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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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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우간다 국장.svg
우간다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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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우간다 제3대 대통령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Idi Amin Dada Oumee
파일:Idi_Amin.jpg
출생 1925년[1]
우간다 보호령 코보코
(現 우간다 북부 주 코보코 구)
사망 2003년 8월 16일 (향년 77세)[2]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재임기간 제3대 대통령
1971년 1월 20일 ~ 1979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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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ff> 국적 파일:uganda colony.png 영국령 우간다(1925~1962)

[[우간다|]][[틀:국기|]][[틀:국기|]](1962~2003)
신체 193cm, 126kg[3][4]
자녀 아들 타반 아민(1955 ~ )
아들 자파르 아민(1967 ~ )
아들 파이살 완지타(1983 ~ )
딸 카디자 아브리아 아민(? ~ )
등 최대 60명
종교 이슬람 }}}}}}}}}

1. 개요2. 일생3. 기행
3.1. 식인 행위?
4. 평가5. 가족 관계6. 그 외
6.1.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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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ut I wanted to tell the boxers that the only chance to defeat the referee, who are aganist you or against the country, is to win by knock out. This is only thing.
국가의 적들을 처치하는 방법은 복싱에서 심판자를 K.O 시키듯이 하는 것뿐이다. 수단은 상관 없다.
아프리카 중부 내륙국 우간다의 제3대 대통령이자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독재자, 학살자.

정치적, 종교적 분쟁이 계속되는 아프리카 대륙 특성상 수많은 독재자가 난립하지만 그 중에서도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와 함께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와 악명이 높은 인물로, 통치 기간 동안 잔학하고 극악무도한 정책을 펴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70년대~80년대 내내 '검은 히틀러'라는 멸칭으로 전 세계 신문에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탐욕스럽고 잔인하게 그려지는 아프리카 국가의 독재자의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집권 기간인 8년 동안 무려 30~50만 명의 우간다 국민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며[5] 독립 직후에는 아프리카에서도 안정적인 나라로 꼽히던 우간다의 경제까지 그의 형편없는 경제 정책으로 파탄났다.

2. 일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디 아민/일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기행

살아있는 독사를 잡아 그 자리에서 를 쳐서 요리를 만들어 외교 사절에게 권했고, 각료회의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장관이 있으면 즉석에서 뺨을 때리는가 하면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다리 밑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그는 엔테베 사건의 여파로 영국이 우간다와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때인 1977년에 자신을 '대영제국의 정복자'로 선포하고 모든 공문서에 적히는 자신의 이름 앞에는 '모든 지상 동물과 바닷속 모든 물고기들의 군주이시며,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이신 종신대통령 야전원수 알하지 이디 아민 다다 박사 각하(His Excellency, President for Life, Field Marshal Al Hadji Doctor Idi Amin Dada, VC(Victoria Cross),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 MC(Millitary Cross), CBE(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Lord of All the Beasts of the Earth and Fishes of the Seas and 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in Africa in General and Uganda in Particular.)'라는 긴 수식어를 붙이게 했는데[6],http://www.victoriacross.org.uk/aagloss.htm 우간다 국민들은 이 호칭을 막힘 없이 외워야만 했으며 이를 못 외운 측근들은 당연히 처형 당했다. 반문맹이었는데도 마케레레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셀프 수여하기도 했다.[7]
파일:attachment/b0041991_4b50334bd34fa.jpg
1975년 7월에 캄팔라에서 열린 외교관 파티에서 아민이 탄 가마를 들고 가는 영국인 사업가들

그는 아프리카 통일기구 수뇌회의가 열렸을 때는 자신이 백인들을 굴복시켰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간다 내에 있던 백인 사업가 6명을 잡아다가 노예로서 자신의 가마를 들게 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우간다에 거주하던 영국스웨덴 국적의 사업가들로, 그가 우간다 내의 그들의 사업권을 몰수하겠다는 위협으로 자신의 가마를 들고 양산을 받쳐들게끔 강압적으로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의 취재에 응할 때는 당시 사건에 대해 "나는 백인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을 뿐"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사건은 이디 아민 하면 거론되는 꽤나 유명한 기행 중 하나라고 한다. 위 사진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들이 반대로 당하는 것이라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자랑거리로 알려지기도 했다. 가마를 드는 것이기 때문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상술했듯 그는 193cm에 100kg을 훌쩍 넘는 거구인지라 사업가들이 들기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그의 가마를 들었던 백인 사업가 중 한 명인 로버트 스캘런은 시간이 흐른 후 1977년 그와 사업 문제를 두고 다투다가 그에게 쇠망치로 맞아 죽었다.[8]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의(1975.7.28~8.1) 당시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보복을 한답시고 빅토리아 호수 인근의 섬을 케이프타운이라고 명명한 뒤 폭격을 자행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때 폭격이 실패하자 그는 해당 부대 지휘관 겸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전 공군 참모총장을 그 포격지에 묶어놓고 재폭격을 실시하고, 그렇게 참모까지 처형 시키면서 성공 시켰다. 이스라엘과 단교했을 때는 관저 뒤뜰 너머에 언덕을 만들어 '골란 고원'이라고 이름 붙인 뒤 병사들에게 점령하라는 훈련을 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권투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장을 내기도 했으며, 1975년 6월 9일에는 우간다에 거주하던 영국인 강사 데니스 힐즈(Denis Hills, 1913~2004)가 자신을 '검은 네로', '공포로, 마을의 폭군처럼 통치한다'고 묘사한 원고를 쓰자 반역죄로 기소한 후 군사 재판소를 거쳐서 힐에게 공개 총살형 선고를 내렸으나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제임스 캘러헌의 우간다 방문 때문에 감금 1달 후인 동년 7월 9일에 풀어준 적도 있었다. 1975년 9월 7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린 힐즈의 회상.

거기다가 그는 1974년에 엘리자베스 2세 대신 영연방의 수장이 되겠다며 '우간다가 지구의 지리적 심장부'라는 근거를 들며 UN 본부를 우간다로 옮겨야 한다는 말도 한 적이 있고. 심지어 어느 날에는 갑자기 미국에 전쟁 선언을 한 뒤 바로 다음 날에 자신이 승리했다는 선언을 한 적도 있었다. 그의 기행에 대한 1977년 3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 게다가 친 나치 성향이던 그는 '독일에 히틀러의 동상이 세워지지 않았다'며 캄팔라에 아돌프 히틀러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만류해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고 한다.

3.1. 식인 행위?

그는 식인을 했다는 것으로 매우 유명한데 젊은 여자는 처형 후 성기를 도려내 먹었다거나, 인육을 먹고 국민들 앞에서 자신이 분석한 인육의 맛을 논하거나 주술에 취해 자신의 10살 난 아들을 죽인 후 그 심장을 꺼내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정작 아민 본인은 사우디아라비아 성직자들 앞에서 사람을 죽이기는 했어도 먹지는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결국 충실한 무슬림이 아니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직자들은 그를 추방시키자고 건의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이스라엘에 맞섰다는 점 하나로 편의를 봐주었고 무엇보다 식인 혐의에 대한 증거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아민 본인의 부인은 본인의 증언이니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치더라도 그의 식인 행위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증인이 있는데, 바로 1971~1978년까지 그의 전속 주방장이던 오톤데 오데라다. 'Teufelskoche'라는 책자(한국어 번역판 제목 <날 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에서 나오길, 오톤데 오데라는 케냐에서 태어나 우간다로 가 영국인 성공회 사제에게 조리를 배워 우간다 호텔 주방 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았는데 우간다 독립 후 케냐인 추방에 휘말려 고생하다가 반란을 일으키던 이디 아민 군대의 주방일을 돕게 되면서 이 인연으로 그의 전속 주방장이 되었다.

오데라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대식가에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잔학한 기행을 하던 인간이지만 식인에 대해선 극도로 부정적이며 나아가 식인을 했다느니, 내가 사람 고기를 준비했다느니 등 온갖 모욕적인 소문이 돌고 있다고 분노했다고 하며 주방장으로 일하던 7년 동안 아민의 식인에 대해서 강력히 부정하였다.

오데라는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그에게 엄청난 월급이나 보너스, 벤츠 차량, 으리으리한 집 같은 후한 대가를 받고 아내도 여럿 두며 잘 살았지만 이런 막대한 대가를 받는 대신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일해야 했다고 한다. 그 예시로 하루는 오데라가 주방에 있는데 무장 친위대원들이 총기를 들고 주방으로 난입하여 자신과 주방 보조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 어안이 벙벙한 오데라에게 그는 무척 화를 내며 자신의 13살 아들 모제스(Moses Amin)가 오늘 저녁을 먹고 배 아파하며 병원으로 갔다고 일갈했는데, 만약에 독이 검출되면 네놈들은 아주 잔혹하게 죽을 각오를 하라고 으르렁거려서 다들 공포에 질려 덜덜 떨기만 했다고 한다. 물론 의사에게 아들이 저녁으로 나온 건포도를 넣은 달콤한 필라프과식했기 때문에 배탈이 난 것뿐이라는 진단을 받자 미안하다면서 씨익 웃어줬다고 한다. 그 뒤론 오데라를 비롯한 그의 요리사들은 음식 재료에 대하여 사전 점검은 물론 다들 그야말로 완벽하게 매달리며 주방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 케냐와 영토 및 여러 갈등이 빚어지면서 케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데라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로 케냐로 도로 쫓겨났다. 케냐인 아내 한 사람만 같이 추방 당했고 그 뒤로 30년 넘은 지금도 우간다에 가보질 못해 다른 아내나 재산에 대하여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데라는 케냐로 도로 추방 당하면서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빈털터리로 쫓겨났고 케냐에선 오데라가 가진 음식 솜씨가 통하지 않아[9] 운전 기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아내는 가정부로 일하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러다 보니 오데라는 아민에 대하여 찬양할 생각은 없으며 거짓으로 식인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외신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다만 그가 워낙에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사람을 마구 죽인 건 사실이었으며 죽인 사람을 악어 밥으로 던졌다는 이야기를 친위대들이 하는 걸 들었다고 했고, 식인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뱀고기 회 같은 온갖 괴식을 즐긴 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특히 오데라는 90년대에 자신에게 외신 기자들이 찾아와 그의 식인에 대한 걸 물어봤을 때 대체 뭔 소리 하는지 몰라 멍 때렸고 그때서야 식인 장면을 넣은 그에 대한 영화를 보고 "저런 엉터리가 어디 있냐!"고 격분했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그가 식인했다는 걸 내가 왜 부정하겠느냐? 그걸 증언하는 걸로 돈을 벌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내가 아민을 감쌀 것 같냐? 내가 인육 요리를 준비해서 그걸 탓할까봐 감춘다? 만약 아민이 식인 요리를 즐겼다면 나에게도 가차없이 만들라고 지시할 자였다. 뱀이나 별별 동물 생식을 준비하라고 하여 다 준비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식인 요리 준비를 거부한다? 그렇게 수틀리면 나도 얼마든지 죽일 아민이었다. 추방 당하기 전 나도 교도소에 몇 달 동안 갇혔을 때 '이제 나도 죽는구나'라며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아민이 그동안 먹은 요리들이 워낙 맛있어서 살려준다며 맨 몸으로 풀어준 것뿐이다."고 털어놨다.

결론적으로 그의 식인설은 그 때문에 죽을 뻔했던 전속 요리사마저 격렬하게 부정했고 뚜렷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위 카더라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장 베델 보카사의 식인도 공식적으로는 무혐의로 판정 났음에도 보카사의 요리사는 물론이고 당시 미국 대사가 식인설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암시가 있는 증언을 남긴 것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여하튼 이디 아민 식인설은 상당히 유명하기 때문에 여러 매체에서 아민이 식인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예외적으로 2006년 영화인 라스트 킹에서는 식인설에 대한 클리셰를 뒤집기 위해서인지 아민이 귀빈들을 초청한 만찬의 축사를 진행하며 "여기 있는 음식 중 사람 고기는 없습니다"라며 재치 있는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나왔다. 한편 라스트 킹 원작 소설에서는 식인설을 긍정하듯 만찬 중 아민이 자신이 식인을 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주변 사람들이 얼어붙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말단 병사로 전쟁에 참전했을 때 식량 부족으로 모두가 아사 직전인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치명상을 입은 전우를 안락사 시키고 고기를 먹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4. 평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악명이 높은 독재자 중 한 명이며, 그에 걸맞게 역사학자들은 잔혹성과 억압성 면에서 독재자가 난립하던 1970년대의 아프리카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악랄한 독재자로 평가하고 있다.[10] 이디 아민 치하의 우간다는 체제의 억압성과 지옥 같은 감옥에 사람을 가두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는 것과 겨우 자신의 반대파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부족의 멸족을 시도한 것은[11]폴 포트[12], 아돌프 히틀러[13]도 하지 않은 짓이다.

단순히 매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자였을 뿐만 아니라 내치 면에서도 지나친 비흑인을 위시한 사업가들을 박해하는 바람에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무분별한 인도인 추방으로 우간다의 경제 기반은 뿌리까지 뽑혀버렸고, 쫓겨난 후에도 여전히 권력욕에 차있던 밀턴 오보테의 재집권과 그로 인한 반발로 일어난 내전, 이 과정에서 일어난 오보테의 학살, 요웨리 무세베니의 집권과 그에 버금가는 학살자 조지프 코니의 등장 등의 지독한 혼란상을 거친 끝에 결국 우간다는 이전에 비해 경제가 성장했다는 2021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884달러 미만인 최빈국으로 남게 되었다. 우간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나 우간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적인 정세를 이어온[14] 케냐의 1인당 GDP가 우간다의 2배 이상인 2,081달러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후손들의 미래까지 철저히 망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집권 기간은 고작 8년으로, 독재자치고는 그렇게 긴 기간이 아닌데도 우간다에 이 정도 해악을 저질렀으니 그가 더 오래 살아 수십 년 동안 집권했으면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것은 기본으로 보일 정도로 악행의 규모와 분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불어났을지도 모른다.[15]

5. 가족 관계

그는 최소 6~7명의 부인, 최소 30명의 내연녀들 사이에서[16] 슬하에 최대 60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으며 신원이 확인된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집권 시절에는 흑인 여자와 백인 여자 2명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즐겼고 67세였던 1992년에도 막내딸을 출산했으며 사망한 2003년에도 재혼한 적이 있다.

1975년 7월에는 사라 키올라바(Sarah Kyolaba, 1955~2015)라는 이름을 가진 임신 중이던 고교생 무용수가 마음에 들어 그녀의 남자친구를 참수한 후 다음 해에 캄팔라에서 당시 가치로도 약 1천만 달러가 든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려 그의 5번째 아내로 만들었다.[17]
파일:external/i.telegraph.co.uk/news-graphics-2007-_642040a.jpg
왼쪽은 이디 아민의 아들인 파이살 완지타.[18] 위의 사진 오른쪽은 그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

그 아빠에 그 아들이라고 그의 아들 중 파이살 완지타도 갱단의 일원이 되어 경쟁자 갱 동료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살인을 저질렀다. #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칼로 20번이나 찌르고 야구방망이와 맥주병, 망치, 주먹 등을 이용해서 피해자를 구타해서 사망케 해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것 때문에 과연 부전자전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2007년 4월, 런던 올드 베일리 법원의 스티븐 크레이머 판사는 그의 아들 파이살 완지타에게 살해 공모 혐의를 인정해 5년형을 선고했다. 고작 5년형만 선고 받은 이유는 당시 살해 장면이 찍힌 CCTV에 완지타가 직접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완지타는 다른 조직원들이 피해자를 난자해 쓰러트린 후 걍 열심히 스톰핑만 했다. 참고 자료.

6. 그 외

이디 아민의 발언들.
파일:829716.jpg
*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우간다 라이트 헤비급 권투 챔피언을 지낸 적이 있다. 그는 1961년 당시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원래부터 비만은 아니었고 운동 선수답게 건장한 몸이었지만 집권하고 나서 폭식을 하기 시작하여 비만이 심해져 말년에는 성인병을 심하게 앓다가 죽었다. 그는 권투 외에도 수영 선수와 럭비 선수 경력도 있었다.

6.1.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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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 아민 영화 한국 개봉 당시 포스터


[1] 1923년 혹은 1928년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2] 1923년생일 경우 향년 79세이며 1928년생일 경우 향년 74세다.[3] 20세기 국가 수반들 중에서 손에 꼽는 거구이며 그가 1920년대 아프리카 태생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거인이라고 볼 수 있다. 야구 선수 이대호와 비슷한 체격이며 권투로 따지면 슈퍼 헤비급이고 유도로 따지면 무제한급에 해당된다.[4] BMI로 치면 33.8 남짓으로 I단계 비만에 해당된다.[5] 동시기 집권하던 폴 포트보단 적지만 둘 다 잔혹한 건 같다.[6] 참고: http://www.victoriacross.org.uk/aagloss.htm[7] 마치 사실상 반문맹이었는데도 저명한 화학자를 자칭한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연상 시키는 대목이다. *호칭 작위관련 영국 무공훈장 참고: http://www.victoriacross.org.uk/aagloss.htm[8] 캄팔라의 교도소에서 쇠망치로 맞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9] 요리를 영국인에게 배웠기 때문에 백인들이 주로 먹는 요리들만 할 줄 알아서 대다수 흑인들 사이에서 음식 장사를 해도 팔릴 리가 없었다.[10] 당대 아프리카의 독재자 중 확실히 이디 아민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밖에 없다. 사실 응게마는 진짜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와 폴 포트도 능가한다고 평가받는 인물인지라...[11] 르완다 내전이나 시아드 바레의 이사크족 학살처럼 아프리카에서 자국에 사는 특정 부족의 절멸을 목적으로 한 학살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은 특정 부족이 이전에 기득권층을 차지했던 것에 반감이 쌓인 끝에 벌어진 것이었지 아민처럼 자신의 반대파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학살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로버트 무가베구쿠라훈디 정도가 이에 비견된다.[12] 나이도 비슷하고, 동시기에 집권했고 몰락했다.[13] 물론 폴 포트와 히틀러도 소수 민족 학살을 하긴 했지만 독재자 본인만의 광신적인 신념에 기반했던 폴 포트와 히틀러의 학살과는 달리 이디 아민의 학살은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그 추악함이 더욱 강조된다.[14] 1982년 케냐 쿠데타와 2007~2008년 대선 폭력 사태 같은 혼란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케냐는 우간다처럼 내전에 시달리는 일은 전혀 없었으며, 이디 아민 같은 막장 지도자가 출현해서 나라를 전반적으로 파탄냈던 적도 당연히 없었다.[15] 이와 비슷하게 단기간에 국가가 박살난 예로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민주 캄푸치아가 있다. 크메르 루주는 정상적인 민주 국가의 한 대통령이 집권한 후 물러나는 시기와 비슷한 4년밖에 집권하지 않았다.[16] 이들 중 3명은 싫증이 나서 곧바로 이혼했다.[17] 참고로 그녀는 남편이 축출된 후 남편을 따라갔다가 1982년에 아민과 헤어지고 독일로 가서 란제리 모델로 일했다고 하며, 이후에는 런던으로 가서 1997년에는 런던에서 아프리카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을 운영했지만 바퀴벌레와 썩어가는 쥐까지 발견될 정도로 위생 상황이 열악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식품안전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이후에도 그 식당은 위생을 일신한 채 한동안 운영하다가 토트넘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영국의 이웃들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2015년 6월 11일에 으로 사망했다.[18] 그의 어머니가 바로 상술한 사라 키올라바 아민이다.[19] 내장을 제거하고 수염을 자른 후 쌀, 감자, 당근, 파슬리, 완두콩, 허브 및 향신료로 채운 후 굽고 '살아있는 것처럼' 서있는 자세로 탁자 위에 가져왔다고 한다. #[20]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도 어설프게나마 5개 국어를 구사한 것과 하술하듯 기발한 농담을 즐겨 했다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머리가 나쁘기는커녕 꽤나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실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으니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는 것조차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21] 다만 어느 면에서는 아민이 무가베보다 낫긴 하다. 사실상 일자무식이던 아민과는 정반대로 무가베는 무려 영국 명문대 경제학 석사 출신이었는데도 역대급 초인플레이션을 만들어냈으니...[22] 아민의 행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라스트 킹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부각된다.[23] 실제로 적도 기니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이디 아민마저 능가하는 수준의 끔찍한 학정을 벌인 것도 온갖 정신질환을 앓던 와중에 마약에까지 중독되어 정신이 망가졌던 것의 영향이 매우 크다.[24] 사실 아민하고 저 둘을 비교하는 건 실례에 가깝다. 후세인은 몰라도 카다피는 궁지에 몰린 말년을 제외하면 아민처럼 공포 정치를 하고 반대파를 끔찍하게 죽이는 악행은 안 했다. 그 후세인조차도 아민마냥 집권기에 기행을 수시로 벌인 적은 없었으니 저 둘은 아민에 비하면 그래도 정신은 멀쩡한 독재자들이었다.[25] 실제로 독립운동가 출신이던 콰메 은크루마(가나)와 아메드 세쿠 투레(기니)는 이 투표에서 각각 1위/4위에 올랐다. 8위를 기록한 무가베도 타락 전에는 만델라와 함께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26] 토마 상카라, 제리 존 롤링스, 프랑스알베르 르네, 폴 카가메 등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아프리카 독재자로 꼽힌다. 세레체 카마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아프리카 지도자이긴 하나 독재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이므로 논외.[27] 참고로 이 영화가 나온 해 아민은 한참 전에 쫓겨나 백수 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나머지 인물들은 당시에도 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