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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계 러시아인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리투아니아인 또는 리투아니아계 후손들이다. 2010년 인구 조사 기준 러시아 시민권자 중 리투아니아계는 모두 31,377명이었으며 이들 중 1/4 이상이 칼리닌그라드 주를 중심으로 거주한다.2. 역사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노브고로드 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은 서로 국경을 접할 때가 많았으며 교류 또한 활발하였다. 상호 간의 전쟁이 빈발하기 이전에는 상호 간의 혼인도 잦았는데 대표적으로 바실리 2세의 모친이 리투아니아 대공국 출신이었다. 요가일라 치세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 왕국과 동군연합을 맺고, 동군연합을 맺는 조건으로 발트 신화를 믿던 리투아니아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이미 루테니아인들과 통혼하고 정교회를 믿고 있던 리투아니아인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 중 러시아 쪽으로 망명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모스크바 대공국이 확장을 거듭하여 루스 차르국으로 거듭났다. 근세 루스 차르국은 혼란 시대를 지난 이후 서쪽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적지 않은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루스 차르국 측에 투항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적지 않은 리투아니아계 귀족 가문들이 러시아의 귀족 가문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폴란드 분할 이후 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를 받는 서부의 쾨니히스베르크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 가톨릭교도들을 불순불자로 취급하는 편이었고,[1] 이들의 해외 이주를 장려하였다. 이웃한 라트비아인이나 벨라루스인들이 러시아 제국 각지로 이민을 가던 것과 대조적으로 근대 리투아니아인 가톨릭교도들의 주 이민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비교하자면 벨라루스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세 민족 사이의 통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과 대조적으로 리투아니아인과 러시아인 사이의 통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발트 3국 합병 과정에서 131,600여 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소련 각지로 강제이주나 유배를 당하였다. 1950년대~60년대 이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리투아니아로 복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 내에서 리투아니아계 성씨를 사용하는 이들은 대개 이런 스탈린 대숙청 희생자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소련 시대 이전 서로 종교 문제로 통혼하지 않던 리투아니아인들과 러시아인들은 소련 시대 국가 무신론 정책 하에서 서로 통혼이 잦아졌다.
2.1. 칼리닌그라드의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의 리투아니아인들이 전부 다 강제이주 희생자인 것은 아니다. 2차대전 종전 과정에서 쾨니히스베르크 일대를 소련이 점령하고, 소련은 리투아니아 측에 리투아니아 마이너 영토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측에 흡수시킬 것을 제안하지만, 리투아니아 측에서 이를 거절하였다.사실 리투아니아 마이너 지역은 전간기 리투아니아가 독립국이던 시절(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이미 상당한 수준의 갈등을 겪던 지역이었다. 리투아니아 마이너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프로이센의 신민으로 수백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 상당부분 독일화되어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여타 리투아니아인들이 독실한 가톨릭 전통을 가진 것에 비해 프로이센 출신 리투아니아인들은 루터교회 신도가 많았다. 가톨릭 리투아니아인들은 이들을 작은 리투아니아인이라고 비하하였고, 프로이센의 개신교도 리투아니아인들은 가톨릭 리투아니아인들을 사모기티아 이단이라고 비하하곤 했다. 쾨니히스베르크 점령 이후 칼리닌그라드 내 개신교도 리투아니아인들 상당수는 독일로 추방당했고, 이들이 차지하던 땅은 리투아니아인 가톨릭 신도들이나 여타 소련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칼리닌그라드의 생활 환경이 악화되고, 이웃한 리투아니아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는 가운데 칼리닌그라드의 리투아니아인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이다. 1970년 통계 기준 23,376명에 달했던 칼리닌그라드의 리투아니아인 인구는 2021년 기준 4,279명으로 감소한 상태이다.
3. 언어
2010년 러시아 연방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리투아니아계 러시아인들은 거의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러시아어를 못하는 리투아니아인은 약 10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시베리아나 연해주 등의 리투아니아계 러시아인들은 고려인 비슷하게 강제이민 2세대 들어서 리투아니아어를 잊어버려 잘 구사하지 못하는 편이다.4. 유명 인물
5. 관련 문서
[1]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19세기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러시아 제국에 맞서 봉기하였던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