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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0:45:23

중세/과학 기술

1. 개요2. 민간 기술
2.1. 농업2.2. 건축 및 토목2.3. 예술2.4. 시계2.5. 기계 공학2.6. 제철2.7. 수차2.8. 항해2.9. 인쇄·용지 및 문서2.10. 과학 및 학술 지식2.11. 의복2.12. 기타
3. 군사 기술
3.1. 갑옷3.2. 방패3.3. 냉병기
3.3.1. 도검류3.3.2. 폴암3.3.3. 타격무기3.3.4. 기병3.3.5. 투석기3.3.6. 투사 무기
3.4. 화약 무기3.5. 방어 시설3.6. 군사 제도

1. 개요

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다른 문명권보다 빠르게 각종 기술들을 재발견하거나 발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세 유럽의 기술 발전은 대개 6세기를 기준으로 향상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기계론적 세계관의 맹아가 싹틀기 시작했다.# 기술은 보통 민간 기술과 군사 기술로 나눠져 발전했다.

아래의 내용의 상당 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아의 《medieval technology》에서 기반한다.

중세 과학 기술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와 같은 무형의 것도 다루고 있다.

2. 민간 기술

2.1. 농업

카루카는 기존의 아드보다 무거웠지만 대신 무거운 무게와 함께 땅을 갈게 만드는 철로 만든 수평 날이 추가되었으며, 덴마크의 카루카의 경우 바퀴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북유럽의 척박한 땅을 갈기에 적합했고, 무엇보다 이랑과 고량을 낼 수 있어 배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기가 통할 수 있어 한시적으로 기름진 옥토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무게로 인해 방향 전환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어 이때를 기점으로 유럽의 농토는 정사작형에서 직사각형의 농지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와인 압축기는 개인이 만들어 사용하기엔 너무 비쌌으며 무엇보다 당시엔 포도씨를 빼지 않고 그대로 넣는 경우가 많아 발로 으깬 것과 달리 포도씨까지 으껴버렸기에 압축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맛이 써 웬만하면 그냥 발로 으껴서 짜낸 포도즙을 선호했다.

2.2. 건축 및 토목

특히 로마 시대에는 크레인을 움직이기 위해선 라틴어로 마그나 로타(magna rota)라는 트레이드휠 크레인이 개발되었다. 로마의 신형 크레인은 옆으로 거대한 쳇바퀴를 외륜 내지는 한쌍 달아 놓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굴리는 형식으로 가동되었다.
크레인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유럽에서 잠시 명맥이 끊기지만 12세기경 다시 서유럽에서 상·공업의 부흥과 함께 거대 건축물인 고딕 건축 양식이 등장하면서 대형 성당과 성 등을 건축하기 위해 다시 도입되었으며, 이밖에도 항구에서 화물의 적채와 하역을 위해 대형 크레인을 하나 정도 설치했다.그단스크의 항구 크레인
이후 1420년 피렌체에서 그동안 미완이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짓기 위해 필리포 브르넬레스키에 위해 기존의 크레인보다 더 높은 높이로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카스텔로라는 황소 한마리로 움직이는 신형 크레인이 만들어졌다.

2.3. 예술

2.4. 시계

기계식 시계는 개인이 사용하기에 크기가 크며 30분 가량 오차가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기계적 세계관이 싹트는 것과 함께 다른 시계에 없던 분의 개념을 갖고 있는 점 때문에 상인들 사이에서 선호되었다. 이밖에도 도시에 대한 자부심, 실용적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어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적으로 애용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510년경 독일에서 개인용 시계가 발명된 이후 단점들을 개선해갔다.

2.5. 기계 공학

2.6. 제철

중세 유럽의 제철 기술은 시대별로 초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줄로 풀무를 이용한 화로에서 철을 생산했으나 생산량은 1~15kg 밖에 생산되지 못했으며 탄소 함유량도 낮은 연철로 나왔기에 따로 목탄불에 달구면서 표면침탄시키고 따로 가열해야 했으며, 주로 접쇠법의 일종인 패턴웰딩 방식으로 강철 제품을 생산해야 했다.
중기에 들어서 수차와 연결된 풀무로 통해 공기를 불어 넣는 강제과급하는 방식과 최대 300kg급까지 키운 발전된 괴철로로 연철을 샌산하여 패턴웰딩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수차와 연결된 대형 망치로 두들겨 강철화 시켰고, 이때의 철 생산량은 전기에 비해 수백kg이나 증가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인 1350년대로 들어서자 용광로와 함께 철을 용해시키는 제강법이 등장하면서 강철의 생산이 증가하게 되었고, 15세기에 총생산량이 6만톤을 넘게 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물레방아에 연결된 풀무와 페턴 웨딩이 사라진다. 다만 자력으로 초강법을 얻는 것은 실패해 18세기 영국이 식민통치를 하던 인도에서 초강법을 획득한 후 유럽 전역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2.7. 수차

수차는 상기한 대로 고대부터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세 시대로 들어서면서 일반에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 전파와 장원제와 봉건제의 등장으로 인해 노예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은 기존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기 시작했다.[1] 이에 대한 대안이 바로 수차와 풍차였다.

수차와 풍차는 6세기경 아일랜드에서 위에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가동되는 상괘식이 등장한 것 외엔 초기에 단순히 곡식의 도성과 물을 빼내거나 붓는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나 9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축용을 위한 용도의 수차가 개발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성전이 끝난 후 선박형 수차는 서유럽으로 전파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주적이었던 이슬람 제국 또한 선박형 물레방아를 사용했다. 이미지를 보면 알지만 수차를 강가 위에 띄우는 형식도 있으나 그냥 두 척 이상의 나룻배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하 수차들은 곡식을 도정하기 위한 수차들이었으나 정작 농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영주들이 물레방아의 경영자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이들을 세리로 삼아 사실상 장원 내의 농노들에게 강제적으로 물레방아를 이용하게 만들어 도정한 곡식의 일정부분을 물레방아 업자에게 주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농노들도 물레방아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몰래 맷돌을 사용해 곡식을 도정했고, 영주는 영주들 대로 맷돌을 압수하려고 했다.
이후 1189년 프랑스로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276년 이탈리아, 1336년 독일의 마인츠, 1498년 영국에 수력에 가동되는 제지공장이 들어서는 등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도 제지용 수차를 만들어 종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지용 수차 덕에 유럽은 타문명권과 달리 그나마 상대적으로 종이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3]

이밖에도 수차는 다리를 세울 때도 사용되었다. 교각을 착공하기 전 우선적으로 교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하천의 높이 보다 더 긴 여러 개의 나무 말뚝을 교각의 형태에 맞게 박은 다음 그 옆으로 수차를 가설해 틀 안에 고여있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2.8. 항해

2.9. 인쇄·용지 및 문서

7세기까지의 제본 과정 중 바인딩 방식은 고리 형태의 캅틱 바인딩으로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애용한 방법으로 이후 9세기부터 책 가장자리에 한줄의 고리 엮음 방식이 등장했고, 보드를 가공한 표지가 추가된다.

2.10. 과학 및 학술 지식

임페투스 가설은 이후 서유럽으로 소개되어 14세기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장 뷔리당에 의해 한층 체계적으로 연구되었다.

2.11. 의복

하지만 19세기까지 단추는 금·은·보석과 같은 값비싼 재료들이나 공정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비싼 사치품에 속해 있어 평민들에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16세기경 부터 군복에 뼈로 만든 단추가 달린 상의가 나오게 되지만 전체 계층에 가리지 않고, 사용하기까지는 18세기 중엽 독일의 웨스퍼가 개발한 금속 단추 제조 기술과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의 대량 생산을 기다려야 했다.
이후 15세기경 스페인과 프랑스에도 누에나방과 제조법이 전파되어 스페인에선 발렌시아그라나다 지방, 프랑스에서 리옹이 비단을 생산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참고로 비단을 제조하는데 수차가 사용되었다.

2.12. 기타

그러다가 11세기 초 중부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포레스트 글라스(forest glass)라는 새로운 유리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유리는 제조시설이 숲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 재료가 탄 나무재와 모래/석영으로 만들어졌다.

3. 군사 기술

중세 유럽의 군사 기술은 동시기에 평화기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동양과 달리 군사 기술이 평이하게 달랐다. 우선 로마제국의 쇠퇴기와 서로마 제국의 붕괴기를 거치면서 퇴보하였고, 동양과 비교하면 군사 편제서부터 봉건제 등으로 인해 동원력이 약해지면서 단순한 편제를 하고 있었고, 군사학적으로도 무경칠서가 존재하던 동양과 달리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전 서로마 제국의 귀족이었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저술한 군사학 논고 하나 외에 없었다.

하지만 중세 중기를 거치면서 이슬람과과 교류 및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군사 기술을 발달해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군사 기술의 발전은 후일 16세기를 기점으로 군사 기술이 동양을 초월하게되는 양분이 된다.

3.1. 갑옷

중세 유럽의 갑옷은 대체로 신분과 재력별로 구분된다. 동서 막론하고 병장기 중 갑옷 만큼은 대체로 가성비 싼 것을 제외하면 자비로 구입하는 것이 현실로 대다수 병졸의 경우 철갑으로 무장하지 못한 것이 허다했다. 그래서 병졸들의 갑옷은 갑옷은 대체로 지급품인데다가 금속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보편적이었다.

반면 금속제 갑옷은 시대별로 세가지로 나눠진다. 중세 초기만하더라도 대체로 반팔 티셔츠 형태로 쇠사슬로 만들어지거나 가죽끈으로 엮은 여러개의 철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후자가 점차 도태되기 시작하고 전자가 주류가 되면서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부터 중세 후기인 14세기부터 15세기 초반꺼지 제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차 판금으로 갑옷을 만드는 이행기(Trasition Period)에 진입하면서 몸통을 제외한 전체 부위가 판금화를 거치게 된다. 다만 몸통에 입는 흉갑의 경우 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동양의 두정갑 동일한 구조의 갑옷들이 1410년 판금갑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1420년대가 되면서 판금 갑옷의 초기형의 등장하게 되며 이 때를 기준으로 점차 판금갑이 대세가 되기 시작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남부 독일에서 각각 밀라노 양식, 고딕 양식 등이 등장하게 되며, 또한 철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일반 병졸들도 돈만 넉넉하게 있다면 판금으로 만들어진 투구와 흉갑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자세한 발전사는 서양 갑옷을 참고할 것.

사족이지만 판타지 등의 매체의 영향으로 일반 병졸들도 가죽 갑옷을 입고 다녔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통념과 달리 상당히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
중세시기 오래된 갬비슨은 10세기의 것이 유일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 다영한 형태로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갬비슨은 금속제 갑옷을 입을 수 없던 일반 병사들에게 유일한 방어구였으나 동시에 기사들에게는 갑옷 안에 입는 내갑의로도 중요한 갑옷으로 화살촉이 갑옷을 관통할 때 치명상을 피하거나 아니면 둔기에 의한 충격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착용하였고, 플레이트 아머의 시대가 도래한 후에도 애용되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셀릿아흐메가 등장한다. 셀릿의 경우 바이저가 인중 정도까지 내려와서 얼굴 전체를 덮지 않았고 가동식과 일체형 둘 다 존재했다.또한입을 보호하는 비버(bevor)와 조합하면 폐쇄형 투구와 같이 얼굴 전체를 보호할 수 있다는 융통성 때문에 15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했다.
아흐메의 경우 15세기 당시 바이저를 옆을 열어서 벗어야 하는 데다 입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형태였다가 16세기에는 앞뒤로 열어서 벗고 입도 완전히 드러낼 수 있게 개량되고 면갑 고정에 경첩을 쓰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 동유럽에서 러시아 공국들을 중심으로 애용되었는데, 본래 쿠만의 머리 방어구 중 하나였기에 쿠만 마스크로 불리며, 쿠만인들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과 교류로 통해 받아들인 방어구로 쿠만 마스크를 그대로 도입했기에 콧수염이 세겨진 것이 특징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에서 시나리오 클리어 후에 나오는 다큐에서 통해 쿠만식 마스크를 설명하고 있다.#

3.2. 방패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서면서 게르만족들이 군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면서 로마군의 방패는 직사각형의 방패인 스쿠툼에서 이민족들의 원형 내지는 타원형의 방패로 전환되었고, 이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갑옷의 발달과 함께 카이트 실드와 히터 실드 등의 다양한 방패가 나오기 시작하나 14세기 말 화약의 전래와 함께 갑옷 또한 극단적으로 방호력이 상승하게 되면서 방패의 입지가 줄어들어 소형화가 진행되어 이후 총기를 비롯한 화약무기가 완전히 보편화된 18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전장에서 퇴출된다.

3.3. 냉병기

중세 시기는 유럽의 냉병기가 갑옷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가던 시기였다. 투사 무기를 제외한 냉병기들은 고대부터 도검류와 창류, 둔기류 등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로마식 무기와 북쪽의 게르만/노르만족 양식의 무기들로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갑옷의 발달 등으로 인한 여러 요인들로 인해 점차 중세 고유의 양식들이 등장, 고대의 냉병기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3.3.1. 도검류
도검류는 양손검한손검, 단검으로 분류된다. 전근대까지 동서 막론하고 검은 검병을 제외한 모든 병과에 거쳐 부무장의 위치에 있었다. 일단 중세 중기까지는 양손검은 동로마군이 쓰던 팔크스를 빼면 전무하다시피했다. 이는 이당시 검술의 전술 자체가 검과 방패를 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4세기 트랜지셔녈 아머의 유행과 함께 방패를 사용하는 것이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양손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 양손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단검의 경우 주로 한손검 다음으로 중세시기 유럽 각지의 군대에서 부무장으로 애용한 무기로 기사라도 한손검 외에도 별도로 차고 다녔다. 단검의 용도는 주로 근접전 와중에 한손검을 분실할 시에 그 대용품으로 사용되어 갑옷으로 보호하기 힘든 부위의 급소를 노리는데 사용되거나 전투 후 살 가망이 없는 자들의 목숨을 끊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부무장으로 한손검을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병사들이 둔기류 다음으로 차고 다닌 무기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스페인과 아일랜드, 덴마크 등에서도 제각기 양손검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중 덴마크의 양손검은 크로스 가드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관련 링크
3.3.2. 폴암
중세 유럽의 보병들은 대체로 궁병을 제외하면 주무장이 창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창이란 무기 자체가 다른 무기에 비해 가성비가 저렴한 양산형 무기인데다가 근접 병기 중 공격범위가 넓었고, 상대적으로 배우기가 쉬웠다. 중세 중기까지는 방패와 함께 1.8미터 정도의 단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중심이었으나 중세 후기가 됨에 따라 방어구가 점차 발달하면서 기존의 창으로 트랜지셔널 아머나 플레이트 아머를 제압하는데 불리하자 그 대안으로 폴암류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폴암은 대개 농기구 내지는 공구에서 기원하는 장병기들을 통칭하며, 익숙한 농기구 및 공구에서 기원한 장병기들이 많기 때문에 농민이나 시민 출신의 병사들이 손십게 익힐 수 있던 무기였다. 하지만 폴암은 창에 비해 무겁다보니 점차 보병들 사이에서 방패를 버리는 병사들이 보변화되기 시작하나 폴암만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상대하는데 역부족이었다.
3.3.3. 타격무기
타격무기는 둔기도끼로 나눠진다. 도끼의 경우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야만족의 무기라는 인식도 있지만 둔기와 함께 플레이트 아머와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와 상대하는데 효과적인 무기로 창과 폴암에 등재된 데인 액스와 폴 액스 또한 원칙적으로 도끼에 속한 무기이기도 하다.

둔기의 경우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중세 중기로 들어서면서 갑옷이 중무장화됨에 따라 점차 도끼와 함께 갑옷에 효과적인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세 후기에 발생한 농민반란에서 농민병들들이 기사들을 상대할 때 도끼와 함께 둔기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중장병들에게 대항했으며, 형태에 따라 여러 분류로 나눠졌다.
3.3.4. 기병
데스트리어는 네 종류의 군마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군마로 말 중에서 가장 대형 종의 수컷만을 선별해 망아지 시절부터 사육하면서 조련시켰고, 그렇기에 가격 또한 상당히 비싸 코서의 2배, 라운시의 10배 가격이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타고 다니는 것보다는 토너먼트에서 타고 다니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대 회화 자료를 보면 목이 뱀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코서는 데스트리어 다음으로 선호된 군마로 데스트리어에 비해 경량급 군마이며, 제대로 조련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덕분에 데스트리어보다 제대로 된 군마로서 기사와 같은 중장 기병들을 태우고 적의 대열을 향해 돌격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밖에도 사냥이나 토너먼트에도 동원되었다.
라운시는 웹상에서 짐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엄연한 군마의 일종으로 승용마로도 이용되었으며, 코서보다 더 저렴해 대체로 가난한 기사들이 타고 다니기도 했으나 14세기 이후 지세가 험한 토지를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승용마로 굳어지게 된다.
펠프리는 군마이지만 주로 승용마로 이용된 말로 통상의 군마들은 전투 전까지는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기에 보통 전장으로 이동할 때는 펠프리를 타고 다녔다. 매끄럽게 걷는 훈련을 받았기에 고급 승용마로 유명했다.
3.3.5. 투석기
투석기는 화약이 보편활될 때까지 사용한 공성무기로서 유럽에서도 고대서부터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고된 이후 목책으로 지어진 성채가 보편적이었기에 강력한 투석기가 불필요했으나 이후 바이킹과 마자르 족 등의 약탈 등으로 인해 석축으로 된 성채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11세기 중반에 십자군 전쟁으로 중동의 건축 공법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석재 성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강한 투석기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3.3.6. 투사 무기

3.4. 화약 무기

3.5. 방어 시설

3.6. 군사 제도

중세는 고대과 근·현대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로 군사 제도 또한 과도기적 제도로 운영되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동로마가 통치하던 지역들을 제외한 구 서로마령에서는 제국이 해체되면서 레기온 체계 또한 완전히 붕괴되면서 그 서로마령에 각자도생식으로 세워진 게르만족 왕국에 이어져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사회 구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봉건제와 함께 기사들 위주인 기병대가 위주였고, 전시에 자신의 장원에서 징발한 징집병들을 이끌고 전장에 합류했다. 또한 상술한 병기들조차 고대에는 거의 없던 것들이었으며, 이에 따라 전술과 병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중장과 대위가 중세 중기를 전후로 생겼다. 우선 장군의 어원은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프랑스어 capitaine général에서 유래되었으며, 중장(Lieutenant General) 또한 이시기쯤에 생겼으며, 부장군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상술한 대무관장과 원수의 부관격인 계급이었으나 이마저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대위(Captain)의 경우 14세기 초 필리프 4세때 전쟁시 지방의 영주들을 동원할 때 이들에게 부여된 칭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칭호를 부여받은 영주들 중 영지의 생산력만으로 생계 등을 유지하지 못한 이들이 사설 용병대를 만들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용병대장=캡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후 용병을 중심으로 한 유사 상비군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군사 계급으로 편입되었다.
중위(Lieutenant)는 중세 후기에 등장한 군사 계급으로 용병대의 규모가 커지고, 캡틴이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면서 보좌직으로 신설된 직책에서 시작되었으나, 명칭은 중세 초인 10세기 말에 신설된 Lieutenant du roi에도 있을 정도로 유래가 깊었다.
소위의 경우 중세가 지난 후에야 생겼으나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12세기부터 기수(Ensign)가 소위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 하사관 계급에 속하는 상사를 뜻하는 서전트하사 또한 중세에 생긴 계급이었다. 다만 이러한 군사 칭호들이 정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군대 계급으로 정식으로 편입되기까지는 1550년대까지를 기다려야 했다.
군사 편제의 경우 배틀(battle) - 베너(banner) - 랜스(lance)로 구성되었다. 배틀의 경우 현대의 사단과 같은 편제이지만 배속되는 배너의 규모에 따라 수백에서 수천으로 일관되지 않았으며, 내부적으로 병종에 따라 보병, 궁병, 기병 등으로 그룹이 세분화되었으며 선봉대(Van Guard), 본대(Main Body), 후위대(Rear Guard)로 나눠졌는데 정황상 사단이라기 보다는 대대에 가까우며,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도 대대의 기원을 배틀로 보고 있다.관련 링크
베너는 콘로이(Conroi)라고 불리며 현대의 소대와 같았으며 마찬가지로 배속된 랜스의 수에 따라 차이가 났으며, 이러한 베너를 지휘한 기사를 나이트 배너렛(Knight banneret)으로 불렸다. 랜스는 밴드(band)라고 불리며 현재의 분대에 가까웠는데 한 랜스당 기사나 서전트의 지휘하에 2명에서 다섯 이상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중세 중·후기쯤 되면서 대위 칭호를 갖고 있단 영주들이 용병 사업에 뛰어들면서 새롭게 중대(company)라는 개념이 새롭게 생겼다.
1480년 루이 13세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보병 위주의 편제를 구상하면서 연대의 개념이 생겼다. 이개념은 16세기 테르시오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1] 다만 노예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19세기 들어서이며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중세 유럽에선 여전히 노예제가 잔존했는데, 주로 겔리선의 노잡이들이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며, 속설과 달리 같은 종파의 그리스도인이라도 노예로 삼은 기록이 남아 있다. 자세한 것은 노예제 항목을 참고.[2] 비누 용액과 알칼리 용액을 섞은 것에 서로 겹쳐진 양모를 적셔 압력을 가하는 작업. 양모는 섬유의 수축이 심하기 때문에 축융 작업으로 미리 최대한 수축시켜놓아서 섬유를 치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놓아야한다.[3]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 생산 이전까지 종이는 여전히 비싼 편이었다.[4] 참고로 동시기 동북아에서 최고로 치던 서역산 말 다음으로 치던 몽골 초원의 말들은 어께 높이가 120cm 내외였고, 한반도산 말의 경우 제일 커봤자 이보더 더 작은 117cm 정도이며, 가장 작은 크기가 9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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