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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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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창 시절2. 정치 초년생3. 민선 5기 충청남도지사
3.1. 선거과정3.2. 주요공약3.3. 직무수행
4. 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
4.1. 선거 과정4.2. 주요 공약4.3. 직무 수행4.4. 제19대 대통령 선거4.5. 제19대 대선 이후의 행보
5. 몰락
5.1. 형확정 이후5.2. 출소 이후

1. 학창 시절

1965년 5월 1일, 2남 3녀 중 셋째(차남)으로 태어났으며[1], 충청남도 논산군(현 논산시) 출신이다.[2]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름인 '희정'.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매우 좋아하던 아버지가 희[3]자 돌림의 항렬자를 쓰고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인 정희(正熙)를 뒤집어 희정(熙正)으로 지었다고 한다. 참고. 어린 시절의 본인을 박정희 유겐트로 표현하며 꿈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의 안희정이 체격도 좋고 어릴 적부터 탁구, 야구 등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며 육군사관학교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

당시 배경 없는 소시민이 출세하는 방법 중 대표적인 수단으로 사관학교 진학을 통한 출세가 선호된 점도 있다. 지금이야 고시 폐지가 '사다리 걷어차기' 논란까지 빚지만, 당시로선 고시도 우골탑 소리를 듣는 대학을 나와서도 또 몇 년을 공부해야 하니 소시민들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그에 반해 사관학교는 일절 학비 부담도 없고, 재깍 장교로 취업까지 시켜주는 데다 장교에 대한 대우도 좋았고, 장교로 있다가 진급이 잘 안 되어 포기하고 중년에 전역을 하게 되어도 그 후에도 장교 출신들은 일반회사나 관공서 취업에서조차 다른 중년 남성들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선호되었다.

중학교 때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5.18 민주화운동을 보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장폴 사르트르의 책 구절 중 '지식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창녀다'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학력 과정이 묘한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충남대 재학생들과 같이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서 몽둥이 찜질당하기도 했다 한다. 학교가 문제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교장에게 "문제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내는가?"라고 항의하다 위의 불온 서적 문제까지 겹쳐서 제적 처분을 받았다고. 고등학교 1학년 때 교과서를 전부 팔아버리고 사상계 등의 잡지와 사회과학 서적만을 읽었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 내려가 농사일이나 돕고 있었는데, 가을 추수가 한창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너 고등학교 안 가면 내가 죽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안희정의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안희정 본인도 전통적인 효(孝)를 중요시하는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터라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에 뜻에 순순히 따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성남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지 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부모님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결국 얼마 가지않아 다시 자퇴하고 만다. 참조.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안희정은 본인의 누나가 야학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던 제일교회의 '형제야햑'에서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혁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말 그대로 백수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다.

일단 혁명은 해야겠으니 혁명 서클에 가입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혁명 서클은 대부분 대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17살 청소년을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 안희정은 독특하게도 학생 운동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대에 간 이유도 학생운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라고[4]... 처음에는 재수종합반을 다니다가 3개월 다니고 때려치우고 국영수에서 150점 만점, 암기과목 170점에서 반 정도 맞고 체력장에서 20점 만점을 받으면 고려대 정도는 갈 수 있겠지 싶어서 독학했다고 한다. 당시 암기과목이 4개라 사회경제, 한국지리는 자신있는 과목이라 열심히 풀고 나머지 두 과목은 한 번호로 밀었다고... 수학은 다른 거 안 하고 수학의 정석만 2번 팠다고 한다.

시간도 많이 없고 하여 7달 중 2달 가량 밤을 새가며 국영수만 팠다고 한다. 결과는 대입시험에서 만점 340점 중 270점을 맞으며 고려대 철학과 합격.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생 운동만을 위해 입학한 것이였으니 학부 과정을 충실히 공부했을 리 만무하고, 오로지 지하 서클 활동에만 전념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운동권 생활을 이어가다 1987년,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수감되면서 제적되었고, 출소 이후 정치에 입문하면서 대학은 계속 휴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두번째로 수감되어 악명높은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면서 안희정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만[5], 청년 안희정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 경찰의 심문이었다. 취조실에서 안희정에게 "그래, 네가 혁명 해서 권력 잡았다고 치자! 그럼 너 농업정책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외교정책은?" 하는 식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을 낱낱이 던졌는데, 안희정은 저런 기초적인 질문에 변변한 답변도 하지 못했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곤 그저 '전두환 타도', '파쇼 타도', '반미'라는 세 가지 단어밖에 없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다.

육체에 이어 정신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안희정은 결국 함께 학생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자백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지만,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도 1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이상을 끝없이 돌아보며 공부하는[6] 시간을 가지게 된다. 현재까지도 극단적인 수단을 고수하는 NL계열 인사들과는 달리 젊은 나이임에도 원숙한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7]

이후 잠깐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복학하여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2. 정치 초년생

1989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측근인 김덕룡 국회의원실에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 초기에는 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비서로 일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여 꼬마민주당에 참가하며 버티려 하다가 당시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끼자 견디지 못하고,[8] 1992년에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년 정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대학도 복학한 끝에 마침내 졸업했다.

당시 서른을 앞두고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이미 다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뒤여서 같이 캠퍼스를 누비며 어울릴 사람도 별로 없던 와중에 교정의 벤치에 앉아 쓸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사색을 많이 하고는 했다. 3당 합당 때, 노무현3당 합당에 크게 반발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다. 즉, 이 시점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거의 처음부터 행적을 동반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비단 안희정 말고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시절부터 노무현과 같이 한 인사들도 있었으나, 현재 기준으로 안희정을 제외하면 상당수가 정계에서 은퇴를 했고, 게다가 안희정 본인도 후술할 성추행 사건으로 정계에서 불명예 은퇴를 하게 되었다.

1993년, 같은 의원실의 강원도 출신의 이광재가 지방자치연구회로 안희정을 끌어들였다. 이후로 1994년부터 노무현 캠프로 들어갔는데, 정작 그를 끌어온 이광재는 15대 대선 정국에 꼬마민주당의 합당으로 한나라당 캠프를 관람(?)하고 나온 게 함정.

이후 2001년 당시 노무현의 보좌관을 맡으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이광재강원도지사와 함께 좌희정 & 우광재라고 불릴 만큼 노무현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었지만, 정작 참여정부 하에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더군다나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관련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서 공직을 맡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노무현은 안희정의 출판기념회 축사 영상을 찍으면서 "내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나는 뭐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노무현의 지시로 대선자금을 총대맸다지만, 어쨌든 1심에서 징역 2년 6월 및 추징금 13억 1천만 원이 선고됐으며, 2심에서 징역 1년 및 추징금 4억 9천만 원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서 실형을 살게 되었다. 자세한 건 안희정/비판과 논란 참고.

당시 재판 과정이 인상적인데, 최후 진술의 경우 보통 감형을 위한 변명으로 일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희정은 "자신을 엄벌에 처해서 승자도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게 해달라."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기사. 또한 감형도 없이 형기를 채우고 만기출소했다.

출소 직후인 2005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산하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연구위원직을 역임했다. 2006년에 노무현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2007년에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입집행위원장직을 맡아, 참여정부 재평가 작업을 수행했다. 2008년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의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상술한 선거법 위반 전력이 발목을 잡아 낙천됐다.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노무현을 수사하면서 출소한 직후에도 박연차로부터 백화점 상품권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노무현의 자살로 수사가 전격 종결되면서 유야무야 되기도 했다.

3. 민선 5기 충청남도지사

36대 (민선 5기) 충남지사를 역임했다.

3.1. 선거과정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에 당선[9]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선거결과는 상당히 접전이었는데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의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2위를 기록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와 고작 20,023표 차이(2.30%)였다.

안희정 지사의 고향인 논산에서 박상돈 후보를 22,497표 차이[10]로 이겨서 당선될 수 있었다.[11]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연설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3.2. 주요공약

3.3. 직무수행


4. 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

4.1. 선거 과정

도지사 재선 의사를 밝히고, 새누리당정진석 후보와 경쟁하였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는 10% 이상의 꽤 큰 차이로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를 앞섰다. 선거 직후 출구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접전으로 나와 지지자들을 긴장하게 했으나, 개표가 시작되고 투표함을 연 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정진석 후보를 약 8.26%(73,679표)차로 이기고[12] 재선에 성공하였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와 비교해 충남 모든 기초자치단체 지역에서 득표율이 올랐으나[13], 공교롭게도 고향인 논산 지역에서만 근소하게 득표율이 감소[14]했다. 이는 제5회 지방선거에서 선거가 삼자구도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산 사람들이 논산이 고향인 당시 안희정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삼자구도임에도 득표율 60%이상)했던 결과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논산의 인구가 6회 지방선거 때 5회 지방선거 때보다 근소하게 감소한 영향도 있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비해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 10만 표 정도 더 득표했고 득표율도 10% 정도 올랐다. 5회 지방선거는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이번 6회 지방선거는 양자구도로 선거가 진행됐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5회 지방선거에서 보수계라고 분류할 수 있는 한나라당, 자유선진당[15]과 진보계로 분류할 수 있는 민주당의 득표비는 약 5 : 4 정도로 보수계 정당의 득표를 단순 합산하면 보수세가 우세하였다.

하지만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합당하여 새누리당이라는 거대여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회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과의 득표비는 4 : 5 정도로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의 안희정 후보가 우세하였다. 지역에서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이 크게 앞서는 걸 생각하면 충남에서 안희정 지사의 개인경쟁력을 알 수 있게 된 선거라는 평가가 있다. 이 때문에 충청권의 대표주자로 일컫어지게 된 면도 있다. 5회 지방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를 선택했던 유권자의 30% 정도가 6회 지방선거에선 안희정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있다.

고향인 논산에선 제5회 지방선거에 이어 2회 연속 60%이상의 득표(60.21% - 36,205표)를 했다.

제6회 지방선거 과정, 정진석 후보와의 TV토론에선 충청 대망론을 언급하며 충청도 출신의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는 지역 사람들의 열망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 토론 내용을 언급하자면 정진석 후보는 안희정 지사를 깎아내리는 데 급급했지만, 안희정 지사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지역주민들과 이야기하는 식으로 맞받아쳤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쪽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끌렸겠는가?

4.2. 주요 공약

민선 5기와 같다.

4.3. 직무 수행

파일:Gallup 2017 1-6 .jpg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민선6기 광역단체장 직무 수행평가에서 14년 하반기~16년 하반기까지 단 한 번도 1위를 내려놓지 않았던 김기현 울산시장을 넘어서 직무 수행 긍정평가 1위에 올랐다. 그것도 2012년 조사 실시 이후 역대 최고수치인 79%로. (여당 프리미엄+차기 대권주자) 안희정 지사 + (자유한국당 당적을 유지+울산의 주력 산업 불황) 김기현 시장이라는 요인이 있던 덕분이지만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부정 평가 역시 9%로 매우 적은 편이다.

4.4. 제19대 대통령 선거

2017년 1월 22일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360명의 방청객들 앞에서 공식 출마 선언을 했다.대선출마선언 전문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 동안 사람들과 즉문즉답 시간을 가졌다는 게 인상적이었다는 평이 많았다.동영상 링크 또한 저녁 8시 망치부인 방송에 참여하여 직업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비전을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네이버 종합 검색어 1위가 되기도 했다. 박수현공주시 국회의원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행사를 진행하였고 직업적인 행사 진행자들이 아니라 약간 행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원봉사자들이 진행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평이다.

출마 선언 이후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정책과# 문재인 전 대표의 군 복무 1년 단축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등 서서히 대선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차근차근 정책을 선보이며 준비해 나가는 문재인 상임고문이나,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대선에 임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의 다른 주자들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선언 직후 문재인 고문을 향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형제를 때리는 정치는 하지 않는다."라며 타 후보들에 대한 견제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내세워 대중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현 정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밝히며 자신을 어필하는 데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그가 코앞으로 다가온 2017 대선보다는 2022 대선을 겨냥하고 장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냔 전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이러한 '차차기 준비 프레임'을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 여권의 남경필 지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이러한 프레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토로한 바가 있다.# 사실 안희정이 정말로 차차기를 겨냥했다고 해도 이를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렵다. 차차기를 위해서라면 19대 대선 때 인지도 및 지지도를 끌어 모으는 게 중요한데 '저는 이번엔 참가하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면 당연히 대중들의 지지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찌되었든 19대 대선 자체에 열중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경제 정책 관련해서는 역대 제6공화국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을 확 바꾸지 않겠다고 했고 # 국민은 공짜 밥을 원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 비정규직 노동유연화는 시대 흐름상 어쩔 수 없다고 발언했다. #

2017년 1월 31일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안희정을 만나 여야를 넘어서 돌풍을 일으키자며, 사실상 탈당을 권유했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그러나 김종인 전 위원장은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며 #, 안 지사의 대변인격인 박수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안희정 지사는 "어째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

한때 문재인 후보마저 위협하며 인기몰이를 했던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이 잦아들고 안희정 후보와 비슷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던 박원순 후보가 불출마 선언을 하여 유망한 대선주자로 조명받던 중, 2017년 2월 1일 반기문 후보가 돌연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지지율 2위권으로 성큼 뛰어 오르게 되었다.

2월 8일 바둑 기사 이세돌과 바둑을 두며, 그를 '국민 후원회장'으로 영입했다. #

2월 13일 SBS 프로그램 '대선주자 국민면접'에 출연했다.

2월 16일 상술한 이세돌을 비롯한 선거캠프 후원회장 15명을 발표했다. #

노무현 대통령처럼 전작권 환수를 주장했다. #

민주당 이철희 , 기동민 , 어기구 등이 안희정을 지지하면서 캠프에 합류했다 네이버뉴스 연합뉴스[17]

10년 일했으면 1년은 유급휴가를 하는 '안식년 제도'와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주장했다. 한겨레 , 한국일보[18]

4.5. 제19대 대선 이후의 행보

광화문 치맥파티를 마지막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은 편이다.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인하여 충남도청에서 도민들에게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한 바 있으나 정부의 대응을 우선시 하고 있다.

태안 유류 피해 극복 10주년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오랜만에 언론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촛불혁명의 기적, 시민이 주권인 나라, 살아있는 민주주의 상징인 문 대통령님을 모시고 행사를 치러서 더없이 영광"이라며 "꼭 모시고 싶었다"고 인사말을 하며 대통령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였다. 태안 유류 피해 사건이 참여 정부 시절에 발생하기도 했고 국민적 협력을 통해 극복했다는 점에서 작년과 올해의 촛불 정국을 비슷한 상징성이 있어 안 지사가 문재인 대통령 섭외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차기 대권 주자라는 위치에서 충남과 안 지사 본인의 위상이 많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계획에 충남도에서 제안한 과제가 다수 포함되고 일선 공무원들이 중앙 정부와 만날 때 야당 때와 대접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

사실상 경기지사 출마를 공언한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3선 도전이 유력시 되는 박원순 시장과 달리 중앙 진출을 노릴 것이라는 이야기만 돌 뿐 내년 행보에 대한 별다른 소스가 없었는데 돌연 9월 27일 서울 노원구를 찾아 강연을 해 이목을 끌었다. 서울 노원구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지역구로 안 대표가 의원직을 사퇴한 지금 재보궐 선거 대상이다. 안 지사는 노원구청장과 인연이 있어 강연했을 뿐 별 다른 의미가 없다며 중앙 진출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원 병 출마를 거의 기정 사실화 하고 노원보다는 자유한국당 박찬우의원의 벌금형으로 재보궐 선거 대상인 천안 갑 출마를 요구 하고 있다.

언론의 별다른 주목 받는 일 없이 도정과 외부 일정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11월 28일, 강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이른바 '쓴소리'를 해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 강연에서 "이견의 논쟁을 거부하지 마라.", "우리 이니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발언했는데 안 그래도 '선의', '대연정' 발언으로 회색분자 의심을 받고 있는 안 지사가 이런 말을 하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 그중에서 강성 지지자들이 적폐청산에 초 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극렬하게 반발했고, 민주당 차기 당대표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안 지사가 당 내 대주주라고 할 수 있는 친문 성향 당원들의 행동을 비판하자 언론 역시 이에 주목했다. 자세한 내용은 안희정/비판과 논란을 보자. 이후 강연에서 자신은 문재인 정부가 성공 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떤 이견도 없다고 수습하는 모양새를 보여주었는데 일각에서는 차기 당대표 행보를 위한 몸풀기 발언 아니었냐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에서 내년 지방선거를 위해 현직 지자체장들을 상대로 연 자체 평가에 본인이 출석 하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 이미 중앙 정계 진출에 마음을 굳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본인은 일정에 바빠 대리인을 보냈을 뿐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 했으나 불출석 할 경우 페널티가 있다고 사전에 공지 했고 박원순 시장을 비롯해 평창 올림픽 준비를 바쁜 최문순 강원도지사도 출석했는데 홀로 출석하지 않아 쉽게 이런 해석이 가라앉고 있지 않다.

12월 18일, 충남지사 3선 불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오늘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새로운 도전자들한테 기회를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3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열리는 내년 재보궐선거 도전도 현재로서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안희정이 도지사 임기를 마친 후 2018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직에 도전하거나, 정치적 휴식기를 가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해외로 유학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에게 크게 패한 이유 중 하나가 더불어민주당 내 지지 기반의 차이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안희정 지지자는 당권 도전을 바라고 있는 느낌이다. 다음 경선 유력 후보인 박원순, 이재명은 국회 경력이 있지 않다. 그래서 안희정은 당 대표 경력을 가지는 것을 바란다.

5.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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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8년 3월 5일 JTBC 뉴스룸에 안희정 충남지사의 성폭행 혐의를 고발하는 폭로가 보도되었다. 이 주장의 당사자는 정무비서 김지은으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안 지사로부터 8개월째 4차례의 성폭행과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고[19] 다음 날 고소를 할 예정이라 밝혔다. 반면 안 지사 비서실의 해명은 "부적절한 관계임은 이해하지만 합의한 관계이며 강압이 없었다"고 밝혀 최소한 성관계 여부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안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 명의로 비서실의 해명은 거짓이라며 합의하 성관계가 아니었음을 시인했다.

JTBC 보도 직후 열린 민주당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출당 및 제명조치가 진행되었으며, 3월 6일 새벽 본인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발표하고 입장을 표명했다. "합의에 의한 관계라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었다"며 "도지사직을 사퇴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3월 6일 공식적으로 더불어민주당에서 제명 및 출당 조치 되었다.#

5.1. 형확정 이후

2018년 8월 14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019년 2월 1일 2심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하여 1심 재판을 뒤집고 징역 3년 6월을 선고하여 안희정은 법정구속되었다.[20] 이후 상고하였지만 2019년 9월 9일 대법원에서도 징역 3년 6월 실형을 확정하여 성범죄자가 되었다. 이로써 정치계에서는 완전히 퇴출되었다.

2020년 7월 4일 모친상을 당했다. 특별 귀휴를 통해 상을 치르러 나갈수 있긴 하나 코로나-19 상황이기 때문에 귀휴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형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안팎의 전현직 정치인들이 대거 조문을 오고 문재인 대통령도 조화를 장례식장에 보내 추모했다. 그러나 '어려운 사정'[21]이나, '나도 옥중에서 아버지를 잃었다'[22]이라는 일부 인사들의 발언, 그리고 '내일의 성범죄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겠다'던 추미애 당시 법무부장관의 조문은 정의당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많은 반발을 샀다.

정의당에서는 이런 행태를 두고 "민주당 대표, 원내대표,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걸고 조화를 보낸 행동이 정말 책임을 통감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오늘과 같은 행태가 피해자에게, 한국 사회에 '성폭력에도 지지 않는 정치권의 연대'로 비치진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국회 페미니스트 노동자 모임 국회페미에서는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의 모친상을 개인적으로 찾아 슬픔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정치인들이 보낸 조화의 비용을 국민의 혈세가 아닌 개인 비용으로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연합뉴스), (조선일보)

이와 같은 조문 관련 공격에 대해 '그럼 지인 부모상인데 조문도 못 가느냐?' '안희정 본인상도 아니고 그 어머니가 죄 지은게 아니지 않느냐?' 등 싸늘한 시선의 반박도 나왔으며, 포털 댓글들 역시 정의당을 비난하는 기류가 강했다. 정치권에서도 정의당 외의 다른 정당들은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았다. 실제로 민주당이 아닌 제1야당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철천지원수 간에도 상을 당하면 조의를 표하는데 안 지사 모친상에 조화 보냈다고 비난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라며, 특히 과거에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김정일 조문을 주장했던 것을 꼬집어 “수십만 북한 주민을 정치범수용소에 가둬 죽이고 연평도 포격전천안함 폭침으로 우리 국민과 청년 장병들의 목숨까지 빼앗아 간 반인륜 범죄자의 죽음에는 애도를 주장하고 안 전 지사 모친상에는 조화도 못 보내게 하는 건 도대체 무슨 기준인가”라고 비판했다. #

이로 인해 2020년 3월에 출간되었던 안희정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의 수기인 '김지은입니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하였다. 또한 뒤이어서 같은 해 7월의 박원순 자살 사건과 이은 박원순 성추행 사건에서 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의원의 '조문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판결 이후 2년여의 시점이 흐른 2022년 1월 16일, MBC 방송을 통해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후보의 배우자 김건희가 안희정을 옹호하는 발언이 전파를 타게 되었다. 김건희는 "난 안희정이 불쌍하더만. 둘이 좋아서 한 거를. 얘(안희정 전 지사)가 강간한 것도 아니고"라고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김지은이 웃긴 애 아니야? 지가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소리를 질렀어? 뭐했어? 둘이 합의하에 했으면서"라고 성폭력 사건의 실체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김씨는 "안희정을 문빠가 죽인 거지", "(안희정을) 대통령 후보(에서) 아예 잘라 버리려고 문빠에서 죽인 거지" , "보수에서 죽인 게 아니라 지그들 내부에서 싸워서 (안희정을) 내친 거야"라고 주장하며 해당사건이 정치공작일 가능성을 재기했다. 한편, 김씨는 "나랑 우리 아저씨(윤석열 후보)는 지금도 안희정편이야"라고 발언하였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윤석열 후보 역시 안희정을 무고한 희생자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2022년 3월 8일, 부친 역시 노환으로 별세하면서 수감 중에 양친을 모두 여의게 되었다. 역시 형집행정지를 받아 당일 오후 10시 40분에 여주교도소를 출발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부친상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번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두고 정의당 내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이탄희, 박지현을 필두로 한 민주당에서도 반발하는 구도가 되기도 했다. # 또한 아내와도 2021년 9월, 협의로 옥중 이혼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3]

5.2. 출소 이후

2022년 8월 4일, 사면이나 가석방도 없이 만기 출소했다. 십수명 가량의 지인들과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2명[24]이 마중을 했으며, 기자들과 카메라에 고개를 숙인 후 아무 말도 없이 지인들과 곧바로 경기도 양평군으로 향했다.

출소 이후로는 언론에 일절 나오지 않고 사실상 칩거 중에 있다. 가벼운 일반 경범죄 기록만 한 번 이상이라도 있어도 정계 입문이나 복귀는 어려운데, 이쪽은 자그마치 성범죄라는 중범죄로 형을 산 만큼 정계 복귀는 힘든 상황이다.[25] 본인의 고향이자 정치 기반인 충청남도 지역이 아닌 연고도, 정치적 기반도 주소지도 없는 양평으로 간 것도 지역 주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우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차피 안희정 본인도 정치를 하면서나, 옥중에서 수감 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해봤겠으니 더 이상 정치 생활에 미련은 없겠지만[26], 한 때 대권 잠룡으로까지 평가받았던 거물로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퇴장이다.

양평에서 거주하는 이유는 지인이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

출소 이후 김지은 측이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안희정 본인은 성폭행 유죄와 손해배상과는 관련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

2023년 11월 22일, 피해자 김지은의 최초 조력자인 문상철 전 충남지사 비서관이 쓴 '몰락의 시간'이 출간되었다. 문상철 비서관이 주장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도정 초기에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의전 중독, 여성 편력, 외모 집착 등의 모습을 보이며 권력에 취하고 그 카르텔에 잠식되어갔다고 한다. #

2023년 12월 2일, 양평에서 지지자들과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 2024년 5월 경에 다시 모임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총선 이후 여러가지로 활동을 재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범죄로 불명예스럽게 정계에서 퇴출된 만큼 다시 정계로 돌아와 공개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 22대 총선 이후 다시금 근황이 안 잡히는 것으로 봐서는 비공개로 조용히 만났거나 아예 만남 자체가 무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 이건 호적상이고, 출생신고가 늦었으므로 실제로는 음력 1964년 12월 1일에 태어났다.[2] 안희돈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형이다.[3] 한자까지도 같다![4] 당시 서울대-연세대-고려대학생운동메카였다.[5] 자그마치 1주일을 잠도 재우지 않고 두들겨 팼는데, 나중엔 오줌을 누면 오줌의 색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였다고 한다.[6] 안희정 본인이 말하길, 정보의 양이 많아지는 것이 공부가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이 많아지는 것이 공부라고...[7] 이 때문에 훗날 2018년 안희정은 성추문 사건이 터졌을 때,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면서 뼈아픈 경험을 겪고 그만큼 정진하고 분발해서 스스로를 성장시켰는데도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한 모습으로 정치인 인생을 마감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느냐!" 라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8] 몇 년간 그가 정치계를 보면서 여야 의원들이 가리지 않고 방송이나 주목받는 자리에서의 앞과 뒤가 다른 모습을 많이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극도로 실망스러웠다고 한다.[9] 42.2%, 367,288표[10] 안희정 36,197표(61.24%), 박상돈 13,700표(23.17%)[11] 안희정 이전에 논산은 비교적 보수성향을 띄던 지역이라 박상돈 후보에게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12] 52.2%, 465,994표. 충남의 기초자치단체 중 예산, 부여, 태안을 제외한 충청남도의 모든 지역에서 정진석 후보를 이겼다.[13] 득표수는 충남의 기초자치단체 지역중 인구가 감소한 지역도 있기 때문에 득표율은 올랐으나 득표수는 감소한 지역이 있다.(공주)[14] 6회 지방선거 논산지역 득표수는 제5회 지방선거에 비해 고작 8표 증가[15] 물론 지역정당을 모두 보수계 정당이라고 말할 순 없으나, 자유선진당은 강령과 정책 등으로 볼 때 분명한 보수계 정당이었다.[16] 다만 이는 리얼미터 조사에서만이며, 갤럽 조사에서의 단골 1위는 김기현 울산시장이다. 물론 갤럽 조사에서도 안 지사는 긍정평가가 김기현 시장, 김관용 지사와 함께 Top3에 든다.[17] 참고로 여기에 박영선의원도 지지를 표명했는데 박영선 의원이 들어오면서 안희정캠프에 지지를 표하던 사람들이 지지를 철회한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18] 요컨대 경제성장이 둔화돼서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기 힘들어진 만큼 사회적 타협을 통해 기존의 일자리들을 재분배하자는 입장이다. 기존 근무자들의 근무시간을 줄이고 줄어든 시간만큼의 업무량을 맡을 신입 사원을 고용한다고 보면 된다.[19] 미투운동이 확산될 때에도 성폭행과 성추행은 이어졌다고 한다.[20] 직접증거는 없었다.[21] 김부겸 前 의원.[22] 고대 후배인 이인영 통일부장관 내정자. 다만 옥중에서 상을 당했다는 것 자체만 같고 혐의에는 차이가 있는데, 이 쪽이 옥살이하던 것은 민주화 투쟁 때문이었지 성범죄 때문이 아니었다.[23]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된 예의를 표하는게 무슨 상관이냐는 의견도 적지않다.[24] 김종민, 강준현 의원. 김종민 의원은 안희정의 고향인 논산 일대가 지역구였으며, 과거 안희정계로 구분될 만큼 가까웠다. 강준현 의원은 안희정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역시 안희정과 가까웠다. 실제 이들은 당시 인터뷰에서 인간적인 도리를 지키기 위해 개인 자격으로 나왔다는 것을 매우 강조했었다. 참고로 이후 강준현 의원은 친명이 되었고, 김종민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미래로 옮겼다. 하지만 김종민 의원 역시 의도치 않게 민주당 후보가 공천 취소를 당하면서 사실상 민주당 몫으로 세종특별자치시 갑으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돼 다시 친민주당 성향이 되었다.[25] 당장 같은 범죄를 저지른 박희태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박희태는 사건 발발 당시 이미 정계를 은퇴한 뒤였던데다 팔순이 다 된 고령이어서 별 타격은 없었고, 안희정과 달리 집행유예가 나와서 수감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박희태도 이 사태로 인하여 에서도 제명되고 국립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게 되었다. 법적으로도 10년간 피선거권을 상실한 상황이다. 2022년 기준 58세인 점을 감안하면 68세, 즉 칠순이 다 되어서야 피선거권을 회복하게 된다. 물론 중간에 복권을 받으면 출마는 가능하겠지만 무슨 범죄로 형을 살았는지를 감안하면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복권은 매우 어려우며, 설령 복권을 받아도 민주당이 안희정을 공천해줄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렇다고 보수정당이 미쳤다고 안희정을 받아줄 리는 더 없고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해도 전과 기록 탓에 이미지가 굉장히 나빠서 당선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상 정계 복귀는 죽을 때까지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형을 살고도 사면되어 정계에 복귀한 뒤 80줄이 다 될 때까지 오랫동안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거나 활동 중인 서청원이나 박지원의 사례들도 있지만, 그들은 본인들 혼자 저지른 범죄였지 최소한 남한테 폐를 끼치지는 않았고 성범죄가 아니라 돈 문제였기에 안희정과는 경우가 다르다.[26] 그 이전에 이미 민주당에서도 고위직을 몇 번 했었고, 충남지사까지 연임한 만큼 충분히 성공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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