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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9대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56년 2월 9일 | ||
무쓰국 이와테군 모토미야촌 (現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
사망 | 1921년 11월 4일 (향년 65세) | ||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도쿄역 (現 도쿄도 지요다구 도쿄역) | |||
재임기간 | 제19대 내각총리대신 |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1]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 양부 나카이 히로시(中井弘) | |
배우자 | 하라 사다코(原貞子) [2] (별거) 하라 아사(原浅) (사실혼) | ||
자녀 | 양자 하라 미츠구(原貢) | ||
학력 | 사법성법학교[3] (중퇴) |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다윗) | ||
정당 | |||
지역구 | 이와테 1구 | ||
의원 선수 | 8 (중) | ||
의원 대수 | 7, 8, 9, 10, 11, 12, 13, 14 | ||
약력 | 우편호치신문 번역기자 주조선국 일본전권공사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사장 중의원 의원 제11·16대 체신대신(내무대신 겸임) 제25·27·29대 내무대신 제3대 입헌정우회 총재 제22대 사법대신 제19대 내각총리대신 | ||
수훈 | 대훈위 국화대수장 (정2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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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19대 내각총리대신. 전형적인 정치인이자 문민관료로, 일본에서 중의원 제1당 대표로서 임명된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이다.이름인 다카시(敬)를 음독으로 읽은 하라 케이(ハラケイ)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애칭이며 본명은 하라 다카시다.[4] 호는 이츠잔(逸山, 일산)이며, 어렸을 적 이름은 켄지로(健次郎).
외무성 사무차관, 제25, 27, 29대 내무대신, 제22대 사법대신, 제11, 16대 체신대신, 입헌정우회 간사장과 총재를 역임했다. 기자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편집장과 사장을 각각 역임하기도 했으며[5], 1896년에는 주조선공사를 맡기도 했다. 우편호치신문 기자를 거쳐, 외무성에 입성, 이후 농상무대신에 올라 무츠 무네미츠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신뢰를 얻는 데에 성공한다. 또한 기자 시절부터 이노우에는 그의 선배로서 하라의 관료 시절 및 정계에 머무르던 시절 내내 그와 희로애락을 함께한 최측근이 된다.
외무대신 시절에는 외무관료로서 등용되었으나 얼마 후 퇴직하였고, 이후 입헌정우회가 발족하자 이에 참가하여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후인 1918년, 제19대 대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로 취임하며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공신들과 귀족들이 각종 요직을 꿰차고 있던 당시 일본 정계를 뒤엎고 최초로 등장한 평민 출신 총리대신으로 등극했다.
2. 생애
2.1. 정계에 입성하기까지
2.1.1. 유년기
1856년, 난부번의 하급 무사 가문의 일원이던 하라 나오하루(原直治)와 하라 리츠(原リ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시 이름은 켄지로(健次郎)였다. 13살이었던 1870년, 그는 모리오카번의 작은 학교였던 사쿠진칸(作人館)에 들어가 공부하다 이듬해 12월 도쿄로 상경하여, 유학을 가르치던 스승 나카 미치타카의 사숙에 들어가 공부했지만, 얼마 안 되어 아이즈번의 번사(藩士)였던 키시 토시오가 운영하는 사숙 고신주쿠(苟新塾)으로 옮긴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때 모리오카에 있던 고향 집에 도둑이 들어 학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었고, 하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름에 불운이 깃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형제 전원이 이름을 바꾸었고, 하라 역시 이때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다카시로 개명했다. 다카시라는 이름은 하라 본인이 주자학의 입문서라고도 불리는 근사록에서 따온 이름으로, '공경하다(敬う)'라는 의미를 이름에 새기자는 본인의 의지가 담겨있다.이후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할 곳을 찾아 전전하다 프랑스 선교사가 운영하는 식비와 숙박료 모두가 무료인 라틴 학교를 발견했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학교의 영향이었는지 이듬해인 1873년에는 종교를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다윗'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또한, 하라는 당시 요코하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부 펠릭스 에브라르의 지도로 한학과 가톨릭 서적을 읽으며 지식을 쌓아 나갔다. 이듬해부터는 그와 함께 포교 활동에 참가하여, 1년간 니가타에 체류하기도 했다. 참고로 나중에 총리대신이 되면서 일본 최초의 기독교도 총리대신 겸 전전 유일한 기독교도 총리대신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살이 된 하라는 신부 에브라르의 곁을 떠나, 다시 고향 모리오카에 돌아왔다. 운이 좋게도 당시 하라의 집안은 가세를 회복하여 그의 상경을 지원할 여유가 생겼고, 20살이 된 하라는 재차 상경할 계획을 밝힌다. 또한 이때 하라는 스스로 본인을 호적에서 분리하여 평민으로 독립했다. [6]
2.1.2. 몇 년 간의 기자생활
호적까지 분리하여 재차 상경한 하라는 난학(蘭学)[7]을 가르치던 미쓰쿠리 슈헤이가 운영하는 산사가쿠샤(三叉学舎)에서 공부하였고, 이윽고 1876년 사법성 법학교에 수험, 전체 응시자중 2등(차석)으로 합격한다. 재학중에도 101명 중 10등으로 성적은 좋았으나, 기숙사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학교로부터 징계 처분을 받았고, 이에 하라가 다시 항의하자 결국 퇴학처리를 당하게 된다. 당시 함께 이에 동참하여 함께 퇴학을 당한 멤버였던 구가 가쓰난[8], 후쿠모토 니치난[9] 등과는 한때 퇴학 이후 이곳저곳에서 꽤나 방종하게 살았지만, 다시 그는 나카에 조민[10]의 지도 아래 운영되던 불문학 강습소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민권파 신문에 와시야마 쇼후(鷲山樵夫)라는 필명으로 여러 글을 연재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같은 해 10월, 하라는 우편호치신문에 입사했다. 입사 당시에는 그의 외국어 실력을 토대로 번역만을 담당했었으나, 1880년 경부터는 각종 논설 집필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라의 주된 주장은 일본 내의 점진적인 민권의 확장을 요구하는 이른바 '관민조화론'이었으며, 이는 급전적인 민권론에는 비판적이었던 당대 난학자 출신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그러나, 제17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오쿠마 시게노부가 메이지 정부 주요 요직에서 전부 좌천되는 '메이지 40년 정변'의 발생으로 인해, 그의 주장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가운데, 오쿠마 파벌이 그가 속해 있던 우편호치신문사를 매수하였고, 같은 파벌이었던 야노 후미오(矢野文雄)를 사장으로 앉히고, 이누카이 쓰요시를 회사에 입사시키는 등, 입지를 넓히게 되었다. 이후, 하라의 상사였던 쿠리모토 조운(栗本鋤雲) 또한 퇴사하기에 이르러, 그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결국 25살이 되던 해인 1882년 1월, 하라도 퇴사를 결정한다.
퇴사 후 하라에게 관심을 품은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정치계에 오랫동안 몸 담고 있었던 이노우에는 마침 오사카에서 정부의 정책관련 홍보를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 적임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하라였다. 하라는 1882년 4월에 발간된 오사카의 정부 보도지 다이토일보(大東日報)의 그의 소개로 주필로 취임하여 높은 급료와 함께 전문 편집가로 활약하게 되었고, 오사카 지역 재계에서도 높은 입지를 갖추게 된다. 또한 그 직전에 발족한 입헌제정당에도 입당한다. 그러나, 얼마후 신문사의 집필노선을 둘러싸고 간부와 하라 사이에 큰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고, 7개월 뒤 그는 다시 다이토일보를 떠나면서 그의 기자 생활은 짧게 마무리된다.
2.1.3. 관료가 되다
몇 년간의 기자 생활을 마친 하라는 3주 후, 옛 친구의 소개로 외무성 하급 사무직에 취직, 뒤늦게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외무성에서는 프랑스어 구사자가 부족했기에, 하라는 당시 외무경[11]에 재임중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있어서도 귀중한 인재였던 것이다. 같은 해 7월에는, 태정관 문서국 업무를 겸임하며, 정부 기관지인 관보 창설에도 관여하게 된다. 또한 민권파가 우세했던 지방순회직으로 파견 제안을 받게 되어, 같은 해 10월부터는 주코쿠 지방 및 사이카이도[12] 시찰에 나서게 된다.그러나 그 해 11월, 프랑스와 청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정보수집을 위해 하라는 톈진 총영사로서 중국에 파견된다. 그 때 마침 사츠마번 출신의 공부성[13] 대서기관이었던 나카이 히로시(中井弘)의 딸 사다코(貞子)와 결혼하며 드디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재계를 압도하던 번벌 그룹의 일원에 합류하게 된다. 하라는 27살이 되던 해인 1884년, 청불전쟁에 관한 정보를 정부에 면밀히 보고하여 높은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듬해인 1885년에는 갑신정변의 영향으로 악화된 청일관계 재건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 사이의 교섭을 주도했다. 성공적인 조약 체결의 공을 인정받은 하라는 당시 총리였던 이토에게 높은 외교적 역량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뛰어난 정보수집능력과 분석능력을 각인시키는 성과를 얻는다.
이토의 귀국 후, 하라도 귀국을 명령받아 이번에는 파리 공사관 서기관으로의 취임을 명받는다. 1년 뒤인 1886년 1월에는 파리로 건너가 대외업무를 보지만, 본인의 어학능력이 아직 부족했다고 생각한 그는 1년간 공부할 기회를 달라며 공무 연기를 요청하였고 얼마 뒤 허락받는다. 그러나 당시 주 프랑스 대사였던 하치스카 모치아키(蜂須賀茂韶)는 프랑스 외에도 4개국의 공사를 겸임하고 있어 대단히 바빴기에, 하라는 공부는 물론, 사무작업과 공사 대리업무로서도 활동해야만 했다. 이듬해, 사무능력이 뛰어났던 다나카 후지마로(田中不二麿) 공사가 취임, 그는 2개국의 업무만을 맡고 있었기에, 하라의 부담은 경감되게 된다. 여유가 생긴 하라는 파리정치대학의 청강생 신분으로 국제사법을 공부하며, 시간이 될 때마다 일본에 있던 아내 사다코와 여행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889년 4월, 귀국한 하라는 농상무성[14] 참사관에 직임한다. 이노우에 가오루 역시 농상무대신이었는데, 이는 외무대신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하라에게 앙심을 품은 것을 안 이노우에가 그를 구제하고자 자신의 근무처로 전근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농상무성의 유력한 관료이자 귀족원 의관이었던 마에다 마사나(前田正名)와 대립하여, 생각한 대로 잘 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복수심을 품은 것인지 하라는 차기 농상무대신인 무츠 무네미츠의 취임 이후 대신비서관 겸 참사관에 오르자마자 마에다파를 대거 일소하기도 했다. 또한 도미오카 제사장 잉여품 매각 등에도 관여했다. 35살이 되던 해인 1892년엔 무츠의 임기가 끝났고, 하라도 그를 따라 퇴직했다. 외무성과 농상무성 시절 모두 권력을 이용해 본인의 입지를 유지했던 하라였던데다, 당시 이토 내각의 정당결성 행보를 보고 자신의 상사였던 무츠가 그 중심인물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이토와 마찬가지로 출세와 전도예측에 무척 명석한 사람이었다. 예상대로 그 해 7월, 제2차 이토내각이 출범하며 무츠가 외무대신에 발탁되었고, 하라도 외무성 통상국장으로 복귀했다. 하라는 영사재판권의 철폐와 외무성 내부개혁에 힘쓰며 전반적인 외무성 조직 개편과 일본의 본격적인 외교관 시험제 도입을 이끌었다.
이 기세를 몰아 1895년, 그의 나이 39살에 외무성 차관을 직임하였고, 이듬해 1896년 6월에는 무츠의 사퇴가 결정되자 주조선공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동년 10월에 오쿠마파의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출범하며 오쿠마가 외무대신에 올랐고, 오쿠마파와 정치적 노선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 하라는 곧바로 사직서를 내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1월에는 아내 사다코의 불륜 행각이 발각되었고, 고향 모리오카에서부터 상경한 어머니와 이후 그의 후처가 되는 스가노 아사(菅野浅)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라는 외무성 차관 시절인 1895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편집장으로 초빙되어, 연봉 5천엔(현재 가치로 한화 약 2억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불과 3년 뒤인 1898년 9월[15]에는 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신속성보다는 정확성을 중시한 그의 보도지침에 따라 성장한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은 큰 성공을 거두어, 연 2천만부 정도였던 판매실적이 연 2천9백만부까지 성장, 최종적으로는 약 3배인 6천만부까지 급성장하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는 정계로의 복귀 의지를 거두지 않았기에, 거의 매달마다 도쿄에 올라가 주요 정계인사들과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2.2. 본격적 정계 진출과 위기
1898년 6월, 그의 나이 42살이 되던 해에 이토 내각이 사임하자, 정권찬탈을 위한 정당결성에 주도했다. 하라는 이토와는 점차 관계가 소원해졌고, 오히려 반대 세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자주 함께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료와 재계 두 분야에 큰 권력을 쥐고 있엇던 하라를 이노우에 가오루가 높게 평가했고, 또 그가 사이온지 긴모치와도 친했던 점에서 비롯해 하라는 이토의 신당결성의 사무작업을 거의 다 본인이 맡기 시작한다.그 결과, 1900년 5월, 입헌정우회가 결성되었으나, 하라의 이름은 창립위원 명단에 적히지 못 했다. 그 이유는 그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사장직을 사임할 당시, 후계자였던 오쿠마 파벌의 야노 후미오에게 하라가 불만을 표하며, 사장직 승계안을 철회할 때까지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약 넉 달 뒤인 10월, 제4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음에도 여전히 그가 각료로 선출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그는 이토를 향해 '의지박약'이라며 비난한다. 하라는 자신을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의 사장직 사임과 동시에 입헌정우회 총무위원에 임명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온 인사가 알도록 공표하겠다며 사이온지를 협박한다. 끝내 그는 12월 19일, 총무위원 겸 간사장에 임명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체신대신에 임명되었으며, 하라는 이 때 철도부설법 개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귀족원의 저항으로 법안제출을 포기한다. 또한 재정건전화를 주장하는 와타나베 구니타케 대장대신과 대립하였고, 1901년 5월에는 총리였던 이토와 와타나베 대장대신 모두 사퇴한다. 비록 그가 소속된 내각은 붕괴했지만, 대장성의 수장이라는 거물급 인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점은 그의 큰 명성에 기여했다. 1901년에는 가쓰라 다로가 정권을 잡으며, 입헌정우회는 야당이 된다. 하라는 다시 여당복귀를 위해 분주히 노력했고 이토를 설득해 다시 정우회 총재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토가 해외로 떠나면서 큰 주축을 잃은 입헌정우회는 동요에 휩싸인다. 그러한 상황에서 당원이었던 마츠다 마사히사와 오자키 유키오가 총리 가쓰라와의 교섭에 실패하며, 당의 위신을 잃는 등 큰 위기를 맞이한다.
1902년에 개시된 제7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하라는 고향인 모리오카시에 출마하여, 전임 시장인 기요오카 히토시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03년에는 제8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모리오카현에 속한 모든 시가 합의하여 무투표당선을 계속하는 등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엄청난 위상을 뽐낸다. 그러나, 입헌정우회 내부에서는 이토와 그 밖의 당원들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하라와 마츠다는 이토를 지지하면서도 당의 분열을 막는 데에 주력하였지만, 역으로 이토로부터 사퇴 권유를 받는 등 곤란한 상태에 놓이고 만다. 이후 같은 해 7월, 이토가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자, 사이온지를 당의 후계 총재로 지명한 뒤 당을 떠난다.
2.2.1. 케이엔 시대와 사이온지 내각
하라가 당을 떠난 지 정확히 1년이 지나던 해인 1903년 7월, 입헌정우회는 사이온지 긴모치를 총재로 선출하며 하라와 마츠다 마사히사를 다시 주요 간부로 내세워 재도약을 꾀한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적 정치적 상황이 크게 뒤틀리게 된다. 결국 하라와 마츠다는 총무위원직을 사퇴했고, 오사카에서 은거를 시작한다. 은거 시절에 이들은 전후 정우회 내각 출범을 위해 가쓰라와 밀약을 맺으며 본격적인 정권 수립을 위한 준비를 개시하게 된다. 1905년, 하라는 무쓰의 차남이 양자로 들어간 후루카와광업[16] 부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내무대신 취임 직전까지 직무를 맡는다.온갖 개고생을 겪은 끝에 결국 1906년 1월,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이 출범한다. 하라는 이때 내무대신직을 역임하였으나,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각엔 가쓰라의 영향력이 짙게 남아있었기에,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을 순수한 입헌정우회 정권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하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경시총감[17]을 총리대신 직속이 아닌 내무대신 직속으로 변경하는 등의 경찰 개혁을 단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번벌 출신 관료나 지사들을 일거에 사퇴시켜 주요 관직에 젊은이들을 대거 등용시키는 등 성청 및 지방행정에 대해 큰 개혁을 단행하여 본인의 입지를 확고히 한다. 하라는 자신이 등용한 젊은 관료들과 활발히 의견을 교환하거나, 회비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등, 부정부패와 권력 독식을 위한 세력 갈등이 치열했던 그 당시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민주적 행정의 본보기를 보였다. 한편, 이러한 지방개혁의 핵심이었던 군(郡)제도의 폐지는 야마가타 파벌의 강한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본인이 추구하는 정책을 위해 반대 세력과 홀로 싸우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이는 곧 정치계에서 하라에 대한 지지를 크게 넓힐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08년 7월, 사이온지는 질병으로 인해 사의를 표명한다. 후임은 가쓰라가 맡았다. 하라는 사이온지에게 총리대신직을 계속 역임할 것을 권했지만, 사이온지는 거절했다. 온건파였던 사이온지 특성상 하라를 중심으로 단행된 일련의 내무성과 지방 개혁이 세력 균형적 정치를 지지하던 원로에게 지나친 행동으로 비칠 수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라는 이러한 사이온지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이토에게 접근해 사이온지에 대한 푸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정치에 다시금 큰 피로감을 느낀 하라는 8월부터 유럽과 미국으로 떠나 한동한 연락을 끊다가 이듬해 2월에 다시 귀국한다. 하라가 돌아온 그 해 4월, 가쓰라는 정우회에게 정권을 이양할 뜻을 암시하면서, 차기 총리는 사이온지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고, 이 때부터 입헌정우회가 대놓고 가쓰라 내각을 지원하는 형태인 정치 체제가 탄생하게 된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이른바 케이엔 시대[18]로 통칭한다.
2.2.2. 제2차 사이온지 내각
그렇게 1911년 8월 30일,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출범했다. 사이온지는 하라에게 대장성의 수장인 대장대신에 취임하여 달라고 요청했으나, 하라는 이를 거절하고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한 야마모토 타츠오[19]를 대신 추천했다. 하라가 대장대신직을 기피한 것은 예산삭감의 당사자이자, 당원들의 요구에 항시 응해야만 하는 위치가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풀이된다. 대신 하라는 내무대신에 올라 철도성[20] 총재를 겸임했다. 하라를 비롯한 각 성청의 대신들은 기반시설 정비를 위해 정부의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재계와 대장관료의 영향으로 재정건전화를 위해 긴축재정을 취해야 한다며 방침을 일거 전환한 야마모토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사이온지의 중재로 각 중앙성청의 추가 예산 요구는 수그러들었지만, 하라는 철도부설예산을 증액하지 않는다면 사직하는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며 사이온지와 심한 말싸움을 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야마모토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이온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하라에게 행정개혁을 위해 각 중앙성청의 조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했다. 하라는 여기에 불만을 품었지만, 내각 붕괴를 막기 위해 해당 요구에 응했다.약 2년 뒤인 1912년 5월에 실시된 제11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가 대승을 거두자, 행정개혁의 선도자 역이었던 하라의 존재는 운이 좋게도 더욱 커진다. 각종 언론에서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일도 자주 생기기 시작했다. 언론은 '사이온지 내각이 아니라 하라의 내각이 아니냐'며 그를 당대 일본 정계의 선배격이었던 마츠다 마사히사를 뛰어넘는 정우회의 으뜸이라고 평론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를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거세졌는데, 특히 와세다대학 계열의 입헌청년당 기관지 등에서는 "하라를 정계로부터 사장시켜야 한다(「原を政界から葬るべし」)"는 격정적인 문구를 내걸면서 비판했다.
하지만 2달 뒤인 7월 30일에 메이지 천황이 붕어했고, 그 뒤를 이어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다. 내각은 장례 준비로 한참 바빠졌지만, 육군은 2개사단 증설문제[21]를 구실로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의 책임론을 들었다. 그 배후에는 사쓰마 번의 번벌과 정계복귀를 노리고 있던 가쓰라의 책략이 있었다. 그러나 여론의 지지가 있다고 판단한 사이온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군부의 팽창을 막고자 끝까지 이를 거부했다. 이 때 정치계 원로이자 우에하라 편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역시 자신과 같은 파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정우회를 연계한 내각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당시 정우회와 대립하기를 꺼렸다. 따라서 야마가타를 필두로 한 원로회의는 사이온지를 회유하며, 총리직에 물러나면 육군대신 자리에 앉혀주겠다는 제의를 하지만 사이온지는 이를 거부, 내각총사퇴를 선택한다. 이로써 하라가 몸을 담구던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붕괴했다.
2.2.3. 다이쇼 정변, 제1차 야마모토 내각
사이온지 내각이 붕괴한 직후인 1912년 12월, 제3차 카츠라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카츠라의 본의와는 달리 카츠라를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수하로 보았던 여론의 큰 반발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카츠라는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신당 설립을 위한 준비와 동시에 정우회와의 연을 끊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신당인 동지회(同志会)에는 100명이 채 안 되는 인원만이 모였고, 정우회를 비롯한 호헌운동[22]에 대항하기 위해 카츠라는 다이쇼 천황에게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1913년 2월, 다이쇼 천황은 사이온지에 대해 사태의 수습을 요구하는 칙서를 발표한다. 사이온지는 천황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지만, 당원에 대해서는 행동의 자유를 인정한다. 하라와 마츠다 역시 천황의 뜻에 따르겠다는 방침을 내걸지만, 오자키 유키오를 중심으로 한 카츠라 내각 붕괴를 위한 뜻은 굽히지 않았다. 2월 11일, 내란이 일어날 것이 두려웠던 카츠라는 내각총사퇴를 결단했으나, 마침 그 무렵 사이온지가 조칙을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근신중에 있었기에, 하라를 비롯한 정우회 내각의 출범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사이온지와 사츠마 번벌은 같은 사츠마 번 출신의 거물이었던 야마모토 곤노효에 전 해군대신을 총리에 임명할 것을 제안하였고, 야마가타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야마모토는 본인의 수상 취임과 동시에 하라와 마츠다를 내각 각료에 임명하여 정우회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으나, 하라는 총리대신직, 외무대신직과 해군대신직 이외의 각료를 정우회에 입당시켜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이에 따라 다카하시 고레키요, 오쿠다 요시토, 야마모토 타츠오와 같은 각료들이 정우회에 일제히 입당하였고, 당원들로부터는 하라가 내무대신, 마츠다가 사법대신으로써 내각에 입성하는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사츠마 번과의 타협이라고 간주한 오자키 일당은 즉시 정우회를 탈당, 하라에 대한 비판도 커져갔다. 실제로 이 때 하라의 자택 앞에는 100명 가까운 군중이 모였으며, 그 중 정우회 소속 활동가들과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정권의 정당성과 유지의 위협을 느낀 야마모토 내각은 이러한 번족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여 여론의 지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6월에는 해군대신 현역무관제[23]를 개정하여, 예비역도 군부대신에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8월 1일에는 문관임용령을 개정하여, 대졸자 이상의 경우 문관고등시험 면제, 차관자격제한 면제를 선언했다. 하라는 당시 차관 외에도 국장과 현(縣) 등의 지사의 자격제한 역시 면제할 것을 요구했으나, 추밀원의 반대로 차관만으로 한정키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사실 추밀원의 이토 미요지[24]는 이마저도 철회시키려 했었고, 하라는 이 사실을 몰래 신문에 누설하여 그를 비판했다. 또한 야마모토가 강력하게 여기에 힘을 실어 강력하게 밀어붙였기에 성사된 것이었다. 야마모토의 정치력 권력에 의해 오랜 과제였던 행정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하라와 야마모토 내각은 마침내 여론의 지지를 되찾을 수 있게 된다. 또한 관료계에서도 정우회를 지지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현직 고급관료들이 대거 정우회에 입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정우회는 관료계에도 큰 영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2.3. 하라 내각
총리대신 시절 |
하라 내각은 일본에서 의원내각제가 제대로 기능한 첫 내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내각제에서는 각료 대부분이 국회 의원이어야 하는데 사실 그전의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하라 내각에서는 총리인 하라 본인부터 중의원 의원이었고, 그는 법으로 육군 / 해군 인사만이 임명될 수 있는 육군대신, 해군대신과 외무대신을 제외하고 모두 자신의 소속 정당인 입헌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을 임명했다.[25]
더불어 전례가 없는 정당 내각으로서 37개월 1주(약 3년 1개월)라는 굉장히 긴 기간을 대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직했다. 여러모로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양반이다. 당시 일본은 번벌과 원로들이 차례로 번갈아 총리를 하면서 순번만 바꾸는 정치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회에서 내각총리대신직을 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라는 번벌 출신도 아니었고 원로도 아니었음에도 야마가타 아리토모[26]나 사이온지 긴모치 등 내로라하는 원로들을 구워삶으면서 사망할 때까지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히 하라는 정당내각을 세우는 대신에 원로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노동운동을 가차 없이 때려잡던 그의 모습을 본 야마가타는 "하라는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일제 정치권 최대의 숙제 중 하나였던 문민통제를 일부나마 실현한 최초의 총리였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에 해군대신을 역임하던 가토 토모사부로가 워싱턴으로 출장을 가면서 임시로 '해군대신 사무관리'라는 직책을 겸임하여 해군성의 사무를 보았다. 이 직책은 후임 총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도 물려받아 이런 광경이 나타나기도 했다.[27]
식민지 정책에도 이름을 남겼다. 그의 임기 중간에 민족자결주의가 유행하고 조선에서 3.1 운동이 터진 것을 계기로 식민통치 방침을 온건하게 바꾸었는데, 그 일환으로 조선에서 이뤄진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고 대만에도 비슷한 정책 전환이 이뤄졌다. 또한 천황 직속이라는 명분으로 식민지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를 내각이 통제하고자 하여, 그때까지 군인만 총독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문민 총독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은 여러 내각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이권 문제로 문관 총독이 부임하지 못했으나, 대만에는 실제로 문관 총독이 부임했다. 남양장관, 가라후토청장 등 기타 식민지 수장들도 하라 내각에 들어서 정우회 출신들로 대거 물갈이 되었다.
그 밖에, 교통 운수시책의 확충을 내세우며 내각철도원을 철도성으로 승격하기도 하는 등 철도 부설에 각별히 신경을 쓴 총리이다. 자신의 고향인 이와테현에 철도를 건설하려고 국회에서 논의를 하고 있을 때 한 의원이 "그런 산골에 철도라니, 원숭이라도 태울 셈이요?"라고 하자 하라는 "철도 규칙에는 원숭이를 태워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라며 위트있게 대처했다고 한다. 그 철도가 현재의 야마다선. 한편 하라는 철도 시설 개선보다 노선 확장을 중시하는 건주개종 원칙을 내세웠던 탓에 고토 신페이 등 개궤론자들의 표준궤 개궤안을 번번히 좌절시켰다. 이로 인해 일본의 철도는 대부분 1067mm의 협궤로 지어지고 있다.
2.4. 암살
하지만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절인 1921년 11월 4일, 교토에서 열리는 입헌정우회 교토지부 대회에 참가하러 가던 도중 도쿄역에서 나카오카 곤이치(1903년 ~ 1980년)라는 청년의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 정치 스타일에 불만을 품은 군부의 소행이 아니라 단독 범행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실제 사유는 극우 단체의 지시가 있었던 것과 더불어 당시 부유층과 그들과 결탁한 정계에 대한 개인적 증오의 결합이 일으킨 폭발로 보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이후 나카오카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지만 사건 당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34년에 사면되었다.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1980년까지 조용히 천수를 누렸다.
3. 평가
4. 여담
- 개인적 성격은 호탕하고 자립심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당대 유행하던 잡지인 "중앙공론"에 따르면 '매사에 임기응변이 강하고, 융통을 악으로 보지 않으며, 성공 거두는 것을 우선시로 뒀던 사람'이라고 한다.#
- 19살 때 처음 쓴 일기를 죽을 때까지 매일 썼다고한다. 게다가 본인이 죽는 순간조차 메모 형식으로 일기를 써서 남겼다고. 그의 일기는 메이지 및 다이쇼 시대의 일본 정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 하라가 30대에 접어들던 파리 외교관 시절부터 백발이 진행돼 처음엔 크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골상학을 전공한 프랑스 육군 대위로부터 '백발은 많은 사람의 수장이 되어 출세할 수 있는 징조'라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론 총리대신직에 올랐으니, 틀리지 않은 셈.
- 하라는 1873년 4월에 세례를 받은 천주교도이자 전전 총리대신 중 유일한 기독교도였지만[28], 생전 하라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언급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2005년, 유품 중 하나로 칼날을 닫으면 손잡이 부분에 십자가가 나타나는 가위를 지니고 있던 것이 확인된 바 있다.
- 신장이 168cm로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꽤 큰 체격을 자랑했었고, 패션에도 남다른 감각을 보였다. 이 때문인지 미모로 유명했던 첫 부인 사다코와 함께 파리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고 한다.
[1] 재임 중 피살[2] 부인의 불륜으로 별거. 이혼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3] 나중에 제국대학 법학부에 통합되었다. 그리고 이 제국대학이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고, 이는 현재 도쿄대학 법학부에 해당한다.[4] 하라 다카시의 고향인 모리오카에서는 주민들이 하라 다카시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친근하게 하라 케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하라 다카시의 유물과 사료를 보존, 전시한 모리오카 소재의 기념관의 이름은 하라 케이 기념관이다.[5] 일본 4대 신문사 중 하나인 마이니치 신문의 오사카 지부였다. 현재는 마이니치신문 단일 회사로 통합되었다.[6] 그 이유로써, 비록 정확한 사실은 아니나, 당시엔 독립해서 새로 분가를 만들면 군면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래서 그는 메이지 시대부터 개시된 징병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덕분에 훗날 그가 출세하여 정계에 입성한 후에도 결코 군부와 엮일 일이 없었다는 주장이다.[7] 네덜란드에서 유래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18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근대화와 함께 법학, 의학, 건축학 등 수많은 학문의 발전에 앞섰다. 여기에 대표되는 인물이 바로 오늘날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설립자이자 교육자, 일본 1만엔권 지폐 도안의 인물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키치다.[8] 陸羯南(1857-1907), 일본 문학의 대가 마사오카 시키를 가르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평론가이자 일본신문(日本新聞)의 사장이었다[9] 福本日南(1857-1921), 중의원 의원이자, 일본의 원로 저널리스트다. 現 니시닛폰 신문의 전신인 규슈일보(九州日報) 사장을 역임했다.[10] 中江兆民(1847-1901), 이타가키 다이스케로 대표되는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자 중 한 명이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일본에 처음으로 전파했다는 점에서 동양의 루소라고도 불린다.[11] 당시에는 외무성의 수장이 '외무대신'이 아닌 '외무경(卿)'이었다. 메이지 초기의 정치구조인 태정관제에서 비롯된 관직의 이름으로, 메이지 중기 내각제 도입 이후부터 현재의 이름인 외무대신(또는 외무상)으로 바뀌게 된다.[12] 중세~근대(메이지 시대)까지 쓰이던 일본의 지역구분 단위인 고키시치도 중 하나다. 현재 일본의 규슈 지역과 그 주변의 부속도서를 이른다.[13] 현재의 국토교통성 및 경제산업성에 해당[14] 現 농림수산성과 경제산업성의 전신.[15] 그가 귀국 후 관료직을 내려놓은 때였다[16] 古河鉱業, 도쿄도 지요다구 오테마치에 위치한 일본의 비철 및 산업기계 분야 대기업으로, 현재 도쿄증권거래소 제1부에 상장되어 있다. 현재 사명은 후루카와기계금속(古河機械金属).[17] 일본 경시청의 최고직급이다.[18] 桂園時代. 가쓰라(桂)의 음독인 케이(けい)와 사이온지(西園寺)의 한자 園의 다른 발음(엔, えん)에서 각각 따온 것. 일본에서 특정시대나 사건을 명명할 때 이런식의 형태는 자주 등장한다.[19] 山本達雄(1856-1947), 메이지 시대 후기부터 전전 쇼와 시대를 이끌던 일본의 은행가이자 정치인이다. 43살의 나이에 제5대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했고, 이후 일본권업은행(日本勧業銀行) 총재, 대장대신, 농상무대신, 내무대신 (사이토 내각), 정우본당 총재와 입헌민정당 최고고문직을 역임했다.[20] 당시에는 철도성이 정식으로 설치된 중앙성청이 아닌 내각 직속 조직이라서 정식 명칭은 내각철도원(內閣鐵道院)이었다.[21] 러일전쟁 직후인 다이쇼 시대 초기, 일본에서 발생한 육군 전력의 확장을 둘러싸고 발생한 정치적 갈등이었다. 육군은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육군의 확장요구를 전면 거부했다는 사실을 구실로, 육군은 우에하라 유사쿠 당시 육군대신을 후임자 지명 없이 사임시키며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22] 다이쇼 시대에 발생한 입헌정치를 수호하기 위한 운동이다. 오랜 번벌 정치에 반발하던 당시 혁신계열 정치인들이 내건 '번족타파, 헌정옹호(藩族打破、憲政擁護)'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된다.[23] 군부대신(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의 취임자격을 현역 대장 및 중장에 한정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문관은 물론 예비역, 후비역, 퇴역군인들에게도 취임자격이 없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1913년부터 1936년 사이에는 예비역과 후비역 장관급 인사에게도 취임자격이 부여되었다. 이를 군부대신무관제라고 한다.[24] 伊東巳代治(1857-1934),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의 귀족. 작위는 종1위 훈1등 백작이었으며, 관료이자 정치인이었다.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의 성 이토(伊藤)와는 다른 성이다.[25] 내각제 국가에서도 대부분 국회의원이 아닌 자를 각료로 임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수가 엄격히 제한되거나 요직에는 임명하지 못하는 등의 제한이 있다. 현대 일본에서 각료로 임명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아닌 자는 총 각료 수의 절반으로 제한되며, 특별한 사항이 아닌 이상 각료의 대부분은 국회의원으로 채워진다.[26] 그렇다고 하라 본인 또한 야마가타를 별로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야마가타는 정계의 영향력이 강해 하라 또한 아리토모에게 중대사를 건의할 정도로 상왕 노릇을 하고 있었고, 야마가타가 하라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면 하라는 춘신장의 뒷방 늙은이, 돈만 밝히는 영감탱이라고 뒤에서 흉을 본 이력이 있다.[27] 해군대신 사무관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내각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본인에게 제출한 서류다.[28] 전후에는 요시다 시게루(천주교), 가타야마 데쓰(개신교), 하토야마 이치로(감리회), 오히라 마사요시(성공회), 아소 다로(가톨릭), 하토야마 유키오(감리회), 이시바 시게루(일본기독교단)에 이르기까지, 현재 기준 7명의 기독교도 총리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