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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270><tablebordercolor=#ffffff,#1f2023> | KBS 1TV KBS 제1텔레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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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KBS 한국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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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 안전한 대한민국, 국민안전 중심채널
2020년 10월 1일부로와 현재 계속 사용 중인 캐치프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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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31일부로 사용 중인 캐치프레이즈
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 채널 중 하나.2021년 5월 31일부로 사용 중인 캐치프레이즈
한국방송공사 산하 국가기간 TV 채널. 호출부호는 서울지역 HLKA-DTV / HLKA-UHDTV(이상 디지털 TV) / HLKA-TDMB(DMB), 채널 번호는 서울 CH
국가기간방송으로서 주로 보도 프로그램, 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한다.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로서 국가적 재난 시에는 KBS 제1라디오와 함께 속보 체제가 가동되며, 2016년 경주 지진으로 국가 재난안전 시스템이 갱신되기 이전에도 보도전문채널을 제외하면 속보 전환이 가장 빠른 방송사였다. 재난/사고발생시로부터 뉴스특보 편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20분 정도. 자동화된 시스템과 재난 대응 인력의 상시기동이 있는 NHK의 긴급지진속보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수동전환 치고는 빠른 편이었다.[28]
지상파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규제가 풀린 이후, 2012년 10월 8일부터 국내 지상파 방송 최초로 상시 24시간 방송을 실시하였다. 규제가 풀리기 이전에는 지상파 텔레비전이 새벽에 방송하려면 사전에 허가가 필요했으며, 심지어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규정외 시간에 속보를 때리려고 해도 공보처의 허가가 필요했다. 1995년 케이블TV 출범 이후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규제였으나 낮시간대 종일방송을 실시한 후에도 상당기간 새벽 정파는 계속되고 었었다.
2. 연혁
자세한 내용은 KBS/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1961년 12월 31일, 공보부 산하 서울중앙방송국이 KBS-TV(HLCK-TV[29])로 개국했다. 1962년 1월 15일에는 정규방송을 했고, 1963년 1월 1일에 수신료와 시청료,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개시한 뒤 공보부 측의 조직개편에 따라 '서울텔레비전방송국'으로 분리됐다.[30]
1968년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공보부가 '문화공보부'로 개편되자 조직도 다시 짜여져 서울TV국은 서울국제방송국, 서울중앙방송국과 합쳐져 새로 출범된 '중앙방송국' 예하에 속했고, 1963년 1월 1일부터 1969년 4월 30일까지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했다. 1969년 5월 1일에는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폐지하고 교육방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73년 한국방송공사 출범으로 인해 그쪽 관할이 된 후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TBC-TV가 KBS 2TV로 흡수되면서[31] KBS 1TV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1981년 3월 7일에는 또 한번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재개를 했고,1982년 1월 25일에 KBS 2TV의 채널과 다르게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평일과 주말 및 공휴일에 오전 및 오후 광고를 줄였다.[32] 1990년부터 스포츠, 실황중계, 영화 프로그램까지 확대했으나 1994년 10월 1일에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마저 없애버렸다.[33]
2.1. 언론통폐합과 컬러화
1980년 11월 12일, 광주민주화 운동과 서울의 봄을 유혈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보다 효과적인 언론통제를 위해 전면적으로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34] 이로 인해 방송과 신문의 겸영 및 주재기자제가 금지되고 지방지는 1도 1지로, 5개사로 난립되었던 통신사는 단일 통신사 '연합통신'으로 개편되었으며, 거기에 CBS의 보도기능과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이 폐지되었고, TBC, DBS가 KBS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KBS는 TV 채널 2개[35], 라디오 채널 7개를 가져 초 거대 방송사로 등극하였고, 기존 KBS-TV는 12월 1일부로 KBS 1TV로 명칭을 변경했다.이와 동시에 수출의 날 기념식 중계방송을 컬러로 중계함으로써 세계에서 81번째로 컬러방송을 시작하였다.[36] 이후 1980년 12월 9일, 컬러화비용과 TBC, DBS를 인수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상업광고 재개를 허용받고, 동시에 시청료 인상을 추진하였는데, 흑백 TV 시청료 인상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각종 로비로 컬러 TV 시청료를 월 2,500원으로 정하는데 성공[37]하고 동시에 1981년 3월 7일에 광고를 다시 하면서 재정을 충당하게 되었다.
1982년 1월에 재정충당을 위해 KBS 2TV의 광고시간을 확대하면서 공영성 강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1TV의 광고시간이 축소[38]되었다가 당년 4월에 평일 오전시간대에 블록광고를 편성하게 되어 광고 시간이 늘어났다.[39] 윤재걸 기자가 <신동아> 1986년 5월호에 낸 칼럼 등을 토대로 하자면, 당시엔 친정부/친자본성 편파방송으로 시청료도 아까워 죽겠는데 광고도 같이 늘어났으니 시청자들이 KBS를 곱게 보지만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국산 애니메이션을 거의 명절에나 편성해주던 상황이었으며, 그것도 영화 재방으로 TV용은 결코 아니었다. 학생운동이나 공안사건이 터지면 '보도특집'을 긴급 편성해 민주화 운동 자체를 '좌경 공산폭동'으로 매도하는가 하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감추고 허구적 성공사례만 내보냈다. 심지어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희석시키고 광고 수입을 더 벌기 위해 편성표의 반 이상을 스포츠에 할애하고 광고 역시 명색이 공영방송인데 나레이터의 육감적인 목소리로 낸 "돌려 먹을래"나 "빨아 먹을래" 같은 선정적 멘트까지 거르지 않았다. 이에 시청자가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면 징수원들이 집까지 들이닥쳐 '빨갱이'라 부르며 폭언, 공갈, 협박, 폭행까지 감행했다.(당시 항의문)
이게 곪아 터진게 1985년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40]이었는데, 1985년 총선과정에서 KBS는 당시 여당인 민정당을 노골적으로 치켜세우고 야당인 신민당을 대놓고 비하하자 시청료 거부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며 1985년부터 시청료 수입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KBS는 1985년 5월에 술 광고를 폐지하고, SA시간대(20:00~22:30)의 광고를 줄였다.[41] 하지만 정작 가장 문제가 되었던 편파보도가 개선되지 않으면서 시청료 거부운동이 확산일로를 걷게 되고, 거기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민주 시민사회단체까지 나서서 KBS 시청거부 운동까지 벌이자 1986년 7월에 평일 오후 블록광고(20:30~20:35)를 폐지하였다. 물론 당연히 미봉책에 불과했고 정부는 KBS에 강제징수권을 부여하며 1986년 대도시에 통합공과금 제도[42]를 점차 도입하고 경찰과 보도지침까지 동원하며 이를 막으려 했다. 이후에도 KBS 시청료 징수율은 1988년까지 계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한 편 이 시기 편성 가운데서 두드러진 점이 있었는데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 특히 주말 낮 시간대를 거의 스포츠 중계방송으로 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43] 이는 5공의 스포츠 장려정책[44]도 있었지만 2TV와 다르게 1TV에서는 정규 프로그램에 따로 광고를 붙일 수는 없었고 프로그램 사이에 방영하는 블록광고도 일정 횟수[45]이상 편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포츠 중계방송의 편성이 훨씬 이득이었던지라 당연히 1TV의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상당히 남아있어서 현재도 KBS 1TV에서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46]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47][48] 그리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때 개막식과 폐막식은 주로 KBS 1TV를 통해 중계되어 타 방송과 다르게 광고없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49]
민주화 이후 1988년에 올림픽 특집-중계프로그램, 사회고발 프로그램 등을 집중적으로 편성하였으며, 떠돌이 까치[50], 아기공룡 둘리, 까치의 날개, 날아라 슈퍼보드 등의 국산 애니메이션들이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51] 이후 1989년 3월 봄개편 들어, KBS는 1TV를 보도,교양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하면서 지금과 비슷한 편성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90년 3월 평일 블록광고를 폐지했다. 하지만 1TV 광고수입은 오히려 급증했는데, 1TV에 스포츠 중계, 특집 프로그램을 대량 편성해서 이전보다 광고수익은 증가했다.[52] SBS의 개국 이후 한 동안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늘어났다가 1992년 가을개편과 1993년 봄개편 들어 다시 보도 프로그램,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높아져 갔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아나운서가 나와서 방송순서를 안내하는 유럽식 방식을 쓴적도 있었다.
2.2.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폐지와 그 이후
1993년 수신료 인상 드립을 쳤지만 되려 시청자들에게 냉소를 듣는 등 여의치 않자 수신료 합산징수로 징수액수를 절감하고 징수율을 높여 매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 1994년 7월 23일에 광고방송 폐지가 결정되면서 10월 1일부로 폐지됐다.[53] 이후 징수 방식 변경에 따라 징수율이 50%대에서 90%대까지 치솟으며 KBS 수신료 수입이 급증하고 1TV의 공영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당시 1TV의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10% 초반까지 하락한다. 이 전략은 당시 보도 프로그램의 중립성 강화와 맞물리면서[54]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KBS 1TV가 평균 시청률 1위 채널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물론 이건 중년층 이상에서의 시청률이 높기 때문이고 젊은층 사이에서의 시청률은 크게 낮다.물론 그로 인해서 부작용도 있는데 KBS 2TV의 시청률이 부진할 경우에는 1TV에서 광고를 따로 붙일 수 없게 되니 KBS 입장에서 상당히 손해가 된다. 물론 당시에야 수신료 수입이 엄청 불어났기에 KBS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이기는 했지만 현재도 수신료가 인상되지 않기에 그런 것이다. 덕택에 2008년에 정연주 사장이 쫓겨나게 된 이유로 경영부실이라는 이유로 내세워지기까지도 했을 정도이다. 사실 이 때의 적자는 그냥 2TV의 시청률이 안 나오다보니 광고가 안 팔려서 그런 거인데 이러다 보니 영업이익(935억원 적자출처)과 당기순이익(765억원 적자출처)이 모두 적자이었다. 만약 1990년대 초식으로 1TV에서 상업광고가 편성되었더라도 주말 9시 뉴스, 대하사극 사이에 광고를 넣는 건 가능할테니 대충 적자는 안 났을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물론 케이블TV 채널도 있지만 케이블TV에서 걷는 수입이 적은 편인지라...
그리고 2017년 들어서 MBC와 SBS와 마찬가지로 중간광고 해야하다는 내용을 계속 보도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채널이미지 때문인지 1TV 상업광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2TV에서도 중간광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5] 사실 KBS 내부에서 KBS 1TV의 상업광고를 재개할 경우에 상당한 수입을 거둘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나온 적이 있고, 1TV 상업광고 재개에 대한 제안도 나온 적이 있기는 한다만, 채널 이미지 상실로 시청률이 뚝 떨어질 수 있는 데다가 신문광고와 지상파 광고시장 모두 좋지 않은 상황에서 주요 언론사들과의 마찰을 각오해야 하고 거기에 수신료 징수에 대한 명분도 사라지기 때문에 1TV 광고에 대한 언급을 꺼려 한다는 카더라가 나오기는 한다.
2023년 7월 5일 방송통신위원회가 수신료 분리징수를 의결한데다가 수신료를 대체할 대체 수입원이 있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1TV의 상업광고를 부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수신료 분리징수 의결 시 한국전력공사와 계약만료 시점을 앞당길 수도 있다. 한국전력공사와의 계약은 2024년 12월까지이다.
2.3. 구 호출부호
1990년대 중후반까지 사용했던 호출부호이며 중계소의 경우 1970년대 초반에 사용했다.지방사 | 호출부호 | 비고 |
본사 | HLCK-TV | |
본사 (용문산) | HLAE-TV | |
부산총국 | HLAB-TV | |
대전총국 (식장산) | HLSD-TV | |
대전총국 (흑성산) | HLSQ-TV | [56] |
전주총국 (미륵산) | HLSF-TV | |
광주총국 | HLSG-TV | [57] |
목포국 (양을산) | HLAI-TV | [58] |
대구총국 | HLAH-TV | [59] |
대구총국 (금오산) | HLST-TV | [60] |
안동국 (학가산) | HLSB-TV | [61] |
창원총국 | HLAL-TV → HLKD-TV | [62] |
3. 특징
- KBS의 시사, 뉴스, 교양 대부분, 오락은 주로 공익성이 있고 건전한 프로그램들, 음악 프로그램은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열린음악회와 같은 중장년층과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클래식 프로, 국악 프로, 드라마는 중장년층을 위한 일일 드라마[63], 사극을 편성하고 있다. 한마디로 라디오로 말하자면 KBS 제1라디오, KBS 제2라디오, KBS 1FM의 컨셉이 합쳐진 존재다. 중장년 및 노년층의 콘크리트 시청자들이 많은 채널이여서 공공장소에서 주로 틀어주는 TV채널이기도 하다.
- 위에 적혀있듯이 지상파 TV 채널 가운데 상업광고를 하지 않는 얼마 안 되는 채널이다.[64] 그러나 이미 1960년대에 상업광고를 편성했던 적이 있고 1981년부터 1994년까지 제한적으로 상업광고를 편성하였다.
- KBS 2TV를 포함한 다른 방송국들과 달리 프로그램 예고, 로고송을 잘 띄우지 않으며 정해진 시간이 되면 바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상업광고가 없기 때문에 한 프로그램이 끝난 직후에 바로 다음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상징색은 1993년 가을부터 '그린정신'을 선포한 이래 2003년까지는 KBS 전체의 상징색을 녹색으로 설정하면서 녹색이었으나 2001년부터 공식 약칭을 '한국방송공사'에서 '한국방송'으로 바꾸고, 2003년 이후 채널 이미지를 '한국인의 중심채널'로 설정하면서 쪽빛 계열의 푸른색으로 고정하여 이 무렵부터 ID나 KBS 뉴스 9 등에서 푸른색 큐브를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65] 다만 방송중단 화면에 표출되어 있는 KBS 로고의 경우 2000년대까지는 녹색 로고와 엑스포체가 표출되었다.[66]
- 1995년 정시를 알리는 시보 방송[67]이 단순한 3초 시보(뚜, 뚜, 뚜, 땡)에서 멜로디 형태로 바뀌었다.[68] 동시에 "정성을 다하는 KBS가 정시를 알려드립니다." 멘트가 추가되었다. 이어서 2000년도에 2TV에서 정시 시보음과 동일한 시보음으로 단일화와 동시에 정시를 알리는 멘트가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KBS가 정시를 알려드립니다."로 변경되었고,출처 2006년도에 한번 더 변경되었다.출처
- 국내 방송사로는 유일하게 2003년 개편 이후 2004년부터 방송시작과 종료방송 때 남자 아나운서 목소리로 시작과 끝방송을 알렸다. 그 동안에는 1TV나 2TV 모두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로 시작과 끝방송을 알렸지만[69] 2003년 개편 이후부터 1TV에서는 남자 아나운서 목소리로 시작과 끝방송을 알렸다. 2018년에는 2TV와 마찬가지로 다시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로 시작과 끝방송을 알렸다가 2019년부터 1TV에 한해 남자 아나운서 목소리로 시작과 끝방송을 알린다. 단, 2021년 한정으로 방송종료 때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로 알렸다.
- 1980~90년대에 이 채널에서 금요나이터라 하여 금요일 저녁 시간대에 프로야구 경기를 중계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1980년대는 지금과 달리 제작비가 많이 드는 드라마 등을 많이 제작할 수 없어서 스포츠 중계나 해외수입 다큐멘터리, 외화 시리즈[70] 등으로 방송편성을 많이 때웠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의 3S정책의 일환으로 KBS건 MBC건 스포츠 중계가 매우 잦았다.[71] 참고로 금요나이터 프로그램 자체는 BBC에 있던 "Grandstand"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것으로[72] 이후 이 프로그램은 본가의 명칭을 그대로 번역한 "KBS 스포츠 중계석" 등으로 명맥을 이어갔으나 하이라이트 방송이지 중계방송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4년 10월 광고 방송 폐지 이후 점차 줄어들어 2000년대 이후에는 KBO 리그[73]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요 경기를 2TV에서 방송한다. 지금은 주로 K리그/V리그 남자부/여자프로농구의 일부 경기를 중계방송 하고 있다.
- 애니메이션이나 교양, 오락 프로그램의 경우 처음에 2TV에서 했던 본방송을 1TV로 옮겨서 방송하거나 재방송하는 특징이 있다.[74] 물론 그 역도 존재한다.
- 비수도권에서 유일하게 HD DMB로 송신하는 채널이다. 단, DMB의 경우 모든 방송은 지역 자체없이 수도권 방송 그대로 나간다.
4. 방송 권역
4.1. 본사
경인방송센터 발족으로 인천광역시, 경기도 지역 송신소, 중계소가 경인방송센터 관할로 넘어감에 따라 인천광역시, 경기도 지역은 IPTV, 케이블TV에서 본사 1TV 대신 경인 1TV가 나오지만 경우에 따라 본사 1TV 전파의 직접 수신이 가능하다.- 남산 송출 (UHF 22ch)[75] : 서울특별시·광명시·부천시 일대, 인천광역시·김포시·고양시·구리시·의정부시·하남시·시흥시·과천시·성남시 일부.
- 관악산 송출 (UHF 15ch) : 서울특별시·광명시·부천시·안양시·과천시·군포시 일대, 인천광역시·김포시·고양시·구리시·파주시·의정부시·양주시·하남시·성남시·남양주시·시흥시·안산시·화성시·수원시·오산시·평택시·의왕시·용인시·안성시 일부, 충청남도 천안시·아산시·당진시·서산시·태안군 일부, 북한 개성시 일부.
- 스카이라이프 채널 9번에서는 전국 어디서나 무조건 본사 1TV가 나왔으나, SD 방송을 종료하면서 9번에서도 가입지역 관할(총)국의 방송이 나온다. 무궁화 위성 6호 전파(주파수 12523 MHz, 수직파)를 직접 수신한다면 여전히 전국 어디서나 본사 1TV를 시청할 수 있다.
5. 디자인
2021년 5월 31일부터 자체 디자인을 적용하고 있다. 자세한 설명은 오늘을 담는 창 문서로.
6. 방송 시작/종료 영상
KBS1 - Sign On · Sign Off (2024년) |
7. 로고
<rowcolor=#fff> 1961년 ~ 1972년[76] | 1972년 ~ 1973년 3월 2일[77] | 1973년 3월 3일 ~ 1980년 11월 30일 |
<rowcolor=#fff> 1980년 12월 1일 ~ 1984년 10월 28일[78][79] | 1984년 10월 29일 ~ 2018년 9월 2일 | 2018년 9월 3일 ~ 현재 |
8. ID 및 로고송
1973년~2021년까지의 ID 변천사.
1994년 10월~2001년 3월 2일까지 쓰였던 로고송.[80]
1980년대 중반 - 90년대 중반까지 KBS 9시 뉴스가 시작되기 전에 쓰인 ID 로고송으로 KBS 노래를 어레인지해서 썼다.[81]
1988년 서울 올림픽 버전
1992년~1993년까지 쓰였던 로고송. 위처럼 KBS의 노래를 썼다.
2005년부터 2014년 초까지 사용된 버전
2001년 3월 3일부터 2021년 8월 14일까지[82] KBS 뉴스 9 시작하기전에 항상 틀어주던 영상과 로고송. 직후에 9시 시보가 이어진다.[83] 2007년 2018년
로고송의 가수가 바뀐 현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근본 로고송이라 통칭되면서 레전드 로고송으로 기억되고 있다. 상당수 20대들도 이 가수 버전을 더욱 추억하거나 높게 평가하는데 어릴 적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TV를 보면서 같이 듣게되었던 영향도 있고,[84]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장 오랫동안 쓰인 버전이기도 하다.
2018년 8월 12일부터 26일까지 쓰였던 로고송. 공식 명칭은 '평화테마송'으로, '함께 하는 평화, 함께 여는 미래'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국면에서 KBS가 써오던 슬로건이다. MR 연주에는 남북 전통악기 가야금, 옥류금이 협주했고, 로고송을 부른 이는 오연준군이다. 2023년 기준으로는 이것의 국악버전이 한민족방송의 몇몇 프로그램(예: 경제로 통일로) 중간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현재는 MBC와 비슷하게 도레파미솔이라는 음도 사용한다.[85]
2021년 8월 16일에 KBS 1TV 로고송이 20년 만에 리뉴얼 되었다.[86] 작곡자 김수철씨는 무더위와 싸워가며 한 달 간 작업해서 새로운 로고송을 내놓았다. 편곡을 의뢰한 KBS측은 결과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수철씨는 원곡의 선율은 살리면서 클래식, 노래, 퓨전국악, 랩, 크로스오버 등 5개 장르로 로고송을 탈바꿈시켰다. KBS는 새 로고송을 다양한 TV 홍보 스팟, 채널 ID, 라디오 방송의 브릿지 음악, KBS myK 등 디지털 플랫폼의 인트로, 엔드택, 배경음악으로 활용하는 중이다.링크
개편 초창기에는 여러가지 버전을 순차적으로 선보이다 현재는 이 버전으로 고정되었다.
2024년 10월부터 사용 중인 랩 버전 로고송으로, 오전에만 쓰인다.
9. NEXT
△ 2021년 5월 31일부터 개편된 NEXT 영상.
1980년대 중반까지는 아침방송에 한해서 부분적으로 NEXT 영상이 있었다가 2019년부터 주요 프로그램에 한해 다시 부활하여 사용 중이다.[87]
10. 프로그램
자세한 내용은 KBS 1TV/프로그램 문서 참고하십시오.11. 광고
- 블록광고 : KBS 1TV가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편성했을 때 실시 했었던 광고 방식이다. 1981년 3월 7일부터 1994년 9월 30일까지 광고방송을 편성했지만, 특정 시간대를 정해서 광고를 방영하는 방식이었으며 5분의 광고시간 동안 30초짜리 광고가 10개 방송되었다.[88] 그래서 2TV와는 다르게 정규프로그램에 따로 광고를 붙이지는 않았고 대신, 특집 프로그램과 스포츠 중계방송에서만 한정적으로 광고를 편성했다.[89] 여담으로, KBS 2TV에서도 1981년 3월 7일부터 1982년 1월 24일까지 블록광고가 편성된 적이 있었지만 광고가 잘 안 팔린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 직접 광고를 붙이는 형식으로 변경했다. 1981년 KBS 2TV 방송자료[90] 하지만, 한국전력공사가 1994년 10월 1일부터 수신료의 전기요금을 위탁 징수하면서 자연스럽게 1TV의 채널의 광고방송을 전면 폐지하여 공익광고만 남았다.
1984년 블록광고 자료
1991년 블록광고 자료[91] |
[DMB] [2] 1980년 11월 30일까지는 그냥 KBS-TV였다. 12월 1일 동양방송 강제 통합과 동시에 KBS 1TV로 바뀜.[3] 단, 여기서 운용이 종료된 ATV 방식은 NTSC 방식이며 PAL 방식은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이유는 후술.[4]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1987년까지 내적으로는 국영방송으로 회귀한 모습을 보였으나, 외적으로는 여전히 공영방송이었다.[5] 여기서 ATV는 아날로그(Analog) TV를 말하며 아래 대치되는 용어인 DTV는 디지털(Digital) TV를 말한다. 2012년 연말 공식적으로 아날로그 TV방송이 종료된 이후로도 PAL 방식으로 송출을 지속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윗동네의 아날로그 방송 방식이 PAL이기 때문이다. 즉, 윗동네 방향으로도 전파를 초강출력으로 쏜다는 뜻. 대신 2012년 12월 31일 새벽 4시 부로 지상파 방송 4사 (KBS, MBC, SBS, EBS)의 NTSC 방식 송출이 종료됨에 따라 NTSC→PAL로 변환하던 예전과 달리 디지털 방송(ATSC) HD 신호를 아날로그 PAL 신호로 변환해서 송출한다. 아날로그 호출부호에 취소선을 친 이유도 이 때문. 또한, 호출부호는 개국 당시부터 적어도 90년대 후반기까지는 HLCK-TV를 사용했지만, 90년대 후반기 이후 제각각이었던 무선국 호출부호를 HLKA국 하나로 통합하면서 지금과 같이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KBS경인방송센터 1TV 개국 당시 아날로그는 송출하지 않았고 디지털만 송출을 했기 때문에 아날로그 HLKA-TV는 사실상 수도권 공통 부호라고도 할 수 있다.[6] 출처(방통위 재허가 의견청취 요약문)[7] 위성방송 자체 송출의 채널명[8] 스카이라이프의 채널명[9] 기본적으로 1TV 편성을 그대로 따라가나 일부 편성은 전송권 문제로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10] 8VSB를 사용하는 CMB와 일부 케이블SO의 알뜰형 상품도 해당 번호로 송출하고 있다.[11] 울산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 충청북도, 전라북도, 횡성군은 각기 다른 번호로 송출.[12] HD채널과 UHD채널의 가상 번호가 동일한 이유는 별개의 방식, 별개의 송신망으로 송출되고 있기 때문이다.[13] 2012년 10월 8일부터 대한민국 지상파 최초로 24시간 방송 전면 개시. 단,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점검 차원에서 종일방송을 하지 않는다.[14] KBS NEWS D는 2010년 3월 3일 개국 직후 24시간 방송 전면 개시. 단, 1TV와 달리 매일 24시간 종일방송한다.[15] 2020년 9월 15일부터 KBS의 정책에 따라 일부 지역에 1TV 지역국으로 적용받아 편성된다.[16] 1961년 12월 31일 ~ 2012년 12월 31일(수도권 기준), NTSC 컬러 방송은 1980년 12월 22일 부터 시행하였다.[17] 2012년 12월 31일 새벽 4시까지는 4:3 그대로, 동일 새벽 4시 이후로는 16:9 네이티브 HD를 16:9 아나모픽으로 변환해 송출, 북한향 전파에만.[18] 1961년 12월 31일 ~ 1985년(1채널 모노), 1985년 ~ 2000년 9월 2일(A2(투 캐리어) 스테레오)/2000년 9월 3일 ~ 2012년 12월 31일(A2(투 캐리어) 스테레오, 돌비 병행/수도권 기준)[19] VHF-Low 6CH로 송출한 일부 지역국의 음성 주파수는 87.75MHz라서 이 기간동안 해당 지역에서는 라디오 기기로 KBS 1TV를 청취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KBS대전 1TV) 참고로 음성다중방송 시연 당시 KBS는 FM-FM(EIAJ-MTS) 방식을 밀었었다.[20] 2000년 9월 3일 ~ 2012년 12월 31일(NTSC-M 486-line과 병행 송출, 수도권 기준), 2012년 12월 31일 ~ 2017년 5월 30일(ATSC 1.0 단독 송출, 수도권 기준), 2017년 5월 31일 ~ (ATSC 3.0 2160/60p와 병행 송출중, 수도권 기준). 코덱은 MPEG-2 비디오 코덱(H.262, Part.2)을 사용해 송출하고 전송 비트레이트는 19.9Mbps, 유선, DMB에는 MPEG-4 AVC(H.264, Part.10) 코덱을 사용해 재송출하고 전송 비트레이트는 32Mbps/584kbps다.[21] 2017년 5월 31일 ~ (ATSC 1.0 1080/60i와 병행 송출중, 수도권 기준). 코덱은 아래 HD DMB와 같은 MPEG-4 HEVC(H.265, H-Part2)를 사용하고 전송 비트레이트는 최대 57Mbps, 평균 17Mpbs다.[22] 2000년 9월 3일 ~ 2012년 12월 31일(FM-FM A2(투 캐리어)와 병행 송출, 수도권 기준), 2012년 12월 31일 ~ 2017년 5월 30일(단독 송출, 수도권 기준), 2017년 5월 31일 ~ (MPEG-H 3D Audio와 병행 송출중, 수도권 기준)[23] 2017년 5월 31일 ~ (돌비 디지털과 병행 송출중, 수도권 기준)[24] 1996년 DVB-S 방식으로 전파를 쏘아 올렸으며 이후 2003년부터 자체 채널을 폐지하고 단순 재송신으로 변경되는 과정을 거쳐 2014년 방송 종료. 코덱은 MPEG-2 비디오 코덱(H.262)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5] 자체송출, 스카이라이프 모두 MPEG-4 AVC(H.264, Part.10) 코덱을 사용해 재송출하고 전송 비트레이트는 32Mbps다.[26] 아날로그 TV(NTSC) 기준[27] 디지털 TV(ATSC) 기준[28] 사실 일본이야 워낙 지진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재난방송분야에선 다른 나라와 차원이 다르다.[29] 90년대 후반기까지 사용한 부호로 1962년 기사와 당시 화면조정시간 중 테스트 패턴에 이 부호가 나와있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기사는 테스트 패턴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30] 가뭄이 어려워져서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 및 수신료, 시청료까지 추가되었다.[31] TBC-TV는 2011년 JTBC로 재개국한다.[32] 1985년 5월 1일에 시청료거부운동을 했으나 저녁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20:00 ~ 22:30(2시간 30분)의 10묶음 짜리 8개를 줄여서 방영했고, 1986년 7월 1일에 평일 블록광고를 폐지했다. 1986년 2월 9일에 광고만 15개짜리였고,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 중계방송 때 광고를 24개나 때렸다. 1988년 10월 2일에도 19개 및 서울올림픽 페막식 때도 광고 11개를 때려갔다.[33] 1994년 7월 11일에 광고 14개를 때려갔다. 1994년 9월 30일에 마지막으로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송출을 했고, 1994넌 10월 1일에 수신료징수제도개선을 계기로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폐지를 하면서 광고가 사라지게 한 후 광고를 없애자 1TV의 채널에 TV수신료를 전기요금에 병과를 시켜서 수신료 2,500원으로 동결을 했고, 수신료대 광고를 30:70에서 50:50으로 바뀌었다.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은 편성하지 않게 되었지만 위탁징수까지 추가되었다.[34] 물론 겉으로는 사이비 기자 퇴치, 방송공영화를 내세웠다.[35] KBS 3TV와 KBS 교육FM은 1981년 2월 2일에 개국했다.[36] 이렇게 컬러방송 시행이 늦어진 건 1970년대 초반부터 컬러방송 시행논의가 있었지만 이에 박정희가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면서 반대해서라는 후문이 있다. 하지만 KBS1를 비롯한 대부분의 TV 방송국들은 컬러방송 준비가 이미 완료되어 있었고, 컬러필름으로 녹화한 1970년대 프로그램들이 꽤 남아있다. 참고로 KBS는 1974년, MBC는 1976년, TBC는 1977년부터 컬러필름으로 녹화하기 시작했다.[37] 동시기 해외 TV시청료를 본다면 영국은 월 2.83파운드(당시 한화로 4,300원), 일본은 월 880엔(2,830원)선이고 뉴질랜드는 월 2,300원 선이었다.[38] 1일 3블록→ 평일 1블럭, 주말 3블럭.[39] 평일 1블럭→ 2블럭, 주말 3블럭→ 4블럭.[40] 사실 TV 시청료 징수 거부운동이 시작된건 1982년부터지만, 당시 여러가지 한계점들로 인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41] 기존에 1블록당 10개씩 묶어 편성되었던 걸 1블록당 8개로 줄였다.[42] 제도 자체는 1983년부터 시범적으로 시도했다.[43] 이는 당시 MBC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MBC의 경우, MBC 청룡이라는 야구팀을 소유했었다는 점이 가장 컸다.[44] 이른바 1986년 아시안게임 - 1988년 올림픽 유치.[45] 1982년부터 1986년까지 4회, 그 이후에는 3회다.[46] K리그, 씨름, 겨울의 V-리그, 프로농구 및 종목별 국가대표 선발전.[47] 물론 광고를 붙일 수는 없으니 월드컵, 올림픽. WBC나 축구국대전의 경우 2TV에서 편성하는 경우가 많다. (단, 경기시간이 겹치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축구 조별리그 3차전은 2TV가 한 경기(대한민국 경기 포함)를 중계하면 다른 경기는 1TV에서 중계한다.) 또 KBO 리그는 광고 수익이 상당하기 때문에 1998년 이후에는 포스트 시즌 경기를 2TV로 넘기고 2000년대 후반부터 거의 2TV에서 중계하고 있는 상황이다.[48] 축구국대전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 경기까지 KBS 1TV에서 담당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본선 경기부터는 광고 수익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는지 KBS 2TV에서 중계하기 시작했다.#[49]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 폐막식,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폐막식,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식은 2TV에서 방송되었다.[50] 다만 떠돌이 까치는 1987년 5월 5일에 방영되었으니 민주화 이전의 일이다.[51] 다만 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영심이, 옛날 옛적에, 2020 우주의 원더키디와 같은 시리즈물은 2TV에서 첫 방송했다. (다만 아기공룡 둘리의 경우 첫 방영은 6~7개의 에피소드를 여러 개 묶어서 방영하였다. 그래서 1TV에서 방영했던 것이다.)[52] 다만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광고수입이 감소세에 접어들기도 했다.[53] 공영방송 텔레비전 채널을 전기요금과 TV수신료를 같이 붙여서 수신료 2,500원까지 추가 되었고, 수신료면제가구를 저소득층 136만가구와 난시청지역 106만가구를 합해서 242만가구를 늘렸다. 수신료징수제도개선을 계기로 1TV의 광고를 없애자 KBS 재원구조에 수신료대 광고를 30:70에서 50:50으로 바뀌었다. 다만 공익광고방송이나, 자사 프로그램 홍보방송은 계속 하고있다.[54] 물론 그 와중에 1995년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건설 현장 가스 폭발 참사처럼 방송 위에 굽신거린다거나 한 적이 있었다.[55] 2021년부터 2TV도 중간광고를 시작하였다.[56] 현재는 SBS TV에서 사용 중이다.[57] 현재는 BBS 불교방송에서 사용 중이다.[58] 현재는 창원총국의 동일 채널에서 사용 중이다.[59] 현재는 강릉국 2TV에서 사용 중이다.[60] 현재는 TBS FM에서 사용 중이다.[61] 현재는 원주MBC TV에서 사용 중이다.[62] 현재는 동일 지역국의 2TV와 부호를 맞바꿨다.[63] 이는 자매채널인 KBS 2TV 일일드라마도 포함된다.[64] 다른 하나는 EBS 2TV. 다만 광고 폐지 이후에도 실수로 상업광고를 몇 번 방영한 적은 있다. 2TV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을 1TV로 재방송했을 때 광고를 따로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 방송했어야 되는데 광고를 편집하지 않는 실수로 광고가 그대로 전파를 탄 일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간대나 채널 특성상 인터넷 이용률이 높지 않은 시청자들이 TV를 보는 시간대라 별로 화제가 되지는 못했다. 물론 광고를 방영한다 해서 따로 광고비를 받아낸다거나 하는 일은 일절 없다.[65] 2TV 상징색은 노란색. 이쪽도 1TV 못지않게 노란색 동그라미를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66] 기사 1, 기사 2[67] 정확히는 평일 뉴스네트워크 시작 전 저녁 7시 시보, 뉴스라인 시작 전 밤 11시 시보, 주말 KBS 뉴스 시작 전 정오시보 등에 적용[68] 이때쯤 MBC도 시보음이 바뀌었다.[69] 이것은 MBC나 SBS, EBS도 마찬가지이다.[70] 지금으로 치면 미드에 해당한다.[71] 오죽하면 이 당시 KBS의 별명이 "Korean Baseball System"이었다고 한다. 출처는 이계진 아나운서의 자서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딸꾹!"이다. 그런데 KBS는 사실 당시 유일한 경쟁사이던 MBC에 야구 콘텐츠는 선점당했기 때문에 1983년 출범한 프로축구 K-리그(당시 명칭은 그냥 '프로축구'였다)로 쪼르르 달려가서 9시뉴스 리포터를 축구장 관중 경품추첨 현장에 내보내는 등 콘텐츠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72] BBC의 경우 그 유명한 MOTM(Match of the day)이 이 프로그램의 명맥을 계속 잇고 있다.[73] 1998년 8월 7일 수원 삼성-현대전이 1TV에서 중계된 최후의 평일 저녁 페넌트레이스 경기였다. 이후에도 평일 저녁 페넌트레이스 경기가 가끔 중계되지만 2TV에서만 중계된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은 2005년 한국시리즈 2차전이 마지막 1TV 중계였다.[74] 애니메이션의 경우 1990년대 당시 전국노래자랑 뒷시간대에 KBS 자체 제작 한국 애니메이션을 재방영하여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바 있다.[75] 채널 재조정 이전의 수신 지도라 현재는 그 지도보다는 수신 범위가 살짝 더 넓을 수 있다.[76] 중앙방송국 시절에 쓰인 초기 로고이다.[77] 중앙방송국 시절에 쓰인 두번째 로고이다.[78] 1980년 12월, 컬러방송 시대가 열리면서 기존의 흑백로고에서 색을 입힌 로고로 바뀌었으며, 둥근 사각형이 사라졌다.[79] 그러나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불탄 KBS 광주방송국 건물 사진을 보면 컬러방송 시작 전부터 회사 차원에서 컬러 로고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80] 참고로 이 시기에 KBS 2TV에서도 같은 합창단이 부른 로고송이 쓰였다. 그쪽은 "좋은 방송 밝은 세상 KBS" 였다. 영상을 보면 종전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ID에서 벗어나 열린음악회를 관람 중인 국민이 차례대로 등장하는데, 이는 KBS가 국민과 함께 하겠다라는 걸 의미하고 있다.[81] 참고로 90년대 초중반 당시에는 주말에 한해서지만 KBS 뉴스 9가 시작되기 전에 광고가 방송되고 나서 나왔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82] 2018년 8월 12일부터 26일까지는 '평화테마송' 송출.[83] 2001년 3월 3일부터 KBS 한국방송으로 약칭을 변경해서 기존 로고송에서 음색을 바꾸고 가사 뒤에 한국방송을 덧붙었다. 참고로 이 ID 영상에 나오는 길이는 현재는 KBS 뉴스 9 전이나 지역방송시작전에만 볼 수 있다. 나머지 시간대에는 축약버전이 나온다.[84] 20대들이 어릴 때 할머니집에서 연속극이 끝나고 들리는 그 노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85] 오늘을 담는 창과 블루 큐브 디자인 사이(2018년 후반~2021년 5월)정도에 사용되었지만 오늘을 담는 창이 생기면서 사라졌다.2021년 2월 ID[86] 원래는 하루 전인 8월 15일 KBS 뉴스 9 방송 직전 ID영상에서부터 변경된 로고송을 내보내려 했으나, 20:50부터 방송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 생중계가 길어져서 ID 영상 없이 곧바로 KBS 뉴스 9를 시작했기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87] 주말에는 주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방영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88] 다만 무조건 10개씩만 방영하도록 되어있는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달랐다. 1981년경에는 광고가 안팔려서 1블록당 광고가 4~6개씩만 편성되는것이 일상적이었다고 하고, 1985년 5월부터 1986년 6월까지 평일 오후 블록광고는 10개씩 편성하는 씩에서 8개씩으로 줄여 편성하였으며, 주말 블록광고 편성만 남은 1990년대에는 1블록당 광고를 12편씩 편성하기도 했다.[89] 그런 이유로 1TV에서 제공 자막을 볼 수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90] KBS 1TV처럼 블록광고했던 시절의 방송자료로 엔딩 제공 크레딧 없이 프로그램 끝났고 바로 방송사 ID로 넘어갔다.[91] 일요일 정오 뉴스 뒤 광고 후 전국노래자랑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