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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문단 <3.1. '천황'과 '일왕'의 격에 관한 문제>의 소문단 <일본 역사에서의 혼용 사례>을 생성, 일본내에서 관련 호칭이 혼용되었다는 내용을 근거 첨부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 }}}}}}}}} |
1. 개요
일본의 군주인 천황의 칭호를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대한민국 내의 정치, 언론 및 사회적 쟁점과 사례를 다루는 문서.2. 현황
본 항목을 읽기에 앞서 천황 문서의 한국과의 관계 문단을 한 번 읽고 오는 것을 권한다.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필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강한 갈등 관계였던 한일관계 사이에서는 '천황', '덴노', '일왕' 등의 호칭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갈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특히 천황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은 군국주의 시대의 만행이 천황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공식 표기는 '천황'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도 일본의 군주를 천황이라고 불렀고,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한동안은 '일왕' 등이 사용되었으나, 1998년 국민의 정부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1] 이후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2] 외교석상에서 일본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에서 제공되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1945년 01월 01일 ~1999년 12월 31일까지 데이터베이스로 검색해 보면 일왕(日王)이 1778건, 천황은 1,500건, 일황(日皇)은 762건, '왜황'은 22건이며, '일왕'이라는 칭호는, 쇼와 천황이 사망한 연도인 1989년을 전후해 갑작스럽게 그 빈도가 높아진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에는 일황(日皇)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여 오다 1988년부터 1989년에 쇼와 천황이 사망하며 일제강점기 때가 조명[3]되자,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이 증가하며,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낮추어서 호칭하고 있다.(역대 언론자료로 본 천황 사용 비율 / 역대 언론자료로 본 일왕 사용 비율)
한국을 제외한 동아시아[4]에서는 모두 천황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쇼군에게 부르는 칭호였던 '일본 국왕'을 천황에게도 사용하였으나 천황(天皇), 왜황(倭皇), 왜왕(倭王),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 나라 임금) 등 다종다양한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해 왔다.
3. 쟁점
3.1. '천황'과 '일왕'의 격에 관한 문제
일왕이란 표현은 일종의 신문 용어다. 1980년대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과 재일동포 지문날인 강요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천황을 격하시켜 일왕으로 표기했다. 대통령은 천황이라 부르는데 신문과 방송은 꼬박꼬박 일왕으로 바꾸어 쓴 게 20년이 넘었다.
황성기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신문 2008년 4월 24일자 오피니언 '일왕과 천황'에서#
황성기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신문 2008년 4월 24일자 오피니언 '일왕과 천황'에서#
본보 역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한다. 예외적으로 직접 인용한 발언이나 문서에 천황이라고 돼 있거나 ‘천황제’를 설명할 때만 천황으로 쓴다. 그러나 ‘큰 나라 미국 대통령도 대통령이고 작은 나라 한국도 대통령인 게 말이 되느냐’며 일본의 극우 언론이 한국은 ‘소통령’이라고 한다면…. 불쾌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도 ‘천황’을 일왕으로 낮춰 부르니까.
동아일보
동아일보
일왕 표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천황에 대해서는 '천황'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반명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문자 그대로 한자를 뜻풀이해 '하늘의 황제', 중화질서에서 변방이나 제후국의 유력자에게 조공을 받고 왕으로 책봉할 권위를 갖는 이른바 천자를 자칭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정서가 있어서 거부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에서 비롯된 황제 칭호가 '왕중왕'의 의미나 '신의 대리자', 하늘의 아들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천황은 대리자도 아닌 아예 '하늘의 황제' 그 자체라는 뜻의 칭호에서부터 일본이 중화질서에 의거한 주변국의 지배야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는 분석도 있다. 황제는 영토가 넓고 왕국을 넘어서는 군주 중의 군주의 이미지가 있으며, 한국보다 3배 정도 넓지만 세계적으로는 일본이 특별히 넓은 영토를 갖는 나라는 아니기에 민족주의적 감정과 더불어 한국인들은 천황을 '황제'라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미디어물, 영화, 게임 등에서 큰 영토를 가지고 수많은 민족, 문화를 아우르는 국가의 수장에 대해선 대부분 '황제'라고 칭한 것 또한 이러한 호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높였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영화, 게임 등에서 등장하는 황제들은 거의 대다수가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는 방법 등으로 드넒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의 출신들이고 이러한 미디어물 게임 속의 황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보기엔 천황과 이를 떠받드는 일본에 대해 나라도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 황제를 칭하는 자뻑질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디어물과 게임, 소설에 익숙해진 일부 사람들이 이런 식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댄 것이 대한제국의 칭제건원으로 식민지도 하나도 없는 나라 주제에 무슨 제국이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게임과 미디어물과 다르게 황제/국왕 칭호를 쓰는 것은 단순한 영토 크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은 말기에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겨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리스 남부의 몇몇 도시와 공국들을 가진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했으나, 황제(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라는 직함만큼은 유럽 세계에서 엄연히 유지되었고, 이는 국왕도 마찬가지여서 대영제국처럼 중견국으로 출발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주변 여러 민족을 복속시킨 뒤에도 황제라고 칭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국왕(King) 칭호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일왕 표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후손이고 동로마 즉 로마가 구미권에서는 '세계 그 자체였고 그 로마의 황제가 곧 세계의 황제로 간주되었던 것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3세기에 야마토 정권이 수립되고 그 통합된 정권의 수장인 히미코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이래 1,700년의 세월 속에서 일본의 군주인 천황은 단 한 번도 동아시아 전역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왕 내지는 국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5]
하지만 일본의 천황은 일본 열도[6]라는 세계 안에서는 유일무이한 황제였고, 실제로도 일본 열도 내에서 몇백 년간 실권이 있었던 시기도 존재했다. 거기에 구미권에서도 다른 문화권의 왕중왕 등을 황제라고 불렀으며, 황제란 그저 한 문화권에서의 최고 권력자라는 의미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근세 이후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며 한 문화권의 최고 권력자라기보다는, 단지 국왕보다 더 격식이 높은 칭호일 뿐이었다.
일왕 표기를 고집하는 이들은, 국왕이라는 호칭에 천자로부터 분봉되는 제후왕으로서의 의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독립국 군주로서의 국왕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격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는 것이 감정적인 비하이고 격하이며 국왕은 비하하는 호칭이라고 한다면 다른 국가의 '국왕'이라고 불리는 군주들도 똑같이 '황제'라고 높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미권에서도 황제보다 국왕이 격이 낮은 호칭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는데, 스페인 국왕이나 프랑스 국왕은 종교학자와 법학자들을 동원해 “국왕은 자기 자신의 왕국에서는 황제이다.”라는 말을 남겼었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프랑스 황제를 칭했고, 이탈리아 왕국과 영국의 국왕들은 각각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와, 인도 제국의 여제라는 타이틀로 스스로를 높였다. 만약 황제 칭호와 국왕 칭호가 동등하다면 이러한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 이는 엄연히 황제가 국왕보다 더 격이 높은 칭호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황제라는 단어만큼이나 '왕'이라는 단어 역시 충분히 오해를 사고 있는 단어인데, 왕은 흔히 황제보다 아래이며 황제에게 분봉된 제후왕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애초에 황제라는 용어가 진시황에 의해 등장하기 전에 황제 즉 '천자'는 왕이었다. 즉 진나라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왕이라는 칭호가 남발[7]되자 천자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황제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즉 진나라 이전에는 최고 군주의 칭호가 왕이었던 것인데 이때 당시 나온 공자와 맹자 등 제자백가들의 책 및 이념, 단어에는 왕(王) 자가 군주의 의미로 쓰일 수밖에 없다.[8]
이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 천황가를 소개할 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는 일본의 황실입니다"(世界最古の王家は日本の皇室)라며 일본의 황실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라고 부르고 있는데 왕가라는 말은 모나코 공실, 일본 황실, 영국 왕실처럼 군주국의 군주 가문을 의미하는 단어로, 군주가 국왕이던 공작이던 황제건 작위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술했듯이 왕이라는 단어가 황제보다 먼저 만들어진 관념이자 단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가 만들어질 당시는 왕이 곧 군주였던 것이다.[9] 즉 왕보다 격을 높이기 위하여 황제 칭호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군주를 칭하는 말로 그 격의 높고낮음과 상관없이 왕이라 칭하기도 했던 것이다. 진나라 이후 중원의 군주들은 황제를 칭호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왕(王)자가 들어간 왕도정치, 왕조 등의 단어는 잘만 사용했다.
일왕 표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본 역사서에서 왕(王)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일본인들도 천황을 왕으로 불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왕조, 왕가, 왕사 등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황제한테 사용했던 단어들이고, 여기에서의 왕은 그냥 군주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일본의 천황을 국왕이라 부른다면 중국의 황제도 왕이라고 칭한 기록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상술한 왕사라는 단어도 처음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진나라가 세워지기도 몇백년 전에나 만들어진 단어이고 겨우 왕(王)자를 몇번 쓴다고 국왕이라고 단정짓게 되면 중국의 명 왕조, 청 왕조 등도 왕(王) 자가 들어가는 단어를 쓰므로, 전부 국왕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덧붙여 조선이 제후국을 자처하면서도 국왕에게 올리는 묘호를 비롯해서 일부는 고려 이전부터 사용하던 외왕내제식 제도나 '성상(聖上)' 등의 용어가 온존하며 쓰이고 있었다. '주상'뿐 아니라# 일본에서 천황을 가리킬 때 '국왕'과 함께 사용했던 용어 가운데 일부는 조선에서도 버젓이 잘만 썼던 것이며,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일본 전국 각지에 내린 명령서를 가리키는 '윤지(綸旨)'라는 용어는 조선에서도 국왕의 명령서라는 의미로 일본과 거의 똑같이 쓰였다. 심지어 조선 후기가 되면 중국에서 황제의 사망을 가리킬 때 쓰던 붕어(천붕),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성지(聖旨) 역시 조선에서 국왕의 죽음, 또는 국왕의 명령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조선 국왕을 그 어느 누구도 황제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황제가 쓰는 용어와 왕이 쓰는 용어를 혼용한다 해도 엄연히 일본 군주의 공식 명칭은 천황, 조선 군주의 공식 명칭은 국왕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와 같이 몇몇 한국사 왕조의 일부 군주도 자신을 황제라 칭한 적이 존재하지만 엄연히 정식 시호는 왕(王)이었으며 칭제와 연호를 사용한 경우도 일본이나 베트남의 외왕내제에 비해 연속적이거나 정식적인 호칭이 아닌 단발성에 그쳤다.[10]
덧붙여 과거 천자가 왕을 칭할 당시의 용어는 지금의 황제가 쓰는 용어(폐하, 태자, 성지, 붕어 등)를 썼지만 진시황이 황제로 한 단계 격상하며 그 전까지 제후가 쓰던 용어(전하, 세자, 교서 등)를 왕이 쓰게 되었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그래도 이것이 명확히 지켜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륙 너머 한반도에는 중국만큼 명확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거기에 완전 섬인 일본 열도에는 중국의 영향력이 제후국이었던 한반도만큼 크지 않아, 대놓고 황제가 쓰는 용어를 사용했다.
3.1.1. 일본 역사에서의 혼용 사례
헤이안 시대에 천황이 거주하는 수도 헤이안쿄 즉 지금의 교토는 '왕성(王城)' 즉 '왕이 머무는 성'이라고도 불렸다. 헤이안 시대에 헤이안쿄의 동북쪽 히에이 산에 세워진 사찰 도지(東寺)는 '왕성진호(王城鎮護)'의 역할이 맡겨져 있었고# 헤이안 시대 말기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던 헤이케의 무장 다이라노 노리츠네(平教経)는 당시 왕성 제일의 강궁 정병(王城一の強弓精兵)이라고 불렸다.또한 일본의 고전 군키모노가타리(군담소설)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나 「태평기(太平記)」, 공식 법령집 「다이호령」(大宝令)이나 「요로령」(養老令), 공가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玉葉),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나 「신황정통기」(神皇正統紀), 그리고 「쇼토쿠 태자 전력」(聖徳太子伝暦) 등, 일본 천황을 가리켜 '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른 기록들도 있다.
夫王家之為王家, 在佛法之擁護, 佛法之為佛法, 任王家之歸依. 又云佛云神, 保護天下, 其誓是同, 譬猶牛二角, 鳥之雙翅而已.
무릇 왕가가 왕가임은 불법(佛法)의 보우하심 때문이요, 불법이 불법임은 왕가가 귀의하고 있기 때문이라. 또한 '부처'니 '신'이니 하지만 천하를 보호하리라 하신 그 맹서는 다 같았으니, 비유하면 소의 두 뿔이요, 새의 두 날개일 따름이다.
『헤이안 유문』(平安遺文) 3837호 문서 「지쇼 2년 6월 기이 국 대전법원 중도해안」(治承二年六月紀伊国大伝法院衆徒解案)
무릇 왕가가 왕가임은 불법(佛法)의 보우하심 때문이요, 불법이 불법임은 왕가가 귀의하고 있기 때문이라. 또한 '부처'니 '신'이니 하지만 천하를 보호하리라 하신 그 맹서는 다 같았으니, 비유하면 소의 두 뿔이요, 새의 두 날개일 따름이다.
『헤이안 유문』(平安遺文) 3837호 문서 「지쇼 2년 6월 기이 국 대전법원 중도해안」(治承二年六月紀伊国大伝法院衆徒解案)
九州之地者, 一人之有也、王命之外、何施私威.
구주[11] 땅은 한 사람의 것이라. 왕명 이외에 그 누가 사사로이 위엄을 부리겠는가?
호겐(保元) 원년(1156년) 윤9월 18일(양력 11월 2일)에 발호된 이른바 '호겐 신제' 7개조의 제1조 첫머리에서
구주[11] 땅은 한 사람의 것이라. 왕명 이외에 그 누가 사사로이 위엄을 부리겠는가?
호겐(保元) 원년(1156년) 윤9월 18일(양력 11월 2일)에 발호된 이른바 '호겐 신제' 7개조의 제1조 첫머리에서
"저는 황실(朝家)을 위하여 생각하고 있으니, 임금(君)에게 변이 생기면, 그것을 사심없이 제 일처럼 여깁니다. 이는 스케노하치로 히로쓰네를 죽인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히로쓰네는 도고쿠의 유력자로 요리토모가 거병하여 임금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적으로 히로쓰네를 아군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히로쓰네는 공적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도대체 요리토모 그놈은 무슨 까닭으로 황실(朝家)만을 그리 볼썽사납게 챙기는가? 그냥 반도(坂東)에서 지내면 될 것을 누가 멋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운운하며 모반할 마음을 품었던 자입니다. 이런 자를 노토(가신)로 둔다면 요리토모까지도 신불의 가호를 잃게 될 것이라 여겨 죽여 버린 것입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고시라카와원에게, 구칸쇼(愚管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고시라카와원에게, 구칸쇼(愚管抄)
국왕은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일본국에서는 국왕의 종성(種姓)을 가지지 못하면 국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대(神代) 이후로 정한 관습이다.
지엔(慈圓) 저 구칸쇼 제7권
지엔(慈圓) 저 구칸쇼 제7권
その先祖を尋ぬれば桓武天皇第五の皇子、一品式部卿葛原親王九代の後胤、讃岐守正盛が孫、刑部卿忠盛朝臣の嫡男なり。かの親王の御子、高見王、無官無位にして失せ給ひぬ。その御子、高望王の時、初めて平の姓を賜はつて、上総介に成り給ひしより、たちまちに王氏を出でて人臣に列なる、その子鎮守府将軍良望、後には國香と改む。國香より正盛に至る六代は、諸国の受領たりしかども、殿上の仙籍をば未だ赦されず
그 선조를 돌아보면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다섯째 황자(皇子), 1품 식부경(一品式部卿)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9대(代) 후윤(後胤)으로 사누키노카미(讃岐守) 마사모리(正盛)의 손자요, 형부경(刑部卿) 다다모리(忠盛) 아손(朝臣)의 적남(嫡男이라. 저 친왕의 아드님 다카미 왕(高見王)은 무관무위(無官無位)로 하여 세상을 떠나셨더라. 그 아드님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때에 처음으로 다이라(平)라는 가바네(姓)를 내리시어, 가즈사노스케(上総介)가 되시고, 곧바로 왕씨(王氏)를 떠나 인신(人臣)에 드옵시니, 그 아들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요시모치(良望)는 뒤에 구니카(國香)로 고쳤다. 구니카로부터 마사모리에 이르기 6대, 여러 구니(国)의 수령이시긴 하였으되, 전상(殿上)의 선적(仙籍)은 여직 내려받지 못하셨더라.
- 헤이케 이야기 제1장 '기원정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선대를 설명하면서
그 선조를 돌아보면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다섯째 황자(皇子), 1품 식부경(一品式部卿)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9대(代) 후윤(後胤)으로 사누키노카미(讃岐守) 마사모리(正盛)의 손자요, 형부경(刑部卿) 다다모리(忠盛) 아손(朝臣)의 적남(嫡男이라. 저 친왕의 아드님 다카미 왕(高見王)은 무관무위(無官無位)로 하여 세상을 떠나셨더라. 그 아드님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때에 처음으로 다이라(平)라는 가바네(姓)를 내리시어, 가즈사노스케(上総介)가 되시고, 곧바로 왕씨(王氏)를 떠나 인신(人臣)에 드옵시니, 그 아들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요시모치(良望)는 뒤에 구니카(國香)로 고쳤다. 구니카로부터 마사모리에 이르기 6대, 여러 구니(国)의 수령이시긴 하였으되, 전상(殿上)의 선적(仙籍)은 여직 내려받지 못하셨더라.
- 헤이케 이야기 제1장 '기원정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선대를 설명하면서
同廿日、法皇の宣命にて、四宮、閑院殿にて位につかせ給ふ。摂政はもとの摂政近衛殿かはらせ給はず。頭や蔵人なしおきて、人々退出せられけり。三宮(さんのみや)の御(おん)めのと泣きかなしみ、後悔すれども甲斐ぞなき。「天に二つの日なし、国に二人の王なし」と申せども、平家の悪行によッてこそ、京田舎に二人の王はましましけれ。
그[12] 20일, 법황의 선명으로 시노미야(四の宮)가 간인도노(閑院殿)에서 즉위하시게 되었다. 섭정(摂政)은 옛 섭정인 고노에 님(近衛殿)으로 변함이 없었다. 토(頭)[13]나 구란도를 임명함에 있어 사람들은 퇴출되었다. 산노미야(三の宮)의 유모는 눈물 흘리며 슬퍼하시고 후회하셨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천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명의 왕이 없다」[14] 하였거늘, 헤이케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교토와 시골에 두 사람의 왕이 계시게 된 것이다.
헤이케 이야기 권8 나토라(名虎)#
그[12] 20일, 법황의 선명으로 시노미야(四の宮)가 간인도노(閑院殿)에서 즉위하시게 되었다. 섭정(摂政)은 옛 섭정인 고노에 님(近衛殿)으로 변함이 없었다. 토(頭)[13]나 구란도를 임명함에 있어 사람들은 퇴출되었다. 산노미야(三の宮)의 유모는 눈물 흘리며 슬퍼하시고 후회하셨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천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명의 왕이 없다」[14] 하였거늘, 헤이케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교토와 시골에 두 사람의 왕이 계시게 된 것이다.
헤이케 이야기 권8 나토라(名虎)#
天下将乱時、妖霊星と云悪星下て災を成すといへり。而も天王寺は是仏法最初の霊地にて、聖徳太子自日本一州の未来記を留給へり。されば彼媚者が天王寺の妖霊星と歌ひけるこそ怪しけれ。如何様天王寺辺より天下の動乱出来て、国家敗亡しぬと覚ゆ。哀国主徳を治め、武家仁を施して消妖謀を被致よかし。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때, 요령성(妖霊星)이라 하는 악성이 내려와 재앙을 일으킨다 하였다. 더구나 덴노지(天王寺)는 바로 불법이 처음 일어난 영험한 땅인데, 쇼토쿠 태자께서 몸소 일본 한 주의 미래기(未来記)를 남기셨다. 그렇다 하면 그 미혹하는 자가 '덴노지의 요령성'이라 노래한 것도 괴이한 일이다. 실로 덴노지 주변으로부터 천하의 동란이 일어나 국가가 패망할 것을 깨우치려 함이다. 이제 국주(国主)[15]가 덕으로 다스리고 무가가 인을 베풀어 요사한 모의를 제거하는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후지와라노 나카노리(藤原仲範)의 발언, 《태평기》 권5 '사가미 뉴도가 덴가쿠와 투견에 빠진 일(相摸入道弄田楽並闘犬事)' 중에서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때, 요령성(妖霊星)이라 하는 악성이 내려와 재앙을 일으킨다 하였다. 더구나 덴노지(天王寺)는 바로 불법이 처음 일어난 영험한 땅인데, 쇼토쿠 태자께서 몸소 일본 한 주의 미래기(未来記)를 남기셨다. 그렇다 하면 그 미혹하는 자가 '덴노지의 요령성'이라 노래한 것도 괴이한 일이다. 실로 덴노지 주변으로부터 천하의 동란이 일어나 국가가 패망할 것을 깨우치려 함이다. 이제 국주(国主)[15]가 덕으로 다스리고 무가가 인을 베풀어 요사한 모의를 제거하는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후지와라노 나카노리(藤原仲範)의 발언, 《태평기》 권5 '사가미 뉴도가 덴가쿠와 투견에 빠진 일(相摸入道弄田楽並闘犬事)' 중에서
王家之恥, 何事如之哉? 天下静謐, 尤雖可悦, 一朝之恥辱, 又不可不歎
왕가의 수치가 어디 이와 같은 것이 있으랴? 천하가 평온해짐이야 매우 기쁜 일이라 하나, 하루 아침의 치욕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나조노 천황 신기(花園天皇宸記)》 겐코 원년(1331년) 별기 10월 1일조
왕가의 수치가 어디 이와 같은 것이 있으랴? 천하가 평온해짐이야 매우 기쁜 일이라 하나, 하루 아침의 치욕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나조노 천황 신기(花園天皇宸記)》 겐코 원년(1331년) 별기 10월 1일조
우리 나라는 왕종(王種)이 바뀐 적은 없지만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치세의 연수가 짧아지고 (황위가) 직계로 전해지지 않는 예를 여러 곳에서 기술하였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중권, 제52대/제29세 사가 천황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중권, 제52대/제29세 사가 천황
왕위를 떠나 석문(釈門)에 들어간 예는 지금까지도 많이 있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중권, 제59대/제34세 우다 천황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중권, 제59대/제34세 우다 천황
호겐, 헤이지의 난 이래로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무용(武用)이 중시되고 왕위(王位)가 경시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태평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명분에 걸맞은 올바른 행동이 문란해진 탓이리라. 헤이지의 난 이후 잠시 정국이 진정되었지만, 천황과 상황의 사이가 나빠졌다. 니조 천황의 외삼촌인 다이나곤 쓰네무네와 천황의 유모의 아들인 벳토 고레카타 등이 고시라카와 상황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상황은 기요모리에게 명하여 이들을 체포하고 유배보내 버렸다. 이후 기요모리는 천하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고 이윽고 태정대신이 되었다. 그 자식들도 대신, 대장이 되었으며 게다가 형제까지 나란히 좌우에서 대장에 올랐다. 천하의 구니의 절반 이상이나 헤이케 가령으로 만들고 많은 관위를 일족과 그 가신들이 독점하니, 왕가의 권위는 없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제78대 니조원(順徳院)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제78대 니조원(順徳院)
요리토모는 일신의 전력을 기울여 난을 평정하였다. 왕실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더라도, 수도의 전란은 진정되고 만민의 부담도 가벼워졌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폐제(廃帝)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폐제(廃帝)
메이지 유신 직전의 근세인 에도 막부만 놓고 보더라도 정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에는 승정(僧正)의 임명 규정을 정하는 14조에 「국왕」(国王)이라는 문언(文言)이 보이는데,
僧正【大、正、權】、門跡院家可守先例。至平民者、器用卓抜之仁希有雖任之、可爲准僧正也。但、國王大臣之師範者各別事。
승정(僧正)【대(大)、정(正)、권(權)】과 몬제키(門跡), 인케(院家)는 선례를 지킴이 가하다. 평민에 이르는 자까지 그 재주가 뛰어나고 두드러질 만큼 인하여 찾아 보기 드문 자로 임명하되 승정에 준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다만 국왕 대신의 사범(師範) 되는 자는 별개의 일로 한다.
18세기 후반에 성립된 금중병공가제법도의 주석서 『게이초 공가제법도 주석 전』(慶長公家諸法度註釈全)에는 국왕이란 「천자(天子, 즉 천황) ・ 쇼군」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승정(僧正)【대(大)、정(正)、권(權)】과 몬제키(門跡), 인케(院家)는 선례를 지킴이 가하다. 평민에 이르는 자까지 그 재주가 뛰어나고 두드러질 만큼 인하여 찾아 보기 드문 자로 임명하되 승정에 준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다만 국왕 대신의 사범(師範) 되는 자는 별개의 일로 한다.
일본 천황의 계보를 설명하는 저술도 남북조 시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처럼 황(皇)자를 써서 제목을 붙인 책도 있는가 하면, 에도 시대의 하야시 가호(林鵞峰)의 일본왕대일람(日本王代一覧, 1634년)처럼 왕(王)자를 사용한 책도 존재한다.
에도 시대 중기에 아라이 하쿠세키와 아메노모리 호슈 사이에 있었던 논쟁도 주목할 만한데, 대조선 외교에 있어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대군에서 일본국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에 대해 쓰시마 후추 번의 아메노모리 호슈는 '왕'이라는 단어에 가즈사나 히타치 같은 지역이나 방위명칭을 붙인다면 가즈사의 왕 또는 동쪽의 왕 식으로 그 지역에서나 행세하는 자칭 왕으로 허용해 줄 수 있지만,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일본의 왕'이라는 뜻이 되어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며 하쿠세키가 쇼군을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다. 하쿠세키는 쇼군이 대조선 외교에서 칭하는 '일본국대군'이라는 칭호에서 '대군'은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를 부르는 말인데 일본의 쇼군이 그럼 조선 국왕의 아들이란 소리냐며 엄연히 일본국왕으로 불러서 조선국왕과 격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에도 왕은 제후국의 군주라는 해석이 붙어 있긴 하지만, 아메노모리 호슈는 막부의 쇼군은 엄연히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당한 주권자인 천황으로부터 국가 권력을 위임받아 무력으로 통치하는 존재일 뿐이며 일본에서 '일본국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엄연히 교토의 천황뿐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토학에서 비롯되어 막부 말기 서양 세력에 맞서 천황을 일본의 '국부'로까지 격상시키고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해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의 대표적 슬로건이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 역시 '존왕(尊王)'의 대상 즉 왕을 '일본의 천황'으로 지목하였다. 존왕양이는 이후 글자 하나만 바꾸어 존황양이(尊皇攘夷)로 바뀌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존왕'이라는 단어나 왕이라는 단어 안에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의미가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에도 막부 말기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행한 뒤에 메이지 천황이 게이오 3년(1868년) 1월 3일 에도 막부와 기존의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삼직(三職)[16]의 설치로 천황이 중심이 되는 새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선언 역시 황정복고(皇政復古)나 제정복고(帝政復古)가 아니라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옛 막부군과 충돌하던 시기에도 신정부군, 즉 천황의 명을 따르는 군대를 가리켜 흔히 알려진 '황군(皇軍)'이 아니라 '왕사(王師)'라고 불렀다. [17] 흔히 알려진 '황군'이라는 단어는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퍼뜨린 것으로 신조어이며, 메이지 유신 뒤에도 신정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군을 '황군'이 아닌 중국의 고전에서 유구하게 '황제의 군대'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던[18] 용어인 '왕사'를 사용했다.
3.2. 일본의 식민지 지배 과거사 관련
몇몇 사람들은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 지배했으므로 천황을 일왕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리핀, 대만과 같이 한국처럼 일본 제국의 피해를 입은 나라들도 많은데 그들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격하해 부르지 않는다. 타 제국주의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등은 '러시아 황제'나 '독일 황제' 같은 표현은 전혀 거리낌 없이 쓰면서 일본 황제만은 '일왕'이라고 낮춰 부르는 것은 과도한 민족적 적대 감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다. 반대로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 한국 대통령을 소통령이라고 억지로 비하하지는 않는다. 또한 같은 논리로,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양제나 당태종도 수양왕 또는 당태왕으로 불러야 하는 비판도 나온다.#영국 제국주의는 혐성국 밈이 부각될 만큼 충분히 잔혹하였으며, 벨기에는 '손목국' 이라는 멸칭이 나올 정도로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 내 잔학 행위가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였는데 영국 국왕은 영국 공작으로 호칭할 것인지, 벨기에 국왕은 벨기에 공작으로 격하하여 호칭할 것인지, 또한, 미국은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냉전 시기에는 반공을 목표로 독재 정권을 쿠데타로 만들도록 후원했는데, 그럼 미국 대통령은 소통령으로 격하할 것인지,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 위구르, 홍콩 등에서 압제를 벌이고 있으니 '중국 주석'은 '말석'으로 격하해 부를 것인지, 독재를 강화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 대통령은 어떻게 호칭힐 것인지도 의문점이다.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으면 일왕이고 사죄와 반성을 하면 천황이라는 것은 억지 논리라는 비판도 있다. 사죄여부와 국가원수의 호칭을 격하하여 호칭하는 것은 어떠한 관련도 없을 뿐더러 물론, 다른 나라들과 피식민지국 사이의 관계가 한일관계 설명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겠지만,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았다고 군주의 격을 한층 떨어뜨리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도 자신의 육성 회고록에서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등감이라 비판한 바 있다.#
즉 세계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논리로 지배국가의 군주 칭호를 낮춰 부르는 조치는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 제국과 맞서 싸워 엄청난 수의 희생자를 낸 중화민국, 일제가 수탈했던 베트남 등 에서도 천황을 왜황이라고 일본 국가 자체를 비하할지언정 일왕으로 낮춰 부르지는 않는다. 즉 일본 제국이 식민지배로 수탈한 것과 천황의 격을 끌어내리는 것에는 어떠한 연결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일제 패전 이후 아키히토 전 천황은 굳이 극우적인 모습이나 지지를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식민지배에 유감이라는 표현을 보이는 등 상당히 온건하고 중립적이며, 현행 헌법의 천황 지위에 대해서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이나 혐한 등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걸 굳이 현재 딱히 제국주의적 자세를 보이지도 않는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는 의미없는 방법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3.3. 언론의 방송 보도상 용어로써의 '일왕'
국내 언론은 반일 감정이 늘어날 때마다, '일왕' 표기를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쇼와 천황의 사망과 조문 문제로 반일감정이 늘어나자 '일왕' 표기를 사용한 것이 그 예시이다. 또한 1998년 정부가 천황 호칭을 공식화함에 따라 일왕 표기에서 천황 표기로 바꾼 동아일보, MBC 등도 2000년대 이후 한일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되고 반일 감정이 증가하자 호칭을 다시 일왕으로 낮추어 부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참여정부 때에도 독도로 인해 영토분쟁이 발생하고 반일감정이 증가하자, '천황' 표기를 '일왕' 표기로 전환하려 했던 시도도 존재한다.국내 언론의 경우, 일본 황실 구성원 호칭에 대한 통일된 원칙은 없는지 '천황'을 '일왕'으로 부름과 동시에 '황태자' 역시 '왕세자'로 현지화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皇太子'를 유지하고선 '고타이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는가 하면(#[19]), '일왕'의 장남 '황태자'라는 괴이한(?) 서술도 있는 형편이다(#). 차라리 왕태자로 썼다면 모를까... 또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더라도 그 언론의 영문기사에선 국제 표준에 맞춰 '일본 황제(Japanese Emperor)'로 표기한다.[20]
3.4. 일본 황실 궁중용어 표기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게 되면 일본 황실은 왕실, 황후는 왕비, 황태자는 왕세자가 되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데, 천황 호칭에 딸려 있는 수많은 일본 고유명사 호칭도 덩달아 바뀌어야 하고 여기서 혼선이 야기된다. 일본은 따로 친왕과 왕 등 각각의 작위가 황실전범을[21] 통해 규정되어 있으며, 천황을 지칭할 때 '일왕'이란 단어를 일본인들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22] 여기에 '친왕/내친왕[23]', '왕/여왕[24]' 같은 일본 황실 용어들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난감해진다는 것이다.일본어 원문에서 천황과 황후, 황태자 등으로 표기 되어있는 것을 일일이 일왕과 왕비, 왕세자 등으로 격하하는 것은 경제성에도 떨어진다. 한국과 일본의 제도가 완벽하게 일치하지도 않으니 언론에 따라 표기도 중구난방이다.
거기에 '일왕'이라는 표현으로 천황이라는 존재를 대치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일본 극우파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를 외친 사건이 일어나면 한국 언론들은 "일본 극우파들이 '일왕 만세'를 외쳤다"고 보도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 주체가 한국인이 아닐 경우, 특히 일본인일 경우엔 일왕이란 표기는 영 어색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표현상의 문제이고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 개인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다.[25]
다만 현대 한국인 관점으로는 일본 황실에 대해 따로 교육을 받거나 관심이 없는 이상에야 의미 전달에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 친왕 문서에 보듯, 왕 작위의 개념에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왕'이라고 하면 일국의 지존이라는 이미지가 짙다. 천황(황제)과 왕을 황족 내부에서의 위계에 따른 호칭으로 보기보다는 일단, 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나라의 수장에 대한 칭호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 군주가 여럿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이 제후국 체제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바꾸는 게 언어 소통 면에서 명확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또한 한국어로 그대로 음차할 수 있는 일본 천황과 황족 작위들을 '왕'이나 '왕세자' 등으로 현지화하는 것이 언어의 경제성과 사회성을 모두 거스르는 것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황실을 설명할 때에 천황과 황후, 황태자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 언론에서 굳이 일일이 다룰 일이 거의 없는데 중요도도 인지도도 없고 언론 노출도 별로 없는 인물을 위해서 굳이 고유명사 표기를 따로 도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경제성, 사회성 모두에 대한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친왕이라는 용어는 현직 천황의 친자식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자식과 그 아들들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천황의 딸을 가리키는 내친왕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는 아예 쓰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26] 차라리 후미히토 '왕자'나 아이코 '공주'라는 표기가 후미히토 '친왕'이라는 고유명사 표기보다 더욱 쉽게 와 닿을 뿐 아니라# 고유명사 표기의 경우 전근대에는 천황이 정실 황후뿐 아니라 측실이나 궁녀로부터도 자식을 얻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러한 경우 정실 소생이냐 아니냐 또는 친왕선하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나아가 승려로써 출가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친왕/왕/법친왕 또는 내친왕/여왕으로 구별하거나 해야 할 필요가 일단 현재는 많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천황이 양위하는 경우 양위한 천황을 상황이라고 부르게 되지만, 여기서 또 출가하면 법황(法皇)이라고 부르는 용어가 따로 있고, 나아가 양위하고 출가까지 한 천황이 원정을 행하는 경우까지 있고 원정을 행하는 천황을 '치천의 군'이니 '원(院)'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보니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특수한 일본 역사에서의 복잡한 전개 및 환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천황/상황/법황/원정 등의 용어 사용은 불가피하며 필수적인 것이지만, 적어도 근현대 언론 보도에는 그럴 우려가 적다. 아키히토 천황은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치천의 군'도 아니고 승려로써 출가한 '법황'도 아니며, 현대 일본의 종친 중에도 승려로 출가한 '법친왕'은 없다.
천황을 일왕으로 격하한다면 왕(王)이 들어가는 여러 관직이나[27] 세습친왕가들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된다.
3.5. 중국의 한국 '총통' 표기와 비교
중국의 경우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천황/일왕 호칭 논쟁과 견줄 만한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한국을 포함해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의 국가원수는 대부분 공식 표기가 '대통령(大統領)'이고[28][29] 한국 역시도 국가원수를 대통령이라 공식 칭호이자 직함으로 정하고 있지만, 중국은 그런 걸 쿨하게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대통령'이 아니라 굳이 '총통(总统)'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세계의 다른 공화제 국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어, 한국에서는 미국 대통령(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러시아 대통령(Президент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독일 대통령(Bundespräsident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이라고 표기되는 지위가 중국 언론에서는 각각 '美利坚合众国总统', '俄罗斯联邦总统', '德國聯邦總統'인 것이다. 즉 '한국 대통령'은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한국 총통'이다.2013년 한중정상회담 때에도 인민일보 등 중국 언론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가리켜 '한국 총통'이라고 번역했지 '한국 대통령'이라고 번역하지 않았고#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총통'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고 총통 하면 히틀러부터 먼저 떠올리는지라 한국인들은 한국 대통령이 무슨 독재자란 말이냐 라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현행 중국어 위키나# 바이두 백과에서도# 심지어 외신의 중국어 번역에서도# 그러한 '한국(대한민국) 총통' 표기는 바뀌지 않고 있다. 중국뿐 아니라 대만도 이 점에서 차이는 없다. [30]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한다는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김대중 당시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 대선 당시 충남 지역 선거 유세를 앞두고
김대중 당시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 대선 당시 충남 지역 선거 유세를 앞두고
묘하게도 한국에서 총통이라는 단어는 '대통령'이나 '원수'에 비해 훨씬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한 뉘앙스의 단어로 쓰인다. ## 아무래도 당시 총통이라 소개되던 이들, 한국인들이 접한 '총통'들이 나치 독일의 '히총통' 아돌프 히틀러나, 36년 동안 에스파냐를 독재 통치했던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 그리고 1949년의 국부천대 이후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975년에 사망할 때까지 대만(자유중국)의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은 '종신총통' 장제스까지.[31] 김대중이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7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3선 개헌을 강행하면서까지[32]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을 두고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웃기게도 그때 한국 안에 신민당도 그렇고 공화당도 그렇고 '대통령'이나 '총통'이나 똑같이 미국에서도 쓰는 그 'President'의 이역(異譯)인 줄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지, 공화당에서도 "박정희가 당선되어도 총통제를 시행할 일은 없다"고 항변할 정도였다.
미국나 독일 같은 구미권이야 아예 언어 체계 자체가 다르니 그렇다 쳐도 일단 한자 문화권을 공유하는 한국에 대해서 한국에서 사용하는 표기대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을 것을 굳이 자기네 한자 표기대로 바꾸는 중국의 사례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한국내 일각의 주장처럼 일본에서 부르는 대로 일왕이 아닌 '천황'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맞다면, 마찬가지로 총통이나 대통령이나 어차피 'president'의 번역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총통'이라는 표기에 대해서 아무래도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있는 만큼, 미국 등 구미권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단 같은 동아시아권 국가로써 한국에 대해서는 '총통'이라고 부르기보다 한국에서 부르는 대로 '대통령'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맞다는 논리도 성립된다. 일단 일본 언론에서는 '총통'과 '대통령'을 분리해서 쓰고 있다. ##
하지만 총통과 대통령은 그 격의 높고낮음이 구별되는 황제-국왕과 달리 단지 President 의 번역어일 뿐이다. President의 일본식 번역어가 대통령이고 중국식 번역어가 총통인 것이다. 즉 한국에서의 일왕 표기는, 그 전까지 일황, 천황등의 표현을 잘만 쓰다 특정 기간에 반일감정이 증폭되며 나온 엄연한 격하의 의미이지만, 중화권에서의 총통 표기는 비하의 의미가 아닌 예전부터 사용하던 President의 번역어라는 의미이다. 한국에서 대만 총통을 대만 대통령이라 하여 비하가 아닌 이유도 이와 동일하다. 중화민국-대만의 국가원수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총통이라 표기했기 때문인 것이다.
3.5.1. 어휘에 대한 인식
3.6. '천황'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언론 보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1998년 국민의 정부#에서 '천황'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 외교석상에서 일본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하지만 대한민국이 헌법으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본인들에게 닥칠 후폭풍이나 발언 자체의 가부 논쟁 및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란 및 비판, 나아가 그로 인해 발언자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모든 패널티에 대한 각오를 하고서라도 뇌 필터를 거치든 말든 자기한테 달린 입으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떠들고 다니겠다는데야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 발언의 법리적 시시비비를 가려[33] 법으로 규정된 만큼의 패널티를 가하고, 또는 곱게 사회적으로 파묻어 줄지언정 발언하는 행위 자체를 무언가 법적으로 제재할 수는 없다.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1989년 당시 일본 천황인 쇼와 천황의 사망인데, 그 전까지는 일황 내지 천황을 쓰거나, 일왕을 쓰더라도 아주 드물게 썼음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천황을 지냈던 쇼와 천황이 사망하자, 일제시대가 평소에 비해 대폭 조명되고, 반일 감정이 증가했다. 이를 통해 일본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언론이 증가했던 것이다. 특히 정부가 98년에 천황 칭호를 공식 사용하기를 결정했을 당시, 문화일보나 MBC와 같은 몇몇 언론사들도 천황 표기를 사용했지만, 반일 감정이 증가할 때마다 일왕 표기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풍조는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조차 열등감이라 비판한 바 있지만, 일왕 표현을 언론에서는 계속 사용했다.
요컨대 천황이라는 표현이 전 세계적 그리고 국가, 정부 차원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해서 그것을 방송이나 저널리즘, 일반 시민들에게 강요하기는 어렵다. 이 또한 전 항목에서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자유에 맡길 문제이며, 그에 수반되는 비판 여론 역시 각자의 몫이다.
4. 결론
천황이라는 칭호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공식 칭호로, 학술 대회나 외교 석상에서 학술적인 견지 및 외교적 수사로서 사용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일본 국왕(일왕)이라는 칭호 역시 엄연히 역사성이 존재하는 용어어이기는 하나 이는 군주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이지,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 군주의 공식적인 명칭은 언제까지나 천황이었다.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특정 연도에 일왕이라는 표기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쇼와 천황의 사망 이후 천황의 장례식 조문 문제로 인해 일제강점기가 조명되며 반일 감정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는 횟수가 증가한 것이다. 즉 이는 역사적으로 군주를 국왕이라 부른 것을 감안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천황의 사망 등의 이유로 반일 감정의 증가에 의한 것으로 일본의 역사서에서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건 말건 관련이 없다.
5. 학술 용어로서의 '천황' 사용
한국어 말뭉치 물결21 코퍼스# 상에 '천황'을 입력해 보면 '천황'의 용례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일본의 천황뿐 아니라 치우천황이나 지리산 천황봉 혹은 고사성어 파천황 등도 중복되어 있으며, 시사 방송뿐 아니라 천황이라는 존재와 지위의 역사성을 추적한 학술 교양 서적에 대한 서평 기사도 공존하고 있다.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쓰는 '덴노'라는 표기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덴노를 천황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파라오’나 '카이저', '차르'처럼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바라보자는 근거를 곁들였다. 2012년부터 고등교과목으로 채택된 동아시아사는 천황이라고 써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를 다룰 때 '천황제의 확립'과 같은 표현은 일반적인 편이다. 물론 이쪽도 '일본의 고유명사', '일본식의 특이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에서 우리가 중국의 황제를 인정해서 황제라 하는 것이 아니고 고대 이집트 파라오를 애급의 애왕이라고 표기하지 않듯[34] 천황도 일왕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표기하고, 대신 그들이 천황이라 하든, 황제라 하든, 파라오라 하든, 카이저라 하든 우리는 왕으로 인식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즉 한자 뜻에 얽매이지 말고 현지에서 쓰는 고유명사로서 보자는 취지이다.
천황이나 일왕이 아니라 '일본 군주'와 같이 한국어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일반 명사 ‘군주’로 통일하자는 의견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영국 여왕 등 작위와 관련없이 군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실제 작위가 대공인 모나코 등 소국 군주도 한국에서 일반적으로는 군주라 부르기 때문이다.
한편 책에서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일왕'을 사용하는 책들도 있다. 일례로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에서는 천황을 사용했지만 Go Go 카카오프렌즈에서는 일왕을 사용했다.
[1] 이 당시 정부의 천황 호칭 공식 사용에 따라 MBC와 문화일보를 비롯한 몇몇 언론사들도 천황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2] 참여정부 때 독도 분쟁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3] 실제로도 1989년부터 일제시대를 다룬 사설이나, 기사가 많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일본, 대만, 북한, 중국 등[5] 애초에 근본적으로 이런 논지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애초부터 상대국의 군주를 호칭할 때에는 상대국 스스로 자국의 군주를 자칭하는 표현에 기반한다. 표현의 지위상의 위계를 떠나서 일본이 천황을 황제(Emperor)로 자칭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그렇게 칭해야 한다는 것이지, 일본을 우대하려는 의도에서만 비롯된 주장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리이다. 실제로 국왕(King)과 황제(Emperor)은 단순히 수직적 위계관계가 아니라 엄밀히 구분되는 표현이었으며, 일례로 인도를 통치하던 시절 영국은 로마 제국과 관련된 역사적 문제 등으로 '영국의 황제'를 자칭하지 않았으며, 인도 제국의 황제를 따로 만들어서 '인도 황제'만을 자칭했다. 따라서 영국 국왕은 영국의 국왕(King)인 동시에 인도의 황제(Emperor)였으며, 당연히 자국의 군주를 국왕(King)으로 자칭했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영국의 황제' 로 칭하지도 않았으며, 이는 당연히 영국 국왕을 비하하고 격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천황이니 국왕이니 하는 호칭은 모두 해당국에서 스스로 선포한 호칭에 기반하는 것이지, 격상이나 비하의 의미로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왕을 국왕이라 부르고 천황을 천황이라 부르는 것을 놓고 '일본 천황을 천황으로 칭하고 나머지 국왕을 국왕으로 부르는 것을 일본만을 칭송하고 나머지 국가를 싸그리 비하하는 의미'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며 '일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우며, 오히려 이런 주장이 도리어 황제-국왕 호칭 간의 위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했다고 볼 수도 있다.[6] 일본은 다이카 개신 이후로 많은 문물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받아들인 문물을 자기 스스로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등, 섬이라는 이점을 잘 활용하여 대륙과 가까워 중국 왕조와의 교류와 간섭이 많았던 한국사의 왕조와는 달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중국과 한국과는 다른 일본만의 세계관과 문화를 발전시켰다.[7] 고조선의 군주도 원래는 조선후였지만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칭왕했다.[8] 황제라는 단어가 완전히 정착하기도 전인데다가 진나라가 오래가지도 못해 진나라 이후에도 황제라는 단어가 쓰일지는 알 수 없었다. 이는 두번째 중국 통일왕조인 한나라가 황제 칭호를 쓰며 본격적으로 황제 칭호가 천자의 칭호로 정착하면서 황제란 곧 천자가 되었다.[9] 당연하게도 왕이라는 단어가 황제보다 더 먼저 나올 수밖에 없다. 황제란 왕들의 왕, 즉 왕중왕이라는 뜻인데 당연히 왕이라는 개념이 전제되야 황제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10] 일본이나 베트남의 칭제건원은 중국과의 교류 정도만 왕(王)을 사용했지, 국내의 정식 시호는 천황과 황제였으며, 연호도 독자적으로 사용한 기간이 상당히 길었고, 칭제건원도 단발성에 그친 것이 아닌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한국사 왕조의 경우에는 칭제건원을 하더라도 특정 군주의 치세에만 사용했다거나, 비공식적이고 단발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황제국으로 여기지 않는다.[11] 여기서 구주는 일본 규슈가 아니라 '전 국토'라는 의미를 담은 관용어이다.[12] 8월.[13] 구란도노토(蔵人頭).[14] 중국의 고전인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나오는 "하늘에 두 해는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天無二日, 土無二王)"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순(삼황오제) 항목 참조.[15] 국왕(国王)으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16] 오다 노부나가 항목에서 나오는 삼직 즉 태정대신, 정이대장군, 관백이 아니라 총재(総裁), 의정(議定), 참여(参与)를 말한다.[17] 『세 천황 이야기』(야스다 히로시 지음, 하종문·이애숙 옮김, 2009, 역사비평사) 참고[18] 이미 상나라에서 갑골문에도 나올 정도니 역사가 거의 3천 년을 넘어간다.[19] 해당 기사에선 '상황', '상황후', '황사' 등도 모두 '상왕', '상왕비', '왕사'로 일률 조정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上皇', '上皇后', '皇嗣'로 해 두고선 각각에 '조코', '조코고', '고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었다. 한자 표기를 사실상 일본식 호칭 전용으로만 쓴 셈이다.[20] 예제 1예제 2[21] 심지어 한국에서는 이것도 왕실전범이라고 하기도 한다.[22] 일왕이라는 표현은 일본인들이 자기네 군주를 격하해 부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한자문화권인데다가 날 일(日) 다음에 임금 왕(王)자가 붙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물론 천황이라고 쓴 책들도 많고 나무위키나 위키백과 등 인터넷 자료에서도 천황이라고 부르므로 다양한 자료들을 보면 오해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리고 애초에 일왕은 '일본 (국)왕'의 줄임말일 뿐이지 그 자체가 고유명사조차 아니다. 미국 군대를 '미군'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과 같은 용법이다.(현지 표기도 United States Armed Forces 이지 U. S. Armed Forces 같은 줄임말이 아니다.) 공수처의 정식 명칭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고 그걸 편의상 줄여서 '공수처'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보도가 한국인을 위주로 작성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23] 천황의 손자/손녀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했다.[24] 천황의 증손자/증손녀부터는 왕/여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25] 경향신문의 박용채 기자는 2008년 당시 일본 황실에서 한창 벌어지던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와 일본 황실(정확히는 궁내청 안의 우익 세력) 사이의 알력을 보도하면서, 기사 전체상에서는 '일왕', '왕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기사 안에서 거론하는 하케다 신고 궁내청 장관 등 일본측 인사나 일본측 언론의 발언, 보도를 따옴표 처리로 전하면서는 '폐하', '황태자', '천황'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살리는 괴이한 번역을 한 바 있다. 본 기사 안에서 박용채 기자가 사용한 '주상'과 '동궁'은 일본 공식 매체 및 언론에서 버젓이 천황과 황태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는 용어다. #[26] 중국에서도 내친왕이라는 용어는 공주라는 용어에 밀려 완벽하게 사장됐다.[27] 율령제하의 일본에서 2관 8성중 하나이고 국가 제사를 담당하던 신기관의 장관인 신기백을 세습하던 가문인 시라카와 백왕가(白川伯王家)는 현직 신기백에 한해 '왕'의 칭호를 쓸 수 있는 권리를 누렸다.[28] 물론 이것도 한국이나 일본 안에서나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는 하다.[29] 한국의 사학자 전우용은 일왕 표기를 비하, 격하라고 보는 주장에 대해 '중세적 사고방식'이라며 'President'라는 영어를 '대통령'으로 번역한 것은 일본에서였고, 그 의식 자체에 미국의 President를 일본의 천황(Japanese Emperor)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이런 의도를 가지고 호칭을 문제삼을 거면 '대통령'이라는 호칭부터 문제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 하지만 이러한 전우용의 발언까지도 "이런 걸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람들이 '일왕' 표기를 격하 표현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일왕은 천황의 다른 표기일 뿐'이라는 중립적이고, 비하 의도 없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반론할 이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30] 참고로 중화권은 아돌프 히틀러의 직책인 퓌러를 '원수'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한국어 문장에서 '대통령에서 총통으로 바뀌었다'는 중국어에서는 '총통에서 원수로 바뀌었다'라고 번역해야 자연스럽다. 대통령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미 총통을 두고 있기 때문. '총통'과 달리 '원수'는 한국어에서 독재자라는 이미지는 지니고 있지 않다.[31] 물론 현재의 대만 총통제는 결코 독재국가의 그것은 아니지만, 국부천대 이후 '총통' 장제스가 대만에서 벌인 행위는 명백한 1인 종신독재이자 반민주적 폭거였으며, 한국에서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부른 것과 달리 그 시절의 대만은 전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장제스가 사망하고도 21년이나 지난 1996년에야 대만에서는 총통 직선제가 시행되면서 국민당에 의한 1당 독재가 막을 내렸고# 이는 한국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이루어진 9차 개헌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전환하고 9년 뒤의 일이다. 9차 개헌으로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기 3개월 전인 1987년 10월에야 대만에서는 장제스가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풀지 않았던 계엄령이 38년만에 그의 아들에 의해 해제됐다.[32] 박정희는 제5대, 제6대 대통령을 연임했다.[33] 예를 들면 명예훼손이라든가 허위 사실 유포라든가.[34]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식민지 조선의 신문이나 근현대(1995년) 신문에서도 이집트 국왕을 '애급왕'/'애왕'으로 표기한 전례가 존재하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