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얼(庶孼)은 양반(양인)의 자손 중 정실 소생이 아닌 첩이 낳은 자식을 뜻하는 신분 계급이다. 불건전한 관계에서 태어났기에 정실 자손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양반들이 가진 특권의 일부는 적용되었는데, 이렇듯 준양반 취급이라 신분사회에서 굉장히 애매한 존재였다. #참고로 양인 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서자(庶子), 딸은 서녀(庶女)로 부르고 천민 첩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얼자(孼子), 딸은 얼녀(孽女)라고 구분지었다. 이를 통틀어서 서얼이라고 한 것. 자세한 건 후술.
양반의 서얼은 신분이 한단계 낮은 중인으로 떨어졌으나, 아버지가 왕이면 적자들과 서열 구분이 있기는 했지만 천민의 소생도 중인은 커녕 엄연한 왕족으로 신분이 유지되어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왕실의 손이 귀해지던 조선 후기때는 어머니가 누구든 성별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금지옥엽이었을 정도.[1] 모친이 천민인 영조는 왕이 되었으며, 천민 출신 후궁 안빈 이씨가 자신의 딸인 옹주에게 '너'라고 불렀다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는 왕자를 아버지로 둔 이들도 마찬가지며,[2] 어머니의 신분에 관계 없이 아들은 군호를 받은 왕족으로서 왕실 본가에서 갈라져나가 분가를 창시하고(전주 이씨 OO군파), 딸들 역시 정실 공주들처럼 양반 가문의 정실로 시집갔다. 이는 왕족 대우 유지의 대수에서 멀어져 일반 사대부와 동격인 사족으로 편입된 왕손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이는 선원록에 실린 왕손들 한정으로 왕족 여인들이 등재되는 족보인 유부록에 실리는 정종의 후손들은 예외였다. 이 때문에 정종의 서자 무림군의 후손 이덕무는 왕손임에도 불구하고 사족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아래에 열거하는 조건을 가진 다른 부류에도 이 단어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2. 역사
2.1. 조선 이전의 시궁창 대우
서얼 관련해서 가장 대표적이 오해는 조선 시대부터 차별이 심화되었다는 것과 조선 태종 15년의 서얼 현관직사(顯官職事) 임용 금지법이 서얼 차별의 효시라는 인식이다.이는 조선 이전의 기록이 절대적으로 적고 취합하기 힘들다는 힘들어 90년대 이후에나 조선 이전 서얼들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고려의 습속인 양측적 친족관계에 대한 이해가 80년대 이후에나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태종은 이전 시대에 비해 기회를 조금이나마 열어줬던 임금이며 서얼 차별의 본진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조선 이전 시대다.
적서 차별은 한반도 왕조가 중국 왕조와 가졌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이기도 한데 첩의 신분이 어디까지나 양인이었고 천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송대 이후 중국에서 그 소생들이 재산 상속 등에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과 달리 고려도, 그리고 이전 왕조인 신라도 기본적으로 첩에 대한 대우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왕이 비천한 첩을 총애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殷影)이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으니, 은영이 그 첩을 잡아다 죽였다. - 삼국사기 권 12 신라본기 효공왕
허유는 성격이 혹독하고 포악하여 첩이 가노(家奴)와 간통하였다며, 첩의 두 귀를 베고 두 눈을 상하게 하였으며, 또 그 노비의 두 눈을 뽑고 덧붙여 귀·코·발꿈치를 베었으며 또 그의 생식기를 베어 첩에게 먹게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이 몸을 움츠렸다. - 고려사 권 105 열전 18 허공(許珙) 부 허유(許猷)
(최사전의 )아들은 최변(崔弁)과 최열(崔烈)이다. 최사전(崔思全)이 일찍이 최변과 최열에게 금 술잔(金罍) 하나씩을 주었는데, (최사전이)죽자 첩이 그 하나를 훔쳤다. 최변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찍으로 때리려 하니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돌보아야 하는데, 하물며 이러한 물건으로 그래야 하겠습니까? 아우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형에게 드리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 고려사 권 98 열전 11 최사전
그의 (정숙첨)형 우복야(右僕射) 정진(鄭稹)도 탐욕이 많아서 남의 토지를 강탈해 차지했다. 또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해 처와 첩의 분별이 없었으므로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강등시켰다. -고려사 권 100 열전 13 정세유(鄭世裕) 부 정숙첨(鄭叔瞻)
김원명과 찬성 이구수(李龜壽)는 생사를 같이 하는 친한 벗이었다. 하루는 이구수가 김원명의 집에 들러서 술을 마시는데 김원명의 첩이 본처와 동석(同席)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자네가 오늘날 재상이 되어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찌 나라를 바로 잡겠는가?”라고 하고 그 첩을 꾸짖어 물러가게 한 다음 술도 마시지 않고 돌아갔다. - 고려사 권 125 열전 38 김원명
효공왕대의 기록은 신라 후대 왕권의 열악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대신이 왕의 총애를 받는 첩을 마음대로 죽여버릴 수도 있었을 정도로 첩의 위상이 보잘 것 없었음을 드러낸다.
허유와 최사전 아들들에 관한 기록은 첩을 가정내에서 재량껏 형벌을 가할 수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허유에 관해서 주변에서 경악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어떤 법적인 제지도 받은 적이 없다. 최사전 아들들의 이야기 역시 왕이 최열의 관대함을 칭찬했다는 후일담만 있을 뿐이다. 즉, 최변의 행위 자체는 그 당시에 불법도 아니고 혹독하긴 해도 되는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진과 김원명의 일화는 첩의 사회적 위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처와 절대 동격일 수 없는 존재였고 가내에서 엄격히 구분되어 가장이 처와 첩을 동등하게 대하면 그것이 탄핵 사유가 되었다.
고려 초기인 성종 시기 기틀이 잡히는 고려의 오복제, 쉽게 말해 상복 입는 방식에서도 첩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드러난다.
조선은 경국대전에서 첩이 남편의 부모를 위해 자최복(齊衰服)을 입을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고려와 고려가 참고한 당제에선 무복(無服). 관련된 규정이 전무하다. 조선의 첩은 남편 사후에 참죄(斬衰) 3년복, 남편의 부모, 자식, 자신의 자신, 남편의 첩을 위해서 기년복(朞年服)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남편을 제외하곤 모두 일괄적으로 기년복을 입도록 한 것인데 남편 사후 참죄 3년복은 같으나 자식 상례에 입을 상복은 장자와 차자의 구분을 엄격히 뒀던 고려와 차이가 있었다.
고려의 첩은 남편과 남편의 처(妻) 상례에 상복을 입으나 첩이 먼저 죽었을 때 상복을 입는 건 남편과 첩의 자식들 뿐. 남편과 처는 상복을 입을 의무가 없었다.
남편의 자식이 첩을 위하 성복을 입은 건 어쨌든 서모(庶母)에게 예를 지키라는 것인데 이게 오복 중에 가장 가벼운 3개월짜리 시마복(緦麻服)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들이 있는 첩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지팡이를 짚고 자최장기복(齊衰杖期服)을 입도록 한 조선시대의 조치보다 훨씬 저열한 것이었다.
고려의 첩은 공적으로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가문, 가장에게 소유된 존재에 가까웠기에 이토록 지위가 낮았고 이는 자연히 첩 소생 자녀들의 지위 약화로 이어졌다. 심지어 왕족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흔히 소군(小君)으로 불린 고려 왕의 서얼들조차 조선에 비해 극히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기미일. 소군(小君) 한 명이 국가의 금령(禁令)을 어겼다 하여 어사대(御史臺)의 관리가 모욕을 주었으나 왕은 금지할 수 없어 그를 가구옥(街衢獄)에 수감시켰다. 당시 국가의 제도상 왕을 모시는 궁인이 낳은 아들은 머리를 깎아 승려로 만든 후 그를 소군이라 불렀다. - 고려사 세가 권 26 원종 6년 4월
무신정권 실세라면 왕권 약화가 원인이겠으나 상대는 일개 어사대 관리였는데 소군을 모욕주고 감옥에 수감시킬 수 있었다. 이는 낮은 신분의 어미를 둔 소생에 대한 당대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조선에서 간택 제도가 탄생하는 이속 사건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무신 집권 최장기 집권자 최우의 아들 최항의 사례 역시 비슷하다. 무소불위의 당대 최고 권력자 자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얼자라는 이유로 최우의 사위 김약선에게 후계자 경쟁에서 밀리고, 조카 김미의 지지자들에게 도전을 받고, 승계 이후에도 지지세력 부족으로 고심해야 했던.
이토록 대우가 시궁창이었던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일반적이었던 양측적 친족구조 때문이다. 고려는 익히 알려져 있다 시피 친가와 외가. 아버지 가문과 어머니 가문 서열이 동등했는데(남녀가 동등한 게 아니니 주의) 양쪽 가문을 모두 중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천한 어머니 가문, 첩과 서얼들의 지위가 시궁창에 떨어진 것이다.
흔히 조선 태종 때 만들었다고 '잘못' 알려진 서얼금고법은 사실 조선 이전 시대에 존재하던 법과 관행에 유교 껍데기를 씌운 것에 불과했다. 오히려 태종은 서얼의 관직 진출 제한을 명시하기 1년 전인 태종 14년에 한품서용제로 고위 관료 소생 서얼들의 제한적인 관직 진출과 면천을 허락했는데 바꿔 말하면 조선 이전 시대에는 제한적이 관직 진출과 면천 조차 일반적이지 않은 호사였다는 소리.
간택 제도가 만들어지게 된 직접적 동기인 이속의 사례도 고려시대 사고 방식으로는 태종이 아닌 이속이 자연스러웠다. 미쳐서 헛소리한게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태어나 개중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진 관리였던것. 반면 이숭인과 우현보 아래서 수학한 유학자 출신 태종은 노비종부법 시행 원리에서 엿보이듯 부계 중시 개념을 명확히 하려는 입장이었고, 이는 역시 유학자인 대간과 중신 다수도 공감은 할 수 있는 사안이라 조정내에 이속을 비호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고려와 조선은 연속이며 고려가 서얼에 관대했는데 고려 사람들이 세운 조선이 갑자기 차별한 게 아니라 원래 고려시대까지 차별이 극심했던 것이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완화되어 조선 초기에는 얼자들이 공공연히 면천을 받고 서자들이 제한적이나마 관직에 나가는 제도가 보장된 것이다.
시중에 풀린 많은 개설서 등에서 양측적 친족관계를 강조하며 고려가 조선보다 더 평등한 사회였다고 주장(남녀평등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런 늬앙스로 서술하는 식으로)하나 기실 조선보다 훨씬 심한 차별과 혹형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 조선이 개국하고 성리학적 질서가 조금씩 뿌리내리면서 부계 혈통을 훨씬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며서 비로소 서얼들이 운신할 폭이 넓어지고 양측적 친족관계가 희미해지는 조선 후기에 익히 알려전 서얼 허통이 활발이 진행될 수 있었다.
3. 차별 완화를 위한 노력
고려는 법제적으로, 사회적으로나 다소 구멍이 많다보니 사회적 신분으로 서얼이 고착되진 않아서 대부분 차별 받는 와중에 일부 서얼들은 극적으로 드물게 나마 날아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은 서얼이 하나의 신분처럼 고착하는 대신 성리학 통치 질서의 정착과 함께 점진적으로 차별을 완화해 갔고, 무엇보다 서얼들이 뭉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대부 계층에서도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전술했듯 태종 대 제정된 서얼금고법은 이미 언급했듯 조선시대 이전에 원래 있던 법과 관행에 다시 한 번 주장한 것에 불과했다.
태종 14년에 아버지의 가문, 본종을 중시해서 아버지가 양인이면 엄마가 천인이라도 양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의정부 건의에 따라서 2품 이상 관리의 양첩 소생은 영구히 면천해서 5품 이하 관직에 임용할 수 있게 되었고 천첩 소생도 속신(贖身 대가 받고 풀어주는 거)해서 양인이 될 수 있게 공인받았다. 이듬해에는 한층 허용의 폭이 넓어져서 3품 이하 관리들의 천첩자도 속신이 허락되니 관리 아버지를 둔 얼자들은 아버지가 특별히 막되어 먹은 사람만 아니라면 노비로 굴러떨어질 일이 없게 되었다.(=고려때는 진짜 노비가 될 수 있었다.)
태종 14, 15년의 이같은 조치는 현관 직사 임용 금지법과 한품서용제가 경국대전까지 내려가 서얼 한품서용법 된다. 즉, 서얼을 차별해서 한품서용법을 만든게 아니라 고려 때까진 아예 기회가 없었고 어디까지나 각자도생하며 행운을 노려야 했던 이들에게 고위 관직자 소생이나마 제한적으로나마 관직 문 열어주는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성리학 질서 정착으로 부계가 중시되면서 이 법은 지속적으로 개정 노력이 이뤄졌다. 명종대인 1550년, 모친쪽이 양인인 서자 출신이면서 그 후손이 손자대까지 내려오면 문과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서자 출신이라는 것은 답안지에 명시[3]해야 했다. 18세기 즈음 신분제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정조 1년에 서얼도 과거 문과 응시가 가능해졌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서얼은 수가 많아지고, 상민의 윗 계층인 중인의 대다수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돈과 교양을 획득하면서 16세기부터 서얼통청운동(庶孽通淸運動)이 일어났고, 1777년 정조가 정유절목(丁酉節目)를 발표하면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규장각에 놓기에 이른다. 철종 대에 문과 합격한 서얼의 청요직 임용도 이뤄졌다.
태종이 서얼 차별의 시작처럼 오해하게 된 이유는 조선 후기의 인식에 기인한다. 조선 후기에 고려-조선을 아우른 사료 분석을 통한 실증적 연구가 가능할리가 없는 상태에서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한 이들이 상고할 수 있었던 가장 이른 시기가 조선 태종 시절이었다. 때문에 정도전을 견제하기 위해 서얼금고법을 만들었다는 인식이 조선 후기에 팽배해지는데 고려시대에 대한 연구가 크게 부족했던 일제강점기 이상백의 1934년 정도전이 아니라 이방석을 제거한 명분 마련을 위해 서얼금고법을 만들어 차별을 시작했다는 논지를 내놓았고 사료가 많고 접근이 용이한 조선 후기 서얼 연구에 치중하던 학계에선 수십년간 받아들여졌다.
80년대 고려의 양측적 친족구조에 대한 연구가 뼈대를 갖추고 00년대에 고려시대 서얼 대우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면서 비로소 고려시대에 보편적이었던 차별이 조선 이후 점진적으로 완화되었음이 밝혀졌다.
조선에서 조선의 서자, 서녀, 얼자, 얼녀가 크게 늘어난 이유는, 서얼이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알 수 있다. 서얼 중 '서'는 양첩의 자손, '얼'은 천첩의 자손을 의미한다. 당연하게도 본부인은 1명이지만 첩은 여러 명이니, 시작부터 숫자가 많다. 게다가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자손'. 아무리 어머니가 정실이어도 아버지가 서자면, 즉 할머니가 측실이면 자신도 서얼인 것이다. 정조대의 유명한 규장각 한학 4가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중에 박제가를 제외한 3인의 어머니는 당당한 정실부인이었다[4]. 다만 할머니, 혹은 증조할머니나 먼 윗대의 할머니 중에서 한 분이 첩이었을 뿐. 이러니까 서얼의 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서얼은 양반의 서자녀, 얼자녀 1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손 대대로 물려지며 서얼 집단과 계층을 이루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서얼제도 일단 사라졌다. 물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첩 제도 자체도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뒤에야 공식 폐지[5]되었기 때문에 서얼에 대한 차별의식이 사라지려면 그만큼 더 시간이 필요했다.
1930년대 동아일보 '응접실' 코너를 보면 이때에도 서얼이 차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問: 설령 상대방이 서얼(庶孼)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더 많다면 존대를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 答: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요즘 들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생아와 더불어서 친자논란이 심심하면 벌어지는 지위이다. 당장 김두한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연상이 쉽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정식 혼인이 아닌[6] 관계이므로,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의혹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7] 영조 같은 경우도 이 때문에 재위 시기 내내 정통성 문제에 휘말렸다.[8]* 答: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요즘 들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대표적인 서얼이며, 정확히 말하면 서얼 중에서도 천민(계집종)의 자식인 얼자이다. 때문에 결말을 두고 자기가 얼자면서 처첩을 뒀다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는데, 홍길동전에서 비판하는 건 적서차별이지 처첩제가 아니다. 첩을 두었어도 적자와 서얼을 차별하지 않으면 모순이 아니며, 작중 길동은 아들들을 모두 대군으로 삼아 차별하지 않았다. 또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처를 2명' 두는 판본도 있다.
4. 한품서용제
서얼의 경우도 관직에 오를 수는 있지만[9] 그 품계에 제한을 두었는데, 이를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라고 부른다. 한품은 승진 가능한 품계에 제한이 있다는 것이고, 서용은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라는 의미이다.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서 적용되었고, 후대로 갈 수록 제한이 점점 풀려가는데 가장 대표적인 수혜자가 서자[10]에 잡과를 치렀음에도 생전에 종1품 숭록대부, 죽어서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 겸 부원군 직책까지 받은 허준[11]과 문과시험을 본 허준의 남동생 허굉 형제다.
선조는 전란으로 떨어진 권위를 보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능하고 믿을 수 있다 싶으면 중인이나 서얼, 천민이더라도 전례없는 관직이나 직책을 내렸다. 예를 들어서 종계변무에서 공로가 있다고 역관 홍순언에게 2등공신호를 내리거나, 임진왜란 당시 자신을 따라왔다고 공신호를 붙인 것인 호성공신에 마의[12]까지 넣어주고 노비 출신 한명련, 정충신을 군부 요직에 넣어주었다.
4.1. 경국대전 기준
- 문무 2품 이상의 고관의 양첩 자손은 최대 정3품[13]까지, 천첩자손은 최대 정5품까지 오를 수 있었다.
- 문무 6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 4품, 천첩 자손은 정 6품이 제한선이다.
- 7품 이하이거나 관직이 없다면 정 7품, 천첩 자손은 정 8품이 제한선이다.
- 이 경우에도 문과 시험 자체는 불가능해서, 사역원(통역), 관상감(천문), 전의감(의학), 내수사(왕실 사유재산), 혜민서(서민치료), 도화서(그림), 산학(계산), 율학(법률) 등의 잡과를 본다.
4.2. 속대전 기준
- 서얼이 문무과 시험 자체를 볼 수는 있었다. 문과에 급제된 사람은 교서관에, 무과에 급제된 사람은 부장 혹은 수문장으로 들어간다. 참고로 문과 합격자의 경우는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고 임명될 수 있고, 무과합격자의 경우는 선전관, 부장, 수문장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았는데, 승진 한계와 승진속도가 정확하게 이 순서에 비례했다.
- 서얼이 문과에 급제하여 참상관이 되면 호조, 형조, 공조 3조의 낭관이 될 수 있고, 여타 관청의 판관 이하는 음관, 무과 출사자를 임명할 수 있으나, 능, 전, 묘, 사, 종부시 등 5사의 낭관과 사헌부 감찰, 의금부 도사는 될 수 없다.
- 서얼로서 문과, 무과에 급제한 당하관은 부사로 제한하고, 당상관은 목사가 될 수 있다. 생원, 진사, 음관은 군수로 제한하되,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가 될 수 있다. 소과(생원시 + 진사시)를 보지 않은 사람[14]와 인의[15] 출신인 자는 현령으로 제한하되, 치적이 있으면 군수가 될 수 있다.
- 문과에 급제하여 참상관이 된 자를 직강에, 무과에 급제하여 참상관이 된 자를 중추부 경력, 도사 등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나, 도총부의 관료와 훈련원 부정은 될 수 없다.
- 오위장은 문관, 음관, 무관이 모두 가능하고, 무관을 우후에 임명될 수 있다. 문장, 학식, 덕행, 의리가 뛰어난 자와 재능, 기량, 치적이 현저한 자는 특별히 뽑아 임명하되, 묘당과 전조에서 국왕에게 보고한 후 실시한다. 병조도 같다.
4.3. 대전회통 기준
- 문관은 종2품으로 제한하며, 한성부의 좌윤, 우윤과 호조, 형조, 공조의 참의를 허락한다. 청요직은 사헌부 관직만 허용한다[16].
- 음관은 목사로 제한하고, 처음 관직에 진출한 경우는 5부의 도사, 감역, 수봉관에 임명될 수 있다.
- 서얼 무관은 종2품 병마절도사로 제한하고, 도총부의 부총관과 각 영의 아장, 평안도와 함경도의 절도사, 훈련원의 정과 부정, 묘, 사, 능, 전, 궁의 관원, 세자익위사 관원, 교관 등은 허락하지 않는다. 각 도에서 재능이 있고 행실이 바른 자 1인을 선발하여 추천한다.
- 철종 2년부터는 고관 가문의 서얼이 문과에 급제하면 승문원, 무과에 급제하면 선전관에 추천될 수 있다.
5. 예외
왕족의 서자는 부계 혈통이 왕족이라 서얼금고법이 통하지 않았다.[17] 다만, 진짜로 없다는 것이 아니며, 왕위계승권의 인정과 왕족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접을 해준다는 의미이다.[18] 왕의 자녀는 품계가 무품이나 왕의 적자녀는 무품 상계인 대군과 공주, 서자녀는 무품 하계인 군과 옹주로 구분했다.[19] 또한 왕세자의 적자녀는 군과 군주로 정 2품, 서자녀는 군과 현주로 각각 종 2품, 정 3품이었다.정확히 말하면, 먼 부계 조상 중에 왕이나 왕자가 있었다면 서자녀, 얼자녀 출신이라도 일반 사대부 취급을 해주었다. 어차피 왕의 5대손을 넘어가면 적서 구분 없이 일반 사대부의 대우를 받는다. 따라서 왕의 5대손 이후는 서얼로 태어나면 서얼로 판정된다. 이는 여자도 예외가 아니다.[20] 게다가 대역죄를 짓지 않는 이상 왕실족보인 선원록에 무조건 올라가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왕족의 서얼도 왕족이었다. 조선 초기에 서자녀, 얼자녀 출신 왕족은 선원록이 아닌 왕족의 딸들을 기록하는 유부록에 같이 올라갔지만, 겨우 조선 태종대에 흐지부지 되면서 결국 왕족의 서얼은 왕족이나 종친 대접을 제대로 받게 되었다. 물론 왕실에서도 왕족의 서자들은 왕실 적자의 후손과는 구분해서 차별했으나, 적자의 후손에 비해 밀릴 뿐이지 왕위 계승권 역시 존재했다.[21] 대표적으로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명종의 양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한 것이나,[22] 역시 선조의 서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실제로 왕의 적자로 왕위를 계승한 건 사실상 숙종이 마지막이었을 정도였다. 이후 헌종이 순조의 적장자의 적장자, 즉 적장손으로 왕위를 이은 게 전부이다. 순종이 적장자로서 왕위를 이었지만, 이미 나라는 망국테크를 타고 있었다.[23]
덤으로 조선 초기에는 감히 옹주를 서얼 취급하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왕실 권위에 관련된 일이라 국왕에게 철저하게 박살난다. 간택 항목에서 나오는 것처럼, 조선 태종이 몸종 출신의 후궁 신빈 신씨에게서 낳은 서녀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려고 부마 후보를 알아보았는데, 춘천 군수 이속(李續)이란 인물이, "아무리 왕녀라지만 궁녀의 딸에게 나의 아들을 장가보낼 순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가, 오히려 곤장 100대 맞고 노비로 강등되는 일도 벌어졌다. 전재산 몰수에 관노비까지 떨어졌다가 손자대에 겨우 가문이 복원되었다. 자신의 아들도 부마 후보로 거론되자 이속이 저런 망언을 한 것.
경종은 일단 원자에 책봉되긴 했으나, 출생 당시에 생모인 장희빈은 왕비가 아닌 일개 후궁에 불과했고, 영조는 경종의 이복동생이었고, 정조는 영조의 서자인 사도세자의 아들 즉 서손자였다. 역시 순조도 정조의 서자였다. 헌종은 부친이자 순조의 적자인 효명세자가 뒷날 익종으로 추존되어 생모가 대비가 되긴 했지만, 부친인 효명세자가 요절해 즉위 당시 왕세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철종은 할아버지 은언군대에 일찌감치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진 방계 왕족이었고[24],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자로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 전의 족보상으로는 은신군의 증손자, 그걸 넘어 실제 혈통으로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3남 인평대군의 8대손인 방계왕족이었다.
위에 나와 있는 규장각 서얼 중 하나인 이서구가 전주 이씨로, 선조의 서자의 후손이었다.[25] 그래서 그는 그냥 사대부 취급을 받았으며, 벼슬이 우의정에 오르며, 규장각 한학 4가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유득공 같은 경우는 정조가 아껴서 서얼치고는 매우 중용받는 관직 생활을 했는데도 정3품인 부사밖에 못했다. 그리고 이덕무는 조금 특이한데, 왕족의 후손[26]이긴 했으나 정종의 후손, 즉 선원록에 서자들을 올리기 이전에 출생한 관계로 왕의 후손임에도 서얼 취급을 받아서 크게 중용받지 못했다.
6. 타국의 사례
일본에서도 서자녀, 얼자녀 개념이 있었다. 에도 막부의 경우는 적자가 제대로 쇼군직을 계승한 사례가 별로 없었으니. 막부의 15명 쇼군 중 적장자 출신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미츠, 도쿠가와 요시노부 3명뿐이다. 그나마 '쇼군의 적장자'로 쇼군직을 계승한 사람은 이에미츠가 유일했으며[27] 그나마도 요시노부는 메이지 덴노에게 권력을 반환해버리고 막부 시대를 제 손으로 끝내버린 인물이다.중세 이래 유럽에서는 아예 그리스도교 교리상 첩(concubine)을 둘 수 없었으므로 서얼과 일치하는 개념은 없었다. 대신 비공식적인 정부(mistress)를 두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비합법적인(illegitimate) 자녀' 즉 사생아 개념으로 통틀어졌다. 사생아가 남자이고 본처에게 아들이 없어도 딸이 있으면 그 딸이 작위를 이었고, 사생아가 작위의 계승자가 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비합법적인 성직자의 자식은[28] 보통 조카나 주위 친척으로 간주했다. 예외로 체사레 보르지아. 단,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기 전의 게르만족에는 서자녀 개념이 존재했다.
영어로 bastard, love child, natural child,[29] illegitimate child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사용빈도가 높은 단어는 bastard[30]로, 한국어로는 대개 이런 서양 특유의 관습을 고려하여 서자보다는 사생아로 번역된다.
이따금 사생아인데 쉬쉬하며 숨기지 않고, 아버지가 본처에게도 허락을 받아 책임지고 키우는 경우가 창작물에서 드물게 나와 어느 쪽으로 분류하기 애매한 경우도 있다.[31] 이러한 경우 서자(녀)로 번역하거나, 사생아라 번역했다가 서자(녀)로도 번역하기도 하며, 번역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있다.[32]
다만 서양권에서도 귀족 계승법에 따라 부부의 정식 자녀임에도 서얼과 비슷한 지위를 가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정식 부부지만) 부부 한쪽의 작위가 낮아서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높은 쪽 작위를 계승할 수 없는 경우이다. 이런 결혼을 귀천상혼이라 불렀고, 대표적인 사례가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부부다. 남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공작이고 아내 조피 페르디난트는 백작이었고 조피의 신분 때문에 두사람의 자녀들은 오스트리아 황위 자격을 가지지 못하고 프란츠가 죽은 뒤 황태자 지위는 프란츠의 조카인 카를 1세가 가져가게 된다.
그런데 중세유럽을 모델로 한 판타지물에서 간혹 배경이 서양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나 일본 작가들이 정부와 사생아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첩과 서자녀라는 개념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있다. 물론, 베르세르크 같이 실제 중세 서양의 정부와 사생아 개념을 잘 살리는 경우도 드물게 나오기는 하지만, 서양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동양적 개념이 들어가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33]
7. 서얼에 해당하는 인물
7.1. 실존 인물
- 조선 왕실에서 "군(君)"의 작위를 받은 왕자, "옹주" 작위를 받은 모든 왕녀 - 단 왕족 중에서도 임금의 적자(대군)의 적자, 즉 적손은 똑같이 군(君)으로 봉해지므로 서자 왕자군과의 구분이 필요하다.[34] [35]
- 강변칠우
- 공손찬 - 서자
- 궁예 - 헌안왕의 아들 또는 경문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로 원래 신라의 왕족이었지만 신라의 왕후의 소생이 아니다.[36]
- 김대중 - 자서전에 밝힌 내용으로, 좀 더 정확하게는 태어날 때는 첩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가 나중에 본처가 되어 적자가 되었다.
- 김두한
- 김정은
- 나르세스 1세 - 서자
- 바흐람 1세 - 얼자
- 박제가
- 백동수
-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 - 얼자(어머니 쪽이 노비)
- 원소 - 얼자
- 유득공
- 유자광
- 이덕무
- 이몽학
- 이제마
- 임경업 - 인조실록 인조 6년 (1628년)의 기록을 보면 김류에게 선물을 보낸것 때문에 탄핵을 받았는데, 이때 간원의 언급에 의하면 천얼(얼자)출신이라고 한다.
- 정난정 - 얼녀
- 정도전 - 정확히는 본인은 얼자가 아니나, 외조모가 노비라서 여러모로 시달려야 했다.
- 환석건 - 얼자
- 황희 - 얼자
- 호르미즈드 1세 - 서자
7.2. 가상의 인물
사생아와는 다르니 사생아 캐릭터는 여기 적지 말자. 어머니가 "첩"인 경우가 이 경우에 해당하고, 어머니 또는 아버지가 "흑역사"인 경우는 사생아이다. 어머니랑 아버지가 정식으로 결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정도의 차이.- 궤적 시리즈 - 유시스 알바레아[37]
- 군도: 민란의 시대 - 조윤
- 닥터 진 - 김경탁
- 녹두꽃 - 백이강 [38]
- 나의 나라 - 남선호
- 던전앤파이터 - 히리아[39]
- 덴마 - 엘 리뇨 아르케딜라마 누브레 소셰키아스
- 마루한 - 구현동화전 - 적우
- 마크로스 Δ - 키스 에어로 윈더미어
- 메이플스토리 - 샤렌 4세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 세타 소지로[40]
- 수리검전대 닌닌저 - 키바오니 큐에몬 신게츠
- 은혼 - 히지카타 토시로, 사사키 테츠노스케
- 재혼 황후 - 폴 맥켄나[41]
- 작약만가 시리즈 - 황운, 황소거, 황미릉(봉혜공주)[42]
-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 ~천재들의 연애 두뇌전~ - 시노미야 카구야
- 테일즈런너 - 시오넬[43]
- 트롤트랩 - 설백
- 추노 - 김성환[44]
- 춘향전 - 성춘향[45]
- 하렘의 남자들 - 트라틀라
- 홍길동전 - 홍길동
- 휴먼버그대학교 - 노다 하지메
- 옹정황제의 여인 - 오라나랍 의수, 옹정제(옹정황제의 여인), 오아 성벽
- GOSICK - 빅토리카 드 블루아[46]
8. 관련 문서
[1] 특히 조선 극후기 시절엔 왕자를 낳으면 미래 왕의 모후를 꿈꿔보는것도 허상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인 이씨.[2] 세자를 제외한 적출 왕자(대군)와 서출 왕자(왕자군)의 경우 자손들의 왕족 대우 유지의 대수(代數)가 차이난다는 것 외엔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3] 과거 시험 답안지에는 4대조까지를 적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 4대조가 아버지, 조부, 증조부, 그리고 외조부였다는 점이다. 즉, 어머니의 신분을 명시해야 했다는 것.[4] 박제가의 어머니는 확실히 첩이었다.[5]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거고, 실제로는 유력 정치인들과 재벌 기업인들, 공무원들은 계속 암암리에 축첩을 했다. 축첩이 실질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16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로, 당시 최고회의는 축첩을 엄금하여 축첩을 한 정치인 및 공무원에게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때렸었다.[6] 사실 첩을 들이는 방법도 예법을 따지긴 했으나, 정식 혼인의 예법보다는 한참 가벼웠다. 상위호환인 왕실로 가도 마찬가지로서, 정식 왕후의 간택ㆍ합궁 절차는 상당히 세밀하고 복잡한데 후궁은 그렇지 않다.[7] 당사자인 신 안동 김씨 문중에서 일찌감치 자신들의 일원으로 인정했고,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나 일제도 인정했고 언론기사도 남아있기에 친자가 확실하다. 다만 본인이 자신의 불행한 유년시절을 꾸미려고 터무니없는 과장을 너무 많이 해서,(사실 김두한은 이것 말고도 많은 부분에서 과장이나 자뻑을 많이 했다. 당장에 이런 김두한이 한 말을 토대로 제작된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인공인 김두한의 행적과 실존인물 김두한의 행적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심하다.) 도올 김용옥같이 친자가 맞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잊을만 하면 나왔다. 2000년대 후반에 김좌진의 후손을 자칭한 위 모씨와 논란을 빚으면서 다시 한번 자료와 입장을 정리하면서 현재는 종결된 논란이다.[8] 영조가 출신 문제를 다룬 얘기만 나와도 노이로제, 편집증적 광증을 보였다는 점은 유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영조의 출신 및 그에 대한 컴플렉스는 거꾸로 서얼 차별을 완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전에도 후궁 소생의 왕자군이 왕이 된 일(광해군, 경종. 다만 선조와 인조도 본인들은 적출이었으나 부친이 서얼이라 '서손'이었다.)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영조처럼 대놓고 천한 무수리였던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왕은 더더욱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짐은 고황제 후궁 소생이었다" (유명한 '강목 사건'에서 나오는, 한문제가 남월왕 조타한테 보낸 편지에 실린 구절) "질차이모비야"(네 어미는 종년이다!라고 꾸짖었다는, 사기 노중련 열전의 구절) 등 출신 신분 얘기가 나오는 구절도 듣기 싫어했고, 왕 앞에서도 함부로 천출이니 서얼이니 하는 말을 하기 어려운데, 다른 서얼에게 하자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것.[9] 서얼이라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서자'라고 해야 될지도 모른다. 얼자는 과거 응시를 떠나서 일단 면천부터 해야 했다. 여성은 신분이 무엇이든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관직 진출이 닥치고 금지된 시대였으니 서녀와 얼녀는 말할 필요도 없고[10] 아버지가 현직 관료, 어머니가 첩[11] 의관 같은 기술관은 정3품 하직을 한계로 하는 참상관이 승진 한계이다. 어의가 바로 정3품이었다. 훨씬 나았던 무과의 승진한계가 임시관직인 정2품 도원수이니, 1품은 무조건 문관품계이다.[12] 말 그대로 왕이 타는 말의 건강을 담당한 의사[13] 중인과 마찬가지로 서얼이 주로 응시했던, 기술관직의 승진상한이 정3품 하직이었다. 즉 당하관이 승진한계라는 이야기. 중인은 문과응시는 가능했지만 합격자를 인쇄소같은 한직에서 평생 썩게 하는 등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14] 조선 후기가 되면 소과를 스킵하고 바로 대과를 치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물론 소과를 거치지 않으면 승진에 불리했다. 하지만 양반 신분이라면, 불리한 것이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15] 제사를 맡아보던 관청인 통례원 하급 문관직[16] 서얼허통의 결과물[17] 왕의 서자가 아니라 왕족의 서자라는 점에 유의하자. 일단 조상이 왕이면 양첩의 후손이든 천첩의 후손이든 조선시대에는 선원록(璿源錄)에 등재되면 서얼금고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양녕대군의 얼녀가 천민과 재혼해서 딸을 낳았다가 왕실의 명예를 어지럽혔다고 사사당하는 일도 있었다.[18] 그래도 그정도면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단 조선에서도 분명히 왕의 4대손까지는 서자에게도 계승권을 주었기에, 고조할아버지가 왕이었으면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이 계속 서얼이더라도 내일은 조선의 왕이 되는 것이 아주 바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철종은 혈통상 헌종의 7촌 재당숙이자 혈통이 영조 이후로 서얼이었는데도 왕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법적으로는 익종(문조 추존은 대한제국 때.)의 동생이자 헌종의 3촌 숙부로서 왕위를 이었다. 당연히 혈통으로는 익종의 6촌 동생이자 순조의 5촌 조카다.[19] 원래 옹주는 왕자녀 중 유일하게 정 1품의 품계가 있는 존재였으나 후에 격상되었다.[20] 일단 왕녀들은 첩이 될 일이 없다. 공주가 아닌 옹주도 명문가의 정실로 시집보냈다. 더군다나 부마에게는 그 영예만큼 상당한 제약이 가해졌다. 부마 항목 참조. 사실 공주는 물론이요 옹주들에게도 나름 좋은 가문에 시집가게 된 것은 요 인물 영향도 컸다.[21] 즉 적자가 선순위를 갖되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잇는 것 이렇게 서자가 왕위를 잇는 건 일단 중종 초반기에 '이과의 옥사'에서 주모자인 이과가 중종을 폐위하고 성종의 서자인 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데서 명종 사후 선조가 잇기 전에도 일단 대군(적자)가 없으면 군(서자)가 잇는것이 당연하다고 본 듯[22] 만일 서자에게 계승권이 없다고 치면 굉장히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명종의 아버지인 중종은 적자가 인종, 명종 둘 뿐이었는데 둘 다 자식이 없었고 중종의 아버지인 성종은 중종 외의 적자는 연산군 뿐이었는데 폐위된 왕인지라 계승권도 없고 자식들은 중종 즉위 후 다 죽었다. 그럼 성종 위로 올라가면 덕종인데 이 사람은 성종 외의 적자는 월산대군 뿐인데 월산대군은 서자만 있고 적자는 없이 죽었다.(일부러 적자 대신 서자를 둔 것도 아예 왕위계승권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처세의 일환이었다.) 덕종 위는 세조인데 세조는 덕종 외엔 예종이 있었고 예종은 제안대군이 있었긴 한데 제안대군은 세종대왕의 7남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이 되었으며 후사없이 죽었다. 결국 세조 위인 세종의 자식들의 후계자들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그나마 세종은 적자만 8남이라 적자로서의 대는 안 끊겼다. 그런데 세종은 명종 입장에서 보면 무려 5대조 할아버지다(...)[23] 의외로 자식 많은 왕들도 사실은 적자보다는 서자가 공주보다는 옹주가 더 많다. 물론 왕비는 하나고 후궁은 여럿이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긴 하며 예외적으로 태종, 세종은 왕비에게서도 많은 자식을 보긴 했지만 후대에서는 그 비율이 줄어든다. 이러니 적자로서 이을 수 있는 계승자가 적어지고 서자가 이을 확률이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24] 심지어 따지고 보면 철종 본인이 전계대원군의 서자이고, 전계대원군도 은언군의 서자이고,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이고, 사도세자도 영조의 서자이고, 영조마저도 숙종의 서자이다(...). 그나마 고조부 영조가 왕이라 서얼 취급은 안 받았다.[25] 애초에 왕통 자체가 선조의 서자의 아들을 통해 내려오는 것이기도 했고, 나중에 서자 아버지를 추존은 했기는 하지만.[26] 정확하게는 정종의 서자인 무림군 이선생의 10대손이었다.[27] 어디를 가나 적장자가 계승하는 건 드물다. 적장자는 하나지만 적자이나 장자가 아닌 경우 장자이나 적자가 아닌 경우 혹은 적자도 장자도 아닌 경우는 수도 없이 많고 정치적 모략 등에 의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28] 천주교는 초기에는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성직과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는 성직자들 때문에 여러가지 폐단이 발생하자,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게 되었다고 한다.[29]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이 표현을 많이 썼다.[30] 영어에서는 욕설로도 쓰인다.[31] 다만, 이런 경우에도 본처의 자식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가문의 계승권자가 되기에는 어려웠다. 왕족의 사생아는 왕실에서 대충 핑계를 대며 작위를 내려주는 방법이 있지만, 귀족의 사생아는 호적 상 아예 아무런 관계도 아니기 때문에 본 배우자와 사별하고 자식과 혼인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작위를 물려줄 방법이 없었다.[32] 예를 들어,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6에 나오는 슬라바의 아들 산도르는 원문으로는 bastard라고 하는데, 계승권자가 아니라는 점만 빼면 차별없이 양육되고 자랐으며, 원래는 슬라바가 산도르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랑 결혼하려고 했으나 황제의 명령으로 결혼하지 못하고, 결국 케이트랑 결혼해야만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그리핀 대공령에 머무르며 살긴 했지만, 첩의 지위거나 첩으로 대우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며, 그녀도 나름 행세할 수 있는 하급귀족인 남작(Baroness)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산도르의 입장이 애매한지라 작품 초반 정도에만 사생아라 번역되었고, 그 이후 줄곧 서자로 번역되었다.[33] 캐릭터의 배경설명이나 설정을 보면 서자보다는 사생아가 더 맞는 표현인데 서자녀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2가지 속성이 섞여 있는 캐릭터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34] 서자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선조(하성군), 광해군, 경종(원자), 영조(연잉군), 순조(원자), 철종(덕완군) 등이 있다. 본래 철종은 워낙 촌수가 멀었기 때문에 봉군되지 않아서 그냥 이원범 으로 불렸으나 즉위 하루전에야 덕완군으로 봉해졌다[35] 노산군, 연산군처럼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란 이유로 강등당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그 어미가 먼저 폐서인되어 강등된 케이스이므로 명목상으로는 서얼에 해당된다. 그나마 노산군은 복권되어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는다.[36] 태조 왕건에서는 경문왕의 궁예 부친설이 채택되었기 때문에 궁예는 작 중에서 경문왕의 서자이자 신라 조정에 의해 버림 받은 왕자로 나온다.[37] 그 와중에 형은 사생아다.[38] 아비 백만득이 노비였던 유월이를 성폭행해 낳은 아들이 이강이다.[39] 황제의 장녀지만 후궁 소생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실제로는 황궁과 거리가 먼 별궁을 하사받는 등 권력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40] 이 때문에 이복형제들이 당시 어렸던 그를 거의 노예처럼 부려먹으며 업신여기고 심지어 폭력까지 일삼았다.[41] 서자 출신이라는 언급이 있다.[42] 황운과 황소거는 어머니가 패전국의 왕녀 출신 후궁이므로 서자에 해당하며, 황미릉은 어머니가 사회계급 최하층 출신이라 얼녀에 해당한다.[43] 반대로 자기 이복 여동생이자 동화나라의 왕비 사브리나는 정실 왕비의 딸, 적녀이다.[44] 어머니가 노비이며, 그의 이복동생이 바로 이대길로, 이대길은 정실 소생의 적자이다.[45] 아버지가 종2품 참판을 지낸 양반이고 어머니 월매는 천민으로 분류되는 기생이므로 얼녀에 해당한다.[46] 블루아 후작이 코르델리아를 납치하고 강제로 범해 태어났기에 엄밀히 말하면 사생아에 가까우나. 블루아 후작 본인은 이용해 먹을 목적이긴 하나 코르델리아를 아내라고 지칭하는 등 숨겨둔 마누라로 생각하고 있고, 빅토리카도 정식으로 호적에 올려 친자식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사생아보다는 서녀로 취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