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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4:17:44

동로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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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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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군제 개혁2.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 이후
2.2.1. 분류2.2.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동로마군 규모
2.3. 무슬림 팽창기의 진공 속에서
2.3.1. 배경2.3.2. 테마 제도2.3.3. 테마의 세분화와 타그마
2.4. 콤니노스 왕조 시대2.5. 제국의 황혼2.6. 구조적 약점
3. 병종
3.1. 보병
3.1.1. 스쿠타티(Skoutatoi)3.1.2. 펠타스트(peltast)3.1.3. 프실리(Psiloi)3.1.4. 바랑기아 친위대(Varangian Guard)
3.2. 기병
3.2.1. 타그마(Tagma)3.2.2. 카타프락토이 (Cataphract)3.2.3. 클리바노포리(Klibanophoroi)3.2.4. 트라페지토스(Trapezitos)3.2.5. 투르코폴레스(Turcopoli)3.2.6. 바르다리오타이(Vardariotai)3.2.7. 카발라리오스(Caballarius)
3.3. 기타
3.3.1. 부켈라리이(Bucellarii)3.3.2. 용병3.3.3. 아크리티(Akritai)3.3.4. 보조병
4. 무장5. 전술6. 해군
6.1. 군선6.2. 무기와 전술
7. 군기(軍旗)8. 참고9. 관련 문서

1. 개요

로마 제국의 중세시대 군대를 설명한 문서이다.

고대 도시국가에서부터 시작된 로마의 군제 변화는 공화정, 제정을 지나치며 다양하게 변화해왔으며, 영토의 변천에 따라, 막아내야 할 적에 따라 유연한 개혁을 단행해왔다. 이 문서에서 나오는 로마군의 변모는 제정 로마에서 중세 로마 제국으로 갑자기 변화하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라, 사두정치 시대부터 시작해 연속적으로 변화해오는 느리고 확실한 진화의 과정이다.

2. 역사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군인 내지 오현제 시대때의 전형적인 중무장 군단병과 화려한 군장을 갖춘 프라이토리아니만 연상하는 대중의 분위기에 맞춰서 말하면, 실제 로마군은 다양한 적을 상대하면서 군제와 장비가 지속적으로 바뀌었고 주둔 환경과 전투에 맞게 진화했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만 하더라도, 다키아 전쟁을 치르면서 다키아인들이 사용한 무기가 새롭게 로마군 무기 중 하나로 활용되었고, 서부와 동부 전선마다 로마군의 복장과 무기, 전술 역시 그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변했다. 중세로 넘어 가면서도 예외는 아닌지라 대중이 아는 로마군과는 전혀 달라보이게 되지만 그건 그냥 적응과 진화과정의 부산물이다. 흔히 떠올리는 카이사르-오현제 시대 로마군과 달라보인다고 로마군 아니다라곤 못 한다는 것. 붉은 군복 입는 레드 코트 전열보병들이나 20세기의 카키색 옷 입은 토미들이나 시기만 다를 뿐 다 같은 영국군인 것처럼 말이다.[1]

일단 동로마 제국의 군제는 세 시기로 구분된다. 초창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 등으로 이어지는 군제 개혁의 와중이었다면 중기에 테마 제도를 통해 둔전병에 가까운 분권화를 꾀했고, 이것이 한계에 도달하자 중앙집중적인 군대로 바꾸었으며 이후 멸망까지 비슷한 체제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2.1.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군제 개혁

3~4세기경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존 레기오 체제론 다양화, 기병화되는 적을 쉽게 제압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만이 떠올린 천재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 백 년 전부터 제기되어오던 문제를 반영한 것이었다. 각 변경 속주를 지키던 군단들은 변경 방어군이라는 뜻의 리미타네이(Limitanei)로 변모했고, 기동 야전군은 야전군이라는 뜻의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2]로 바뀌었다. 이들 군대는 국경을 위협하는 사산 왕조게르만 족의 기병과 맞서기 위해 기병 비율을 더해갔고, 말기에 가면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1까지 치솟았다. 기본적인 전략은 리미타네이가 이전의 군단병들을 대신하여 각 지역의 변경 요새(Limes)를 지키는 식으로 야만족들의 소규모 침입을 막아내고, 대규모 야만족 무리가 국경선을 넘어와서 지원이 필요하거나 대규모 원정이 시작된 경우에 각 속주의 주요 도시나, 전선 후방에 주둔하는 코미타텐세스 군대가 신속하게 기동하여 망치 역할을 했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 당시에는 정식 명칭이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였고 이들은 전원 황제와 부제가 이끌었으며, 각 황제와 부제에게는 기존 프라이토리아니 부대들을 빼내어 새로 만든 부대인 요비아니, 헤르쿨리아니 등이 직속으로 배속되어 바로 이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의 핵심을 이루었다. 저 위에서 간단화한 조치들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나 되어야 정착된 제도다.

2.1.1.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

각 코미타텐세스 부대는 10,000에서 15,000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보병을 중심으로 스타블레시아니(Stablesiani), 카타프락토이(Cataphractoi)등의 중기병 병력이 상당 포함되어있었다. 이들은 옛 레기오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 체제가 아니라 이미 카라칼라 때부터 지속된 흐름이었던, 즉 직속 군단 본부 부대는 약화되던 반면 각 분견대가 갈수록 정예화되고 수도 많아지던 흐름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가 멀쩡히 기능하던 기존 군단들 중에서 정예부대와 기병부대들을 추려서 코미타텐시스에 배치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리미타네이에 배치한 것이 아니고, 이미 군단 자체가 이백 년 가까이 계속되던 각종 편법으로 야전군에 차출된 정예병과 군단 기지 잔존병의 차이가 커진 것을 반영하여 합리적으로 개편한 것이다. 코미타텐세스의 기원인 세베루스 왕조, 군인 황제 시대의 기동부대(vexillationes)나 황제 직속 야전군은 레기온과 보조병 구분 없이 정예부대만을 각 국경 방어 군단에서 차출한 것이었기에 코미타텐세스 또한 구 레기온 부대와 구 아욱실리아 부대를 모두 포함하게 된다.

옛 군단을 직속 계승한 게 리미타네이란 오해도 있는데 이는 시오노 나나미도 저지르던 오류지만 사실과 다르다. 옛 레기오가 여러 부대로 쪼개졌고 대체로 옛 부대 본부 자리에 있던 부대들이 리미타네이가 더 많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인원과 직제 그리고 정예 부대 계승성을 고려해보면 코미타텐시스가 오히려 더욱 계승성은 강하며, 옛 레기오 본부대 명칭을 직접 계승한 코미타텐시스 부대도 꽤 있다. 예컨대 카이사르가 로마 진군 때 이끌었던 13군단이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남다보니 10세기의 트라키시온 테마 부대로까지 남아있게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을 정도. 당시 사가들은 이들을 이루는 하급부대들을 누메로이(Numeri)나 코미타텐세스라고도 불렀지만, 그냥 전에 부르던대로 군단병(Legiones)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건 바로 이것이 원인이다. 보병들은 예전과 같이 로리카 사슬갑옷을 입고, 중무장을 갖췄으며 고대 로마군과 똑같이 보조병이나 포에데라티라고 부르는 이민족 징집병들을 두어 경보병 전력을 보강했다. 다만 시대가 가면서 사각 방패는 노후화되어 폐기되는 반면 점점 원형 방패 비중이 높아지고, 필룸은 갈수록 짧아지며 모양이 단순화되는 한편 검은 갈수록 길어지면서 투구 또한 모양이 단순화되면서 알려진 기존 로마군 레기온의 모습과는 꽤 멀어지게 된다.

2.1.2. 리미타네이(Limitanei)

리미타네이는 대개 코미타텐세스보다 경무장한 2선급 부대들로 이루어졌지만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이후 해체된 프라이토리아니 병력 일부가 판노니아 전선에 재배치되는 등 예외적으로 전력이 강한 곳도 있었다. 이들도 코미타텐세스와 마찬가지로 기병 보충이 두드러졌지만 그 수와 질은 코미타텐세스에 비해서 상당히 떨어졌으며 징집은 주둔하는 곳 현지민들에게서 이루어졌다. 전 시대보다 새로운 벡실라티오, 레기오, 아욱실리아 부대들이 창설되었고, 이들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지방군이었지만, 전선이 고착화되거나 반격작전이 시작되었을 경우에는 상태가 양호한 몇몇부대가 코미타텐세스와 합류하여 적의 심장부까지 깊숙히 쳐들어갔다는 경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미타텐시스와 마찬가지로 물론 예전 세기 레기오에서 이어진 부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각 군단의 정원을 줄이고 각 지방의 거점 수비에 배치시킨 이후 대부분 리미타네이로 전환되었고, 이후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가 되면서 급료가 완전히 없어진 후론 당연히 전투력은 그나마 제역할을 좀 했다고 볼 수 있는 3~5세기와는 달리 완전 당나라 부대들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의의를 낮추어 볼 수 없다. 이슬람 맹진 직전 시기에 코미타텐시스들은 용케 건졌지만 리미타네이는 죄다 날아갔고 바로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7~8세기의 극적인 축소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훗날 리미타네이 부대 혹은 부대원들의 후손이 가끔씩 제국으로 넘어와서 테마 부대로 편입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카이사르의 10군단 부대 후예들이다.

2.1.3.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

프라이토리아니는 이미 기병화가 진행되면서 군제 개혁시기에도 온존했으나, 사두제가 펼쳐지며 황권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자 위상이 크게 하락한다. 물론 기존 프라이토리아니 인원들은 4두 정치 황제들의 직속 부대로 많이들 들어가게는 되었으나 정예병력과 정예부대들을 이렇게 빼앗긴 프라이토리아니는 형해화될 수밖에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막센티우스 밑에서 극적인 부활을 이루지만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패하고 완전 해체된다. 훗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가 프라이토리아니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들은 적어도 직제에선 프라이토리아니와 아무 상관이 없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에 콘스탄티누스가 판노니아로 보내지 않고 그대로 편입한 인원 일부가 있었을 정황은 분명 있지만 분명한 문헌적 근거는 사실 없는 상태다. 어쨌든 리미타네이로 강제 전출당하지 않고 남은 프라이토리아니의 일부 기간병이 창설에 간여했을 개연성이 높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의 부대 훗날을 보도록 하자.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궤멸되어 재건되지 않았다. 한편 스콜라이 팔라티나이는 정말로 정예 기병대로서 많은 활약을 했지만, 5~6세기 들어서 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했던 데다 황제와 식사를 함께 할 기회도 많았고 때문에 유력한 원로원 의원들이나 부유층들이 온갖 빽을 동원해 자녀들을 집어넣는 짓들을 저지른 탓에 7세기에 들어와 그야말로 도련님들만 모인 당나라 부대가 되고 말았다. 7세기 중반 이후 위기의 시대가 되면서 제국은 이런 여유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빡친 황제의 명으로 스콜라이 팔라티나이는 정예 타그마 부대 중 하나로 완전 개편되면서 정예 부대로 다시 거듭났지만 해당 부대의 장교들은 큰 날벼락을 맞게 되었음 정돈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다.

2.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 이후

4~5세기에 들어서서 제국의 서부에는 구멍이 송송 뚫렸다. 서로마가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군제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3], 동방에서는 오도아케르의 찬탈 이후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혁한 군제는 지속되었다. 단지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들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숙적은 게르만 대이동의 주역인 고트족 약탈자들이나 훈족보다는, 바로 시리아 코앞에서 코카서스의 소국들과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두고 제국과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사산 왕조였다. 6세기가 되자, 제국은 실지 수복에 박차를 가했고, 대 사산 왕조 방어 및 서방 지역의 고토수복을 위한 새로운 군제개편이 벌어진다.

2.2.1. 분류

파일:Byzantine_Army.png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까지 계속된 군제의 변화로 동로마 군은 간략히 정리하면 이러한 구조로 구분되었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먼저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리미타네이(Limitanei)의 명칭이 동로마에서 더 흔하게 들을수 있는 명칭인 스트라티오타이(Stratiotai)아크리타이(Akritai)로 바뀌었다. 기병 비중은 더더욱 늘어났으며, 주요 귀족층들은 더 흔히 벌어지는 대규모 기병전에 대비하여 가신들이나 하급 귀족들을 무장시켜 중기병대인 부켈라리이(Bucellarii)를 대동하고 다녔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들 군대는 동방으로 옮겨간 제국의 중심을 따라서 트라키아나 마케도니아, 일리리아와 같은 그리스 서북방부에서 모집되었다. 훗날 여러 황제 가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등장한 것도 당연한 인과였다.

동로마 제국은 상업과 비옥한 아나톨리아 지방을 바탕으로 융성했지만, 계속되는 야만족의 영내 이주와 국경침범으로 혼란을 겪었다.이를 해결하고 주변 야만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제국은 포에데라티(Foederati)라는 새로운 부대들을 야만족들로부터 징집하게 된다. 이들은 제정 시기의 아욱실라리, 즉 보조병과 비슷하게 속주 출신, 혹은 주변 야만부족 출신에서 모집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옛날에 군단에 소속되어 기병, 궁병 보조의 역할만을 담당한 아욱실라리와 다르게 이들은 동로마 출신의 장군의 지휘아래, 또는 동로마제국에 오랫동안 볼모로 잡혀있었던 야만인 왕족의 지휘 아래 독자적인 부대로 창설되었다. 물론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함께 혼성 편재되는 일이 흔했으나, 아예 군단의 소규모 병과였던 예전과는 천지 차이였다.

2.2.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동로마군 규모

학자들마다 규모를 다르게 잡지만 한창 영역 확장에 힘쓰던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동로마군은 보조병들을 모두 합쳐 약 30만 내지 35만 정도의 규모였을 것이다.

야전군은 보통 코미타텐시스(Comitatenses)와 포에데라이(Foederati)로 구성된 15,000 내지 25,000 정도의 주력 외에 지휘관의 사병 및 동맹부대[7]를 보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유명한 벨리사리우스의 533년 카르타고 원정을 보면 1만명의 보병과 3,000명의 기병이 코미타텐시스(Comitatenses), 포에데라이(Foederati) 혼성으로 주력을 이룬다. 여기에 1,000명 정도 훈족을 포함한 이민족 기마 궁사들과 1,500명 정도의 부셀라이리를 합친 것이 벨리사리우스 원정군을 이루었다. 이 병력이 약 500척의 함선에 나누어 100척 정도의 드로몬 호위를 받으며 아프리카 원정에 나선 것을 통해 당시 동로마군의 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

2.3. 무슬림 팽창기의 진공 속에서

2.3.1. 배경

이라클리오스사산 왕조를 박살내고 동방 영토를 회복했지만 포카스의 실정으로 약화된 제국은 한 세대 내에 동지중해 전역에 대한, 메소포타미아를 아우르는 지배권을 재차 포기하고 새로 일어난 이슬람 세력에 밀려 소아시아로 후퇴했다. 제국이 관리하는 인구는 560년 2천만을 헤아렸으나 641년에는 그 절반까지 떨어졌고 당연히 병력의 규모도 379,300명에서 129,000명으로 축소되었다.

2.3.2. 테마 제도

600년대 중후반의 제국은 밖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맹공에, 안으로는 영역 축소로 인한 세금 부족과 안전보장 비용 증가에 시달렸고, 이러한 변화는 제국의 군제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이전 시기의 코미타텐세스 부대들은 잔존 영토에 종전의 황실 영지를 받아 나뉘어 배치되면서 테마를 이뤘고, 리미타네이는 문자 그대로 완전 사멸되었다. 이로써 고대 로마사에서 익숙한 "황실 영지"가 영영 보이지 않게 되고, 종전의 코미타텐세스들은 테마로 변모하여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리미타네이가 했던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이슬람의 공격에서 제국을 방어하는 테마는 더 이상 결전을 수행하는 군대가 아니라 중요거점을 방어하고 게릴라 전을 수행하는 군대였다. 과거에는 지역 방어군이 적을 막는 동안 기동군인 주력부대가 와서 격파하는 방식이었다면, 과거의 기동군들이 각기 분리되어 정착한 테마는 둔전병들이 주력이 되어 세금을 면제받는 대신 병기를 각자 소지하고 농사를 짓는 형태가 되었다. 결론만 말하면 테마는 어느 정도 당대 현실에 맞게 기능했지만 리미타네이만큼 적의 공격 자체를 흡수하는 쿠션 역할은 충분히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것이 제국의 안보 상황을 매우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가 없으니 잇몸이 이 역할을 했지만 진짜 이가 하는 노릇은 당연히 못했다는 얘기. 세월이 흐르면서 종전의 리미타네이 부대들의 후손이나 이슬람측 지역민들의 투항으로 이런 상황이 나아지게 되지만 적어도 테마 초창기인 7~8세기엔 대단히 해결이 어려운 과제였다.

2.3.3. 테마의 세분화와 타그마

8세기 후반에 동로마 제국이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자 테마는 세분화되고 지방 행정과 결부되어 테마 제도로 발전했고, 테마의 장관인 스트라테기는 지방 행정관인 동시에 군관구 사령관이기도 했다.

774년 제국의 인구는 약 7백만이고 육해군은 총병력 118,400명이었는 데 그중에서 62,000명이 10개 테마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후 70년 뒤에 제국은 인구 증가와 세분화에 맞추어 약 20개 테마를 보유하고 총병력 154,600에 테마 병 96,000을 확보했다.

테마 세분화와 함께 콘스탄티노스 5세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타그마라는 상비군을 만들어 지방군-중앙군 체제를 부활시켰다. 테마군의 반란을 처리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타그마는 중장기병대로 제국군의 중핵을 이루었다.
8세기 후반 이후 타그마는 총 16,000명의 중장기병과 4,000명의 보조병을 거느렸고 여기에 다시 치중병과와 870년 이후 창설된 제국 해병대를 포함해 28,000명의 전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군제 개혁으로 10세기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상비 중앙군이 전쟁의 주역이 되는 변화를 겪었으나 그와 함께 지방 주둔군이 된 테마 제도의 군인들은 자영농이 아니라 유력자에게 예속되어 몰락하기 시작했다. 지방 유력자는 재력을 바탕으로 중장기병을 보유해 제국을 방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만큼 지방군의 사유화가 진행되면서 반란이 잦아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2.4. 콤니노스 왕조 시대

대귀족들의 혼란 속에서 셀주크 제국의 위협이 커지자 10세기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제국은 다시 위험에 처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중앙군 타그마의 대다수를 날려먹은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상실했고 덤으로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족에게 이탈리아 남부까지 빼앗긴다. 그 결과 간신히 유지되던 테마 제도가 완전히 붕괴하여 제국의 외곽방위선이 유명무실하게 무너져내렸고 이러한 혼란속에서 튀르크 족 일파가 카파도키아 지방에 룸 술탄국을 세우고 소아시아 서부해안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이런 위기 속에서 1081년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제국의 군제를 다시 바꾸어 유력 귀족군과 황제 자신의 사병을 바탕으로 직속 군대를 강화했고 유명무실해진 테마 제도를 대신할 군제를 개편했다. 프로니아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바랑인 친위대, 아타나토이[8] 등의 강력한 호위병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시켰고 각지에서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비롯해 소아시아의 흑해 연안까지 타그마 정예병들을 징집했다.[9] 요안니스 시대에는 파플라고니아, 킬리키아 등에서도 더욱 많은 병력을 포함시켰으며 페체네그, 세르비아 등 정복한 지역에서도 징발하여 정규군을 형성해 유럽과 아시아에 주군시켰다. 투르코폴레스 궁기병 등을 포함해 정규군을 늘린 결과 동로마 군대는 1/3이 외국계 병력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고 궁병, 보병, 기병으로 나뉘어 합동작전을 발일 수 있게 조직되었다.

흔히 제국이 용병을 구입하고 본토 병력을 등한시하여 무너졌다는 이야기, 혹은 프로니아 제도를 통한 봉건화의 강화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나, 실상은 콤니노스 왕조 시기까지의 육군 주력은 아직까지 본토 로마인들이 주였다. 알렉시오스 황제의 시기까지만 해도 중앙군의 잔여가 제국에 남아있었으며, 그들이 문구에서 사라진 요안니스 2세의 시기에도 타그마 중심의 중앙군은 재편되어 건재하였다. 또한 용병을 '구입'하였다는 것도 일종의 오해인 것이, 제국은 병사로 징집할 외국인들을 정착시키거나 프로니아 제도로써 봉급을 주거나 하여 병력을 충원하였지, 대규모 용병으로 전쟁을 벌인것은 쿠만족을 끌어들인 레부니온 전투나, 급한 김에 1만의 튀르크 부대를 급구한 디라히온 공방전 등 뿐이었다. 이 경우도 외국에게 원조를 구한 것이지 돈주고 산 게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양판소식 용병 고용은 13세기의 니케아 제국 시기부터 등장한다. 이는 마치 로마가 제정 당시 보조병 부대를 둔 것 때문에 제국이 파탄났다고 보는 판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적어진 병력을 더 빠르게 투사하기 위해 폐지 위기에 처해진 해군을 강화시켰다. 그 전까지 해군은 각 해군 테마에서 징집되어오는 병력을 그대로 차용했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이 룸 술탄국에게 삼켜진 이후, 해군의 주요 항만이었던 스미르니, 아틸레이아등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면서, 해군도 단일한 제국 해군으로 재편성된다. 이 동로마판 연합 함대의 사령관으로는 그 전까지의 해군 함대 사령관들인 메가스 드룽가리오스들보다 상위의 계급인 메가스 둑스를 두고, 그 직종을 그의 부제였던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맡겨 안정을 도모했다. 이 메가스 둑스는 각 테마타의 함대를 통합하여 지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통합 함대가 유지될 수 있도록 주둔지와 보급을 담당하는 펠로폰네소스, 헬라스 등지의 제국의 그리스 남부 속주 통치자 또한 겸했다.[10] 하지만 육군 부흥책과는 다르게 해군에 대한 투자는 알렉시오스 1세 당시에 바로 나타날 수 있는 성과가 아니었다. 제국 해군이 재건되는 동안 그는 노르만과 튀르크 함대에게 판정패를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런 부담은 아들 요안니스 2세에게로 그대로 전가되어, 그의 치세에 제국은 통상 특권 갱신을 요구하는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일수 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보두앵 2세를 구출하기 위해 전력을 투사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레스보스, 키오스, 로도스, 사모스, 안드로스 등의 섬들을 모두 석권하며 제국 해군을 능욕했다. 다행히도 당시의 베네치아가 이 섬들에 대한 지배권이 아닌, 무역 특권을 주장한 덕에, 통상 특권이 보장되자 제국에게 모든 섬들을 다시 돌려준 상황이었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제국은 속수무책으로 주요 섬들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요안니스 2세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에 그리스 남부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만 묶여있던 해군 보급, 주둔 담당을 크레타, 로도스 등의 에게해 주요 섬들까지 확장시켰다.

노력은 마누일 대제 시기에 빛을 발하여 당시 역사가들은 제국 해군이 최소 500척 이상의 크고 작은 전선들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2만명 정도의 해군을 보유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시기까지 왔다. 마누일 시기 제국은 십자군과 동반하여 파티마 왕조의 다미에타를 공격하고, 안티오키아 정벌전에 수륙 양면 군대를 파견하거나 1170년대에는 베네치아를 꺾기도 하는 등의 기염을 토했고 11세기엔 페체네그, 셀주크에 정신 못 차리게 털렸는데 12세기엔 페체네그는 야전에서 전멸시키고 황제가 아나톨리아에 친정을 나가서 성과를 보았지만 이마저도 그리스 남부나 흑해에서의 제해권 장악 이상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구성된 콤니노스 군을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은 다시금 부흥을 꿈꾸었지만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 되었다. 훈련도와 무장도를 전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이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은 통치자에게 있었기에 매우 유능한 통치자가 지휘하지 않는다면 제국군대는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제국은 결국 강력한 지도력의 부재로 인해 안으로는 지방 대귀족들의 분열을 막지 못하고 밖으로는 서방과의 불화, 이슬람 세력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2.4.1. 프로니아 제도

동로마제국의 봉급 지불 제도이다. 이는 사실 콤니노스 이전 선대 황제들의 비상 지불책으로써 현지화하자면 과전법과 같은 성격이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 이후, 니케아 망명정부, 팔레올로고스 왕조 대까지 대부분의 중앙군과 타그마들의 직업군인들이 이 방식으로 봉급을 지불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2.5. 제국의 황혼

1185년 콤니노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죽었을 때 동로마 제국군은 지극히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바뀌어 있었다. 그 동안의 개혁으로 제국군은 작고 효율적인 군대로 바뀌었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 역량은 아주 우수한 황제가 필요한 곳에 한정적으로 사용할 때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장군들은 황제만 바라보고 있었고 황제가 직접 지휘해야 움직이는 군대에서 지휘를 새로 맡게된 앙겔로스 왕조는 불행히도 유능한 황제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사키오스 2세가 똥볼을 차대는 사이, 외부의 위험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제국의 부유한 아나톨리아 해안지대는 튀르크인들의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되었고 서쪽에서는 세르비아와 헝가리가 달마티아와 시르미움을 집어삼켰다. 게다가 앙겔로스 왕조의 과세정책은 제국에 편입되었던 불가리아 인들을 자극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그 결과 불가리아 제국의 재림이라는 재앙이 제국에 닥쳐온다. 이렇게 주변 상황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앙겔로스 왕조의 황족들은 서로 싸우기에 바빴으며, 무능한 알렉시오스 4세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서 4차 십자군을 내전에 끌어들인 결과 급기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당하고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해버리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터져버리고 만다.

이후 로마인들은 4차 십자군이 미쳐 점령하지 못한 제국의 나머지 지역에 망명 정권들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였던 니케아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메소티니아와 파플라고니아를 중심으로 국력을 길러 126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시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미하일 8세가 간신히 상황을 진정 시킨 뒤에도 과거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미하일 8세의 치세에 제국은 사방에서 전쟁을 겪었고, 영토는 점점 줄어드는데 군비는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어 제국의 재정은 파탄에 이르게되었다.

이후 그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재정 파탄을 피하기 위해 군비를 대규모 감축하는데,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군대를 최소한으로 감축하였으며 해군은 아예 해체하고[11] 제노바 공화국에 위임해버린다. 미하일 8세 시절의 수만명에 달하던 군대는 완전히 공중분해되어 사라졌으며, 제국의 국운이 걸렸던 1302년의 아나톨리아 원정에서도 제국이 동원한 병력은 1만여명도 안되는 수준이였다.

나중에 안드로니코스 2세도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군을 재건하는데 힘썼으며, 그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3세 때는 다시 제대로 된 육군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군을 재건하는 것은 많은 돈과 시간을 요구했기에 완전히 복구되진 못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은 후에는 흑사병이 발발해 인적 자원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다 제국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제국군은 다시 증발해버린다. 이후에 요안니스 6세가 제국군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354년 요안니스 6세가 폐위되고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하면서 무산되고, 요안니스 5세의 치세에 제국군은 사실상 없다고봐도 무방할 수준까지 약화되었다.

15세기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테살로니카, 펠로폰네소스 반도 정도의 영역으로 축소된 제국은 소수의 도시 수비군과 모레아군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전력을 베네치아 등의 믿기 힘든 몇몇 외국 용병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발전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 되던 시점에 제국군의 수는 7,000명에 불과했고 그 중 수비대 사령관을 포함한 2,000명이 베네치아/제노바의 용병들이었다.

2.6. 구조적 약점

세계사 수업에서 동로마 제국 하면 테마 제도를 떠올릴 만큼[12]테마 제도는 동로마 제국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 제도는 동서 양면에서 수시로 군사적 위협을 겪는 제국에 도움을 주었으나, 그와 함께 구조적인 약점을 만들었다.
테마 제도는 우선 많은 병사들을 확보하는 데 유용하였고, 단기적으로 국방비 절감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테마 병들은 본인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에 기본적으로 의욕적이었고, 지리적으로 전장에 익숙하기에 게릴라전에도 능숙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방어전에서만 통용되었으며 각지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어야 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는 상비부대에 자국 병사를 구하는 자체가 힘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그 시스템상 필연적으로 각 지방의 반독립적 군사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던 테마군은 동로마의 전통적 해악인 잦은 내란의 주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약점이 드러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군제를 보다 효율적이고 소규모인 중앙군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의 결과로 제국의 방어는 주로 외국 용병들과 해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잠재적 문제가 있었다. 과거의 테마군과 비교했을 때, 콤니노스 왕조가 개편한 중앙군은 자율성에 문제가 있어서 매번 황제가 유능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또한 모처럼 중앙집중화된 해군의 활동도 이를 뒷받침할 기지의 부족이 활동 영역을 제한시켰다.

3. 병종

3.1. 보병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전부터 로마군은 기병 비율을 높이고 기병 전투력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천 년 넘게 보병을 중시하는 전통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가 없었다. 검, 창, 도끼 및 납 다트로 무장하고 둥글거나 삼각형 방패와 금속 투구, 누비 갑옷으로 무장한 것이 보통이고 간혹 보다 부유한 병사들은 체인메일로 무장하기도 했다.

보통은 650명 정도인 중보병 스쿠타티, 약 350명인 경보병~궁병인 프실리 등이 모여 천 명 단위로 부대를 이루었다. 중보병은 앞열에 서서 돌격하거나 경보병을 적의 투사체 공격에서 보호했고, 기병이 주로 양익에 배치된다면 보병은 중앙을 맡아 모루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병 앞에 배치되어 보호하다가 신호에 맞추어 양편으로 갈라져 기병에게 돌진로를 열어주는 전법도 썼다.

3.1.1. 스쿠타티(Skoutat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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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교양서적에서는 스쿠타투스 혹은 스쿠타토이라고 나오며, 전자는 라틴어고 후자는 정작 중세 로마 제국 시절에는 쓰인 바 없고 동서 분열 훨씬 이전부터도 쓰인 게 의문시되는 코이네다. 누가 뭐라고 부르든 자유고 학계에서도 고정된 건 아니지만 스쿠타티가 보다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있다.

동로마 보병의 중추이며 명칭은 이들이 사용하는 타원형, 연 모양 대형 방패인 스쿠톤(Skouto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스쿠톤은 각 부대마다 장식이 달랐다. 투구는 대체로 단순하고 위쪽이 뾰족한 철제로 목 보호대가 추가되는 정도였다. 린넨이니 양모 옷을 입은 위에 흉갑을 덧입고 그 위에 가죽이나 천으로 된 패드 등으로 고정시키는 게 보통의 갑옷이며 그 외에 하반신 보호를 위해 두꺼운 천을 받쳐입기도 한다. 대대의 앞열은 2~3m 정도의 장창과 대형 방패로 무장해서 후위를 보호하며 그 외에는 검과 방패로 무장한다. 검은 장검과 곡도(곡검도 있긴 하다.)를 쓰는데 장검은 전형적인 스파타지만 후기로 가면 가드 등이 중세형 장검으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검과 방패로 무장한 이들은 개인에 따라 투척무기 같이 보조무장을 따로 챙겼다. 그 외에 검과 투창 또는 검과 활로 무장한 경보병 프실리를 포함해 약 1000명 단위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보통은 중보병 650명에 경보병 350명 비율이었다고.

3.1.2. 펠타스트(pelt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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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하단의 병사가 펠타스트. 우측 하단의 병사는 후술할 프살리다.

본래는 그리스에서 투창병/척후병을 부르는 말이였지만, 동로마 군에서는 경무장한 창보병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그래도 무장에는 다트가 포함되어 있다.

3.1.3. 프실리(Psiloi)

프실로스라고도 하며, '맨몸' 이라는 의미. 주로 , , 투창, 슬링샷같은 투사 무기로 무장한 경보병. 정찰 등에도 활용하지만 동로마 시대에는 중보병 뒷열이나 중앙에서 보호를 받으며 원거리 공격을 했다. 주로 소아시아나 트레비존드 출신. 스쿠타티와 마찬가지로 주로 쓰는 무기들 말고도 단검이나 손도끼 같이 보조무장을 따로 준비하기도 했다.

3.1.4. 바랑기아 친위대(Varangian Guard)

파일:external/larsbrownworth.com/Varangian_Guard.jpg

바랑인출신 용병들로 구성된 동로마 제국의 외인부대겸 친위대. "타그마 톤 바랑곤(Τάγμα τῶν Βαράγγων / Tágma tōn Varángōn)"이 보다 정식 명칭이지만 당대엔 "바랑기"로 더 자주 불렸다.

3.2. 기병

초기엔 기병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으나 시리아, 아나톨리아 동부를 상실한 후에는 군마의 보급이 힘들어져 규모가 줄어들었다. 후기 동로마군은 과거 고대 그리스가 그랬듯이 테살리아 지역의 군마에 주로 의존했으며 십자군 전쟁으로 수복한 아나톨리아의 메소티니아나 파플라고니아 지역의 군마들도 적극 활용했다.

3.2.1. 타그마(Tagma)

파일:Byzantine Tagma.png
복수형은 타그마타(Tagmata). 사실 타크마를 기병에 끼워넣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데, 이는 타그마가 병종이 아닌 기병 비율이 높은 중앙군 이기 때문. 타그마의 모집은 다양한 곳, 다양한 계층에서 실시했다. 초기에 타그마는 수도에 상비하며 제국의 기동전력을 담당하는 중앙군을 의미했지만, 만지케르트 전투디라히온 공방전을 거치면서 절멸에 가깝게 피해를 입은 구 타그마들은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콤니노스 왕조 후기에 가면 대부분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에 있던 타그마들은 마케도니아, 트라키아부터 일리리아, 모넴바시아 같은 유럽 방면, 니코메디아, 헤라클레이아 등의 아나톨리아 주변에서 모집된 기동성 높고 무장이 잘된 기병화 연대를 의미하게 되었고, 위치도 꼭 수도에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13][14]

이들 중 대부분은 봉급이나 프로니아를 받는 직업군인이었다. 물론 전방으로 강제 정착된 세르비아계나 페체네그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알던 스콜라이, 아타나티, 엑스쿠비티, 베스티아리, 에테리아 등의 타그마들은 요안니스 4세, 또는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까지는 등장하나, 그의 후계자 요안니스 2세 이후로 언급이 줄어들거나 재편된다.

쉽게 설명하면

3.2.2. 카타프락토이 (Cataphract)

파일:Byzantine_Cataphract.jpg
제국의 카타프락토이들은 고대시대와 중세시대의 연장선에 있는 기병 병과였다. 이들은 카우치드 랜스를 이용하여 적에게 돌격하기도 하였으나[15], 중세 기사들처럼 돌격력을 통한 한 방에 방진을 붕괴시키는 것 보다는 전통적 양익 편제를 이용하여 도검을 들고 망치와 모루 전술을 이용하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였다. 이는 제국의 기병전술이 크게 변하지 않은 점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말의 산지인 아나톨리아 동부와 시리아를 잃고 나서 다량의 군마를 보유하기가 힘들어졌고, 이 때문에 말의 소모가 극심한 연쇄 돌격을 꺼리게 된 까닭도 있다. 물론 이들이 아예 연쇄 돌격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레부니온 전투 에서는 페체네그 기병대의 마차 방진을 향해 계속해서 돌격을 시도한 적도 있었고, 마누일 황제의 편력에서 연쇄 돌격을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하지만 상기한 문제점 때문에 제국 기병은 전투지속능력 향상을 위해 도검과 둔기류를 선호하며 가지고 다녔다.

카타프락토이를 묘사한 삽화와 재현화에서 흔히 보이는 작은 버클러는 철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후대 유럽의 기사들이 랜스돌격을 막기 위해 작은 타지를 가슴에 끼우는것과는 사뭇 다른 이유를 지녔다.

사슬갑과 찰갑 위에 누비갑인 클리바니온까지 겹쳐입은 카타프락토이들은 화살이나 검격에 충분한 방어력을 가졌지만, 둔기류를 많이 쓰는 동방의 적들의 특성상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쉽게 휘둘러 막을 수 있는 버클러에 유사한 방패를 채용했던 것.

후대로 가면 마갑을 반만 두르거나 병사만 중갑을 둘러도 카타프락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2.3. 클리바노포리(Klibanophor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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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형은 클리바나리라고 하며, 이름의 뜻은 화덕(...).[16] 마갑을 장착한 중장기병이며, 카타프락토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타프락토이 참고.

3.2.4. 트라페지토스(Trapezitos)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테마를 포함해 제국의 외곽지대에 주둔하는 경기병을 의미한다. 토스트라페지타이, 타시나리오이 라고 부르기도 한다. 빠른 속도를 활용해 정찰을 하거나 연락병 역할, 소규모 기습을 해서 적을 괴롭히는 것이 주요 임무.
이들의 출신과 특성 상 제국 각 지역에 흩어져 있어, 집단으로 운영하기가 어렵다보니 대규모의 경기병이 필요하다면 외국인 부대를 운용하는 걸 선호했다.

3.2.5. 투르코폴레스(Turcopoli)

튀르크계 병사들로 구성된 보조병과로, 보병도 있으나, 대부분 분견대의 궁기병으로 복무하였다.

3.2.6. 바르다리오타이(Vardariot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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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르 계곡 사람들이라는 뜻의 이 부대는, 대충 페체네그족 출신의 기마경찰대를 칭하는 말이다. 제국은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페체네그족과의 치킨 게임을 계속했다. 이들은 왈라키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쿠만족과 함께 내려온 아시아 튀르크계 유목민족이었지만, 헝가리 남부 바르다르 계곡에도 많이 살았기에 로마인들은 이들을 바르다리오테라고 불렀다. 페체네그족이 베로이아 전투로 자연상태에서(...) 멸족의 위기에 처하자, 사로잡히거나 항복한 대다수의 페체네그인들은 제국에서 복무했고, 이를 기념하는 페체네그족 연례 기념일이 생길 정도였다. 이들은 1차~3차까지의 여러 십자군 주력에게 길잡이를 하거나 일탈 행위를 벌이는 프랑크인들을 토벌하는 등의 활약을 보여 황제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고, 소아시아 여러 곳에 알바니아계와 함께 식민되었다가 13~14세기를 전후로 해서 종족적 특징을 잃고 동로마, 헝가리로 흡수되었다.

3.2.7. 카발라리오스(Caballarius)

동로마군에는 흔히 라티니콘이라고도 불리는 서유럽인 용병기사들이 있었다. 12세기의 절정기를 거쳐 13세기의 쇠퇴기를 맞이하는 동안, 제국 내에 거주하는 프랑크계 기병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다. 그것이 성지순례를 가다가 눌러앉은 독일인이건, 4차 십자군의 잔당인 프랑스인이던, 콤니노스 왕조 시기의 군대에서 복무했다 정착한 노르만인이던 간에 14세기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복구한 제국에게 있어서 서유럽식 중기병 전력은 절실했다. 초기에는 단지 기병을 모두 뭉뚱그려 부르는 단어였던 카발라리오스는 14세기경부터는 뚜렷하게 서유럽적 의미의 기사만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1차례 이상 라티니콘 기사가 동로마 제국의 군사령관을 맡아 서유럽인을 상대한 적은 있었으며, 이들을 통솔하기 위한 직책인 메가스 코노스타울로스라는 비상설 직함이 존재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왕이 될 뻔했던 몬페란드의 콘라드도 이사키오스 2세 시절 제국군에서 라티니콘 기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카탈루냐 용병들이 일으킨 사건[17]과, 세르비아, 불가리아의 남하, 베네치아의 이권 상실에 의한 왕래 중단등과 합쳐져 프랑크 출신 기사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흥미를 서서히 잃게 되었고, 이에 더해 제국이 계속해서 축소되는 15세기경에는 이러한 기사들에게 봉급을 줄 형편도 되지 않아, 결국 이런 부대들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물론 제국도 정예병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기에 병종 자체는 제국 멸망때까지 존속하긴 했을 것으로 보인다.

3.3. 기타

3.3.1. 부켈라리이(Bucellarii)

동로마 제국 귀족들의 사병조직. 이름의 뜻은 '부캘럼을 먹는 자'라는 뜻으로, 부캘럼은 로마군이 하드텍을 부르던 이름이였다. 사병대이긴 했지만 국가에 충성하며, 전투에도 참여하는 등 현대기준으로 보면 준군사조직에 해당하는 병종이였다. 벨리사리우스 시기까지는 흔히 사용되는 중기병 집단이었지만, 이후 7~8세기로 넘어가면서 그 의미는 제국 육군의 잘 무장한 기병으로 퇴색되었다가 사라졌다. 훗날 앙카라 주변에 설치되는 부켈라리온 테마가 바로 이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훗날 군제가 개편되면서 이들은 사라졌다.

3.3.2. 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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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데라티(Foederati)나 프로니아 제도로 정착해 복무한 외국계 상비군과 다르게 다양한 병력이 정말 용병의 형식으로 제국에 복무했다. 그 방식은 너무나도 다양한 데다가 때로는 적국의 민족으로 구성되기까지 했다. 이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에도 훈족, 게르만족, 아랍에 위치한 가산 왕조의 병사들을 돈으로 사서 전선에 투입했었고, 11세기의 군사귀족들은 아나톨리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투르크 부족들을 이리저리 고용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800명의 프랑크 기사를 용병으로 구해 즉위 초반 여러 전투에서 써먹었고, 디라히온 공방전에서는 1만명 가까이의 투르크멘 기병들을 임대해 썼다.

그의 제위 초반에는 마니교 신자라고 불리던 보고밀파 이단의 잔당들과 페체네그족도 용병으로 들어왔으며, 레부니온 전투에서는 쿠만족도 수만 단위로 용병으로 싸웠다.

4차 십자군의 참극 이전까지는 대부분 부족, 동맹에게 임대해오는 식의 용병 고용을 선호했다면, 그 이후에는 카탈루냐 용병[18], 제노바 용병단으로 대표되는 용병단 고용이 주를 이룬다. 이는 병력부족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13~14세기부터 시작된 서유럽의 용병 붐을 따라간 수순도 있다. 물론 니케아 제국 시절에도 그 전과 마찬가지로 투르크멘이나 알란족, 쿠만족을 부족단위로 임대하는 식의 고용도 종종 있었다.

3.3.3. 아크리티(Akritai)

아나톨리아의 변경지역 방어병. 아주 예전의 리미타네이(Limitanei) 같은 역할. 종전 리미타네이와 직제나 인적 계승성은 없지만 역할은 확실히 같았다. 일종의 둔전병이다. 대체로 투창과 활로 무장한 경보병으로 트라페지토스 같은 경기병과 협력하여 상대의 경기병이 습격해오는 걸 막거나 동로마 정규군의 일부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10세기 경 타그마의 강화로 이들은 주목받지 못하면서 점점 질적으로 저하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제국의 동방 국경선이 위협받게 되면서 콤니노스 왕조는 이들을 재차 강화하였고 니케아 제국 시절에도 아나톨리아를 잘 방어했지만 미하일 8세 시절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규군의 일부로 흡수되어 그냥 경보병이 되었다.

3.3.4. 보조병

과거 로마 제국 말기에 편입되거나 침입해온 이민족 부대는 부족 단위로 제국의 보조병이 되어 활동했다.
이들은 용병이지만 점차 출신지에 따라 구분되는 로마군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4. 무장

로마 시절부터의 검, 창, 투창, 활을 사용하는 것은 같다. 다만, 복합궁, 기병용 철퇴, 곡도 등. 동방의 영향을 받아 유사하게 바뀌거나 받아들여진 무기체계도 있다. 특히 의복과 갑옷은 말기에 가면 튀르크나 이슬람과 더욱 비슷해지게 된다.

로마군의 글라디우스는 점점 길어져서 긴 길이의 스파타가 되었고 이 스파타들도 후기로 가면 아밍 소드의 영향을 받듯 크로스가드가 커지고 폼멜도 원형에 가깝게 바뀐다. 또한 페체네그, 불가르, 쿠만등 여러 유목민족과 접촉하면서 파라메리온(Paramerion)이라고 부르는 외날의 곡도도 사용하게 되었으며, 방패 또한 스쿠툼에서 점점 기동성을 중요시한 케트라투스나 스쿠톤(Skuton)으로 교체되었다.

카타프락토이나 바랑인 친위대, 루스의 용병들은 검이나 창말고도 도끼나 메이스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5. 전술

오랜 존속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이 사용한 전술은 다양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다양한 적을 접했기 때문에 상대에 따라 다른 전술을 쓰도록 했고 이를 교범화 했다는 부분이다.

제국군의 강점은 여러 병과가 함께 작전하는 혼성부대라는 점이고 조직력이 우수하다는 것에 있었다. 또 기병을 중시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발달상 전반에 두드러지는 특징인 데 동로마 기병은 정면돌격 보다는 가급적 기동력을 살려 우회해서 측면을 공격하도록 했다. 만약 상대가 더 중무장한 기병 전력을 갖는 경우에는 보병대 뒤에 기병을 숨겨서 상대 기병을 끌어낸 다음 보병이 갑자기 전열을 벌려서 그 틈을 통해 기병이 돌격하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레온 6세는 현왕이라는 별명대로 부대 전술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전술론을 작성해 군에 교육시켰다. 이 책은 동로마 제국이 만날 수 있는 적들을 나열하고 그들에 맞춘 전술을 구사하도록 하고 있다.

6. 해군

동로마 제국은 초창기부터 넓은 제국을 바다로부터 오는 해적들과 이민족의 침략에서 보호하기 위해 해군을 육성했다. 동로마 해군은 지중해를 모조리 장악한 이래 리부르니안을 포함한 중형 군선에 의존해 지중해를 보호했으며 이를 이어받은 동로마 해군은 드로몬이라는 보다 빠른 군선을 개발해 제해권을 틀어쥐었다.

7세기 경 이슬람 세력이 동지중해에서 동로마 제국에 도전해오자 해군을 강화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졌다. 이집트, 키레나이카 레반트에서의 후퇴로 인해 동지중해는 더 이상 로마의 호수가 아니었다. 이슬람 해군과 경쟁하면서 동로마 해군은 흩어진 제국 영토의 보호만이 아니라 바다에 바로 노출되어 있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해군이 필수적이었다.

비밀병기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면서 동로마 해군은 일단 7~8세기의 위기를 넘겼으며 10세기 경에는 이슬람 해군의 끈덕진 도전을 물리치고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회복할 듯 보였다. 하지만 11세기에 동로마 해군은 제노바와 베네치아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13세기 이후 한때 수백척에 달하던 제국 함선은 두자리 수로 줄어들었지만[20]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까지도 동로마 해군은 마르마라 해에서 보스포루스 해협까지는 제국을 방어할 수 있었다.

6.1. 군선

드로몬

6.2. 무기와 전술

중세 시대의 유럽 해군은 갤리선을 이용하고 있었고 구조상, 운영상 해안을 벗어난 장거리 항해는 군선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록상 드로몬들은 3일 이상 기항하지 않고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기술적 한계를 안고 있었기에 당시의 해군은 어느 쪽이건 해안을 따라 다수의 기지를 확보하고 보급을 마련하지 않으면 작전을 할 수 없었다. 이런 관계로 동로마 해군은 중기까지 갤리선에 무장병력을 잔뜩 탑승시켰다가 선상 백병전을 하는 전법을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중기 이후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빼앗긴 동로마 해군은 아무래도 수적인 열세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그리스의 불과 같이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들 뿐이었다. 갑판에 캘트롭이라는 송곳을 깔아두어 적병이 쉽게 백병전을 벌이는 걸 막고 원거리에서 그리스의 불을 담은 일종의 수류탄을 던지거나 화염방사기 형태로 적선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제국 해군은 한동안 이슬람 해군을 학살할 수 있었다.

7. 군기(軍旗)

여전히 로마군 시절 군기도 사용하였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부터 카이 로를 군기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파일:카이 로.svg파일:카이 로 다크.svg
영어 Chi Rho
문자
ΧΡΙΣΤΟΣ
ἐγὼ τὸ λφα καὶ τὸ ,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σχατος, ἡ ἀρχὴ καὶ τὸ τέλος - ΑΠΟΚΑΛΥΨΙΣ ΙΩΑΝΝΟΥ 22
그리스도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 요한 묵시록 22장 13절

카이 로 (/ˈkaɪ ˈroʊ/) 혹은 키로/히로(그리스어식 발음)는 기독교동로마 제국의 상징물이다.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상징물 중 하나이면서 가장 유명한 상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첫 두글자인 카이(Χ)와 로(Ρ)에 요한 묵시록의 알파(Α)와 오메가(Ω)를 합친 것이다. 그냥 Χ와 Ρ만 합쳐서 간략하게 쓰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내전 중에 군기로 사용하면서[21] 동로마에서 널리 쓰이는 상징물로 굳어졌다.

파일:라바룸.svg

이것이 카이 로를 사용한 최초의 로마군기다. 이후 라바룸 (λάβαρον)이란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정식 벡실룸(vexillum, 군기)의 하나가 되었다.[22]

8. 참고

참고

9. 관련 문서



[1] 특히 로마인 이야기로 로마사를 입문한 사람이라면 이 기병화(레기온)으로의 군제 개혁이 마치 로마군의 보병으로서의 장점을 전부 희석시켜 로마가 멸망하는 단초가 됐다...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의 단견일 뿐이다.[2] 코미타테네시스 라고도 한다.[3] 야만족의 침입으로 병력 소모가 가속화되자 부족한 코미타텐세스 부대를 보충하기 위해 리미타네이에서 병력을 끌어오고 부족한 리미타네이 인원은 다시 제국 내 떠돌이 야만인이나 빈민, 노예, 검투사 등을 끌어와서 보충하는 등을 통해 병력의 질이 점점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런 상황에서 동분서주하던 스틸리코가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암살당하는데, 이런 막장 행각에 반발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서로마 중앙군은 탈영 후 서고트족에게 붙어버리고, 설상가상 군대를 유지하기위한 주요 세수 수입원이었던 북아프리카 지역 중 핵심인 카르타고 지역이 반달족에게 넘어간다. 또 서로마 정세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흔들리면서 정규군 재건 가능성까지 완전히 망해버린다.[4] 소아시아(현 터키) 중남부 지역인 만큼 지도 위치로만 보면 그렇게 변방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험준한 산악지대였다.[5] 이 이사우리아인들의 지도자이자 새로운 친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의 지휘관이 결국 제위를 물려받아 바로 다음 황제가 된 제노이다.[6] 황제의 호위대도 포함.[7] 포에데라이랑 다르게 지휘관이 끌어들인 임시 부대[8] 이름은 거창하고 기병화도 우수하긴 하지만 이 시기의 아타나토이는 만지케르트 전투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흩어졌던 지방군 테마타를 모아놓고 둘씩 싸움붙여서 이긴 병사들을 아타나토이라 부르고 있는 것 뿐이었다.[9] 이때 창설된 대표 부대가 아르콘토풀레다.[10] 고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대략 그 범위 이내로 좁혀진 말기로 가면 제국 전체의 행정과 보급을 담당하게 된다.[11] 이때 해고된 동로마 해병들은 튀르크계 공국들에 가담하거나 바르바리 해적이 되는 등 막장스러운 일이 벌어진다.[12] 현 교육과정상 테마 제도는 소위 ‘군관구제’와 ‘둔전병제’로 나누어져 서술되기 때문에, 세계사를 배우는 수험생이라면 이쪽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13] 여기서 알아둘 점은 지역만 주둔하고 수세적 역할을 맡은 테마군과 후기 타그마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냥 지방에서 모았다는 것이지 지방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14] 예를 들어, 당시 역사가들은 에테리아, 아르콘토풀레 같은 단어보다는 그냥 '마케도니아 타그마' '트라키아 타그마'같이 부대명을 더 많이 언급했다.[15] 마누일 황제가 그들의 중기병을 프랑크인들 방식으로 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16] 찰갑, 사슬갑, 판금갑, 누비갑 등 그 당시의 갑옷이란 갑옷은 싸그리 챙겨입은 모습으로, 방호력은 당연히 뛰어났고 외형 또한 멋졌지만 그 안의 사람은 화덕에서 구워지는 빵마냥 엄청난 더위를 느끼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17] 카탈루냐 용병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고용한 카탈루냐 지역 출신의 용병들인데,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지만 제국에서 제때 돈을 주지 않은데다가 대장이 알란족 용병들에게 살해당하자 폭발, 칼리폴리 반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18] 그러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카탈루냐 용병들은 동로마에 오히려 막대한 피해만 입혔다...[19] 서유럽 사람을 통칭하는 표현[20] 안드로니코스 2세가 해군을 해산할 당시 가지고 있던 배가 80척이었다고 한다. 즉,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한 상태에서도 해군은 전성기 수준을 회복하진 못한 것이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자신의 해군 해산 결정을 후회하고 다시 재건해보려 했지만 딱 군선 10척 건조한 것이 최종 한계가 되어 제국 멸망 때까지 이어진다.[21] 밀비우스 다리 전투 도중 환상을 보고 해당 상징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22]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아 이러한 문장을 썼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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