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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9:06:34

도요토미 히데요시(명군이 되어보세!)

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2부의 등장인물로, 원 역사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일인물이다.

2. 작중 행적

원 역사와 달리 혼노지에서 노부나가가 죽을 뻔했을 때 고니시의 조언으로 원군을 이끌고 도착해 노부나가를 구했기 때문에 노부나가 정권의 사실상 2인자가 되었다. 노부나가에게 대륙 침략의 준비를 하라는 명을 받고 규슈 전역을 다스리는 대영주가 되어 실제 역사처럼 히젠 나고야에 성을 쌓고 동원 체제를 세우고 있다.

본작에서는 노부나가가 살아남으면서 시바타 카츠이에와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고 있는 오이치와 그 장녀인 차차를 남몰래 사모하고 있어 차차가 조선으로 시집가자 속상해하다 노부나가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고, 전쟁 직전 차차를 구해온답시고 조선에 닌자를 보냈다가 조선 첩보망을 모두 붕괴시키는 뻘짓을 벌인다.

조선 원정이 시작되고 전라도에서 개고생하는 것도 모자라 동생과 조카 등 혈육들이 죄다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게 되자 차라리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을 당할 때 그냥 죽게 내버려뒀으면 이 꼴은 안 당했겠다고 노부나가에 대한 불만이 무르익는데, 조선과 명나라 원정을 미친 원정이라고 까는 원 역사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장면이 나온다.

가까스로 합류한 자신에게 위로의 말은 고사하고 한심하다 욕하고 충언도 안 듣고 끝까지 아집을 부리는 노부나가에게 실망감과 원한을 품고, 결국 마지막 전투인 동래성 전투에서 노부나가를 배신해 노부나가를 조선군에게 미끼로 던지고 혼자 일본으로 도망친다.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노부나가가 돌아온 것처럼 속여 오사카 성에 들어가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를 제압하고 일본의 정권을 잡는다.

재석은 원 역사의 임진왜란의 행적과 달리 노부나가 밑에서 고생만 하는 히데요시를 나름 불쌍하게 여겼지만, 히데요시의 전쟁범죄[1] 소식을 접한 후 히데요시를 처죽인다는 결심을 굳혔다. 경인왜란의 피해를 직접 받은 조선측 인물들은 히데요시를 쳐죽이려는 재석의 결정에 별 의문을 품지 않지만, 일본측 인물들은 조선이 히데요시의 목에 집착하는 걸 의아해하기도 한다. 협상을 유리하기 위해서 높게 부르는 뻥카라고 생각했을 정도.

정권을 잡은 후에는 원 역사처럼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 씨족의 종가이자 고셋케의 필두인 코노에 가(近衛家)의 양자로 들어가 후지와라노 아소미노 코노에 하시바 히데요시(藤原朝臣近衛羽柴秀吉)가 되어 원래는 고셋케에게만 허락되는 관백의 자리에 오르고, 천황에게서 도요토미노 아손(豊臣朝臣) 우지노 카바네(氏姓)를 하사받아 도요토미노 아소미노 하시바 히데요시(豊臣朝臣羽柴秀吉)로 개명한다.[2]

하지만 권력에 집착하여 온갖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조선군의 보복원정으로 을미동정이 일어나 권력의 기반인 서국이 초토화된 것도 모자라 본거지인 오사카도 잃고, 고요제이 덴노에 의해 조적(朝敵: 조정의 적)으로 선포되어 주요 다이묘들도 모조리 배신하는 등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다. 을미동정의 마지막 전투인 아즈치 성 전투에서의 패배 후 마에다가 다스리는 카가 번으로 도망쳐 재기를 기도했으나 히데요시를 배신한 호소카와 부자와 구로다 부자의 함정에 빠져 임꺽정과 서림에게 붙잡혔고 종전 후 조선에 끌려가 책형으로 처형당한다.

3, 4부 시점 일본에서는 주군인 노부나가를 배신해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기껏 일본의 1인자가 되어놓고도 권력유지에 혈안이 되어 조선과의 화친을 추진하지 않고 대결구도를 유지하다 내부 분열만 키우고 조선이 보복원정을 일으킬 빌미를 제공해 일본 서부를 폐허로 만들고 류큐와 에조치에서도 손을 떼어야 했으며 쓰시마와 이키에 이어 규슈 북부까지 조선에게 넘겨주면서 일본의 영토마저 줄어들게 만들었기에 원 역사의 전국 3영걸 중 가장 평가가 낮다 못해 최악으로 욕을 먹고 있다.

여기에 노부나가가 현 쇼군 가문의 외가 쪽 조상이라서[3] 노부나가가 조선을 침공한 것도 히데요시가 옆에서 노부나가를 부추겨서 그런 거였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전해져 모든 전쟁의 책임을 덤터기 쓰게 되었다. 이 때문에 3부에서 막부가 대한에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에서 전사한 장수들의 유골 반환을 요청할 때도 히데요시의 유골 반환은 요청하지 않았다.

3. 평가

여러모로 원 역사에 비해 피해를 크게 봤다.

전근대 일본이 외침을 아예 안 당한 건 아니었다. 신라-왜 전쟁 당시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에 따르면 신라가 왜의 혼슈까지 공격한 적이 있고, 나말여초 당시 신라구가 기승을 부려 큐슈가 초토화되고 혼슈까지 해적질을 하거나 원나라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2차례 침공했다 카미카제로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여파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는 등 일본이 외침에 마냥 안전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주 피해는 규슈주고쿠 정도고, 간사이도 해안가나 좀 깔짝대는 정도였지 수도까지 외국 군대가 진입해서 수도가 불타고 천황이 파천한 사례는 원 역사 태평양 전쟁 때도 일어나지 않았다.[5][6]

여기까지는 다 봐줄 수 있어도 북규슈를 외국에 뜯겨서 수백 년간 되찾지 못하는 원인을 초래한 것에는 히데요시의 책임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욕을 안 먹을 수가 없다. 설령 4부 이후에 도쿠가와 가문이 몰락해서 다소 재평가를 받더라도 원 역사의 일제 수준만큼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가능성이 높다.

4. 기타

을미동정 당시에 히데요시를 배신한 인원을 보면 상당히 압권이다.# 도쿠가와(256만석), 우에스기(90만석), 타테(58만석), 사타케(54만석), 시마즈(50~70만?), 초소카베(22만석), 호소카와(18만석)는 확실히 적대했고, 소극적으로 배신하거나 비협조, 빠른 항복을 택한 자들도 쿠로다(18만석), 타치바나 본가(9만~10만석), 사나다 본가(4만석), 나베시마(35만석), 구키(3만5천석), 오이치(75만석), 유키 히데야스(40~90만?)에 영지는 없어도 이름값은 남아있던 천황과 무로마치 막부정이대장군이자 중국에게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았던 아시카가까지 히데요시를 손절했다. 원 역사의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도 이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 정도면 이들만 모아도 히데요시를 역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수준이다.[7]


[1] 특히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일본으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조선 수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납치한 조선인 포로들을 인간방패로 삼았다.[2] 전근대 일본에는 우지노 카바네(氏姓)와 묘지(苗字)가 구별되었고, 평민 출신이었던 히데요시는 씨성이 없었기 때문에 코노에가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노 아손 씨성을 사용했다 천황에게 토요토미노 아손 씨성을 받아 개명한 것이다. 전근대 일본에서 씨성으로 표기할 때는 서양처럼 '~의'라는 뜻을 가진 '노(の)'를 붙여야 하기 때문에 엄밀히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라고 해야 한다.[3] 원 역사와 달리 본작의 도쿠가와 막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노부나가의 딸과의 사이에서 후계자를 두었고 그 후손이 정이대장군직을 세습해서 노부나가가 모계 조상이다. 이는 본작의 도쿠가와 정이대장군의 권위가 원 역사보다 훨씬 높은 원인이 되었다.[4]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고자라고 욕하는 장면이 있다.[5] 외국 군대가 일본 본토에 쳐들어와서 본토를 짓밟은 건 폭격만 당했던 원 역사 태평양 전쟁 때도 일어나지 않았다. 몰락 작전이 일어났다면 그리 되었겠지만 그 전에 무조건 항복해서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6] 덧붙이자면 원래 조선군은 천황을 포로로 잡으려 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그 전에 고요제이 덴노를 탈출시키고 조선 정부와 협상해 히데요시 조적 칙서를 반포하는 것으로 타협한 것이다. 여기까지 갔으면 히데요시는 본편 3부 이후에서 욕 먹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욕을 먹었을 것이다. 이건 원 역사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히로히토가 당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이다.[7] 다만 이만한 결집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히데요시로 인해 외침을 초래했다는 원 역사와 차원이 다른 명분 때문이라서 원 역사에서 이만한 조합은 나올 수 없었다. 아무리 수백 년간 중앙정부가 공백이 되어 민족 의식이 동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지만 특유의 신주 세계관 때문에 외침에는 하나가 되어 맞섰고, 원나라의 일본원정 때도 그랬다. 그 이후에 보상 문제가 터져서 가마쿠라 막부가 망해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