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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역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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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1962 · 2006 · 2016
리그 우승
(7회)
1962 · 1981 · 2006 · 2007 · 2009 · 2012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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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선수 경력 키요미야 코타로/선수 경력
경기장 1군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 2군 카마가야 파이터즈 스타디움
과거 고라쿠엔 구장 · 메이지진구 야구장 · 도쿄 돔 · 삿포로 돔
지방 구장 스타루힌 구장(아사히카와) · 오비히로노모리 야구장(오비히로) · 쿠시로 시민구장(쿠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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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중계 채널 파일:가오라스포츠 로고.png
주요 인물 구단주 이카와 노부히사 · 단장 키다 마사오 · 감독 신조 츠요시 · 선수회장 마츠모토 고 · 주장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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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영구결번3. 출신 선수들
3.1. 투수3.2. 포수3.3. 내야수3.4. 외야수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1. 개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역대 선수들에 대해 서술한 문서. 현역 선수단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선수단 항목 참고.

2. 영구결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영구결번
No. 100
오코소 요시노리

특이하게도 첫 번째 영구결번이 구단 오너. 이 사람은 파이터즈의 現 모기업인 닛폰햄의 창업자이자 닛폰햄 시대의 첫 오너다. 2009년 일본 야구전당에 입성했는데 이것을 기념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 오사와 케이지 감독의 번호였던 86번은 오사와의 퇴임 이후 등번호를 선택한 선수나 코치가 없어 사실상 영구결번 상태이다.

다만 이 이상의 영구결번은 없을 듯. 구단 측에서 선수들의 영구결번에 대해선 거의 영구적으로 제정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3. 출신 선수들

3.1. 투수

3.2. 포수

3.3. 내야수

3.4. 외야수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1] 그나마 1975년에는 3완봉승을 포함한 개막 6연승을 기록했으나 그 이후 7연패하며 여름에 2군으로 올라갔고 2군(이스턴 리그)에서 최우수 방어율(0.69)을 획득했다.[2] 이 해 마시바의 10할 승률은전후 최초의 10할 승률로, 2013년의 다나카 마사히로 이전까지 양대리그제 시행 이후 유일한 10할 승률이었다. 당연히 NPB 최고기록.[3] 원래 고라쿠엔 구장은 천연잔디를 사용했으나 1976년부터 인조잔디로 바꿔 폐장 때까지 계속 인조잔디를 유지해 왔다. 참고로 이 날 노히트 노런은 고라쿠엔 구장 최후의 노히트 노런이기도 했다.[4] 그 해 시즌에 FA권을 취득했는데, 성적 부진 탓에 본인이 FA선언을 고사했다. 그러나 구단 측에서 "FA선언을 하지 않겠다면 트레이드 요원 대상에 넣겠다"라는 사실상의 전력외통보를 선언하면서 결국 세이부로 트레이드되었다.[5]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 된다.[6] 2011년 요코하마를 거쳐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뛴 후 은퇴했다.[7] 외모만 봐도 다르빗슈를 닮았다.[8] 2018년에 1군 기록이 없이 2019년 2년만에 복귀전을 치렀는데, 이날 불륜왕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조기강판. 결국 이 경기가 일본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참고로 상대팀 롯데의 선발 사사키 치하야 역시 이날 2년 만의 복귀전을 치렀는데 이쪽은 QS+을 찍고 승리투수행(…). 참고로 사사키도 1라운더다.[9] 다만 대학 시절 성적은 도쿄대가 아녀도 지명이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준수했다. 도쿄대 화제몰이로 뽑힌 건 아니다. 4학년 시즌을 엄청나게 조져서 7순위로 떨어진 거지 3학년 때 페이스는 오히려 지명은 당연하고 상위 라운드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쿄대 야구부는 당연히 선수들의 수비도 바닥이라서 땅볼 타구가 안타가 되는 일이 더 많은데 미야다이의 성적은 도쿄대가 아니라 다른 야구 명문대학 소속이어도 프로 지명을 노릴 만큼 좋았다.[10] 고졸 1라운더 유망주였다. 기대치가 어마어마했으나 기대치만큼 해준 해는 딱 한 해.[11] 결국 이적 1년만에 세이부에서 방출당했다. 이후 은퇴한 듯.[12] 김하성의 동료가 되었다.[13] 일본은 한국과 달리 대학에 직행 하는 선수들이 꽤 많다. 일본은 고졸 출신보단 대졸이나 사회인 출신을 많이 선호해서 구단 OB인 다르빗슈 유처럼 정말 잘하는 선수가 아닌 이상 좋은 대접을 받기 어렵다.[14] 지금이야 혹사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지만 당시엔 미화되어 나쁜 인식이 없어 라이벌인 다나카도 고교시절 미친듯이 굴려졌다. 사이토는 대학야구에서 이걸 한번 더 경험했으니...[15] 2009년 일본시리즈 당시 타석에서 표정이 썩어있던 마지막 타자가 바로 이 타카하시 신지 였다.[16] BECK타나카 유키오의 이름은 이 선수에서 따왔다고 한다.[17] 부모님 두 분 모두 으로 세상을 떠났고 형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가족력이 의심된다.[18] 이듬해 곧바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센트럴리그 MVP가 되었다. 즉, 양대리그 타자 최초의 MVP. 투수 최초는 에나츠 유타카이다.[19] 같은 팀의 포수 츠루오카 신야가 주로 백업이었던 것과 달리 다나카는 이때 힐만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주전 2루수로 출장했다. 메이저리그까지 합쳐도 06년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 선수는 다르빗슈 유가 더해지는 것 외에는 없다. 엄밀히 따지면 이토이 요시오도 2006년 닛폰햄 소속이기는 했지만 그 해에 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하느라 일본시리즈를 포함한 1군 경기에는 전혀 출장하지 않았다.[20] 메이저리그에서도 잠깐 뛰었다. 정말 메이저리거였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잠깐 뛰어서 그렇지.15경기 나왔다. 황재균보다도 메이저리그 생활이 짧다[21] MLB에 윌리 메이스 단 한명만이 보유 중[22] 성인 요는 일본식 음독이고 이름의 다이칸은 본인 이름의 중국어식 발음인 다이강을 일본화한 독음이다. 참고로 프로 입단하고 나서 개명을 했는데 개명하기 전 드래프트에 지명될 당시의 이름은 일본식 중국음독으로 양 촌소(楊 仲壽, 한국어 표기법으로 옮기면 양 종셔우)라고 표기 했었다. 형인 양야오쉰도 일본에서 뛰었었다.[23] 이구치 카즈토모라는 후배 투수를 단순히 괴롭힌 수준이 아니라 아예 줘패서 뇌진탕까지 오게됐다.[24] 어느 정도냐면 일본 인터넷 상의 반응은 "야구 잘하는 연예인(野球の上手い芸人)" 취급이다.[25] 만약 좋은 성적을 남겼다면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야구 잘하는 연예인 취급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닛폰햄 팬들은 예능에서 활약하던 선수 시절 스기야를 보고 "시합에서 좀 쳐라(シアイデウテヤ)"라 하기도 했다.[26] 2019년 5월 23일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기록.[27] 이승엽이 요미우리 시절 먹튀로 군림화 할때 이승엽과 타카하시 요시노부 그리고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를 밀어낼 수 있다는 그 신인이 바로 이 오타 였다.[28] 고질적으로 선구안이 나빠 타율 2할 중후반을 쳐도 OPS는 단 한번도 9를 넘긴적이 없다. 이런 막장 선구안에 타격까지 망하니 성적이 나빠질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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