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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24:49

구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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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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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梯宮

1. 개요2. 설명
2.1. 동명성왕 전설2.2. 건설된 시기
3. 주요 건축4. 주변 경관
4.1. 영명사4.2. 기린굴4.3. 조천석4.4. 부벽루
5. 기타

1. 개요

고구려 때부터 고려 시대까지 존재한 궁전. 뜻은 "아홉 계단의 궁전".

2. 설명

고려 군주들이 서경에 왔을 때 꼭 들르는 곳이었으며 선종, 숙종, 예종, 인종 등이 행차했다. 구제궁 근처엔 부벽루, 조천석, 기린굴, 영명사와 5층 팔각석탑이 있었다.

2.1. 동명성왕 전설

고구려의 수도이자 고려 제2수도인 서경에 위치했으며 시조 동명성왕궁궐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동명성왕이 정말 구제궁에 왔을 가능성은 극히 적은데, 당시 평양은 낙랑군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동명성왕이 여기에 궁궐을 둘 수가 없었다.

구제궁의 터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세운 아홉 사찰 중 하나인 영명사(永明寺)의 부지였다. 시간이 지나 영명사의 부지 중 일부가 구제궁의 터로 바뀐듯하다. 그래서인지 영명사와 구제궁이 근처에 있다는 서술이 자주 나온다. 구제궁 근처에 있던 영명사는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유지되었다.

고려 구제궁이 고구려 때 영명사의 일부였음을 감안하면 광개토대왕과 이후의 고구려 군주들이 한번쯤은 영명사를 방문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여러 군주들이 거쳐오다보니 동명성왕 전설이 생긴 듯 하다.

고려 왕조 후기의 문신 최자(崔滋)가 지은 부시 삼도부(三都賦)에 구제궁에 대한 전설이 나온다. 최자는 강종 대부터 관직을 시작했는데 고종 때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같이 들어 갔다. 강도(江都)에 있으면서 서도(西都)의 변생[1], 북경(北京)의 담수[2], 강도(江都)의 정의대부[3] 이 세 화자가 각자의 고향에 대해 논하는 부를 지었는데 서도(西都)의 부분은 이렇다.
(생략)

변생이 말하길 "(서도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소."

"서도가 처음 창조됐을 때는 동명(東明)이란 호를 가진 제(帝)가 구현(九玄)[4]에서 내려오시니 하토(下土)를 돌보셨다.

이 곳이 집(宅)이 되니 터를 안 정하고 쌓지 않아도 성(城)이 저절로 세워졌다.

오룡차(五龍車)를 타시고 상천(上天)하고 하천(下天)하시니 백신(百神)이 길을 열고 열선(列仙)이 뒤따르네.

(생략)

웅장하고 미려한 볼거리는 용덕궁[5]구제궁(九梯宮)이니 서로 얽히고 넓고 트였고 높고 밝고 숭고하니, 우주를 열고 닫으며 서동(西東)을 헷갈리게 한다.[6]

하늘도 그 높음을 훔칠 수 없고 귀(鬼)도 그 공(功)을 다투지 못한다.

(생략)
- 동문선 제2권 삼도부 중 발췌

2.2. 건설된 시기

구제궁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아직 모른다. 허나 전설이나 영명사의 기록을 따져 보면 고구려 때부터 구제궁 부지가 활발하게 이용됐음은 확실하다.

1117년 4월, 고려사엔 예종이 내린 제령(制)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서경구제궁(西京九梯宮)을 언급했다. 제령은 용덕궁 건설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게 보상을 서경구제궁, 상경장원정 창성(創成) 때 지급했던 보상에 맞춰서 주라는 내용이다. 이를 본다면 구제궁이 고려왕조 때 건설됐거나 보상기록이 남을 정도로 크게 증축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상경(上京 개경의 별칭) 장원정(長源亭)은 문종이 개경 개성부에 지은 정자인데 장원정과 구제궁이 묶여서 언급된 걸 보면 문종이 구제궁을 건설 혹 증축했을 수 있다. 문제는 문종 세가나 문종 대 신하들의 열전엔 구제궁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는 것.

고려사엔 1081년에 문종이 서경 동쪽, 서쪽에 각각 좌우궁궐을 지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 두 궁 중 하나가 구제궁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는데, 한참 뒤인 오연총 열전에 이 두 궁궐이 언급되는데 구제궁이라 하지 않고 여전히 서경좌우궁(西京左右宮)이라고 한 것이다. 즉 좌우궁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부족해 구제궁이 좌궁, 우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이를 보면 예종의 제령에 같이 언급됐을 뿐이지 문종이 지은게 아닐 수도 있다.

고려사에서 최초로 구제궁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때는 문종이 죽고 4년 뒤인 1087년 선종 때이다. 그럼 선종 때 지었을 수도 있지만 고려사엔 선종이 구제궁을 갔다고 했지 선종이 구제궁을 건설했단 기사는 단 한 줄도 없다.

결국 알 수 있는건 고구려 영명사 부지 혹 그 근처에 고려가 언젠가 새 궁궐을 지었거나 옛 궁궐을 증축했고, 그 보상기록이 최소 예종 대까진 전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3. 주요 건축

인종이 재위 5년(1127년) 3월에 행차한 전각. 이 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전각의 뜻은 "하늘이 흥하다."
인종이 재위 5년(1127년)에 행차한 전각. 이 곳에서 강연을 들었다. 전각은 상상 속 동물 기린에서 따왔다. 기린굴이 근처에 있어 그런 듯.
영명사의 부속 건축이었다고 한다.
구제궁엔 무정(武井)과 문정(文井)이라고 하는 두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파한집 권중에 등장하는 건물. 영명사에 있었다고 한다. 흥상인(興上人)이란 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나중에 부벽료(浮碧寮)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4. 주변 경관

4.1. 영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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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明寺
파일:평남평양 칠성문에서 본 영명사 전경.jpg
일제강점기 칠성문에서 본 영명사 전경

평양성 북성에 위치했으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지은 아홉 사찰 중 하나. 평양성과는 칠성문(七星門)을 두고 연결 돼 있으며 구제궁과 연결 돼 있었다.

영명사 부지에 후 구제궁이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구제궁 위에 영명사가 세워졌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기록엔 광개토대왕 재위 2년, 392년에 처음 세웠다고 한다. 고려의 여러 임금들이 대동강에서 배를 타고 영명사를 방문했다. 예종은 재위 4년, 1109년에 윤관여진정벌 성공을 기원하면서 문두루(文豆婁) 도량을 열었다 . 문두루는 불교 중 밀교 계통의 의식으로 신라나당전쟁을 벌일 때 문두루 도량을벌여 당 해군을 모두 침몰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시대교종 계열 사찰이었으며 득월루(得月樓), 대웅전, 법당, 오층석탑 등이 있었다. 그러다 청일전쟁으로 크게 무너지고 다시 지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았지만, 결국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평양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4.2. 기린굴

麒麟窟

구제궁 뒤쪽에 있는 동굴. 평양성 내성 동북쪽 문 장경문에 가까이 있었다. 전설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이 동굴에서 기린마(麒麟馬)를 길렀다고 한다. 이 기린굴에서 기른 을 타고 돌을 밟고 하늘로 향했다고 한다.

4.3. 조천석

朝天石

기린굴 앞에 있는 큰 돌이다. 이 돌에 동명성왕의 기린말 말굽 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제왕운기엔 동명성왕이 늘 이 돌을 밟고 하늘에 올라갔다고 한다. 삼국유사엔 이 조천석을 '도제암(都帝嵓)'이라고도 한다며 주몽성제(聖帝)상제(上帝, 해모수?)를 보러 갈 때 밟고 올라갔다고 한다.

4.4. 부벽루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부벽루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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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기타


[1] 평양의 말 잘하는 선비.[2] 북경의 이야기 잘하는 늙은이. 여기서 북경은 담수가 현 충주, 안동, 경주시를 자랑하는 것을 보아 고려의 지역인듯 한데 어딘지는 정확히 모른다. 대충 뭉뚱그려서 북경이라 한 듯.[3] 강화도의 옳고 그름을 잘 가리키는 사대부.[4] 하늘, 천계의 다른 말.[5] 고려 예종이 창건한 궁궐인데 예전부터 있던 궁궐을 예종이 확대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6] 원문이 굳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동서라고 안하고 서동이라고 해놨다. 서도 사람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