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고, ② 나머지 부분(대한민국과 검사를 상대로 수사 전반과 기소로 인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부분, 검사 개인을 상대로 개별 불법행위를 이유로 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부분, 감정인 개인을 상대로 위법 감정을 이유로 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상고를 기각하여, ‘제출된 증거만으로 수사 전반과 기소 과정에서 고의에 의한 필적 은폐, 참고인들에 대한 허위진술 유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대한 허위감정 유도, 가족과의 접견교통권 침해가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검사와 감정인의 장기소멸시효 항변은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으며 이들 개인의 손해배상책임은 소멸시효 완성에 따라 소멸하였다’고 판단한 원심판결을 확정하였습니다[대법원 2022. 11. 30. 선고 2018다247715 판결].
대법원은 수사과정의 개별 불법행위(수사기관의 한계를 넘은 위법한 피의자조사,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 침해, 피의사실 공표)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을 청구 부분에 대해 시효가 완성됐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원심 판단 부분을 파기환송했다. 손해배상(기) 사건(2018다247715) 보도자료, 법률신문, 대법원 2022. 11. 30. 선고 2018다247715 판결문 전문

7. 재심 이후의 논란

재심결과에 따라 '강기훈이 유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의 문제는 강기훈이 쓰지 않은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자살한 김기설 본인이 유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 혹은 '강기훈/김기설이 아닌 다른 자가 유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더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변호인 측은 김기설 본인이 유서를 작성하였다는 주장과 함께 강기훈을 공소제기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무고한 사람을 잡기 위해 검사가 공소권을 남용했다는 것인데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자살방조죄로 공소한 것은 문제가 없지만 유서를 작성한 사람은 강기훈이 아니라는 것.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법원이 변호인의 주장을 인용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책임 소재가 다소 엇갈린다. 강기훈은 별론으로 하고 김기설이 유서를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살방조죄로 공소제기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자살방조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검찰 측은 무고한 자에게 공소를 제기한 것 뿐만 아니라 자살방조죄를 저지른 누군가를 놓친 것이 된다.

한편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검찰은 그릇된 공소제기를 한 것은 물론 법원은 그릇된 심리와 판결을 한 꼴을 인정하게 된다. 즉, 사법부까지도 부끄러워질 형국이었다. 이 또한 반박하기 위해 김기설이 유서를 작성했음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도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관계 법조인들은 사법부가 자기들의 과오를 면피하기 위한 허울뿐인 재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재심에 결과에 대해 모두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강기훈뿐만 아니라 그의 지인들은 오히려 안타깝고 슬프다고 했다.

2018년 9월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에서 28년만에 이 사건을 재조사한 걸로 확인되었다. 조사의 핵심은 노태우 정부가 정부차원에서 이 사건을 기획, 조작했는가의 여부인데 당시 김기설이 분신한 당일 오전 7시에 열린 치안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열렸고 대통령 비서실장과 안기부장, 법무부장관, 노동부장관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분신사건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사건 발생 9시간 후 강기훈의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벌어진 것을 의심했다. 위원회는 당시 회의 참석자들을 소환해 회의에서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를 추궁한 걸로 알려졌다. 만약 이 대책회의에서 김기설의 분신을 정권 차원에서 왜곡, 조작하기로 결정했다면 사건의 파장은 만만치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특히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정해창이 주관한 회의였음도 알려져 정 비서실장이 관련 내용을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의 여부도 논란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

8. 여담

강기훈은 클래식 기타를 독학으로 익혀 무대에 설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2015년에 전라남도 장흥의 시골에서 취미로 통기타를 치던 김준희를 우연히 목도하고 클래식 기타의 세계로 이끌었다.[13] 김준희는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 유학을 준비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으로 무산되었고 코스타리카, 스페인 콩쿠르에서 청소년부 우승을 차지했다.

9. 참고/관련 자료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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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시대에 걸친 경우 시작 시점이 기준.
※ 3공화국기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를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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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법 등의 판례는 더 많다. 상고가 되어 유죄가 나온 판결 중 현재 알려진 판결이 더 없을 뿐이다.[2] 재판에 원체 의심쩍은 구석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형사법 학자들은 재심결정이 있기 훨씬 전부터도 수업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이 사건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고 특히 신경쓰는 편이었다. 물론 재심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니 이제 강씨가 사람 목숨 운운하는 누명으로 마음고생할 일은 더는 없겠지만, 그래도 2015년 5월 재심 판결 이전에 출간된 거의 모든 형법서적에서 이 사건을 자살방조죄의 대표 판례로 지목하고 있어 강씨의 이름이 세간에서 완전히 잊히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 듯 하다. 따라서 전공자들이 이 사건을 접할 때는 잘못된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된 사건기록 부분은 믿을 게 못 되니 적당히 거르고 대한민국 법원이 이 사건을 통해 선보인 자살방조죄의 핵심 법리가 무엇인지만 올바르게 이해하여 얻어가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3] 당시 상황은 조금만 더 악화되었다면 제2의 6월 항쟁 수준까지 갔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4] 사건 당시 해당 부대에서 정훈장교로 복무했던 이찬진 변호사는 1992년에 검찰의 필적 은폐 정황을 강기훈공대위에서 밝혔다.#[5] 실제 단체명이 이런 식이다.[6] 해당 일지에는 김기설의 흘림체 및 정자체 두 가지가 상존해 있다.[7] 이에 대해 홍씨는 1993년 10월 검찰청사 민원실 기자회견에서 공판 전날 검찰 수사관의 압력으로 출석치 못했다고 밝혔다.#[8] 2003년 제1회 언론인권상 특별상 수상작.[9] 1998년 3월 19일자 <한겨레21> 기사에 따르면 김기설의 유족들과 여자친구도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김기설의 부친과 누나들은 그때의 얘기가 거론될 때마다 속앓이를 하는가 하면 사건의 중요한 증인이던 여자친구 홍씨도 은둔 중이었다고 한다.[10] 1993년에도 <강기훈 씨 유서대필 사건 - 누가 유서를 썼는가>라는 제목으로 이미 방송 시도가 있었으나 대법원 측이 해당 회차의 제작 사실을 미리 알아챈 후 SBS 측에 "증거 채택은 재판부의 고유 권한"이라며 방영 후에는 SBS에 대한 항의 성명 및 대국민 사과를 위한 성명 여부를 검토하는 식으로 압박하면서 방송사 측은 '객관성 유지의 어려움'을 명분으로 갑작스레 방영을 보류시켰다. 그러다가 1998년 3월 15일에 비로소 이 사건을 다룬 후 2007년 12월 8일에 또 한 번 다룬 바 있다.[11] '법원에서도 유죄판결을 했으니 유서대필한 게 맞지 않겠느냐' 식의 맥빠진 답변을 하여 빈축을 샀다.[12] 국가소송은 어지간하면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 선례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상소하는 경향이 있다.[13] "클래식 기타 선율로 맺은 인연 '스페인 유학' 꿈꾸게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