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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예니세이강 중하류[2]에 사는 북예니세이어계 민족으로 현재 중부 시베리아에서 살던 고대 유목그룹의 유일한 후예이다. 이들[3]의 조상들은 사얀 산맥 주변 지역과 바이칼호 남쪽 끝에서 이주해왔다고 한다. 링크
2. 특징
다른 시베리아인과의 몇 세기에 걸친 족외혼에도 불구하고 케트족들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분자유전적인 유사성을 갖는다. 본래의 예니세이어 화자 집단은 홀로세 초기 중석기 시대에 아메리카로 이주한 무리와 그 형질이 닮은 것을 통해 아메리카로 이주가 일어날 때 후방에 남은 아시아 내륙 빙하기 인구의 흔적일 가능성이 다분하다.1920년대까지는 오스탸크(Остяк)[4], 예니세예츠(Енисеец), 예니세이 오스탸크(Енисейский остяк)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옛 중국 5호 16국 시절에 존재하던 민족인 갈족이 이들이라는 주장이 존재하지만[9], 갈어 연구에서 품포콜어 발음의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같은 예니세이어족에 속하는 품포콜족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이들이 흉노의 주요 엘리트 계층에 속해있었다는 주장 또한 있다.
2021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서는 1,088명 정도 남아있으며, 우크라이나에도 극소수의 인구가 살지만, 동유럽에서 일어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인해 아예 사라졌거나 그 수가 훨씬 감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케트족의 경우, 남성 인구의 93.8%가 부계 하플로그룹 Q-M242를 보유한다. 또한 베링 육교가 수몰된 이후인 청동기 시대부터 시베리아 남부 지역에서 혼혈된 유라시안이다.[10] 현대에는 데네예니세이어족 가설에 따라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인 나바호, 틀링깃과 동계라는 설이 제기된다.
또한 파키스탄의 길기트 발티스탄 내 훈자 주민들의 언어인 부루샤스키어와 이들의 언어 사이의 유사성도 주목 받고 있다.
케트족이 만든 궁시, 칼이나 삽과 같은 공구는 예니세이 강 북부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고 한다.
케트어와 케트족의 문화는 미국의 역사언어학자인 에드워드 바이다(Edward J. Vajda)의 논문에 자세하게 나온다.
3. 사회
3년에 한 번 '수그란'(Сугран)이라 불리는 전체 회의에서 촌락의 수장인 '쿠이'(Куй)를 선출했다. 이는 보통 봄과 가을에 열리는 재래시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선출 제도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러시아 관리들에 의해 후보자가 지정되었기 때문에 후보의 제일 중요한 요건은 러시아어 구사 능력이었다.우선 수장이 되면 해야될 일은 조세 징수와 식량, 탄환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또한 노인 공경 문제나 토지 분쟁과 같은 일부 사법적인 역할도 쿠이가 담당했다. 그밖의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쿠이는 각 가족이나 마을의 장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았다.
3.1. 결혼과 가족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는 반드시 중매와 함께 양가 부모 간 혼담이 이루어졌다. 이때 중매인은 신부의 몸값과 지참금, 결혼 일자에 대해 부모들과 합의했으며 신랑측 친척들은 다람쥐 모피나 스카프 등의 선물로 솥을 가득 채우고 신부의 천막으로 가지고 갔다. 만약 신부측이 받아들이면 그대로 결혼이 확정됐지만, 이를 거부할 경우는 선물을 가득 채운 솥을 뒤집어버렸다. 신부측에서 청혼을 받아들이면 그 후 양측은 신부의 몸값을 합의하고 결혼식 날이 되면 신랑과 신부의 머리를 감긴 다음 신부의 머리카락을 두갈래로 땋았다. 부부가 하나가 됐음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샤먼은 신랑과 신부의 코끝을 맞대고 손을 맞잡게 하였다. 양가 친척들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 주위에 두 개의 반원을 만들었고,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연회와 각종 놀이, 활쏘기 시합, 그리고 줄다리기를 즐겼다.20세기 초까지 케트족 가족은 보통 3~7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40명에 달하는 대가족으로 구성된 마을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해당 마을들은 주로 아버지 쪽 친척들로 연결된 가족들로 이루었으며 같은 마을에 속하는 같은 세대의 남자들은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함께 일하고 서로 도움을 주는 돈독한 관계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을 안에서 남자들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존경을 받았다.
4. 생활
주요 생업은 사냥과 어업이었으며, 주로 청설모, 족제비, 담비, 순록 등과 같은 모피로 쓸 수 있는 동물들을 사냥했다. 특히 청설모는 전체 포획량에서 8-9할을 차지할 정도였다.약 11월 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1-2일 가량 사냥을 떠났는데 이를 '작은 보행'(Малая ходьба)이라고 불렀다. 해당 사냥은 12-1월같이 낮이 짧은 기간이 시작되면 끝났으며, 그 다음달에는 멀리 떨어진 사냥터로 '큰 보행'(Большая ходьба)을 떠났다. 이때 아이들과 노인들은 촌락에 남아있고 여자들은 그들과 동행할 수 있었다. '큰 보행' 시에는 하루 정도 걸려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천막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3-4일을 묵었으며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근처 사냥터에 적응하고, 여자들은 이전에 머물던 곳에서 짐을 끌고 왔다. 이후 3월에는 사냥이 끝내고 촌락으로 돌아왔다.
4.1. 의식주
4.1.1. 전통의상
케트족 여성들과 아이들, 1913년. |
의상은 측면 솔기 없이 짐승의 가죽이나 천을 통째로 재단하여 질긴 실로 꿰맸으며, 다양한 색깔의 매듭으로 허리 부분을 묶었고, 소매에는 벙어리장갑을 달았다. 단추가 따로 없으며 오른쪽 옷깃으로 왼쪽 옷깃을 덮는 게 특징이다. 왼쪽 옷깃으로 오른쪽 옷깃을 덮는 것은 망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남성복과 여성복은 길이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같았다고 한다.[11]
또한 나이 또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머리모양이 다 달랐다. 아이들의 경우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녔으며, 미성년자와 처녀 및 총각들은 한 갈래로 머리를 묶었다. 결혼한 남성은 땋은 머리를 늘어뜨렸으며, 결혼한 여자들은 두 갈래로 머리를 땋았다. 미망인들은 일정 기간 동안 산발을 하고 다녔다. 경우에 따라 스카프나 숄을 쓰기도 했으며, 바람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고 쌓인 눈에 반사된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냥꾼들은 스카프 위에 다람쥐 꼬리로 만든 머리띠를 걸치기도 했다고 한다.
4.1.2. 음식
주로 모피 동물의 고기와 새고기, 물고기를 뾰족한 나뭇가지에 꿰어 모닥불에 굽거나 삶아먹었다. '유콜라'(юкола)라는 말린 생선이나 생선기름, 육포를 먹기도 하였으며, 열매나 나리 속 알뿌리도 채집하거나 풀이나 차가버섯의 진액을 다려 마셨다.또한 봄에 많은 양의 순록을 포획했을 때만 고기를 건조해 저장했을 뿐, 그외의 다른 고기는 저장하지 않고 사냥한 즉시 음식으로 만들어서 먹었다. 채식으로는 모든 식용 열매를 다 섭취했지만, 신선한 상태로 먹는 게 아니라 요리 재료로 사용하거나, 겨울용으로 저장해두고 먹기도 했다.
음식과 관련해서 많은 금기가 있었는데 특히 동물을 가공하여 음식을 준비할 때는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예를 들어 백조나 독수리는 사람이 환생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먹지 않았으며, 동물의 몸통을 손질할 때는 피를 엎지르거나 뼈를 흐트러뜨려서는 안되었다. 골격은 관절에 따라 해체해야 했다.[12] 의례용 음식의 경우는 성별과 나이와 관련된 규범이 존재했는데, 곰과 순록의 머리, 첫번째로 어획한 물고기는 남자들만 먹었으며 몸통의 특정 부위는 여성들은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4.1.3. 주거
케트족의 일림카(Илимка), 1913년. |
먼저 쿠스(Кус)는 장대와 느릅나무 껍질로 만들었으며, 외형은 다른 시베리아 및 동아시아 민족들과는 차이점이 있었다고 한다.[13] 천막의 입구 반대쪽이 동쪽이나 남동쪽을 향하도록 설치했으며, 이 방향을 앞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천막 안에는 2~3명이 식사할 수 있는 자작나무로 만든 작은 테이블이 몇개 놓여 있는데 이 테이블은 보통 남성과 연장자, 손님이 이용했다.
움막의 경우 통나무로 경사지게 골조를 만들고 흙으로 지붕을 덮었다. 보통 가장이 사냥을 떠나고 남은 가족들이나 사냥을 하지 않는 가족들이 거주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림카(Илимка)는 돛이 달려 있고 천장과 선실이 있는 큰 배였으며, 케트족에게 중요한 이동수단이자 주거공간 중 하나였다. 여름과 가을철 어장 근처에서 지붕을 열고 그 위에서 밤을 보냈으며 케트족들은 봄에 일림카를 타고 예니세이 강 지류를 따라 내려갔다. 순풍이 불 때는 아마포로 만든 돛을 달고 향해했다.
5. 실존인물
- 알렉산드르 코투소프[14]: 1955년생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켈로그[15] 출신의 가수이자 작곡가, 어부 및 사냥꾼이다. 주로 케트족 민요와 의식곡, 현대풍의 노래를 불렀으며, 또한 당시에 유명했던 러시아 노래들을 케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19년 7월 12일에 사망했다.
6. 같이보기
[1] 케트어로 사람을 의미한다. 복수형은 денг(뎅그).[2] 투루한스크 등.[3] 케트족 뿐만 아니라 사멸하기 이전의 전체 예니세이어계 민족들.[4] 우랄어족에 속하는 이웃 민족인 셀쿠프인도 과거 러시아인들에게 이렇게 불리었다.[5] 다른 러시아의 소수민족들처럼 모국어는 당연히 러시아어다. 현대에는 케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는 10~20명뿐이라고 한다.[6] 1960년까지 케트족과 근연 관계에 있었던 북예니세이어계 민족인 유그족이 존재했으나 2021년 인구 조사에서는 유그족 인구는 단 7명밖에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7] 남예니세이어계 민족이던 Kott, Assan, Arin, Pumpokol은 1750년대~1850년대 사이에 전부 사라졌다.[8] Kott와 Yugh는 하카스인에 동화됐으며, Arin-Pumpokol은 하카스 또는 출림 타타르에 동화되었다고 한다.[9] 케트어는 예니세이어족에 속하는데, '갈'(羯)의 중고한어 발음 'Kiat'과 '케트'(Ket)의 발음이 유사한 점, 갈어의 동사 어미 -ŋ이 예니세이어족의 일반적인 동사 어미와 동일한 점, 갈어 단어 '구독당'(劬禿當)의 재구 발음 "kot-o-kt-aŋ"이 케트어 문장 "d-kas-a-qos-n"(그들이 잡을 것이다)과 유사한 점을 근거로 한다.[10] 이는 케트족들에게 문화적 영향을 주었던 한티인과 셀쿠프인도 마찬가지이다.[11] 차이점이 있다면 남성복은 무릎까지, 여성용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남성복은 어깨와 앞섶에 끈을 꼬아 붙인 장식이 있으며, 화려한 색깔이 특징적인 여성복 위에는 주로 붉은색 허리띠를 매었다.[12] 이것은 동물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으며, 케트족들은 식사를 통해 섭취한 동물의 속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자면 멧닭의 심장을 먹은 사람은 매우 신중해진다거나 곰의 눈을 씹지 않고 그대로 삼키는 사람은 장수한다는 식이었다.[13] 그 차이점은 지주의 역할을 하는 장대를 연결하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장대 끝을 두 갈래의 작은 가지나 원형 테로 고정하였고, 이것이 다른 장대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문의 바깥쪽은 조각으로 장식해 놓았는데, 이 장식을 '문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장식이 없다면 그 문은 눈이 멀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다.[14] Александр Максимович Котусов, 어웡키족 아버지와 케트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5] 옐로구이 강 주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2010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306명 중 216명, 그러니까 70.6%의 마을 인구가 케트족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