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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6 14:43:29

태실



1. 개요2. 역사
2.1. 조선시대 이전2.2. 조선시대
3. 보존4. 조선 왕실의 태실
4.1. 세계유산 등재시도

1. 개요

胎室. 왕실에서 자손이 출생한 뒤 나오는 를 보관하는 장소를 말한다.

2. 역사

태반탯줄을 의미하는 태(胎)는 과거부터 태아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가지고 아이의 운명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줘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에서 대대로 보관해왔다. 태를 잘 보관했다가 좋은 땅에 묻으면 그 태의 주인도 좋은 기운을 받아 오래 살고 지혜로워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태반을 따로 보관 및 뭍는 풍습은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풍습이다.

오늘날 한국에 남아있는 태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2.1. 조선시대 이전

태를 귀하게 여겨 명당을 찾아 보관하는 것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어서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을 보면 "신라 진평왕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아내 만명이 아이를 밴 지 스무 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 태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었는데, 화하여 신(神)이 되었으므로 태령산이라 하였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두고 나라에서 봄가을에 향(香)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행하였다. 본조 태조 무인(戊寅)에 이르러 비로소 국제(國祭)를 정지하고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속칭 태산(胎山)이라 한다."라고 돼있다. 여기서 김유신의 태를 만노군(진천)의 높은 산에 묻었는데 그 산의 이름을 태령산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상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김유신의 태를 묻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부모가 태를 묻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6세기 중반에 이미 이러한 장태(藏胎) 문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대의 귀족층이나, 어쩌면 왕실에서도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김유신 태실은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사적 제414호)에 지정돼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다. 김유신 태실이 있는 산의 이름은 지금도 태령산(胎靈山)이고 이 산에는 태령산성(胎靈山城)이라는 작은 성곽도 있는데 태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담 역할로 산성을 쌓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같은 시기에 만든 방어용 산성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만들어진 시기는 비슷하니 연관성은 있을 수 있다.

신라시대를 지나 고려시대에도 다수의 왕들이 태실을 만들었는데 고려사 등에 따르면 왕의 태실을 만들면서 해당 지역이 승격되는 사례가 많이 기록돼있어 이를 참조하면 최소 15명의 왕이 태실을 만들었을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 태조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성부(開城府)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대흥동(大興洞)에 해인(海印), 취운(聚雲), 법림(法林), 태안(泰安), 운곡(雲谷) 등의 옛터가 있는데, 태안이 바로 고려 태조의 태실이라고 돼있다.

2.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왕실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태실을 관리하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왕이나 세자의 자녀가 태어나면 조선 전기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이, 임진왜란 이후 중후기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장태할 곳과 길일을 정해 보고를 올리는데 결정이 되면 그곳에 태실을 조성했다. 태실은 대체로 하삼도(충청,경상,전라)에 조성했는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찾다보니 멀리까지 간 것이다. 그 정도로 태를 좋은 곳에 묻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고 성종은 태실을 만들기 위해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 경기도에서도 찾으라고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성종과 중종만 경기도에 태실이 있고 그 전이나 그 이후나 다른 왕들은 하삼도, 또는 강원도에 태실을 만들었다.

왕이나 세자의 자녀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담아 산실(産室)의 미리 점지해 놓은 길방(吉房)에 보관해 두고 출산 사흘째 되는 날 태를 꺼낸 뒤 물과 술(항온주)로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태를 담을 항아리에 동전 한 닢을 넣고 그 위에 태를 올린 다음 기름종이를 덮고 비단으로 봉한다. 그런 다음 태항아리보다 더 큰 외항아리에 태항아리를 넣고 빈 공간에 솜을 채워 태항아리가 움직이지 않게 한 다음 태 주인의 이름과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기록해 길방에 보관하였다. 그 뒤 남자아기는 다섯 달 뒤, 여자아기는 석 달 안에 태항아리를 미리 확보한 명당으로 가져가 태실을 조성한 뒤 묻었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태를 모신다고 하여 안태(安胎)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안태사(安胎使)가 이 과정을 모두 책임졌다.

태실은 크게 아기태실(阿只胎室)과 가봉태실(加封胎室)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아기태실을 조성했다. 먼저 태실지의 땅을 파 석실을 조성한 뒤 돌로 만든 태함을 넣고 그 안에 태항아리와 태 주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기록한 태지석(胎誌石)을 넣은 뒤 봉하여 모래, 자갈, 회 등을 이용해 다져서 봉토(封土)했다. 그리고 그 위에 여러 석물(石物)을 조성하고 태실비를 세워 태 주인의 신분과 태어난 생년월일시, 태실을 조성한 날짜를 기록해두었다. 그러다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의 격을 높이기 위해 아기태실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추가로 설치하는 의식, 가봉(加封)을 하는데 이런 태실을 가봉태실이라고 한다. 가봉태실이 된다 해서 아기태실 때 만들었던 것을 없애진 않고 그대로 두었다.

태실을 조성할 명당은 보통 높고 정결하면서 둥그런 산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산을 따로 태봉(胎峰)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의 태실과 태봉의 산세를 따로 그림으로 그린 태봉도(胎封圖)도 제작했는데 현재 네 점(사도세자, 순조, 헌종, 순종)이 전해지며 2022년에 순종 외의 태봉도 세 점이 일괄 보물에 지정됐다.

태실을 쓸 태봉의 후보지는 평상시에 미리 찾아놔야 하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를, 중후기에는 관상감에서 관원을 지방에 파견해 찾게 했는데 이들은 찾아낸 땅을 1~3등급지로 구분했다. 왕족이어도 신분은 다 다르므로 1등급에는 원자원손, 2등급에는 대군공주, 3등급에는 옹주의 태를 묻었다. 그리고 왕의 태실은 300보, 대군과 공주는 200보, 왕자와 옹주는 100보까지 제한거리를 두어 화재를 막기 위한 금표(禁標) 지역으로 설정했는데 태실이 조성되면 이 안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은 금지되고, 민가나 농경지가 있을 경우 보상하고 철거하였다. 1등급의 경우 태실을 지키는 군인이 파견됐고 또는 인근에 사찰이 있으면 면세, 잡역 면제 등의 혜택을 주고 사찰의 승려들이 그 역할을 대신 하게 했다. 예를 들면 정종의 태실은 김천에 조성되었는데 이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을 직지사가 하였고 순조의 태실은 속리산에 조성되면서 법주사가 이런 일을 하였는데 이런 사찰들을 수호사찰이라 하였다. 이런 특수한 미션을 부여받은 사찰들은 왕실이 보호하므로 왕릉을 수호하는 능침사와 함께 숭유억불의 시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태실을 가봉할 때에는 많은 석물이 필요하고 이때 석재를 구하고 옮기는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통 흉년과 농번기는 피하고, 추수 이후에 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 갈수록 전국 곳곳에 너무 많은 태실이 있어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태실이 생기면서 땅을 뺏기기도 하고, 태실을 만들 때, 수리할 때 부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원래는 즉위하자마자 가봉했던 것을 조선 중후기로 가면 이런저런 이유로 기본 몇 년씩 미루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재위 기간 중에 가봉을 못하는 사례들도 나타나는데 현종은 1659년에 즉위했으나 재위 기간 동안 흉년이 심해 가봉을 계속 미루다 결국 타이밍을 놓쳐 현종이 사망하고 7년 뒤인 1681년(숙종 7년)에서야 가봉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왕이 영조였는데, 태실 하나를 만들기 위해 태봉을 하나씩 쓰고 주변 고을 전체가 동원되는 폐단을 막기 위해 1758년,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반포하면서 이제부터는 부모가 같으면 자녀들은 하나의 태봉에만 묻도록 하였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찼는지 7년 뒤인 1765년에는 모두 궁궐 후원에 묻도록 하였다.

그 뒤 정조도 영조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문효세자가 태어났을 때 태를 후원에 묻으려 했는데 왕위를 이어야 할 원자만큼은 관례대로 태봉을 찾아 태실을 조성해야 한다는 조정 대신들의 만류로 결국 예천 용문사 뒤에 태실을 조성했다. 이어 태어난 순조의 태실은 충청북도 보은에 조성했는데 정조는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당부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숙선옹주가 태어났을 때는 실제로 궁궐 후원에 태를 묻었다. 이와 별개로 정조는 1785년에 예천 명봉사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태실을 가봉했는데, 가봉은 원래 왕의 태실만 하는 것이어서 조선 전체를 봐도 세자의 태실을 가봉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정조 입장에서는 할아버지 영조에서 손자인 자신에게 정권이 단계를 건너뛰어 넘어왔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태실을 가봉함으로써 그 중간 단계를 만들려고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 정조는 정작 자신의 태실은 재위 기간내내 가봉하지 않았고 죽은 뒤 순조가 즉위하고서야 가봉했다.

보통 원자나 원손은 처음부터 왕이 될 것으로 예상해 1등급지에 태실을 만드므로 나중에 왕이 되면 그 자리에 그대로 가봉하면 되는데, 태어날 당시에는 왕권과 거리가 멀어 그런 자리에 태실을 만들지 않은 경우에는 즉위한 뒤에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가는 사례도 있다. 성종이 첫 사례인데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적차남으로 당시 서열 3위여서 사정이 그나마 괜찮았던 편이지만 그 뒤의 선조의 경우는 왕권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신분으로 태어난 경우라 일반인들처럼 살던 집에 태를 묻었다가 왕이 된 뒤에 길지를 찾아 태실을 새로 조성해 묻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혈통이 단절되고 꼬이면서 철종, 고종 같이 방계로서 계승한 왕들이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태실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조선 전기의 태조, 정종, 태종은 태어날 당시에는 조선이 없었으므로(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정립된 안태 문화가 없었다. 그래도 태를 묻는 문화는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건국한 뒤 태조는 함경도에 있던 자신의 태를 옮겨 태실로 조성할만한 곳을 찾았고 태조 이후 여러 세대를 거쳐가는 과정에서 태실지를 1~3등급으로 나누는 방식, 가봉할 때 태실을 호화롭게 꾸며 격을 높이는 등의 관행이 생겨났다. 조선 왕실의 안태 문화는 성종 때 정립됐는데 경국대전이 편찬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태실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지명에 태(胎)가 들어가는 곳은 과거 누군가의 태실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태봉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전국에 있는데 이 경우에도 그 산에는 누군가의 태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 보존

이렇게 전국 각지의 명당에 조성된 조선시대의 태실들은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를 겪는다. 조선총독부의 대한제국 황실 관리 기관인 이왕직에서 전국 각지에 흩어진 태실들을 관리하기 어려우니 한 곳에 모아 보존하겠다는 명분으로 1929년에 전국의 조선왕실 태실 54곳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을 파내 서삼릉에 모아 집단 태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태실뿐 아니라 왕자, 왕녀, 후궁 들의 분묘 45기도 한꺼번에 옮겼는데 이후 왕실 소유의 태실, 분묘 자리를 민간에 매각해버려 훼손은 물론이고 소유권 문제 등으로 지금까지도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28년 8월에 이왕직의 의례를 전담하는 전사(典祀) 이원승(李源昇)과 유해종(劉海鍾)은 전국 각지의 태실을 순방해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조선 왕실의 위세가 사라져 태실들이 관리되지 않은지 오래고 이미 여러 왕의 태실이 도굴당했으며(대표적으로 현종) 또 태실 자리가 명당이라고 해서 민간인의 시신이 암매장된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를 위해 한 곳에 모아야 한다는 명분은 그럴듯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태실을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왕직은 태실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만을 꺼내 봉상시(奉常寺)에 임시 보관했다가 1929년 4월, 서삼릉 태실 구역으로 옮겨 집단 태실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 1929년 3월 1일자 보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전국 명당지에 산재되어 있던 태실의 파괴, 손실방지를 위하여 태항아리 39개를 경성으로 옮겨와 현재 종로구 내수동의 지방경찰청 부근에 봉안실을 마련하고 임시 보관 후 추위가 물러가면 서삼릉으로 이전한다.'라고 돼있다.

그리고 상태가 좋은 태실 하나를 전시 목적으로 당시 박물관 역할을 하던 창경원으로 옮겼는데 바로 성종 태실이다. 이에 대해 당시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자 보도가 있는데 '태봉에 암장시(暗葬屍)가 뒤를 이어 발견됨을 따라 이왕직에서는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여 앞으로는 그 같은 일이 없게 하고자 신중히 협의한 결과 역대의 태봉 중에 가장 완전하며 가장 고귀하게 건설되었다는 광주(廣州)에 뫼신 성종의 태봉의 모든 설비를 그대로 옮겨다가 석물이고 건물이고 한결 같이 창덕궁 뒤 비원에다가 꾸며놓고 전문기사를 시켜 연구케 하는 중이라는데 새로이 건설되는 태봉은 성종태봉을 표본으로 경중히 뫼실 것이라 한다."라고 돼있다.

이왕직은 태실을 옮길 때 몇몇 태실의 태지석은 새로 만들어 넣었는데 태조, 정종, 태종, 문종, 순조, 헌종, 순종의 태지석이 이에 해당한다.[1] 초기 왕들의 경우 원래부터 태지석을 만들지 않았거나, 또는 이미 도굴돼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이때 만든 태지석들에는 생년월일과 함께 태실의 위치, '昭和四年(1929년)'이라는 이장년도가 기록돼있다.[2]

태실에서 꺼내져 정상적으로 옮겨진 태지석은 세종, 세조, 예종, 성종, 중종, 인종, 명종, 선조, 숙종, 영조, 사도세자(장조), 정조의 것이 있고 이 중에 세종과 선조의 것이 눈에 띈다. 세종 태지석에는 태주의 생년월일과 신분 대신 '세종대왕 태실 1601년 3월 21일 개장(改藏)'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세종 태실이 정유재란 중에 파괴되면서 1601년(선조 34년)에 수리를 할 때 태지석을 새로 제작한 날짜를 기록한 것이다. 선조의 태지석에는 '지금 주상전하의 태(今主上殿下胎) 1570년 10월 21일 묻음(藏)'이라고 돼있다. 선조는 아기태실이 없었으므로 즉위 후 가봉태실을 만들 때 그 날짜를 기록한 것이다.

한편 태항아리에서 나온 동전을 보면 시대상도 알 수 있다. 동전은 4종류가 나왔는데 조선통보(1423년~), 개원통보(開元通寶, 621년~), 만력통보(萬歷通寶, 1576~1620년), 숭정통보(崇禎通寶, 1628~1644년)가 그것이다. 예종, 성종, 인종, 명종을 포함한 일부 태실의 태항아리에서는 조선통보가 나왔고 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 헌종, 순종을 포함한 일부 태실의 태항아리에서는 개원통보가 나왔다. 나머지 두 동전은 왕자나 공주의 태항아리에서만 나왔다.

이렇게 태실에서 나와 서삼릉으로 옮겨진 태실 유물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교란된 것이 많으며 1996년에 서삼릉 태실을 발굴해 현재 태실 유물 대부분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4. 조선 왕실의 태실

아기태실은 워낙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봉태실과 일부 특이사항이 있는 태실만 정리했다. 원래 가봉태실은 왕으로 즉위한 후에 만드는 것이므로 조선왕실의 왕 27명, 즉 27개의 가봉태실이 있어야 하지만 정조와 헌종이 예외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와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태실을 가봉했기 때문에 2개가 더해져 총 29개의 가봉태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연산군, 인조, 효종의 가봉태실은 위치가 확인되지 않으며 철종과 고종은 아예 기록 자체도 없기 때문에 5개가 빠져 현재 총 24개의 가봉태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가봉태실들은 1929년에 서삼릉으로 한꺼번에 옮겨진 뒤 방치됐는데 그 자리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섰거나 석물이 옮겨지고 사라지는 등 원형이 훼손된 것이 많아 지금까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가봉태실은 10여개 남짓이다. 최근에는 조선왕실의 태실 문화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됨에 따라 훼손된 태실들도 점진적으로 꾸준히 복원해가고 있다.
중앙석물 분실 수십년 후 2024년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된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로 드러났다. 문서 여담 문단 참조.

4.1. 세계유산 등재시도

현재 '조선왕실의 태실'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관련 정보는 세계유산 잠정목록 참조. 2025년 4개 지자체가 세계유산 추진 위원회를 설치해 잠정목록에 올리는 것이 목표다.
[1] 연산군의 세 딸 이영수, 이복억, 이복합, 영조의 딸 화유옹주, 철종의 원자 이융준, 고종의 8남, 9남, 덕혜옹주,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구의 태지석도 새로 제작했다.[2] 원래는 태주의 생년월일과 신분, 태를 묻은 때가 기록된다.[3] 세종대왕태실석난간수개의궤,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견립시의궤[4] 백성들의 민가가 있는 곳[5]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 정원에 있다.[6] 2022년 8월 2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에서 보물로 승격[7] 2018년 3월 2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에서 보물로 승격[8] 1932년, 청주시 향토유적 제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