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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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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가까이 소련의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안드레이 그로미코 |
벨라루스계 러시아인(러시아어: Белорусский Русский, 벨라루스어: беларуская рус)은 벨라루스에 기원을 가진 러시아인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양국 사이에는 인적 자원 교류가 무척 활발하며 여기에 더해 벨라루스인과 러시아인 사이의 민족적 경계가 상당히 모호한 이유로, 러시아 내 벨라루스인 디아스포라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벨라루스인과 러시아인 사이의 모호한 차이의 발생 이유 그리고 어째서 양자 사이에는 정체성의 경계가 불분명한가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2.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의 분화
2.1.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는 키예프 루스라는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 키예프 루스는 다소 느슨한 형태로 결합된 여러 공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 수즈달은 오늘날 러시아, 키예프 공국과 갈리치아 공국, 볼히니아 공국 등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폴로츠크 공국과 투로프 공국은 오늘날 벨라루스의 기원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1200년 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에 해당하는 리가 일대에 북방 십자군의 일파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정착하여, 발트 해 연안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여 노예화하고, 동시에 폴로츠크 공국의 다우가바강 무역로를 봉쇄해버렸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키예프 공국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면서 폴로츠크 공국을 대신 지원할 수 있는 세력도 부재했다. 한 때 벨라루스 일대의 중심 세력이었던 폴로츠크는 무역로가 막히면서 몰락하고, 백루테니아와 흑루테니아 일대는 카오스에 빠졌다. 몽골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 끼어서 신음하던 루테니아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발트해 연안의 리투아니아인들과 힘을 합치는데, 이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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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라는 가문명은 오늘날 핀스크 일대의 도스토예보(Dostojewo)라는 마을 이름에서 기원하였다. |
리투아니아인들은 서기 14세기까지 기독교 대신 발트 토속 신앙을 보존하던 유럽 기준으로는 매우 예외적인 집단이었고, 이들과 함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구성하던 루테니아 주민들은 정교회 신도였다. 루테니아 일대에 정착한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현지 유력자들과 통혼하면서 정교회로 개종하곤 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가 폴란드 왕국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하여 동군연합을 구성하고, 리투아니아인들의 가톨릭 개종을 선언하면서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의 입지가 어정쩡하게 되어버렸다. 비타우타스 대공 사후 야기에우워 왕조의 가톨릭 우대 정책에 일부 정교회 엘리트들은 불만을 품고 노브고로드 공화국 혹은 모스크바 공국 측에 투항하는데 이들을 오늘날 벨라루스계 러시아인의 시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당시는 벨라루스인과 러시아인이 서로 완벽하게 구분되는 단계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는 오늘날 러시아에 위치한 스몰렌스크를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한 역사가 있는데, 스몰렌스크와 같은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 사이 중간지대에 있는 지역 주민들의 언어나 정체성 등을 칼로 자르듯이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세시대 당시 오늘날 벨라루스 일대에서는 키예프 루스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역사를 이어서 서술한 연대기들이 서술되었다. "1446년까지 쓰인 백러시아(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 연대기"는 9세기부터 1446년까지의 역사와 설화를 담은 책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키예프 루스의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책이었다.
벨라루스인과 러시아인이 서로 본격적으로 분화하게 된 계기는 1596년 브레스트 연합으로 볼 수 있다.
2.2. 브레스트 연합 이후
야기에우워 왕조의 지그문트 2세는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연방제 형태로 통일하였고, 이후 자국 내 정교회 신도들을 동방 가톨릭[1]으로 개종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한 편 루블린 조약을 전후하여 벨라루스 일대의 정교회 엘리트들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계 귀족들과 통혼하며 급속히 폴란드인들과 동화되는 과정까지 진행되었다. 1596년 브레스트 연합을 시작으로 정교회 성당과 신도들은 동방 가톨릭 교회로 반강제로 개종당한다. 하지만 브레스트 연합이 가져온 변화는 단순한 종파 변경만이 아니었다.브레스트 연합 수십여 년 전 이른바 이른바 종교개혁이라 하여 개신교가 가톨릭으로부터 갈라져 나오자, 가톨릭 측에서는 개신교계의 확장에 맞서기 위해 예수회 등등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수도사 집단을 창설하였던 바 있다. 예수회 출신 성직자들은 동방 가톨릭 신도들의 동요나 이탈을 막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개신교 시민, 개신교 귀족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원복시키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에서 여러 가지 교육 산업을 진흥하는데 이 과정에서 성경이 벨라루스어로 번역되고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여타 유럽 선진국들의 문화가 벨라루스인들에게 보급된 것이다. 물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칼뱅파, 유니테리언 역시 성경을 벨라루스어로 번역하고 교육 진흥 사업을 시행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벨라루스 일대는 루스 차르국(모스크바 대공국)과 종교적으로 분리되고,[2] 지역 주민들은 동시에 좀 더 손쉽게 서구의 학문이나 문화, 과학기술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해당 시대 당시 문화적 변혁은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 사이의 확고한 차이점이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먼저 벨라루스 일대가 17~18세기 내내 폴란드와 러시아, 스웨덴의 각축장이 되면서 전쟁과 가뭄으로 인구가 감소한 것, 대홍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엘리트 계층이 좀 더 공격적인 형태의 바로크 가톨릭을 믿으며 벨라루스인 민중들과 유리된 것 그리고 그나마 빈약하게 유지되던 벨라루스의 도회지 경제가 벨라루스어를 사용하는 자생적인 시민 계층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유대인이나 독일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3. 폴란드 분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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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폴란드 분할 전후하여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들을 구분짓는 구체적인 경계는 러시아 정교회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같은 종파 차이에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 측에서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을 정교회로 개종시키는 작업이 사실상 아무 저항 없이 진행되면서,[3] 양자 사이의 차이점은 급격히 옅어졌다.#
물론 차이점이 옅어졌다 뿐이니 동일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벨라루스 주민들은 폴란드에 의해 반강제로 동방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러시아 제국 측에 의해 정교회로 원복하게 되는 과정에서 벨라루스인 대중 사이에서 종교에 대한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오늘날 벨라루스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비해서 비종교인 인구가 월등히 많은 편이다. 유사 사례로 개신교가 가톨릭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개신교 지하교회가 번성하다가 수세대에 걸쳐 개신교 교리가 잊혀지면서 종교 전체에 대한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된 체코가 이웃 국가인 슬로바키아에 비해 무신론자 인구가 월등히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벨라루스 일대에서 러시아 일대로 이주한 정교회 주민들은 문화적 차이가 워낙 옅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사람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금세 러시아인으로 동화되곤 했다.
3. 이민사
벨라루스인들의 대량 이민은 19세기 말부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표트르 스톨리핀의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이주 지원 정책에 힘입어 상당수의 벨라루스인 농민들이 러시아 제국 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영토 각지로 이주하였던 바 있었고, 현대에도 이촌향도 현상으로 벨라루스 시골민들이 러시아 주요 도시로 이주한 경우가 많았다.물론 해당 이동은 당시 러시아 제국이라는 한 국가 내에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민한 것이긴 했지만 벨라루스인들의 이민이 워낙 대단위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당시 영향으로 오늘날 러시아의 여러 주나 자치 공화국 각지에는 벨라루스인 및 벨라루스계 후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다만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 사이의 통혼이 매우 흔했던 관계로 이들의 후손들은 대다수가 러시아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성씨로 벨라루스계인것을 알아보는 수준이다.
3.1. 소련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벨라루스 전역이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던 영향으로 전쟁포로 및 점령지 주민들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정책에 따라 벨라루스 출신 인민들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측 그중에서도 특히 모스크바 토박이들로부터 상당한 차별대우를 받았다.나는 꿈꿔왔던 사범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입학할 때 원서를 써야 했죠. 원서를 작성하다가 한 항목에서 멈췄어요. "당신이나 당신의 친척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독일군에게 잡혔던 적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나는 "물론 있음"이라고 썼죠. 교장이 나를 교장실로 부르더니 그러더군요. "원서를 도로 가져가야겠어요. 학생" ... "우리를 독일군 밑에 두게 한 사람이 누군데 저한테 그러세요?!" 난 그제야 우리가, 독일군이 장악했던 지역에서 살았던 우리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의심의 대상이었던 거예요. ... 그 후로 40년이 지나서야 원서 양식이 바뀌더라고요. 자그마치 40년이요! 원서 양식이 바꾸는 동안 내 인생은 이미 끝나버렸어요. ... 사샤는 군사학교에 지원했고, 마찬가지로 원서 양식을 채우면서 가족이 독일군 점령지에서 살았고 아버지는 실종됐다고 썼대요. 사샤는 바로 제적당했죠. (침묵) ... 내가 선생님께 이렇게 내 예기, 내 인생 얘기를 막 말해도 괜찮은 건가 모르겠네요. 우리는 모두 똑같이 살았어요.
붉은 인간의 최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
붉은 인간의 최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
한 편 소련 시절에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에는 레닌주의 교리에 의거 벨라루스인들을 대상으로는 벨라루스어 민족어 교육권이 보장되었지만 여타 지역에서는 벨라루스어 교육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내 벨라루스인들 역시 굳이 자녀들에게 일부러 벨라루스어를 가르치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 각지의 벨라루스계 이민자들은 현지 러시아인 사회 속으로 말 그대로 녹아들었다.
3.2. 소련 해체 이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각각 독립한 이후에도 양국 사이의 인적 자원 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양국 국민들은 신분증 무비자로 상대방으로 입국가능하며, 국적 소지만으로 상대국 영주자격을 갖는다. 상당수의 벨라루스인들이 민스크보다 규모의 경제가 큰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러시아 내 대도시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며 결혼 등으로 영구정착하는 인구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4. 여담
러시아 유대인 상당수는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전근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들이 많이 살던 국가였고, 러시아 제국은 흐멜니츠키 봉기와 폴란드 분할 등을 거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를 잠식하는 과정에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의 유대인 인구 상당수 역시 흡수하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들 유대인들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으로 이주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제한하였으나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 각지로 이민하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었다. 물론 해당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향 중 벨라루스 나바흐루다크 등등 근처이다 정도를 기억한다 뿐이지 여타 비유대인 벨라루스인들과 함께 벨라루스인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신들을 벨라루스계 러시아인으로 적극 분류하지는 않는 편이다.5. 목록
- 니콜라이 나고르니
- 니콜라이 유데니치
- 마리아 샤라포바 -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 마르크 샤갈 - 러시아와 벨라루스와 프랑스, 이스라엘에서 모두 자국의 위인이라고 주장한다.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바실리 마르겔로프
- 바실리 소콜롭스키
- 소피아 코발렙스카야
- 스테판 슈토프
- 안드레이 그로미코
- 예브게니 이바놉스키
- 올레크 가즈마노프
- 이반 야쿠봅스키
- 이반 프스티고
- 이오시프 구사콥스키
- 파벨 수호이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리투아니아 대공국 지역유지 혈통을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