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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야구장

도원구장에서 넘어옴
파일:도1전경2.png
<colbgcolor=green><colcolor=white> 숭의야구장
Sungui baseball stadium
별칭 인천야구장, 도원야구장
약칭 인천
개장 1934년 (원 완공일)
1964년 (확장 공사 완공일)
폐장 2008년 9월 5일
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 7
홈 구단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5)
청보 핀토스 (1985.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 (1996~1999)
SK 와이번스 (2000~2002)
SK 와이번스 2군 (2000, 2006~2008)
최초의 프로 경기 1982년 7월 17일
MBC 청룡 VS 삼미 슈퍼스타즈
최후의 프로 경기 2002년 6월 9일
현대 유니콘스 VS SK 와이번스
크기 좌우 펜스 91m
중앙 펜스 110m
펜스 높이 4.5~7m[1]
잔디 천연 잔디 (1934~1995)
인조 잔디 (1996~2008)
좌석 규모 12,000석

1. 개요2. 특징3. 역사
3.1. 프로야구 이전3.2.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시절(1982~1995)3.3. 현대 유니콘스 시절(1996~1999)3.4. SK 와이번스 시절(2000~2002)3.5. SK 와이번스 2군 구장 시절(2000, 2006~2008)3.6. 남긴 기록3.7. 철거
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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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인천 공설야구장 1985년.jpg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의 1985년 모습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에 있었던 야구장. 2002년 문학야구장이 개장되기 이전까지 인천에서 사실상의 정식 야구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유일한 경기장이었다. 여담으로 모든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2]이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유일한 야구장이다.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자락의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인천야구의 역사가 시작됐다면, 숭의야구장은 해방 이후 인천고동산고가 주도했던 인천 야구의 전성기와 삼청태로 대표되는 인천 프로야구의 암흑기를 거쳐 현대 유니콘스첫 우승연고지 이전의 쓰라림, 꼴찌로 시작된 SK 와이번스의 초창기를 모두 지나쳐 간 인천 야구 역사의 1.5~2세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2. 특징

파일:1159341_446173_3844.jpg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 외야 펜스의 1988년 모습.
콘크리트 펜스 위에 덧대어진 철망 펜스였다. 1.5m 높이 콘크리트 펜스 위에 3~6m 높이의 철망 펜스를 덧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뜩이나 그라운드의 규모가 좁은 상황에서 추가 확장이 불가능했던 경기장 여건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심각하게 빈약했던 인천 연고 구단의 전력 때문이었다.

숭의야구장은 펜스를 뒤로 밀거나 그라운드를 확장할 수 없는 구조였다. 과거 숭의종합경기장 주변 항공사진을 보면 좌중간 쪽의 관중석 외벽이 옛 공설운동장 주경기장과 벽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기에[3] 주경기장을 부수지 않고서는 야구장의 확장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펜스 위에 철망이 없는 상황에서 좌우 91m-중앙 110m의 그라운드 규모라면 홈런이 숱하게 양산돼 투수들의 무덤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홈플레이트부터 왼쪽 담장까지 극단적으로 좁은 거리를 높은 철망에 의지했던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처럼 펜스 위에 철망을 높이 올렸다. 타구 궤적상 홈런이 될법한 타구가 철망에 맞고 2루타나 단타로 둔갑하는 경우가 왕왕 나왔던 것도 이 철망 때문이다.

철망 펜스의 높이는 구단의 입맛에 따라 달라졌다. 철망이 가장 높았던 시절은 김성근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하던 때였다. 이 당시 태평양은 양상문, 최창호, 박정현, 정명원 그리고 1994년 이후의 정민태, 김홍집, 최상덕, 위재영 등 초특급 투수들이 샘솟듯 등장할 정도로 우월했던 투수력에 비해 타력이 심각하게 허약했기에 호쾌한 홈런을 기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당시 홈런을 기대할 만한 타자라고는 김동기 뿐이였으며 1990년대 이후 김경기 까지 이렇게 두 명뿐이었고 타자다운 타자도 KK포 (김경기-김동기) 에 윤덕규, 이선웅을 더한 정도가 다였다. 나머지 야수는 그저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는 것에 의의를 둘 정도로 타격 실력이 형편없었다.[4] 장타력은 둘째치고 컨택조차도 힘들었던 선수들이 유독 태평양에 많았기 때문에 태평양 투수들이 상대팀에게 3점 이하만 내주고도 패한 경기가 수두룩했고 0-1 완투패를 당하는 경우까지도 종종 있었다. 결국 김성근은 "어차피 치지 못할 홈런, 맞지도 않겠다"는 전략을 내세워 철망 높이를 6m까지 높여버렸다. 아랫쪽 콘크리트 펜스의 높이까지 합한다면 무려 7.5m가 되는 셈. 이 전략이 효험을 본 것인지 김성근의 취임 첫 해인 1989년 태평양은 창단 첫 준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쾌거를 넘어 플레이오프 진출의 대성과를 냈다.[5]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들어온 박영길 감독은 빅볼을 표방하며, 철망 높이를 5m로 낮추면서 전체 펜스 높이를 6.5m로 바꾸었다. 그러나 박영길의 타격 이론을 흡수할 만한 장타자가 없었던 태평양의 타선은 별 차이 없는 성적을 거두었고, 오히려 피홈런만 두배 이상 증가하며 태평양 암흑기의 원인이 되었다. 1996년 팀 간판을 현대 유니콘스로 바꾼 김재박 감독 시절에는 철망 높이를 3m로 대폭 줄여 전체 펜스 높이를 4.5m로 최종 조정했다. 그래도 좁은 그라운드의 한계는 감당이 안 되었는지 해태나 삼성같이 타력이 강한 팀과는 당시 제2 홈구장이자 숭의야구장보다 규모가 훨씬 컸던[6] 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자주 치렀다.

이 경기장은 프로야구 경기장으로도 많은 기록을 세웠지만, 인천에서 야구를 배우고 선수로 성장한 야구인에게는 동대문야구장급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특히 인천 지역의 수많은 학생 야구선수들은 동대문에서 열리는 고교야구대학야구 전국 대회에 출전하려면 무조건 이 곳에서 지역 예선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인천 출신 야구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학창시절의 성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인천 야구의 대부인 박현식 선생이나 김진영 선생부터 1980~90년대 야구 스타였던 임호균, 양승관, 김경기, 정민태, 송지만을 거쳐 오늘날 류현진, 이재원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리그에서 이름을 알린 인천 출신 스타들에게 숭의야구장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3. 역사

3.1. 프로야구 이전

파일:인천 공설운동장 야구장 1966년.jpg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의 1966년 모습.
1920년 인천공설운동장이 완공된 후 1934년에 야구장이 건립되었다. 한동안 인천고등학교 야구부동산고등학교 야구부 등 인천·경기지역의 아마야구 팀들을 위해 쓰이다가 인천에서 처음 열리는 전국체육대회를 맞아 1964년에 새롭게 단장했다.

그 뒤 프로 출범 전까지는 아마야구 위주로 야구장이 쓰였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동대문야구장과 함께 보조구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흔히 "도원야구장"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야구장이 도원동에 위치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94년에 개통된 수도권 전철 1호선(경인선) 도원역의 명칭도 도원역이 되었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 당시 대부분의 인천 시민들은 ‘공설운동장’으로 불렀다. 이후 야구장과 주경기장을 아우르는 이름이 숭의종합경기장으로 명명됨에 따라 숭의야구장으로 불리게 되었다.[7]

정식 명칭은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이었는데 이 당시 세칭은 '인천구장'으로 주로 불렸고 문학경기장 개장 이후 도원야구장, 숭의야구장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3.2.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시절(1982~1995)

파일: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 1982년.jpg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의 1982년 모습.
1982년 KBO 리그 출범과 함께 인천·경기·강원 연고 구단의 주 홈구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후술하게 될 보수 공사로 인해 3월 개막 이후 3개월여가 지난 1982년 7월 17일에서야 처음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첫 번째 프로야구 홈경기가 열리면서 인천에도 프로야구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인천 팬들은 대한민국 야구의 발상지이자 1950~1970년대 한국야구를 호령했던 야구의 도시가 인천이었던 만큼 과거의 영화를 안고 야심차게 창단한 인천 연고 구단이 화끈한 플레이로 팬들을 매료시켜 주길 바랐으나 현실은 달랐다. 과거의 영광은 그저 과거였을 뿐이었고 이 곳을 홈으로 쓰던 인천 연고 구단은 이 경기장에서 처절한 패배의 쓴맛만 들이켜야 했다. 오히려 화끈해진 것은 관중석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응원하던 열혈 팬들이었다. 그라운드로의 오물 투척과 그물 타기는 거의 매일 있는 일이었고 때로는 관중석 의자와 쓰레기통이 땔감으로 전락하고 야구장 입구에서 선수단 버스를 막고 연좌농성을 벌이는 일까지 종종 있었다.

어쨌든 이 경기장을 홈으로 삼았던 삼미, 청보, 태평양이 모두 리그 평균 이하의 전력과 성적을 낸 탓에 다른 경기장과 달리 가을잔치의 영광을 많이 누리지는 못했다. 이 경기장에서 포스트시즌이 치러진 것은 20번의 시즌 동안 딱 4번에 불과했다. 1989년, 1994년, 1996년, 1998년. 그래도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 곳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만년 꼴찌 시절부터 숭의야구장을 지키던 팬들을 환희의 눈물에 젖어들게 했다.

3.3. 현대 유니콘스 시절(1996~1999)

파일:도원구장 1998년.jpg
숭의야구장에서 열린 1998년 한국시리즈 6차전 종료 후 관중들 앞에서 우승 퍼레이드를 하던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
1995년까지 존재했던 숭의야구장의 연고 구단은 상대적으로 모기업들이 가난했다. 그러나 1996년 태평양을 인수하면서 새롭게 프로야구에 뛰어든 현대그룹은 당대 최고의 재벌이었다. 국내 최고의 재벌이 운영하는 구단답게 숭의야구장은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현대가 태평양 구단을 인수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숭의야구장 개보수였다. 먼저 비만 조금 오면 경기를 치를 수 없던 배수 시설을 완전히 뜯어 고치고 잔디보다 모래가 더 많아 흉해보였던 외야 그라운드에 인조잔디를 깔았다. 다만 내야 그라운드까지 전부 걷어내고 인조잔디를 깔기에는 기간이나 비용 측면에서 다소 무리가 있어서 기존의 내야 그라운드는 두고 외야에만 인조잔디를 깔았다. 참고로 숭의구장은 프로 초창기에도 외야 잔디의 질은 인정받았으나 1980-1990년대 초반의 열악한 지원 환경과 관리주체인 인천시의 무관심 탓에 외야 그라운드에 흙이 많이 노출되었다.

1996년 경기 장면과 1997년 이후의 경기 장면을 보면 그라운드 흙 색깔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인조잔디 설치 직후 내야 흙은 산뜻한 황토였다가 1997년부터는 배수성이 좋은 회색 화산석 흙을 일본에서 수입해서 깔았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구장 광고판과 전광판의 변신. 천연색의 내외야 광고판이 난무하던 국내 야구장에 처음으로 녹색배경의 노란색/흰색 글씨의 외야 펜스 광고를 도입했다.[8] 구장은 낙후했으나 방문한 관중들에게 색다른 산뜻함을 제공하였다.
파일:숭의올드전광판.png
파일:숭의NEW전광판.png
1994년 숭의야구장의 전광판 1998년 숭의야구장의 전광판
1996년 구장 개보수 과정에서 전광판 주변의 콘크리트를 검은색으로 덧칠했고 1998년부터는 전광판 가운데 부분에 애니메이션 상영이 가능하도록 4색 이미지 전광판을 도입하도록 고쳤다.[9]
파일:도원 중앙석.jpg
파일:도원 3루.png
숭의야구장의 중앙 지정석 숭의야구장 3루 내야 관중석
파일:숭의야구장 변소.gif
숭의야구장의 화장실(왼쪽)과 광주 무등야구장의 화장실(오른쪽)
관중석도 새단장하긴 했지만 새롭게 단장해 봤자 너무 낙후되어서 그리 티가 안 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이 구장의 화장실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비좁고 낡고 더러웠다. 결국 현대 시절에 화장실 수리를 했음에도 태생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던지라 옛 고속도로 휴게소나 훈련소 야외 교장에서나 볼법한 뻥 뚫린 수세식 소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작은 규모라서 그런지 구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소위 '개구멍'이 있었으며, 심지어 구장 벽을 타고 올라가 구장에 출입했다는 도시전설이 있기도 하다. 거기에 야구장 주변의 높은 건물 옥상에서 공짜로 경기관람을 하던 팬들이 있기도 했다. 이 팬들이 주로 찾던 곳으로는 우측 펜스 뒷편 광성고 쪽 언덕배기, 중앙여상 건물 옥상, 학교 옆 제2장로교회, 인천도원체육관 등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성고에서 당직을 서던 교사들은 야구를 공짜로 보기 위해 학교 운동장으로 침입한 불청객들을 쫓아내는 일들을 해야 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3.4. SK 와이번스 시절(2000~2002)

파일:도원야구장 SK2.jpg
파일:도원구장 SK.jpg
파일:도원야구장 SK1.jpg
2001년 SK 와이번스의 숭의야구장 홈 개막전[10]

현대 유니콘스서울연고지 이전을 발표하고 야반도주한 뒤에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SK 와이번스는 이 구장에서 2000년 4월 8일 한화 이글스 전을 시작으로 홈경기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이후 한화 이글스가 막장 투수진을 가지고도 깨지 못한 기록이 있는게, 그게 피홈런 기록이다. 2000년 195피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때 인천에서 115피홈런을 기록했다.(원정 80) 홈경기 115피홈런도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 얼마나 친 타자 구장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 그러나 광주의 234홈런[11]을 깨지는 못했다. 당시 SK 타자들이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를 제외하면 모두 막장이었다.
파일:도원구장 마지막경기 고화질.jpg
2002년 숭의야구장 프로야구 고별전

2002년 초 문학 야구장이 완공되어 그 해부터는 문학 야구장을 새로운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으나 월드컵과 일정이 겹쳤고 인천문학경기장 전체가 보안구역으로 설정되는 바람에 혼잡 방지를 위해[12] SK가 숭의야구장을 쓰기로 하여 정규리그 홈경기 중 6경기를 숭의야구장에서 치렀다. 그 중 마지막 경기인 2002년 6월 9일을 끝으로 더이상 이 경기장에서는 프로야구 1군 경기는 열리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열린 1군 홈경기 상대팀은 1996년부터 4시즌간 이 경기장을 홈으로 썼던 현대 유니콘스였고 연장전 접전 끝에 10-9로 현대가 승리했다.[13]

2002년 고별전이 끝난 뒤에는 무등 야구장처럼 1군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관중들이 경기장에 들어 올 수 있게 하였다.

시범경기로 폭을 넓히면 2004년 3월 14일에 열린 롯데와의 시범경기가 마지막 경기였다. # 그 뒤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SK 와이번스 2군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여담으로 SK 구단은 이 경기장에서만 2001년, 2002년, 2004년까지 세 번에 걸쳐 이 경기장에 대한 고별 행사를 진행했다. 이 경기장을 홈으로 쓴 마지막 시즌인 2001년에는 마지막 홈경기가 끝난 뒤 다음해부터 문학구장으로 홈구장을 옮기기 때문에 "새로운 시즌 문학야구장에서 만납시다"라는 메시지가 적힌 고별 현수막을 들었고 2002년에는 진짜로 이 경기장에 더 올 일이 없었다고 생각해서 고별 행사를 치렀다. 2004년은 원래 문학구장에서 시범경기를 전부 치를 생각이었으나 숭의야구장의 철거가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지역사회 내에서 퍼지면서 "마지막으로 이 경기장에서 인천팀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팬들의 민원에 SK 구단이 수긍하면서 3월 14일 경기에 한해서만 숭의야구장에서 경기를 치렀다.

3.5. SK 와이번스 2군 구장 시절(2000, 2006~2008)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되어 한 시즌 동안 1군 경기가 없을 경우 2군 홈구장으로도 사용되었다. 2001년 용현동 드림파크가 완공된 후에는 2군을 용현동 SK 드림파크로 이전했다가, 2006년 용현동 일대 재개발로 SK 드림파크가 철거된 뒤에는 다시 숭의야구장을 철거 직전까지 2군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파일:도원 전광판.jpg
2006년 당시 전광판. SK 와이번스가 도원을 떠나고 나서 개보수가 잘 없었기 때문에 전광판도 노후할 때로 노후되었고, 등판한 투수를 띄우는 중앙 전광판은[14] 고장으로 표시되지 않으며, 라인업 명단의 밝기는 낮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2루심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고장난게 아니라 당시 2군 경기가 3심제였기 때문. 자세히 보면 나중에 1군에서 이름을 보인 선수들도 꽤 찾아볼 수 있는데, 기아에는 류은재(당시 류재원), 심재학, 송산, 최훈락, SK에는 조동화, 김형철, 이재원, 임훈, 양승학[15], 김재현, 홍명찬, 김성현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철거 후 SK 2군은 시즌 종료까지 홈경기 없이 원정 경기만으로 시즌을 치르다가 이듬해부터 송도LNG야구장을 이용했다.

3.6. 남긴 기록

초창기 숭의야구장의 홈 구단인 삼미, 청보, 태평양은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경기장에서 부진한 기록을 적지 않게 양산했다. 물론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초특급 기록도 간혹 탄생했다. 예를 들어 밑에서 후술할 임호균의 최소투구 완봉승 등의 기록이 그렇다. 더불어 KBO 리그 최초의 기록이 숱하게 탄생한 기록의 산실이기도 하다.

3.7.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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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인천광역시의 도시재생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 지역이 재개발 대상이 되자, 한국 야구사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숭의야구장은 옆의 숭의종합운동장과 함께 철거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숭의 아레나 파크라는 축구전용구장으로 변신해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홈구장으로 활용 중이다. 2013년 이후 건설경기 불황으로 주상복합 건설은 지지부진하다 도원서희스타힐스라는 지역 주택조합 아파트로 변경되어 2016년 8월 분양에 들어가 2017년 6월 조합 설립인가가 완료되었고 2020년까지 주상복합아파트 47층 7개 동 오피스텔 1동을 건설할 예정이다. 2017년 10월에 공사를 준비 중이다.

인천광역시는 숭의야구장 철거 과정에서 인천 지역 아마야구 대체 구장 마련을 약속했는데, 인천대공원 근처에 짓는다는 말만 있을 뿐이다. 대체구장이라고 지은 것이 바다 한가운데 LNG 기지에 지은 것이다. 거기다 2019년 12월 말까지 된 계약 기간이 지나면 철거하고 물류창고를 만든다고 한다. 물론 대체 야구장 10곳을 조성한다지만 2곳을 제외하곤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그 사이 SK 와이번스강화군 길상면에 SK 퓨처스 파크를 지었지만, 숭의야구장의 대체 경기장과는 무관하다.

야구장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숭의야구장의 흔적은 도원역에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앞 썬큰광장으로 이어지는 지하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건축 과정에서 철거된 야구장의 옛 의자와 덕아웃 등 일부를 보존해 별도 공간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역대 인천 연고 야구단의 역사도 기록하고 있다.

4. 여담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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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역사역대 시즌실업 현대연고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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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역대 주장역대 1차 지명 선수사건 사고암흑기
세부 정보 선수단등번호유니폼재계 라이벌 시리즈
경기장 숭의야구장(1996~1999)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2000~2007)원당 야구장(제2 홈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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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문서
핵심 인물 구단주 정용진대표이사 김재섭단장 김재현감독 이숭용2군 감독주장
구단 세부정보 SK 와이번스(2000~2021) | SSG 랜더스(2021~)
경기장 1군 인천 SSG 랜더스필드2군 강화 SSG 퓨처스필드
이전 경기장: 숭의야구장 | SK 드림파크 | 송도LNG야구장
건설 예정 경기장: 청라 돔 야구장(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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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프로야구단의 시작! SSG 랜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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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펜스가 낮아 여기에 철망을 덧댄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철망의 높이는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자세한 사항은 아래 특징 문단 참조.[2] 현대 유니콘스(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SSG 랜더스(SK 와이번스)[3] 과거 숭의구장에서 열린 경기 장면을 보면 좌중간 쪽에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나 저축추진중앙협의회의 캠페인 문구 간판이 붙어 있다. 사실 이 간판은 야구장 내벽이 아닌 주경기장 외벽에 부착된 것인데 두 경기장이 워낙 가깝게 붙어있다보니 야구장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4] 태평양의 암울했던 타선을 상징할 만한 이들을 꼽으라면 구단의 최전성기였던 1994년 한국시리즈 당시 키스톤 콤비김성갑염경엽. 1994년 김성갑의 타율은 0.237 염경엽의 타율은 0.212였다.[5] 김성근 감독은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에도 똑같은 전략을 쓰게 된다. 이 당시 쌍방울에도 장타력을 갖춘 김기태심성보 정도를 빼면 죄다 컨택 위주의 타자들만 즐비했기에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의 펜스를 숭의야구장과 비슷한 형태로 바꿨다. 전주구장도 숭의구장과 마찬가지로 홈플레이트에서 중견수 쪽 담장까지의 거리가 110m에 불과할 정도로 작았고 콘크리트 펜스 높이가 2m 남짓에 불과했다. 과거 전주구장이 해태 타이거즈제2 홈구장으로 사용되던 시절의 영상을 보면 콘크리트 펜스 위에 별도의 철망이 없었다.[6] 1999년 김재박 감독의 요청으로 홈에서 펜스까지의 거리를 5m씩 줄이기 전까지 수원구장은 좌우 100m-중간 125m, 펜스 높이 4m로, 잠실과 크기는 같으면서 펜스는 더 높았던 초대형 야구장이었다.[7] 1964년, 1978년, 1983년, 1999년 전국체전을 치른 주경기장의 주소지는 실제로도 숭의동이었다. 인천공설운동장이라는 명칭이 숭의종합경기장으로 변경된 것은 2002년 초 문학동에 새로운 종합운동장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비슷한 사례가 부산에도 있다. 사직 야구장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인접한 경기장임에도 주소지가 확연히 다르다. 야구장은 동래구 사직동에 있고 주경기장은 연제구 거제동에 있는데, 사직 야구장의 역사와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탓에 주경기장도 사직동에 있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야구장과 주경기장을 뭉뚱그려서 부르는 통칭도 '사직운동장'이다.[8] 1996년 후반부터는 다시 천연색 광고판이 등장하긴 한다. 백스톱 광고판은 잠실에서 이미 녹색배경의 노란색 광고판을 운영했었다.[9] 전광판 하단의 광고는 자주 바뀌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전광판 밑 공간에 삼성전자의 삼성VTR 광고판이 붙어있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 태평양생명의 광고가 붙었으며 현대 인수 이후에는 구단의 최대주주였던 현대전자의 광고판이 붙었다.[10] 참고로 이 경기의 입장권은 모두 매진되었다. 특히 SK 와이번스 창단 이후 첫 번째 홈구장 만원사례였던 한편 구단 역사상 숭의야구장에서 달성한 유일한 만원사례였다.[11] 2017년 144경기 체제에서 SK 와이번스가 친 홈런 수와 동일하다. 참고로 당시에는 133경기였다.[12]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강원 FC도 홈구장이던 강릉종합운동장이 올림픽 보안구역으로 설정되는 바람에 강릉운동장 대신 평창 알펜시아경기장춘천송암스포츠타운 주경기장을 홈으로 써야 했다.[13] 이 일정은 우천취소 재편성 경기가 아니었고 시즌 경기 일정이 모두 나온 뒤에 문학경기장을 못 쓰는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현대가 숭의구장의 맞상대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우연의 일치라는 이야기. 이 경기장 외에 마산 야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1군 홈경기 매치업은 KBO가 의도적으로 NC 다이노스롯데 자이언츠의 대결로 잡은 바 있다.[14] 파일:숭의야구장중앙전광판.png[15] 이 사진이 찍힌 2006년에 1군에서 딱 한 타석 등록된 것이 SK에서의 마지막 1군 활약이었다. 이후 2008년에 방출되고 2009년에 한화에서 잠시 뛰었지만 부상으로 방출되었다.[16] 참고로 1982년 후기리그에서 삼미가 거둔 성적은 40경기 5승 35패, 승률 0.125였다. 물론 KBO 리그 사상 기별 성적으로는 최악의 기록.[17] 이는 삼미에게만 해당된 얘기는 아니어서 다른 팀들 역시 '특별 홈경기' 명목으로 다른 지역에서 경기를 치렀다. 단적인 예로, 박철순이 연승 행진을 22연승에서 마감한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는 잠실구장에서 열렸는데, 이 경기의 홈 구단은 롯데였다. 참고로 당시 OB의 연고지는 서울이 아닌 충청도였다.[18]건국대 감독. 'SF볼의 마술사'로 불렸으며 해태 타이거즈LG 트윈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19] 재일교포 출신의 언더핸드 투수.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를 거쳐 LG 트윈스에서 은퇴했다.[20] 참고로, 차동철김신부는 나중에 LG 트윈스에서 한팀으로 만나서, 1990년에 우승을 경험했다.[21] 현대의 91승은 16년간 독보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었지만 두산 베어스가 2016년 9월 28일 대전 한화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91승을 기록해 타이기록이 됐다. 그 후 2승을 더 기록해 KBO 리그 한 시즌 팀 최다승리 기록은 두산 베어스가 가져갔다.[22] 안재욱은 LG 트윈스의 팬이다.[23] 훗날 류현진은 동산중학교와 동산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정민태의 직속 후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