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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29호 | |
금동보살입상(1968) 金銅菩薩立像(1968)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보살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1968년 12월 19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 |
1. 개요
金銅菩薩立像.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기의 금동보살입상. 근대 이전 제작된 한국의 '소형 금동제 불상' 중 현존하는 최대 크기의 불상으로 유명하다. 금동보살입상은 1968년에 국보 제129호로 지정되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2. 내용
불상 높이 54.5cm.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소유하여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 중인 통일신라시대 금동보살입상으로, 근대 이전 한국에서 제작된 소형 금동불상 중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문화재로 유명하다.[1] 아트인포 : [삼성가 보물창고-⑦] 이건희 소유 국보 제129호 '금동보살입상'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보살상의 양식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자료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 중인 삼성家의 유물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불상 또한 명확한 제작연대 및 제작 장소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저 일종의 도굴품으로 추정되며, 어떠한 지역의 한 폐사지(廢寺址)에서 출토되었다고만 전하고 있다. 일단 삼성미술관 리움의 홍보에 따르면 민간 유물시장을 떠돌아다니다 해외로 유출될 뻔한 걸 당시 이병철 회장이 한국 문화재 보호를 위해 거금을 들여 사들였다고 주장하고 있다.뉴데일리 : 이건희 회장이 박수 받아야 할 이유 아무래도 장물 매입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인지 최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 있다.
불상 머리 부분에 둥근 구멍 하나와 그 아래로 상하에 타원형의 긴 구멍이 각 1개씩 뚫려 있으며 못 또한 1개씩 남아있어 원래는 불신 뿐만 아니라 아래 쪽의 대좌(臺座) 및 머리에 씌웠던 보관(寶冠), 광배 등이 모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 떳떳치 못한 출토 과정에서 파손되었는지 왼손 또한 팔뚝에서부터 떨어져 나갔으며, 그 외에도 군데군데 조금씩 파손되어 있는 상태다.
원래는 전체적으로 도금이 되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인해 대부분이 벗겨져 현재는 구리를 바탕으로 한 적갈색을 드러내고 있다. 보관이 없기 때문에 보발만 우뚝 드러나 있으며, 넓은 얼굴의 가늘게 뜬 두눈과 코, 작은 입에 비하여 두 귀는 길고 귓부리가 가늘다. 목에는 신라 특유의 삼도, 즉 3줄의 각선이 보이며, 넓은 가슴에는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조백 1줄이 주름을 잡고 있는 것 이외에는 나체를 드러내고 있다. 천의는 몸 양쪽을 따라 흘러내렸는데, 한 가닥은 아래위에 팔찌를 장식한 오른손으로 잡았으며, 다른 한가닥은 직각으로 꺾인 왼손에 걸쳐 있었으나 지금은 끝에서 부러져 버린 상태다.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이 불상은 원래 총 3구의 삼존불 중, 본존의 양 옆에 세워놓는 2구의 협시불(脇侍佛)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형제격인 나머지 2구의 삼존불상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고, 오직 이 불상만이 외로이 남아 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을 조성할 때 중앙의 본존불은 최대한 크고 화려하게 만들고, 양 옆의 협시불은 그보다 작고 소박하게 만든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만약 중앙 본존불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이 국보 제129호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다웠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본 불상의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단 학계에서는 719년에 제작된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대한민국 국보 제81호)이나 8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대한민국 보물 제121호)의 보살상과 거의 유사한 양식을 하고 있어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금동보살입상으로, 신라시대 금속공예술 및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에 현존하는 고중세 소형 금동불상 중 가장 큰 크기를 한 불상이라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다. 이에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3. 더 큰 크기의 금동 불상 발견?
사진 출처 : 이데일리 - "1000년전 장인과 만난듯...현존하는 최고의 중소형 보살상"
9세기 경 신라 선림원에서 제작한 것으로 확인된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은 국보 제129호보다 훨씬 화려하고 세련된 양식을 하고 있으며, 크기도 더 크고 제작 장소도 선림원으로 명확하며 무엇보다 금동보살이란 명칭답게 대부분의 황금이 온전히 남아있어 국보 제129호보다 문화재적 가치가 훨씬 더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을 처음 발견하고 보존처리한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21년 2월 8일, 이 불상을 공개한 후 바로 국가보물 이상의 문화재 지정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보존 상태나 조형성 등이 워낙 빼어난 유물이라 여러 국립박물관에서 벌써 인수 관련 문의가 오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발견 당시 가장 큰 이슈가 된 불상 크기의 경우,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은 현재 대좌가 온전히 남아있는 관계로 불상의 크기를 잴 때 대좌와 불신 높이를 모두 합친 반면 국보 제129호는 대좌 및 광배, 보관 등이 모두 소실된 상태라 단순 부처의 크기만을 비교하자면 국보 제129호가 더 크다. 만약 대좌 및 광배가 소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여전히 국보 제129호가 한국 최대 크기의 소형 금동 불상 타이틀을 지켰을 것이다.
4. 외부 링크
5. 국보 제129호
높이가 54.5㎝인 금동보살입상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보살상의 양식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보살이 서 있던 대좌(臺座)와 머리에 쓰고 있던 관(冠)이 없으며, 왼손은 팔뚝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몸에 비하여 머리가 약간 큰 편이고,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얼굴은 눈 위쪽보다 눈 아래쪽이 유난히 길어 보여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인상을 풍긴다. 넓은 가슴에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입은 천의(天衣)는 등으로 돌아 양 팔 위로 흘러 내렸는데, 오른손으로 그 가운데 한 가닥을 잡고 있다. 허리 부분에서 한번 접힌 치마는 무릎 위에 드리워지고 나머지는 길게 발목 위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치마의 주름은 U자형의 도드라진 선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세련되고 아름답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들 가운데서 흔히 이런 양식의 보살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록 재료는 다르지만 성덕왕 18년(719)에 만들어진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이나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121호)과 비슷한 유형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고 몸의 형태도 유연한 편이지만 얼굴이나 신체의 표현에서 다소 경직된 느낌을 주는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몸에 비하여 머리가 약간 큰 편이고,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얼굴은 눈 위쪽보다 눈 아래쪽이 유난히 길어 보여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인상을 풍긴다. 넓은 가슴에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입은 천의(天衣)는 등으로 돌아 양 팔 위로 흘러 내렸는데, 오른손으로 그 가운데 한 가닥을 잡고 있다. 허리 부분에서 한번 접힌 치마는 무릎 위에 드리워지고 나머지는 길게 발목 위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치마의 주름은 U자형의 도드라진 선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세련되고 아름답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들 가운데서 흔히 이런 양식의 보살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록 재료는 다르지만 성덕왕 18년(719)에 만들어진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이나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121호)과 비슷한 유형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고 몸의 형태도 유연한 편이지만 얼굴이나 신체의 표현에서 다소 경직된 느낌을 주는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 물론 어디까지나 소형 금동불상에 한해서 가장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크기는 93.5cm로 본 불상보다 2배 정도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