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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대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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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79년

멤피스와 네크로폴리스
: 기자에서 다슈르까지의 피라미드 지역
ممفيس ومقبرتها منطقة: الأهرام من الجيزة إلى دهشور
1979년

고대 테베와 네크로폴리스
مدينة طيبة القديمة ومقبرتها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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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عالم النوبة من أبو سمبل إلى فيلة
1979년

역사 도시 카이로
القاهرة التاريخية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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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멤피스와 네크로폴리스
―기자에서 다슈르까지의 피라미드 지역
영어 Memphis and its Necropolis
– the Pyramid Fields from Giza to Dahshur
아랍어 ممفيس ومقبرتها منطقة الأهرام من الجيزة إلى دهشور
프랑스어 Memphis et sa nécropole
– les zones des pyramides de Guizeh à Dahchour
상형문자 𓉴 (Mer, 메르)[1]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79년
등재기준 (i)[2], (iii)[3], (vi)[4]
지정번호 86

1. 개요2. 역사3. 축조
3.1. 건축 주체3.2. 건축 방법
4. 형태
4.1. 입구4.2. 왕의 방
4.2.1. 화강암 석관
4.3. 대회랑4.4. 왕비의 방4.5. 지하 방4.6. 태양 방주
5. 미스터리 및 음모론6. 대중매체 속 대피라미드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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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푸 왕의 피라미드(Pyramid of Khufu) 또는 기자의 대피라미드(الهرم الأكبر, The Great Pyramid of Giza)는 이집트 제3의 도시인 기자 소재의 피라미드로,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 쿠푸 왕의 무덤이다. 일대 피라미드 3개 가운데 가장 크기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기자와 이집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피라미드로서 '대(大) 피라미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축조시기는 기원전 26세기으로 2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공되었는데, 하술하듯 당시에는 외벽이 반죽한 백색 석회암으로 덮여 있어 더욱 완전한 각뿔 형상이었으며,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디온'(캡스톤)을 씌워 화려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대 이집트 왕조의 쇠퇴 이후 여러 차례 뜯겨 건축 자재로 전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울퉁불퉁한 암석들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피라미드는 3800년 넘게 인간이 세운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들은 기원전의 학자와 예술가들에게도 이미 현대인이 생각하는 수준의 고대 유적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스트라보, 로마의 대 플리니우스 등이 대피라미드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5] 소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곳이며, 오늘날에도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이집트에 막대한 외화를 벌어주는 랜드마크이자 관광지로, 매년 147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곳을 다녀간다. (→ '역사' 문단 참고)

피라미드의 높이는 지어질 당시에는 146.6m였으나 외벽의 석회암 석재가 뜯겨나가면서 높이가 138.5m 정도로 감소했다. 대부분은 석회암이나, 일부는 화강암으로 축조되었으며 사면의 경사는 약 51°50'40"이다. 바닥면의 길이는 230.33m이며 부피는 260만 m3에 달한다. 무게로만 치면 600만 톤에 달하는, 암석 230만 개가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내부에는 방 3개가 있다. 왕의 방과 왕비의 방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왕의 방 내부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제작된 빈 관이 하나 있다. 나머지 방 하나는 피라미드 하부 기단암을 파고 만들었는데 완공되지 않은 듯하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태양 방주를 보관하는 신전과 장제전 두 곳이 있어 석조 보도로 연결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고 잔해와 터만 남았다. (→ '형태' 문단 참고)

2. 역사

파일:greatpyramidofgiza.jpg
축조 당시 기자의 피라미드를 추정한 상상도. 맨 오른쪽이 기자의 대피라미드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6세기 이집트 고왕국전성기를 이끈 쿠푸 왕의 재위기간에 지어졌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상세한 축조년도를 특정하기는 힘들며, 고고학계에서는 대략 기원전 2700년과 기원전 2500년 사이의 어느 즈음에 대피라미드가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건축 목적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념비, 정교한 천문대 등 다양한 학설들이 쏟아져나왔지만, 학계에서는 현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쿠푸 왕의 무덤이 거의 확실하다고 여긴다.

쿠푸 왕 사후 카프레, 멘카우레 등의 후계 파라오들이 그의 피라미드 곁에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의 황금기였던 제4왕조가 끝난 이후, 더이상 이집트에서는 이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지어지지 않았다. 후대의 중왕국신왕국파라오들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잡아먹는 피라미드 대신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파서 자신의 관과 미라를 안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원전 5세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 피라미드를 관광하고 돌아갔으며, 그가 집필한 기록이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헤로도토스는 곁의 이집트 신관 및 관리들의 증언을 취합해 자신의 저서인《역사》에 그대로 기록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대피라미드가 지어진 지 2천 년이 넘은 시점이었기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헤로도토스는 피라미드가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써놓았는데, 정작 쿠푸는 신왕국보다 몇천 년 전의 인물이었다. 또한 이집트 백성들을 강제노역장에 끌고 가고, 딸에게 매춘을 시켜 그 돈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폭군으로 쿠푸 왕을 묘사했다. 당시 민주정 체제를 채택하고 전제군주를 본능적으로 경계했던 그리스 출신의 헤로도토스는 거대한 대피라미드를 지으려면 틀림없이 평민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6]

고대 이집트가 말기 왕조 시대에 들어 점차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피라미드는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파라오들이 자신의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 피라미드의 외벽 마감재들을 떼어가긴 했지만, 파라오를 제외하고는 남의 무덤에서 대놓고 돌을 채석해가는 것을 처벌했기에 원형 그대로는 아닐지언정 나름대로 보존되었었다. 하지만 말기 왕조 시대에 들어 왕권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피라미드가 말 그대로 질 좋은 채석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신전을 축조하기 위해 피라미드에서 돌들을 캐어갔고, 대피라미드는 차츰차츰 그 빛을 잃어갔다. 기원전 25년, 이집트가 로마 공화정에 병합된 직후에는 스트라본이 피라미드를 방문해 내부를 관람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기 1세기에는 대 플리니우스가 피라미드를 보고 '파라오가 제 보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들었을 것', 그리고 '피라미드 주위에 벽돌로 만들어진 귀족들의 집이 있었고 그 곁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라는 감상평을 썼다.

중세시대에 들어서는 기자의 피라미드들이 요셉의 곡물 창고라는 민중 소문이 널리 퍼졌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이집트의 기근을 예언한 요셉이 미리 막대한 곡물을 쌓아두기 위해 창고들을 지었다는 <창세기>의 구절에서 유래한 이야기였다. 이같은 근거 없는 속설은 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다스렸던 2세기부터 6세기까지 쭉 유지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라쉬둔 칼리파국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피라미드와 관련된 소문들이 엄청나게 부풀려졌다. 기본적으로 무슬림들은 피라미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바스 왕조의 제7대 칼리파였던 알 마문은 직접 피라미드의 벽을 뚫고 내부의 방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7] 피라미드 내에 파라오가 고대 이집트의 모든 비밀을 써놓았다는 말도 있었고, 우물을 통해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 멋진 탐험을 펼친 사나이에 대한 전설도 떠돌았다. 중세시대가 끝날 즈음에는 내부의 박쥐나 날짐승들 때문에 귀신 들린 장소로 유명해졌다.

여담이지만 문화재 보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알 마문은 대피라미드 곳곳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알 마문은 외벽에 시작 포인트 총 7개를 잡아 굴을 여럿 뚫었고, 석회암을 쉽게 부수기 위해 불을 지펴 가열한 뒤 차가운 식초를 들이부어 암석을 깨버리는 등 보물을 찾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심지어 벽을 부수기 위해 공성용 병기까지 동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파일:LOUIS-21.jpg
1798년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를 묘사한 그림. 저멀리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보인다.
1798년에는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제1공화국군과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격돌했다. 나폴레옹이 지중해를 건너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다음, 1798년 7월 21일에 피라미드에서 약 9마일 정도 떨어진 엠바베 마을에서 오스만 대군과 큰 전투를 벌인 것이다.(엠바베 전투) 프랑스 군대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오스만 군대는 황급히 퇴각해 남쪽으로 쫒겨나야만 했다. 역사상 이 전투를 '피라미드 전투'라고도 부른다. 참고로 나폴레옹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대피라미드가 보이는 위치에 프랑스 군대를 정렬시키고 사기를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8]
"제군, 이 피라미드 위에서 4천 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8년 이집트 원정 당시 벌어진 피라미드 전투 시작 연설 (추정[9])

이후 근현대까지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남았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지금이야 코로나 19 사태로 이전보다는 관광객 수가 약간 줄어들었지만, 한창 몰릴 때는 한 해에 무려 147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대피라미드를 둘러보고 갔다. 이집트에 엄청난 외화를 벌어다주는 효자 건물인 셈이다. 가끔씩 이슬람 극단주의 신봉자들이 피라미드가 우상숭배의 상징이라면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긴 한데, 대피라미드가 벌어들이는 관광수입과 그 상징성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군부는 아예 들은 척도 안 한다.[10] 대피라미드 덕분에 간접적으로 상당한 외화벌이를 하는 이집트 국민들도 돈이 좋기는 마찬가지라 피라미드 파괴 요구를 반쯤은 헛소리 취급한다. 애당초 《쿠란》에서도 무함마드 이전, 즉 이슬람 등장 이전 시대의 타 종교 건축물들은 파괴하지 말라고 써 있기 때문에 다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그렇듯이 피라미드 파괴를 요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전통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들이다.

3. 축조

3.1. 건축 주체

헤로도토스는 대피라미드를 지을 때 쿠푸노예 20만 명을 징집해서 지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노예를 통한 토목 공사라는 고대인의 자연스런 추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설은 오랜 시간 서구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며, 20세기까지만 해도 대피라미드는 노예의 피땀이 들어간 건축물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보급되고 피라미드 근처에서 노동자들이 살았던 마을이 발굴되었으며, 이에 따라 통념과 편견이 깨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로는 노예가 아닌 농부(자유민)들이 정부와 근로 계약을 맺고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이들이 동원된 이유는 나일 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동안 대체 일거리를 제공한다는, 일종의 공익 사업을 겸한 것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었다.[11]

실제로 노동자들이 몇몇 피라미드에 긁적여놓은 낙서에서는 '오늘은 돈을 얼마 받았고 생필품으로 뭐가 제공되었다'고 적혀있다든지, '감독관과 싸워서 며칠 동안 안 나갔다가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혀서 결국 나갔다'고 투덜거리는 듯한 낙서가 발견되었으며, 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된 석판 중에는 노동자들의 근태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결근 사유로써 과음으로 인한 숙취까지 허용되었다. 이들 자료를 토대로 추측하면, 노예가 아닌 자유민 혹은 반자유민 성격의 노동자가 다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 고고학자이자 전 이집트 유물부 장관 자히 하와스는 피라미드 주변에는 노동자들의 공동묘지 유적이 다수 발굴되며, 노예였다면 왕의 무덤 옆에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 해설하였다. 또한 무덤 벽에는 자신을 '쿠푸 왕의 친구'라고 쓴 낙서까지 발견되었으며, 이는 노예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인리히 야콥의 명저 《빵의 역사》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급료로 보리 맥주가 지급되었는데, 감독관이 이를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자는 파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록상의 '세계 최초의 파업'은 고대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이 기록은 기자의 피라미드에 대한 내용은 아니고 기원전 12세기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시절 파라오의 신전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급료를 받지 못하자 시원한 그늘에 누워서 급료를 받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버틴 것인데, 결국 그들은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기자의 대피라미드에서도 같은 식의 노동 쟁의가 가능했을 거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참고로 이런 파업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시대에까지 계속되어서 지역 총독들이 이런 지역문화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이 있다.

헤로도토스는 또한 피라미드 공사에 필요한 인부 수를 지나치게 올려잡았다는 지적이 있다. 현대 학자들이 다시 분석해본 결과, 대피라미드를 짓기 위해서는 3만 6천~ 5만여 명 정도 인력이면 충분하고 20만 명이나 되는 대인력이 투입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집트학자 미로슬라프 베르너[12]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숙련 인력 약 5천여 명과 나머지 막일꾼 3만여 명 정도면 대피라미드 하나 짓기는 거뜬하고, 서너 달쯤 교대로 일하면서 하루에 빵 10개와 맥주 1병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10명 정도씩 조를 나누어 조장과 부장을 정하고 각자 정해진 작업만 해도 10년 정도면 공사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다른 이집트학자 마크 레너가 한 연구를 봐도 많아봤자 4~5만 명 남짓한 인부들이 한꺼번에 작업하면 충분히 이른 기일 내에 피라미드를 완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건축비용은 대략 1조 원 내외가 된다. 사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페르시아군 규모를 수백만으로 뻥튀기하는 등 다른 데서도 인구수를 뻥튀기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3.2. 건축 방법

파일:l_cutting_8b_kw500_c_zanrgv.webp
피라미드를 쌓기 위해서는 돌들이 엄청나게 필요하다. 대피라미드는 남쪽으로 몇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채석장에서 바로바로 석재를 공급했다. 다만 외벽에 쓸 고급 석회암의 경우 일부러 카이로의 채석장에서 돌을 채석한 다음 나일 강의 배에 옮겨싣고 왔다. 현대적인 채석 장비가 없었던 고대 이집트에서는 석재를 떼어낼 때도 상당히 힘을 쏟아야 했다. 인부들에게 주어진 도구는 보다 한참 무른 구리로 만들어진 끌과 톱뿐이었다. 인부들이 일단 톱으로 미친듯이 돌을 줄질하면 홈이 약간 생긴다.[13] 그 홈 사이에 나무로 만든 쐐기를 끼워넣은 다음, 그 위에 물을 부으면 쐐기가 물을 먹어 부피가 팽창한다. 이 과정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쩍 소리가 나면서 단단한 화강암이 깨져나가는데, 채석장에서 이 화강암을 1차로 대강 다듬은 다음 공사 현장으로 옮겼던 것이다.[14]

공사현장으로 옮기기도 문제였다. 평균 무게가 몇 톤에 나가는 거대한 암석을 공사현장으로 낑낑대며 옮기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아래에 통나무를 굴리기에는 사막 기후인 이집트에서 목재가 지나치게 귀했으므로, 이집트인들은 대신 썰매를 이용했다. 나무로 만든 썰매를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암석을 올린 다음 장정 몇십 명이 달라붙어 줄을 끌어서 옮겼다. 윤활 작용을 위해서 물을 중간중간 썰매 아래쪽에 부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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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피라미드를 쌓을 때 목재 골조를 사용했을 거라는 설, 임시 가벽을 쌓았을 거라는 설 등 다양한 학설들이 존재했지만 현대 학계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건 경사로설이다. 이 경사로설 사이에도 어떤 경사로를 이용했을지 학설이 분분한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자형 경사로였다는 것이 통설이었는지라 이 시기 출판된 역사서나 학습만화를 보면 이렇게 묘사한 책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나선형 경사로설이 가장 유력하다. 나선형으로 피라미드를 빙빙 둘러가며 경사로를 쌓아 그 위로 암석을 옮겨 쌓은 다음, 피라미드가 완성되면 경사로를 싹 치워버렸을 거라는 학설이다. 그나마 가장 경제적이고 필요한 시간이나 인력도 적어서 나선형 경사로설이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다.[15] 그 외에도 내부 경사로설, 대형 직선 경사로설 등의 이론도 존재하는데, 내부 경사로설은 지나치게 복잡해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고 있고 대형 직선 경사로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는 단점 때문에 학계에서 딱히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피라미드의 기본 암석들을 쌓는 일들이 다 끝나면, 마지막 단계는 석회암을 가공하는 것이었다. 내부의 암석들과는 다르게 외벽의 석회암들은 모래로 갈아서 반질반질하게 윤을 냈다. 이렇게 가공한 석회암을 피라미드 외벽에 입히면 태양빛이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황금 등으로 도금한 '피라미디온'을 올려서 마감했다. 하지만 비싼 귀금속으로 만들어졌던만큼 제일 먼저 도굴당했으며, 현재는 흔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금속 피라미디온이 사라진 것은 주변의 피라미드들도 마찬가지로 남아있는 유물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이는 이집트 쇠퇴기에 돌로 깎아 도굴 가치가 없었던 다른 피라미디온을 통해 그 형상을 추정한다.

4.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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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라미드의 단면도.
1번은 공식 입구, 2번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도굴꾼들이 파낸 입구, 3, 4번은 정식 입구에서 들어와 내려가는 하강 통로, 5번은 지하 방, 6번은 올라가는 상승 통로, 7번은 왕비의 방과 환기구, 8번은 수평 통로, 9번은 대회랑, 10번은 왕의 방과 환기구, 11번은 석재 환기구. 단 11번 통로의 용도에 대해서는 현재도 말이 많은데, 대회랑을 돌로 막은 후 인부들이 내려갔을 통로라는 설부터 단순히 부실공사로 인한 틈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대피라미드는 암석 총 230만 개로 이루어졌다. 개중 석회암이 550만 톤, 화강암[16]이 8천 톤, 회반죽 50만 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는 지어진 직후에는 백색 석회암으로 외장재를 덮어놓아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피라미드를 이루는 돌들 사이사이에는 회반죽을 발라 고정했고, 겉면을 사포나 모래 등으로 문질러 윤이 나게 만들었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피라미디온'이라는 캡스톤을 얹어 마감했다.[17] 대피라미드의 피라미디온은 이미 그 상징성 혹은 금붙이 때문에 기원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18]

게다가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이 건물을 짓거나 자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손질이 한 차례 끝난 피라미드에서 석재를 골라 빼가면서 현재의 거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1303년에는 크레타 섬 인근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피라미드 외벽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고, 맘루크 왕조의 역대 술탄들이 카이로를 지으려 피라미드 외벽의 석재들을 끝없이 빼갔다. 마지막으로는 19세기 이집트 왕국창업군주 무함마드 알리 파샤가 알라바스터 모스크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대피라미드에서 막대한 석회암을 가져갔고 현대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의 돈을 빼오고 있다.

4.1.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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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라미드의 공식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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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입구와 그 아래의 관광객용 입구.
피라미드 입구는 북쪽 면, 피라미드면의 중심 축에서 동쪽으로 15m 정도 벗어난 지점 13층계 정도 높이에 있다.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가 쌍을 지어 맞대어 서있는 입구로, 원래는 거대한 암석으로 막혔으나 현재는 모조리 파괴되어 달려있던 문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입구 근처에 가보면 수많은 낙서들이 가득하다. 낙서들은 대부분 근현대 들어서 적힌 것들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1842년 프로이센의 이집트 원정을 기념해 새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기념용 상형문자 등이 있다.

정식 입구는 여기지만 관광객들이 들어가는 입구는 따로 있다. 관광객들은 9세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이 파놓은 통로를 통해서 들어가는데, 이 입구는 5층계 정도에 있고 너비는 상당히 좁다. 이 입구로 들어가 약간 아래로 경사진 도굴용 통로를 따라 쭉 걸어가면 정식 입구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던 내부 복도와 연결된다. 이 입구를 발견할 당시 이 곳에 금화 몇 개와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 알 마문이 몰래 숨겨놓은 것이라 추정된다. 피라미드에서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으면 인부들이 실망할까 우려한 알 마문이 미리 금화 몇 개를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대피라미드 비밀 통로?…'미지의 공간' 찾았다" JTBC 2023. 3. 3. 보도
2023년 2월 경에는 대피라미드 정문 근처에서 새로운 복도형 공간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4.2. 왕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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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라미드 중심부에 위치한 방. 피라미드 내부의 방 3곳 중 가장 위쪽에 있으며, 크기는 10.5m × 5.2m에 높이는 5.8m이다. 천장을 포함해[19] 모조리 거대한 화강암 암석들로 만들어졌으며 위쪽에는 하중을 받치기 위해 층층이 쌓인 화강암들이 막대한 압력을 분산시킨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큰 압력을 몇천 년에 걸쳐 지탱하다보니 지붕의 화강암들 모두에 2.5cm에서 5cm 정도 금이 쩍쩍 갈라졌다.

석실의 벽에는 제4왕조의 전통에 따라 그 어떠한 상형문자나 장식도 새기지 않았고, 벽을 이루는 암석의 뒷쪽은 손질되지 않았다. 실제 왕의 방인지는 알 수 없고 임의로 붙여진 명칭이다. 석실의 북쪽과 남쪽 벽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얕은 구멍이 1개씩 나있는데, 이를 '환기구'라 부른다. 남쪽 환기구는 대략 45도 각도로 외부까지 통한다. 현재는 습기 제거를 위해 이 구멍 둘 다에 환기기구를 설치했다.

환기구의 의도나 위치를 가지고 여러 말이 많았다. 예전에는 신비주의 학자들이 환기구가 별자리나 특정 천체를 가리킨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아니라고 밝혀졌다. 남쪽 환기구 통로는 약간 휘어 있고, 북쪽 환기구 통로는 어떤 각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이리저리 꼬여 외벽으로 통하기 때문. 이집트인들이 특정 천체를 가리키기 위해 이 환기구를 지었다면 곧은 일직선으로 만들었을 것이므로 현재는 거의 폐기된 학설이다.

4.2.1. 화강암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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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방 내부에 자리한 큼직한 화강암으로 제작된 관. 중세 시대에 발견되었을 때 이미 모조리 도굴당한 상태라 그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토록 정교한 피라미드의 관치고는 제작 당시 표시한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마감도 끝나지 않은 등 미완성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길이는 2.28m × 0.98m × 1.05m의 사이즈에 두께는 15cm이다. 내부의 안치 공간의 크기는 1.98m × 0.68m 정도의 사이즈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평균 신장을 고려했을 때 왕의 미라가 넉넉하게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관의 모양은 고왕국 시대의 전형적인 관의 모습으로, (현재는 사라진) 위쪽 관뚜껑을 고정하기 위해 구멍 3개를 뚫었다. 또한 관의 크기는 왕의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보다 약간 더 크다. 따라서 방에 천장이 얹히기 이전, 즉 공사를 하면서 관도 함께 놓였다는 뜻이 된다.

4.3. 대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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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용 입구를 지나 상승 통로를 따라 쭉 올라가면 나타나는 거대한 규모의 회랑. 길이는 46.68m이며 높이는 8.6m에 이른다. 들어가는 기단부의 폭은 2.1m로 꽤나 넉넉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벽이 경사지게 들어오는 모습이기 때문에 가장 위쪽 부분은 폭이 1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목재로 계단 비스무리하게 만들어 놓았다. 대회랑의 천장은 벽보다 약간 더 경사진 모습으로 돌들이 맞대어져 있는데, 이는 대회랑에 가해지는 엄청난 하중을 견뎌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워낙에 건축학적으로 잘 만들어 놓은 장소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대회랑을 이집트 건축의 기념비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참고로 대회랑의 끝 동쪽 벽에는 피라미드 최하단의 방으로 향하는 조그만 터널이 있으나 물론 사람이 지나갈 만한 크기는 아니다. 대회랑을 지나면 왕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이 피라미드 내부는 매우 덥다.

4.4. 왕비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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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라미드 중심부에 위치한 방. 왕비의 방 역시 실제 왕비의 방인지는 알 수 없으며 임의로 붙여진 이름이다. 피라미드 내부의 방 3개 중 중간에 있으며, 크기는 5.8m × 5.2m다. 뾰족하게 경사진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높이는 6.3m이다. 정식 입구로 들어간 후 하강 통로를 지나 대회랑으로 올라가지 않고 수평 통로를 따라 쭉 이동하면 그대로 왕비의 방에 들어갈 수 있다. 왕비의 방으로 들어가는 수평 통로는 폭 1m, 높이는 1.17m에서 1.68m 정도로 상당히 낮고 좁아 이동하기 불편하다.

고고학자들은 왕의 방에 있는 것처럼 왕비의 방에도 환기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방을 샅샅이 조사했고, 결국 방 가까이에 있는 환기구 2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왕비의 방의 환기구는 구리 손잡이가 달린 석회암 덩어리로 막혀있었고, 다른 쪽 끝 역시 외벽 바깥으로 뚫려있지 않았다. 2011년에 한 고고학팀이 스네이크 카메라 기술을 이용해 환기구를 막은 석회암 덩어리를 파내본 결과, 붉은색 염료로 상형문자가 새겨진 좁다란 방을 찾았다고 한다.[20][21] (현재는 출입불가)

4.5. 지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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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에 있는 방 3개 중 유일하게 기반암을 파고 들어가 설치된 방으로 지면 27m 아래에 있다. 대략 8.4m × 14.1m 정도의 투박한 직육면체 공간으로, 높이는 4m 정도로 꽤나 크다. 왕의 방이나 왕비의 왕과는 달리 확실히 미완성된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방이기도 하다. 입구는 동쪽 벽 쪽에 나있는데 입구와 멀어질 수록 완성되지 않은 티가 난다. 그래서 입구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서쪽 벽의 경우에는 천장부터 시작해서 아직 채 치우지 못한 흙더미까지 가득 쌓여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나일 강과 폭우로 인해서 완전히 침수되어 있었으나 이후 고고학자들이 물을 빼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방이 원래 쿠푸가 묻힐 안치실이었으나 중간에 마음을 바꿨던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4.6. 태양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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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 왕이 하늘로 승천할 때 사용할 거대한 방주. 피라미드 동쪽에는 거대한 구덩이 3개가 있었다. 1954년 5월에 처음으로 이 구덩이의 존재를 발견했고, 이 구덩이에서 목재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덩이의 모습을 보고 목재들이 배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 고고학자들은 1224개에 달하는 목재 조각들을 일일이 짜맞추기 시작했다. 조각들은 큰 것은 23m에서부터 작은 것은 10cm 까지 크기가 가지각색이었다. 학자들은 밧줄을 이용해 그 많던 조각들을 제자리에 이어붙였고, 그 결과 14년이라는 대작업 끝에 마침내 완벽한 배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보존처리를 마친 후 한동안 대피라미드 옆에 건설된 전시관에 전시되다가 현재는 신설되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이전되었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매일 낮에는 낮의 태양선 맘제트(Mamdjet)를 타고 하늘의 나일 강을 동에서 서로 여행했고 밤에는 밤의 태양선 메스케트(Mesket)를 타고 신 오시리스가 지배하는 지하에 있는 명계의 나일강을 서에서 동으로 여행했다. 따라서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태양 방주 또한 2척으로 구성되었으나 1980년에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팀이 발굴한 나머지 하나는 아직 조립 중이다.

5. 미스터리 및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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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의 허리띠'를 이루는 별 3개와 기자의 3개 피라미드를 비교한 모습.

워낙 엄청난 건축물인만큼 관련된 미스터리나 음모론도 넘쳐난다. 가장 대표적인 가설 중 하나가 쿠푸의 대피라미드, 카프레의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오리온자리의 별 배치를 따라서 지었다는 것이다. 오리온자리를 잘 보면 '오리온의 허리띠'라고 해서 별 3개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데, 피라미드가 지어졌을 기원전 1만년 전 무렵 이 별들의 배치가 기자의 3개 피라미드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점점 살이 붙어가면서 나중에는 기자의 대스핑크스사자자리를, 나일 강은하수를 의미한다고까지 주장하는데에 이르렀다. 사진을 서로 대조해보면 은근히 그럴듯한 주장이라 많은 지지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풍요오시리스를 상징했기에 더더욱 그럴듯한 가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천문학이 발전하자 이 주장도 논박당하였다. 천문학자 에드 크루프와 토니 파이랄이 플라네타리움을 이용해 연구한 결과, 피라미드가 지어질 당시 별들 사이의 각도는 약 47-50도 정도 각이었던 것에 반해 피라미드 사이의 각도는 그에 한참 못미치는 38도 정도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3개 피라미드를 연결하는 선을 그으면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데에 반해 오리온자리 3개 별을 잇는 선을 그으면 정반대인 남쪽으로 치우치며, 만일 대스핑크스가 사자자리를 상징한다면 이는 은하수, 즉 나일 강의 정반대편에 있어야 한다고. 게다가 가장 결정적으로 별자리들의 이름과 그에 관련된 신화는 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애초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별자리를 '사자자리'라고 부르지도 않았을테니 현대의 사자자리와 대스핑크스를 연관 지음이 더 이상할 지경이라는 뜻. 따라서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이 학설을 거의 사장된 사이비 과학 수준으로 취급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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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유명 미스터리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뚫린 환풍구 2개가 하늘의 별자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사실 이 미스터리는 위의 오리온자리와 관련된 가설처럼 신빙성없는 이야기는 아니고 오히려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다. 피라미드 가장 안쪽 왕의 방에는 정체 모를 구멍이 2개 있는데, 학자들은 처음에 이 구멍이 공기가 통하기 위한 환풍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환풍구라는 주장이 힘을 잃었다. 로봇을 통해 환풍구 내부에 카메라를 집어넣어본 결과 환풍구 중간에 돌이 지어져 막혀 있었기 때문. 그래서 힘이 실린 가설이 바로 별자리 가설인데, 환풍구가 용자리의 알파성 투반, 오리온자리의 벨트, 북극성, 작은곰자리의 코카브[23]를 가리킨다는 학설이다. 별들을 가리키는 이 구멍들을 통해서 파라오의 영혼이 그대로 하늘의 별들을 향해 승천했다는 것. 하지만 추가적인 조사 결과 북쪽 환기구는 이리저리 꼬아진 모습인데다가, 남쪽 환기구가 약 20cm 가량 휘어진 것으로 밝혀져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왜 이집트인들이 이 환기구를 뚫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피라미드가 하늘의 별자리와 연관이 있다거나 고도의 기술을 사용한 건축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리엔탈리즘과 결합해 극단으로 치달으면 초고대 문명설이나 외계문명기원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고학계에서는 헛소리로 취급하는 중. 이러한 가설은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미개한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것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라는 제국주의적 오만함에 의거한 백인 우월주의와도 상통한다. 이집트인들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초고대문명론이나 외계인 기원설 따위를 주장하는 학자들에게는 아예 이집트 현지의 발굴 및 연구 허가를 안 내준다고 한다.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이 초고대 문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아예 반쯤 미친 작자들로 취급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일부 사람들은 '대피라미드가 애초에 무덤으로 지어지긴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미 9세기 경 아바스 왕조알 마문이 탐험을 빙자한 도굴 작업을 벌였을 때부터 피라미드 내부는 텅 비었기 때문이다. 무덤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부장품, 도굴당했다고는 해도 하다못해 깨진 도자기 파편이라도 하나 남아있을 법이라도 한데 그것조차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이다. 파라오미라도 부장품도 나오지 않았으니 대피라미드를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지었던 게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기자의 피라미드들에만 이 것들이 왕의 무덤이라는 확증이 없을 뿐, 다른 피라미드들에는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기록이 대놓고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조세르의 피라미드에는 관과 부장품이 발견된 바 있고 그 외에 파라오 테티의 피라미드에서는 수 백여구의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피라미드를 천문대 용도로 지었다거나 요새로 지었다는 둥 대부분의 이야기를 근거 없는 소리로 취급한다.

다만 건축학적으로 미스터리한 점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피라미드의 네 면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근세에 세워진 그리니치 천문대마저도 약 9분[24] 정도 틀어져 있는데 수천 년 전에 세워진 대피라미드가 정확하게 방위를 맞추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틀림없다. 미스터리라기보다는 당시 고대 이집트의 놀라운 건축 기술 성취도를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피라미드를 쌓으려면 주위에서 발견된 채석장보다 최소 3배는 더 큰 채석장이 필요하다는 의문이 있었으나 나일 강을 통해 외부에서 돌을 실어왔다는 지적에 논파당했고, 피라미드 건설방법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의문도 있는데 이건 아마 위에서 언급한 경사로설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6. 대중매체 속 대피라미드

7. 관련 문서



[1] '피라미드'의 어원은 그리스어다.[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최초의 문헌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남긴 것인데, 이때 이미 지어진 지 천 년이나 지난 유적이었다.[6] 현대 고고학자들의 조사 결과, 강제로 노역시킨 것이 아니라 나일 강의 범람으로 농토가 잠겨 농민들이 놀고 있을 때 쿠푸가 봉급을 줘가면서 대피라미드를 짓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7] 알 마문은 피라미드의 보물을 찾아내려고, 도굴 발굴을 시도했는데 대피라미드의 '알 마문의 갱도'는 이 시기에 착굴된 것이다. 그러나 알 마문이 도굴했을 때 이미 피라미드의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8] 다만 열흘도 안 되어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나일 강 유역에서 프랑스 해군을 무찌르면서 프랑스는 얼마 못 가 이집트에 대한 영유권을 빼앗겼다.[9] 몇몇 학자들은 이 발언이 후대의 선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했는데, 전투가 벌어진 장소인 엠바베에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안 보였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이집트학자인 곽민수 박사는 전투가 벌여졌던 평원보다 더 먼 15km 밖의 카이로에서 직접 대피라미드의 사진을 찍어 멀리서도 보인다는 걸 증명하면서 조작된 말일 가능성이 낮다는 견해를 밝혔다.[10] 의외로 이집트에서는 독재 정치를 펼치는 군부가 세속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현 이집트 대통령인 압델 파타 엘 시시 대통령도 세속주의 성향이다.[11] 쓸데없어 보일지라도 억지로나마 부를 재분배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사회적으로도 입증되었고, 지배층도 대형 건축물을 통해 본인 위신을 세우며 백성들 일자리도 제공하는 게 사회안정에 좋다.[12] 체코의 이집트학자. 주로 고왕국 시대 이집트에 대해 연구한다.[13] 약간의 홈이 생기면 그 속에 고운 모래를 집어넣고 다시 줄질을 했다. 그러면 모래 속 석영 성분 덕분에 훨씬 효율이 높아진다.[14] 참고로 이 방법은 화강암이 많은 한국의 옛날 채석장에서도 사용했던 방식이다. 이집트 고왕국 문화권과 별로 상관없는 고대 한반도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일종의 수렴 진화로, 그만큼 나무의 팽창을 이용한 채석 방법이 들이는 품에 비해 효과가 좋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선 면밀히 계산된 위치에 있는 불과 작은 나무 기둥(쐐기) 3개만으로 단단한 화강암을 마치 두부처럼 잘라낸다.[15] 바벨탑 문서에 있는 이미지처럼 고대 중동에도 나선형 경사로 구조는 널리 쓰였으니, 옆동네 사는 고대 이집트인들도 충분히 떠올려볼 만한 개념이었을 것이다.[16] 나일 강아스완에서 가져왔다.[17] 대중문화나 서브컬쳐에서는 화려함을 강조하기 위해 황금으로 만들어졌거나 번쩍거리는 빛나는 모습으로 피라미디온을 묘사한다. 다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피라미디온들은 모두 석회암이나 화강암 재질이며, 그나마 제5왕조 시절 만들어진 사후레의 피라미디온이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18] 대 플리니우스는 당시에 이미 피라미드의 피라미디온이 사라졌다고 썼다.[19] 왕의 방의 천장은 400톤이 넘는 거대한 화강암 9개로 만들어졌다.[20] 석회암 덩어리의 외벽 쪽 부분은 광택 작업으로 윤이 나던 상태였다. 즉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라 무언가 불명의 이유로 그 곳에 놔두었다는 뜻이다.[21] 붉은 염료로 새겨진 문자는 숫자인 듯한데, 피라미드 건설 과정에서 돌의 용도나 위치를 표기하기 위해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피라미드용 석재에서 염료로 적은 숫자가 발견된 예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22] 이 가설을 주장한 그레이엄 핸콕은 다른 사이비스러운 음모론을 계속 주장하다가 고고학자들에게 여러차례 논파당한 적이 있다.[23] 작은곰자리의 '작은 국자'에서 국자의 우묵한 곳에 해당되는 별이다. 별자리에서 가장 밝은 북극성 폴라리스보다는 약간 어두워 바이어 명명법으로 '베타' 기호를 받아서 '작은곰자리 베타'라고도 불린다.[24] 1분은 1도의 1/60[25] 키르쿠스 막시무스로 이전됨.[26] 특이한 점으로는 건물 전체 외형을 재현하는 아키텍처 시리즈와는 달리, 반쪽만 들어 있어 완전하게 만들려면 두 개를 구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