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8:19:37

김응용/지도자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응용

1. 통산 감독 전적2. 실업 야구3. KBO 리그
3.1.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3.1.1. 논란 1: 폭군인가? 스승님인가?
3.1.1.1. 부정적 의견3.1.1.2. 긍정적 의견
3.1.2. 논란 2: 선수단 장악 + 차도남 감독님3.1.3. 논란 3: 투수 혹사3.1.4. 총평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3.3.1. 2013 시즌 전3.3.2. 2013 시즌3.3.3. 2014 시즌3.3.4. 총평
3.3.4.1. 부정적 평가3.3.4.2. 긍정적 평가
3.3.5. 재평가?

[clearfix]

1. 통산 감독 전적

역대 감독 전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3 해태 타이거즈 94[1] 51 42 1 1위 우승
1984 100 43 54 3 5위 -
1985 110 57 52 1 3위 -
1986 108 67 37 4 2위/2위[2] 우승
1987 108 55 48 5 3위/2위 우승
1988 108 68 38 2 1위/1위 우승
1989 120 65 51 4 2위 우승[3]
1990 120 68 49 3 2위 3위[4]
1991 126 79 42 5 1위 우승
1992 126 71 54 1 2위 3위[5]
1993 126 81 42 3 1위 우승
1994 126 65 59 2 3위[6] 4위[7]
1995 126 64 58 4 4위 -[8]
1996 126 73 51 2 1위 우승
1997 126 75 50 1 1위 우승
1998[9][10] 125[11] 61 63 1 5위 -
1999 119[12] 52 64 3 4위[13]/7위[14] -
2000 128[15] 56 68 4 4위[16]/6위[17] -
통산 2122 1151 922 49 ­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1 삼성 라이온즈 133 81 52 0 1위 준우승[18][19]
2002 133 82 47 4 1위 우승[20]
2003 133 76 53 4 3위 4위[21]
2004 126 74 48 4 2위 준우승[22]
통산 532 312 204 16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13 한화 이글스 128 42 85 1 9위 -[23]
2014 128 49 77 2 9위 -[24]
통산 256 91 162 3 ­
총계 2910 1554 1288 68 ­

2. 실업 야구

1973년에 33세의 나이로 한일은행 감독에 취임해 기나긴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미 우승 청부사로 불리고 있었으며 77년에는 니카라과 인터컨티넨탈컵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을 세계대회 첫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한일은행 감독시절 김응용의 제자 중 한 명은 훗날 KBO의 총재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허구연이다. 김응용은 당시 허구연을 매우 아꼈지만, 허구연이 국가대표 때 당한 큰 부상[25]의 후유증이 영영 해결이 안 되는 것[26]에 절망하여 김응용에게 은퇴를 선언하였다고 한다. 강한 멘탈로 인해 웬만큼 큰일에도 잘 안 놀라는 성격인 김응용이 이 때는 크게 놀랐다고 하는데, 허구연을 술집으로 데려가 맥주를 사주면서 은퇴를 말렸다고 한다. 사실 허구연이 부상 후 돌아왔을 때도, 평소 말이 없던 김응용은 일부러 허구연에게는 "야 구연이 너는 다치고 나서 더 잘치는 거 같다"[27]고 칭찬하며 격려했었다고 한다. 결국 허구연의 고집으로 은퇴시켜주긴 했지만, 몇 년이라도 더 선수 생활을 이어나간 것은 김응용 감독의 공이 크다.

여담이지만 실업야구의 시스템으로 인해, 한일은행 감독 시절, 한일은행의 은행원으로 일하기도 했다.[28] 선수로 맥주팀에 있을때는 맥주 외판원도 했었으며, 상술된 허구연도 한일은행에서 김응용 감독과 똑같이 은행원일을 했었다. 당시의 한국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까지 월급을 계좌이체 하지 않고 지폐와 동전으로 주는 문화가 있었는데, 은행원들은 월급을 일부러 깨끗한 새 지폐들로 주다 못해 동전까지도 새로 발행된 걸로만 주는 체계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29]

3. KBO 리그

3.1.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파일:external/sports.donga.com/25472849.1.jpg

파일:/image/295/2011/08/12/%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1%25E8%25C0%25C0%25BF%25EB.%25B9%25DA%25B5%25BF%25C8%25F15.jpg
대만 전지훈련 때 식사하던 사진. 이 때 42세였다.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력에 팔팔할 때 나이.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2_665801_1350256353751717.jpg
만일 제도가 바뀐다면 우리는 또한 그 바뀐 제도에 따라 우승할 것이다.[30]

1981년 대한야구협회에서 추진한 야구인 해외 연수 프로그램의 첫 번째 수혜자로 선정[31]되어 임신근[32]에게 한일은행 감독직을 넘긴 뒤 미국 조지아 서던 대학교[33]로 유학을 떠나# 대학야구 팀에서 연수를 받았다.[34] 해외 연수 프로그램은 대한야구협회에서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한국프로야구의 창설 이후 무게가 프로 쪽으로 쏠리면서 대한야구협회의 처지는 어려워졌고 결국 프로그램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프로야구 출범 당시 각 팀에서 아무도 러브 콜을 하지지 않아 자존심이 상해 야구 연수를 간다는 이유로 1년동안 도미했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용히 귀국해서 개막전을 봤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중에 김응용이 KBS N SPORTS의 「한국야구 레전드」 김응용 편에 나와 그 때 코치 자리조차도 제의를 받지 못한 것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있는데, 당시 야구단 감독으로 해당 연고지 출신의 야구인들이 임명되는 분위기에서[35] 자신은 북한 평안남도 출신이라 부름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36] 1983년에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1982년 시즌 초반 해임당한 김동엽 초대 감독의 뒤를 이어 원년 시즌이 끝난 1982년 11월 3일, 해태 타이거즈의 2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취임 기자 회견에서 시즌 목표를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표야 물론 우승이지요". 당시 1983년 해태의 전력으로 보면 이는 허세로만 들렸다. 1982년보다 강화된 전력이라 해봤자 전해 부상으로 거의 개점 휴업이었던 이상윤이 회복되었다는 점과, 닛폰햄-한신 2군에 있던 재일교포 투수 주동식의 영입 정도 뿐, 그것만 가지고는 우승은 커녕 상위권조차 장담하기 힘들었다. 다만 14명으로 시즌을 치렀던 원년에도 해태 타이거즈는 팀홈런 1위를 기록하고 홈런왕/타점왕/도루왕을 모두 보유했던 팀이었다. 가능성은 있는 팀이었던 셈.

그러나 해태는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를 제치고 전기우승을 확정 짓고,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를 격파하고 창단 최초 우승을 한다. 이 때 해태가 못 했다는 건 아니지만, 보너스 문제로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던 MBC가 자멸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 이후 2000년까지 무려 18년간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을 지내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을 이끌었다.

3.1.1. 논란 1: 폭군인가? 스승님인가?

3.1.1.1. 부정적 의견
군대와 비견되던 예전 해태의 강압적인 이미지를 만든 데에 일조했으며 그 정점에 있었던 감독 김응용은 해태의 독재자이자 폭군이라는 지독한 별명까지 얻었다.

어느 감독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중용하고 싫어하는 선수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김응용의 경우는 어떤 선수라도 경기에서 실책을 저지르거나 본헤드 플레이를 보이면 그 자리에서 얼차려를 시키거나 발로 걷어차는 등 프로팀이라기 보단 군대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한창 잘 하는 선수라도 한 번 눈밖에 나면 무조건 썩혀두거나 트레이드해버리곤 했다.[37] 즉, 실력도 있고 그 실력이 꾸준히 유지되는 선수만 칼같이 우대한 것. 1993년 지상파 방송 중계 도중 올스타전에서 팀의 주축선수를 발로 걷어차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을 탄 적도 있다. 해당 선수는 도저히 감독님 밑에서 못뛰겠다면서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이듬해 바로 LG로 이적하여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게 되는데 그 선수가 바로 한대화.[38] 2012년 KBS N SPORTS에서 기획한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한대화 편에서 김응용은 '그 올스타전이 애들 장난인데 내가 뭐하려 걔한테 그랬겠느냐' 그러면서 둘러대는데 실제 영상보면 제대로 엉덩이에 조인트.#[39][40]

김응용의 폭력은 아주 유명했는데, 해태 투수인 방수원은 강판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덕아웃으로 끌려와서 주먹으로 맞은 경우도 있었다.[41] 이것이 TV에 찍혀 나와 한동안 구설수가 되었다. 그리고 김응용 밑에서 이를 배운 김성한이 후에 이를 따라한 김지영 포수 구타 사건을 일으키다가 결국 논란을 빚고 스스로의 지도자 생활까지 끝내버렸다.[42] 박충식의 증언에 의하면 해태 타이거즈에서는 자신이 트레이드 된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구타문화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2군에서는 제대로 못한 선수를 코치가 따귀를 때리는 게 다반사였다고.[43]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도 이 선수에게 경기 중에 엎드려 뻗쳐를 시키는 게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당연히 요즘 시대에 이런 식으로 선수들을 다뤘다간 스포츠 기사가 아닌 사회 기사에 이름이 실리기 딱 좋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묵인되었지만, 조금씩 구타 문제를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적어도 다루는 척이라도 한다는) 점을 보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3.1.1.2. 긍정적 의견
폭력 문제는 분명한 잘못이다. 하지만, 2000년대까지도 만연하던 스포츠 폭력 문제를 김응용만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폭력은 어느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순 없지만, 당시엔 선배에게 매일같이 맞아서 운동을 관두는 경우도 많았고, 오히려 이러한 구타 문화를 끊어준 사람이 두고두고 추앙 받을 정도로 폭력 문제가 만연했다. 더불어 해태 선수들은 그중에서도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유약한 성격으로는 선수단 통제가 어려워 제대로 이끌 수가 없다는 점에서 이런 폭력을 곁들인 카리스마는 어쨌든 해태 왕조를 여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게을리하는 것 같으면 아무 말 없이 야구방망이로 땅을 툭툭 두들겼다던데, 그 무시무시한 침묵의 카리스마에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안 하면 못 배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 김응용의 철권통치에는 확고한 실력지상주의 원칙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김응용 감독은 정말 실력이 있는 선수라면 술을 마시든 무엇을 하든 간에 자기 앞가림만 제대로 한다면 간섭은 커녕 적당히 못본체 해주었다. 모든 것은 자율, 네 목숨도 자율이었던 셈. 선동열이나 한대화, 임창용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선동열은 훈련에 늦지만 않는다면 밤새 술을 마셔도 간섭하지 않았고[44] OB 베어스에서 뛰던 한대화해태 타이거즈 이적 얘기가 나오자 기겁하고 차라리 은퇴하겠다는 말까지 꺼냈지만, 정작 해태 타이거즈로 온 한대화에게 김응용 감독은 도리어 "너는 푹 자고 오후에 출근하라"며 지시하기도 했다. 간염 환자인 한대화가 충분한 휴식으로 몸을 추스리도록 한 배려였다. OB 베어스 시절과 훗날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의 한대화김성근과 겪었던 불화와 대조되는 부분.[45]

반면 그저 그런 선수가 일탈을 저지른다면 그야말로 헬 오브 지옥을 맛보여줬다. 현재 야구계에서 종사하는 사람 중에서 이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으로 대표적인 게 양승호 전 롯데 감독. 이 양반이 해태 시절 일화가 좀 쩌는데 매번 일찍 나와서 광주 야구장 한 켠 시원한 바람부는 명당(?)에서 낮잠 자다가 김응용 감독한테 걸려서 혼나고 술 마시는것도 항상 이 양반이 중점적으로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46] 이병훈 해설. 이 때문인지 이병훈 해설은 김응용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자 사사구에서 굉장히 부정적인 의견을 날렸다. 근데 이 뒤로 이병훈은 해태를 떠나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1997 시즌 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시즌 아웃되는 병크를 치고 은퇴를 했다.[47] 이 병크가 삼성에겐 시즌 초 악영향을 주었는데 고대로 꼴찌로 꼴아박고 말았다. 그러다가 504 대첩 3연전 기점으로 치고 올라가게 된다.

이처럼 어디까지나 실력에 따라 당근과 채찍을 가했으므로 별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지도자들이 학연, 지연이나 연공서열에 따라 선수를 기용한다는 점에서 김응용의 실력지상주의는 지금까지도 야구계에 많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김응용은 은퇴 후 인터뷰에서 '난 이북 출신에 부산상고에서 야구를 배웠고, 타이거즈 감독을 오래 했으니 전라도 사람이고, 삼성에서 우승했으니 대구 사람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성적이 좋았건 어쨌건 폭력 자체는 정당화될 수 없고 정당화되어서도 안 되기에 이런 점을 근거로 김응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폭력 문제를 현재의 잣대를 대서 과거 김응용의 감독으로의 리더십과 그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상기했듯 당시는 군대식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던 사회였고, 인권에 대한 이해와 성숙이 부족했던 동시에 수직적 문화가 어찌됐건 성장의 발판으로 잘 먹혀들어가던 시대였다. 당연히 체벌이나 폭력 등은 가해자나 피해자나 제 3자나 수직적 위계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다들 묵인하는 내지는 장려하는 추세였다.[48] 김응용은 20세기 한국 프로야구 태동기라는 당시의 환경 속에서 성적을 내는 데에 최적의 방법을 택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성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가혹행위일지라도 인권 개념이 막 뿌리를 잡을 자리를 찾던 당시로서는 성과를 내는 데에 특효였던 보편적인 도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수들에게 항상 폭력만 휘두른 게 아니라, 필요할 때는 몸소 보살펴주기도 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과 앞가림만 잘 하면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았으므로 무작정 주먹질만 한 감독이라고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한화 감독 시절 2년간 한번도 폭력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선 김응용 본인은 폭력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당시에는 폭력을 하나의 팀 워크를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던 지장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3.1.2. 논란 2: 선수단 장악 + 차도남 감독님

한화에서 70대 노장을 삼고초려한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김응용은 기본적으로 선수단에 파벌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여 파벌을 만드는 선수들을 족족 트레이드시키고, 선수단의 단합을 해칠까봐 특정 선수에 대한 공개적인 총애마저 삼가는 등 이런 면에서는 굉장히 철저하다.[49]

전 해태 투수였던 이상윤과 관련된 일화에서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술친구였던 한국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 김기수 씨가 투수 이상윤의 장인이 되자, 이후 김기수 씨와 만나는 걸 삼갈 정도. 참고로 김기수 씨는 호남 지역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김응용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했을때 광주에서 유일한 지인이었다. 당시 광주에서 김응용 감독의 유일한 낙이 경기가 없을 때 김기수 씨 만나서 술 한잔 하는 거였다고 한다.

심지어 선수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도 극히 피했다고 한다. 해태에 몸 담았던 어떤 선수는 트레이드로 다른 팀으로 갈 때 작별 인사를 한 게 김응용 감독과 가진 유일한 일대일 면담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해태 신화가 설립되기 전 해태가 두 번째 우승을 한 1986년의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저라고 왜 선수들과 술 한잔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그런 술자리를 꼭 그라운드까지 연장시키려고 하니(그런 자리를 피합니다.)". 김성근 감독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수와 감독이 농담을 할 정도라면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이미 그 팀은 끝장난 거라고 했다. 물론 김인식이나 류중일같이 인화력으로 선수단을 이끌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감독들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선수들의 프로 의식이 어느 정도 발전한 만큼 감독 스타일의 대세도 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이순철 숙청사건이다. 이순철은 해태의 주장이었으며, 90년대 초중반 해태 선수단은 이순철이 통솔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순철보다 더 빠른 발과 장타력을 겸비한 이종범이 1993년 입단과 함께 이순철의 1번 타자 자리를 가져갔고 거기에 1994년을 기점으로 이순철의 실력이 내리막을 타자 그의 이용 가치도 사라져버렸다. 이순철의 특권은 조금씩 박탈되었고, 오랜 시간 해태의 리더였던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을 거치며 김창희가 대두하자 바로 단칼에 해태에서 방출되었다. 다만 이순철은 실력 자체가 내리막을 탔던 점도 이러한 현상을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또 김일권 숙청의 후속편이었다. 원년 멤버이자 도루왕이었던 김일권 역시 풍운아로 유명했으며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 등 일화가 많은 선수였는데, 일단 실력이 되었기 때문에 넘어가다가 나이가 들고 대안이 될 선수가 등장하면서 칼을 뽑고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 해버렸다. 그 대안이 되었던 신인 선수가 바로 이순철이라는 것.[50] 이렇게 지속적인 물갈이를 통해 김응용 감독은 세대 교체와 선수단 내 파벌 축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3.1.3. 논란 3: 투수 혹사

김응용 감독은 당시의 여느 감독처럼 투수를 혹사하는 감독이었다. 1986년 선동열이 39경기에 올라 1시즌 262이닝을 던지기도 하고,[51], 1991년에는 이강철선동열이 동시에 200이닝을 넘기면서 원투펀치로 굴려졌다. 당시 여느 에이스 투수들 처럼 세이브 기록까지 붙어있는 건 덤. 특히 이강철은 한국시리즈까지 더하면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4년 동안이나 200이닝을 넘기는 혹사를 당했다. 1992년에 선동열이 건초염으로 시즌 아웃되고, 복귀 후 마무리로 뛰면서 전보단 나아졌으나 6회부터 올라와서 세이브를 쌓는 중무리 투수로 굴려졌다.

임창용은 1996~1998년 내내 셋업과 마무리로 뛰었음에도 3년 연속으로 100이닝을 넘기기도 했으며,[52] 1999년에 입단한 대졸 신인 유동훈이 155이닝이나 던지기도 했고, 2000년에는 오봉옥이대진을 마구 굴렸다. 특히 이대진은 재활이 다 안 끝난 선수를 무리하게 당겨쓰는 바람에 20대 후반에 선수 생활이 아예 끝나버릴 뻔했고 과거의 폼을 되찾지 못하였다.

삼성으로 넘어간 후에도 감독 임기 내내 믿을만한 셋업맨인 김현욱을 마구잡이로 굴렸다가 2005년에 은퇴로 밀고갔고, 2002년 노장진라형진의 혹사, 2004년 권오준의 혹사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한화로 간 이후에도 2013년 송창식과 2014년 안영명 등 혹사 당한 투수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붙은 멸칭이 킬끼리.

다만 해태 시절의 투수 운용은 당시 시대 자체가 그랬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원년을 보면 박철순이 한국시리즈 포함 240이닝을 던졌고, 황규봉은 시즌 내내 222이닝[53], 롯데의 노상수는 232이닝을 던지면서 특정한 투수에 의존하는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보면 모든 팀은 각자 가지고 있는 에이스 투수들을 마구 굴렸는데, 삼성은 김일융 - 김시진 투톱, 롯데는 최동원 - 윤학길, 빙그레는 이상군 - 한희민 식의 운용이었다. 괜히 초기 시대 선수들이 일찌감치 은퇴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김응용 감독이 10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리던(감독 20년차) 2002년을 보면, 투수 혹사 문제는 이전 시대보다 강도가 약해졌어도 여전히 이뤄지고 있었다.[54] 투수 분업화 같은 문제는 점점 자리를 잡아가다 2010년대에 완전히 자리가 잡히게 된다.

3.1.4. 총평

김응용은 현대 야구 이론과 자율 야구의 초기 도입과 더불어 특유의 선수단 장악 능력과 사람을 다루는 능력, 안목으로 15년간 9번의 우승이라는 해태 왕조를 일궈내고, 프로 데뷔 첫 해 우승과 한 팀에 18년간 감독으로 임하기도 했으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 올림픽 동메달 및 대한민국 야구 국제 대회 첫 우승의 성과를 일궈낸 한국 야구의 대표적인 명장이다. 개성이 강한 팀을 말 그대로 장악해 버리며 팀을 이끌었고, 선수들과 사적인 소통을 피하며 공정성을 보이려 했다. 더불어 당시의 리그 기조와 정반대로 과도한 훈련을 지양했고, 시대에 앞서 연투 조절을 하기도 하였다.[55] 무엇보다 결과적인 의미로 9번의 우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할 땐 엄하지만 2군 선수들에게 사비를 털어서 월세방을 구해주는 등[56] 적절한 당근을 써먹어가며 딱 불만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선수단을 통제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깨끗한 사생활 관리나 적절한 쇼맨쉽, 무엇보다도 넘사벽급의 뛰어난 성적은 주변의 비난들을 잠재우기엔 충분했다. 또한 공정함을 보장하기 위하여 양아들 야구를 하기보다는 선수들과 적절히 거리를 두었고[57], 이들이 보이지 않는 선에서 지원을 해주는 편이었다. 또한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인원이 있으면 이전까지의 성과와 상관없이 쳐내는 강경한 면모도 보여주었다.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파일:external/4581681ff216066ffcd99c9052a0e4d5e4c9528c44bed0a18a94399fb650bdc1.jpg
2000년 10월 30일 삼성 감독 취임식에서.

파일:/image/295/2011/08/16/%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1%25E8%25C0%25C0%25BF%25EB14.jpg

언제나 우승 후보였고, 정규 시즌에서의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꼭 한국시리즈에서 발목을 잡혀 무관의 제왕이라는 결코 좋지 않은 별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삼성 라이온즈는, 우승에 대한 염원으로 2000년 시즌을 마치고 김응용을 당대 감독 최고 대우인 5년 13억이란 역대급 대우로 모시다시피해서 데려오게 된다. 여기에는 IMF 사태로 인해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해태가 부도난 것과 해태 구단 수뇌부와 김응용 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도 김응용의 삼성 라이온즈행에 한몫했다.

V9 이후 이종범마저 팔리자 빡친 김응용 감독은 아예 팀에 손을 떼다시피 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1999년 무렵 해태 쪽에서 먼저 김응용 감독의 삼성행을 제의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팔려 나간 뒤에 해태와 삼성 프런트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나 김응용 감독만 승낙하면 곧바로 삼성행이 보장된 상태였으나 선수까지 팔다, 이젠 감독까지 다른 팀에 팔아 버리냐는 무등 아재들의 분노와 자신에게 프로 감독을 맡겨준 박건배 해태 구단주와의 의리로 어쩔 수 없이 1년 더 맡았던 것이었다.[58] 해태 말년에 괜히 손을 뗀게 아니다.[59]

라이벌 팀의 수장 김응용의 삼성행은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당시 적지 않은 삼성 팬들이 '삼성을 가장 많이 무릎 꿇렸던 주적 김응용을 데리고 오는 걸 보니 팀에 정나미가 떨어진다'며[60] 삼성 팬을 관두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해태 출신인 유남호, 김종모, 신용균 등이 상당수 코치진에 포진되어 있었기에 당시만 하더라도 김응용 감독에게 불만을 품은 팬들이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삼성을 비꼬던 말인 해삼 라이거라는 이름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김응용이 오기 전에 삼성 라이온즈이만수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에게 홀대한 데 비해, 김응용은 쫓겨나다시피하며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여 그와 잠시 함께했던 양준혁을 2002년에 다시 삼성으로 데리고 왔고[61], 팀의 숙원이었던 KBO 한국시리즈의 한을 풀어 주었으며, 감독 은퇴 후에도 구단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지역 유소년 및 아마 야구계를 위해 활동하고,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2002년 우승 이후로는 김응용 감독에 대한 팬들의 불만이나 비난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특히나 기존시스템을 다 때려부수고 자기만의 확고한 야구철학으로 팀을 인솔하는 방식으로 인해 삼성 프론트 및 선수단과 갈등을 빚고 해임된 김성근감독과는 달리 유연한 자세로 삼성의 팀 컬러와 전통을 인정하면서[62] 자신의 야구 철학을 접목 시킨 것으로 인해서 그 후로도 크게 비판을 받은 일도 없으며 오히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좋은 평가를 들었다.

2001년 부임 첫 해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의 인식을 크게 바꾸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이승엽 오렌지 사건이다. 2001년 스프링캠프 당시 이승엽이 하루 연습을 마치고 오렌지를 까먹다가 오렌지 칼에 손바닥 자상을 입고 다음날 연습에서 휴식하게 됐다. 이런 황당한 부상 사건이 생기자 노발대발한 김응용은 즉시 선수단을 소집했는데, 오렌지를 들고 와서는 선수단 앞에서 오렌지를 그 큰 손으로 거칠게 까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가면서 선수단에게 "오렌지는 이렇게 까먹는 거야. 알았어?!!!!". 이후 선수단 분위기는 안 봐도 비디오. 도련님 야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던 삼성 선수단의 의식 변화에 계기가 된 일이라 한다.[63]

또한 삼성 수뇌부들에 인식도 크게 바꿨는데, 당시 구단주 대행인 현명관 삼성물산 회장이 삼성의 문제가 뭐냐고 물어보니 구단에 돈이 너무 많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돈 많이 주는데 열심히 하는 선수가 있겠습니까?[64][65][66] 라고 말하고 삼성그룹 임원들이 선수들에 대한 간섭이 심하다. 라는 말을 현명관 사장에게 직접 말한다. 현명관 역시도 비서실장을 하다가 야구팀에 처음 내려온 몸이라 일단 김응용이 하는 말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김응용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다만, 이 해에 정규시즌 우승으로 2001년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3위였던 두산 베어스에게 패함과 동시에 본인의 한국시리즈 전승 기록이 깨져버리고[67] 감독 인생 첫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김응용이라도 삼성의 한국시리즈 저주는 풀 수 없다는 말이 나왔으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성근LG 트윈스에게 백투백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를 거두며 삼성 라이온즈의 숙원이었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2002년 한국시리즈 참조. 이로 인해 김응용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달성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파일:external/file2.cbs.co.kr/11141303000_60400020.jpg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시상식때. 이 수상 소감 자리에서 LG 트윈스김성근 감독 최고의 별명 야신이 만들어졌다. 당시 모든 면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전력이 비교가 안되던 LG 트윈스가 계속 삼성을 물고 늘어지자 김응용은 우승후에도 "김성근 감독이 잘했어요, 신과 싸우는듯 했다."라고 밝힌 소감에서 비롯된 말. 근데 그 말뜻에는 "나는 신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이건 본인도 인정했다. 상대도 부족한 전력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 상대를 추켜 주면서도 티 안나게 내 자랑을 하는 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신이라고 해주자. 생각했다고. 김성근 감독도 이 말을 듣고는 대번에 진의를 파악하고 피식 웃으며 "그럼 날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느냐"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후 2003년에도 시즌초부터 17년간 감독으로 이끌었던 친정팀 KIA 타이거즈와 함께 우승 후보로 지목받았고, 전년도에 성공했던 공격 야구를 앞세워 시즌 중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펼치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는 듯 싶었으나, 후반기부터 팀 성적이 쳐지기 시작하며 결국 시즌을 3위로 마감,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나 전년도 삼성에서 배터리코치로 활동했던 조범현이 이끄는 SK 와이번스에게 2연패를 당하며 패배했다.

마해영과 이승엽이 떠난 2004년에는 해태 시절 제자였던 선동열을 수석코치로 데려와서 투수 전권을 주어 후계자로 점찍었다. 그렇게 정규 시즌 2위를 하면서 플레이오프도 가볍게 치렀다. 허나, 김재박의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 패배[68]를 끝으로 감독직을 당시 수석코치였던 선동열에게 물려주고 길고 길었던 감독 생활을 마감했다.

삼성 특유의 훌륭한 시스템과 자율 야구가 합쳐져 안정적으로 팀이 운용되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여 김응용은 현재 삼성 팬덤에게서 명장으로 추앙받는 것과 달리 생각보다는 성적이 좋지 않다. 물론 그가 해태 시절 워낙에 우승을 많이 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만큼 기대감이 높은데다 삼성 역시 강팀이었기에 4년 동안 4위 아래의 순위를 기록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그리고 우승하지 못한 해에는 과정도 그닥 좋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즉 복기해 보면 이 때부터 시대와 슬슬 어긋나고 있었다.

삼성 감독 부임 첫 해였던 2001년에는 누가 봐도 앞서는 전력에[69] 한국시리즈 직행이라는 유리함까지 갖췄음에도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까지 거친 김인식 감독에게 일방적으로 당했고,[70] 2002년에는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고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이뤄냈으나 시즌 막판까지 2위 팀 KIA와 치열한 선두 경쟁 끝에 겨우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시리즈에서도 역시 작년 두산과 똑같은 조건의 LG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갈 뻔했다.[71] 2003년에는 시즌 초 10연승을 달리는 등 전반기만 해도 1~2위 자리를 다투다가 7월 즈음때부터 슬슬 미끄러지기 시작해 3위로 추락,[72]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고,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신생팀이나 다름없었던 SK를 상대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2연패로 스윕당했다.[73] SK가 플레이오프에서 KIA마저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보니 최종 순위마저 4위로 떨어진건 덤. 삼성 감독 마지막 해였던 2004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몇 년째 모 기업 지원이 끊긴 현대에게 9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무너졌고 결국 준우승에 그쳤다. 시즌 중 9연패를 찍은 것도 이 시기의 일. 여름에 강해지는 삼성의 종특 때문에 후반에 치고 올라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렇다한들 류중일을 제외한 21세기의 다른 삼성 라이온즈 감독들보다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평가가 좋고 삼성 특유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야구를 한데다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겨주었기에 여전히 삼성 팬들에게도 큰 지지를 얻고 있다.[74]

여담으로 2004년 삼성 호지스의 빈볼에 빡쳤던 SK 브리또가 삼성 덕아웃을 습격했을 당시 SK 카브레라를 헤드락으로 제압하였다. 훗날 김승우의 승승장구양준혁, 이종범과 출연했을 당시 카브레라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서 헤드락을 풀어줬다고 한다. 박명환야구TV에서 오상민이 밝힌 일화로 오상민이 SK전에 등판하여 역전패로 져서 속상한 나머지 씻지도 않고 밥도 안 먹고 구단 버스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오상민을 발견한 김응용이 매니저를 불러 "쟤 밥 먹이고 씻겨."라고 지시했던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고 한다.

삼성 라이온즈 사장을 끝으로 은퇴하여 이 항목이 더 이상 늘어날 일이 없어 보였으나....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파일:한화 김응용.jpg

2012년 10월 8일, 한화 이글스차기 감독으로 확정되었음이 알려졌다. 임기 2년에 계약금, 연봉 각 3억원으로 총 9억원에 계약을 맺었다. 당연히 한화 이글스 갤러리를 포함한 모든 야구 관련 갤러리들은 대폭발했다. 거기다가 3월에 KIA에서 은퇴한 이종범이 주루코치로 합류하고, 김성한은 수석코치로, 또 다른 감독 후보군이었던 이정훈까지 2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박찬호김태균을 맞이하게 된 작년 못지않게 뜨거운 비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1군과 2군 모두 한 성질 한다는 지도자들로 채워졌으니 이제 농땡이 피우던 선수들의 도망갈 길이 전부 막혔다는 평이었다.

이때 김승연 회장은 배임-횡령사건으로 2012년 8월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김응용 감독 선임시 옥중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화 프런트는 후임 감독으로 김재박을 선임했으나, 옥중에 계신 회장님의 최종 결재 단계에서 반려되었고, 김승연 회장의 장남이 부친의 의중에 따라 김응용 감독측과 접촉하여 영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2022년 2월 양준혁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응용이 현장을 떠나있어 무료해하고 복귀할 의향이 있어보이기에 한화 측에다가 김응용이 지도자 복귀를 원하고 있음을 알려서 한화 측에서 기존에 내정된 인물 대신 김응용과 협상하여 영입했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은 그 때 양준혁에게 선수 겸 수석코치를 제의했으나, 하는 일이 많아서 고사했다고 한다.

취임사는 못하면 죽는다.

3.3.1. 2013 시즌 전

시즌 전부터 논란을 만들면서 건재함을 과시하셨다.
3.3.1.1. 류현진 논란
2012년 10월 24일 류현진의 메이저 리그 진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논란을 불렀다. 이 의사 표명은 며칠 전 류현진이 했던 인터뷰에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

사실 소속 선수의 팀 잔류를 원한다는 의사 표명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다. 팀에서 에이스급 투수가 나가는데 좋아할 감독이 누가 있는가? 문제는 야인 시절에는 한시라도 빨리 가야 된다던 사람이 감독이 되고 나서 말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한입으로 두말한다고 욕먹는 것을 일단 피할 수 없고, 기사 내용 중에 류현진을 깎아내리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 특히 정치인들이 주로 쓰는 단어인 해당행위(害黨行爲)라는 매우 부적절한 단어 선택과 20승 투수 언급이 반감을 크게 모았고, 게다가 류현진과 김응용이라는 두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75] 한화 팬들의 여론은 매우 안 좋아진 상태다. 게다가 한화 팬이 아니지만 류현진을 응원하는 야구팬들도 꽤 많고 이들은 당연히 류현진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을 가진 만큼 이미지에 꽤 큰 타격을 받을 듯 하다.

근데 원래 김응용은 직설적이고 거친 입으로 예전부터 유명했다. 일단 올해(2012년)까지 류현진 문제는 계속 경신될 것으로 보이며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끝낼지가 주목되었다. 그리고 당시 한화 이글스의 상황을 나타낸 짤이다.

일단 10월 29일 류현진의 포스팅 추진이 결정되었고, 김응용은 '아쉽지만 가서 잘 활약하길 바란다'며 입장을 내보였다. 해당 행위니 9승 투수라 가치가 없다니 하면서 류현진을 까내리면서까지 붙잡겠단 지난 기사하고는 정반대의 입장인 셈. 게다가 9승밖에 못한 투수 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상했을 것 같은 류현진도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이번 포스팅으로 성공을 못하면 국가와 팀에 기여하고 다시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뒤끝 없는 인터뷰로 화답했다. 그래서인지 김응용이 일부러 여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어그로를 유발했다는 견해도 있다.[76] 어쨌든 류현진이 메이저 리그에 가는 건 성사되었다. 참고로 김응용이 해태 시절 하던 주특기 중 하나가 일부러 심판에게 어그로를 끌어서 본인은 퇴장된 뒤 그 사이에 교체투수에게 몸 풀기를 시키는 일이었다. 기사를 읽어보고 판단은 알아서 하도록 하자.

다만 적어도 한화 감독을 맡기 전에는 류현진의 해외 진출을 분명 지지했지만, 2013년 시즌 들어서 성적이 부진하자 "류현진이 남아있을 줄 알고 류현진만 보고 왔는데 훌쩍 떠났다", "딱 1년만 남기를 원했다"라는 발언들을 하면서 한화 감독을 맡은 후에는 류현진의 해외 진출을 진심으로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감독 입장에선 팀의 에이스가 빠져나갔으니 더더욱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허나 2015년 기사에 따르면 한화 감독직을 수락할 때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단에서 그 전에 이미 류현진의 해외 진출을 결정했다고 한다. 결국 김응용은 류현진의 메이저 리그 진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독박을 일부러 쓴 셈.#
3.3.1.2. 김주찬 논란
FA 우선협상기간 마지막날인 11월 16일 "김주찬은 50억 가치가 있는 선수"란 인터뷰를 했다. 타 팀의 FA와 접촉이 금지되는 우선협상 기간중에 협상 카드를 제시한 편법이라는 의견을 가진 야구팬들과 이택근의 50억 원 계약 이후 FA선수들에게 너무 거품이 낀게 아니냐는 불만을 가지고 김주찬의 협상을 지켜보던 야구팬들 양쪽에게 폭풍같은 까임을 받았는데, KIA 타이거즈가 김주찬에게 진짜 50억 원을 줘버렸다.

졸지에 롯데는 타선 누수가 심각해졌고, KIA는 2013년 FA(이용규, 윤석민)가 있는데 50억 원이란 엄청난 거금을 써서, 자금 운용에 지장이 생길테고, 뜬금없이 중견수는 강동우가 나이도 많은데 가장 잘치는 거 같다며, 강동우를 기용할 것을 내비쳤다. '애초에 김주찬을 영입할 생각이 있긴 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77]

그러나 2013 시즌 돌입하고 김주찬은 50억 가치를 하는 듯했다. 후에 김응용은 인터뷰에서 김주찬을 영입하고 싶었다는 언급을 하였지만 궁색한 변명처럼 여겨졌으나 2016년 김주찬의 활약을 보면 역시 갓끼리 감독이란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방탄 유리로 돌아온 김주찬은 공수주에서 대활약하며 기아타이거즈의 타선을 이끌고 있다. 게다가 김주찬은 FA 마지막 해인 2017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기아 타이거즈의 11번째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므로써 김응용이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선수 보는 눈 만큼은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른 부분들은 김주찬 문서 참조.
3.3.1.3. 트레이드 논란
장성호를 롯데와 트레이드 하면서 받아온 선수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라 한화팬들의 멘탈을 붕괴시키는 중. 물론, 장성호가 한화에서 좀 성적이 안 좋아서[78] 팀 정리 겸 트레이드를 시킬수야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장성호 정도급의 선수를 내주면서 받아온 선수라는게 꼴랑 3라운드픽 신인 1명이었다. 그렇다고 송창현이 아마에서 성적이 좋았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개밥신보다 더 기대가 안 될 정도라 한화팬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송창현이 2013년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고 후반기에는 실질적인 한화 에이스 역할을 하면서 이 트레이드는 운영은 개판일지언정 선수 보는 눈은 죽지 않은 김응용 감독의 한 수로 평가받고 있다.[79]

3.3.2. 2013 시즌

한화 팬들은 과거 명장이었으나 오랜만에 복귀 이후 커리어 다 까먹는 흑역사 감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우려했지만, 그래도 V10을 이룩한 명장이기에 시즌 전까지만 해도 기대가 컸다. 김응용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하여 프로근성이 없는 선수들의 마인드를 재무장시키고 선수를 재발굴해내어 착실한 리빌딩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개막 후 13연패로 한국프로야구 개막 최다연패 기록인 2003 롯데의 12연패를 깨면서 야구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한화 이글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침체되어 왔던 팀이지만 작년의 나쁜 성적보다도 더 밑으로 내려간 초반 성적을 냈기에 옹호여론이 거의 사라지는 추세, 거기에 작년 후반기 한용덕 감독대행의 팀 성적과 비교되고 비판받는 상황. 사실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고 팀을 4강으로 이끌겠다고 했지만 침체된 팀 상황을 구할 마땅한 대안을 남기지 못했다. 심지어 13연패째를 기록한 LG와의 삼연전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투수 선발투수 기용과 교체로 빈축을 샀다.

그래도 첫 13연패 기간 동안은 나름의 옹호가 있었다. 한화는 작년에도 꼴지였고 팀의 주축이던 류현진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떠난 이상 전력이 약화된 것이 자명하니 아무리 훌륭한 감독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 문제는 13연패를 끊어낸 이후에 김태균의 활약으로 3연승을 거두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가도 상황이 좋아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투수 운용으로 선발로 나왔던 투수가 다음날 불펜으로 나오고 전날 불펜으로 출격했던 투수가 다음날 선발로 나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쌍팔년도 야구가 계속되고 있다. 연패 막바지부터 시작된 이러한 투수 운용에 비판에 목소리가 나왔으나 김응용 본인이 연패만 끊고 나서 정상적인 운용으로 돌리겠다고 발언했기에 일단은 지켜보는 분위기. 하지만 연패가 끊기고도 운영이 정상화 되기는 커녕 더 심각해져서 유창식의 경우 4월 26일부터 5월 3일까지 8일간 선발 1회, 구원 4회로 무려 5회를 등판했고 그 다음날인 5월 4일은 선발로 등판할 예정이다. 또한 송창식의 경우 혹사를 당하고 있는 와중에 6점차 리드상황에 등판하는 등. 상식이 있는 야구팬이라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투수운용과 혹사를 반복하고 있다. 거기다 야수진도 김태균, 최진행, 이대수 등을 빼면 노답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승택이나 하주석 같은 신진급 선수들도 성장세가 더딘 편이다.

시즌 초반에는 대체로 '아무리 명장이라지만 이미 10년 전에 한 번 감독을 은퇴했던 사람이고 그 때문에 현대 야구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과 현재의 한화 이글스는 몇 년간 체계적으로 리빌딩을 했어야 했다는 점에서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5월로 접어든 현재는 그딴 거 필요없고 폭발 직전. 한화팬이 상주한 커뮤니티는 분노와 자학, 쌍욕으로 도배가 되고 있고 야구계의 큰 어른이라 쉬쉬하던 언론도 슬금슬금 비판 기사를 내놓고 있다.

그래도 후반기에는 모든 걸 다 해봐도 안되는 현실을 깨달았는지 리빌딩으로 방향을 선회하며 나아졌다. 과연 리빌딩의 초석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두고 봐야 알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김응용/2013년 문서 참조.

3.3.3. 2014 시즌

시즌 전 두 명의 국가대표 선수 정근우이용규를 FA 영입했지만, 정근우만이 고군분투했을 뿐 이용규는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명타자로만 출전하였다. 불펜 운영은 작년 송창식이 3명으로 늘어난 수준. 안영명, 박정진, 윤규진이 노예 역할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 해에 한화 2군에서 젊은 투수인 이태양을 2군에서 발굴했다. 김응용 감독은 사비로 2군 선수들을 챙기려 했었고 그 중에 눈에 든 것이 이태양이었다.[80] 그러고 2013년 고군분투했던 이대수를 내주고 조인성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타선 강화도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81], 그게 다였다. 반은 맞고 반은 좀 기사가 다르게 나와서 제자들이던 이종범양준혁이 팬들에게 SNS로 호통을 쳤다.

김응용/2014년 문서로.

3.3.4. 총평

2012년 당시 김응용이 한화 감독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상황과 언론 보도를 통해 추정해볼때, 김응용이 한화 감독에 부임한 것은 매우 즉흥적인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성근을 영입하려 했으나 한화 프런트가 통수를 쳐서 물거품이 되었고,[82] 이후 김재박이 되나 싶었으나, 급하게 회장님 지시로 김응용을 영입한 것이었다.

그 당시 김응용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직에서 물러났는데 이후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아직도 감독으로 현장에서 뛰고 싶다" 라는 의사를 밝혔던 상태. 설마하니 TV 프로 한번 보고 감독시켜 줄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만 어쨌든 김응용의 현직 복귀 의사를 접한 구단주가 "이왕이면 최고인 김응용에게 맡기자!"라고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부임 초창기부터 김응용과 한화 이글스의 궁합이 잘 맞을 것이라 본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꼴지 전력인데 류현진박찬호의 거취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우승 청부사를 영입한다는 건 예상할 수 없는 선택이기에 물론 검증된 감독인 만큼 아예 막장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기간 김응용 본인이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건 당연히 아니다.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무성의하게 일을 하는 감독이면 그냥 무능한 감독 정도가 아니라 당장 퇴출시켜야 할 위험 인물로 찍히며 타 팀 팬들에게 비웃음이 섞인 종신감독 소리를 듣지도 않는다. 적당히 무능하면 암흑기를 연장하며 다른 팀의 성적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진짜 작정하고 팀을 망치면[83] 그 폐해는 리그 전체에 미치기 때문이다. 김응용도 팀 운용 방식이 이전 해태나 삼성에서 보여준 방식과 거의 똑같았다. 선수들에게 간섭하지 않되 김응용 본인의 권위와 카리스마로 팀을 통제하기, 전력 구성 상 불필요한 선수는 가차 없이 내치기, 어찌 보면 상식적인 팀 운용 방법이고, 해태 타이거즈 시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팀의 선수층이 어느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구단이라면 이 방법은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한화 구단은 선수 층이 너무 얇아서 그런 식의 처방이 먹힐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존의 해태나 삼성은 선수들 개개인이 우수하거나 최소한 주전 급은 그럭저럭 돌아갔기[84] 때문에 김응용의 운영 방식이 최상의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한화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김응용의 팀 운영은 거의 모두 팀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깨닫게 된 후론 승리도 승리지만 육성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만약 현장에 복귀를 안하고 그대로 야구계의 원로로 남았다면 KS 우승 10회의 빛나는 명장으로 길이 남았겠지만 실제로 본인도 한화를 맡아 99 부진했던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하는듯 하다.
3.3.4.1. 부정적 평가
먼저, 구장 크기를 늘인 결과, 한화의 타자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장타력이 줄었다. 물론 한화 투수들은 여전히 홈런을 맞았다. 구장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투수의 실력이 문제였던 것.[85] 게다가 불펜 운용의 경우, 특정 불펜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투수진 전체에 연쇄 작용을 불러 일으켜 결국 2014년 최악의 팀 방어율을 기록했다.[86]

그렇다고 타선은 잘 돌아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선술했듯이 팀 장타율이 완전히 시망했으며, 김태완의 활용을 두고 매년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팀 내 보직이 꼬여 원래도 최악이었던 수비진 전체를 말아먹게 만드는 막장의 시너지를 불러오게 만들었다.[87] 물론 한화 선수단에서 쓸만한 카드 자체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팬들이 가장 불만을 가진 부분은[88] 김응용의 태도였다. 항간에는 리빌딩에 공을 들였다고 평가를 하나 일찌감치 관심을 접기도 하였다. 2014 시즌 종료 한달 여를 남겨둔 시점에 2015년 2차 신인 드래프트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내놓길 "내년은 나와 관련이 없다, 신인 선발을 구단에 맡겼다"라고 밝혔다. 또한 7회나 8회 무렵 팀의 패배가 확실시되면 늘 인상을 쓰며 경기 운영에서 손을 놔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아예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내일 경기도 준비해야 하는데 오늘 패배가 확실한 경기에서 손 놓지 않고 싶은 감독은 없겠지만 티를 너무 냈다는 것이 문제. 당연히 경기 종료 시 감독 인터뷰도 몹시 무성의했으며, 인터뷰 불참도 밥 먹듯이 했다. 사실 김응용의 인터뷰를 따서 생성된 기사의 수가 제법 되는 것으로 볼 때 언론과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중요한 것은 팬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영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3.3.4.2. 긍정적 평가
대다수가 후임 감독들 덕분에 결과는 처참하지만 취지는 좋은 게 대다수다.

일단 군 문제를 해결한 것이[89] 대표적으로 김응용이 한화에 와서 남긴 업적으로 뽑힌다. 2013년 처참한 성적으로 반 강제로라도 리빌딩을 할 수밖에 없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어떤 감독이라도 그렇게 했을 상황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해야하는 과정이였다. 다만 그 결과를 후임 감독이 말아먹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장성호와 유망주 송창현의 트레이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한화에 장성호가 있어도 성적은 처참한 상황이었고, 포지션 중복 문제가 있던 베테랑을 처분해 미래의 유망주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까지 포텐이 안 터지면서 성공적인 트레이드인지 보여주기식 트레이드인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나마 송창현을 1년이라도 잘 써먹은 한화가 근소한 이익에 가까운 수준.

3.3.5. 재평가?

김성근 감독을 거치며 재평가할 만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들을 모두 씹어먹을 만한 한화에서 불명예스러운 기록들이다.

인터뷰 내용

한화 이글스에서 김응용은 감독 기간 중에는 김응용 본인의 무성의한 태도 및 구시대적인 작전구사, 감독 이후에는 한화에서 감독 행적 자체를 후회하는 듯한 발언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커리어에 걸맞지 않는 성적과 함께 사실상 본인의 야구 인생 최악의 오점을 남기고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서 무능의 대명사 취급을 받았다.

다만 상술되어 있는 비판 점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결과표라 할 수 있는 성적을 제외하면 전부 인터뷰에 대한 비판이다. 성적에 대한 비판의 경우 애초에 남겨진 전력 자체가 전임인 한대화 감독 시절 전력에서 류현진, 박찬호 등이 빠져나가 더 약화된 전력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전년도 10월에 부임한 감독이 개막 전 6개월 가량의 훈련으로 강팀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만화 속에나 존재하는 일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감독의 작전구사의 경우 올드스쿨적인 작전구사라 비판받지만 실제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경기 중 감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승패마진을 2승 정도로 보며 그나마도 메이저리그의 경기 수가 KBO에 비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실제 KBO에서 감독이 작전 구사 등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승수는 1.5승 정도다.

한국에서의 감독의 역할은 오히려 미국의 단장과 흡사한데 미국의 야구단과 달리 한국의 야구단은 기업에 종속적이기에 단장은 모기업으로부터 현장에서 필요한 지원을 모기업이 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이다. 때문에 미국 야구단의 단장들이 실시하는 선수 트레이드 및 팜 정비를 통한 팀 구성은 한국 감독들의 역할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에서 감독의 역할은 선수단의 구성과 팜의 정비 등으로 평가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단기간에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에서 명 단장으로 칭송받는 테오 엡스타인이 시카고 컵스 부임 후 성적을 내기 시작한데 걸린 기간을 보면 알 수 있다. 테오 엡스타인은 11년 10월에 부임했고 시카고 컵스는 12년에는 46년만의 최악의 성적인 61승 101패를 냈고 13년에는 지구 꼴찌였다. 14년도에도 73승 89패 (NL 12위)로 승률이 4할에 가까웠다. 시카고 컵스가 성공적인 성적을 내기 시작한 것은 엡스타인의 4년차인 15년부터였고 우승은 5년차인 2016년 월드시리즈에서 이뤄졌다.[102]

선수단 구성에 대한 전권을 갖고 있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단장조차도 성적을 내기까지 4년이 걸리는 상황에서 선수단의 구성조차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없는 2년 계약의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김응용 감독의 부임 직후의 한화 이글스는 팀 자체가 망가져 애초에 성적을 낼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리빌딩 및 육성 시스템의 재정비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가 재임 시절 추진한 것들 대부분이 당장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 했던 궂은 일들, 장기적으로 봐야 했던 것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엠팍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 서식하는 야구팬들의 인식과 실제 팀 운용은 큰 괴리가 있으며 그러한 허상을 보여준 것이 바로 후임인 김성근 감독이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 육성, 작전 구사 등을 본인의 장기로 내세운 인물이었고 그의 부임 과정은 철저히 팬들의 의견과 여론이 개입되어 있었고 김성근 감독의 3년동안 감독의 선수 육성, 작전 구사 등은 결과적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화는 이러한 점을 뒤늦게 깨달았고 그제서야 NC의 육성이사였던 박종훈 전 단장을 선임하는 등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김응용 감독의 운영 외적인 측면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김응용 감독이 야구계에서 떠나있는 근 10년 가량 한국 사회의 많은 문화들이 바뀌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노력은 한 것으로 보이나 시대의 차이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김응용의 최측근[103]인 김종모 전 코치 #의 증언은 김응용 감독의 선수단 장악 방식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해태 시절의 외부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이른바 김응용 화법은 선수단을 장악하고 집중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고 이러한 방식은 00년대 초까지는 용인 될만한 문화였으나 10년이 지난 한화 시절에는 과거 같은 과격한 언행은 삼갔으나 선수단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옛 방식의 인터뷰 등 야구 마케팅 측면에서 한화 팬들의 반발을 샀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한화 팬들의 반발을 사다 보니 팬들의 비판의 수위도 높아졌고[104] 결국 본인도 감독 기간을 후회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고 그것이 다시 한화 팬들의 반발을 사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종합하면 야구 내적으로는 유능했으나 야구 외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야구 내적으로 이룬 업적 또한 후임자에 의해 박살난 감독. 시간이 지났음에도 선수를 보는 눈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수들을 제법 보존 및 육성시키고 팀의 재정비를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문제는 야구 외적인 마케팅 측면에서 철저히 실패하는 바람에 한화 팬들의 반발을 샀고 이에 팬들의 여론이 김응용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김성근을 선임하게 만들어 김응용이 만든 장기적 자원과 투자들을 박살내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임인 김성근 감독이 김응용 감독이 모아뒀던 유망주와 2군을 박살을 내버리는 바람에 김응용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결국 2020 시즌 한용덕 감독이 역대 최다연패인 14연패 후 사퇴하였다. 한용덕 감독의 실패의 원인은 대부분 노쇠하고 빈약한 선수층에 있다고 분석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한대화~한용덕 감독까지 10여년 간 제대로 칼자루를 쥐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성공한 인물은 김응용 뿐이다. 6년 전인 김응용 시절 주전으로 기용된 송광민이 한용덕 감독 때까지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극명히 보여준다.[105] 반면 김응용 감독의 13, 14 시즌 당시 선수단은 한대화 시절과도 달랐고 심지어 14 시즌은 13 시즌과도 선수단이 상당히 달랐다. FA인 이용규와 정근우를 제외하고도 당시 전역 후 복귀한 다수의 선수들, 고졸 선수들이 김응용에 의해 기용됐다. 김회성, 송광민, 한승택, 정범모, 강경학, 윤규진, 이태양 등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기회를 받았다. 심지어는 14년도 전역선수인 김회성을 쓰기 위해 13년도 전역선수인 송광민을 유격수로 보내려 하기도 했다. 윤규진 같은 경우 한 경기에서 롱릴리프로 좋은 모습을 보이자 바로 당시 부진하던 김혁민을 대신해 마무리로 기용됐다.


[1] 6경기는 심판에게 거친 행동으로 출전이 정지되며 백기성 수석코치가 대행[2] 전후기 각각 2위[3] 빙그레 이글스에게 업셋 우승[4] 1990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3연패로 패배[5] 1992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2승 3패로 패배[6]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7] 1994 준플레이오프 2연패 패배로 4위 확정[8] 3위 롯데와 3.5게임 차 이상 벌어지며 준플레이오프 무산으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9] 이 시즌 KBO 감독 최초로 1000승을 달성한 대위업을 쌓았다.[10] 더 놀라운건 해태 한팀에서만 1000승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11] 1경기는 심판 판정 항의로 출전 정지되며 유남호 수석코치가 대행[12] 시즌 중 13경기중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거친 행동으로 1경기 출전정지로 유남호 수석코치가 감독대행, 폭행사고 동기를 유발함으로 12경기 출전정지로 차영화 코치가 감독대행[13] 드림리그[14] 양대리그 합산[15]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차출되며 5경기 유남호 수석코치가 감독대행[16] 드림리그[17] 양대리그 합산[18]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 2승 4패로 13.5게임 차 업셋 준우승[19] 감독 커리어 첫 준우승으로 한국시리즈 불패 신화 마감[20] 삼성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 감독 등극[21] 2003 준플레이오프에서 4위 SK 와이번스에 2연패로 패했고 SK가 2위 KIA 타이거즈마저 3연승으로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4위 확정[22] 감독 커리어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이자 전설의 9차전 수중전 시리즈로 유명했던 2004년 한국시리즈[23] 감독 커리어 첫 최하위[24] KBO 9구단 체제 유일한 최하위[25] 국가대표로 국제 대회에 나가서 활약했지만, 일본 선수가 슬라이딩 태클을 하여 왼쪽 다리 뼈가 크게 부숴졌고, 몇 년간 수술과 재활을 반복해야 했다. 총 4번이나 수술을 했다고 한다.[26] 다리 근육의 무너진 양쪽 밸런스가 상체에도 악 영향을 미친 탓인지 경기 중 허리 통증이 자주 왔다고 한다.[27] 허구연 말로는 실제로 왼쪽 다리가 다치니까 타격에서 오른쪽 다리에만 힘을 주다보니 우타자인 자신이 오히려 무게 중심이 뒤로 가서, 안정적 자세로 방망이 중심에 공을 잘 맞추게 되어 타율이 잘 나오기는 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게 반복되니 허리 통증이 심해진 것이고, 실업야구의 턱없이 부진한 복지 체계 상 수술 1회당 재활기간을 한, 두달로 짧게 하고 또 경기를 나가게 되어 재활해야 할 시기에 다리 근육 밸런스를 못 맞춘 것이 악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은퇴 전까지 오른다리만 두꺼워서 양다리가 거의 짝짝이 수준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은퇴하고 몇 년 운동을 안하니까 오른 다리 근육이 줄어서 균형이 맞춰졌다고 한다.[28] 그래서 '돈 세는 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다'고 술회한 바 있다. 스포츠 종목을 불문하고 실업팀 선수들은 소속 회사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호봉, 직급 등이 부여됐으며 낮에는 업무를 하고 업무 종료에 운동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경기가 있으면 훈련을 해야 하기에 실질적으로는 근무를 빼주고, 오전부터 운동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대신 겨울 같은 비시즌의 경우, 오후는 케바케지만, 확실히 오전에는 은행원일을 철저히 했었다고 한다.[29] 이는 7080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파괴적으로 높았던 만큼, 화폐 유통량이 빠르게 늘어나고 물가와 임금도 급하게 오르는 인플레이션도 막을 수 없던 시대라 한국은행이 매년 새 지폐 발행을 많이 할 수 밖에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연 경제성장률이 보통 10% 근처에서 놀던 시대라 그렇지, 요즘처럼 경제성장률 2%~3% 시대였으면 새 지폐 빼돌린다고 논란 거리만 돼서 꿈도 못 꿀 일이다. 지금 개발도상국들도 6~7%면 어마어마한 고성장 국가라는 소리를 듣고 중앙은행이 매년 새 지폐 발행한다고 난리가 나는데, 당시 한국은 이를 초월하는 세계 최대 속도의 초고성장 국가였다. 현재 세계에서 7080시대 한국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하는 나라는 특수 케이스인 가이아나(평범한 소규모 빈국이었는데, 뜬금없이 대형 석유 유전이 발견됨) 정도 밖에 없고 이 역시 한국처럼 20년을 간다는 보장은 없다.[30] 1987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끈후 인터뷰에서. 실제로 저 시점 이후로 무려 6회나 더 우승했다.[31] 당시 대한야구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임중이던 이용일과의 인연 때문이었는데 1978년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단장과 선수로 만났다. 이때 다른 선수들은 경비를 모두 탕진하기 바빴는데 김응용은 필요할때만 쓰고 남는 돈은 반납하는 모습을 보고 김응용으로 낙점했다고 한다.[32] 실업시절의 인연이 있는지라 나중에 삼성 코치를 했다가, 해태에서 투수코치를 했다. 임신근은 후일 김인식과 함께 쌍방울로 떠났지만, 심장마비로 급사한다.[33] 당시 조지아 서던 칼리지[34] 2019년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송한 「한국 야구의 가장 위대한 순간들」에서 허구연은 김응용이 미국대학야구 팀으로 연수를 갔다고 했다.[35] 물론 이 말은 반 정도 맞고 반은 틀렸다. 연고 지역 출신 야구인을 감독으로 기용한 팀은 6개 구단 중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 등 3개 팀 뿐이다. 삼성은 대구야구의 대부였던 서영무가 초대 감독이었고 롯데는 경남고 출신이었던 박영길을 감독으로 세웠으며 삼미도 인천야구의 대부였던 박현식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MBC 청룡은 서울 경동고 출신의 백인천을 초대 감독으로 선임했지만 실제 본인이 태어난 곳은 중국이었고 OB 베어스 초대 감독 김영덕재일교포였다. 심지어 훗날 김응용이 지휘봉을 잡는 해태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 김동엽은 김응용과 같이 이북에서 피난 온 실향민이었다.[36] 영상 12분 50초쯤부터.[37] 김성한김종모전설의 타이거즈에서 했던 말에 따르면 한 번은 홈 경기에서 패한 뒤 선수들을 모두 구단 버스에 태워 전남 담양군까지 간 뒤 내려서 뛰어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 재일교포 출신 주동식김무종은 '이건 프로가 아니야!' '빠가야로'를 내뱉었다고. 송유석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는데 스타급 선수들은 손만 흔들면 지나가던 차들이 태워주지만 본인처럼 무명에 인상이 강하면 무서워서 행여나 해코지 당할까봐 태워주지 않았으며 결국 지나가던 경운기를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38] 사실 한대화 영입을 주장한 인물이 바로 김응용이었다. 간염에 걸려서 김성근에게 쫓겨난 한대화를 수석코치인 김인식을 보내서 잘 달래서 데려온 이후 그가 늦잠을 자고 훈련에 늦게 나오도록 배려를 해주면서까지 챙겨 주었다. 한대화는 김응용 특유의 자율야구에 적응하면서 6년 연속 3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여 해태 왕조 건설에 일익을 담당했다.[39] 영상 29분 50초쯤부터. 참고로 이 레전드 시즌 2도 방영됐는데 시즌 1도 그렇고 2도 그렇고 하나의 사건을 두고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다.[40]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방송 카메라를 발로 막는 장면이 비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스포츠신문에서 뽑은 제목은 시청자에 왕발킥?.[41] 방수원이 강판에 불응했던 이유는 아웃 하나만 더 잡으면 세이브 기록을 세울 수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회고했다.[42] KIA 감독 해임 후 군산상고 감독을 1년간 맡았을 때도 좋은 성적과 별개로 폭력은 여전했고, 2013~2014년 한화에서 수석코치를 맡기는 했지만 그 마저도 옛 스승이던 김응용이 불러줘서 간 것이었다.[43] 타이거즈에서 전반적으로 구타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는 이종범이 일본에서 호시노 센이치에게 맞고돌아온 다음이다. 선수단 리더인 이종범이 안하니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고.[44] 장채근의 홈런과 선동열의 완봉으로 승리하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장채근이 크게 코를 골고 잤는데도 모른 척 하고 봐줬다는 일화가 대표적이었다. 군기가 엄했던 80년대 해태에서 당시 선동열이나 장채근이나 짬이 안 되었던 편인걸 생각하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45] 강훈련을 강조했던 김성근OB 베어스 시절부터 한대화를 태만한 선수로 생각했고, 이는 한대화가 은퇴식도 치르지 못하고 선수를 그만두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6] 이병훈 본인의 표현이다.[47] 이병훈이 사실상 지상파에 못 나오는 이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스타일이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점은 둘째 치고, 음주운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극악으로 바뀌었기 때문. 이병훈은 2회 이상 음주운전을 해서 물의를 빚은 바가 있다.[48] 쌍팔년도에 군생활한 사람치고 줄빠따 등 일상화된 폭력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당시 군대에서 폭력을 당한 사람도 얼마 후에는 짬밥이 올라 가면 동일한 폭행을 후임병들에게 가하는 시스템이 돌아갔었다. 군대는 물론이고 운동계나 학교에서도 잘못했다는 이유로 매를 때리고 맞는 걸 당연시했으니 아무도 이를 문제삼을 수가 없었다. 더 멀리 바라보고 일찍 인권에 눈을 뜬 소수가 성장이라는 절대명분 때문에 반박의 목소리를 낼 힘을 모으지 못했던 시대였다.[49] 물론 실력을 최우선으로 보던 감독이었던 만큼, 우수한 실력을 보여주던 선수에게는 사고만 안 치면 알아서 하라도 그냥 두었다.[50] 정확히 말하면 한대화가 트레이드로 입단하고 3루를 보던 이순철을 외야로 이동시키면서 김일권과 같은 유형이나 기량이 더 뛰어난 이순철로 대체했다.[51] 당시 팀 내 이닝 소화 2위는 131이닝을 던진 차동철. 이 쪽도 선발과 계투를 오가면서 굴려졌다.[52] 심지어 97 임창용은 마무리 투수임에도 선발투수인 97 조계현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53] 한국시리즈에서 이선희는 5경기 31 1/3이닝을 던졌다. 괜히 원년에 김유동에게 만루홈런을 맞은 것이 아니었다.[54] 김성한(KIA)은 37살 이강철을 66경기 105이닝을 굴리면서 백정 짓을 해댔고, 투수 깎는 노인으로 악명이 높은 김성근(LG)은 이동현을 78경기 124이닝, 장문석을 59경기 101 1/3이닝, 이상훈을 52경기 85 2/3이닝씩이나 굴리면서 세 선수에게 큰 해악을 끼쳤다. 김재박(현대)도 조용준을 64경기 109이닝, 송신영을 42경기 104 2/3이닝씩 던지게 하면서 혹사를 한 것은 마찬가지고 김인식(두산)은 이상훈을 77경기 133 2/3이닝, 이재영을 67경기 97 1/3이닝, 이혜천 78경기 79이닝, 차명주 67경기 51 1/3이닝으로 심하게 굴렸다. 강병철(SK)도 채병용을 51경기 144이닝이나 등판시켰을 정도. 그나마 투수 분업화의 선구자인 이광환이 감독을 하던 한화는 200이닝을 던진 선발 송진우를 빼면 혹사는 거의 없었다.[55] 1993년부터 선동열이 마무리로 자리잡음으로써 완투가 제일 적었던 팀이 해태이다. 물론 조계현 같은 S급 선발은 예외였다.[56] 양준혁의 자서전을 보면 갈 곳이 없는 선수들은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해주었으며, 한국에 적응 못할 용병들을 위해 자주 양식집에 데려가 식사를 사주는 등 경기장 밖에서는 따뜻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고 언급했다.[57] 오히려 야구 기용에 있어 차가운 쪽에 가까울 정도로 능력이 노쇠화되면 1~2년 안에 가차없이 스타 선수들을 은퇴시켜 코치로 부임시키거나 트레이드시켰다. 이 때문에 초창기 팀의 전국적인 스타였던 김봉연이 강제 은퇴를 하기도 하였다.[58] 결국 김응용 감독이 예정과는 달리 2000년 시즌 해태 감독을 1년 더 맡게 되자 삼성은 그 대체자로 수석코치 김용희를 감독으로 승격시켜 1년만 임시로 맡게 하였다. 그러나 임시 감독인 만큼 김용희의 입지는 좁았고 1년 후 김응용이 삼성으로 오자 김용희는 자진사퇴 형식으로 경질되었다. 김용희의 1년 땜빵 감독 시기 덕분에 삼성과 사이가 나빴던 장효조김성근이 각각 1군 타격코치와 2군 감독을 맡는 진풍경이 일어났을 정도.[59] 하지만 이대진의 173구 완투 그것도 박빙 승부도 아니고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부상 경험이 있는 선수를 완투를 시킨건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 당시에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지금이라면 김응용 그 자신이 옷을 벗을 상황이다.[60] 사실 우승을 명분으로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상징이었던 이만수를 내치고 양준혁을 해태로 트레이드했는데 이때까지 우승은 고사하고 한국시리즈조차 가지 못하는 삼성에 불만이 쌓이던 팬들이 김응용이 감독이 된다는 말이 나오자 폭발했다고 보는게 맞다.[61] 군기반장 역할을 맡겼다.[62] 일례로 수비훈련 방식을 놓고 류중일 당시 코치와 밤샘 토론이라고 쓰고 말싸움이라고 읽는다 끝에 삼성의 수비 훈련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수비 및 작전에 관해 전권을 부여한 사례가 있다.[63] 물론 이승엽은 그 다음 해에 김응용에 대해 속 풀이 뒷담을 하다가 대선배 양준혁에게 크게 혼쭐난 적이 있다고 한다.[64] 당시 삼성은 수훈 선수, 개인 타이틀 등의 보너스를 현금으로 그 자리에서 줬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 차량의 대시보드에는 대구 시내 모든 1만원 권이 들어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고 한다.[65] 박명환야구TV에서 박명환오상민이 술회하길, 삼성 코치실에는 지폐 카운터기가 있었으며 코치들의 업무 중의 하나가 봉투에 돈을 담는 일이었다고 한다. 1군 경기에서 그날 게임에 출전하지 않아도 경기 수당 10만원이 지급됐으며 승리 수당도 액수가 커서 연봉은 그대로 두고 수당 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1군 경기장에 안 보이는 돈들이 깔려있다 보니 선수들이 2군에 안 내려가려고 했다. 이게 삼성 왕조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수당이 어마어마하니 2군 강등이 싫어서 죽어라 야구 하기 때문이다.[66]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이건열이 술회하길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2루에 가면 키스톤 콤비이자 후배들인 류중일-강기웅이 '형님 이번엔 저희가 우승하게 해주쇼' '우승하면 보너스 많이 준다고 안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김성한, 김종모도 삼성의 화끈한 자금력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67] 시즌중 선발 - 계투 - 마무리를 거치며 혹사당한 김진웅이 불을 거하게 지르며 망했다. 외국인 선발투수 발비노 갈베스의 부진도 그 문제 중 하나.[68] 1996년 한국시리즈를 생각하면 둘의 재대결인 셈이다.[69] 당장 정규리그 2위였던 현대 유니콘스와는 무려 7경기 차이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고, 두산 베어스와는 13.5경기 차이가 났었다. 게다가 2001년 시즌의 경우 4위 팀 한화 이글스부터 8위 팀 롯데 자이언츠까지 경기차가 얼마 나지 않아 전력 평준화가 이뤄지는 등 4강 진출을 위해 5팀 간 엄청난 경쟁이 벌어지던 해였다.[70] 실제로 두산의 투수력은 10승 투수도 없었는데다가 3~5차전 각각 9/11/14점을 내줄 정도로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삼성은 10승 투수 4명을 보유하고도 거기서 1승밖에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더 좋지 못했다.[71] 극적인 면만 강조해서 잘 안 알려지는데 단순 전력이나 체력적인 면은 2001년에 이어 삼성이 훨씬 유리했다. 그런데도 이런 승부가 나온것은 LG가 분전한 것도 있지만 삼성 쪽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72] 당시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 의식, 선발 에이스 임창용과 마무리 투수 노장진의 부진으로 인해 투수진에 제대로 구멍이 뚫렸고,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의 시즌 아웃 등 악재가 제대로 낀 상황이었다.[73]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달성여부 때문에 포스트시즌 때 제대로 된 준비를 못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상대팀 SK의 감독이 전년도까지 삼성의 배터리코치를 맡았던 조범현이었다 보니 삼성 선수들의 약점이나 쿠세 등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는데다 쳐진 삼성의 팀 분위기까지 겹쳐 SK가 우세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74] 특히나 그가 해태 시절 황제코끼리로 군림하며 삼성을 번번히 우승을 좌절시켰음을 감안하면 삼성 팬들에게 지지받는 것이 더욱 대단한 일이다. 물론, 김응용과 류중일을 제외한 21세기 이후 삼성 감독들인 선동열, 김한수, 허삼영, 박진만의 평가가 20세기까지의 삼성 최악의 감독이었던 김성근 혹은 그 아래에 놓일 정도로 나락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간 정도의 평가만 받았어도 21세기 삼성 감독 중 둘째 가는 평가를 받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더해서 김응용의 전임자인 서정환 역시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75] 류현진은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화에서 데뷔하여 7년 동안 활약한, 2000년대 한화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상징이고, 김응용은 빙그레 시절 여러 차례 우승을 좌절시킨 원수다.[76] 당시에 류현진의 메이저 리그 진출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여론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77] 강동우는 당시 39살의 고령이었지만, 김응용이 삼성 감독을 하던 시절 주전으로 뛰던 선수였었고, 2011년 수준의 성적만 내 준다면 믿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78] 그나마 잘 한게 2012년 성적이다. 2010~2011년 성적을 보면 2할 4푼대를 치면서 부상으로 골골댔고, 2012년에 돼서야 113 안타와 2할 6푼대를 치면서 그나마 사람 구실만 하던 수준. 장성호라는 이름 값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성적이었다.[79] 아쉬운 점은 2013년 한 해만 잘 했고, 그 이후로는 불만 지르다가 은퇴했다는 점이다. 물론 신인이어서 연봉이 싼 송창현과 달리, 장성호를 받은 롯데는 억대 연봉을 줘 가면서 대타 요원으로도 제대로 써먹지 못 했기 때문에 근소하게 한화가 더 이익에 가깝다.[80] 2군에서 사비로 훈련금을 지원한다며 지원자를 찾을 때 온 선수가 이태양 한 명뿐이었다는 얘기가 있다.[81] 신경현과 동기인 40살의 조인성을 데려온 것이 겉 보기에는 안 좋은 선택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정범모가 주전 포수를 하던 팀이었으니 이대수가 아까워도 어쩔 수가 없었다.[82] 김성근이 한대화 감독을 시즌 도중에 내치지 말 것을 부탁했으나 한화 프런트는 이를 어겼다.[83] 당연히 롯데 재임 시절. 최소한 그 이전에는 명장 소리라도 듣던 사람이었다.[84] 2012 시즌까지의 KIA 타이거즈를 생각하면 된다.[85] 다만 구장 크기가 그대로 였다면 방어율은 더 올라갔을 거다.[86] 부임 첫 해인 2013년에 버팀목이 될 국내 선발 하나 없었다. 이듬해엔 이태양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순전히 김응용 감독이 발굴한 선수도 아니었다.[87] 다만 한화의 수비는 원래 최악이었다.[88] 어쩌면 김성근 감독이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89] 다만 이 기조는 전임 감독이었던 한대화 시절부터 이어진 것이기도 하다. 정확히 한대화 시절은, 주전, 백업 선수들이 입대 시기를 놓쳐서 허겁지겁 병역 문제를 해결하러 간 쪽에 가깝고, 김응용 시기는 군 문제 해결을 위해 신인급 선수들을 군대부터 보내는 기조를 유지한 것이다.[90] 특히 임준섭은 몇 경기 뛰지도 않고 부상으로 드러누워 2015년을 마감했고, 2016년에는 아예 안 보이더니 결국 시즌 중에 공익으로 소리소문없이 입대를 했다. 이종환 역시 수비가 심각하게 안되는 대타용 외야수였고, 17년 3군에 있다가 급히 콜업되어 한가운데 공에 선풍기 스윙을 하는 프로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다 김성근 경질 후 6월 방출되었다. 애초에 이종환은 KIA에서도 전형적인 2군 선수에 가까웠었다.[91] 물론 이걸 알고 버린 것은 아니다만, 결과적으로 폭탄을 치운 셈이 되었다.[92] 이정훈(넥센), 유동훈(KIA), 정현욱(삼성), 마일영(한화) 4명 밖에 없었고 구단에서는 마일영만 잔류 시킨 것.[93] 물론 2014년에도 투수 매물이 없었다. 강영식(롯데)와 장원삼(삼성) 모두 원 소속 구단과 후한 조건으로 재계약을 진작에 해 버렸기 때문이다.[94] 하지만 권혁은 2년동안 그 전에 던진 공만큼 던지다가 수술대에 올라갔고, 정우람은 불펜투수에다가 84억이라는 과한 금액을 투자했는데도 불구하고 2016년 블론 1위를 하는 등 일부에서는 먹튀라고 까이고 있다. 아무리 고무팔이라지만 15년부터 슬슬 퍼지기 시작한, 선발 경험 한 번 없는 투수를 2-3이닝 맡기고 연투시키고 세이브 상황이 아니라 유망주에 기회를 줄 타이밍에도 올린 감독 탓이 제일 크지만 비슷한 사례로는 롯데의 윤길현이 있다.[95] 그나마 심수창은 불펜에서 꾸준히 던지고 있고 스리쿼터-사이드암 변칙 투구로 148km까지 찍었다. 본인이 팔꿈치 주변 인대를 강화시켜서 연투나 포크볼 연속 투구도 큰 무리가 없는 꽤 희귀한 케이스다.[96] 이는 결국 부매랑이 임기영은 99년 이후 한화지명 선수 최초로 타팀에서 한국시리즈 승리투수가 되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간다.[97] 결국 이재원은 허락 없이 군 팀에 들어갔고, 군 팀 입단 가능 나이를 놓친 채병용과 고효준은 30세가 가까이 돼서야 공익 복무를 하게 되었고 소집 해제 후 후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윤길현은 상무에 입대하기는 했으나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후 남은 복무 기간을 국군수도병원에서 재활로 보내야 했다.[98] 결국 둘 다 20 시즌 기준 팀을 떠났다.[99] 김응용의 한화 미래 예상[100] 이정훈 감독은 부임시 김성근 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정훈 본인이 2군 감독 시절부터 눈여겨보고 아꼈던 노수광을 김성근이 트레이드시킨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다가 찍혔다는 소문이 있다.[101] 다만 이는 당시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기조의 영향도 있어서 조정 평균자책점으로는 뒤에서 22번째이다. 역대 최악 급은 아니라는 것이다.[102] 염소의 저주를 뚫고 106년만의 우승이었다.[103] 선수 시절부터 함께 했으며, 삼성 - 한화 시절에 동행했던 인물이다.[104] 직관 팬들이 현수막을 거는 등 비난의 수위가 상당했다.[105] 한용덕 감독 역시 육성을 시도 한 것으로 보이나 아이러니 하게도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단호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