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12-20 22:57:04

신경제정책

NEP에서 넘어옴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if 넘어옴1 != null
'''네프'''{{{#!if 넘어옴2 == null
{{{#!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2 != null
, ''''''{{{#!if 넘어옴3 == null
{{{#!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3 != null
, ''''''{{{#!if 넘어옴4 == null
{{{#!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4 != null
, ''''''{{{#!if 넘어옴5 == null
{{{#!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5 != null
, ''''''{{{#!if 넘어옴6 == null
{{{#!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6 != null
, ''''''{{{#!if 넘어옴7 == null
{{{#!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7 != null
, ''''''{{{#!if 넘어옴8 == null
{{{#!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8 != null
, ''''''{{{#!if 넘어옴9 == null
{{{#!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9 != null
, ''''''{{{#!if 넘어옴10 == null
{{{#!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10 != null
, ''''''{{{#!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D7A3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if 설명 == null && 리스트 == null
{{{#!if 설명1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if 설명1 != null
{{{#!html 싱가포르의 발로란트 프로게이머}}}에 대한 내용은 [[마커스 탄]] 문서{{{#!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를}}}{{{#!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마커스 탄#s-|]]번 문단을}}}{{{#!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마커스 탄#|]] 부분을}}}}}}{{{#!if 설명2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를}}}{{{#!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3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를}}}{{{#!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4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를}}}{{{#!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5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를}}}{{{#!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6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를}}}{{{#!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7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를}}}{{{#!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8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를}}}{{{#!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9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를}}}{{{#!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10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를}}}{{{#!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 부분을}}}}}}
#!if 설명 == null
{{{#!if 리스트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if 리스트 != null
{{{#!if 문서명1 != null
 * {{{#!if 설명1 != null
싱가포르의 발로란트 프로게이머: }}}[[마커스 탄]] {{{#!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마커스 탄#s-|]]번 문단}}}{{{#!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마커스 탄#|]] 부분}}}}}}{{{#!if 문서명2 != null
 * {{{#!if 설명2 != null
: }}}[[]] {{{#!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3 != null
 * {{{#!if 설명3 != null
: }}}[[]] {{{#!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4 != null
 * {{{#!if 설명4 != null
: }}}[[]] {{{#!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5 != null
 * {{{#!if 설명5 != null
: }}}[[]] {{{#!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6 != null
 * {{{#!if 설명6 != null
: }}}[[]] {{{#!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7 != null
 * {{{#!if 설명7 != null
: }}}[[]] {{{#!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8 != null
 * {{{#!if 설명8 != null
: }}}[[]] {{{#!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9 != null
 * {{{#!if 설명9 != null
: }}}[[]] {{{#!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10 != null
 * {{{#!if 설명10 != null
: }}}[[]] {{{#!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 부분}}}}}}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CC0000,#CC0000> 파일:레닌_투명.svg블라디미르 레닌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CC0000>생애<colbgcolor=#fff,#1f2023>생애 및 정치 경력
사상 레닌주의(공산주의)
가족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 배우자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사건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신경제정책
관련 정치인 니콜라이 2세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레프 트로츠키 · 이오시프 스탈린
기타 볼셰비키 · 레닌 영묘 · 레닌그라드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파일:레닌_노랑t.png 레닌주의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cd0000,#cd0000><colcolor=#ffd700,#ffd700> 상징 <colcolor=#000,#fff>국기 · 국장 · 국호 · 노동자 마르세예즈 · 인터내셔널가 · 소련 국가 · 낫과 망치 · 붉은 별
정치 정치 전반 · 소련 공산당 · 소련 공산당대회 · 크렘린 · 레닌 영묘 · 크렘린 벽 묘지 · 소련 최고회의 · 소련 장관회의 · 헌법
블라디미르 레닌 · 이오시프 스탈린 · 니키타 흐루쇼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유리 안드로포프 · 콘스탄틴 체르넨코 ·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고지도자(서기장) · 국가수반 · 대통령 · 정부 전용기
행정 구성국 틀 · 구성국 역사 틀
군사 소련군(장비 · 소련 육군 · 소련 해군 · 소련 공군 · 소련 방공군 · 소련 전략로켓군) · 스타프카 · 소련 국방부 · 소련 국방장관 · 스페츠나츠 · 정치장교 · 바르샤바 조약 기구 · 열병식
소련의 핵개발(RDS-1 · 차르 봄바 · 세미팔라틴스크) · 소련군 vs 미군 · 소련군 vs 자위대 · 대외전쟁
치안 체카 · NKVD · KGB · 밀리치야
경제 경제 · 경제사 · 소련 루블 · · 콤비나트 · 콜호스와 솝호스 · 5개년 계획
인문 민족 · 언어 · 종교 · 교통
역사 역사 ·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신경제정책 · 우크라이나 대기근 · 대숙청 · 독소 폴란드 점령(카틴 학살) · 대조국전쟁 · 소련-일본 전쟁 · 냉전(6.25 전쟁 · 스푸트니크 쇼크 · 쿠바 미사일 위기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1980 모스크바 올림픽)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 소련 존속 여부 국민투표 · 8월 쿠데타 · 소련 붕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외교 외교 · 미소관계 · 소련-유고슬라비아 관계(티토-스탈린 결별) · 중소관계(중국-소련 국경분쟁 · 중소결렬) · 나치 독일-소련 관계(독소 불가침조약) · 독러관계 · 북소관계 · 한소관계 · 소련-일본 관계 · 소련-몽골 관계 · 소련-대만 관계 · 친소 · 소비에트 제국 · 브레즈네프 독트린 · 인테르코스모스
문화 문화 · 사회주의 리얼리즘 · 사미즈다트 · 교육 · 요리 · 공휴일
막심 고리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미하일 숄로호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스트루가츠키 형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 아람 하차투리안
알렉산드르 갈리치 ·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 불라트 오쿠자바 ·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 마시나 브레메니 · 아크바리움 · 미하일 나우멘코 · 키노/빅토르 초이 · DDT(밴드) · 코롤 이 슈트 · 섹토르 가자 · 아우크치온 ·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 크루이스 · 아리야 · 예고르 레토프 · 얀카 댜길레바 · 드미트리 셀리바노프 · 초르니 루키치 · 즈부키 무 · 크루그
과학 <colbgcolor=#cd0000,#cd0000><colcolor=#ffd700,#ffd700> 우주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 · 세르게이 코롤료프 ·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 유리 가가린 ·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 알렉세이 레오노프
스푸트니크 · 소유즈 우주선 · 보스토크 계획 · 보스호드 계획 · 살류트 프로그램 · 미르 우주정거장
기초 소련의 기초과학 · 토카막 · 러더포듐 · 더브늄 · 시보귬 · 보륨
분류:소련의 과학자 · 표트르 카피차 · 레프 란다우 · 이고르 탐 · 그리고리 마르굴리스 · 안드레이 사하로프 · 파벨 체렌코프
스테클로프 수학 연구원 · 쿠르차토프 연구원 · 레베데프 물리 연구소 · 란다우 이론물리학 연구원
}}}}}}}}} ||

1. 개요2. 배경
2.1. 전시 공산주의 체제 실시2.2.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불만 증가, 그리고 막대한 부작용2.3. 크론슈타트 반란
3. 상세 내용과 특징4. 문제점5. 같이 보기

1. 개요

新經濟政策 / 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1] (New Economic Policy)
Социализм бедняков — это паршивый социализм


러시아 내전 말기인 1921년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시행된 소련의 경제정책. 시장경제의 부분적인 허용을 골자로 한다. 신경제정책이 언제 끝난 것으로 봐야 하는지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정부 주도의 급격한 공업화를 시도한 5개년 계획이 실행된 1928~1929년에[2] 끝난 것으로 본다.

2. 배경

2.1. 전시 공산주의 체제 실시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 내전은, 볼셰비키에게는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서 그들의 이상향이었던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 여부가 걸린, 이른바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타국의 군사지원[3]을 등에 업은 백군 이외에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핀란드에서 활동하던 분리주의자들, 네스토르 마흐노가 이끄는 아나키스트 민병대, 그리고 빈번히 발생하는 민중 반란과 계속해서 맞서 싸워야 했다. 이러한 다방면의 위협 속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위시로 한 볼셰비키 지도부는 중앙집중적이고 강압적인 경제 체제를 통해 중대한 전시상황 속에서 주요 자원을 통제하고 물자를 확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내전에서의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이다.

전시 공산주의는 단순한 위기 대응 조치가 아니라, 일부 볼셰비키 인사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즉각적인 이행을 위한 혁명단계의 가속화"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 정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볼셰비키 통제 하에 있는 지역들의 산업에 대한 전면적인 국유화

2) 중앙 집권적인 계획경제의 도입, 사유경제 및 사유재산의 불허

3) 농민의 토지 몰수 및 생산물에 대한 강제 징발

4) 시장 기능의 부분적인, 혹은 완전한 폐지 → 물물교환 체제 도입

이를 통해 볼셰비키는 생산과 분배의 모든 과정을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자원의 효율적 분배와 혁명의 방어를 동시에 추구하려 하였다.[4]

2.2.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불만 증가, 그리고 막대한 부작용

이렇게 등장한 전시 공산주의는 단기적인 군사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내전이 점정 중장기화됨에 따라 러시아에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산업 부문에서는 1918년 6월을 기점으로 하여 중공업, 철도, 은행과 같은 대부분의 주요 산업부문에서 국유화가 실시되었으며, 모든 산업 활동은 최고 소비에트 경제위원회(ВСНХ, Высший совет народного хозяйств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노동자 자주관리는 곧 국유화된 공장의 국가 관료들이 주도하는 행정 지시 체제로 대체되었고, 생산량보다 계획 이행 여부가 중요시되었다. 하지만 생산 수단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숙련된 관리자 부족·노동자들의 탈도시화·원료 및 연료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하여 산업 역량은 급속도로 감소하였다. 내전이 후반기에 접어들던 1920년 기준으로 당시 러시아의 산업 생산량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이던 1913년의 절반도 안되는 20% 수준에 그쳤다. 또한 철강 생산은 1913년의 4% 수준에 그쳤고, 석탄 생산도 50% 이하로 감소하였다.[5]

농업 부문에서는 더욱이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볼셰비키 정권은 권력을 잡을 때 그들이 약속한대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막상 내전이 일어나자 이렇게 분배한 토지를 다시 몰수하고, 생산물에 대한 자율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면서 농민들의 곡물과 가축을 정해진 수량만큼 강제로 징발하였다. 상술했듯이 이러한 제도는 시장을 통한 개개인의 자율 거래를 부정하고, 필요분의 자원을 농민들에게서 얻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징발 대상이 되는 곡물의 양은 농민의 생계유지분까지 초과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므로, 이렇게 식량을 징발당한 농민들은 결과적으로 대부분이 굶어죽거나 그정도까진 아니어도 재산 대부분을 털려서 가난해진 경우가 많았다.[6] 이렇게 볼셰비키의 수탈이 점점 심해지자, 농민들 사이에서 극심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의 주요 곡창지대였던 우크라이나 및 볼가 지역 등지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민중 반란이 발생하였고, 일부 농민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농사를 짓지 말자!"라는 생각에 이르러서 아예 농사를 짓지 않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1921년에는 곡물 생산량이 제정 러시아 시대보다 약 40% 정도 감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으며, 볼가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수십만 명에 최대 1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아사 사태가 일어났다.[7] 또다른 기록에 의하면 소련이 내전 이후 인정한 통계로만 당시 약 500만 명 이상이 기아로 사망하거나 이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어느 지역에서는 식인 사례도 보고되었다.[8]

도시 경제와 유통 체계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볼셰비키가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장경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면서 사적인 상업 활동은 범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암암리에 식량이나 생필품을 밀거래하는 ‘암시장’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정부에서 노동증서나 배급표를 통해 생필품을 배급받았지만, 실질적인 유통은 암거래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화폐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을 뿐만 아니라[9] 상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하던 도시에서는 식량과 생필품을 교환하는 식의 물물교환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전시 공산주의로 인한 후폭풍을 제대로 얻어맞은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이동하는 탈도시화 현상이 일상화되었다. 페트로그라드의 인구는 1917년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고, 모스크바 역시 이 시기에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경험하였다.[10] 그러자 볼셰비키는 산업 생산력의 감소를 타개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이직 및 이주를 철저하게 금지하고, 이유불문 지각이나 결근을 한 자에게는 가혹한 처벌까지 가하는 '노동 규율 강화 조치'를 시행하였다. 또한 ‘노동 군대’라는 명목 하에 반강제적으로 산업 부문에서 동원이 이루어졌다.[11]

이 때문에 처음에는 볼셰비키에 호의적인 여론을 보이던 사람들도 점차 등을 돌린 상태에서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불만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12]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의 실질 가치 하락, 식량 부족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 사이에선 파업과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당대 러시아의 대도시였던 모스크바 및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노동자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이처럼 주요 지지층이었던 농민과 노동자 모두가 불만을 표출함에 따라 볼셰비키 정권의 정통성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2.3. 크론슈타트 반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크론슈타트 반란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크론슈타트 반란#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크론슈타트 반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20~1921년 사이, 적군이 알렉산드르 콜차크러시아국,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외몽골, 극동의 젤레나 우크라이나, 중앙아시아의 바스마치 운동 등 반볼셰비키 세력들을 모조리 분쇄하며 러시아 내전은 점차적으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볼셰비키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계속해서 유지하였으며 오히려 3국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의 신생 독립국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을 수출하려 시도하는 등 지지층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트로그라드주의 군항도시였던 크론슈타트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래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은 볼셰비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 가운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1905년 러시아 혁명, 2월 혁명, 10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혁명세력과 볼셰비키의 굳건한 콘크리트 지지층이었을 뿐만 아니라 10월 혁명에서 파벨 디벤코가 이끌던 발트 함대의 무력시위가 혁명에서 큰 역할을 했을 정도로 볼셰비키의 지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13]

그러나 이들은 러시아 내전을 겪으면서 너무나도 지나친 볼셰비키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특히 볼셰비키가 전시 공산주의를 실시하며 이전 제국압제자들처럼 농민들을 수탈하자 점차 볼셰비키를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도 내전의 빠른 종결과 농촌 수탈 중지, 소비에트 민주화를 외치며 좌파 공산주의적인 성향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층은 이들의 불만사항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배신행위로 여기면서 억압하기 시작했다.[14]

그러자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의 해군 수병들과 노동자들은 일제히 손을 잡고 "소련 공산당의 권력 축소, 내전기 동안 거대해진 공산당 관료집단 해체,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적 자유, 노동계급의 시민권 회복(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인민주의, 사민주의)와 아나키즘 세력이 참여하는 연립 정권" 등의 구호를 부르짖으며 볼셰비키에 반기를 들었다. 이는 곧 볼셰비키 독재에 대한 사실상의 본질적인 도전이었다.[15]

크론슈타트 반란은 2주 만에 진압되었지만, 레닌은 "어제의 혁명 영웅들이 오늘의 반혁명 세력이 되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였다. 특히 이전에 독일 제국이 수병들이 일으킨 11월 혁명으로 인해 멸망했던 만큼, 크론슈타트 사태는 어떻게 보면 볼셰비키에 있어서는 체제를 위협하는 반란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볼셰비키 지도부 역시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버리고 다른 경제 정책으로의 대전환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신경제정책이었다.

3. 상세 내용과 특징

보통 '신경제정책'으로 번역되지만 '새로운 경제정책'이라는 일반용어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는 만큼[16] 보통 소련의 것을 가리킬 때는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영어로 NEP 또는 한글로 네프라고 표기한다. 러시아어로 신경제정책의 약자도 НЭП인데 역시 네프라는 발음이다.

시장경제의 부분적 재도입을 특징으로 한다. 볼셰비키 혁명 후 토지개혁을 단행했지만 소비에트 정부가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불허함에 따라 자신의 농토를 국가에 다시 빼앗기는 꼴이되면서 농민들의 저항이 엄청났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 따라 통화가치를 의도적으로 떨어트렸는데 오히려 생필품 구매에 불편함만 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 때문에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내전까지 겹치면서 소련의 산업기반이 파괴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1921년에 들어닥친 기록적인 가뭄까지 겹쳐 대기근[17]이 닥쳐왔고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전염병까지 나돌면서 약 500만명 가량이 죽어나갔다. 러시아 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1921년 3월엔 비볼셰비키 좌파 봉기인 크론슈타트 반란도 일어났다. 내전에서 어렵게 승리한 볼셰비키였지만 이러한 경제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내전이 재개될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외국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아 구호에 나서는 한편 원활한 전후 재건을 위해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토대로 수정된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농민 개인이 자기 생산물을 팔 수 있도록 허가하고 일정한 기준의 사기업 활동도 허가하였으며 외국 자본을 허용하는 등 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일부 도입하며 시장경제의 요소들을 대거 도입했다. 여기에 박살난 통화가치를 정상화 하고 세금을 걷어 재정을 안정화시키라는 옛 부르주아 출신 고문관[18]들의 조언에 따라 중앙정부의 예산을 삭감하였고 세금을 걷기 시작했으며, 1922년에 금의 가치와 연동되는 새로운 루블을 발행하자 화폐 가치가 얼마 안가 안정화되었다. 그러자 농민들에게 걷던 현물세는 사실상 화폐세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일체 허용하지 않던 기존 마르크스주의 강령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에서 많은 논쟁과 반발이 야기되기도 했으나 전후복구와 기근을 조속히 종식시켜야된다는 레닌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관철되었다.

신경제정책 기간 동안에 공산주의 정부가 모든 산업을 자유 시장에 넘기고 무력하게 물러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규모가 큰 공장과 철도를 비롯한 주요 물류망은 소련 정부가 틀어쥐고 있었고, 각종 원자재와 국유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가격이 국가의 통제 하에 있었다. 신경제정책이 최고조에 달한 1925년에도 시경제정책 하에서 지나치게 커진 네프맨(NEPman, нэпманы)[19]을 골라 처벌하였고, 원자재와 기본 물류망을 국가가 통제하는 상황에서 민간 사업자들의 운신의 폭이 갈수록 제한되었다. 그리고 신경제정책의 실행과 함께 고스플란이라는 약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국가계획위원회가 설립되어, 징검다리 역할로 실시되는 신경제정책의 다음에 올 장기적인 공산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1928년부터 실시된 5개년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투르크십 철도드니프로 댐이 네프 기간에 계획되고 첫 삽을 뜬 뒤 5개년 계획 중에 완성된 대형 국책 사업이다.

신경제정책 실시 후 소련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하여 1923년에 이르러 기근에서 벗어났고 1928년 들어서는 전쟁전인 1913년도의 경제수준을 회복하였다. 레닌의 주장으로 시행된 전기 보급 계획의 결과 20년대 후반이 되자 1913년의 7배에 달하는 전기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은 이쯤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계에 봉착했다. 정치적인 이유로는 1924년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스탈린이 대립하였는데 둘 모두 네프를 중지시키고 공업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체로 네프에 우호적이었다가 레닌의 사후에 네프를 비판하고 나섰고, 원래 네프에 비판적이었던 스탈린은 태세를 전환하여 네프에 우호적으로 되었다가 1927년에 트로츠키를 축출한 뒤에는 또 다시 변신하여 네프를 끝장내려고 했다. 그리고 변함없는 네프의 지지자였던 부하린이 뒤늦게 스탈린을 저지해 보려고 했으나, 영민한 스탈린의 상대가 되지 못한 부하린은 1929년에 실권에서 밀려나 버렸고, 이제 절대 권력자가 된 스탈린은 자기 마음대로 네프를 종결시킬 수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로는 네프 기간동안 부를 축적한 도시의 네프맨이나 농촌의 쿨라크와 같은 부자들이 출현해 빈부의 격차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다수의 일반 공산당원들은 네프의 시행이 혁명의 결과를 무위로 되돌리고 결과적으로 1913년과 다를 바 없는 퇴보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며 20년대 내내 계속된 당내 정치투쟁은 단결과 권위에 집착하던 당원들을 불안에 빠뜨렸다.

그러나 네프는 좀 더 지속될 수 있었는데 이는 네프를 멈추고 공업화를 추진할 재원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업화를 추진한다는 건 말이 좋지 당시 소련처럼 공장에 들여놓을 기계부터 수입해야 하는 국가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외국의 차관을 빌려와서 자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트로츠키는 공업화 추진에 있어서 옛날 제정 러시아 말기에 세르게이 비테가 했던 것처럼 외국 차관을 들이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트로츠키 반대파에게 공격할 구실을 잔뜩 만들었다. 왜냐면 그 차관을 들일 국가가 결국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채를 들이지 않는다면 국내의 자본을 이용해야 하는데, 혁명 이전부터 러시아는 국내 자본이 충분하지 못한 국가였다. 물론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소련 자체적으로 자본을 축적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트로츠키는 국영 공장에서 생산하는 공산품의 가격을 올려서 여기서 얻은 수익을 사용하자는 입장이었고, 부하린은 농작물의 가격을 높여서 농부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면 이들이 결국 유효 자본을 축적할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스탈린은 공산품이든 농작물이든 가격을 낮추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결국 자본을 얻기 위해서는 인민을 쥐어짜서 돈을 걷어야 하는데, 공산주의 정권의 지지 기반인 도시 노동자를 공격할 수는 없으니 농민들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많은 반발이 예상될 것이었다.

하지만 대외적 상황은 소련에게 공업화라는 선택지를 강요했다. 영국 경찰이 소련의 주영 통상기구를 습격해 와해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영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따라서 외채를 들이는 일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해졌다. 여기에 국제 공산주의 혁명에도 심각한 차질이 생겨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 결렬되어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해 국공내전으로 돌입했으며 폴란드에서는 소련 외교대사가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외교참사는 소련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무너뜨리려 공작하고 있고 전쟁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언론과 정보기관들이 연일 국내의 '간첩'과 '반혁명분자'들을 잡아들이며 국내의 적을 조심하라고 선전하자 국내에도 혁명의 적이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었다.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농민들은 그해 농업 생산량이 풍작이었음에도 다시 1920년처럼 시장에 곡물을 팔지 않았으며[20] 실업률이 급증하였고 도시에서는 생필품이 대거 사재기되었다. 네프로 기껏 회복한 경제가 다시 악화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 소문을 이용해 스탈린을 비난했지만 스탈린은 이에 대응하지 않다가 1927년 중반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트로츠키의 비판을 역으로 비틀어 적이 모스크바의 코앞까지 다가와도 분파행위를 할 작자라고 비판했다. 이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트로츠키는 급속도로 인망을 상실했으며 얼마 후 당에서 완전히 축출된다. 이를 계기로 1928년부터 스탈린은 국내의 '반혁명분자', 즉 부르주아 출신 고문관, 네프로 부를 축적한 이들, 공산당에 가입되지 않은 기술자 등을 대거 잡아들여 사실상의 사법살인을 저질러 네프의 기반을 붕괴시켜 버렸고[21] 식량 공급의 감소로 인해 폭등한 식량 가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22] 1928년에 농민을 향한 대대적인 수탈을 시작했고, 1929년부터는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지목해 쿨라크를 가혹하게 탄압하는 동시에 농업집산화를 강행했다. 이때의 쿨라크 탄압은 전례가 없이 당 회의도 거치지 않은 스탈린의 독단적인 정책이었는데, 이후로도 스탈린은 필요할 때마다 같은 방법을 종종 사용하였다.

동시에 대숙청의 전조도 이때 나타났는데 비록 스탈린은 전쟁 소문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진짜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무너뜨리려 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사법살인을 통해 부르주아 출신 피고들에게서 얻어낸 억지 자백[23]을 진지하게 믿었으며 반대파 숙청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들의 음모를 최소 몇 년 늦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성과를 인민들에게 자랑했으며 사회적인 불안과 공포,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스탈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빈곤이나 식량 문제, 경제 위기 등의 원인을 '반혁명분자들의 사보타주' 때문이라 주장함으로서 이런 위기를 더욱 부추기기까지 했다.

4. 문제점

1923년 여름에 가위 위기라 불리는 경제 위기가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제정 러시아의 무능과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수년간 볼셰비키 정권의 실책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러시아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농업 생산량의 감소, 물류의 마비, 소비재 공업 생산량의 급락을 겪었었다. 이후 신경제정책 덕분에 경제난이 조금이나마 해결되긴 했지만, 1923년에는 농업과 공업의 회복 속도가 현저히 다른 것이 문제였다. 볼셰비키 정권 초기에 농업 생산량이 감소한 주요 원인 중에 하나는 정부가 잉여 농산물을 몰수해 가자 농부들이 딱 자신이 먹을 만큼만 파종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네프 하에서 몰수가 아니라 잉여 생산물을 수매하는 정책으로 바뀌자 파종 면적이 바로 늘어나면서, 농업 생산량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반면에 공업 분야는 공장의 국유화로 인한 비효율성과 원자재 및 생산 기계 부품의 부족으로 인해 회복이 더디었고, 결과적으로 공산품이 여전히 귀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정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정부도 돈을 마구 찍어내면서 1924년 경에는 전쟁 직전인 1913년에 비해 물가가 500억 배나 오르는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는데, 농산물을 수확할 때만 가격을 올릴 수 있는 농부는 매일같이 가격을 올릴 수 있는 공장과의 가격 인상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싼 공산품 가격과 싼 농산물 가격의 차이가 마치 벌려진 가위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벌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24] 계속해서 공산품의 가격만 올라가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공장에서 공산품을 밀어내더라도 사람들이 상품을 돈과 바꾸는 것을 주저하게 되고, 농산물이 제 가격을 받지 못하는 데다가 공산품을 구하기 힘들면 농부들이 농산물을 팔 이유가 없기 때문에, 결국 시장에서 공산품과 농산물이 모두 부족해지게 된다.

트로츠키는 1923년 4월에 열린 12차 당대회에서 농업 가격과 산업 가격의 차이가 가위처럼 점점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표를 소개했다. 1923년 10월에 그 차이가 가장 크게 벌어졌을 때 농업 가격 대비 산업 가격의 비율은 1913년에 비해 3배나 높았다. 결국 당은 농촌 수매가를 인상하고, 공업 분야별 트러스트 조직의 비대한 관료의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원가 절감에 나서며, 강제로 국영 공장에서 생산한 공산품의 가격을 낮춰서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이후 몇년이 지나자 국가 통계상으로는 가위 위기가 해결된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소비재의 생산량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산품의 공식 가격만 낮추자 암시장에서 두세배 가격으로 재판매하는 행위가 성행했고, 결과적으로 인민이 실제로 구입하는 공산품의 가격은 여전히 지나치게 높았다. 게다가 가위 위기가 해결되었다는 자위적인 통계에 고무된 나머지, 1926~7년에는 국가가 곡물을 농촌으로부터 수매하는 가격도 6% 낮추면서, 실제 현장에서는 가위 위기가 재발되었다. 공산품의 민간 시장 가격에 비해 곡물의 수매가가 지나치게 낮아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낮은 가격으로 빼앗기듯이 국가에 곡물을 넘기는 대신에 아직 남아있는 민간 상인에게 더 좋은 가격으로 곡물을 팔거나 축산 또는 수매 대상이 아닌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이 때문에 1927년 겨울~1928년 봄의 기간에 풍작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25]우랄 지방에서 곡물의 수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곡물을 해외로 수출하여 얻은 자본을 공업화에 투입하려 했던 스탈린의 소련 정부를 크게 실망시켰다.사망 플래그

그래도 신경제정책이 도입되면서 소비재 경공업은 약간이나마 회복되었지만, 생산수단 생산과 관련된 중공업은 뒤쳐졌다. 1924년 10월 1일의 산업 생산은 1920년의 2.5배에 달했지만 전쟁 전 수준의 40%에 불과했고 금속 산업은 겨우 28.7%였다. 게다가 상술한 것과 같이 너무 저렴하게만 값을 책정한 가격 정책의 실패로 인해 돌아다니는 공산품의 양이 너무 적어서, 소련 정부가 필요한 물자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스탈린은 1930년부터 민간 시장을 불법화시키고, 민간 사업자들이 가진 물자를 몰수하게 되었다.

거기에 서민들 입장에서도 좋지 못하게 보일 일들이 일어났다. 볼셰비키 집권 이후 교육과 의료가 전면 무상화되었으나, 신경제정책의 시행으로 배급보다는 월급을 지급하게 됨에 따라 공공 서비스도 다시 유상화되었는데, 이는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하위 계급에게는 퇴보로 여겨졌다. 게다가 연금이다 각종 수당도 불평등하게, 즉 당사자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지급되었다. 네프가 종식된 데는 이런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도 영향을 미쳤다.

5. 같이 보기


[1] 노바야 에코노미체스카야 폴리티카[2] 5개년 계획은 실질적으로 1928년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승인된 것은 1929년이었다.[3]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 이들 모두 당대의 주요 열강이었고, 심지어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국과 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부르짖는 볼셰비키의 부상을 두려워하여 백군에 대대적인 군사 지원을 감행했다.[4] Richard Pipes, 『The Russian Revolution』, Vintage, 1991.[5] Alec Nove,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Penguin Books, 1992.[6] 그래서 당시 농민들 사이에서는 "볼셰비키가 나눠준 땅을 공산당 놈들이 뺏어간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7] R.W. Davies, 『The Economic Transformation of the Soviet Union, 1913–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8] Orlando Figes, 『A People's Tragedy: The Russian Revolution 1891–1924』, Penguin, 1998.[9] 1921년 1월 시중에 유통되는 돈이 12억 루블이었는데, 2년 후인 1923년 1월에는 2조 루블이 되고, 1924년에는 81 루블이 됬을 정도였다. 볼셰비키 정부가 윤전기를 돌려 얼마나 많은 지폐를 찍어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심지어 1922년에 금에 기반을 두어 가치가 안정적인 신 루블을 발행한 이후에도 1924년까지 지폐 루블을 마구 찍어내어, 한동안 가치가 안정적인 신 루블과 가치가 천문학적인 속도로 떨어지는 구 루블이 공존할 지경이었다.[10] R.W. Davies, 『The Development of the Soviet Economy』, Macmillan, 1967.[11] Sheila Fitzpatrick, 『The Russian Revoluti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94.[12] Alec Nove,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Penguin Books, 1992.[13] 심지어 제헌의회 선거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당선된 비례대표 권역도 다름 아닌 발트 함대 군관구였으며, 후자는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아예 페트로그라드 제헌의회 의장까지 지내기도 하였다.[14] 레닌은 이같은 행동을 두고 《좌경모험주의라는 소아병》이란 제목의 저서까지 작성하면서 심각한 배당행위라며 이들을 반혁명 세력과 마찬가지로 파괴하여야 할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는 부르주아의 참여와 견제가 없는 정치체제를 의미했던 초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보기에 당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곧 노동자를 선동해서 이권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에 지나지 않았다.[15] Paul Avrich, Kronstadt 1921,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0.[16] '닉슨 쇼크'를 불러일으킨 1971년 리처드 닉슨의 경제안정책도 신경제정책으로 불린다.[17] 기근은 1922년까지 지속되었는데 1922년 1월 볼셰비키는 기근 해결을 명분으로 교회 재산을 대규모로 압류했다.[18] 볼셰비키들 중에는 부르주아나 구 제국 상류층 출신을 고문으로 기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이 꽤 있었으나 레닌은 이들의 주장을 당이 모든것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라며 비판하고 공산주의자 행정가가 충분히 길러지기 이전까지는 이들을 고용하고 조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네프 기간동안 성장한 사업가들을 뜻한다. 중간 상인 역할을 하거나 작은 공장을 운영하며 소비재를 생산했다.[20] 다만 이는 국가가 설정한 수매가가 현저히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21] 이 사법살인의 목적은 이것도 있지만 동시에 구 상류계급 출신 관료나 기술자들을 향한 노동자들과 평당원들의 노골적인 불신과 혐오를 이용해 전쟁 불안을 해소하고, 동시에 공업화 경제계획에 회의적으로 반응하던 관료 세력을 일소하기 위함이기도 했다.[22] 기존 당원들이 농민들을 상대로 유화적인 해결책을 썼던 것과 달리 스탈린은 식량 가격 폭등의 근본적인 원인이 소수의 쿨라크만이 시장에 식량을 내놓음으로서 사실상의 독점 상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스탈린은 공업화 추진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단기적으로 확실한 해결책을 쓰고자 했고 그게 바로 부농 탄압이었다.[23] 다만 뒷걸음치다 쥐를 잡는 격인지, 개중 일부는 실제로 간첩이나 사보타주 행위를 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이 과장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체제 붕괴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었다[24] 가위를 벌려서 놓아두면 두 가윗날 사이의 간격이 힌지가 있는 손잡이에 가까운 부분에서는 좁지만, 날의 끝으로 갈수록 간격이 더 넓어지는데, 공산품 가격과 농산물 가격 사이의 간격이 점차 벌어지는 상황이 마치 가위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뜻이다.[25] 극동 시베리아 지역의 모습만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모든 것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시베리아에서 무슨 농사를 짓겠나 싶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시베리아는 기후가 온화한 서시베리아의 남부 지역을 뜻한다. 서시베리아의 남부 지역은 지금도 러시아의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주요 농업 지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