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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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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3. 준비 및 작전
3.1. 독일군3.2. 영국군
4. 전투5. 결과

1. 개요

파일:external/olivier.leflon.free.fr/crete1.jpg

지도상에서 Crete라고 표기된 지명이 크레타 섬이다.

제2차 세계 대전중이던 1941년, 그리스 침공의 마무리를 위해 동지중해 최대의 섬 크레타를 점령하기 위해 펼쳐진 독일 공군 팔슈름예거의 공수작전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며, 동시에 이때까지 맹활약하던 팔슈름예거의 생명을 끝장낸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전선 형성의 배경은 그리스 침공 문서 참고. 그러나, 크레타 섬 전투는 좀 더 복잡한 문제들이 끼어들고 있었다.

사실 독일로서는 그리스 침공의 연장선에서 크레타 침공을 결정했지만, 애초에 그리스 전선 자체가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의 똘끼짓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성되어 강제로 끌려간 측면이 컸고, 안 그래도 독소전쟁의 준비로 시간과 병력이 빠듯한 상황에서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를 상대하며 크레타 섬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1]

하지만 독일의 최고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크레타 섬을 계속 연합군이 장악할 경우 동지중해의 불침항모가 될 것을 우려했다. 크레타 섬에서 발진하는 영국 폭격기들이 발칸 지역, 특히 독일이 애지중지하는 추축동맹국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지대를 폭격한다면 독일의 석유수급능력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터였다. 동시에 북아프리카 전역에 보내야하는 안전한 보급선도 필요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어떻게든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싶어했다. 사실 히틀러의 우려가 틀린 것도 아니었는데 훗날 몰타가 진짜로 영국의 불침항모가 되어 독일/이탈리아 지중해 수송선단을 끝없이 괴롭혔다.

그런데 사실 영국군은 크레타 섬에 대해서 반쯤은 손을 놓은 상황이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영국과 독일의 결전이 있는 와중이었지만 그만큼 보급이라는 건 양국 모두에 큰 문제였기 때문에 전선의 확장은 난처한 상황이기도 하였다. 영국군 수뇌부 입장에선 그리스 본토에서 발진하는 독일 공군기를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독일 전투기들, 특히 Bf109영국 본토 항공전때와 달리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여서 크레타 섬에서의 공중전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 영국도 이제야 본토 방공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정도의 공군력밖에 확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국으로선 본토 항공전과 달리 사력을 다해 독일 공군과 한판 승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비록 성가신 이탈리아 해군타란토 공습으로 침묵시켰다지만, Ju 87이 돌아다니는 해역을 수상함대로 어술렁거리는건 자살행위였다. 아무리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라도 제공권을 잃어버리면 독일 공군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할 뿐이었다. 여기에 영국 그리스 원정군도 크레타에서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길 강력 희망하고 있었다. 이는 동시기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개시, 리비아 대부분을 뺏기고 토브룩을 간신히 사수하는 와중에서 반격을 위한 추가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전시수상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와 똑같은 생각, 즉 '크레타 섬을 어떻게든 유지하면 불침항모로 굴리면서 폭격기를 띄워 루마니아 플로에슈티 유전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잘만 하면 이탈리아 본토나 남부 독일도 두들겨팰 수 있겠지?'란 생각으로 크레타 섬 사수를 지시했다.

3. 준비 및 작전

3.1. 독일군

독일군은 주력 대부분을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서 소규모 병력밖에 차출할 수 없었고, 설사 지상군을 투입한다 하더라도 영국의 지중해함대가 기다리고 있는 바다로 뛰어나온다는건 자살행위였다. 때문에 독일은 공군 제7항공사단과 육군 제5산악사단으로 구성된 제11공수군단을 편성, 항공전력과 공수부대 중심으로 크레타 섬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지휘관으로는 쿠르트 슈투덴트 공군 대장군단장으로 임명됐다. 최초 투입된 부대들이 주요 비행장을 점령하고, 후속부대가 비행장들로 병력을 증파하며, 약간의 기계화부대는 징발한 수송선 및 동맹국 이탈리아의 협력을 얻어 해로로 수송, 공수부대와 합류하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rman_assault_on_Crete.jpg

머큐리라는 작전명이 부여된 크레타 침공에서 독일군 공수부대는 크게 3개 전투단을 구성, 각각 동쪽의 이라클리온, 중부의 레팀논, 서부의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하기로 계획했다. 특히 서부전투단의 경우 말레메 비행장만이 아니라, 비행기로는 절대 수송이 불가능한 귀중한 전차와 중화기를 싣고 올 수송선단을 입항시킬 하니아 항만까지 확보해야 했다.

이들 중장비, 중화기의 수송을 위해 독일군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탈리아는 약간의 수송선어뢰정 등 소형함 20여 척을 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독일 입장에선 대형함 몇 척이라도 나와서 지중해함대를 유인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타란토 공습으로 호되게 당한 이탈리아 해군은 여전히 항구에 짱박혀 있었다.

머큐리 작전은 5월 16일 발동 예정이었으나 항공작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기상조건 문제로 연기되어 최종적으로 5월 20일로 작전이 실행되었다.

3.2. 영국군

영국군은 탈취한 에니그마를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1941년 5월 20일 경에 추축국의 크레타 섬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하였다. 하지만 인력과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었으며, 그리스 원정군 생존자 5만여 명 중 4만여 명은 이집트로 철군, 롬멜에 대한 첫 반격작전인 브리티시 작전에 참가하거나 예비대로 편성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영국 제8군으로선 어떻게든 고립된 토브룩 요새를 구원하고 롬멜을 격퇴해야 했기에 크레타 방위전에 큰 신경을 쓰기 어려웠다. 항공전력도 대부분 아프리카 전선에 묶여 있었다.

때문에 섬에 남은 영국군 1만여명을 중심으로 방어작전이 준비되었고,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해 그리스군 잔류자 및 민간인 자원자 등을 중심으로 민병대가 편성되어 일단 머리수는 약 3만을 채우긴 했지만 전차와 같은 중화기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수준에 불과했고, 심지어 소총같은 소화기와 탄약이 크게 부족했다.

대신 영국군의 유일한 강점이라 할 수 있는 해군은, 독일군의 해상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전함 워스파이트와 항모 포미더블을 포함한 상당수 함정을 크레타 섬 및 인근 해상에 투입하여 대대적인 초계활동에 나섰다.

4. 전투

5월 20일 오전 8시를 기해 독일 공군의 Ju 52 수송기들이 말레메 비행장 주변에 나타났고 비행장 및 주변 마을 등지로 수송기들이 착륙하거나 팔시름예거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독일 공수부대 역사상 최악의 날이 찾아왔다.

말레메 비행장 및 주변 지역은 영국군도 핵심 침공예상지역으로 선정하여 영국군 예하 육군 21, 22, 23 뉴질랜드 대대가 집중배치되어 다수의 QF 3.7인치 대공포 등으로 철저하게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의 실수로 인해 비행장에 선제 공습을 가한 지 한참 후에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타이밍 미스까지 터지는 바람에 수비대가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참고로 당연히 이를 모른 독일 수송기들은 야간작전도 아니고 주간작전에 공수부대를 투하하기 시작한다. 눈에 잘 보이는 공수부대는 수비대 입장에선 하늘에서 떨어지는 좋은 사격훈련용 표적지였고, 노르웨이에서 했던 것처럼 강행착륙하는 수송기들은 영국군의 집중사격의 대상일 뿐이었다.[2] 거기에 독일군이 비효율적인 낙하산을 사용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낙하산의 문제로 인해 빈약한 무장으로 공수된 팔시름예거들은 작전 단 한 시간 만에 이미 사상자수가 수백 명에 달했고, 제1돌격연대 예하 어느 중대는 중대정원 126명 중 112명이 전사, 사실상 전멸을 넘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단 하루 만에 병력 600명 중 400명이 죽은 대대도 있었다. 단순히 큰 피해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단위부대 전멸에 가까운 피해가 속출한 것이다.

독일군 공수부대 제2파가 들이닥친 이라클리온도 다를 바 없었다. 오후 4시 15분을 기해 시작된 이라클리온 공수작전도 영국/호주/그리스 연합부대의 거센 방어에 직면했다. 화력이 가장 부족한 그리스 육군 담당지역을 돌파하는가 싶었지만 곧 예비부대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독일군은 비행장 한켠에 확보한 약간의 교두보에 몰려있는 상태에서 절망적인 첫 날을 보내야했다. 공군 폭격기들이 SOS를 받고 대대적 폭격에 나섰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거기다 독일 공군이 간신히 점거하나 싶던 일부 마을과 도시에서도 반독 폭동이 일어나 시민들이 구식 소총 같은 무기로 팔시름예거들을 무참히 학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시민들에게까지 공수부대가 당하는 이유는, 당시 독일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공수부대는 낙하산으로 강하할 경우 권총 외에는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낙하산 방향도 두 팔을 허우적거려야 간신히 조정하는 상태였는지라... 그래서 소총 등 다른 무기와 여분의 탄약은 따로 상자에 넣어서 낙하산 투하를 했는데, 이 상자들이 적진 한가운데 떨어지거나, 크레타의 험악한 산골짜기 깊숙이 박혀버리는 등 회수하기 참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무기를 회수하려다가 죽는 팔시름예거 부대원들이 많았고,적 민병대가 가져가는 경우도 많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rman_prisoners_under_British_guard.jpg

전투 첫 날을 요약하는 사진. 줄줄이 잡힌 독일군 팔시름예거 포로들이 보인다. 그나마 이 사진 속 주인공들은 운이 좋았던 케이스고, 대부분의 독일군 팔시름예거들은 전투 첫날 그야말로 화형 등을 당해 끔살당한 통에 이보다 더 당일의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사진들은 다 끔찍하거나 혐오스런 사진들이다.

이처럼 전투 첫 날 이미 상황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중부의 말레메 비행장 인근의 107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유일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는 전투의 향방을 갈랐다. 이게 영국군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인데. 107고지를 방어하던 뉴질랜드 대대가 본인들 외에는 모두 철수한줄 알고 고지를 버렸다. 만약 107고지를 사수했더라면, 독일군의 추가적인 공중강습을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부와 서부에서의 작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깨달은 슈투덴트 장군은 21일부터 제2파로 투입될 예정이던 육군 제5산악사단 병력과 수송기로 수송 가능한 모든 중화기를 모조리 말레메 비행장으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산악부대원들은 낙하산 강하가 아닌, 수송기가 착륙하자마자 측면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수송기는 바로 이륙해 이탈하는 식으로 투입되었다. 21일 오후가 되면 말레메 비행장이 승부처라는걸 모르는 양국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군은 107고지를 발판으로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했고 21일 오후에 단행된 뉴질랜드군의 탈환 작전은 탄약이 부족해진데다가 비전투손실을 무릅쓴 독일군의 증원강행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공수부대원들과 달리 산악부대원들은 자신의 병기와 군장을 고스란히 지니고 투입되었기에 영국군은 이전과 같은 이점을 누릴 수가 없었다.

같은 날 독일군의 호송선단을 영국 해군이 발견, 일방적인 공격 끝에 대다수의 수송선을 격침하고 몇 척 남지 않은 수송선을 저지했으나 다음날인 22일 영국 해군의 함포사격을 등에 업은 뉴질랜드군 마오리 대대의 말레메 비행장 야습이 실패하면서, 독일군은 모든 증원병력을 말레메로 돌리면서 말레메 교두보는 점점 단단해졌고, 독일군의 병력과 중화기도 빠르게 늘어만 갔다. 더군다나 독일군의 해상수송을 차단하려던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가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아 순양함 2척이 격침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 등 악재가 계속되었다. 이때 입은 피해로 지중해함대는 크레타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23일이 되면서부터 독일군은 본격적으로 교두보를 확대해나가기 시작했고 공중수송도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영국군의 모든 시선이 독일군으로 쏠린 틈을 타 당시 이탈리아령이던 로도스 섬에서 소규모 부대가 크레타 섬 최동단 일대에 상륙, 제2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이로써 크레타 섬의 운명은 결정났으며 잔존 연합군은 모두 남부 항구지대로 기나긴 후퇴를 시작했다. 이들의 머리 위로는 이제는 익숙한 Ju 87이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전투는 영국군이 철수한 5월 3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철수하는 수송선단에 탑승한 병력도 수송선을 집중공격한 Ju 87 때문에 상당한 희생을 겪었다. 게다가 혼전의 와중에 철수연락을 받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철수에 실패한 5천여명의 연합군은 대부분 항복하고 극소수만이 남아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이들도 1941년이 끝나기 전에 모두 죽거나 항복했다.

크레타 섬을 완전히 장악한 독일군 팔시름예거들은 앞서 침공 초기 시민들에게 공격받거나 화형 등을 당해 살해당한 것을 잊지 않고 청야전술로 잔혹하게 복수해서 상당한 민간인 피해와 가옥 파괴 및 전소가 추가적으로 발생했다. 팔시름예거의 콘도마리 학살사진 # 적군도 아닌 민간인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향해 무기들고 공격해오고, 자기들이 써야할 무기까지 탈취해서 저항을 해온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민간인도 일정 수준의 장비와 조직을 갖추면 준군사조직으로 인정받아서 교전권을 확보하는데다가, 침략국에게 공격당한 국가의 주민은 당연히 반항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민간인이 전투중 교전으로 인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투 후에 민간인을 마을에서 끌어낸 후 제대로 된 재판 없이 현지에서 즉결총살한 것은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로 전쟁범죄다.

단, 크레타 지역의 민병대들 또한 단순히 독일군에게 저항한 것을 넘어 항복하는 독일군을 포로로 잡지 않고 사살하거나, 심지어 산채로 불질러 죽이는 등 지나치게 잔인한 방식으로 대응했기에, 화를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5. 결과

공수부대의 생명은 불시의 기습이야. 그게 없어지면 평범한 보병보다 못하지. 자네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네.
아돌프 히틀러,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에서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에게
겉으로 보기엔 명백한 영국군의 패배였다. 끝끝내 크레타 섬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으며, 영국군 4,000여 명이 전사하고 17,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뿐만 아니라 10여 척의 함정이 격침되거나 파손되었는데 이중에는 순양함 3척 격침 피해에 항공모함 포미더블 대파, 전함 워스파이트 중파와 같은 핵심 주력함 피해도 있어서 한동안 지중해 해상작전에 커다란 제약이 있을 정도였다. 이는 이탈리아 잠수정에 의한 퀸 엘리자베스 대파, 유보트에 의한 바함 격침으로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나치 독일상처뿐인 승리라는 것이 후대의 평가이다. 작전에 투입된 제 7항공사단은 전체 병력 10000여명 중 1032명 전사, 2097명 실종, 1632명 부상으로 무려 4761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941년 당시 7항공사단의 병력수가 1만여명이었으니 크레타섬을 점령하는데 사단의 절반에 가까운 47%에 달하는 손실을 입은 것이다. 이로 인해 7항공사단은 작전 수행이후 9월까지 전열에서 이탈하여 재편성을 받아야 했다.

문제는 이 7항공사단의 4761명의 사상자는 1940년 노르웨이 침공, 프랑스 침공 당시 베네룩스 공수 작전, 1941년 그리스 코린트 지협 차단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독일 공수사단의 배테랑 중 배테랑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독일군 공수부대는 대규모 작전을 벌일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작전에 투입한 수송기 다수까지 상실하였는데 여기에 히틀러가 공수부대에게 공수작전을 금지하는 초대형 삽질을 저지르게 된다.

1943년 6월 16일 공수부대의 공수 작전 훈련을 보도하는 독일 주간 뉴스.
크레타 섬 전투 이후 히틀러는 공수작전을 금지하였지만 공수부대의 공수 작전 훈련은 계속 실시되었다.
결국 이게 원인이 되어, 독일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수작전다운 공수작전은 하지도 못한 채 몰타를 점령하지 못해 아프리카 전선을 말아먹고 최정예라 불리던 공수부대들은 일반 보병전투에서 소모되었다. 하지만 크레타 섬 전투에서의 치명적인 피해는 독일군 최정예답게 공수부대는 해당 피해를 복구해내는데 성공한다. 다만 이 피해를 복구하는데 1943년까지 총 2년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1942년 11월 제 5 낙하산 연대 2개 대대가 튀니지 서부에서 공수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수송기 조종사들의 미숙으로 인해 목표 지점에 한참 떨어진 지점에 강하를 시켜버려 작전을 말아먹고 만다. 이후1943년 이탈리아 전역이 열릴쯤 독일 주간 뉴스에서 공수부대원들의 공수작전 훈련을 보도하였고 공수부대도 크레타 섬 전투나 에반 에말 요새 전투때만큼의 규모는 아니었지만 대대급 공수작전을 여러 차례 실시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이탈리아가 항복한 1943년 10월 도네카스 전역에서 독일군은 대대급 규모 공수작전을 실시하였는데 10월 3일 독일군 공수부대는 기습적으로 레로스 섬에 공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5000명의 이탈리아군과 3000명의 영국군을 잡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무솔리니 구출작전에도 82명의 공수부대원들이 강하작전을 지원하였다.
1943년 9월 22일 무솔리니 구출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독일 주간 뉴스. 영상 속 독일 제 2공수사단 병력들을 볼 수 있다.

크레타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 중 베테랑이 된 공수부대원들은 자신의 후임들을 맹훈련시켰고 그 결과 독일군 공수부대는 동부전선과 몬테카시노 수도원 전투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과 1944년 6월~8월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강요하였다. 크레타 섬 전투에서 전면 재편성을 받아야 했던 제 7 항공사단의 경우 1942년 재편성을 마치고 제 1공수사단으로 개칭한 이후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1943년 5월까지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맹활약을 펼쳤고 이들은 7월 이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여 연합군에게 녹색 악마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재편성을 받을 시간 없이 이탈리아와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되면서 공수 훈련은 점차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게 출혈을 강요했던 3 공수사단과 5 공수사단으로 구성된 제 2 낙하산 군단의 공수부대원들이 팔레즈 포위전에서 전멸당하면서 크레타섬 전투 이후 복구된 최정예 공수부대는 그 모습을 잃어버리고 만다. 마지막으로 공수작전 훈련을 사단전체가 이수한 것은 1944년 4월 창설된 제 5공수사단이었고 6월 창설된 6공수사단은 최후의 공수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

이후 독일은 10 공수사단까지 창설하였지만 이들 모두 공수 작전 훈련은 받지 않은 알보병들이었다. 살아남은 대원들로 간신히 재편성한 제 2 낙하산 군단은 그나마 남아있던 베태랑들도 뿌리채 뽑혀버린 상황이었고 이들은 벌지 대전투에서 최후의 공수작전을 펼쳤지만 이전처럼 지옥과 같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선임들로 부터 훈련을 받으며 성장한 공수부대가 아닌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긁어모아서 만든 부대였으니 공수부대임에도 불구하고 공수 작전 훈련은 물론이요 기본적인 전투력 조차 매우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발터 모델이 공수부대 지휘관에게 공수작전의 성공확률을 묻자 10%도 안된다고 답했을 정도였고 실제로 미군 한개의 중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도 쩔쩔 매는 등 매우 처참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크레타 침공전에서의 손실로 말미암아 몰타를 점령 못 하는 사태까지 번지자 결국 보급의 한계에 직면한 아프리카 군단은 전멸한다. 크레타 섬을 점령한 주둔군 자체적으로도 보급상황은 좋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히틀러가 크게 벌여놓은 동부전선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면서 독일군은 지중해 및 북아프리카 전선 전반에 안정적 전선을 구축할 수 없게 되었다.

점령한 크레타 주둔군 또한 게릴라들의 저항에 직면해야했고 와중에 북아프리카 전선에 주둔군 병력으로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은 궤멸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면서 크레타 섬에도 연합국의 반격이 이어졌고, 크레타 섬이 사실상 거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종전까지 독일군은 크레타 섬에서 철군하지 못했고 종전이 되어서야 해산되었다.

한편 나치 독일 점령기간에 크레타 섬에서의 게릴라, 파르티잔 진압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많은 대량학살 사건이 있었다. 때문에 침공 당시의 학살과 포함하여 크레타 섬 전투를 지휘하고 주둔군 사령관을 보낸 공군 쿠르트 슈투덴트 상급대장, 육군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 보병대장, 공군 브루노 브로이어[3] 공수대장 등은 전후 기소되었고 슈투덴트[4]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군들은 그리스 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선전부 장관의 양아들 하랄트 크반트 공군 소위도 이 전투에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후 연합군은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과 같은 실수를 하며 공수부대를 말아먹기는 하였으나 빠르게 정신차리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공수부대를 운용했다.

1942년, 크레타 전투에 참전한 독일군 장병들이 왼쪽 소매에 부착하는 수장 형태의 참전장인 크레타 수장이 제정됐다.



[1] 아래에도 어느 정도 이유가 서술되어 있지만 어쨌거나 크레타 섬 전투에서 추축국이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어 점령은 어찌저찌 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아프리카 전선의 상황이 안정권이라고 판단, 독소전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2] 위의 영국군의 준비에 대한 서술 문단에 간단하게만 서술되어있지만, 에니그마의 해독으로 인해서 사전에 이 작전을 알았던 점이 그리스측의 크레타 초기 방어 성공에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3] 브로이어는 비교적 인도적(?)인 정책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군들의 학살범죄로 인해서 총살당했다.[4]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5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