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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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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1969년2.2. 1970년대2.3. 1980년대2.4. 1990년대2.5. 2000년대2.6. 2010년대2.7. 2020년대
2.7.1. 위기
3. 주식 관련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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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전자의 역사에 대한 문서이다.

2. 역사

파일:삼성전자 연간 매출.jpg
삼성전자의 매출
파일:삼성전자 연간 영업이익.jpg
삼성전자의 영업 이익
1993년부터 2016년까지 삼성전자의 연간 매출과 영업이익 추세를 나타낸 그래프다.[1]

2.1. 1969년

[S/I/M 전시 투어] (역사관①) 한국 전자산업의 초석을 마련하다
[S/I/M 전시 투어] (역사관②) 초일류 100년 기업을 향해 가다[2]
1968년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이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고[3] 이에 따라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였다. 그 이후 1969년 12월 삼성전자-산요전기-스미토모상사와의 합작법인인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하였다. 사실 삼성이 동양방송을 소유하던 시절이니까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대규모로 만들어 팔면 TV 수상기와 라디오의 대수가 늘어나게 되고 삼성전자에서 생산된 TV와 라디오를 구입한 고객들이 TBC 프로그램을 시청/청취하면 삼성에게 더 많은 광고료가 들어오는 구조가 되어 삼성이 이중, 삼중으로 이득을 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자기업을 설립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삼성과 럭키금성은 사돈 지간이었다. 1957년 삼성 이병철의 차녀 이숙희가 LG 구인회의 3남 구자학과 결혼했다. 이병철과 구인회는 같은 경남 출신이면서(이병철은 의령, 구인회는 진주) 진주 지수보통학교 동문 관계다. 그래서 두 사람의 자녀끼리 혼사도 맺었지만 삼성의 전자 사업 진출을 계기로 양가의 밀월 관계가 망가진다. 당시 삼성은 비료, 식품, 보험, 모직 등의 사업을 하고 있었고, 금성사는 화학, 전자 등 삼성과 다른 분야에 진출해 있었다. 그런데 이병철이 1969년 4월 27일자 중앙일보<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이란 칼럼을 기고해 전자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하자 럭키그룹의 구인회는 사돈이 하는 분야에 끼어들어서 경쟁하려 한다며 진노했다고 한다.

이숙희는 이 상황 때문에 집안에서 곤란한 상태에 빠져, 여러 차례 친정에 와서 아버지 이병철에게 전자 사업에 대해서 하소연을 했고 이병철은 딸이 시가(媤家) 편만 든다며 분노해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이때 데릴사위처럼 계열사 중앙개발호텔신라 대표를 맡았던 구자학도 삼성을 떠나 럭키로 복귀했다.

2.2. 1970년대

1970년 삼성-산요전기가 흑백 TV (모델: P-3202)를 생산했고 삼성전자공업도 1970년부터 백색가전과 AV기기를 생산했다. 이듬해 파나마에 흑백TV를 처음 수출했고, 1972년에는 내수용 흑백 TV를 생산 하였다.[4] 1973년 삼성전자공업은 삼성일렉트릭스를 합병하였다.

1974년 12월 삼성전자공업은 국내 최초로 반도체를 생산했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산업에 진출하였다.[5] 당시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모든 자재를 수입하여 단순 조립한 후 수출하는 방식으로 트랜지스터 정도의 반도체 산업을 유지하였다. 즉,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기지로써 한계를 가졌으나 삼성전자의 시도를 통해 한국 반도체는 단순 조립을 넘어 웨이퍼를 가공하는 데 이르렀다. 1975년에는 6기능 LED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인 KS-5001 LED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를 개발하면서 축적된 경험과 인력을 토대로 1980년대 이후에 첨단 반도체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1975년 삼성-산요전기는 회사명을 삼성전기로 변경하였다. 1977년에는 삼성전자공업이 이 삼성전기를 흡수합병하였다.
1977년 컬러 TV 수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1978년 업계 최초로 미국에 현지법인(SEA)을 뒀고, 1979년 한국 최초로 VTR전자레인지를 생산했다. 같은해 반도체 개발에 적극 나서며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하였다. 참고로 당시 한국 내 라이벌은 금성사대한전선-대우전자, 화신쏘니, 화신전기, 아남전자 등이 있었다.

흑백TV(이코노)와 냉장고(하이콜드), 세탁기(은하)같은 백색가전을 만드는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는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 시절이기 때문에 외국 기업이 직접 한국에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때문에 당시의 삼성전자공업과 같은 기술력이 부족한 기업도 외국 기업의 기술과 제품을 라이센싱하여 제조해 판매할 수 있었다. 당연히 외국 기업보다 품질이 떨어졌지만 애초에 한국 내수시장에는 외국산 제품이 없으니 당연히 한국 제품끼리만 경쟁하는 상황이 되었다.
파일:삼성 하이콜드-서리없는 냉장고.jpg
삼성 하이콜드 - 서리없는 냉장고

당시 냉장고 방식에 대한 일화가 상당히 유명했는데 삼성과 금성은 간냉식,[6] 대한전선은 직랭식[7]을 채택했었다. 문제는 직랭식은 구조적 특성 상, 성에가 끼기 쉽고 냉동 효율이 무지막지하게 떨어졌는데 삼성에서 당시 간냉식을 채택한 하이콜드 냉장고를 내놓으면서 "서리가 없어요"란 캐치프레이즈로 대한전선을 디스했고 금성도 눈표냉장고로 미투 마케팅을 펼치면서 결국 혼자 직랭식을 택한 대한전선은 경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가전사업부가 대우그룹에 인수되어 대우전자가 된다. 초기 대우전자 냉장고가 직냉식을 채택했다는 증거는 대우 로얄 120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파일:삼성 이코노텔리비젼-삼성 이코노로 절전합시다.jpg
삼성 이코노텔리비젼 - 삼성 이코노로 절전합시다

이코노TV도 순간수상이란 점을 강조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지금이야 스위치 켜면 화면이 바로 나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 진공관식 흑백TV는 브라운관 전자총 부분을 20초 ~ 1분정도 예열시켜줘야 화면이 나오는 방식이었는데 당연히 전기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당시 생활 수준과 소득 수준을 감안하면 제 아무리 TV를 가질만한 수준의 가정이라도 열뻗치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처음으로 스위치 켜자마자 화면이 나오기 시작하는 TV를 내놓으니 절전형TV라며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즉 삼성은 이때부터 상당한 마케팅 수완과 광고전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파일:삼성카세트1979_2.jpg
삼성 카세트 - 카세트라디오의 베스트셀러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 삼성전자공업은 6개 품목에서 금성사를 앞지르거나 엎치락 뒤치락 할 정도로 시장점유율을 크게 높였는데, 전자시계[8]와 더불어 카세트라디오 부문에서는 1979년 시점에 이미 금성사를 크게 앞질러 업계 1위 자리에 올랐다. 1974년 출시한 삼성의 첫 내수용 카세트라디오 모델 SP-320P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자 여기에 고무된 삼성은 해당 모델을 100V/220V 겸용으로 개량해 저가형으로 돌린 후 1978년 후속 모델인 RC-325W를 출시했는데, 작은 몸체에 직경 6인치의 듀얼 콘 스피커를 내장하여[9] 당시 중소형 컴포넌트와 맞먹는 음성 출력 성능과 수준급 음질, 예쁘장한 외관[10] 등으로 1985년 단종될 때까지 120만대 이상을 판매하며 인기를 얻어 삼성전자공업을 단숨에 업계 1위로 올려놓는 데 큰 기여를 했다.[11]

2.3. 1980년대

1980년 삼성전자공업은 삼성반도체를[12] 합병한 후 반도체 개발에 적극 나섰다. 1980년대만 해도 삼성이 일본의 전자기업들을 추월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이 트리니트론워크맨, VHS 등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뽐내던 시기였다. 이건희"양은 우리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최고다. 언제 따라가겠나?"라고 말했고 삼성전관(현 삼성SDI) 사장에게 "다른 요구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하나, 소니를 따라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전자산업의 패러다임이 완전한 디지털 기반으로 바뀐 오늘날 삼성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자산업의 아이콘들 중 하나가 되었다. #

1983년 2월 8일 이병철 회장은 소위 ‘동경(東京) 구상’을 통해 반도체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공표하였다.[13] 하지만 그 당시 국내 반도체 산업은 선진국과의 기술격차, 막대한 투자재원조달의 부담, 고급 기술인력의 부족, 특수설비 공장건설의 어려움 등으로 수많은 우려가 제기되었다. 심지어 “삼성이 반도체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사업성도 불확실한 그 돈이 많이 드는 반도체를 왜 하겠다는 것인가. 차라리 신발산업을 밀어주는 게 낫다”[14]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발간된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며 첨단반도체에 도전을 강행한다.
인구가 많고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길은 무역입국(貿易立國)밖에는 없다. 삼성이 반도체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세계적인 장기불황과 선진국들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값싼 제품의 대량수출에 의한 무역도 이젠 한계에 와 있어 이를 극복하고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서 자동화, 다기능화, 소형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여기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반도체 비중이 점차 커져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반도체개발 전쟁에 참여해야만 한다. 반도체는 제철이나 쌀과 같은 것이어서 반도체 없는 나라는 고등기술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내 나이 칠십삼 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이병철, 『호암자전』 (중앙일보사, 1986), 237, 243-244쪽

반도체는 제품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각 제품이 요구하는 기술수준이나 시장의 크기가 매우 다르기에 어느 제품을 투자하는 것에 따라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되었다. 당시에는 삼성전자공업 내부적으로 비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는 삼성전자공업이 가전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으며, 그 동안 기술개발을 추진해 온 분야도 가전용 중심의 비메모리 반도체였기 때문이다.[15]

하지만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하였다. 내부적인 수요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수익을 낼 수 있는 품목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 삼성의 생각이었다. 당시의 예측에 의하면 메모리 반도체는 1982-1988년에 연평균 28%의 고성장을 통하여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해 나갈 것으로 보였다. 또한, 메모리 반도체는 비메모리 반도체와 다르게 투자회수기간이 짧아 재투자의 여력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아울러 메모리 반도체는 원천기술에 비해 응용기술이 비중이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은 후발국도 선진국과의 경쟁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16]

이후 메모리 반도체 중에서 시장진입이 쉬운 S램(static RAM)을 주력 제품으로 결정할 것으로 보였으나 가격 변동성이 크고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D램을 주력 제품으로 선택하였다. 이는 D램의 시장규모가 S램의 두배가 넘어가며 D램의 기술을 선도하는 것이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17] 이후 64K D램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으며 이임성, 이상준, 이일복, 이종길, 박용의 등과 같이 미국의 우수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료하고 반도체 관련 업계에서 실무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1983년 7월 미국 산호세에 현지법인[18]을 설립하였다. 이후 1983년 5월부터 양면적 전략(dual strategy)을 사용하여 64K D램 개발기간을 단축시켰다. 양면적 전략은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조립공정기술은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한편, 국내에 전혀 확보되어 있지 않은 설계기술과 검사기술은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하는 전략으로 해외 선도 기업들과 기술 격차를 줄이는데 중요한 전략이였다. 아울러 이를 위해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에게 기술연수를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가보니 마이크론측의 태도는 적대적이었고 제대로된 연수는 커녕 질문도 받지 않았으며 정해진 시설을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기초적인 D램 기술 자료를 받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 히타치제작소, 도시바, NEC 등 일본 전자 기업들을 직접 찾아가 기술 전수를 요청을 했는데 거절 당했다. 이 중 샤프의 경우는, 삼성 직원들을 기술을 배워 오게끔 샤프공장으로 파견근무시켰음에도, 정작 핵심기술을 전수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메모도 못하게 했기에 눈으로 본 것을 외워야 했다.# 결국 삼성은 자체 개발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어떤 회사도 삼성에게 D램 핵심기술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클린룸도 일본 업체로부터 전해들은 클린룸의 개념만 가지고 경험도 없는 국내 업체들과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

이때 팀워크를 다지고 64K D램 개발을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연구개발진들이 그 유명한 '64km 행군'[19]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결국 삼성전자공업은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각오로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지 6개월만인 1983년 11월에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한 국가가 되었다. 그 누구도 삼성이 이렇게 단기간에 해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64K D램의 개발을 계기로 선진국과 10년 이상의 격차가 났던 우리나라의 반도체 기술수준은 3년 정도로 크게 단축되었다.[20] #

반도체 생산을 위해 설립된 양산공장은 1983년 9월 경기도 기흥에서 기공식이 진행되었으며, 이병철 회장은 “6개월만에 공장건설을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도체 장비는 매우 민감하기에 선진국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데 18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 지시로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에 선도업체들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고자 하는 의지를 알 수 있다. 약 2개월 후인 1983년 11월에는 제2라인 생산라인으로 당시에 3개 업체 밖에 갖추지 못한 6인치 웨이퍼 공정을 선택하였다. 256K D램 생산기술이 개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6인치 공정라인을 만든다는 시도 자체가 우려가 샀으나, 선진업체를 하루빨리 따라잡기 위해서는 보다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 삼성의 입장이었다. 그 결과 삼성은 1984년 3월에 256K D램을 개발하는데 착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256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21]

1984년 2월 삼성전자공업은 회사명을 현재 이름인 "삼성전자"로 바꾸었다.

삼성은 1985년 9월에 이일복 상무를 중심으로 하는 현지법인팀과 박용의 박사를 팀장으로 하는 국내팀이 동시에 1M D램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팀이 동시에 연구개발에 착수하면 비용은 두 배로 소요됨에도 진행한 이유는 두 팀이 경쟁적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함으로써 시간을 단축하며 성공률을 높이고자 하는 효과가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국내팀은 1M D램의 개발에 착수한 후 11개월만인 1986년 7월에 양품에 성공하였다.

삼성은 1M때 사용하였던 국내팀과 현지법인팀의 경쟁체제를 4M개발때 다시 사용하였는데 두 팀모두 1986년 5월에 4M D램의 개발에 착수했지만 1988년 2월에 국내팀이 먼저 양품을 생산하는데 성공하였다.[22]

국내팀이 현지법인팀과의 경쟁에서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내팀이 보여준 엄청난 성실성이라며 당시에 삼성전자 회장을 맡고 있었던 강진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미국 현지법인에 스카우트된 개발요원들은 모두가 메모리 반도체의 디자인부문과 공정부문에서 경험을 쌓아온, 말하자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 나이도 40대가 대부분이었다. … (그들은) 미국의 생활양식에 익숙해 있으며, … 일과 시간 중에는 자신에게 부과된 연구개발에 몰두하지만, 일과 시간 외엔 자기의 개인생활을 철저히 지킨다. … 그런데 국내의 분위기는 그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밤낮의 구별조차 없다. 일단 개발에 착수하면 몇 달씩 연구소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 미국의 현지팀은 고도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에서처럼 24시간, 아니 몇 개월씩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연구개발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이에 비해 국내의 젊은 팀은 전문지식이나 기술의 핸디캡을 젊음을 불사르며 극복할 수 있었다. 자신과 가족의 희생도 당연시하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문자 그래도 ‘불철주야’ 강행군이 가능했던 것이다. [23]

1986년부터 '휴먼테크'라는 기업 PR 카피를 내세우며 같은 해 세계 최소형/최경량 4mm VTR을 개발했고, 1987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에 삼성종합기술원을 열었다. 1988년 미국 마이크로 파이브 사를 인수하며 삼성반도체통신을 합병하고[24] 1989년 부문별 대표이사제 개편 후 광주전자를 설립하였으며, 정보통신부문에서 컴퓨터사업을 별도 부문으로 독립시켰다.

1986년부터 <휴먼테크>라는 기업 PR 카피를 내세웠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지금 잘 쓰이지 않지만 오늘날도 삼성 주관의 휴먼테크 논문 대상 등에 알게 모르게 남아있다.

1980년대초에 일본업체의 덤핑으로 삼성전자가 망하는것은 시간문제였는데 1985년 플라자 협의로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경쟁력을 잃어 삼성그룹이 글로벌화 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https://youtu.be/ITJYENRjPMQ?si=e6xrrsPVvx6o4I0z

2.4. 1990년대

4M D램 개발까지는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거나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선진업체를 신속히 추격하는데 초점이 주어져 있었다. 1990년 8월에 16M D램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991년 3월에 상용 제품을 개발해냈다. 당시에는 16M D램의 시제품을 생산하는 해외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설계기술과 공정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물론 감광재료나 노광장비의 일부도 자체적으로 개발해야 했다.[25] 16M D램의 개발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의 업체들은 삼성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26]

이와 관련하여 당시에 16M D램의 개발을 주도했던 진대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삼성의 16M D램 개발 성공은 회사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의의를 지닌다. … 노동집약형 산업에만 강세를 보여 온 한국이 선진국의 전유물이라 불리던 최첨단기술 분야인 반도체에서 제1군에 합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의 기술을 빌려오지 않고 오직 우리의 독자적 기술로 개발한 첫 메모리 반도체 제품이라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었다. 비교하기조차 낯 뜨거웠던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는 이제 ‘제로(O)’. 마치 마라톤에서 꼴찌를 달리던 선수가 갑자기 막판 스퍼트를 내 순식간에 선두를 차지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27]

삼성은 1992년 12월에 16M D램의 선폭을 0.28㎛으로 축소하는 기술을 확보한 후 1994년 8월에는 선폭이 0.25㎛인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삼성은 1996년 10월에 선폭이 0.18㎛인 1G D램을 개발하였고, 2001년 2월에는 선폭이 0.13㎛인 4G D램의 시제품을 성공적으로 완성해 냈다. 이로써 삼성은 64M, 256M, 1G, 4G D램의 4세대를 연속해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업이 되었다. 삼성은 경쟁업체보다 1년 내지 1.5년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품의 생산 시기를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아래 <표 1>은 삼성의 D램 개발사를 개발시기, 소요시간, 개발비용, 선진국과의 격차, 그리고 선폭으로 정리 하였다.
<표 1> 삼성의 D램 개발사[28]
<rowcolor=#fff> 구분 64K 256K 1M 4M 16M 64M 256M 1G 4G
개발시기 1983년 11월 1984년 10월 1986년 7월 1988년 2월 1990년 8월 1992년 9월 1994년 8월 1996년 10월 2001년 2월
소요기간 6개월 8개월 11개월 20개월 26개월 26개월 30개월 29개월 30개월
개발비용 7.3억 11.3억 235억 508억 617억 1,200억 1,200억 2,200억 2,200억
선진국과의 격차 5.5년 4.5년 2년 6월 동일 선행 선행 선행 선행
선폭 2.4㎛ 1.1㎛ 0.7㎛ 0.5㎛ 0.4㎛ 0.35㎛ 0.25㎛ 0.18㎛ 0.13㎛

삼성은 일본의 도시바를 제치고 1992년부터 D램 분야에서, 1993년부터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최고의 생산업체로 부상하였다. [29]

삼성은 D램에서 기술기반을 확보한후에 S램, 비디오램, 마스크롬, EEP롬 등 다양한 제품에도 투자를 진행하였다. 삼성은 1992년 5월에 4M S램을, 같은 해 8월에는 4M 슈도 S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S램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 수준을 확보하였다. 삼성은 S램에서 1992년의 세계 7위, 1993년의 세계 6위를 거쳐 1995년부터는 히타치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부상하였다. [30]

삼성은 D램에만 치우쳐있는 제품 포토폴리오의 협소성을 해결하기 위해 플래시 메모리시장에도 진입하였다. 이중에 하나는 모바일 기기에 많이 사용되는 플래시 메모리 사업에서 선도하기 시작하였다. 플래시 메모리는 인텔의 노어(nor)형[31]과 도시바의 낸드(nand)[32]형로 이분화 되어 있었는데 삼성은 이중에 성장성이 높은 낸드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였다. 이후 1996년에 64M, 1998년에 128M, 1999년에 256M 제품을 잇달아 개발하였으며 차후 플래시메모리의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삼성은 1996년에는 기존의 마이크로 사업부를 시스템LSI사업부로 개편하면서 비메모리 분야에도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에 500M Hz 알파칩[33]에서 시작한 후 1998년에는 1G Hz로 성능이 향상되었다. 이와 같은 신제품을 매개로 삼성은 1998년부터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흑자를 내기 시작하였다.[34]

1999년에 MP3 휴대전화 및 3D TFT-LCD 모니터를 세계 최초로 각각 개발해냈으며, 인텔로부터 1억불 투자를 받았다.

다른 한편 1998년에 부천 전력용 반도체공장을 페어차일드코리아로 넘겼다.

2.5. 2000년대

2000년에 처음으로 국내 기업 시가총액 1위[35]를 차지한 이후 2020년대에 들어선 현재까지 명실상부 한국 증시의 대장주 역할을 맡고 있다.

플래시 메모리 사업에서는 2000년에 512M 제품을 개발하였다. 이때 기존의 낸드의 강자였던 도시바는 2001년 합작을 제안하였지만 삼성은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대한 자신감으로 도시바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 후 삼성은 2001년, 2002년, 2003년에 각각 1G,2G, 4G 제품을 개발했으며, 2003년에는 플래시메모리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부상하였다. [36]

2005년, 인터브랜드에 의해 국제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소니를 제치고 가장 인기있는 전자제품 브랜드가 되었다. 2007년에는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2위의 휴대폰 제조 회사로 등극했고 같은 해 말에 최초로 매출 1,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는 독일의 지멘스와 미국의 휴렛팩커드와 더불어 전자제품 부문에서 TOP 3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2009년 매출 100조 원, 영업이익 10조 원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면서 매출 기준 세계 제일, 순이익 기준 2위의 IT회사가 되었다. 2012년, 전체매출액 200조 원을 돌파했다.[37]
파일:일본 제계가 분석한 '삼성전자의 힘'.jpg


일본의 내로라하는 주요 전자기업들과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 비교. 이것도 2009년의 일이다.

일본 제계가 분석한 '삼성전자의 힘'
크게 반도체, LCD, 휴대폰, 가전 부문으로 사업부가 나뉘었으나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불어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에 대응해 반도체와 LCD로 대표되는 부품 부문과 TV와 휴대폰, 냉장고로 대표되는 완제품 부문으로 사업부를 통합했다. 분야가 완전히 달랐던 삼성테크윈의 디지털 카메라 부문과 삼성SDI플래시 메모리, 낸드플래시도 통합되었고 그 외 삼성전기 LED 사업부도 통합되었다.

2.6. 2010년대

2010년대 들어서는 파브(TV)·하우젠(에어컨)·블루(카메라)·매직스테이션(데스크탑)·싱크마스터(모니터)·지펠(냉장고)·센스(노트북) 등 완제품에 붙이는 브랜드를 모두 정리하고 삼성으로 통일했다. 개별(서브) 브랜드가 경쟁사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삼성이라는 통합(기업) 브랜드가 반도체, 스마트폰 등의 세계적인 성공으로 인지도와 브랜드 가치가 크게 높아지면서 내린 결정이라고 평가받는다.[38] 이후에도 삼성의 브랜드 통합은 계속되어 2018년 시점에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IT 제품에서 남아있는 개별 브랜드는 삼성 갤럭시삼성 오디세이가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신 패밀리허브나 플렉스 워시처럼 일부 프리미엄 제품에 한해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한 네이밍을 주로 사용하거나, 삼성 엑시노스(모바일 SoC)·삼성 아이소셀(이미지센서)·EVO/PRO(SSD)처럼 부품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브랜드를 도입하기도 한다.

원래는 스마트폰의 무선사업부 외에도 디지털이미징(카메라), IT솔루션(개인용 PC) 등의 사업부가 독립적으로 존재했으나 사업부의 부진으로 구조조정을 거쳐 모두 무선사업부 산하 팀 단위로 격하되어 2017년 기준으로는 온갖 잡다한 무선기기를 만드는 무선사업부와 로 정리되었다. 무선사업부의 경우 통폐합을 거치면서 조직이 굉장히 비대해졌다.

2010년 삼성디지털이미징과 광주삼성전자, 에쓰이에이치에프코리아를 합병했다.

2012년 연 매출은 무려 200조다.[39] 1990년대 중반에는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전체 시가총액의 50%, SK하이닉스의 상장시장 거래량이 전체 거래량의 50%를 차지하던 때도 있었다. 다만 하이닉스는 시가총액이 1%도 안되던 회사였고 주식이 엄청 많아서 거래량만 많았다.

2013년 삼성광통신을 합병했다.

삼성전자의 옴니아 II 출시 이후 어마무시한 흑역사를 써내려가자, 많은 전문가들이 삼성은 애플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갤럭시 S을 시작으로 갤럭시 S II에서 애플과의 점유율 격차를 줄이더니 갤럭시 노트로 드디어 애플에게서 점유율을 역전하고 과거 세계 1위 휴대폰 업체인 노키아를 꺾어 세계 1위 스마트폰 메이커 자리를 차지했다.[40] 2015년에는 갤럭시 S6갤럭시 노트5로 격차를 더욱 벌려놓고 있다. 심지어 2016년 7월, 갤럭시 S7으로 북미 판매량 점유율에서 애플을 반짝 추월하고 1위를 하기도 했다. 물론 iOS와 안드로이드의 차이라든가, 판매량 집계 방식의 차이 등등 여러 반론들도 있지만, 최소한 안드로이드 연합군에서 삼성전자가 에이스 노릇을 하고 있다는데는 반론이 없는 편이다.

모바일 OLED 기술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 AMOLED는 세계점유율 99%로 사실 상 독점이다. 하지만 아무리 99%의 점유율이라고 해도, AMOLED가 거의 폐급이던 시절부터 제품에 채용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연구실에 있어야 할 물건이 세상에 나왔다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지금의 OLED도 사실 이런 제품을 사서 써준 소비자들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청색 인광소자가 태생적으로 수명이 짧은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에 2018년 기준으로도 갤럭시 S9에서 번인이 발생하는 등 이슈가 있었고 S21, S22에서는 발열이슈가 있어 제조회사임에 불구 OEM방식을 혼용하는 애플에 비해 아직 갈길이 멀다.

대형 LCD 및 OLED 패널 시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삼성의 RGB OLED 방식은 LTPS 등의 공정을 사용하므로 LG의 WOLED에 비해 대형화가 매우 어려우며, 때문에 삼성은 프리미엄 TV 시장에서 OLED TV 라인업을 포기하고 QLED TV를 제작하고 있다. LCD 패널 및 대형 OLED 패널 시장에서 삼성은 철수 수순을 거쳐 현재는 모바일 OLED에 올인하고 있다. LG 디스플레이가 발을 늦게 뺀 것인지 삼성이 판단을 잘못 한 것인지는 BOE 등 중국계 패널 제조사들의 약진 여부에 따라 갈릴 듯하다.

반도체 시장에서는 세계 CPU 공급량의 2/3을 차지하고 SSD 공급량의 1/3을 차지하는 인텔을 2013년 내 RAM과 SSD, 낸드플래시로 역전시킬 기세다. 거기에 DDR4에서도 특허 가지고 맨날 시비를 거는 램버스에게 선수를 쳤다.

카메라 부문은 DSLR보다 중소형 미러리스에 집중하는 중이었으나 말아먹고 결국 철수했다.[41]

라이벌 애플의 제품에 모바일 AP를 OEM으로 팔았으나 TSMC로 넘어가면서 이쪽 발주는 끊겼다. 디스플레이 또한 애플이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삼성도 LCD 패널 사업을 정리하면서 발주가 끊겼는데... 아이폰X에 OLED 패널을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발주가 트인 상황. 아무리 부품 공급사 후려치기를 잘 하는 애플이라도 독점 공급 상태인 OLED 패널을 후려치는 것은 불가능해서 삼성에게 상당히 비싼 가격에 현존 최고 스팩의 패널을 공급받는다는 후문이다.

2014년 들어 삼성전자를 이끄는 주요 사업 부문인 IM부문이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세 둔화에 실적 악화가 도래하자 위기론이 고개를 들었다.[42] 실제로 2014년 2분기에 전분기 대비 매출은 2%, 영업이익은 15% 감소하며 이른바 어닝쇼크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환영향으로 인한 악재였음을 발표하며 다음 분기에는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2014년 9월 현재 증권가에서는 3분기에도 삼성전자의 상황은 좋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영업이익이 6조 원 대에 머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43] 여기에 주요 시장 중 하나인 중국에서 스마트폰 점유율이 2위로 밀려난 사실은 이 위기론에 더욱 힘을 실어줬다.

2014년 동안에는 이러한 실적 부진에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내부에서는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반토막 실적 예감에… 삼성전자마저 구조조정에 떤다라는 기사에 따르면 갤럭시 알파의 디자인도 오래 전 고안된 것이었으나 높으신 분들에 의해 자꾸 미뤄지다 뒤늦게 출시 된 것이라고 한다. 갤럭시 S5의 디자인이 혹평받으며 갤럭시 시리즈 디자인에 높으신 분들의 취향이 반영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는데, 반쯤 사실로 보인다.(...)

2014년 기준, 어닝쇼크 이후 조금씩 불안해 보였던 삼성전자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의견들이 힘을 더욱 얻었다. 카운터포인트 리서치 부문장 톰 캉은 (삼성전자가) 고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중저가 시장에서 지지 않기 위해 필수적 조치를 취해야 다한고 지적하기도 했다. 즉, 애플과의 무리한 경쟁은 일단 접어두고 중저가 시장에서라도 살아남으라는 지적.[44]

2014년 10월 7일에 발표된 2014년 3분기 실적에서는 영업이익 4조 1천억원을 기록했다. 위에 나와있듯 9월까지만 해도 나쁘게 잡아 6조원으로 예상된 것에 비해 2조 원이나 낮은 실적이 나오며 2분기 연속 어닝쇼크를 기록했다. 이는 10조 1,600억 원이었던 2013년 동기 대비 60% 하락한 수치이며 5년 만에 가장 큰 하락폭이다. 특히나 스마트폰을 담당하는 무선 사업부의 실적이 크게 악화되어, 대표 모델인 갤럭시 S5의 부진과 중국 업체의 약진으로 인한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부진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택에 15조 원 규모의 반도체 시설 건설에 투자했다.

2015년 10월 7일에 발표된 2015년 3분기 실적에서 영업이익 7조 3000억원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는 2분기 영업이익보다 5.80%증가한 실적이며 지난해 3분기 실적에 79.80%나 급증한 걸로 시장에서는 어닝 서프라이즈라는 반응이다. 삼성전자 영업이익 7조3천억원 '깜짝실적'(종합2보) 참고.
<rowcolor=white> 사업부문 구분 2015년 3분기 2014년 2013년
<colcolor=white><colbgcolor=#034ea2> CE <colcolor=white><colbgcolor=#034ea2> 매출액 33,044,945 22.4% 50,183,135 24.3% 50,331,515 22.0%
영업이익 438,205 2.2% 1,184,325 4.7% 1,673,343 4.5%
IM 매출액 78,553,207 53.3% 111,764,544 54.2% 138,817,219 60.7%
영업이익 7,908,699 39.0% 14,562,885 58.2% 24,957,741 67.8%
반도체 매출액 34,378,243 23.3% 39,729,902 19.3% 37,436,579 16.4%
영업이익 9,990,399 49.3% 8,776,442 35.1% 6,887,978 18.7%
DP 매출액 20,961,132 14.2% 25,727,169 12.5% 29,837,116 13.0%
영업이익 1,996,987 9.9% 660,181 2.6% 2,980,563 8.1%

단위는 백만원, 옆의 %는 각각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CE는 텔레비전, 세탁기 등의 소비자 가전, IM이 핸드폰과 태블릿, 반도체는 말 그대로 반도체고, DP는 디스플레이를 의미한다. 15년 3분기는 누적 기준이다.

4분기 실적은 삼성전자, 2015년 4분기 실적발표 참고. 2015년 전체로 사업부문별 영업이익을 계산해 보면 반도체 12조 7천 억 원, IM 10조 1천 억원, DP 2조 3천 억 원, CE 1조 2천 억 원이다.

2016년 1분기 실적 발표 이후, 과거 어닝쇼크의 위기를 완전히 회복한 삼성전자의 주식이 연일 급등하여 원달러강세로 약세인 다른종목 가운데 홀로 독주하고 있다(...) 덕분에 코스피 지수가 2000P선을 회복하는 경이로운 상황. 그리고 브렉시트라는 역대급 복병을 만나 장중 1900P선으로 후퇴...

2016년 2분기에는 영업이익 8조 1,000억원이라는 수치가 나와 삼성의 최근 실적중 가장 높은 수치를 달성했다.

2016년 8월 18일에는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집중매수하면서 주가가 1,640,000원으로 올라 사상최고가를 경신했다.[45] 하지만 갤럭시 노트7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주가가 9월 12일 1,465,000원까지 곤두박칠 쳤으나, 2016년 12월 7일 현재, 주가가 177만 2천원으로 사상최고가를 경신했다. 시가총액은 250조를 눈앞에 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출시된 구글 픽셀/픽셀 XL, 아이폰7/Plus, LG V20 중에서 대체 할 갤럭시 노트7 이상급의 폰이 없다면서 50만명에 가까운 이용자들이 환불/교환을 거부하자, 외국인 순매수가 증가하면서 다시 주가가 올라갔다.

거기다가 삼성전자가 카오디오, 자동차 전장 사업을 하는 하만 인더스트리를 2016년 11월에 인수하자 주가는 더 올라갔다. 하만은 25여개의 유명 브랜드를 소유한 그 사업 부문의 1인자이다.

그리고 인적분할을 실시하는 것으로 사실상 가닥을 잡고 이 같은 방향을 2016년 11월 29일 이사회 이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7년 들어 이재용이 구속되고, 삼성물산 합병에 대해 3대 승계가 목적이 아니냐는 의심이 커지면서 삼성전자에서는 40조에 가까운 자사주를 소각하기로 결정하였다. 인적분할은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자사주의 의결권을 부활시켜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만큼, 자사주 소각은 사실상 인적분할안을 폐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CE 부문은 2016년 기준 매출 48조·영업이익 3조 5천억을 기록했다. IM 부문은 2018년 기준 매출 100조, 영업이익 11조 4천억을 기록했다. 여기서 2016~2018년의 삼성전자의 실적을 볼 수 있다.

2016년 프린팅솔루션사업부를 에스프린팅솔루션으로 분사시켰다.

2017년 들어 나타난 메모리 가격 상승과 초과수요에 힘입어 1분기에 9.9조의 영업이익을 달성하였다. 이는 역대 영업이익 중 2위에 해당하는 실적이다. 1분기는 새로 내놓은 폰도 없었고 회사 내적으로도 그다지 호재가 없었음에도 이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에 2분기의 성적에 엄청난 기대가 쏠리고 있다. 자사주 소각에 따른 주주가치 상승과 더불에 2분기 실적에 대한 기대 때문에 삼성전자의 주가 또한 2017년 6월 현재 240만원을 넘나드는 고공행진을 했다. 2분기 영업이익이 13조에 이르러 세계 1위를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으며, 이런 추세라면 2017년에 반도체 기업 순위에서 인텔을 제치고 드디어 1위를 할 수도 있다는 예측도 나왔다.

마침내 2017년 7월 7일, 증권사들의 예측을 뛰어넘은 14조의 2017년 2분기 실적을 잠정 발표하며 어닝 서프라이즈를 달성하였다. 이는 역대 최초로 애플의 영업이익을 뛰어넘는 실적이다.

2017년 3분기 실적에서는 애플에 추월당했다.

2018년 1월 31일,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 1주를 액면가 100원짜리 50주, 즉 1:50 액면분할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거래소, 금융위원회 등에서 삼성전자가 지나치게 높은 주가(명목주가 250만원 이상)를 보이고 있어 개인투자자들의 접근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2010년 이후 계속하여 삼성전자한테 액면분할을 요구하였는데, 삼성전자가 8년만에 이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기사 이에따라 2018년 3월 23일 정기주주총회1월 31일에 바로 소집하였으며(원래는 2월 하순, 그러니까 주주총회 일정 30일 전에 소집한다), 정기주주총회 때 안건으로 상정하여 처리하기로 하였다. 주식시장에서의 반응은 환호 일색. 삼성전자가 1:50으로 액면분할하게 되면, 보통주 총 주식 수는 64억 주로 폭증한다. 결국 5월 4일 액면분할한 신주권이 상장될 예정이다.

2018년 5월 4일 1:50 액면분할을 끝내고 시초가 53,000원에 변경상장되었다. 기사

2019년 11월에는 창사 50년만에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출범됐다.

2019년 삼성전기로부터 PLP 사업을 넘겨받았다.

2019년 포브스가 선정한 전 세계 2,000대 기업 중 13위[46]를 차지했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기업 순위에서는 7위[47]를 기록했다. 2019년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서는 15위를 차지했다.[48]

사업부문별 2017-2019 매출액 및 영업이익 (단위: 조원)
<rowcolor=white> 사업부문 구분 2017년 2018년 2019년
<colcolor=white><colbgcolor=#034ea2> CE 매출액 44.60 16.7% 42.11 15.6% 44.76 17.3%
<colcolor=white><colbgcolor=#034ea2> 영업이익 1.80 3.3% 2.02 3.4% 2.61 12.5%
IM 매출액 106.67 39.9% 100.68 37.2% 107.27 41.6%
영업이익 11.83 21.8% 10.17 17.1% 2.52 12.1%
DS 반도체 매출액 74.26 27.8% 86.29 31.9% 64.94 25.2%
영업이익 35.20 64.8% 44.57 74.9% 14.02 67.2%
DP 매출액 34.47 12.9% 32.47 12.0% 31.05 12.0%
영업이익 5.4 10.0% 2.62 4.4% 1.58 7.6%
하만 매출액 7.1 2.7% 8.84 3.3% 10.08 3.9%
영업이익 0.06 0.1% 0.16 0.3% 0.12 0.6%

2.7. 2020년대

2020년 코로나19 속에서도 매출 236조 8,100억 원, 영업이익 35조 9,900억 원을 기록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29.6% 증가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기존 결산배당금 354원[49]에 특별배당금 성격으로 1,578원을 더해 1주당 1,932원의 배당을 주기로 했다. 총수 일가 역시 배당을 통해 상속세를 납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투자자들이 삼성전자 실적과 배당 공시를 확인하기 위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사이트(DART)에 몰려 사이트에 일시장애가 발생하기도 했다. # # #

2020년, 인터브랜드의 기업 브랜드 가치 평가 순위에서 세계 5위를 차지했다.[50] 2021년 기준, 시가총액으로 세계 10위권 규모의 기업이다.[51] 아시아 기업에서는 4위.[52]

2021년 사상 첫 분기매출 70조를 돌파, 3분기 매출만 74조, 영업이익 16조원을 기록했다.

2022년 IM 부문과 CE 부문이 DX 부문으로 합쳐졌다. 2021년 12월 13일 무선사업부의 명칭을을 MX사업부로 변경하였다. MX사업부는 기존의 IM사업부 대신에, DX사업부 산하의 사업부로 재편되었다.
파일:삼성투자금액.jpg
2021 EU 산업 R&D 투자 스코어보드

2021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2021 산업 R&D 투자 스코어보드'(2021 EU Industrial R&D Investment Scoreboard)에서 세계 4위 규모의 R&D를 집행한 기업으로 꼽혔다.

경제 전문 매체 포브스가 선정한 '2022년 세계 최대 기술 기업(The World's Largest Tech Companies in 2022)' 순위에서 4위로 하락했다. 이는 지난해 기록한 2위에서 2단계 하락한 순위다. #

포브스에서 발표한 2021년 세계 최고 고용주 순위 중에서 (World's Best Employer) 1위로 선정되었다.

2021년 8월 삼성전자가 Home Connectivity Alliance(HCA)의 창설멤버로 참여했다.#

2022년 6월 30일, 세계 최초로 GAA(Gate-All-Around) 기술을 적용한 3나노(nm, 나노미터) 파운드리 공정 기반의 초도 양산을 시작했다.#

2022년 7월 7일, 이날 개장 직전 공시를 통해 지난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77조원, 영업이익 14조원의 잠정실적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20.94%와 11.38% 늘었다.

2022년 7월 14일, 삼성전자가 업계 최고 속도인 ’24Gbps GDDR6(Graphics Double Data Rate) D램’을 개발했다.

2022년 9월 15일, 삼성전자는 新환경경영전략을 선언했다.

2022년 9월 15일, 보스턴컨설팅그룹이 발표한 세계 지속가능한 혁신 기업 중 6위로 발표했다.

2.7.1. 위기

가트너에 의하면 2023년 매출 399억달러로, 각각 609억 달러와 487억 달러를 기록한 NVIDIA, 인텔에 밀리며 2년 만에 반도체 업계 매출 1위를 내주었다.[53] 엔비디아는 기록적인 한 해를 기록했으며, 인텔은 한 해동안 매출이 역성장했으나, 메모리반도체 부진으로 인해 삼성전자가 더욱 큰 폭으로 매출이 급락하면서 생긴 결과다. 또한 대침체 직후인 2009년 이후 14년만에 국내기업 영업이익 1위 자리에서 내려왔다. 1,2위는 각각 현대자동차기아가 차지했다.

2024년 5월 삼성 파운드리 최대 고객 중 하나인 구글이 새 스마트폰에 탑재할 G5칩 생산을 TSMC에 위탁 생산할거란 미국과 대만 언론이 보도했고# 현재까지도 TSMC에 위탁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영업이익의 경우 반도체 사업부가 전년 대비 무려 39조 가까이 줄어들며 적자전환했던 점이 패인으로 작용했다. 매출의 경우 메모리 사업 36%, 네트워크 30%, 비메모리 25% 순서로 가장 큰 폭의 매출 감소를 겪었다. 이에 메모리반도체 단가 상승, 삼성 가우스갤럭시 링, 삼성 글래스 등을 준비하며 재도약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노조 '무기한 파업'..."라인 멈추게 할 것" / YTN

2024년 7월 8일부터 3일간 삼성노조가 창사 이래 처음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고수한 총파업을 벌였다. 노조측 생산 차질을 목표로 내걸었으며 무기한 파업 가능성도 열었다. 삼전노조는 1만 3천여명의 조합원이 가입하고 있으며 파업 결의 대회에 4000명 가량이 참가하였다.# 3일간 파업 예보와 다르게 파업 25일만에 8월5일 현장 복귀를 밝혔으면 앞으로 게릴라 파업과, 준법투쟁 등을 통한 장기 투쟁으로 저항할 것을 밝혔다.#

2024년 9월 삼성전자 인도 첸나이 공장에서 전체 노동자 1800명 중 1000명이 파업에 나섰다. 이들은 주 35시간 노동(?), 임금 2배 인상(?), 고용세습(?) 등을 노조는 요구하고 있으며 무허가 행진# 또한 강행하고 있다.[54] # 10월 8일 노동자들에게 특별 인센티브 등의 혜택을 주기로 하며 합의에 도달했다는 인도 매체 보도가 있었지만 CNBC는 일부만 현장에 복귀했을거라고 보도했다.# 이번 인도 파업 영향으로 중국을 벗어나 인도로 진출하던 애플·엔비디아·구글 같은 빅테크들이 인도로 진출하는 것을 망설이게 되자 인도 주정부가 개입에 나섰다. 한편 노조는 파업을 이어갈거라는 방침을 밝혔다.#[55][56]

2024년 10월 2일 삼성전자 동남아, 호주, 뉴질랜드 법인 등 인력을 10%~30% 감원할 것이라고 블룸버그와 로이터에서 보도했다. 인도와 남미에서는 이미 10% 감원을 마쳤고 감원규모를 확대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
돌파구는 어디에…'삼성만의 겨울' 오나 / SBS

2024년 삼성 핸드폰 수요 부진과 삼성 디램 수요가 감소하며[57] 10월 발표한 3분기 실적이 증권사 추정치보다 매출은 -2.3%, 영업이익은 -15.6% 낮은 성과를 보이면서[58] 삼성전자 위기론이 불거졌고 삼성전자 반도체수장 전영현 부회장이 직접 사과문까지 게시하였고# 파운드리 분사론#[59][60], 이재용 책임론#, 삼성전자 부도설# 등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고대역폭메모리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경쟁력이 내려가면서 영업이익 8조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61] 또한 삼성전자의 밥줄과 같은 스마트폰 사업이 비수기로 분류되면서 스마트폰 사업부 전망도 하향조정되었다.[62]

2024년 10월 8일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직장’ 순위가 5년만에 마이크로소프트에 1위 자리를 내주고 3위로 강등되었다. 반도체 부문 적자로 낮은 성과급, 창사 이후 이뤄진 첫 총파업 등으로 악화된 노사관계가 원인으로 확인된다.#[63]

3. 주식 관련

4. 기타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에 가면 삼성전자의 역사적 사건과 제품을 알아볼 수 있다.


[1] 1993년은 이건희가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제창한 해이기도 하다. 이후 삼성은 2000년대 D램 경쟁 시장에서 이른바 '램버스 사태' 등을 겪고 TV 시장에서도 성장하며 일본 전자 기업들을 확실히 제치고, 2010년대엔 지지부진하던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갤럭시 시리즈를 성공시키는 등 주목할만한 성장을 이어간다. 3류 제품 싸게 팔던 국내 대기업 수준에 머무르던 삼성전자가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 된 것도 이시기.[2] 영상의 설명은 윤서영이 담당했다.[3] 이 이야기는 당시 이병철의 사돈이자 금성사의 오너 구인회의 귀에도 들어갔고 머지않아 두 사람이 독대한 자리에서 이병철이 구인회에게 "내 전자 사업을 할라카네"라고 말하자 구인회가 극대노했다고 한다. 이 당시 구인회는 "사돈이 하는 업종에 뛰어드는 게 도리에 맞는 일이냐"며 이병철을 향해 "상종 못할 사람"이라는 악담을 퍼부은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이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치열한 신경전이 이어지게 된다. 이들은 사돈이기에 앞서 지수공립보통학교 동문인 오랜 고향 친구이기도 했다. 효성그룹조홍제 역시 마찬가지.[4] https://www.samsung.com/sec/aboutsamsung/company/history/[5] 정작 창업자인 강기동 박사는 얼마 못 가 삼성이 원하던 메모리 관련 기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질당했다. # 이후 삼성은 비메모리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 중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한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도 생산했다.[6] 냉매를 팬으로 돌려 전달하는 방식.[7] 냉장고 안쪽에 냉매가 지나가는 가는 파이프를 붙여 냉기를 직접 전달하는 방식.[8] 쿼츠 시계가 아니라 디지털 전광판을 가진 시계를 말하는 것이다.[9] 정확히는 직경 6.7인치(악 17cm)이다.[10] 사실 이 모델은 삼성이 독자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일본 마쓰시타 전기RQ-548S 모델을 베낀 것이다.[11] 얼마나 대박을 터뜨렸으면 삼성이 카세트라디오를 팔아서 번 돈으로 64K DRAM을 개발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12] 1974년 이건희가 사재로 인수했던 한국반도체를 1978년에 삼성전자공업이 인수하고 이름을 바꿨다.[13] 『삼성반도체통신 10년사』, 191-192쪽; 강진구,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 (고려원,1996), 203-213쪽.[14] 한국경제신문 특별취재팀, 『삼성전자, 왜 강한가』 (한국경제신문, 2002), 36쪽.[15] 대만의 TSMC 같은 경우는 비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 생산 역사가 길어서 엄청난 점유율을 보여주고 있다.[16] 『삼성반도체통신 10년사』, 193-194쪽; 『삼성전자 20년사』, 549-550쪽.[17] 김광호, “끝없는 도전”,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전자공업 30년사』 (1989), 419쪽.[18] 미국 현지법인의 첫 상호는 SSTII(Samsung Semiconductor & Telecommunications InternationalInc.)였으며, 1983년 8월에 TSI(Tristar Semiconductor Inc.)로 개명된 후 1985년에 SSI(Samsung Semiconductor Inc.)로 변경되었다.[19] 64K D램을 성공적으로 개발하자는 의지를 위해 64km였으며 저녁을 먹은 후 무박 2일 동안 실시되었다. 행군 도중에 꺼낸 도시락에는 D램 개발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편지한 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윤호, “64km로 시작된 반도체 신화”, 김대용 외, 『미래를 설계하는 반도체』 (사이언스북스, 2000), 108-110쪽)[20] 『삼성반도체통신 10년사』, 200-205쪽; 한상복, 『외발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76-82쪽.[21] 『삼성반도체통신 10년사』, 260-264쪽; 한상복, 『외발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106-110쪽.[22] 강진구,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 229쪽.[23] 강진구,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 227-229쪽[24] 이때 로고도 三星電子 한자 붓글씨에서 삼성전자 한글 인쇄체로 바뀌었다.[25] 진대제, “일본을 이기는 것이 소원입니다”, 『삼성전자 30년사』, 296쪽; 진대제, 『열정을 경영하라』, 24-36쪽[26] 『삼성전자 30년사』, 296-297쪽; 진대제, 『열정을 경영하라』, 14-23쪽.[27] 진대제, 『열정을 경영하라』, 19-20쪽.[28] 송성수, “추격에서 선도로: 삼성 반도체의 기술발전 과정”, 『한국 과학사학회지』 제30권 2호 (2008), 518쪽.[29] 송성수, “삼성 반도체 부문의 성장과 기술능력의 발전”, 177쪽; 『삼성전자 30년사』, 306,400쪽.[30] 『 삼성전자 30년사』, 298-299, 400쪽.[31] 접근 시간이 빠른 장점이 있음[32] 비용이 저렴하고 내구성이 높은 장점이 있음[33] 알파칩은 다섯 층의 금속배선 기술을 적용하여 속도를 크게 증가시킨 마이크로프로세서이다.[34] 『삼성 60년사􋺸, 391-392쪽; 진대제, 『열정을 경영하라』, 95-104, 112-114쪽.[35] 2000년 말 기준 약 25조 원의 시가총액을 기록하였다. # #[36] 최영락․이은경, 『세계 1위 메이드 인 코리아, 반도체』, 115-119쪽; 신장섭․장성원, 『삼성 반도체 세계 일등 비결의 해부』, 77-82쪽.[37] 삼성전자 4분기 영업익 8조 8천억...연매출 2백조 원 돌파 참고.[38] 반면 LG전자는 백색가전 부문에 여전히 디오스(냉장고), 휘센(에어컨), 트롬(세탁기) 등의 개별 브랜드를 유지 중이다.[39] 삼성전자 '매출 200조' 시대… IT기업 최초 참고.[40] 이외에도 다양한 스마트폰 라인업이 주효했다.[41] 다만 계속 고전 중인데다 소니에서 최초로 풀 프레임 미러리스를 출시했는 데 바디 가격이 1499달러, 1999달러다. 거의 200백만 원에 가까운 갤럭시 NX는 결국 삽질이 되었다. 게다가 또 다시 철폐 위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펜탁스는 풀프레임 제품이 나오고, 캐논니콘은 원래부터 업계 최고 수준이고, 올림푸스파나소닉은 무섭게 올라오고 있고 후지필름은 크롭 제품군이지만 제품의 디자인과 성능이 뛰어나다. 물론 NX1으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나 초기의 실수가 너무 컸고, 후에 높으신 분들 때문에 칼질 당한 NX500도 크롭 제품군 중에서 끝판왕 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홍보나 후속 제품, 렌즈, 어느 것 하나 충족하지 못했다.[42] 사실 위기론 자체는 갤럭시 S3 출시했던 2012년부터 제기된 바가 있었고 전문가들의 지적도 여러 번 있었다.[43] 삼성전자, 3분기 '어닝쇼크' 공포... 영업익 6조 현실이 될까 참고.[44] "삼성전자, 애플과 경쟁하다 中 샤오미에 발목" 참고.[45] 시가총액은 무려 232조원을 넘어섰다.[46] 기업의 매출과 수익, 자산, 시장가치 등 4개의 지표로 세계 최대 규모의 상장 기업을 선정한 결과다. 아시아 지역 기업 중에서는 6위이나 다만 1위부터 5위까지가 모두 중국 회사인데, 중국 기업은 그 성격상 국영기업처럼 운영되는 경우가 잦아 실제로 삼성전자보다 큰 기업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실제로 화웨이중국 인민해방군 출신 장교에 의해 설립되자마자 이동통신 장비 사업분야에서 1위를 찍은 배경에도 중국 공산당의 비호가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한국 정부도 삼성전자 밀어주기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통상마찰을 빚을 정도의 노골적인 푸싱은 중국 말고 아무도 안 한다.[47] 아시아 기업 중에서는 1위. 2위는 토요타[48] 중국의 내수형 국유기업을 제외하면 토요타에 이어 아시아 기업 중 2위다.[49] 참고로 삼성전자는 3개월에 한 번씩 배당을 준다.[50] 위 4개 기업은 미국 빅테크 기업인 MAGA.[51] https://companiesmarketcap.com[52] 위로는 알리바바 그룹, 텐센트, TSMC 뿐이다.[53] 파운드리 포함 시에는 TSMC가 1위지만, 통상적으로 산업 특성이 다른 파운드리, 장비, 소재 관련 업체들은 제외한다.[54] 이미 첸나이 삼성공장 임금은 지역 평균 임금의 2배 넘는 임금을 받고 있다.[55] 결국 합의도 없었던거다.[56] 빅테크들이 제조업이 덜 발달된 인도를 막대한 비용을 들여 개발하고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면서 까지 중국을 포기해야하는지 의문이 생긴 것이다.[57] 이례적으로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실적은 서프라이즈를 기록하였다. 이는 디램 수요 부진도 삼성에 국한된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58] 증권사들이 20%~30가량 (14조)하향조정하여 최대한 보수적으로 잡은 기준치(10조)조차 충족 못한 결과(9조)다.[59] 삼성 파운드리 2024년 3분기 적자만 1조원이 넘는다.[60] 다만 분사와 관련해서는 한-필리핀 비즈니스포럼에 참석한 이재용 회장이 전면 부인하였다.#[61] 아이비케이(IBK)투자증권과 유진투자증권에서 각각 영업이익 전망치를 8조8천억원, 8조9천억원으로 낮췄고 현대차증권에서도 기존 12조 전망에서 8조5천억원으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62] 모바일·네트워크 부문의 영업이익이 지난해 4분기 2조7천억원에서 올해 4분기 1조원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63] 다만 10위권에 머무르는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가 유일하다.[64] 액면분할 후의 가격으로는 약 57,000원.[65] 2024년 11월 14일 기준 동시호가에서 49,900원까지 내려갔다.[66] 2024년 8월 23일부터 10월 14일까지 9월 2일 하루를 빼고 외국인들은 삼성전자를 매도하고 있으며 그 규모는 12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부분 개인투자자들이 삼전을 레버리지를 끌어서 매수하는 중이다. #[67] 물론 압도적인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매년 진행하는 Apple에 비해서는 자기자본이익률도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주가 변동성이 심한 편이다. 순이익이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국내 주식들 중에선 그나마 장기간동안 우상향 기록을 보여줘서 사람들이 삼성전자 주식을 사는 것이다. 제2의 삼성전자가 될거라고 여겨졌던 LG생활건강이 10년 천하로 끝났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에는 삼성전자는 수십년동안의 순이익 성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68] 대표적으로 공모 펀드를 운용하는 많은 기관투자자들. 펀드의 투자 테마나 스타일과 상관없이 삼성전자를 포트폴리오 내에 편입시키려는 펀드매니저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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