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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3 12:00:27

광덕제

조선 제22대 국왕
대한 제8대 태황
헌종 광덕제 | 憲宗 廣德帝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태황
憲宗 經文緯武明仁哲孝太皇
[1]
출생 1795년
대한 황도 한성부
즉위 1829년 음력 6월 2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834년 음력 9월 17일
대한 황도 한성부 경희궁 침전
재위 대한 태황
1829년 ~ 1834년
(음력 1829년 ~ 음력 1834년)
연호 광덕(廣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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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순(峋)
부모 부황 영종 원평제, 모후 파평 윤씨
부인 추존 순원황후 안동 김씨, 황후 반남 박씨 }}}}}}}}}

1. 개요

대한 태황 헌종 광덕제 이순(憲宗 廣德帝 李峋)
명군이 되어보세! 4부에서 이재석이 빙의한 흥선제 이진의 아버지. 1795 ~ 1834.
이재석, 김상희에 이은 3번째 현대인 빙의자로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영종 원평제의 삼남으로 태어났지만 형 둘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요절했기에 태자가 되었다. 재석이 평하길 원본 성친왕이나 홍이 같은 놈. 어릴 때부터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그래도 살인이나 강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 등 폐태자될 일은 피하는 얍삽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금에게 다른 적자가 없는데다 과거 성친왕이 재석의 빙의 후 개과천선했던 사례 때문에 태자 자리는 잃지 않았다. 여색을 좋아하는데 4부 시작 시점에서 이미 정식 후궁만 넷이고 황손으로 인정받은 서자만 아들 둘에 딸 넷인데, 그후 4년 만에 7명이나 자식을 더 본다 제위에 오르고 2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자식이 (영유아기에 일찍 죽은 아이들 빼고 살아있는 자녀들 숫자만 세어도)20명으로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남긴 자식 숫자는 29명.[2] 취향이 아주 확실한지 조금만 미모와 몸매가 망가져도 바로 흥미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그외에도 여자를 많이 두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서자녀도 여럿 있다고 한다. 미주 방문 중에도 나라에 충성을 다한 미주 원씨 가문에게 역적 원균의 후손이라고 폭언을 하여 원씨 당주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으며,[3] 음주가무에 빠져 미주 백성들을 위무한다는 원래 목적은 팽개쳤으며, 자기 정실부인과 아들이 탄 마차를 몰면서 음주운전으로 폭주하다가 아내를 사고로 죽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부황의 명으로 1년간 북한산성에서 근신했는데, 우연한 사고였는데 내가 뭘 반성하냐는 식으로 전혀 반성하지 않고 음주와 여색, 사냥 등 할 거 다 하는 것도 모자라 문안인사를 안 왔다고 어린 아들을 구박하고 큰딸에게 하루 8시간씩 바이올린 연습을 강요하는 등 막장부모 짓까지 벌여 재석을 분노케 한다.[4] 여성 교육에 대해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다. 재석은 이런 자가 군주가 되면 틀림없이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기에 막아야 한다 생각하지만, 엄연히 혈통상 부친인 태자에게 대들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은 참으며 와신상담하고 있다. 다만 태황이 된 후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자신의 뜻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일부 타협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잦은 모습이 과거 무종이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지라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100% 막장은 아닌 것이, 재석이 어린 나이에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어릴 때는 마음껏 놀아야 한다며 다정하게 굴고[5] 재석이 그간 마포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자 몰래 암행에 동참시켜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서 재석을 의아하게 만든다.[6] 게다가 장조와 중종의 예를 들며 재석에게 군주는 변란에 대비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며 승마, 궁술, 생존기술 등을 출중한 솜씨로 시범을 보인다거나 공부에 대해서 대놓고 자기는 '일부러' 지나치게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한다고 말하고, 측근들도 부귀영화를 위해 몰려든 아첨꾼들과 국가를 위해 자신이 성군이 되길 바라는 충신들을 구분해서 전자는 지금은 같이 놀지만 즉위하면 손절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처신을 보인다.[7] 태자비 박씨가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고 싶어서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재석을 미주 순행에 보내달라며 베겟머리 송사를 하자 그대로 부황에게 요청하고 성사시키지만 태자비의 검은 속마음을 다 꿰뚫어보고 있으며, 본인은 재석이 나폴레옹을 만나 외교적인 성과를 올려 태손의 지위가 굳건해지기를 바래 미주로 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주변에선 태손이 너무 치켜세워지면 이를 질투한 태자가 아들을 핍박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점으로 나오는 부분을 보면 의외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태손이 미래의 태황감으로 각광받을수록 그 아비인 자신의 입지도 단단해진다며 좋아하는 중.[8][9]
재석이 미주에 간 동안 건강이 악화된 원평제가 명해서 사흘간 대리청정을 하는데, 눈치껏 성실하게 국정을 돌보고[10] 자신의 서양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며 유창한 영어로 영국 대사를 접견했으며 그 이후에는 유흥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재석이 귀국하는 동안 원평제가 붕어하면서 제위에 오른다. 전 장인인 김조순을 보내서 재석을 맞이하게 하고, 노예 재석을 마주하자마자 바로 '태자'라고 칭하며 반기며 엄격했던 조부와 달리 자신을 '아바마마'라고 부르게 하고, 전례를 깨고 국상 기간 중에 태자 책봉식을 개최하여 정식으로 태자로 임명한다. 그렇게 재석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본인이 귀찮아하던 빈소 지키는 일도 재석에게 떠넘겨버린다. 그와 별개로 재석이 생각한 것과 정확히 같은 논리로 나폴레옹에게 캐나다 서부 땅을 사는 것에 동의하고, 재석이 생각했던대로 건주 양국에 재석을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구상을 밝히며, 놀이 친구들은 손절해서 조정의 호감을 사고, 국상 중임에도 재석의 태자 책봉을 밀어붙이는 정치력을 발휘한다. 막상 뚜껑 열어보니 군주로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지만 재석이 북경에 간 사이 중종 건흥제의 유지를 대놓고 어기는, 유구를 동군연합으로 만들어 실질적으로 병합하겠다는 폭탄 같은 구상을 밝히고 일본을 달래기 위해 아모국을 일본에 넘기겠다는 구상을 밀어붙이며 재석과 독자들이 안심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주변국 모든 황실에 자기 딸들을 시집보내 혈연으로 묶어 동양의 외조부가 되겠다는 구상을 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이 안은 재석이 뜯어말려 일본과만 조카들을 통혼시키는 것으로 축소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복동생 전왕에게 딸을 일본에 시집보내라고 강압적으로 통보하는 등 이복동생들에게 원한을 스스로 쌓아가고 있어 독자들은 제 명에 못 살고 암살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소왕의 테러 음모를 다 꿰뚫어보고 있으면서 재석에게 수사 책임을 맡겼다.
즉위한 후 눈치볼 상대가 없어지자 운동을 그만둬버리고 음주와 여색은 그대로 몰두한 바람에 점점 비만이 되어가고 있어 성인병이 우려되었다. 일단 태의들은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하여서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줄 알았으나... 어처구니없게도 후금에서 선물로 받은 한혈마를 타고 고선지, 나폴레옹 흉내를 내며 금강산을 무리하게 등산하려다가 낙마하여 10미터 절벽을 굴러떨어지면서 중상을 입어 사망하고 만다. 다발성 골절과 내장파열이 더쳐 결국 복막염으로 악화됐는데도 치료가 실패할까 두려워서 수술을 거부하고 마취약으로만 버티다가 결국 사고 15일 만에 붕어했다. 평소 내가 내일모레 마흔인데 살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겠느냐며 태자에게 나랏일을 미리 가르쳐놔야 한다고 틈만 나면 재석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모두들 지금은 건강하니 놀기 위한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알고보니 사망 플래그였다.
재석에게는 애증이 교차한 인물이었지만[11] 백성들에게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은 군주였다. 그의 재위기간 약 6년 동안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도 없었고, 작황도 전반적으로 좋았던데다가, 임금이 유흥을 즐기는 게 흠이 되는 시대도 아니고 노는 것도 국고를 축내거나 백성을 약탈하는 일 없이 술 마시고 유람 다니고 후궁이나 들이는 등 돈 많은 한량 수준으로만 개인적으로 놀았으며,[12] 태자를 굴려서 국정도 빈틈없이 운영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태황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훗날 실록에서 재석이 이 시기에 대리청정을 수시로 하며 사실상 국가를 통치하고 본인은 국무 대부분을 방임하다시피 한 것이 드러난다면 "운이 좋았을 뿐인 범군과 암군 사이의 군주" 정도의 평가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그의 재위기간은 작중 조선 왕실/대한 황실을 기준으로 하면 예종, 문종, 정종, 단종 다음으로 짧다.[13]

3. 평가

사후 흥선제 시기의 전개를 보면 광덕제의 여성 편력과 그로 인한 다산은 커다란 나비 효과를 낳았는데 황자와 황녀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어지간한 경화사족 가문들은 전부 왕실과 통혼에 성공했다. 본국이 아닌 속지 출신인 대남도 정씨 가문 자제에게 평소라면 언감생심 쳐다도 못 봤을 적통 공주와 혼인할 기회가 주어질 정도였다. 덕분에 훗날 러시아, 청에서 국혼 제안이 들어왔을 때 완강한 반대가 아닌 반반으로 여론이 갈렸고 반대측도 흥선제가 결정을 내린 순간 군말 없이 따랐다. 흥선제의 외가인 장동 김씨는 어차피 참여할 수 없었고 나머지 가문들은 광덕제 소생을 통해 왕실과 사돈이 되어서 완강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었던 것. 본의 아니게 황실의 국제화에 공헌한 것이다.##
한편 이 인간이 오래 재위했다면 대한이 흔해빠진 제국주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감상도 있다.#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을 개시한 2~3부에서 재석은 명분 있는 전쟁만 하고, 약소국이라도 존중하고, 충성의 대가로 정복한 지역의 원주민 권익을 보장하는 등 영토 확장에 으레 따라오기 마련인 패권주의를 최대한 지양하는 행보를 보였고 이것이 경로의존성으로 작용해 4부의 대한은 제국주의 시대에 다른 제국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여럿 보여주는데[14] 서양식 동군연합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대뜸 유구의 독립국 지위를 빼앗은 데서 보여주듯 머리에 든 게 딱 서양 근대와 제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흉내 밖에 없는 인간이 오래 즉위했으면 광덕제 본인은 자제하더라도 기풍에 변화가 생겨 남의 나라에 아편 팔아먹고, 수탈과 침략 일삼는 영프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원역사에서의 일제와 다를 게 없는 국가로 바뀌어 갔을 거라는 것.[15][16] 반면 작중 세계의 후대에는 적극적인 국혼, 일본의 공무합체 공작 협력, 동남아에 대한 팽창정책,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로의 세력 확장, 캐나다 구입 등 흥선제(재석)의 정책이 사실 부황 광덕제가 추진하려다 때이른 죽음으로 흥선제가 물려받아 추진한 것으로 오해되면서 광덕제의 평가가 실제보다 높아지거나 미화될 수도 있다는 독자들의 평가도 있다.####

4. 현대인 빙의자 가능성

상희 대신 등장한 새로운 3번째 현대인 빙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주 한 사람이 이 제국을 다스릴 수 없는 시대라며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한편 재석에게 의회제도를 도입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하고, 재석을 태자로 책봉하며 선물로 내린 명마의 이름을 부케팔로스로 붙이고, 서양 음악과 오페라를 즐기며 세익스피어 전집을 읽고자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대한의 사상과 문화보다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찬양한다.

그외에도 간간히 아내들과 자식들을 모두 모아 파티를 열면서 다양한 양념의 무종계, 남만전, 흑장면, 탕수육을 메뉴로 내고 아이들이 손으로 뜯어먹어도 전혀 꾸짖지 않으며, 맥고국을 메히코가 아닌 멕시코로 부르고 아직 21세밖에 안된 청년이던 박규수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동안 무조건 거세를 시키던 양매창을 말라리아 감염법으로 치료하도록 하는 등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순 서양빠이자 서양 사회의 장점만 보며 내로남불하는 국까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었으나 재석이 빙의한 후 처음 만났을 때는 "네가 혼이라도 바뀌지 않은 이상 그렇게 조리있게 말할 리가 없다"는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고, 황제가 된 이후엔 재석에게 일을 다 시키는 와중에 재석이 문서들 틈에 태황만 볼 수 있는 금위사 보고서가 섞여있는 것을 보고 이를 바치자 금위사 문서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하다가, 곧 언젠가 봤겠거니 하면서 그냥 보라고 하고 인생은 연극과 같다는 묘한 말을 하기도 한다. 이후에는 등선군의 명칭을 해병대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는데, 굳이 등선군이라는 명칭을 바꿀 실익도 없을 뿐더러 해병대라는 단어가 작중 시기에서 떠올리기에는 좀 어색한 현대적인 명칭이다. 또한 만주에서 유정을 찾을 때 다칭유전부터 찾으라고 하여 석유 개발이 지연되거나, 수에즈 운하, 시나이 반도 등 당시 대한인들에게 생소할 중동 지명에 대해 잘 알고, 반영 성향이면서 가장 잘하는 외국어는 황실에서도 우선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영어고 영국인들에게 유독 친근히 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며 의혹이 점점 커졌다.

무엇보다 임종 때 재석에게 순원황후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내가 할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이미 다른 이들이 많은 일들을 해놓아 내가 끼어들 필요도 능력도 없었다. 내가 아는 것들은 금방 쓸모없는 게 되어버렸다. 이제 이 꿈을 끝내고 내가 온 곳으로 돌아가노라."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이 결정타. 독자들은 그가 재석, 상희처럼 원 역사에서 온 빙의자가 역시 맞았으며 재석이 무종 때부터 일으킨 변화로 인해 대한이 이미 대제국이 되어있어 원 역사 세계에서 갖고 온 지식도 별 쓸모가 없어지자 그냥 태자→군주라는 초특급 금수저 코스 인생을 한껏 즐겨보기로 하고 즐겁게 살다가 명이 다하자 원래 삶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17][18]

사후 재석이 그의 유언을 곱씹으며 생각하는 장면이 나옴으로써 사실상 확정. 이번 생의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현대인 빙의자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심하게 된 재석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그가 살아서 함께한 12년 동안 지켜봐온 모습을 돌이켜보며 위험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며 일단 그가 이 삶에 만족했다고 하고 죽었으므로 자신처럼 윤회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19] 혹시 다음 윤회에서 그를 다시 만나더라도 굳이 선빵치지는 않기로 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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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 역사 헌종과 동일.[2] 태자 이진(재석)+그보다 손위인 효왕과 화원공주+재석의 친동생 순친왕+이복동생들 25명. 막내는 유복자다. 그나마 적장남 이윤 같이 영아기에 사망한 아이들은 뺀 게 이 정도 숫자이며, 서른아홉에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대체 얼마나 더 낳았을지 알 수 없다[3] 미주 원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심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지 만약에 원한을 크게 품었다면 북미주가 위태로워질 뻔했다. 또한 유교적 관점에서 이것은 원균의 죄를 가문에 연좌하지 않은 장조에 대한 모독에도 해당하므로, 부황 귀에 들어갔다면 결국 폭발해 폐태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다.[4] 나폴레옹도 이 이야기를 듣자 뭐 그런 막장 아비가 있냐며 재석을 위로해줄 정도로 경악했다.[5] 이때 쓸모없는 성현의 말씀 열두마디보다 쇠를 다루는 법 여섯가지를 배우는 게 더 낫다고 하는 조야를 경천동지하게 할 만한 폭탄발언도 한다.[6] 그러나 이때도 자신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아들에게 사과하지는 않았다. 또 후술되는 것처럼 자식들을 모아 파티나 낚시대회를 열었지만,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은 없었고 그 많은 자식 중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묘사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순은 본인이 내키는 대로만 아버지 노릇을 했으며 정말 책임감을 느끼고 돌보거나 키워야 하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7] 게다가 대담하게도 전자에게는 자기가 즉위 후에도 너희들을 버리지 않을거란 암시를, 후자에게는 즉위한 뒤엔 아첨꾼들을 버릴거란 암시를 주는 묘사를 하는데 완전히 상반된 묘사임에도 양쪽 모두 자기들에게 해주는 말 쪽이 사실일거라 믿고 기대감을 품는다.[8] 아무리 태손의 능력이 뛰어나고 명군의 자질을 보여도 유교가 국시인 대한에서 자신을 내치면 태손의 입지가 불안해지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국인 대한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더해 아버지의 애정으로 재석이 공부(자신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에서 적당히 손 놓길 바랬지만,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힘든 길을 걷겠다면 원하는 일을 실컷 시켜주겠다는 속셈. 자신이 태황이 됐을 때 절대 대들 수 없고 일을 잘하는 노예 후계자가 생겼으니 좋아할 수밖에 없고 공을 세우게 해서 입지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 게다가 태황이 태손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하자 자신에 관심도 끄게 되었으니 더 싫어할리가 없다. 현실에 비유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처럼 자신은 제위에만 있고 재석에게 실질적인 일을 다 시키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실제 김조순의 사위였던 순조도 효명세자에게 전권을 넘기고 본인은 유유자적 쉬려 들기도 했다.[9] 확실한 것은 광덕제는 태자 시절부터 재석에게 평범한 아버지가 다 그렇듯이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태자비를 죽게 만든 음주운전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쩔"이란 태도를 보여서 처가 장문 김씨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적들을 만든 것과는 달리, 재석 앞에서는 성의있게 변명하며 쩔쩔매기까지 한다.[10] 그 전에 부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리 국정 현안을 파악하는 밑작업을 했다.[11] 광덕제가 놀기만 할때는 차라리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12년 동안 부자의 연을 맺고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가 죽을 때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12] 작중 대한 왕실은 재석이 중간중간 재위하며 각종 사업체를 설립해서 내수사 수입원을 소작료가 아닌 사업 수익으로 바꿔 체질개선을 해놓았기 때문에 국고를 건드리지 않아도, 백성을 수탈하지 않아도 왕실 재산 선에서 어지간한 유흥비는 감당 가능했다. 게다가 국고에 손을 대더라도 당시 대한은 북태평양을 대한의 호수로 만들 정도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궁궐을 여러 채 짓거나 어마어마한 사치품을 소모해대지 않는 이상에야 어느정도의 사치는 감당할만 했다. 여기에 나라 기둥뿌리를 뽑아 말아먹을 정도로 놀아대서 국가재정을 파탄낸 후송 태녕제와 아예 나라를 망조로 이끈 서나라 함녕제의 사례가 있었고, 그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2대에 걸친 학정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의 만력제와 태창제의 사례도 있다보니 이런 주변국들에 존재했던 최악의 암군들과 워낙 비교가 되어 이 정도 일탈에는 관대해진 감도 있어 보인다.[13] 원 역사의 최단기 재임자는 약 9개월 재위한 인종이었으나 작중에선 역사의 변동으로 재석이 첫번째로 빙의한 무종 때 낳은 맏아들 인종(칭제건원 후 인조 추존)이 48년을 재위해 최장기간 임금 노릇을 했다.[14] 원평제의 동남아 정책이 대표적이다. 서양 국가라면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무주공산이 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세력을 뻗치거나 일정한 이권이라도 요구했을 텐데 함대를 파견해 지켜준 것도 모자라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깔끔히 물러났다. 작중 유럽에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작품 외적으로 답답해하는 독자들도 있었으나 이를 통해 대한은 그 영국이 '대한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우호 관계 유지에 집중할 정도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었다.[15] 작중에서도 이는 "광덕제가 역대 태황의 유지를 깨고 독립국이던 유구국을 병탄했으니 대한이 예전 자신이 했던 약속을 깨고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다"며 섬라와 대한의 교섭 문제에 개입할 것을 주장하는 증국번의 발언으로 입증되었다.[16] 유구의 독립을 빼앗은 뒤 행보를 보면 자기 허영심 만족시킨 뒤 후속 조치는 조공 면제 하나 뿐. 그마저도 동군연합에선 자기가 자기에게 조공을 바치는 꼴이라서지 유구 인심에 대한 고려가 아니었다. 한인들의 범법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고 배상하며, 유구 왕실을 꾸준히 챙겨 대한의 번국이란 국체에 만족하게 만든 건 재석이었다. 그나마 작중 유구가 말이 대한과 동등한 독립국이자 제국이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1년 2회 연공을 바치고, 200여년 넘게 대한군이 주둔해 있어 사실상 대한의 번국이나 다름없는 위치였기에 백성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약했고, 유구 지도층들도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마인드로 비교적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기 망정이지 다른 소국에게 이랬으면 큰 소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400년간 성공일변도만 달리며 국수주의와 자국 우월주의가 뿌리 내리고 분리주의와 공화주의가 도전해오는 19세기에 이런 무책임한 리더쉽은 설령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폭주와 충돌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17] 상희도 2부에서 '(무종 때 첫번째 빙의 인생에서는)조선에 온 걸 하나의 긴 꿈처럼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으니.[18] 이게 진짜라면 작중의 의문스런 행동들도 잘 설명된다. 재석에게 말한 "쓸모없는 성현의 말씀 열두마디보다 쇠를 다루는 법 여섯가지를 배우는 게 더 낫다"고 하는 말도 원역사의 대한민국에서 조선은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인 성리학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서 발전을 못해 망했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라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내뱉은 걸 수 있다. 원씨 가문을 홀대한 건 빙의된지 얼마 안되어서 원사웅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성리학적으로 원균 집안을 욕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원균 자손이란 것만 듣고 원균 후손이 호의호식하냐고 분개했을 수 있다. 조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대한에 매각을 제안한 신불랑국 북부를 사는 걸 혼자 밀어붙이려 했던 것도 캐나다 지역이 자원의 보고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유구를 대한의 번국으로 편입시킨 것도 원 역사의 일본 제국의 첫번째 희생양이 유구였으니 일본이 유구를 차지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내기 전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유구를 대한이 차지하는 조건으로 아모국을 일본국에 넘긴 것도 아모국은 어차피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일본의 영토인 홋카이도'였을테니 아모국을 일본에 넘기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정도 없었을 것이다. 금강산을 유독 좋아한 것도 그가 대한민국 사람이라 북한에 있는 금강산을 자유롭게 가보지 못 했을테니 그랬을 것이다. 여성 고등교육에 반대한 것도 그가 원래 살던 시기가 원역사 2020년대였다면(작중 재석이 조선 왕으로 빙의를 시작한 시점은 2017년이라 재석은 2010년대 후반 이후 격화된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에 대해 잘 모른다)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을 실시간으로 겪으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에 학을 떼여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사후 재석의 언급에 따르면 생전 군대에서 단발령을 전면 시행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면서 삭발했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9] 소원이 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재석은 "왕이 되게 해 달라"는 대단히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질릴 때까지 왕노릇 하게 해 주겠다는 천녀의 결정에 따라 계속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상희 역시 마찬가지로 "양한의학 구분 없이 마음껏 환자나 돌보고 싶다"고 했으므로 질릴 때까지 환자만 돌보는 윤회를 거듭하는 중이다. 그런데 광덕제 이순의 경우, 이 인물이 대체 어떤 소원을 빌어 황제가 되었는지, 아니 애초에 소원을 빌어서 황제가 된 건 맞는지, 천녀가 아닌 다른 루트로 빙의한 것인지, 전체적으로 의문투성이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이 인물이 (재석과 상희처럼 천녀에게 소원을 빌어 빙의하는 정석적 루트를 탔다는 가정 하에) 빌었던 소원이 "내가 역사를 바꾸게 해 달라"였다면, 본인 말마따나 재석이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그는 바꾼 역사가 별것 없으므로 아무리 만족했더라도 윤회할 수도 있다. 그가 재석에 필적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20] 여담으로, 재석이 소원을 빌 때 사용한 물건은 연적이었고, 상희가 소원을 빌 때 던지면서 사용한 물건은 벼루였으므로, 광덕제 이순(에 빙의한 인물) 역시 문방(文房) 중 뭔가를 통해 천녀를 불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연적은 먹을 갈 때 물을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물통이요, 벼루는 먹을 가는 판이므로, 먹이 있으면 깨끗하게 연적에서 벼루에 물을 따라 먹으로 간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이순에게 빙의한 사람이 건드린 물건은 일 가능성이 높고, 이후에도 유사한 현대인이 등장할 경우 붓, 종이, 문진, 종이 등 문방과 엮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