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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9:54

원소(삼국지)/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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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군웅할거 이전
1.1. 최고 명문가의 천출1.2. 청년 시절1.3. 6년상1.4. 재야의 거두1.5. 정계입문1.6. 십상시의 난1.7. 난세의 초래
2. 생애: 군웅할거 이후
2.1. 기주 점거2.2. 계교 전투와 하북 평정2.3. 협천자 논쟁2.4. 조조와의 대립2.5. 공손찬의 머리를 허도로 보내다2.6. 저수와 전풍을 숙청하다2.7. 관도대전2.8. 말년2.9. 사후

1. 생애: 군웅할거 이전

1.1. 최고 명문가의 천출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지만, 이는 가문의 본적이 여남군 여양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되었을 뿐, 실제로는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洛陽)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원소 본인이 남긴 글에서 자신이 낙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동탁 진영에서 원소를 비하할 때 수도에서 나고 자라서 외모만 반듯한 겁쟁이니 변경에서 실전으로 백전연마한 자신들의 상대가 안 된다고 호언하는 기록들에서 잘 드러난다.

고조부 원안(袁安)부터 4대가 모두 삼공(三公)의 직위를 얻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나 태생은 다소 복잡하다. 원소를 낳은 어머니가 노비인 것도 한몫 한다.

원소의 할아버지 태위 원탕(袁湯)은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원평(袁平)과 차남 원성(袁成)은 젊은 나이에 죽었고 실질적으로 후사를 볼 정도로 장성한 건 삼남 원봉과 사남 원외였다. 원소의 호적상의 아버지는 원성, 원소를 양육해준 수양아버지는 원봉인데, 원소의 친아버지가 원성인지 원봉인지 기록이 갈린다.

진수정사 삼국지에 원소의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이 고조부 이래로 삼공을 지내 큰 집안이었다고만 적어놓았다. 배송지는 원소의 친부가 원성이라고 주장했다. 원소가 삼년상의 대상으로 삼은 아버지는 호적상의 아버지 원성이다.[1]

원소의 어머니는 형식적으로 두 명이다.
분명한 것은 원소가 천민 출신 에게서 나온 자식인 얼자(孼子)라는 것이다.[6] 유교를 근본으로 삼은 후한 시기까지 단순한 서자들은 출세에 큰 제약을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노비인 얼자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당시는 과거 제도로 사람을 뽑아 쓰던 시대가 아니었는지라,[7] 징소/벽소 등으로 천거를 받았는데, 계급사회인 당시로서는 어머니가 노비라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혈통상 평판이 좋게 나오기 힘들었다. 후에 원술이 공손찬에게 편지를 보내 원소를 비난할 때 "우리집 종놈"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8] 천민 출신 첩의 취급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성적 노리개였고, 후에 원소는 이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6년상을 치르는 등 극도로 유교적인 행보를 보여야만 했다.[9]

그래도 황실의 권위가 바닥을 기는 시대에서 단순한 집안의 얼자도 아니고, 명문 중의 명문, 그러니까 제후에 버금가는 집안의 얼자였기 때문에 신분상의 이점이 작용하긴 했다. 실제로 원소가 한 시대의 기인으로 평가받게 되는 6년상 이전에도 비록 하급에 속하기는 하지만 관료생활을 한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아 원소의 출신성분은 분명히 제약으로 작용했으나, 워낙 가문이 좋았기 때문에 그 점이 어느 정도는 상쇄되지 않았나 보는 시각도 상당히 크다.

원소의 생년이 언제쯤인지는 불명이나 토탈 워: 삼국이 발매된 후 한 한국인 유저[10]레딧에 올린 글이 있다.레딧 출처, 한글 요약 번역 이 글에 따르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1.2. 청년 시절

어린 시절부터 삼공부 고위 관료들의 주목을 받아서 고관의 하급부관인 낭으로 일하다가 20세에 벽소되어 복양현장에 임명되었는데 청렴하고 깨끗하다는 평판이 두루 있었다. 태평어람 권 389 영웅기에 따르면 원소는 의지할 곳 없이 자랐고, 어려서 낭이 되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위엄과 예절이 출중해 원소가 움직여 보이는 곳마다 (사람들이) 원소를 모방했다.[11]

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다. 명사들의 일화집인 세설신어에는 조조와 원소의 젊은 시절 일화가 있다. 둘이 다른 집의 신부를 잡아서 겁탈하려다가 원소가 가시덤불에 걸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조조가 "도둑이 여기 있다!"라고 외치고 원소는 기겁을 하며 단숨에 뛰쳐나왔다. 몇몇 판본에서는 직후 원소가 칼을 빼들고 "너 이 새끼 감히 날 팔아서 혼자 살려고 해?!"라며 진심으로 빡치자 이에 조조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그래도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네가 전력으로 빠져나왔고 우리 둘 다 살았지 않았느냐"라고 하자 원소도 "생각해보니 그 말도 맞다"라며 칼을 버리고 같이 웃어제꼈다는 후일담도 있다. 판본에 따라서는 조조가 변명한 게 아니라 진짜 그걸 노린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1.3. 6년상

이때 원소의 적모(嫡母=원봉의 정부인)[12]가 죽었는데, 원소는 이를 계기로 벼슬을 그만두고 원씨의 본적이 있는 여남으로 내려가 시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지냈다.[13] 탈상을 마친 후 곧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으나 상복을 입지 않았던 것을 추감하여 아버지 원성의 삼년상을 연이어 지냈다. 이런 과할 정도로 극진한 효심으로 인해 이름이 널리 퍼졌으며 그 덕분인지 수많은 빈객이 찾아왔고 원소는 그 빈객의 신분고저를 막론하고 언제나 예를 갖추고 겸허한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에 빈객 중 그 누구도 원소를 나쁘게 말하지 않고 호평일색을 남기고 떠났다. 이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한번이라도 원소를 만나보고자 찾아온 사람들로 그의 집은 문전성시였고 주변 거리가 마비되었을 정도였다.[14]

이 6년상이 어떤 고행인지 감이 잘 안잡힐 수 있는데, 당장 이 절반인 삼년상만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중노동으로 후한 말만 해도 삼년상을 약소화하는 풍조가 컸고 정식 삼년상을 치른다는건 그 하나만으로도 효심이든 예식에서든 엄청난 시선을 모아오는 행위였다. 조선시대에서도 정식 삼년상 하려다 줄초상 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그 6년상을 조선시대 문종이 똑같이 했었는데 문종은 이로 인해 지나치게 약화된 나머지 약골 체질이 아니었음에도 단 2년만에 요절했다. 원소가 급사한 이유 중 하나로 이때 입은 신체 및 정신적 고통이 중년이 돼서 관도대전 패배의 스트레스와 함께 폭발해서 그런 것이라는 얘기도 나올 정도다.[15]

물론 6년이나 되는 동안 이 '효행'이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지 않을지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으나,[16] 6년상을 치르는 내내 꾸준히 빈객이 왔음에도 구설수 하나 없었단 말은 곧 고된 시묘살이를 수많은 선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하나의 흠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그 당시 명사 중 하나였던 하옹도 이에 대해서 극찬했다.

또한 원가의 제일 대표적인 명칭으로 '사세오공을 지낸 명문가'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환관세력과 결탁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대다수의 청류파는 그와 입장상 적대하는 위치였는데, 원소는 이 육년상을 통해 빈객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당고의 금 사건 등을 포함해 중앙정치의 부정을 성토하며 청류파들의 마음을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본인도 청류파로서의 입지를 늘렸다. 즉, 원소는 명문가 천출이라는 출신성분과 탁류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원가의 일원이라는 이미지를 무려 6년간의 복상이라는 고행을 거침으로서 씻어내고 극복해낸 것이다.

원성이 원소의 친부였든 양부였든, 원소가 시묘살이를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여남에 머무르며 청류파로서의 입지를 굳혀간 것은 사실이며, 이 과정에서 천출인 원소가 다수의 청류파 인사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원씨의 문객과 고리 등의 지지기반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1.4. 재야의 거두

6년상 이후 탈상을 마치자 곧바로 낙양으로 이주했다. 당시 낙양은 이보다 앞선 176년 5월에는 당인을 보호하던 영창태수 조란(曹鸞)을 찢어죽여 사대문에 효시한 뒤, 당인 및 그 보호자에 대한 연좌제가 시행되어 이들의 문객과 고리 그리고 5촌 이내의 친척 중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파면시키고 임용기회를 박탈하는 칙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이 때문에 낙양에서 청류파는 거의 전멸하였고, 십상시 등 환관 세력이 날뛰어 부정부패가 들끓었으며 지사(志士)들은 대부분 낙양에서 도망치려 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한서 하옹열전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원소는 배짱 좋게도 이런 환관의 천하에서 당인이었던 하옹과 함께, 환관세력의 안방인 낙양으로 들어가 은밀히 당인들을 보호하고 십상시에게 억울하게 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왔다. 또한, 그를 중심으로 모인 당인들과 매양 장차 환관 체제에 타격을 가하고 전복시켜 정치를 바로잡을 방안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원소가 이토록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6년상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원가가 환관들과도 매우 긴밀히 결탁했던 탁류파의 거두였기 때문이다. 연좌제를 천하에 공표한 이상 원소문제를 공론화 시키면 그 연좌제탓에 원소가문까지 엮어야 하는데, 원소는 어미가 어떻든 간에 아버지가 원가의 가주였다. 그리고 그 원가는 환관들의 대표적인 우군중 하나이며 동시에 그동안의 역사로 나라 방방곡곡에 수많은 연줄이 있기 때문에 원소 하나를 족치려 했다간 이들 모두를 적대해야만 했다. 즉 원소는 자신의 어미가 어떻든 간에 자신도 '원씨'이긴 하단 점을 이용해 환관들에게서 치외법권을 암묵적으로 허락받고 활보하고 다닐 수 있던 것이었다.[17]

이때문에 십상시는 섣불리 원소를 제거할 순 없었고, 회유든 뭐든 해보기 위해 그를 불러보자 하였으나 원소는 그때마다 꾀병을 핑계로 거절하면서도 잔존한 청류파들의 구심점이 되어 청류파로서의 입지를 극대화시킨다. 물론 원씨 가문도 자신들을 이용하고 환관들과 적대하는 원소를 좋게보진 않았다.

1.5. 정계입문

다만 모종의 이유[18]탓에 결국 하진의 아래에서라곤 하지만[19] 그의 연(掾)[20]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임관 뒤 학행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관리의 비리를 감찰 및 탄핵하는 시어사로 승진했으나, 평소 사이가 나빴던 원술(袁術)이 상서[21]로 있었기에 결국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186년 이후에는 호분중랑장(虎奮中郞將)이 되었는데 당시 종정이었던 유우와 함께 황실의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갑훈, 유우와 모의하여 근위대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마침 장온이 갑훈을 경조윤으로 전임시키도록 조정에 건의했고, 갑훈을 꺼리던 건석(騫碩)이 이를 적극 밀어붙여서 통과시키는 바람에 불발에 그쳤다.

188년, 서원팔교위가 창설되자 원소는 서원군 2인자격인 중군교위로 전임되었으나 애초에 군권이 없었던 십상시를 위해 편성된지라 실권은 서원군 총사령관이자 십상시중 하나인 건석이 독점했기에 사실상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대장군(大將軍) 하진이 권력을 잡자 원소는 다시 하진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1.6. 십상시의 난

하진은 본디 천민이었으나 환관들에게 줄이 닿아 여동생을 후궁으로 넣으면서 낭중으로 벼슬을 시작했고, 여동생이 영제의 총애를 받음에 따라 승진을 거듭해 하남윤까지 출세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군으로 임명, 진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막강한 위세를 얻은 인물이었다. 영제가 서원팔교위를 창설하고 환관인 건석을 수장으로 삼은 것은 중앙군을 강화해 하진을 견제하기 위함으로 서원군은 황제의 직할군이며 건석은 비록 교위에 지나지 않지만 황제를 대리해 그 직할군을 지휘하는 역할이었으므로 군부의 최고위인 대장군도 상군교위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건석 또한 평소 하진을 벼락출세한 무식쟁이로 여겨 항상 지나치게 깔보았는데, 영제의 임종을 지켜며 하진을 죽이고 진류왕 협을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하진은 이를 간파하고 선수를 쳐 외조카인 변황자를 황제로 옹립한다. 이를 기점으로 양자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때 원소는 하진의 측근 장진을 통해 하진에게 먼저 접근해 환관 세력을 축출할 것을 권하는 등 직속 상관인 건석을 배신하고 하진을 부추겼다. 비슷한 시기 호분중랑장을 맡고 있던 원술 또한 하진에게 포섭되면서 하진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고, 불안해진 건석은 서원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하진과 군사적으로 전면적인 대결을 벌이고자 했으나 하진과 가까운 환관들의 밀고로 간파당해 실패하고 처형당한다.

건석이 이끌던 서원군은 해체되어 하진의 휘하로 편입되면서 하진은 모든 권력을 독점했으며, 서원군의 2인자 격이었던 원소는 이 과정에서 하진의 핵심 측근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 것으로 보인다. 하진과 '친한' 문객 장진을 통해 조심스럽게 설득하던 때와 달리 서원군 해체 시점부터의 원소는 하진의 면전에서 직언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본디 십상시의 후원으로 출세한 하진은 건석을 제거한 시점에서 기존 십상시 등 환관세력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입장이었으나 원소를 필두로 하는 강경파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원소는 수도의 행정, 사법을 총괄하는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어 환관세력 축출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원소는 외부 군벌 세력을 편입하려 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동탁으로, 이는 원소의 사실상 큰 실책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십상시의 난 항목 참조.

그러나 하진이 십상시를 축출하던 도중에 암살당하면서, 원소는 도성을 장악하기 위해 선수를 쳐서 십상시 중 하나인 장양(張讓)이 임명한 사례교위 등 친환관계 관료들을 모두 살해한 뒤 궁정에 돌입해 환관세력을 철저히 주살했다. 그러나 장양과 남은 환관들이 천자와 유협을 데리고 궁 밖으로 도주하였고, 마침 지방에서 올라와 있던 동탁이 원소보다 먼저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는 바람에 결국 정권 장악에 실패하고 말았다.

정권은 뜬금없게도 지방 군벌이었던 동탁에게 넘어갔으며, 원소는 황제인 유변을 폐위하고 진류왕 유협을 새 황제로 추대하려던 동탁과 대립하던 끝에, 결국 기주(冀州) 발해군(渤海郡)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폐위를 둘러싼 동탁과의 언쟁 도중 폐위를 강행하겠다는 동탁의 협박에 칼을 뽑아 읍하며 "천하에 힘있는 자가 동공 하나만은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 것은 유명한 일화.[22] 여기에 덧붙여 그는 자신이 받았던 부절을 낙양성문에 걸어 언젠가 동탁의 목을 치리라는 정치적 쇼맨십을 드러낸다.

동탁은 원소에게 분노하여 현상금을 걸고 원소를 잡아들이려 했지만, 하옹과 오경 등이 원소와 친했으므로 원소를 두둔하며 회유할 것을 권했다. 동탁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원소의 명망이 높고 가문 또한 큰 것을 봤으므로 이에 동의해 원소를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임명하여 원소의 세력권을 추인하는 등 회유에 나섰다. 원소는 태수직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본래의 직함이었던 사례교위를 자칭했다. 사례교위는 수도를 통치하는 장관이며 관리의 감사권도 가지는 관직이다. 소제-하진 정권의 실력자였던 원소는 동탁이 이끄는 새로운 제실(유협)을 유명무실한 동탁의 괴뢰 정권으로 보며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전 정권의 정통성을 대표한다는 의미가 있어 뒤에 언급될 정통성 분쟁과도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

동탁은 또한 어사중승 한복을 기주목으로 삼아 원소를 견제하도록 했다. 원소는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한복이 부관들을 보내 행동을 낱낱이 감시했으므로 거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교모가 삼공부의 지령을 날조해서 각지의 거병을 부추기는 격문을 돌렸고 원소와 동탁 사이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던 한복이 마침내 원소의 거병을 승인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기 이전에 동탁은 나름대로의 민심 수습책으로써 영제 시대의 부패한 분위기를 청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청류파의 명사들을 대거 기용하며 각지의 자사, 태수로 임명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게 역효과가 되어 이렇게 임명된 태수와 자사들이 모두 원소의 거병에 호응하고 동탁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하면서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게 된다. 반동탁연합이 이렇게 결성된다.

1.7. 난세의 초래

군사를 일으킨 원소는 하북의 여러 국상, 태수들과 함께 하내에 주둔했다. 하지만 기주목 한복은 여전히 업에서 대기했는데 업이라는 지리와 기주목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보았을 때 연합군의 후방의 보급과 군사업무를 총괄한 것으로 보인다. 한복이 이러한 행보를 보인 것은, 종사 유자혜(劉子惠)가 연합에 나서지 말 것을 권하였기 때문이다. 하남 지역에서 거병한 관리들은 따로 산조에 모여 주둔했다.

그 지역에 거점을 둔 제후국이나, 훗날의 절도사와 같은 지방 군벌이 아니라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파견나간 관리들(삼호법에 따라 모두 현지 출신이 아니다)이 서로 연합하고 군대를 조직해 중앙정부를 공격한 일은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이는 동탁 정권이 기존의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겨우 9살이었던 유협을 사실상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던 만큼 그 정통성이 바닥을 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탁은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경악하였고 이에 곧바로 소제를 살해했는데 이는 소제가 연합군의 구심점이 되어 복위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동탁은 그 다음 달에 장안으로 천도를 강행하고 군대를 낙양에 주둔시켜 관동지역에서의 접근을 차단했으며 3월, 호족들의 대다수가 원소에게 귀부하여 원소가 관동지역을 수중에 넣었다는 소식을 듣자 태부 원외와 태복 원기 및 원소의 친어머니와 누이를 비롯한 낙양에 남아 있는 원씨 일가 50인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몰살시켰고,[23] 이후 호모반, 음수, 한융 등 조정의 명사들을 칙사로 보내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지만 원소는 하내태수 왕광을 시켜 호모반 등을 처형하고 시체를 조리돌리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황제의 칙사를 살해하여 수만 명의 군사들에게 조리돌림하는 충격적인 행동을 보였음에도 관동지역의 호족들은 오히려 더욱 원소를 지지했고 전국 대다수의 군현에서 원소에게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켜 거병하기 시작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맞물리는데, 첫째로 당시의 제실은 동탁이 마음대로 기존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운 형태였다는 점과 홍농왕으로 격하된 전 황제를 시해했다는 것, 또 후한 2백 년의 수도였던 낙양을 초토화시키며 무자비한 천도를 강행하고 황실과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싹쓸이하는 등의 광포함에 대비되듯 원소가 그동안 보여 왔던 올곧고 청렴하며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이미지로 인해 당시 호족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던 청류파의 대표로서 평판이 매우 좋았던 것에다가 원씨 일족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표가 더해졌다. 여기에 더해 동탁이 원씨의 고리였다는 점도 호족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한대의 태수나 자사는 사실상 그 지역의 임금에 해당하였고 고관에게 징소되어 정계에 진출한 고리와 문생들은 제후와 신하의 관계처럼 얽혀졌다. 고리와 속관은 자사와 태수를 (사실상) 주군으로 섬겨 충성을 바치고, 자사와 태수는 다시 황제를 구심점으로 삼았다. 동탁은 단경에게 천거되고 사도 원외가 벽소하여 속관으로 삼았으니 원가의 고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소가 관동에서 기의하자 원외와 그 일가를 모조리 도륙했다. 한대의 법률에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어린아이와 늙은이에게까지는 연좌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동탁은 노인과 어린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것도 모자라 몰래 파묻어 묘소조차 세울 수 없게 만들었다. 문생과 고리가 온 천하에 가득한 원씨였으니, 그들 모두의 분노를 산 것도, 원소가 동탁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자 관동지역 전체가 호응한 것도 그저 까닭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원소의 위세는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때 한복은 원소가 지나치게 민심을 얻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원소가 아무리 명성을 드높였다곤 하나 실제적인 관위는 태수에 불과했다. 반면 후한의 대주인 기주의 목이었던 한복은 당연히 원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자금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관위상으로도 원소를 통제하는 상관이 된다. 애초에 동탁은 어사중승(감찰부의 수장)이던 한복을 원소의 감시역으로 파견한 것이다. 원소와 동탁 사이에서의 이득을 저울질하던 한복의 태도로 봤을 때 원소의 거병을 승인한 것은 어느 정도 원소를 통제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계산이 있었고 이후 원소에 대한 지지가 너무 강해지자 통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원소가 쓴 글에서도 한복이 자신과 동탁 사이에서의 득실을 계산하며 계략을 꾸몄다고 적고 있다. 한복은 원소의 군대에 공급하던 군량을 끊으어 원소군을 붕괴시키려 했고 이에 원소는 별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단지 하내에 주둔한 채로 시간을 보낸다.

190년 겨울, 한복이 원소의 군량을 끊은 이후 원소와 한복이 어떤 경위를 거치며 서로 타협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원소는 한복과 함께 당대의 명망높은 황족이었던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고자 시도했다. 동탁은 수도를 불태우고 패악을 저지르며 꼭두각시인 어린 황제는 연락이 끊겨 관동이 무주공산이 되었으니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명망과 위엄을 갖춘 황족을 추대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이었는데, 상기한 이유로 인해 동탁과 장안 조정의 정통성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원소의 지지도와 발언력은 막강했으며 유우 또한 훌륭한 통치와 그 인품으로 당대 인덕의 아이콘으로 여겨질 정도로 오랫동안 모든 계층에게서 존경을 받았기에 헌제와 장안의 조정은 전국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공손찬과 원술을 필두로 한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 외에도 조조 등이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평소 유우와 견원지간이었던 공손찬은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며 원소와 한복 등의 행동을 역모로 규정, 군사를 일으켜 기주를 공격했다.

원소의 이복형제 원술 또한 원소에게 유독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어 원소가 정국을 주도하며 지지를 받는 것을 고깝게 여겼다. 이에 원소와 한복의 행동을 역모로 규탄하며 장안으로 진군해 동탁을 격파하고 황제를 구출할 것을 주장했다. 오서에 의하면 이는 원술 본인이 개인적으로 무군지심을 품어 한 황실의 쇠퇴를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기회로 여겼기에 유우 같은 능력있는 인물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토록 동탁과 장안 조정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했던 원소의 논리는 각 주와 군의 군벌화를 부추기며 중국을 군웅할거의 무질서 상태로 몰고 갔다. 하지만 원소는 물론이고 원술 같은 유니크한 견해를 가진 인물이 아닌 이상 기존 장관들의 대부분도 관직과 법령이 남발되는 무질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바랐던 것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바로잡힐 필요가 있었고, 유우는 명망과 능력면에서 당대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그 중심에 서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편 이 무렵 원술은 남양에 주둔하면서 손견을 내세워 동탁과 접전을 벌였다.[24] 눈치만 보며 나서지 않거나 격파당하던 다른 제후들과 달리 원술과 손견은 정말로 동탁군을 격파했으며 낙양을 수복하였다.

이로 인해 대단히 주가를 올렸으나 동탁 세력은 장안으로 도망쳐서 뿌리를 뽑지 못했다. 원술과 손견은 이대로 장안까지 들이쳐서 동탁을 없애버릴 기세였기 때문에 이를 놔두고 볼 수 없는 원소의 음흉함과 경계심이 번뜩였다. 원술은 전비 조달을 위한 영지에서의 지나친 학정과 수탈로 반대세력을 양산했다. 양주의 명사였던 주흔, 주앙, 주우 삼형제가 대표적이었는데 원소는 주씨 삼형제를 부추겨 원술을 견제했다. 주앙을 예주자사로 임명하며 예주 장악을 지시하고 주앙과 주우가 원술의 근거지였던 예주와 사예 지역의 중간기지인 양성 등을 습격해 탈취한다. 이는 손견군이 주둔하고 있는 노양의 바로 옆이라 손견과 원술의 진격로와 보급에 심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원술과 손견은 결국 낙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주씨 형제와의 싸움으로 발목을 잡히게 된다.

하지만 정작 유우의 추대는 유우 본인이 수차례에 걸쳐 완강히 거절했기 때문에[25] 물거품이 된다. 이에 한복은 유우에게 따로 사절을 보내 영상서사가 되어 연락이 끊어진 천자 대신 국정을 총괄하며 관직의 임명을 맡아주도록 권했으나 유우는 이 또한 거부하였고 오히려 한복의 사자를 붙잡아 참수했다.

유우가 진정한 대인배인 것이 드러나는 것은 한복의 사자를 참수한 시점부터다. 이 이후로는 직책을 받들어 처리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더욱 공경스럽고 엄숙해졌으며 혹 외국의 사절로부터 바쳐진 조공이 있으면 도로가 막혔더라도 모두 운송하여 장안까지 보내는 등 철저히 헌제의 정통성을 옹위하고 신하로서의 위치에 충실했다. 겉으로만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며 속으론 딴 생각만 품고 있던 원술, 공손찬 따위의 군벌들과 달리 오직 조칙에 따를 뿐 끝까지 군벌화하기를 거부했으며 오히려 원소 등을 달래며 장안의 조정을 받들어 따르도록 설득하였다.

하지만 후한 13주 자사, 태수들의 대다수는 유우와 같은 성인이 아니었다. 원소가 호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황제의 칙사를 살해하고 조리돌림한 사건 이후 후한 조정의 권위는 사실상 붕괴되어 장안에 고립되었고, 원소가 유우를 중심으로 붕괴된 체제를 대신할 신질서 수립에 실패하자 중심을 잃은 전국의 관리들은 제각기 군벌화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군웅할거의 시작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진수는 포훈전에서 이 무렵의 원소에 대해 '원소의 무리가 최고로 성했던 시기'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물리적인 세력의 크기로 봤을 때는 당시 원소의 힘은 미약하여 공손찬은커녕 한복에게도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훗날 원소가 경쟁하던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여 하북 4주를 통일하고 호구는 수백만에 수십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며 명실상부한 당대 최강의 세력을 형성했을 때도 저만한 표현을 쓰진 않았다.

따라서 진수의 평가는 물리적인 세력권이나 군사력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 시기의 원소가 지녔던 정치적 영향력에 관해 이야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당시 모든 정치인들과 군벌들이 자기 세력의 생존이나 이해 관계 정도만을 시야에 넣고 있을 때, 사실상 유일하게 원소만이 한 황실의 정통성이라는 거시적 문제에 관해서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고 추진할 수 있는 시야와 행동력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 대안이 유우의 거부로 표류함에 따라 군웅할거라는 혼란상이 가속화되는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이는 그만큼 이 당시 원소라는 인물의 발언과 행동이 중국 대륙 전체의 정세를 뒤집어놓을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대로, 군웅할거 이후의 원소는 비록 세력 면에서는 하북을 평정하여 당대 최대 군벌의 지위에 올라섰지만, 더 이상 중국이라는 천하를 어떻게 개편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대안과 전망을 제시하는 입장은 아니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역할은 삼보의 난 이후 천자를 옹립한 조조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2. 생애: 군웅할거 이후

2.1. 기주 점거

원소의 유우 추대 시도가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에 의한 것인지 한복의 견제에 대한 타협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연합군 창설 초기에 원소는 낙양의 바로 북쪽인 하내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내는 황하 건너편의 나루터인 맹진을 거쳐 바로 낙양을 노릴 수 있는 곳이고 산조의 연합군과 연계할 수도 있어 낙양 공격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기주의 북쪽인 발해군에서 멀리 사예주에 있는 낙양 공격의 주요 루트인 하내군에 군을 이끌고 가서 주둔했고 연진까지도 진군했으며 칙사까지 죽여버리는 등 기세등등하던 것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원소는 분명 동탁과 직접 맞붙을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때 한복이 원소의 군량을 끊으며 원소를 견제하였는데 이에 원소군이 거의 와해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복이 원소를 견제한 이유는 원소의 행동들이 예상외로 전국적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았기에 결국 원소가 그 명망을 바탕으로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두려워한 것. 그렇지 않아도 당시 동탁의 탐욕과 광포함에 대한 불만여론이 들끓던 상태였는데, 그에 반발해 대립각을 세웠던 상대가 평소 청렴하고 올곧다는 명성이 높던 원소였고 여기에 더해 동탁의 원씨 일가 멸족크리로 원소에 대한 동정여론이 들끓었던 상황이었다. 설령 원소가 패배하더라도 원소가 일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소 군사를 이끌며 동탁과 대결하는 구도가 나오는 자체만으로 원소의 주가는 올라가게 되며 이길 경우에는 완전히 한복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손견을 앞세워 낙양을 점령한 원술이 잠시 손견을 견제할 생각을 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원술은 결국 끝까지 손견을 밀어줬다.

하지만 결국 유우 추대가 실패한 이후에도 원소는 한복의 집요한 견제를 받아 근거지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연진에 머무르며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근거지인 발해군에서 한참 벗어난 원소의 군세는 한복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한복에게 이용가치가 떨어진 얼굴마담인 원소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발해군으로 돌려 보내기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던 중 한복의 장수인 국의가 한복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이때 원소는 한복을 증오하고 있었기에 국의와 결탁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한복의 원조와 발해군 귀환 모두가 불발되면서 원소가 국의를 후원해 한복에게 선수를 친 것으로 보인다. 사세상 한복의 입장에서 원소는 더이상의 이용가치가 없는 위험인물이나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손을 대기는 어려웠으나, 단순히 원조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원소의 생명줄인 군사력은 그대로 끝장나고, 임시방편으로 군량을 조달하는 것에도 한계가 뚜렷하니 결국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 약탈 등에 의존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이는 곧 한나라 최고의 애국열사며 연합군의 맹주라는 위치에서 일개 도적떼 수준으로 전락해 원소의 가장 큰 정치적 무기였던 여론의 지지가 끝장나는 것이기 때문에, 강대한 기주군으로 이미 여론의 지지를 잃은 원소의 한줌밖에 안 되는 군대를 손쉽게 처치하면 되는 상황이기 때문.

원소는 한복 수하의 불만세력이던 국의를 포섭, 한복 세력 내부에서 기습적인 무력 봉기를 시도하여 이를 타개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국의는 한복에게 패하여 달아났고, 이로써 표면적으로나마 유지되던 한복과의 관계가 완전히 결단나게 되었다.

이때 봉기가 공손찬을 끌어들여 한복을 격파하자는 계책을 내면서 원소는 공손찬에게 밀사를 보내 기주를 칠 것을 설득했고[26] 이에 공손찬은 '동탁을 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뻔한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기주로 향했고 한복은 황급히 군대를 돌려 공손찬에게 맞서나 크게 패하여 시원하게 병력을 말아먹고 만다. 결국 공손찬에게 온 정신이 팔린 한복은 원소의 주위세력 병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이 계책이 성사되자 원소는 봉기를 더더욱 극진히 아끼고 친근히 대하며 신임했다고 한다.

이에 원소도 군사를 이끌고 한복의 근거지인 업으로 북상, 한복이 패한 틈을 타 기주에서 찝적대고 있던 흑산적과 장양, 어부라 등의 무리를 전부 격파하고, 상당수를 병합하며 세를 늘려 간다. 공손찬의 표문에 따르면 이때 호아도위 유훈이 장양, 어부라와 교섭해 투항을 받아내는 활약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에게 숙청당했다.

한복은 공손찬이 대군으로 남하하고 있는 데다가 원소가 이에 호응하듯 급격하게 병력을 불리며 기주로 들어오니 원소와 공손찬이 협공할 것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질렸고, 이에 원소는 한복과 같은 영천사람인 곽도순심, 외조카인 진류 사람 고간 등을 세객으로 보내 기주의 여론을 부추기고 한복을 협박했다.

순심이 한복에게 유세하며 한 말에 따르면 공손찬은 도저히 이기기 어려운 적수이며 원소 또한 영걸이라 결코 한복 밑에 있는 것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므로 두 사람이 연합한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나 원소는 한복과의 옛 친교가 있으니 자리를 양도한다면 목숨은 물론 지위도 보장해주겠다고 설득하였다.

담력이 작았던 한복이 이에 동의하려 하자 한복의 측근인 종사 이력, 경무, 민순, 저수 등은 원소의 군세가 급조된 오합지졸인데다 제각기 산재해 있고 군량조차 없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둬도 곧 와해될 것이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한복은 공손찬에게 패한 이후로 이미 싸움에 질려 있었는지 자신은 원씨의 고리였던데다 원소가 자신보다 훨씬 유능하므로 뛰어난 자에게 뒤를 맡겨야 한다고 핑계대었다.

패하기 이전에 한복은 도독종사 조부, 정환 등에게 1만의 강노병[27]을 맡겨 하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부와 정환은 한복이 원소에게 기주목을 양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귀환해 원소와 일전을 벌이자고 한복을 설득했으나 한복은 끝끝내 듣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 한재를 원소에게 파견해 기주목의 관인을 양도했다.

이에 원소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한복의 종사 10명이 달아났고 모든 종사들은 그저 원소가 도착하면 자신이 뒤에 남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경무와 민순 등은 직접 무기를 잡고 나서 원소가 오는 것을 저지했다. 여론이 흩어질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원소는 이들에게 당장 손을 대진 못했으나 이후 전풍을 시켜 이 둘을 죽였다. 용재수필에 따르면 조부, 정환, 이력 등도 원소에게 전원 숙청되었다.

191년 7월, 기주목이 된 원소는 천자의 명의를 빌어 한복을 분위장군으로 삼았으나 실권은 전혀 없었다. 한편 한복의 측근이었던 저수와 만나며 저수가 원소가 천하를 평정할 전략에 대해 유세하자 분무장군으로 삼고 감군을 겸하게 하여 중용했다. 배송지는 이때 저수가 원소를 위하여 유세하고 원소가 저수를 중용한 것을 근거로 들어 애초에 저수는 한복에게 원소를 칠 계책을 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저수는 지방 아전으로는 최고위직인 별가를 두 차례나 지냈으며 중앙에 천거되어 2개 현의 현령을 역임했고 한복 시대에는 실권자인 별가에 더하여 이미 2천 석의 반열인 기도위를 겸하던 거물이었다. 때문에 워낙 거물이라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포섭했다는 시각도 성립이 가능하다.

또한 원소는 거록 사람 전풍, 위군 사람 심배 등을 발탁하였는데 이들은 한복에게서 소외되었던 인사들이었다. 한복은 이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원소가 발탁한 도관종사 주한이 원소에게 영합하기 위해 마음대로 군사를 내어 한복의 자택에 테러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복은 달아나 화를 피했으나 한복의 장남은 구타당하여 두 다리가 부러졌다. 이에 원소는 즉시 주한을 잡아들여 참수했으나 한편으론 전풍이 자객을 보내 경무, 민순을 죽이는 등, 사실상 구 한복파 숙청을 위해 원소가 사주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치 테러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공포심이 극에 달한 한복은 기주에서 달아나 장막에게 의탁했다.

2.2. 계교 전투와 하북 평정

기주목이 된 원소가 이렇게 내부를 장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할 때 공손찬은 밀약의 결과인지 남쪽으로의 진군을 멈췄지만, 곧 원술과 연합하여 원소를 견제했고 사촌동생인 공손월에게 군대를 주며 원술에게로 파견했다. 원소 또한 유표와 연합해 형주로 진출하고 있던 원술을 견제하였다. 공손월은 원술을 지원해 손견과 함께 원소의 후원을 받았던 주씨 형제와 싸웠는데 예주의 양성에서 주앙을 공격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이 사건에 크게 대노한 공손찬은 군대를 다시 남쪽에 배치시켰다. 이에 원소는 크게 두려워하며 공손찬의 다른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의 지위를 양도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공손찬에게 보냈다는 원소의 편지가 주석으로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신이 족제(=공손찬의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를 양도했지만 공손찬은 오히려 우호를 저버리고 예주를 공격했고 그러다 아우(=다른 사촌동생 공손월)가 죽자 자기 탓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사건의 순서가 원소 기주목 취임→발해태수 양도→공손찬의 예주공격→공손월 사망→계교전투로 이어지므로 기존의 기록과 다르다. 비록 원소가 기주목이 되었지만 당시 공손찬은 세력적으로도 원소보다 훨씬 강했고, 한복을 친 것도 일단은 원소와의 밀약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원소로서는 이 밀약의 대가를 건넬 필요가 있었고, 자료의 부족으로 그 대가가 정확히 무엇이었지는 불분명하지만, 설령 공손찬이 아닌 원소가 한복을 병합하게 되더라도 공손찬에게 영토 일부를 양도하겠다고 약조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원소의 주장과 다르게 다른 기록들은 모두 공손월 사망 이후에 원소가 발해군을 넘겼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원소가 약속을 하고서도 실제적인 양도를 계속 미루며 시간을 끌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분노한 공손찬이 공손월을 예주로 보내 원술과 연합하는 등 견제하다가 공손월이 죽으면서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자 허겁지겁 발해군을 넘기고 저자세로 나왔다고 보면 앞뒤가 맞는다.

원소는 공손범이 자신과 공손찬 사이를 중재해줄 것을 기대했겠지만 공손범은 오히려 발해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가세하였다. 191년 11월, 청주의 황건적 30만이 하북으로 올라와 발해군의 경계를 침입했는데 공손찬은 보기 2만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여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30만을 거의 몰살시킨 것에 가까운 엄청난 대승을 거뒀으며 이로 인해 공손찬의 위명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실제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것 같다. 요격하여 3만의 수급을 취하고 수 만 수레의 물자를 노획, 재차 추격하여 강을 건너 달아나는 것을 반쯤 건넜을 때 습격해 완파했다. 이때 수만 명을 베었는데 이들의 피로 강이 붉어졌으며 포로가 7만 명에 노획한 무기와 식량은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위광을 온 나라에 떨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공손찬의 무리는 더욱 강성해졌고 위세는 절정에 달해 공손찬은 원소군을 무찌르며 계교로 군을 전진시켰고 엄강을 기주자사로, 전해를 청주자사로, 추단을 병주자사로 삼아 각기 파견했으며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3개 주의 주, 군, 현에 배치된 기존 관리들을 모조리 실력으로 몰아내고 점거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노골적인 야심을 표출한 것이다. 또한 장안의 헌제에게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상주문을 작성하고 포고한다. 이에 하북이 진동하였으며 기주에서도 수많은 군현이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또한 이때 원소에게 붙고 있던 장양, 어부라는 동탁이 이끌고 있는 장안 조정에게로 투항하여 원소와 다시 적대하였다. 당시 동탁 정권은 여포, 왕윤 등 병주계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에 따른 병주계의 회유책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흑산적의 맹주 장연은 공손찬과 연합해 부하 두령인 두장을 파견해 공손찬을 지원했고 별도로 우독, 수고, 백요 등 10만의 군세를 보내 원소의 근거지인 위군과 연주의 동군을 공격한다. 기주목의 치소인 업이 위군에 있었고, 동군은 연주자사 유대가 기존 동군태수 교모를 죽이고 부하인 왕굉을 태수로 임명했으니 유대의 영역권이다. 유대는 본디 원소가 가족을 맡기고, 공손찬은 기병을 원조해줄 정도로 원소, 공손찬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원소의 처자식을 붙잡아 넘기라는 공손찬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공손찬과 갈라서게 되었다. 장연이 이를 격파한다면 하남으로 진출하여 남북으로 원소를 견제할 수 있었다.

위기에 몰린 원소는 이를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으므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하로 진군했다(192년 1~2월경). 당시 막 생겨난 신세력이었던 원소는 아직 군의 편제가 통일되지 않았고 군사의 수와 훈련도는 물론 장비와 물자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국의의 활약에 힘입어 회전을 통해 공손찬의 주력이었던 기병을 강노로 무력화시키고 엄강을 전사시키며 승기를 잡았고, 계교에서 이어진 2차전에서 공손찬군을 완전히 박살내는 데 성공한다.

참패한 공손찬은 근거지인 유주로 돌아갔다. 그 외에 동군으로 진출한 흑산적은 왕굉을 격파했으나 이 무렵 원소의 지원을 받던 조조의 활약으로 다시 하북으로 쫓겨났고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았다. 어부라 또한 이때 조조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고 위군을 공격한 흑산적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별도로 부하장수를 시켜 막아내는 데 성공한 듯 하다. 원소는 부장 최거업을 보내 공손찬을 공격했지만 최거업은 참패했고 최거업을 격파한 공손찬은 재차 기주로 진군해 평원군에 주둔했다.

이후 기주 전역과 연주의 일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28] 192년 12월 무렵, 원소가 용주(龍湊: 발해군과 평원군의 경계에 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에서 공손찬을 대파하면서 완전히 기주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이전 장안에서는 동탁이 왕윤, 여포에게 살해되고 이각, 곽사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조정은 관동 지역에 사절을 보내 각 주군의 관리들이 제각기 전쟁을 벌이는 것을 중단하고 화해하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193년 1월, 조정에서 파견한 태복 조기가 하북에 도착하자 공손찬은 원소에게 화해하자는 편지를 썼고 원소 또한 이를 받아들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3년 3월, 원소가 부재중이었던 틈을 위군의 불만세력들은 장연과 연계해 반란을 일으켰다. 휘하 두령인 우독을 중심으로 흑산의 10개 조직이 참가했고 이에 반란군이 내응하면서 위군태수 율성을 죽여 기주목의 관부가 있는 업을 기습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장안 조정에서 임명한 기주목인 호수를 앞세워 기주를 통치하려 했다.

이때 기주의 여러 관리들은 물론 원소의 일가족도 모두 포로로 붙잡혔으며 공손찬 또한 휴전 약속을 깨고 재차 병력을 보내 침공해 왔으며[29] 이에 더해 원술 또한 흑산과 연계하여 군사를 이끌고 원소를 치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으며 어부라도 이를 지원했다. 이에 지휘부 전원이 패닉에 빠지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원소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하며 반격을 준비한다.

우선 조조를 지원하며 원술의 북상을 저지했는데, 이에 조조는 진류에 침입한 원술을 수 차례에 걸쳐 대파했으며 오히려 원술의 영역권인 예주까지 공격한다. 당시 예주에는 원소의 우군이었던 주씨 형제들도 아직 건재해 있었고 그 남쪽에는 유표가 있었다. 조조와 주씨 형제, 유표 등 친 원소계 군벌에 둘러싸여 역관광을 타게 된 원술은 근거지인 예주를 버리고 회남으로 달아나게 된다. 한편 점령하고 있던 10명의 두령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도승이라는 자는 자신의 조직을 이끌고 원소에게 붙어 원소의 가족과 기주의 관리들을 구출하고 직접 호위하며 척구(斥口)까지 호송하는데 이에 원소도 척구로 향해 도승과 합류한다.

같은 해 6월부터 원소는 흑산적에 대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위군의 북부에 있는 녹장산에서 우독을 5일동안 포위 공격하여 1만 명을 죽였고 우독과 호수 등도 참수하여 업을 탈환한 뒤 좌자장팔의 무리를 전멸시켰으며 나머지 일곱 두령들도 모두 격파하여 위군 내의 흑산적을 완전히 박멸시킨다.

이후로도 흑산적과의 전투는 계속되었는데 이 무렵 장안에서 이각, 곽사에게 패하여 쫓겨난 여포가 원술과 장양을 거치며 원소에게 의탁해 왔다. 원소는 여포에게 부장으로 종군해 흑산과의 싸움에 합류할 것을 명했으며 이듬해인 194년, 상산에서 장연의 본대와 직접 접전을 벌여 승리했다. 장연은 많은 군사를 잃고 도주했으나 원소 또한 오랜 전쟁으로 군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기에 장연을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 채로 군사를 물렸다고 한다. 한편 여포는 공적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며 마음대로 사병을 늘리고 원소의 영토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데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장안 조정에서 삼공에 준하는 관직을 받았다는 것으로 원소가 임의대로 내리는 관직을 받은 원소의 제장들을 무시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30] 원소 휘하에서 숙청되고 기주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원소와 장연의 전쟁에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일부 부족들이 장연과 연합하고 있던 오환흉노는 이 무렵부터 원소와 화친하기 시작했으며 원소의 조카인 고간이 병주자사로 임명되어 부임했고 장연은 결국 패하여 무리가 흩어졌다고 한다. 상산 전투 이후로도 집요한 군사, 외교적 공격을 받으며 서서히 세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손찬은 원소와 장연이 싸우는 사이 다시 기주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으나 이 무렵 유우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기에 대 원소 전선은 산발적인 침입에만 그쳤을 뿐, 대대적인 확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손찬은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유우와 그 관속들을 모조리 처형한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유주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지만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심각한 내상에 시달렸다. 또한 오로지 군사적인 이점만 중요시하는 공손찬 본인의 과격한 성격에 더해 여론 형성의 중심이 되는 기존의 사대부와 식자층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역술인이나 말장사꾼 같은 낮은 계층의 인물들을 관료로 중용하는 등의 기이한 행동을 벌였는데 이 또한 민심의 불만을 더더욱 조장했다.

변경에서의 전투로 잔뼈가 굵었고 또한 학문에도 능하며 매사에 논리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 공손찬이었으니 어쩌면 예를 중시하는 당대의 유가적 가치관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고 그랬기에 실무에 능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공손찬 휘하 관리들의 대부분은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 상인이나 역술인 같은 부류였고 이들의 실무적 능력이 뛰어났는지 무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효재와 청렴을 미덕으로 삼지 않던 이들의 부정부패와 치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로 공손찬이 극심한 소화불량을 겪고 있는 사이, 194년 말엽부터 원소는 공손찬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는데 국의를 파견해 공손찬을 공격하는 한편 공손찬과 오랜 적대관계였던 오환, 선비와 연합했으며 유우의 아들인 유화를 전면에 내세워 선전공세에 활용하는 등 공손찬의 반대 여론을 선동한다. 원소의 선동공작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대군, 광양군, 상곡군, 우북평군 등 4개의 군이 각기 공손찬이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고 호응[31]했고 염유, 선우보, 숙부환 등 수 만 명의 무리가 원소군에 합류하여 총 10만의 군세가 일제히 연합해 공손찬을 공격했으며 195년 12월, 포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공손찬군은 2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참패한다.

또한 각 주에 자사로 파견했던 부하들도 모두 이 무렵을 전후로 모두 원소의 수하들에게 패하여 공손찬의 세력은 극도로 곤궁해진다. 기주자사 엄강은 이미 한참전에 사망, 청주자사 전해는 원담에게 패하여 세력을 잃고 공손찬에게 돌아갔고, 병주의 추단은 어느 사이에 세력을 잃었는지 194년엔 어양태수가 되어 있다가 선우보, 염유에게 패하여 살해당했으며 연주의 선경은 기록이 없지만 정황상 다른 원소의 수하, 혹은 조조에게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포구 전투에서 패한 이후 공손찬은 이전부터 축조하고 있던 거대요새 역경성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했고 국의는 1년에 걸쳐서 이를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공손찬의 우회공격에 패하여 귀환했다.

195년 무렵 공손찬과 장연은 여전히 당대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벌들이었으나 이는 거듭된 패배로 안팎으로 기반이 불안해진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에 극도로 집착해 영지를 무제한적으로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수탈한 결과로 표면상 전력은 엇비슷할지 몰라도 전형적인 막장테크에 가까운 수준이라 당시 영향력이 기주 전체와 청주의 대부분 그리고 병주와 유주의 일부에 미치고 특히 기주는 내적으로도 통치가 안정화되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한 원소와는 급격히 격차가 벌어져 가고 있었다.

이후 공손찬, 장연을 멸망시키고 하북 4주를 평정했지만 상대적인 전력으로는 이때가 가장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관서의 이각, 곽사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자멸테크를 타고 있었고, 중원의 조조는 여포와 겨우 연주 하나를 두고 처절하게 싸우는 수준이었으며, 도겸에게서 서주목을 양도받은 유비는 공손찬을 버리고 원소에게 허리를 굽혔다. 형주의 유표는 비록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여전히 원소를 맹주로 받들었다. 원술 정도가 회남에 세력을 다시 형성하며 재기하는 듯 했으나 아직 원술의 기반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2.3. 협천자 논쟁

195년, 조정에서는 원소를 우장군에 임명했으며 원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이전까지 원소는 장안 조정을 괴뢰정권으로 규정해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조정과의 연락을 끊고 수하들 중 장안 조정을 따르는 자는 죽여서 본보기를 보이는 등[32]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안에서 파견된 태복 조기의 중재를 명분삼아 공손찬과 휴전을 하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황제가 내리는 장군직을 수여받는 것으로 일정수준 타협을 짓고 마무리를 보았던 것 같다.

장안의 황실은 190년 이후로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으나, 관동 지역의 관리들에게 뚜렷한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지방에 부임한 관리들이 각 주군에서 왕과 같았으나, 황제만이 유일한 정치주체로 군림하던 당대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충성의 대상은 여전히 황제였고 제각기 군현에 부임해 있던 지방관들의 지배는 황제의 이름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이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의 기록을 봤을 때 '표를 올려' 자기 사람을 천거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원소, 원술, 공손찬 등의 유력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제각기 자기 사람들을 장군, 태수, 현령 등으로 임명했는데 동탁 등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들은 반란군이었고, 반란군 수괴의 하나가 자기 사람을 천거하는 표를 올렸다고 해서 어떤 직을 하사할 리가 없었으니 처음부터 승인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표를 올려 추천하는 형식을 취한 것은 아무리 유력자라고 그들이 황제가 아닌 이상 일개 하급 속관도 아닌 2천 석 이상의 고관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하등의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정한 세력권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합법화된 체계가 필요했고, 최소한 합법을 가장한 방식에 의해 관직을 수여하고 관원을 임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실력(=군사력)에 따른 지배만으로서는 이러한 권위를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 상주하고 황제의 승인을 얻어야 했던 것인데, 조정과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만큼 이러한 임용행위가 승인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엄연히 황제가 존재하는데 자기 임의로 관직을 하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반역자로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행보는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그래서 상표하는 형식을 빌려 벼슬을 주는 것이었고, 황제의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 임시로 취임해 업무를 담당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물론 이 표는 형식적인 것으로 조정에는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미봉책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워진 것이 중망있는 황족인 유우의 추대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했고,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보였던 유우는 193년 겨울, 공손찬에게 살해되었기에 원소는 별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한 끝에 황실과 타협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해 겨울, 장안에서는 이각, 곽사가 내전을 벌이고 헌제는 장안을 탈출하는 사건, 즉 삼보의 난이 벌어진다. 황제는 이각, 곽사에게 추격당하며 수차례 교전한 끝에 크게 패했으나 결국 이들의 손을 벗어나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때 저수 등은 원소에게 황제를 옹립할 것을 권했으나 원소는 헌제의 즉위 과정을 문제삼으며 이를 거절했다. 바로 같은 해에 황제가 내리는 벼슬을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다시 정통성 문제를 거론하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장안을 탈출한 헌제의 여정 과정을 살펴보면 이각, 곽사의 거듭된 추격으로 궁핍해진 끝에 수많은 대신이 굶어죽고, 황제가 도보로 걸어다니며 길에서 노숙하고, 심지어는 일개 백성에게 사례교위가 구타당하는 등 극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헌제가 안읍에 체류하고 있을 때, 도적떼 두목들인 한섬, 이락, 호재 등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이들의 사병을 제외하면 헌제가 거느린 병력은 우림, 호분을 합쳐 일 백 명을 넘지 못했다. 조정 백관들의 수도 불과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조정의 힘은 주, 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개 현은 물론, 군벌화한 향리의 일개 종수나 호족[33] 세력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전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황제가 어려서 권신이 권력을 농단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래도 조정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권력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었어도 황제의 권위는 지켜졌고 조정의 권력은 변함없이 유지되었었다. 동탁의 집권 초기 시점까지만 해도 조정은 권위와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동탁이 황제를 갈아치운 것에 대한 반발로 대부분의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적어도 관중 일대에서만큼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각, 곽사에게서 벗어나면서 황제와 조정은 아무런 실력과 권위도 없는 무력한 존재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천자와 조정의 권위는 도둑떼나 백성들에게는 물론 심지어는 천자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몇 안되는 병사들에게까지 조소당할 정도로 말 그대로 희화화되었다. 반면에 각 주, 군에서는 제각기 군대를 소집해 스스로를 지키며 사실상 자립했고, 각 주목이나 군태수들은 수 천, 수 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관할구역 내의 치안을 유지하며 사실상 군주의 역할을 대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백성과 영토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은 군벌들에게 있었지 황실에 있지 않았다.

원소의 정확한 심중을 알 수는 없지만 헌제의 영접을 거부할 만한 몇 가지 이유는 추측할 수 있는데. 우선 동탁이 소제를 폐립하고 헌제를 세울 때 가장 크게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연합군의 맹주로서 지위를 갖출 수 있던 것도 동탁의 진류왕 옹립에 반대하는 명분이 있었던 덕분이고[34], 그덕에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인데, 도리어 동탁이 세운 천자인 헌제를 옹립하게 되면, 그동안 쌓아왔던 지지기반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게다가 이미 아무런 힘도 없어진 황실을 포섭하게 되면, 세력이 반분하여 행정, 절차적인 소모를 가중시키고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사람을 자처하는 파벌이 생겨날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35]원소는 본인의 청류파로서의 명성과 상표하는 형식을 통한 영직을 남발하여 호족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은 원소의 고리에 해당하니 원소에게 충성을 바치겠지만 세력 내에 헌제를 맞아들였는데 헌제가 직접 자기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며 포섭한다면 이들은 더이상 원소의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사람을 자처할 가능성이 높고 원소는 명분상 이런 자들을 제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원소는 예주출신으로 세력의 수장이면서도 정작 본거지인 기주에서 지역적 기반이 없는 외부인이었기에 이 대립관계에서 기주 출신 인사들이 황제를 등에 업고 기어오른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며, 실제로 유표의 경우에도 중앙의 동정을 살펴오라고 한숭을 보내니 오히려 황제에게 작위를 잔뜩 받고 돌아와선 유표의 부하가 아닌 황제의 신하를 자처하며 유표의 형주 집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전면 부정해버리며 기어오른 사례가 있었다. 유표 입장에서는 당장 한숭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건만 죽이지 않고 연금시키는 것만으로 간신히 분을 삭혀야 했다. 이미 황실에는 레임덕 수준의 권력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숭을 죽였을 때의 내부적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 게다가 훗날 원소와 같은 하남출신이자 원소의 최측근인 곽도, 봉기와 기주의 호족 출신인 저수, 전풍 등의 대립이 심각하게 불거져 나오는 걸 보면, 헌제 옹립을 빌미로 조직의 결집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컸다.

원소는 광범위한 선비들의 지지는 받았지만, 친족과 동향인을 중심으로 한 '핵심 인재'는 애초에 인재풀이 너무 협소하여 능력도 부족했고, 광범위하게 펼쳐놓기에는 숫자도 적었다.[36][37] 원소가 헌제를 받아들였을 때, '원소의 막부'와 '헌제의 조정'이 양립하는 모순적인 정치 상황에서 오는 마찰을 이겨내기에는 원소 집단의 응집력은 상당히 약했을 것이다. 유우처럼 원소 자신이 명망 있는 황족을 옹립한다면 이 약점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지만, 유우처럼 '명망만 높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무능력한 황족'은 그리 쉽게 찾기 어려워 유우가 제위를 거부하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원소가 협천자를 거부한 것에는 이런 이유에 더해 슬슬 장차 황제에 오를 생각을 품던 본인의 야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황실이 처참할 정도로 몰락해 있었기에, 이를 방치하여 헌제가 혼란 속에서 살해당하거나 객사하면서 한황실의 맥이 끊기는 것. 즉, 비유하자면 중화문명의 구심점이었던 주나라가 완전히 멸망해 춘추전국시대가 재림하는 상황이 소위 문명 붕괴 이전의 '애국열사'이자 내전기의 '영웅'으로서 당대의 정치적, 군사적 명망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원소에게는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2.4. 조조와의 대립

195년, 천자가 장안을 탈출하자 저수 등이 원소에게 천자를 옹립할 것을 권하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조조는 재빨리 헌제를 옹립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인 허현으로 천도하여 조정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헌제는 원소가 강병을 거느리면서도 왕실을 구할 마음은 없고 자신의 도당을 키우기에만 힘쓴다며 원소를 꾸짖는 내용의 조서를 보낸다.

조정 역시 원소와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이때 조조는 원소를 전혀 변호하지 않았는데, 조정의 위상을 통해 그동안 갑을관계에 가까웠던 원소와의 제휴관계를 뒤집고 재설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원소는 장문의 상소문을 쓰며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헌제와 그 측근(조조 등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들의 무능함을 강하게 비난하는 등 격렬히 반발했지만 끝내 천자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진 못했고, 조조는 이에 만족했는지 조정에 상표하여 원소를 태위로 삼고 자신은 대장군의 지위를 차지한다.

천자를 옹립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의 부하에 가까웠다. 조조를 동군에 자리 잡게 한 것도 원소였으며, 연주목으로 승인해준 것도 원소였고, 원소가 공손찬과 싸울 때 조조는 원소에 의해 동원되었다. 원술을 막을 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으며, 도겸을 칠 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다. 여포에게 연주를 뺏긴 것도 장막이 조조가 원소의 지시를 받아 그를 해칠까 봐 두려워 선수를 친 것이었으며, 복양에서 여포에게 패배한 시점에서 원소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위는 군사상의 최고위직이었지만 명예직에 가까웠고 실권은 대장군에게 있었다. 조조가 대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는 이에 "조조가 번번히 패할 때마다 나는 그를 구해줬는데, 이제는 천자를 끼고 나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크게 분노했으며 병을 핑계로 태위의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원소의 반응을 듣고는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이는 마침 협천자에 실패한 원술이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천자를 자칭하여 조조와의 대립 의사를 확고히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예주의 허현 일대를 도읍으로 삼으면서 인접한 유표와의 대립도 표면화되고 있었기에 원소를 지나치게 자극하여 적으로 돌릴 경우 적대세력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형국이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조는 원소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양보한 것에 더해 하북 4주의 도독을 겸하도록 하고 구석의 일부[38]를 내리는 등 파격적인 특권을 내렸는데, 이는 황제의 이름으로 원소가 황제 다음가는 최대의 실력자임을 공인함은 물론이며 관할 구역 내에서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를 보장한 것이다. (197년 3월.)
뿐만 아니라 원소 최대의 주홍글씨인 유우 추대의 이력은 자연스럽게 흑역사로 묻혔으며, 오히려 원소의 유우 추대 전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원소의 최대 경쟁자 공손찬을 역적으로 선포해 공식적으로 목에 현상금까지 거는 등, 의외로 조조의 협천자는 원소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조조 입장에서도 이는 원소가 좋아서 줬던 게 아니라 사세상 원소와의 전면적인 대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부득이하게 굴복하면서 원소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미 조조가 협천자와 동시에 원소에게 이빨을 드러냈던 것은 명확했고 양자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원소는 더 나아가 허도의 지반이 낮고 습해 침수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수도를 자신의 세력권과 인접한 견성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조도 이런 요구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협천자를 통해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정의 영수격이 되었으며, 이에 맞서 후한 조정을 전면 부정하고 독자적인 칭제건원으로 대응하던 원술을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렸는데,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원술은 비록 회남에서 재기하며 자리잡은 기반이 아직 안정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후한 조정이 조조를 중심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진 여전히 내전기의 핵심 군벌 중 하나였다. 원술이 조조와 손잡은 여포에게, 그리고 조조에게 연달아 참패하면서 유동적이었던 지지세력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에 따라 통치력이 확고히 미치진 못했으나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펼치던 세력권이 사실상 공중분해되었는데, 비록 조조는 같은 시기에 형주에서 할거하며 대립하고 있던 유표를 제압하는데는 실패했으나, 이는 사건은 조정의 영수로서 각지의 반역자를 토벌하고 나라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구호를 내걸던 조조의 위상에 엄청난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당대의 유력자들이 게임에서처럼 제각기 자기 주군이 천하를 통일하길 바란 것이 아니라, 내전기라는 인세에 강림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라는 대안이 훨씬 설득력있고 정당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실제 조조의 협천자와 원술의 몰락 과정을 전후해 예주와 형주 북부에서 독자적인 군벌세력을 갖추고 있던 이통, 허저, 누규, 장수 등이 조조에게 귀부했는데, 특히 이들 중 누규와 장수는 유표의 후원을 통해 세력을 형성한 인물들이었다. 장수의 참모였던 가후는 조조가 유표를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원소보다 세력이 미약했음에도 조조에게 투항하길 유세하며, 조조는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니 마땅히 따라야한다는 것으로, 세력의 강약을 떠나 조조의 승리를 전제했으며, 유표는 조조의 침공을 선방한 뒤 원술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칭제하면서[39] 내부의 불만세력을 억누르려 했지만, 몇몇 군사적 실패와 함께 결과적으로 이를 억누르는데 실패하면서 식물군주로 전락해 맥없이 무너지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부분으로, 조조의 협천자와 이에 대응하던 원술의 몰락을 기점으로 시대적 패러다임 자체가 점차 '내전기의 영웅' 원소가 아닌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를 주도하는 '한나라 조정의 수장' 조조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 원술의 칭제가 딱히 병신짓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부분으로 오히려 '황제' 원술이 조조에게 군사적으로 승리하거나 최소한 선방하면서 세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한황실이 여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각인시켰다면 각지에서 황제를 자칭하면서 오대십국시대의 양상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이 당시 원소는 상황이 점차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서 황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하는데, 비록 황제와 조정을 통해 세력 기반 내에서 확고한 권력을 공인 받기는 하나 중앙 조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속 하며 파격적인 권위를 부여 받는 모양새는 중앙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에게 섣부른 공세 전략을 펼치지 못하도록 강제했고, 전국적인 입지 또한 조정을 장악한 조조에 비해 불리해지면서 조조의 급성장을 견제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시점의 원소는 어마어마한 관직을 통해 세력 기반 내의 정치적 합법성을 보장 받아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해졌다는 이득은 있었지만 원소의 일개 부장 수준에 가까웠던 조조가 협천자라는 비장의 카드를 앞세우고 원소와 견줄 정도로 급격히 팽창한 시점에서 사실 득보다 실이 많게 되었다.

한편 원소는 북방 전선의 핵심인물이었던 국의를 숙청하고 잔당들을 병합했으며[40], 원담을 청주자사, 원희를 유주자사, 고간을 병주자사로 삼아 일족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고히 한다. 이러한 처사에 저수는 "재앙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풍은 원소에게 조조가 남양에서 유표와 대치하는 틈을 타 배후를 치고 허도를 장악할 것을 권하였으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41] 역경성에 틀어박혀 배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던 공손찬을 정리하기 위해 출병한다.

2.5. 공손찬의 머리를 허도로 보내다

199년 3월, 원소는 해를 넘긴 공성 끝에 역경성을 함락시키고 공손찬의 무리를 병합하였다. 하북 4주를 평정한 원소는 수십만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교만해져 조정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무렵 원소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자 원술은 원소에게 제호를 바치며 투항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원소는 여기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히 원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하며 배송지 주로 인용된 전략에 따르면 이때 원소가 참칭할 뜻을 품고 주부 경포를 시켜 제위를 칭할 것을 간하도록 말을 맞춰 자작극을 벌였으나 다른 부하들이 요사스러운 말을 한 경포를 죽여야 한다고 하자 즉시 경포를 죽이며 의혹을 풀었다고 한다.

원술의 칭제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원소와 유표가 모두 칭제를 계획했던것은 결국 칭제를 통해 독자적으로 권위를 세우지 않는 이상 이상 조정의 작위를 받고 명령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고, 조조가 황제를 장악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급격한 이변이 없는 이상 시간이 갈수록 자신은 서서히 약해질 뿐 득될 것이 없기 때문. 그렇다고 대놓고 조정을 무시하는것은 이제는 조정에서 받은 작위를 통해 얻은 자신의 정당성을 그 스스로 부정하는 격이라 내부의 반대파를 양산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소가 공물을 끊고 조정과 대립하게 되는 원인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기록도 있는데, 조조의 전기인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하내의 군벌 장양양추에게 살해되었다가 수고가 양추를 죽이고 원소에게 투항하자 조조가 황하를 건너 이들을 격파한 뒤 199년 4월에 오창으로 회군한 것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원소의 격조조서에 따르면 자신이 공손찬을 치는 사이 조조가 공손찬과 은밀히 연합을 체결하고 원소의 배후를 치기 위해 황하를 건넜지만 공손찬에게 보낸 사절이 붙잡히고, 공손찬 또한 패하고 자살하면서 예봉이 꺾였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조조를 비난하는 구절이 있고, 헌제춘추에서도 이때 조조는 공식적으로는 원소를 돕는다는 핑계를 대며 실제로는 업을 습격해 공손찬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공손찬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하고 원소가 계획의 전모를 파악했음을 알자 다시 황하를 건너 오창으로 철수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내는 원소의 근거지가 있는 위군과 맞닿아 업성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으나, 황하를 경계로 중원과는 떨어져 있었으며, 기주가 아닌 사예의 관할이라 기,병,유,청주와 달리 원소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다소 애매한 지역이었다. 하내 단독으로 기주에 맞설 여력은 없었고, 하내를 근거지로 한 장양이 원소에게 협조적이었기에 균형이 유지되어 왔으나, 장양이 석연찮은 이유로 암살당하고 조조가 하내의 친원소파들을 죽이며 이 곳으로 진출한 것은 원소의 입장에서는 무척 의심스러운 상황이었고, 여기에 공손찬에게 보낸 사신이 붙잡히면서 물증까지 더해졌다면 이는 공식적인 문제를 삼을 만한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협천자로 조정을 장악하고 원술을 격파해 위상을 확보한 조조는 조정의 권위를 이용해 원소 영역권의 주변부에 해당하는 지역들을 집요하게 공략하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개입도 개의치 않았는데, 상술한 것과 같이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는 순간에는 하내로 북상해 원소에게 협력하던 장양을 축출하고 위종을 남겨 원소를 견제했으며,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는 데 협력하던 유주의 군벌 선우보는 공손찬이 패망하자 어양태수로서 원소를 건너뛰고 조정에 직접 사신을 보내 귀부했고, 조정은 선우보에게 유주 6군의 지배권을 더하여 원소가 임명한 유주자사 원희와 대적하게 했고, 청주에서는 손관을 북해태수, 하기를 장광태수로 삼아 청주의 호족들을 회유했고, 199년 8월에는 장패를 시켜 제, 북해, 동안을 지역을 공격하며 원담과 충돌했다. 원소의 부재를 틈타 업성을 습격하겠다는 조조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원소의 영향력은 중심부인 기주에서는 여전히 건재했지만 변두리에 해당되는 지역들은 조조에 의해 차근차근 잠식되고 있었다.[42]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내전기의 핵심 군벌들이던 공손찬, 원술, 여포는 역적으로 규정되면서 한 조정의 권위를 대체하지 못한 채 정치판에서 퇴출당했고, 칙령에 따라 원소는 대장군, 조조는 거기장군, 유표는 진남장군으로 제각기 막부를 창설하며 권력의 축으로 자리잡아 균형을 유지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이렇듯 서열다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고 위세가 절정에 달해 교만해지자 일방적으로 공물을 끊고 황제를 꿈꿨다는 진수의 해석과 달리 협천자라는 압도적인 명분을 등에 업은 조조의 원소에 대한 기선제압 시도는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원소의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소는 이를 좌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고, 아직까지는 세력/군세 자체는 우위를 점한 원소는 서서히 불리해지는 상황을 보고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기주로 돌아온 원소는 공손찬의 머리를 조조가 있는 허도로 보냈으며, 대대적으로 조조를 칠 계획을 세운다.

2.6. 저수와 전풍을 숙청하다

조조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원소의 계획은 196년의 허도 천도로 정립된 조정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내전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반대는 격렬했다. 감군 저수와 별가 전풍은 연이은 원정으로 창고가 비어 황폐하고, 전쟁의 성패는 당장의 강약에 있지 않으며,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조와 싸우는 것은 천자를 적대하는 것이니 의롭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조조와의 결전을 반대했다.[43]

저수와 전풍은 원소의 전면전 안에 대한 대안으로 지구전을 이야기하는데, 이에 대한 저수의 구체적인 발언 내용을 살펴보면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천자에게 승첩의 사실을 보고하고, 농사에 힘쓰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십시오. 만약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조씨에게 우리의 왕로(王路)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연후에 진격해 여양에 주둔하여 차츰 하남에 군영을 짓고, 선박을 더 제작하며 군수물자를 수리하고 나서,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주변 지역을 초략하여(중략) 3년 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인데, 이 발언은 원소가 중앙을 거스르며 날을 세우지 말고 신하로서의 책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며, 그것이 통하지 않을 경우라는 조건부 하에 기병을 통해 초략하는 등의 제한적 국지전만을 펼치며 조조의 권력 남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조조가 원소를 겨냥하고 있음이 이미 명백해진 상황에서도 조정을 거스르지 말고 신하로서의 직무에만 충실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경우라는 조건부 하에 조조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며 제한적 국지전을 펼치면 3년 안에 평정될 것이라는 발언은 명백히 수세적인 태도로 전풍,저수의 지구전론이 실질적으로는 주화론에 가까우며, 적벽대전 직전 장소가 손권에게 항복을 주장하던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대의 인식에서 원소나 조조는 어차피 표면적으로나마 같은 헌제 정권 내부의 사람들이었고, 이들 사이의 서열다툼이 극단화되었다고 해서 굳이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쓰러뜨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내전까지 끌고 갈 이유는 없었다. 그럴 만한 동기가 원소나 조조에게는 있을지 모르나, 여기에 말려들기를 꺼리는 하북 구성원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므로, 명분이 있는 쪽에 적당히 숙이며 뒷날을 기약하자는 주장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론이었다.

이때 곽도심배 등은 하삭의 강역을 차지한 자군의 역량이 현재 조조의 몇 배에 달하니 우세한 자군의 역량을 활용해 조조와 결전을 벌이지 않으면 뒷날엔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반박했고, 이에 저수가 중앙정부를 적대할 수 없다는 명분론을 꺼내들자, 이는 천자와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조정을 사당화한 역적 조조와 그 일파에게 향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 반박하며 저수의 말은 패배주의적 발언이라 비판한다.

곽도는 더하여 저수가 밖에서 군사를 제어할 뿐 군사 내부의 일은 잘 모른다고 비판하면서 저수가 번번히 군주와 뜻이 충돌하는데 그가 맡고 있는 감군의 권력은 지나치게 강하니 위험하다고 저수를 탄핵했고, 원소는 감군을 폐하고 삼도독을 세워 저수가 관할하던 군권을 분할하여 빼앗았으나 삼도독의 일원으로 곽도, 순우경과 함께 저수를 기용하면서 자신은 곽도의 정치공세를 중재하는 척 하는 쇼맨쉽을 보인다.

이 무렵 원소의 개전에 반대한 인사들과 찬성한 인사들의 면면에서 흥미로운 정황을 찾을 수 있는데, 원소의 개전을 반대했던 저수, 전풍, 최염 등은 모두 기주 현지의 명사들이었고, 개전에 찬성하거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사들은 심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영천, 남양 출신에 수도 낙양에서의 정치경력이 있던 곽도, 순우경, 순심, 봉기, 허유 같은 인물들이었는데, 영천은 원소의 본적인 여남과 같은 예주였고, 남양은 형주에 속하지만 형주 소속의 군들 중 유일하게 장강 이북에 있고 여남, 영천과 맞닿아 있어 예주와의 인적 교류가 활발하게 나타나던 지역이었다.

때문에 원소 막부 내에서도 일정한 지역적 기반을 갖춘 호족적 배경의 인사들은 원소의 개인적 야심으로 인한 내전에 말려들기 보다는 조조와 허도 조정이 주도하는 질서를 대체로 수용하는 선에서 안정을 원했고,[44] 연고지가 없이 원소와의 개인적 인맥에 따라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던 이주민 계파들은 원소에게 개인적 충성을 바치면서 원소의 친위세력을 형성했으며, 원소의 개전 선언과 이후 나타나는 원소 진영 내부의 갈등은 이런 계파간 대립구도가 수면 위로 떠오른 사례로 보기도 한다.

삼도독을 세운 원소는 이 삼군을 모두 동원해 조조를 칠 준비를 한다. 이에 앞서 유비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점거하자 원소는 유비와 연합하여 기병을 보내 지원했으나 200년 1월, 조조가 유비를 치자 전풍은 황하를 건너 대대적으로 조조의 배후를 칠 것을 진언하자 원소는 아들의 병[45]을 핑계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우금전에 따르면 조조가 유비를 치는 사이 우금이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연진을 지키며 조조의 부재를 틈타 내려온 원소를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기존 통설과 상충되는데, 다른 기록들은 모두 원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금전의 기록이 사실이라 해도 원소의 본대가 직접 움직인 것이 아니라 소수의 별동대를 통한 견제의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조조에게 패한 유비가 망명해 오자 원소는 업성에서 2백 리 밖까지 마중나와 성대히 환영하며 남정을 시작했는데, 조조와의 전면전을 계획하고 있던 원소의 입장에서 유비가 망명해온 것은 더도 없을 호기였다. 헌제가 주도한 친위 쿠데타였던 의대조 사건에 가담한 유일한 생존자가 유비였기 때문이다. 의대조 사건은 1.) 반란의 주체가 헌제였고, 2.) 임신 중이던 동승의 딸 동귀인을 포함해 7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간 대숙청으로 조조보다 세력비상 당장의 강약은 앞서지만 명분의 부재로 그 잠재성은 뒤떨어지고, 그렇다고 섣불리 칼을 빼들자니 여론의 반발을 살 것이 극명했기에 마땅한 명분이 없어 고심하던 원소의 우려를 해소하고. 정상 질서의 복귀를 내걸던 조조와 허도 정권이라는 명제 전체를 뒤엎을 파급력을 가진 대사건이었는데, 동승 사건의 주요 가담자인 유비가 원소에게 투항하며 명분을 원소에게 가져다 바치는 상황은 원소로서는 오히려 조조를 치는 것을 진정한 우국열사의 행동으로 포장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화룡점정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

견해에 따라서는 원소가 조조의 배후를 대대적으로 치지 않은 것도 조조에게 패한 유비가 자신에게 투항하여 명분을 바쳐올 것을 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체한 것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다. 원소는 유비를 영입하자마자 곧바로 남하를 시작했고, 신참자인 유비를 극도로 후대함은 물론 관도전투에서도 전면에 내세웠는데, 이는 유비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헌제를 옹립하고 있던 조조를 역적으로 규정할 결정적인 개전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조가 유비를 치는 사이에 대대적으로 남하하자며 잠시 조건부 찬성으로 돌아서기도 했던 전풍은 정작 유비가 망명해오고 원소가 개전을 선언하자 다시 반대로 돌아서면서 전쟁을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원소는 더 눈치볼 것도 없다고 여겼는지 전풍이 군의 사기를 꺾으려 한다고 크게 노하며 전풍을 형구에 채워 투옥시킨다.

원소는 격조조서를 발표해 조조 토벌의 정당성을 내세웠고, 저수는 원소의 출진 전부터 패배를 예견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원소가 마음대로 위세를 부릴 것이며, 패배할 경우 자신은 확실히 죽을 것이니 전쟁의 승패에 관계없이 미래가 어둡다고 탄식하면서 가솔들에게 가산을 정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2.7. 관도대전

200년 2월. 원소는 여양에 주둔하며 안량, 곽도, 순우경을 선발대로 보내 동군을 공격케 했다. 저수가 안량의 무모한 성격을 근거로 안량을 선봉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했고, 원소는 이를 거부했다.

안량 등은 백마에서 동군태수 유연을 포위했고, 조조는 이를 구원하고 싶었지만 백마 포위망의 군세는 1만이 넘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뿐만 아니라 안량의 배후에는 원소의 본대가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조조가 이 포위망을 성급히 공격하면 안량의 군세와 더불어 원소의 주력까지 한번에 상대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조 측은 이 포위망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고 2개월 동안 이 포위망을 방관하게 된다.

하지만 조조도 가만히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순유의 조언을 따라 연진에 군세를 보내 황하를 건너 원소의 배후를 치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우금, 악진이 보기 5천을 이끌고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하내에 설치되어 있던 원소의 별영들을 공격해 수천명을 참수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므로,[46] 이는 원소의 영향력이 확고하지 않은 하내를 치면서 원소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

우금에게 하내의 주둔군이 격파당하자 원소는 우금의 퇴로를 끊고 하내를 구원하기 위해 연진으로 도하를 시도했다. 조조는 원소가 연진으로 향하는 사이 안량을 격파하고 그를 참수했으며, 곽도와 순우경의 포위망을 후퇴시켰다. 안량을 참수해 유연을 구출한 조조는 연진으로 향했는데, 우금과 악진은 무사히 퇴각하여 조조에게 합류할 순 있었지만, 원소가 이미 연진 도하에 성공한 상태였으므로 조조는 동군을 거점으로 한 방어를 포기하고 관도 일대로 방어선을 후퇴시킨다. 원소는 문추와 유비를 보내 보내 조조를 추격하게 했으나 문추는 조조의 계략에 걸려 전사한다.

원소는 황하 일대의 도하거점을 확보하면서 안정적인 보급선을 확보했고, 동군을 거점으로 한 조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조조로서는 동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긴 했어도 아직 관도가 남아 있었고, 전술적 차원에서는 원소의 피해가 막심했다.

원소가 연진으로 도하하면서 하내를 구원함과 동시에 우금의 퇴로를 끊으며 잘라먹고, 본대와 떨어진 안량은 조조의 공세에 맞서 필사적으로 위치를 사수하며, 그 사이 원소 본대가 안량에게 합류해 조조를 포위해 쌈싸먹는 상황이 원소 입장에서 최상의 행복회로였겠지만, 원소가 조조의 본대와 떨어진 우금을 끊어먹지 못한 채 우금의 퇴각을 허용했는데, 안량은 조조에게 패하여 전사한데다, 후퇴하는 조조를 추격하던 문추조차 전과 확대는 커녕 조조의 계략에 당해 전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량과 문추는 원소군의 이름난 명장들이라 군의 사기는 크게 흔들렸다.

원소가 연진에 도하하기 직전 저수는 연진에 본영을 두고, 관도에는 별동대만을 보내 조조와 싸우면서 관도에서 패배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진언이 무시당한 저수가 군중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자 이를 이유로 도독이었던 저수의 병권을 빼앗아 그 병력을 곽도에게 배속시켰다.[47]

군세를 전진시킨 원소는 양무에 본영을 두고 조조와 대치했으며 양군은 제각기 수십리에 걸쳐 진지를 구축한다. 수 개월 간 대치 국면이 지속되다 200년 8월에 마침내 양 군이 크게 맞붙었는데, 기록상 조조의 직접적인 패배를 거론하지는 않고 있으나, 이때 조조가 '불리했고', 이 사건 이후 조조의 상황을 군사수가 일만을 넘지 않았으며 부상자가 3할에 이르렀다고 서술하고 있는 데다, 이후 관도에서 벌어지는 농성전의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에 조조가 크게 패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관도에서 농성을 시작하고 원소는 조조의 관도 본진에 맹공을 가하는 한편 조조의 후방인 예주에서의 반란을 선동했으며 이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주도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비를 파견한다. 유비는 유벽등과 연합해 허도를 공격하려다 은강에서 조인에게 격파되어 원소에게 돌아갔으나, 예주는 이통이 다스리는 양안군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원소에게 호응한 세력들이 강세를 이뤘고, 이에 원소는 재차 유비를 여남으로 파견한다.[48]

한편 조조가 원소군의 공격을 버티면서 보급부대를 습격해 수레 수 천 대를 불사르는 일이 있었다. 200년 10월에 추가 보급이 도착하자 원소는 순우경에게 1만 명의 군사로 이를 호송하게 했고, 이때 저수는 원소에게 장기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추가로 엄호하여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소는 조조를 관도에 몰아붙여 전세를 매우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초반에 안량,문추가 전사하면서 사기가 꺾였던 것과 달리 이 시점의 원소군 수뇌부들은 자기네들이 연전연승 중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소 세력 내부의 정쟁과 장기화된 전선에 대한 의견대립의 결과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해 순우경군의 배치 등 주요 기밀들을 누설하면서 원소의 본영에서 40리 떨어져 있던 오소에 숙영하던 순우경군은 조조의 기습을 받게 된다.

오소의 습격 사실을 파악한 원소는 오히려 주전력이 빠져나간 조조의 본진에 주력군을 배치해 공세를 강화하고, 오소의 순우경군은 기병대만을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했다. 순우경군이 전열을 유지하며 버텨내는 사이 기병으로 조조군의 후열을 공격해 무너뜨린다는 계산에서 나온 결정으로 보인다. 조조의 습격에 맞서 싸우던 순우경군은 정말로 전열을 유지하며 잘 싸웠기에 조조는 포위섬멸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기병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순우경군이 붕괴되었고, 순우경은 귀의를 거부하고 참수되었으며 조조는 전열을 재정비해 막 도착한 기병대까지 격파하면서 인생에 남을 역전극을 이뤄낸다.

순우경군의 전멸과 운반중이던 군량의 전소가 파악되자 원소군 수뇌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책임 소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 주력군을 이끌고 조조의 본진을 공격했던 장합, 고람은 도리어 아군을 공격하고 진영을 불지르며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 고람의 배신으로 군이 대혼란에 빠지자 원소는 전선을 버리고 단기로 달아났으며, 총사령관의 생사까지 불분명해진 원소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사실 정상적인 군신관계라면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 만무하지만, 전풍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원소는 자기 실수를 면피하기 위해서라면 무고한 신하 하나 죽이는 것 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애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고, 장합이나 고람도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합, 고람의 투항을 받아들여 상황을 파악한 조조가 반격에 나서자 원소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대다수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저수같은 핵심 간부도 달아나다가 포로로 잡히게 되고, 저수는 가문의 안전을 걱정해 조조의 귀순 권유를 거절하고 돌아갈 궁리만 하다가 결국 처형된다.

원소는 조조의 추격을 피해 황하를 건너 여양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했고, 여양을 지키고 있던 장의거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아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리고 패잔병을 수습해 상당수의 병사를 모았으나, 돌아가지 못하고 조조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모조리 학살당했다. 그 숫자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진수의 기록에서는 병사들이 거짓항복해서 '모두' 파묻어 죽였다고만 하고, 장번의 한기에서는 포로로 잡아 파묻어 죽인 것만 8만명이라 하나 헌제기거주에서는 앞뒤로 참한 것이(=전사자를 포함한 관도대전 전체의 원소군 총 사망자가) 7만이라고 하며 후한서에서도 앞뒤로 8만이 죽었다고 한다. (사망자 중 포로로 잡혔다가 살해당한 비율이 높긴 하지만) 살아 돌아가지 못한 병사가 7, 8만에 가까웠다는 게 사실에 가까울 듯.

관도전투에 대해 일반적인 평가는 원소의 판단미스와 분열로 인한 결과로 두는 편이다. 그러나 허유의 투항 이전까지는 조조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연의와는 달리 순우경은 술이나 퍼먹는 무능한 장수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원소가 운이 없어서 졌다고까지 여긴다. 하지만 그러한 압도적인 전력, 전황이면서도 원소군 내부의 결속은 매우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49] 이는 원소 본인이 부하들의 충성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벌 싸움을 조장한 측면이 크다. 또한 앞서 언급된 저수의 자포자기한 예견이 본인은 물론 전풍에게까지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면 패배의 책임에 원소 본인이 없다고 보기 힘들다.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소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상하였으며 재간과 도량이 있었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질이 거만하고 괴팍하며 스스로 높여서 선행을 하는 데는 모자랐다. 이런 까닭으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앞뒤가 모순되는 말 같지만, 앞부분에 '겉으로 보기에는', 뒷부분에 '실제 내면은' 이라는 뜻이 생략되었다고 보면 딱 맞아 떨어지게 된다.

2.8. 말년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참패하자 기주의 수많은 군현들이 조조에게 투항하는 등 원소의 위상은 심각하게 흔들렸으며, 조조 역시 원소가 과거 황제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던 전력이 있는 역적이라며 비판했다.

원소가 관도에서 참패하자 원소의 남정을 반대하던 전풍과 저수가 돋보였는데 저수의 경우 조조에게 붙잡혀 죽었으므로 전풍의 거취만이 문제가 되었다. 어떤 이는 원소가 패하고 돌아오자 전풍에게 당신의 말의 맞았으니 중용될 것이라고 했으나 전풍은 "우리 군이 승리했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지만, 패하였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며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고, 원소는 측근들에게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과연 웃음거리가 되었다."며 그대로 전풍을 죽였다고 한다.

선현행장에 따르면 원소의 병사들은 가슴을 치면서 전풍의 말대로 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울부짖었고, 원소도 전풍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으나 전풍과 사이가 나쁜 봉기가 "전풍은 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자신의 말이 맞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라고 참언하자 원소가 전풍을 죽였다고도 전해진다.

손성은 이를 평하여 저수와 전풍을 보니 그들의 계책을 씀은 진평과 장량에 뒤지지 않으나 다만 어두운 임금을 만나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연의에서는 원소가 전풍을 죽인 동기로 이 기록을 채용하며 전풍이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취합해 원소의 암군포스와 전풍의 예견력이라는 개별적인 인간평에 집중하여 소설적 재미를 높이려 하는데, 반대로 엄청난 공을 들인 원정의 참패로 대규모 반란이 이어지는 등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표적인 반전파였던 전풍의 입지 강화가 위험하다고 판단, 적당한 핑계를 붙여 숙청했다는 시각도 있다. 즉, 원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는 주장.

문제는, 전풍만 그런 게 아니라 저수도 전풍과 똑같은 예측을 하고 있었으며, 장합, 고람도, 자신들의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책임 전가당할 것이 두려워 차라리 배신을 해버릴 정도로 군신간의 신뢰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으며, 원소가 그런 성향이라는 것은 이미 신하들이 모두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풍이 단순히 기주 출신이라서든가, 반전파여서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원소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당장 전쟁이 중요한 상황에서 세력 내 중신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의도가 어떻든 간에 졸렬한 처사로 보일 수 밖에 없으며, 이를 평가한 많은 사가들도 비슷한 논조이다.

201년 4월, 조조는 창정에서 원소를 공격해 격파했고 원소는 패잔병을 수습해 반기를 든 군현들을 모두 평정한다.

연의에서는 재기를 노린 원소가 황하를 건너 조조를 공격하다 십면매복계에 당해 참패하는 것으로 묘사되나, 관도의 패배 이후 불과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창정의 전투가 언급되는 것은 무제기가 유일한데. 원소전에서는 창정 전투를 건너뛰고 패군을 수습해 반기를 든 지역들을 평정했다는 서술만 무제기와 동일하게 나타나며, 창정이 연주에서 황하를 건너는 나루터라는 점과. 조조의 영역권 내에 원소에 호응한 반란세력들 상당수는 아직 잔존해 있었다는 점, 원소의 관도 패배 직후부터 다수의 군현이 반기를 들었고, 창정에서 패한 원소가 패잔병을 수습해 반기를 든 지역들을 평정했다는 서술에 무게를 두고 바라본다면 창정의 전투는 관도 전역의 연장선으로 원소가 황하 이남의 패잔병과 자신에게 호응한 지지세력을 규합해 하북으로 철수하던 도중 조조의 추격을 받았다는 정도의 해석이 유의미할 것이다.

이후 원소와 조조는 황하를 경계를 두고 대치했고, 원소는 재차 원정에 나서 조조를 칠 것을 계획하지만, 202년 5월 병이 들어 피를 토하고 사망하였다. '군이 패한 이후 병을 얻었고 건안 7년(202년)에 근심으로 죽었다(憂死)'는 삼국지의 기록을 따르면 홧병이 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소의 발병과 구혈(歐血, 피를 토하는 것)한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와있지 않다. 발병한 시기, 구혈한 시기가 일치하는지도 불분명하다. 발병이 관도대전의 패배와 연결될 뿐 발병 시기와 병세의 진행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온 기록이 없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50]

급사로 보는 시각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구혈의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며 후계자 선정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된다는 전제(즉, 유언을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전제)는 논리적 오류이니 원소의 죽음은 급사가 아니며, 급사로 보는 것은 후계자 선정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원소에게 면책을 주려는 의도라는 반박도 있다.

하지만 원소가 원상으로 후사를 잇게 하려 했다는 기록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실린 원소의 전기에 모두 나타나며, 죽을 때 원상을 후사로 삼으려던 계획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못한 채로 죽었고(삼국지), 후사를 정함에 미치지 못해서(후한서), 심배와 봉기가 유부인과 짜고 원소의 평소 뜻에 따라 원소의 유명을 조작하고 원상을 세웠다는 내용으로 이어지고 기록을 신뢰할 경우 당시 원씨 집단 내부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후를 의심할 수 있을 유명조작에 대한 의심조차 당시 누구도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를 명분 삼아 큰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던 원담조차도 유명의 조작이 아니라 심배가 생전의 원소와 자신을 이간질했다는 것을 전쟁의 이유로 삼는 등 유명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은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조작되었음이 명백한 유명조차 감히 도전하지 못할 정도로 원소의 권위와 발언력이 절대적이었고, 원상으로 후사를 잇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 또한 분명하게 확인되는 상황에서 후계자를 선정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거나 반발을 의식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것이라는 시각은 성립되기 어려우며,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지만 후계구도 정립엔 관심이 없었다는 시각 역시 가정에 근거한 순환논법이 되므로,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여력이 충분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 있었음에도 그 뜻이 드러나기 전에 죽어 최측근들이 평소 뜻에 따라 유명을 위조했다는 상황을 모두 깔끔하게 설명하는 급사설은 별도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가장 일반론적인 해설이 된다.

딱히 무리될 게 없는 이 설이 논란이 됐던 것은 후사는 애시당초 원상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하늘이 원소에게 수명을 허락하지 않아서 급사한 것이 원소 죄인가? 원소가 급사만 안 했더라면 천통...식의 if를 펼치는 원빠들이 나타나고, 사서에 급사라고 명시적으로 적힌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급사라 확정짓고 후사문제에서 원소의 책임을 회피하고 우상화하려는 저열한 의도가 아니냐. 식으로 반발하는 원까들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결과.

2.9. 사후

본디 원소는 장남 원담을 폐출시키기 까지 하면서 자신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게 하고 막내아들 원상을 편애하여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문제는 이미 클만큼 큰 원담과 달리 원상은 아직 아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51] 이들 사이에선 10년 이상의 경력차가 있다보니 아무리 원소의 카리스마가 쎄다 해도 후계와 관련해서는 대부분 원담을 따랐고 이 당시 원상파는 사실상 원소가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범위에 한정되었다. 심지어 고간마저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면서 크게는 기주의 원소&원상과 청주의 원담과 병주의 고간으로 갈라진 셈.

정사에 따르면 저수는 이런 상황을 예측했던 것인지 원소 생전 원소가 원담을 청주 자사로 부임시키려는 것에 그로부터 재앙이 시작될 것이다.라 할정도로 친인척 위주 인사방식에 대해 엄청 강경하게 반대했다. 원소도 이렇게 한데 이유가 없진 않았지만[52][53] 결국 저수의 예언대로 원소라는 기둥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내분이라는 재앙이 일어났다.

물론 원소가 죽는다고 그 휘하세력이 따라 죽거나 하는게 아닌만큼 원소 사후에도 단순 전력으로 볼때 원씨의 세력은 조조측보다 여전히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그 원씨끼리 내분이 일어나고 여기에 조조가 더욱더 부추기기 까지 하자 원씨의 세력은 처참해졌고 결국 그 틈을 노린 조조의 급습에 첫째와 둘째는 조조에게 그대로 죽어버린다.이들을 받아줬다가 같이 목따인 답돈은 덤. 이 와중에 병주의 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한 뒤 배신을 하려다가 토벌당해서 역시 패망했다.

최종적으로 원상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강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동시에 공손강을 살해하고 요동을 기반으로 삼을 음모를 꾸몄으나, 공손강에게 살해당하면서 원소의 잔당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원소의 죽음(202년)에서 원상의 죽음(207년)까지 고작 5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원소는 관도에서 참패했지만 조조에게 효과적으로 역적의 프레임을 덧씌우는 데는 성공했고, 그 자신의 권위는 세력 내부에서 신격화되어 체제 정당성의 상징으로 남으면서 조조와의 승부는 여전히 향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원씨 일족은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했으나 관도의 패전 이후 흔들리던 상황에서, 원소의 급사와 후계 분쟁으로 원씨의 카리스마가 흔들리자 초촉, 장남, 여광, 여상 같은 무장들의 배신이 잇달았다. 그나마 장합은 명령에 따라 싸우다가 입지가 꼬이게 되자 우발적으로 선수를 쳐서 배신한 상황이었지만, 원소의 후계자인 원상의 경우 아예 포진 다 마치고 조조와 회전을 벌이기 직전 상황에서 배신을 당해 군이 와해되거나(마연, 장의) 원상을 습격해서 내쫓은 뒤 군사, 행정을 장악하고 조조에게 항복하는(초촉, 장남) 등 계획적이고 스케일 큰 배신을 연달아 당하는데, 이는 원소의 카리스마와 권위가 압도적이었음을, 그 세력의 체제가 원소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다란 1인 독재 체제였음을 반증한다. 그렇게 커다란 카리스마를 지닌 원소가 폭발하고야 말 불씨를 남긴 채 떠나자, 원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결국 원소 세력은 1인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건재할 때는 한없이 잘나가지만, 반대로 1인자가 잘못된 결정을 하거나 후계구도가 꼬이게 되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몰락해 버리는 독재체제의 강점과 약점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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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삼국지 위서 원소전 주석 영웅기[2] 출처: 왕선겸의 후한서집해 인용 주수창의 후한서주보정[3] 출처: 무제기 주석 황보밀의 일사전[4] 출처: 후한서 원소열전 주석 헌제춘추[5] 출처: 왕선겸의 후한서집해 인용 주수창의 후한서주보정[6] 이후 일반 첩 소생의 서자와 천민 첩 소생의 얼자의 앞글자가 합쳐져 서얼로 등장하며, 이후 첩 소생의 자녀를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7] 과거제도는 수문제가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당나라 초중기를 넘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기능하였으며 송나라 이후엔 완전히 관리선발 체제로 정착된다. 다만 명나라 때부터는 부유한 강남의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역배분에 고심한 흔적들도 있다.[8] 원술은 원소와 달리 어머니가 정실 부인이었다.[9] 전한의 대장군이었던 위청도 어머니가 평양공주의 하녀였으나, 위청의 경우 오히려 천한 출신의 인물을 황제가 친위세력으로 키우기 위해 군권을 준 것으로 원소와는 경우가 다르다.[10] 역사학 전공이라고 한다.[11] 고아로 태어나고 어려서 낭이 되었다는 큰 얼개는 삼국지 원소전 배주에 인용된 영웅기의 내용과 거의 비슷한 데다, 잘생긴 외모에 위엄과 예의가 있다는 이야기 역시 삼국지 원소전 본편에 비슷한 언급이 있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격이 되므로 아마 배송지가 이 기록을 연문으로 여기고 뺀 것 같다는 의견이 있다.[12] 원술의 친모.[13] 천출인 친모의 3년상은 안 했다.[14] 다만 현대와 달리 그 당시 도로 상황은 열악했으며, 귀족같은 경우 마차나 수행인 등을 챙겨오는걸 고려하면 현대처럼 몇차선 도로 넓이가 수천 수만명에게 메워지는 급이 아니라 실제 방문자는 보통 십수명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만 해도 이 시대에선 엄청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엄연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십수명대라고 해도 결혼식이나 장례식 하루가 아니고 6년상을 치르는 동안 저랬다는 거니 실제 방문객 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것이다. 명문가라곤 하지만 얼자 출신에 하급 관리 출신인 20대 젊은이의 명성이 전 중국에 퍼졌다는 건 그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의 명사들이 원소를 만났고,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는 얘기다.[15] 삼국지톡에서는 이 6년상으로 인해 영원히 낫지 않을 지병을 얻었다고 설정했다.[16] 당장 비슷한 시기에 두가지 전례가 있었는데, 3년상을 치르는 것 덕분에 효자로 알려져 천거된 선비가 삼년상 기간 사이에 아이를 가진 것, 즉 성행위를 했다는게 발각되어 벌을 받은 사례가 있으며, 다른 한 명은 이와 달리 3년상을 진짜 지극정성으로 했으나 이런 아들을 보다못한 어머니가 겹이불을 덮어줬다가 이 때문에 주변에게 일제히 비난받고 빈객이 끊겼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엄청 예민했다. 즉 사생활은 포기해야 하는 수준이다.[17] 이 외에도 아직 잔류한 중도 또는 청류파 지식인들 중에서 당고의 금 사태로 언론을 억누르는 환관들에게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 많았던 것도 한몫했다. 즉 원소가 청류파의 대표격 인사중 하나가 되어버린 상황에선 그를 건드렸다간 위에 말한 원씨가문만이 아니라 자청해서 몰려드는 지식인들까지 감당해야했는데 그러기엔 자기들 상태도 영 좋지 못했다.[18]영웅기》에선 원씨 가문의 시선이 점점 안좋아지고 원외까지 직접 나서며 명령하자 어쩔수 없어 받아들였단 의견도 있지만 《후한서》에선 원외의 말에도 불응했다고 서술되어 있고 이 전후의 행적을 고려하면 어차피 황건난 이후 인재가 부족해지면서 청류파인사도 중앙 정부의 문턱을 넘기 시작했기 때문에 자신또한 그에 맞춰 벼슬살이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19] 이때의 하진은 영제 붕어 이후와 달리 하태후 건도 있고 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긴 해도 십상시랑 불구대천으로 여길정도로 엄청나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20] 삼공 이상 고관의 속관으로, 대장군연의 정원은 29명이다.[21] 시어사는 상서의 결재를 받는다. 즉, 원술이 원소의 상관.[22] 삼국지연의에선 이부분이 더 극적으로 묘사되는데 다른 대신들이 쫄아서 동탁의 막장 행보에 아무 말도 못할 때 혼자서 "지금 황제가 딱히 폭정을 저지른 적도 없고 엄연히 선대 황제의 자식인데 왜 네가 혼자서 폐위하고 자시고를 논하는가?"라며 반대하고 이에 분노해 칼을 빼든 동탁에게 마주 칼을 빼들고 "어리석은 놈! 천하에 칼 찬 사내가 네놈뿐인줄 아느냐!?"라고 대놓고 욕을 한 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23] "태부(太傅) 원외는 원소의 숙부이고, 태복(太僕) 원기(袁基)는 원술과 같은 어머니의 형으로, 동탁이 사례교위 선번(宣璠)으로 하여금 갓난아기까지 잡아들이게 하였는데 원소의 어머니와 자매(姊妹), 갓난아기 위로 50여 명을 하옥하여 죽였다.-헌제춘추) 후한서집해에서 주수창은 이때 동탁에게 죽었다는 원소의 어머니가 원소의 생모인 것으로 보았고, 영웅기에 언급된 6년상의 대상은 적모라고 주장했다. 노비인 원소의 어머니가 원씨 가문의 일원으로 대우받아 수많은 조문객이 몰렸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24] 단 손견이 나중에는 몰라도 이 시점에서 완전히 원술의 부장으로 들어갔는지는 좀 의문스럽다. 원술이 손견이 너무 잘 나간다고 보급을 한 번 끊은 것도 있고 이 시점에서의 둘은 상하관계가 좀 있는 동맹에 가까워 보인다. 왜냐면 원술과 손견이 딱히 그 전에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 이 때 남양에서 만나고 함께 행동했기 때문이다. 손견은 동탁 토벌을 몹시 열망하고 있었던 기색이 뚜렷하고, 한복에게 물려 아무 것도 못하던 원소를 보면 손견이 본격적으로 동탁과 싸우기 위해 후방에 보급도 해주는 든든하게 믿을 만한 세력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25] 무제기에 따르면 필유(畢瑜)를, 후한서에 따르면 장기(張岐)를 유우에게 보내 추대를 권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26] 이 밀약의 조건으로 무엇을 제시하였는지는 기록이 부재하여 알 수 없다.[27] 기주의 강노병은 유주의 돌기와 함께 후한의 최정예 병력으로 명성이 높았다.[28] '다시 남은 무리를 규합하고 내 모적(蛑賊, 악인)을 이끌고 발해(勃海)를 불태웠소'[29] 한진춘추에 인용된 원소의 편지에 따르면 '휴전을 요청해 놓고서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북쪽에서 침입을 알리는 급보가 끊이질 않아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원소와 공손찬의 휴전은 193년 1월에 있었고 장연이 업을 함락시킨 때는 193년 3월이므로 원소의 위기를 틈타 휴전을 파기했다고 보면 들어맞는다. 후한서 유우열전에서도 유우와 공손찬의 대립이 격화되는 계기로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기만 거듭하면서도 계속 원소를 친답시고 백성들을 거덜내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것을 들고 있는데 이 시기가 193년 무렵이기 때문에 공손찬이 원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재개했을 가능성이 높다.[30] 원소는 장안 조정을 동탁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했으며 이전 소제 정권의 실세였던 자신에게 그 정통성이 어느 정도 이어짐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장안 조정에서 받은 관직이 정품이고 원소가 상표해서 내린 관직은 짭퉁이라며 얕보는 태도는 원소의 자존심을 직격으로 건드는 행위였다.[31] 유주는 총 11개 군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중 요동, 낙랑, 현도의 3군 일대는 요동 공손씨 정권의 영역이었고 유주에서 공손찬은 8~9개 군을 점유했다. 단순하게 볼 경우 유주 내의 공손찬 세력권 중 절반이 원소에게 붙은 거다.[32] 위서 장홍전에 따르면 장홍은 원소 휘하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던 장도(張導)가 장안으로 가서 천자를 알현하고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원소에게서 본인은 물론, 일족까지 모조리 주살당해 대가 끊긴 사건을 비난하고 있다.[33] 각각 향당(享黨)과 종적(種賊)으로 불림. 정도가 심한 곳은 각 마을마다 제각기 민병대로 무장하여 세력을 갖추고 관리의 통제를 거부했다는 말이다.[34] 이 과정에서 원씨 친족들이 동탁에게 살해당해 동정여론을 받았던 것은 덤[35] 실제로 헌제를 옹립했던 조조군 내에선 순욱, 최염, 모개 등이 한 황실에 충성을 다했고, 결국 이들은 모두 훗날 조조에게 숙청당하며, 이들 중 몇명의 자손들은 나중에 조씨의 정권을 버리고 사마씨의 정권에 붙는다.[36] 이런 친족과 동향인을 중심으로 한 '핵심 인재' 들은 대부분 동탁의 손에 죽었거나 적자인 원술을 지지했다. 사실 원소 본인도 원씨 일족이 몰살당하는데 간접적으로 한몫했다.[37] 항우의 숙부 항량도 초의제를 옹립했지만 그 역시 핵심 인재는 항우밖에 없었던 터라 항량이 죽자 항우는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되었고 주도권은 초나라의 구 귀족이자 문관 출신이었던 송의에게 넘어갔다.[38] 석(錫)의 궁시(弓矢)와 부월(節鉞), 호분(虎賁 = 호위병) 100인. 이는 구석의 6, 7, 8번째에 해당하는데, 부월은 사법적 재량권, 호분은 신변불가침을 비롯한 면책특권, 궁시는 언제든지 역적을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상징이었는데, 법령에 따라 관할 구역 내 2천 석 고관의 사형까지 집행 가능한 지절까지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관할구역인 하북 4주 내에서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다.[39] 대놓고 일을 크게 벌리다 실패한 원술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는지, 대외적으로는 한나라의 신하를 자처하는 외왕내제에 가까웠다.[40] 197년 무렵으로 추정.[41] 198년 5월의 일로 당시 유표와 반년째 대치하고 있던 조조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싸움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당장은 원소가 거절했다고 하나 대치가 더 길어질 경우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42] 이들 중 선우보는 이후 허도에 직접 들어가 귀부하고 조조와 같이 관도대전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위종은 하내태수에 임명됐다는 것 이후론 기록이 없는데 하내가 원소의 근거지인 위군과 맞닿아 있는 데다 관도대전 무렵 우금이 하내군에 설치된 원소군 별영들을 급습해 격파하는 기록이 확인되며, 청주 역시 원소의 수하들이 관도대전 시점에 태산군으로 들어와 서주에 역으로 공세를 펼치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관도대전 직전 시점엔 모두 원소에게서 쫓겨나거나 영향력이 약해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43] 원소 입장에서 이는 협천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원소 본인에 대한 간접적 질책으로 느껴졌을 것이다.[44] 다만 내전기 초반엔 오히려 전풍, 저수를 비롯한 기주 인사들이 특히 이각/곽사 난리때 협천자의 중요성을 고집했고 이주민 계파들은 당시 원소의 정치적 마스터 플랜(조조와 군사적 대결보다 유우 추대 + 기주 호족 컨트롤)를 지지함으로 오히려 조조와 정면 충돌을 피하자고 주장했다. 즉, 특별히 기주 인사들이 비둘기파라고 볼 수 없다. 그보다는 타이밍의 문제로 이미 조조가 협천자를 했고 상황이 안정적으로 흐르면서 함부로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한 듯.[45] 보통 원상으로 해석된다.[46] 이미 하내가 원소에게 떨어져 있었으므로 조조가 하내에 남겼던 위종의 결말도 별로 안 좋았으리라 짐작되는 기록이기도 하다.[47] 연의에서는 저수를 아예 투옥시킨다.[48] 악운이라고 해야할지 몰라도 이때 유비를 따라간 원소군 병사들은 동료들이 대패하거나 생매장을 당하는 일은 면했다.[49] 허유, 장합, 고람의 투항과 전풍, 저수의 진언을 무시하는 것,[50] 각혈+홧병으로 인한 급사로 봐서 심근경색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다만 원래부터 위암이나 폐암, 또는 심장병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증거가 이 둘 밖에 없으니 확실하지는 않다.[51] 원상이 추정 187년 생인데 원담은 기록에 따르면 못해도 190년즈음엔 최소 15살이었다. 즉 아무리 적게 잡아도 둘 사이의 나이차가 띠동갑은 된다는 것.[52] 먼저 원소는 땅을 점령하는데 어지간하면 지방의 토호들을 챙기면서 예를 중시하고 합병위주로 나아갔다. 그러다보니 세력은 컸지만 하나하나 파고들면 원소의 독자세력이라기보단 원소를 대표로 둔 일종의 연합체에 가까운 구조였다. 또한 그들이 뭉치면 원소가 경시하지 못할 만한 수준이다보니 아예 관계없는 사람보단 친족을 보내는게 좀 더 이들을 통제하기 쉬웠을것이다. 조조가 유력자들을 대부분 쳐죽였던것과 정반대인데, 조조는 그런만큼 반란이 종종 일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권력이 오롯이 조조와 그 계승자에게 집중돼서 조조 사후에도 크게 내분이 벌어지진 않았다. 다만 조조와 원소는 각각 생전 나라의 기틀을 닦았던 정도가 다른걸 고려하기도 해야한다.[53] 사실 이렇게 된 건 역시나 조조가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설령 유력자들을 쳐죽여도 "너 반란." 한마디면 충분하기 때문. 하지만 원소는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 그 유력자들이 조조에게 붙을 테고 그러면 연쇄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므로 그럴 수는 없었던 것. 좀 더 길게 보자면 원소가 유비에게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가 유비가 서주에서 망하고 나서 받아들인 것도 결국은 이런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비를 받아들여서 명분을 얻으려고 했던 것. 사실 이 점은 손오도 뒤통수를 친 것까지별 차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