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08:38:08

태자비 왕씨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670000> 태조 후 혜종 후 [ruby(정종, ruby=定宗)] 후 광종 후
1
신혜왕후
2
장화왕후
3
신명왕후
4
신정왕후
5
신성왕후
6
정덕왕후
1
의화왕후
1
문공왕후
2
문성왕후
1
대목왕후
<rowcolor=#670000> 경종 후 성종 후 목종 후 현종 후
1
헌숙왕후
2
헌의왕후
3
헌애왕후
4
헌정왕후
1
문덕왕후
2
문화왕후
1
선정왕후
1
원정왕후
2
원화왕후
3
원성왕후
4
원혜왕후
5
원용왕후
6
원목왕후
7
원평왕후
<rowcolor=#670000> 덕종 후 [ruby(정종, ruby=靖宗)] 후 문종 후 순종 후
1
경성왕후
2
경목현비
3
효사왕후
1
용신왕후
2
용의왕후
3
용목왕후
1
인평왕후
2
인예왕후
1
정의왕후
2
선희왕후
<rowcolor=#670000> 선종 후 숙종 후 예종 후 인종 후
1
정신현비
2
사숙왕후
1
명의왕후
1
경화왕후
2
순덕왕후
3
문정왕후
연덕궁주
복창원주
1
공예왕후
2
선평왕후
<rowcolor=#670000> 의종 후 명종 후 신종 후 희종 후
1
장경왕후
2
장선왕후
1
의정왕후
1
선정왕후
태자비 왕씨
1
성평왕후
<rowcolor=#670000> 강종 후 고종 후 원종 후 충렬왕 비
1
사평왕후
2
원덕왕후
1
안혜왕후
1
정순왕후
경창궁주
1
제국대장공주
<rowcolor=#670000> 충선왕 비 충숙왕 비 충혜왕 비 공민왕 비
1
계국대장공주
1
복국장공주
2
조국장공주
3
경화공주
4
공원왕후
1
덕녕공주
2
희비 윤씨
1
노국대장공주
6
순정왕후
<rowcolor=#670000> 우왕 비 공양왕 비
근비 이씨
1
순비 노씨
}}}}}}}}}
<colbgcolor=#670000><colcolor=#ffd400>
고려 신종의 태자비
태자비 왕씨 | 太子妃 王氏
고려 희종의 폐비
폐비 왕씨 | 廢妃 王氏
출생 연대 미상
창화후 왕우의 사저
사망 연대 미상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태자비
? ~ 1197년 (신종 원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670000><colcolor=#f9d537> 본관 부계 개성 왕씨
모계 명주 김씨
부모 부친 창화후 왕우(昌化侯 王祐, ? ~ ?)
모친 수안궁주(壽安宮主, ? ~ 1199)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남매 - 수사공 왕현(守司空 王泫, ? ~ ?)
배우자 희종
}}}}}}}}}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고려 제21대 대왕 희종의 첫 부인.

2. 생애

희종이 일개 왕족이던 시절에 맞이한 아내로 보인다. 왕씨의 아버지는 제15대 숙종의 4대손 창화후 왕우였으며[1] 어머니는 명종의 딸 수안궁주였다. 희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태자비는 기본적으로 왕족이라 왕씨일테지만 외할머니의 성씨인 김씨[2]를 썼을 수도 있다. 희종이 태자가되자 함께 태자비가 되었으나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올리기 위해 강제로 내쳤다. 《고려사》 <최충헌 반역 열전>[원문]에 따르면 신종은 노골적으로 싫어했지만 최충수가 계속해서 을 떠보자 결국 그의 뜻대로 폐출 시켰다고 한다. 태자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었는데, 선정태후마저도 같이 울었고, 결국 궁중의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태자비는 평복을 입고 궁궐에서 쫓겨났고 이후 역사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4]

3. 대중매체에서

작중에 성평왕후는 실제 태자비 왕씨와 성평왕후의 행적을 합친 역할이다.[5]
[1]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긴 한데, 1180년 수안궁주가 아버지 명종과 5개월간 동거할 때 삼촌인 충희와 간통했으므로 실제로는 그의 자식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희종이 1181년생이므로 추정되는 그녀의 출생연도도 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2] 명주 김씨[원문] 권129, 열전 권제42, 반역(叛逆), 최충헌(崔忠獻) 최충헌이 최충수를 처단하여 권력을 독점하다이전에 태자(희종)가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을 비(妃)로 맞았는데, 이때에 와서 최충수(崔忠粹)가 자신의 딸을 태자에 바치려고 왕에게 굳이 청하니, 이 좋아하지 좋아하지 않았다. 태자비가 흐느껴 울고 목이 메이기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니, 왕후도 눈물을 흘렸으며 궁중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4] 비슷한 신세인 강종 후 사평왕후가 폐출된 후 강종이 즉위하자 추존된 것을 고려해보면 왕씨가 복권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폐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재가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5] 실제 최충수에 의해 폐출된 태자비는 최충수 사후에도 복위되진 못했고, 성평왕후는 그 후에 희종이 재혼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