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
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지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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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중성
"이제 문제는 어디를 조준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사격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가 되었다." —오시리스그건 전리품 사냥이었다.
거미 남작이 아끼는 부관(그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에게 수여하는 칭호) 하나가 사라졌다. 거미는 배반을 의심했다. 그는 까마귀에게 현장으로 나가 답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벽에 걸어 두고 충성심을 자극하는 용도로 이용할 만한 것 말이었다.
까마귀가 파악한 부관의 마지막 위치는, 뒤엉킨 해안의 미개척 지역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산마루에 오른 그는, 예상했던 광경 그대로를 보았다.
부관의 흔적은 검은 현무암에서 삐죽 솟은 비밀석탑에서 끝이 났다. 거미의 졸개가 또 시부 아라스의 속삭임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 전의 졸개 하나와, 또 그 전의 둘이 그랬듯이. 하지만 거미가 말했듯이, 거미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증거를 요구했다.
까마귀는 비밀석탑의 그림자에 무릎을 꿇었다. 미끼는 이미 그의 손안에 있었다. 곱고 파란 모래에는 최근에 생긴 엘릭스니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남은 명쯤이었다. 그가 처리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농축 에테르가 담긴 병을 꺼내 미끼에 끼웠다. 그것은 용기 안의 영혼불꽃과 섞이면서 거품을 냈다. 미끼의 얇은 금속 케이스에 습기가 방울방울 맺혔다.
그는 거치대를 땅의 균열 속에 박아 넣고 출력을 조절한 다음, 미끼에서 짙은 페로몬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손짓해서 글린트를 부르고, 함께 전망이 좋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는 개조 산탄총의 가압 장치를 손보더니 총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최악의 부분에 마음의 준비를 했다. 비밀석탑이 방송하는 고약한 설교를 듣는 것이었다.
첨탑의 존재감이 피부에 닿아 간질거렸다. 까마귀는 뒤틀리며 웅웅거리는 흉물스러운 토템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 맥동하는 빛이 시야에서 벗어나면 속이 매우 불편했다. 꼭 사냥당하는 기분이었다.
까마귀는 무기의 조준경을 다시 조정하고 말없이 경계를 계속했다. 스트레스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탑에서는 고동치는 압력이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까마귀는 눈이 욱씬거렸다. 그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했다.
글린트가 근처의 바위로 날아가서 흥미로운 이끼가 덮인 땅을 스캔하는 동안, 까마귀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차오르는 메스꺼움을 억누르려 했다. 숨을 죽여 속삭이는 소리가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는 뭔가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을, 심장 바로 위를 쓰다듬는 느낌을 받았다. 부드럽고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까마귀." 글린트가 말했다.
까마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들이 보여요."
엘릭스니 분노의 자손이 무리 지어 미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거미의 가문임을 나타내는 깃털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중구난방이었지만, 거기에는 시부 아라스에 복종하여 얻은 강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끝났어." 까마귀가 씁쓸하게 말했다.
분노의 자손들은 비밀석탑을 발견했다. 그들은 제정신이 아닌 듯이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 분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거칠고 딱딱거리는 언어로 말을 하며, 이 세상 것이 아닌 힘으로 미끼 주위의 땅을 파헤쳤다.
그중 하나가 까마귀가 숨어 있는 곳을 지나갔다. 눈은 흐리멍텅하고, 턱에서는 침이 흘렀으며, 분노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전신에서 아른거렸다. 놈은 나머지 자손들을 향해 달려가서, 그들과 함께 리드미컬한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구호를 외치고 있어요." 글린트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점점 불어나는 무리 쪽을 보았다. "어법이 뒤죽박죽이지만 제가 해석할 수 있—"
"하지 마." 까마귀가 말했다. "부탁이야."
그는 무기의 조준경을 들여다보고 일을 시작했다.
3. 매의 달
사냥감을 추적하고 그대의 발톱으로 어둠을 덮치세요.이 기분은 무엇이지?
내가 요청한 것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군. 난 원치 않는다.
무지한 까마귀는 아무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 모닥불의 빛이 그의 창백한 모습을 비추고, 나는 그의 황금빛 눈에 어린 희망에 이끌린다. 내가 예상했던 절망에 빠진 아이는 어디에 있지?
그는 고스트의 만류에도 병을 들고 와인을 마신다. 수호자가 그를 격려하고,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축하하고 있다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두 사람 다 이렇게 의기양양할 이유가 없을 텐데. 그들의 세계는 끝나 가고 있고, 그들은 붕괴하는 별의 마지막 빛에 사로잡혀 죽어가는 짐승들처럼 발버둥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존재가 얼마나 무가치한지 모른다. 우주의 소멸 앞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모르고 있다.
이제 수호자가 불에 가까이 선 채 마시고 있다. 그들의 고스트도 그러지 말라고 설득하는 중이다. 그들은 그저 즐겁다는 이유로 스스로 독에 중독되고 있다.
자매들이 떠오른다. 파도가 철썩이는 해안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끝없는 별을 올려다 보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도 동경하고 있다.
이 기분은 무엇이지?
이해할 수 없군. 난 원치 않는다.
그들은 굴복자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까마귀는 한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고, 다른 손으로는 거의 빈 와인 병을 칼처럼 휘두르고 있다. 수호자는 불가의 바위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그들이 지키는 비밀을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까마귀도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만, 따로 티를 내지는 않는다. 그는 수호자가 기운을 차리게 해주려 한다.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지지해 주려 한다.
동등한 존재로서.
고향이 떠오른다. 태양과 내 가족의 품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배신한 모든 이들이 떠오른다. 불멸이라는 이름 아래 흘렸던 모든 피. 태양의 온기가 그 기억으로 나를 불태우고 있다.
이 기분은 무엇이지?
난 원치 않는다.
불이 거의 꺼졌다. 까마귀는 쓰러졌다.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일어나지 못한다. 수호자는 칼끝으로 불씨를 뒤적이고 있다. 고스트들은 서로 이야기하며 조용히 음모를 꾸미고 있다. 자축연은 종료되었지만, 그들의 감정이 복합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수많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은 단 하나의 단순한 문제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와 함께 판단력은 흐려져 간다.
이 기분은 무엇이지?
4. 동경의 대상
거미의 잡다한 취향에 맞춰 다듬은 지구의 유물입니다."늦었군. 이건 우리에 대한 모욕이다." 거미의 현장 대원의 엘릭스니 지도자인 브리비가 파이크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아래쪽 팔로 와이어 소총을 꺼내며 헬멧의 깃을 세워 언짢은 표정을 드러냈다. "거미는 이 화물을 어제 받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인간 밀수업자는 짜증 난다는 듯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브리비의 헬멧에서 빛나는 렌즈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거미의 생각 따위는 오우거의 따끈한 똥 덩어리만큼이나 관심 없어." 그의 손이 보조 무기로 다가가 살며시 손잡이 위에 놓였다. "수호자들 눈에 띄지 않고 탑에서 도시 시대의 장비를 조달할 방법이 또 있다면, 얼마든지 써먹어 보라고 해."
모욕적인 말에 브리비의 부하들 세 명이 이를 드러내며 전기 무기를 작동시켰다. 브리비는 위쪽 팔 하나를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 인간을 죽이면 거미가 더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장비를 꺼내 봐라."
밀수업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감압하는 쉬잇 소리와 함께, 도약선의 화물실이 열리고 반짝이는 무기들이 담긴 상자 몇 개가 드러났다. 폭력배 같던 현장 대원들의 태도가 사탕 가게에 들어선 아이들처럼 바뀌는 모습을 보며, 그는 비웃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즉시 무기를 쓰다으며 도시 시대의 솜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브리비는 고급스러운 보라색 천에 감싸인 놋쇠 색 저격총을 들어 올렸다. 섬세한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진 우아한 총열은 무기라기보다는 악기에 가까워 보였다.
이런 예술적 감각을 이토록 실용적인 물건에 발휘하다니, 인간은 얼마나 부유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기가 도난당한 곳에서 얼마나 많은 보물이 썩어가고 있을까 궁금했다. 또 전성기에 이 소총이 얼마나 많은 엘릭스니를 죽였을까 생각했다.
인간의 무기와 비교해 보니, 고철을 수리해서 만든 브리비의 와이어 소총은 초라하고 너절해 보였다.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인간이 왜 그의 동족을 "몰락자"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브리비는 저격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쓰레기를 전부 실어라." 그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자."
5. 무기
5.1. 마찰의 불꽃
속도와 열기, 빛. 마음껏 발사하세요."무슨 소리야? '사라졌다'니?" 거미는 성난 기색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왕좌에 앉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들의 파이크에는 추적기가 붙어 있었다. 왜 바로 쫓아가지 않은 거지?"
브리비는 거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손바닥 네 개를 모두 바닥에 댔다. "파이크는 남았습니다. 밖에 있습니다. 대원들만 사라진 겁니다. 상자하고요." 그는 깃을 납작하게 가라앉히고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사라졌다고. 리프 한가운데서. 그것도 걸어서. 미광체 백만 개짜리 무기를 갖고. 뭔가 말이 안 되잖아." 거미는 아브로크와 아르하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융해 용접기를 들고 브리비에게 다가섰다. "어차피 진실은 곧 알 수 있겠지."
브리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부탁드립니다, 거미 남작님. 그게 진실이 아니었다면, 전 돌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브로크는 브리비의 위팔 하나를 녹여 떼어낼 준비를 마치고는 거미를 바라보며 명령을 기다렸다.
거미가 미처 입을 열기 전에, 옆쪽에 있던 까마귀가 앞으로 나섰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작님…"
거미는 아브로크에게 멈추라는 손짓을 하고는 빛의 운반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냐? 내 체벌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여기서 나가도 좋아."
"그게 아닙니다, 남작님. 브리비의 말은 리프에서 글린트와 제가 목격했던 몇 가지 사례와 일치합니다. 아무래도 그 군체 구조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까마귀는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닥에 엎드린 브리비를 바라봤다. "게다가, 브리비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가 도둑질에 참여했다면, 여기로 돌아오진 않았을 겁니다. 글린트와 제가 그의 여정을 되짚어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 현장 대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저희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모르죠… 무기를 회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미는 왕좌에 앉아 느긋하게 긴장을 풀었다. "좋아, 까마귀. 가서 내 무기를 찾아라. 현장 대원들을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네, 남작님." 까마귀는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그의 뒤에서, 거미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브로크, 계속해라."
5.2. 귀청을 울리는 속삭임
"옳은 이야기는 음량과 관계 없이 크게 들리는 법이지." —오시리스시종은 전장의 아수라장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것은 각성자 테키언의 무표정한 조각상 아래를 유쾌하게 달렸다. 기념비와 뻣뻣하게 굳어 가는 사체들 사이의 추상적인 연결 고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것은 모든 재료에 똑같은 관심을 보였다. 피로 얼룩진 천, 돌 잔해, 불에 탄 종이, 내장까지. 그것은 텅 빈 탄띠를 유심히 관찰했다. 머리카락 뭉치를 잘근잘근 씹어도 보았다. 맛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시종은 툴코르의 공허 눈길에 반으로 잘린 사체의 상반신을 뒤집었다. 다른 적들과는 달리 그 사체는 두꺼운 검은색 튜브를 붙잡고 있었다. 육신이 아닌 금속이었다. 그것은 멈춰 섰다.
무기일까?
그것은 튜브를 붙잡고 끌어당겨, 적의 굳은 손가락에서 튜브를 빼냈다. 튜브가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폭발은 시부 아라스의 흉폭함도 비틀거리게 했다.
무기다.
공격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시종은 마지막 형체를 엿보았다. 이 무기만 있으면 시종은 승천할 수 있었다. 논리를 부과할 것이다. 이 무기만 있으면 파괴도—
그렇게 시작된 그것의 생각은 공허한 으지직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시종의 두 눈이 흐릿해졌다. 그것이 지상으로 풀썩 쓰러지자, 기사는 시종의 두개골에서 검을 빼냈다. 그것은 부하의 사체를 한 손으로 내던져 버리고 다른 손으로 유탄 발사기를 집어 들었다.
시부 아라스의 기사에게 어울리는 멋진 무기였다.
5.3. 왕의 추적
"왜 여기 나와 있는 거냐고 누가 묻거든, 아무 말 없이 재장전하게." —데브림 케이선봉대 네트워크/PRXC 정찰대 광대역//:AudCHNL-33295, 공개//:LogSkew-859128312785
VGS-6: 아직도 토성 근처에서 그 괴물을 쫓고 있어?
PXC-0: 그래. 닐-1은 타이탄 상공에 머무르고 있어. 목표 지점 진입은… 음, 27시간 후 예정. 3시간 후에 벗어난다.
VGS-6: 엄청나게 긴 교대 근무구먼. 너희 실천의 세력 친구들,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거기 들어간 거 후회하지 않아?
PXC-0: 그런 건 상관 없어. 우린 잠을 자지 않으니까.
VGS-6: 그러시겠지.
[통신 중단.]
VGS-6: 아니, 너희도 잠은 자잖아.
PXC-0: 아니야.
VGS-6: 왜 이래. 내가 수호자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PXC-0: 아니라고.
VGS-6: 자꾸 그러면 윗사람에게 연락한다.
PXC-0: 제대로 된 윗사람이라면 우리 세력과 논쟁하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VGS-6: 좋아, 잘 들어, 제프. 너는 그 세력이 아니야. 나도 그런 데 신경 쓰고—
PXC-0: 조용히 해. 대상에서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다…
VGS-6: 뭐라고?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PXC-0: '거의'라고 했잖아… 베림, 이거 기록해 둬. NavTAC에 직접 피드를 연결해 주고.
PXC-0-베림: 연결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중력 이상 현상이 감지— 아니, 붕괴됩니—
[잘 들리지 않음. 신호 간섭.]
[통신 중단. 몇 분 가량의 침묵.]
PXC-0: (거친 숨을 몰아쉬며) NavTAC, 돌아와라. NavTAC, 돌아와라. 연결 신호가 수립됐다… NavTAC, 돌아와라. 원격 계측 위치가 토성의 반대쪽으로 확인됐다. 변위 측정치는 약 470,000km. 타이탄이… 타이탄이 사라졌다. 말도 안 돼.
PXC-0: NavTAC. 선봉대 정찰조, 응답하라. 탑, 들리나? 해리엇, 듣고 있어?
[신호 삭제됨]
[교신 삭제됨]
5.4. 폭발 몰이 사냥
"그래, 자네가 처치했지. 하지만 가죽이 엉망이 됐잖아." —데브림 케이Rc-9: 여기는 선봉대 민병대 정찰선 리콘-9, 선봉대 네트워크 대체 위성을 통해 보고한다. 현재 리프 탐색을 마친 상태로, 이번 정찰 임무에 대한 보고서를 전송한다. 향후 이번 임무를 참조할 경우 사건-01번을 이용할 것.
화자가 자리에 앉으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서류를 분류하는 소리와 함께 마이크에서 약간의 잡음이 들린다.
Rc-9: 뒤엉킨 해안을 방문했던 건, 사건 발생 당시 합의되었던 정기적인 선봉대/리프의 보안 점검 차원이었다. 해안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는 대부분 각성자 무장함의 호위를 받았는데, 장거리 스캐너에 비교적 큰 규모의 소행성에서 송신된 것으로 보이는 가청 주파수 이하의 신호가 포착되었을 때 딱 한 번 착륙했다.
화자가 헛기침을 한다.
Rc-9: 나는 가까이에 있던 각성자 함선에 조난 신호가 수신되었다고 알렸으며, 그때 상대 함선에서 했던 말을 여기 그대로 인용하겠다. "네 일이나 신경 쓰고 갈 길 가라고." 당연히 나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떠나는 시늉을 하고는 착륙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쪽에서는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신호의 출처에서 작은 야영지를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경멸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경멸자의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변형되고 정신적으로 쇠락한 몰락자의 것이었다. 내가 총으로 몰락자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나머지는 그냥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반격해 오지도 않았다. 나는 소행성의 구멍 안에 세슘 폭탄을 발사하고 놈들이 타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명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그들은 뭔가 주문 같은 걸 외우고 있었다. 물론 확실하진 않다. 불타오르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으니까.
화자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펑 소리를 흉내 낸다.
Rc-9: 안쪽 깊은 곳에서 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난 불길이 꺼지길 기다린 후 안쪽으로 들어갔다. 군체의 건축물로 보이는 구조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전통적인 양식으로 제작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군체의 특징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몰락자 하나가 그 안에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공격성을 드러내며 무기를 꺼냈다. 그 무기는 장전되어 있지 않았고, 나는 상대를 제거했다.
Rc-9: 지금부터 얘기할 회수 장비는 내 기록에 포함시켜 두겠다. 하나는 군체 구조물의 유기 조직 일부로, 영원히 축축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 같다… 정말 끝내주네. 맨손으로 붙잡고 있으면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지기도 한다. 또한 불쾌감과 전반적인 불안감을 초래하기도 한다. 난 연구용 표본을 수집해 달라는 부대장의 요청을 받았고, 그 임무는 완수했다. 납 상자에 넣어서 화물칸 뒤쪽 깊은 곳에 보관해 두었다. 시부 아라스에게 바치는 영구적인 십일조다. 어쨌든. 음… 어디까지 했더라.
깡통 따는 소리가 들린다.
Rc-9: 회수한 물품 중에는 튜브 형태의 유탄 발사기도 하나 있었다. 제조 공장의 표식은 없다. 확실히 몰락자의 물건은 아니고, 경멸자는 무기를 만드는 방법이나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각성자가 유탄 발사기도 만들었던가? 그들은 항상 인간이 만든 무기를 사용했던 것 같은데. 아름다운 무기다. 이 무기는 사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탑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용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몰락자 중 하나의 위치 추적기를 회수했다. 신호를 따라 리프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조금 외진 곳이다. 그곳 일이 끝나고 나면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보고하겠다.
Rc-9: 아름다운 무기다.
기록이 중단된다.
5.5. 해적의 분노
"우리는 잠시만 각성할 뿐. 존재의 나머지 시간은 영원한 꿈이다." —세디아파쇄기의 탄환이 지글거리며 머리 위를 지나가는 사이, 해적은 임시방편으로 세워 놓은 방벽 뒤에서 재장전했다. 더 괜찮은 엄폐물이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성의 전당은 애초에 방어를 염두에 두고 건설된 게 아니었다. 여기에서 각성자가 공격을 받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융합 소총을 재장전하고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절망적이었다. 레오나 브릴의 팀이 군체의 남쪽 측면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녀의 부대는 적에게 제압될 것이다. 명성의 전당이 최후의 저항에 꽤 잘 어울리는 장소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꽉 찬 탄창에서 여섯 발이 부족했다. 그녀는 왼쪽으로 돌아서 리라에게 추가 탄환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팀원은 이미 축 늘어져 파란색 피부가 회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영혼불꽃 탄환이 뚫어 놓은 가슴의 구멍에서 걸죽한 보라색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적은 이를 악물고 리라의 장비에서 탄환을 끄집어냈다.
해적은 재장전을 끝내고 다시 방벽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달려오는 시종 셋을 빠르게 쓰러뜨렸을 때,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오우거가 보였다. 거대했다. 키가 적어도 7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녀는 융합 소총에 남은 탄환을 오우거의 얼굴에 마구 발사하며 장갑판을 꿰뚫어 보려고 했다. 가까스로 적의 위턱 일부를 날려 보내는 데 성공했을 때, 철컥 소리와 함께 소총의 탄창이 텅 비어 버렸다.
탄환을 소진한 해적은 방벽 뒤로 다시 뛰어들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전당을 둘러보며, 우아한 조각상들을 감상했다. 달콤쌉싸름한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보다 먼저 떠나간 동족의 얼굴들, 테키언과 여왕들. 세디아가 오래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통제를 벗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우리가 각성자로 살아가는 건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야. 우리 존재의 나머지 시간은 영원한 꿈이지. 그리고 그 꿈속에서, 우리는 모두—"
6. 방어구
6.1. 타이탄
6.1.1. 황야의 사냥 투구
집중력을 잃지 마세요.I
"자발라 사촌. 아이코라." 사령관의 사무실 화면에 페트라 벤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커튼을 드리운 사무실에서 빛을 비추는 것은 그 화면뿐이었다. "어떻게 조의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행성들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중력은 남아 있네… 여러 측면에서 말이야." 자발라가 헛기침을 했다. "선봉대가 여왕의 분노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나?"
아이코라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데이터패드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유로파와 뒤엉킨 해안, 달, 기타 등등 끝없이 목록이 이어지는 지역들에서 온 정보 보고서를 샅샅이 훑었다.
"유감이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야." 페트라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는 기밀 정보다. 우리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돼."
아이코라가 데이터패드에서 시선을 뗐다. "그래? 리프 여왕의 방송과 관련이 있는 정보인가?"
"그 뒤에 내게 맡겨진 거지. 우리가 각자 아는 정보를 교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흥미롭군." 아이코라는 데이터패드를 내렸다. "우리에게 회의와 관련된 정보를 거부할 권한은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단조로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중하게 고른 표현이었다.
"전시에는 일방적인 지휘 결정도 인정될 수 있지. 필요한 증거가 적절히 제공되었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자발라는 아이코라를 흘긋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얘기해 보게, 페트라. 왜 연락한 거지?"
"기갑단 제국이 움직이고 있어."
"그건 걱정스러운 일이군요." 아이코라가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데이터패드를 자발라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자발라가 격분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대체 놈들을 몇 번이나 파묻어야 하는 거지?"
"적어도 한 번은 더 해야 할 것 같아, 사령관."
"'제국'이라 부른다면 그들이 하나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연합했다는 얘기일 것 같은데. 여왕의 분노는 적의 이름을 알고 있나?"
"아직은 소문뿐이야. 기갑단의 최근 교신 암호는 해독하기가 생각보다 까다롭더군. 하지만 새로운 문구가 그들의 어휘 목록에 포함된 건 확실해."
"무슨 뜻이지?" 자발라가 물었다.
"우리가 해석한 몇몇 문장을 보면, 그들은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아. 군체에서 기인한 일종의 질병이라고 할까."
아이코라가 데이터패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페트라, 한 은신자가 소릭스의 끝에서 감염된 야수를 만났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영혼불꽃을 방출했다고 하던데."
"오시리스가 행성계 전역에서 군체의 활동이 증가했는지 확인해 줄 수 있겠지." 사령관은 아이코라를 바라본 후 다시 페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
"그래. 오시리스와는 내가 얘기해 봤어. 테키언들이 군체가 정복에 관해 수근거리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군. 해적들이 조사하러 벌레 소굴에 진입해 봤는데… 솔직히 접근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
"이게 기갑단 제국이 새롭게 조직화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 자발라가 물었다.
"그 질병에 관한 설명은 아직 불완전하지만, 여기 지상에서 목격되는 것과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지."
"성간 질병이라고?" 아이코라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 거리에서라면, 우리 사이의 가교가 필요할 텐데."
"넥서스일 수도 있지." 자발라가 말했다.
"왕좌의 세계라면 가능하겠지." 페트라도 생각에 잠겨 이마에 주름살이 잡혔다. "눈먼 우물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해."
"페트라." 아이코라의 두 눈이 수은처럼 변해, 그녀는 천상의 존재처럼 보였다. "붉은 하늘의 아침. 가득한 공포. 테키언에게 전해 줘."
"불길한 얘기군. 메시지는 전달하겠어. 무슨 뜻이지?"
"꿈이야.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녀는 페트라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군체의 활동이 증가했다고?" 자발라가 끼어들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일 테지."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거칠어졌어. 예전 같으면 눈치를 봤을 법한 상황에서도 싸움을 걸어 오더군." 페트라의 정신이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어둠이 광기로 내몬 거겠지."
"새로 진격 명령이라도 내려진 건가? 그 문제를 조사하는 데 우리가 화력을 지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발라가 제안했다.
"수호자에게 내 명령을 따르라고 하겠다고?"
"어느 선까지는 그래도 괜찮겠지." 아이코라가 덧붙였다.
"그러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모든 걸 부숴 버리지는 않을 사람으로 부탁해도 될까?"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나?" 자발라의 머릿속에 명단이 떠올랐다. "솔직히 지금은 수호자가 부족한 상황이라서 말이지."
"슬론은 돌아왔나?" 페트라가 물었다. "그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녀는 지금 움직일 수 없어." 아이코라가 단호한 눈빛으로 자발라를 바라봤다. "오노르의 돌격자가 어젯밤 여기 우주선을 정박했다. 새로운 수호자고, 능력은 충분해."
"그 정도면 괜찮겠나?"
"리프는 도시의 어떤 지원이든 감사히 받겠다. 이건 우리가 함께 맞서야 할 일이야, 사촌. 선봉대 레이."
"그렇지."
아이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트라의 영상이 사라졌다.
"요즘 친구를 많이 사귀시는 것 같군요." 아이코라가 그를 자극했다.
"요즘은 우리 가운데도 적이라 불러야 할 자들이 워낙 많아서, 이제 제대로 된 거래의 가치를 배운 것 같네." 자발라의 말투에는 어딘가 묘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유로파에서 선봉에 선 이들이 본 것과 그들이 한 일을 생각하면… 합의를 존중해야 강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거겠지."
"그 점은 저도 동감합니다. 이 작전은 일단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돌격자에게 새로운 임무를 전해 주게. 내게도 그 사람 이름하고 배경 정보를 알려 주고. 이 도시를 찾아온 타이탄을 내가 모르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하군."
6.1.2. 황야의 사냥 건틀릿
무자비하게 공격하세요.II
거대한 상아색 탑이 멀리 떨어진 지평선을 꿰뚫고 솟아올랐다. 실천의 세력 최초의 돌격자 타이탄 지크프리트가 여왕의 분노 및 경호원 두 명의 반대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스키머 우주선이 꿈의 도시의 찬란한 자수정 건축물과 안개에 뒤덮인 터널을 미끄러지듯 가로질렀다. 결정체에 반사된 빛이 무지갯빛 안개의 불꽃처럼 선실을 이리저리 비추고, 지크프리트의 반짝반짝한 사막행군병에 반사되었다.
"이 길은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겠지. 이 도시는 지금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페트라 벤지는 쿡쿡 웃었다. "전에 여기 와 본 적이 있나?"
"한두 번. 저기 안개 너머로 보이는 게 레아 실비아인가?" 지크프리트는 헬멧을 벗어 좌석 옆에 꽂아 둔 독설에 걸었다. 굵게 땋은 금발 머리가 머리 중앙을 가로지르며 아래로 내려와, 양옆의 구레나룻을 지나 화려한 턱수염으로 이어졌다.
"그래." 페트라가 그 남자를 바라봤다. "수호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새는 아니군."
"붉은 전쟁 당시에 길렀지. 이제 익숙해졌어." 지크프리트가 턱을 쓰다듬었다. "우리가 도착하면 병사들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밤이 되면." 그녀가 손을 뻗어 현장 기록을 내밀었다. "상대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지크프리트는 그것을 받아 들고 기록을 가마우지 인장 아래 흉갑에 넣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체겠지."
"그래. 아주 흉측한 놈들이야."
"내 경험으로는 늘 그랬던 것 같은데." 지크프리트는 웃었다. "당신네 해적들이 내가 다치지 않게 지켜 주겠지. 나도 그들을 지켜 주겠어."
"수호자가 돌격을 이끌어 준다면 부하들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
"브리핑에서 들은 바로는 이곳 동물상이 침습하는 감염에 오염되었다고 하던데?"
페트라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얼굴에 떠오르지 않게 주의했다. "최근에는 지적인 생물들에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확산되고 있군." 실천의 타이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싸워 온 거지?"
"첩보에 따르면 군체가 일종의 성물 주위에 모여들고 있다고 해. 거기가 감염의 시발점인 것 같다." 페트라는 그의 흉갑을 가리켰다. "그 기록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을 거야."
"그 성물은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던데. 왜지?"
"군체가 어둠 속에서 경배하는 대상이라면, 손상되지 않게 확보해야 한다." 그녀는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버리기에는 미지의 정보가 너무 많이 담겨 있으니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군체를 상대할 때는 제거하거나 제거당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니까, 난 우리 본분을 다하고 싶은데." 지크프리트는 여왕의 분노를 바라봤다. "물론 내 기분이 그렇다는 거야. 이번 원정에서는 당신이 지휘관이니, 지시를 따르겠어."
"신중하게 접근해라. 성물에 접근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건 너뿐이다. 내 해적들은 빛의 보호를 받는 걸 딱히 즐기지는 않으니, 일단 둥지가 정리되면 안전 거리를 유지하라고 지시할 거야."
"좋아. 그래도 내가 선봉대에 제안하고 싶은 건 박멸 또는 억제를 돕는 일뿐이다."
"리프도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지. 일단 지금은 선봉대도 유로파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뭐, 에리스에게 들은 얘기가 정확하다면 그렇겠지만."
"에리스 몬은 배신자다." 지크프리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페트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떨렸다. "그녀가 공유해 주는 정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페트라는 시선을 돌렸고, 스키머 우주선은 안개 아래쪽을 향해 기수를 내렸다. 그녀는 바릭스를 보았다고 한 에리스의 마지막 편지를 떠올렸다. 조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덮개가 뒤집어지거나 갈라지려 하고 있었다. 전시의 시작일까. "이번 작전이 네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내 빛이 어둠을 쫓아 버릴 수만 있다면, 어떤 작전이든 좋아."
6.1.3. 황야의 사냥 판금 흉갑
"우리가 사냥하던 것, 그것은 똑똑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똑똑했다. 그것은 우리를 옛 시카고 아래에 있는 무덤에 가두고, 나머지 화력팀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했다." —엑소 타이탄, 리드-7III
꿈의 도시에 황혼이 내려앉았다. 범의 앙심 소총을 든 해적 여섯 명이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했다. 페트라와 지크프리트가 숙영지에 들어서자, 해적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경례를 했다. 앞쪽 디발리의 안개 속에는 군체의 생체 물질로 뒤덮여 악취를 풍기는 구덩이가 있었다. 거친 화음의 비명처럼 부산하고 비인간적인 속삭임이 메아리쳤다.
야전 홀로그램에는 중앙 협곡 주위를 둘러싼 구불구불한 터널 지도가 표시되고 있었다. 둥지 안쪽으로 그들의 목표를 표시하는 화살표가 보였다. 목표에 이르는 최단 거리가 접근 경로로 표시되고 있었다.
"안심해라, 해적들. 이쪽은 지크프리트다. 이 둥지에서 군체를 몰아내고 우리의 땅을 되찾는 일을 도와주러 왔다. 내부로 진입한 후에는 지크프리트가 지휘할 거다. 경비대와 나는 이곳 전방 기지를 지키겠다. 다들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지. 여왕 폐하를 위하여." 페트라는 몸을 돌려 지크프리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타이탄."
"반갑다, 리프의 각성자 여러분. 선봉대가 여러분과 함께한다. 나는 첨병이다. 다들 나를 따라 돌진하면 승리할 수 있어." 지크프리트가 헬멧을 썼다. "실망시키지 않겠다."
화력팀은 출전했다. 그리고 영원한 어둠이 드리운 지하에서, 군체가 그들을 덮쳤다. 터널을 가득 채우며 밀집한 노예 무리가 바리케이드 뒤쪽에서 쉬지 않고 총을 발사했다. 지크프리트는 찬란한 전기의 사자후로 터널을 가득 채웠고, 총탄을 목표물에 박아 넣었다. 발톱이 피를 쏟으며 방어구를 찢었지만, 타이탄도 해적도 흔들리지 않았다. 일곱 명이 뛰어들어 일곱 명이 남았다. 해일이 갈라질 때마다 그들은 폭풍에 둘러싸인 채 전진했다.
지크프리트는 치명적인 불꽃처럼 오물을 꿰뚫었다. 그가 돌진할 때마다 적은 흩어지고, 전기가 흐르는 키틴질 껍질과 사용한 탄피, 비릿한 오존만 남았다.
영혼불꽃의 연기가 대기를 더럽히고, 지원군들도 의식의 원 안에 나타났다. 시종들이 타이탄의 측방을 공격하려고 달려들었지만, 해적의 제압 사격에 쓰러졌다. 지크프리트는 사람도 일격에 자를 것만 같은 커다란 검을 든 거구의 기사와 마주했다. 그는 손에 섬광탄 두 개를 생성한 후 적에게 달려들어 시야를 빼앗았다. 기사는 거칠게 포효하며 대검을 휘둘렀고, 무기는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타이탄은 전방으로 돌진했고, 마귀는 거칠게 나뒹굴었다.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타이탄은 앞쪽의 막힌 터널을 바라봤다.
미끌미끌한 군체 분비물이 앞쪽 협곡을 따라 줄지어 떨어져 있었다. "여기가 놈들의 성소인 게 분명해." 지크프리트의 손바닥에서 빛이 맥동했다. 희미한 고스트의 실루엣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 여기야. 뒤로 물러나서 경계를 유지해.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퇴각해도 좋아."
지크프리트는 점액의 봉인을 찢고 희미한 빛이 비치는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에서 악취를 풍기는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지며 발치에 웅덩이를 형성했다. 앞쪽에서 선혈의 기념비가 꿈틀거렸다. 누리끼리하고 음울한 빛을 부드러운 촉수가 감싸고 경련했다. 배가 갈라진 기사의 뒤틀린 하체에서 자라난 촉수였다. 등과 갈비뼈가 둘로 나뉜 배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그 모습은 변태를 절반밖에 마치지 못하고 안팎이 뒤집어진 모습 같았다.
"더러운 것." 지크프리트는 흉측한 제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걸었다. 기사의 눈이 그의 발걸음을 쫓았다. 그 끔찍한 상대에게서 겨우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의 양쪽 땅이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그가 벽이라고 착각했던, 키틴질로 뒤덮인 주머니에서 오우거 두 마리가 뛰쳐나왔다. 지크프리트는 독설을 꺼내 정확한 사격으로 첫 번째 오우거를 제거했다. 그리고 두 번째를 향해 돌아섰지만, 적은 이미 그를 덮치고 있었다. 오우거는 그를 동굴 벽에 밀어붙인 후 거칠게 울부짖으며 눈에 에너지 광선을 그러모았다.
오우거의 끔찍한 시선이 방출되기 직전에 지크프리트는 치솟은 방벽을 생성했다. 빛의 장벽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지크프리트는 두 손으로 방벽을 막았다. 오우거는 지축을 울리며 그에게 덮쳐 왔다. 타이탄 온몸의 뼈에 빛이 집중되며, 그는 격돌할 준비를 했다.
멀리서 무언가 움직였다. [콰직] 오우거의 머리가 강렬한 충격에 옆으로 돌아갔다. 지크프리트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고, 그의 반대쪽 터널 입구에 누군가의 형체가 언뜻 보였다. 오우거는 고개를 돌리고 포효했다— [콰직] 그것의 머리가 뒤로 꺾였고, 새롭게 생긴 상처에서 체액이 흘러나왔다. 그 형체는 무기를 세 번 더 발사했고, 오우거는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그 남자는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타이탄은 방패를 해제하고 오우거의 목을 붙잡았다. 그는 부상당한 적을 지면에 쓰러뜨린 후 전기를 가득 채운 두 주먹으로 내리쳐 목숨을 끊었다. 타이탄은 구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텅 빈 터널만 남아 있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지크프리트는 지표면으로 돌아왔다. 페트라는 석상처럼 야영지에 우뚝 서 있었다.
"표본을 회수했다. 내가 제거한 게 전부 재생됐다는 사실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어…" 지크프리트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래도 여기는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지역인 것 같아. 행운의 여신이 우리 편이었든가, 그게 아니면 더 규모가 큰 활동이 여기로 확장해 온 거겠지."
"행운은 우리 편인 적이 없어." 페트라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음 공격 지점을 물색해 보지."
"선봉대에 제출할 보고서도 그런 방향으로 작성하겠다."
"오늘은 정말 과분한 일을 해 줬어, 타이탄. 푹 쉬라고. 표본은 내일 테키언에게 가져가지. 아마 그쪽에서도 할 얘기가 많을 거야."
6.1.4. 황야의 사냥 각반
사냥감을 따라잡으세요.IV
밤은 너무 다급히 지나가고, 아침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지크프리트는 온몸이 아팠다. 전투를 마치고 이렇게 힘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크프리트의 고스트 오그덴이 타이탄이 가져온 표본 위에 둥실 떠올랐다. "이 멍청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마법은 극도로 불안정해요."
"거기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불경한 거야." 지크프리트가 천막의 장비 걸이에서 가져온 가방에 표본을 던져 넣었다. "사실, 우리가 떠날 때까지 네가 몸을 숨기고 있으면 좋겠는데."
"당신도 어릴 때는 그렇게 무례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고스트는 타이탄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제가 걱정스럽다고 할 때마다 우리 지크프리트 주인님은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저도 똑같은 얘기를 해도 될까요?"
"때가 달라졌어, 옛 친구. 이제 내 육신은 교체 비용이 너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지크프리트는 농담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테키언에게 가는 여정은 불편한 침묵 속에 이어졌다. 그는 선실에서 서류 더미에 파묻힌 페트라를 찾아갔다. 자욱한 안개 속에 거친 비명이 묻혀 있었다. 리프가 움직이고 있었다. 페트라가 그에게 와 달라고는 했지만, 사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가 여기 온 이유가 뭐지?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혼돈. 그는 표본이 든 가방을 단단히 붙잡고 페트라와 함께 사원으로 갔다. 그녀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나름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했고, 지크프리트는 동굴에서 본 모습, 그 으스스한 의식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뭐든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려 보려고 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수호자가 있나?" 지크프리트가 물었다.
"수호자는 원래 바람 따라 오가는 존재지. 하지만 달리 주목해야 할 인원은 없다. 그게 궁금한 거겠지."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건 없고?"
"네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어, 타이탄."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어."
페트라는 걸음을 멈췄다. 사원의 문까지 겨우 몇 걸음 남아 있었다. "다른 자가 있나?"
"각성자였다. 거미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고—"
"그를 어디서 봤지?"
"당신 작전을 수행하다가." 지크프리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를 지켜 주려고 오우거를 날려 버리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조직의 파리치고는 고상한 짓을 했군."
"당신이 거미와 친하게 지낸다는 건 알고 있어." 지크프리트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페트라는 잠시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지만, 곧 마음을 추스렀다. "거미가 왜 거미줄을 치는지 알고 있나, 타이탄?"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지."
"거미는 통제를 즐긴다. 덫을 놓고 상대의 무력함을 감상하지. 작은 모퉁이에서 줄을 끌어당기면서 말이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주시하되 방해하지는 않으면, 거미는 자기보다 더 유해한 해충들을 잡는다." 페트라는 앞으로 걸어가 문에 한 손을 얹었다. "이제 그의 거미줄을 확인해 볼 때가 온 것 같군." 그가 다른 손을 내밀어 가방을 요구했다. "내가 확인해 보지."
지크프리트가 가방을 그녀의 손에 놓았다. "기대하고 있을게."
"테키언에게 네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지." 페트라는 히죽 웃었다. "이 계단은 네게 맡기겠다. 경계를 늦추지 마, 타이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정찰이라도 하고."
칼리와 센디아, 슈로 치가 여왕의 분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표본을 각각 봉인된 억제 용기에 담고 하나씩 차례대로 살폈다. 그들은 정신을 준비하고 명상을 시작했다.
제물로 바쳐진 기사의 이빨, 피, 뼈. 응고된 영혼불꽃. 뒤틀린 자의 벗겨진 조직.
탐색하는 교감.세 목소리가 하나로 이야기한다.소음을 뒤덮은 소음.침잠하는 엘레우시스의 축제.
붉은 항구 위 에메랄드 불길의 테라스먼 구덩이에서 칼날처럼 내뻗는 손가락시험촉구시음사육되는 전쟁.
꿈이 제안되었다.
붉은 하늘: 그들은 조직의 의식 안에 낙인이 찍혀 있다.
아침: 각각의 존재 모두와 한 목소리로 접촉했다.
가득한 공포: 시부 아라스. 전쟁의 화신.
더. 더 많이 더.
그들은 모든 것을 목격했다.
페트라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지크프리트는 계단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마법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기가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은 더욱 싫었다. 그래도 그 외의 면으로 봤을 때 이 방법이 더 빠르다는 건 분명했다.
그의 뒤에서 문이 열렸다. 페트라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숙영지로 돌아가. 난 아침에 가겠어. 아직 논의해야 할 게 많아서 말이야." 그녀는 지크프리트를 잠시 바라봤다. "선봉대에게 아이코라의 꿈이 도움이 됐다고 전해 줘. 다시 연락하지."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네."
그는 왠지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스키머에 들어설 때는 왠지 머리가 맑아진 느낌까지 들었다. 지크프리트는 그게 텅 빈 선실이 마음의 평온을 주기 때문인지, 아니면 병력 수송선이 그를 안전하게 호위하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가방은 페트라에게 맡겨 놓았다. 이제 그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는 헬멧을 벗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해안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장대한 관문이 그의 위에 펼쳐졌다. 전설적인 결정체 장벽이 안개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 장벽 꼭대기에, 독수리처럼 내려앉았다.
그였다.
그의 위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기 있다!" 지크프리트가 외쳤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는 스키머의 속도가 줄어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뛰어내렸다. 타이탄은 빛의 힘으로 하늘로 날아오른 후 전기의 힘으로 전방으로 돌진했고, 이내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그가 결정체 장벽 위에 올라섰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해안을 감싼 안개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지크프리트는 그 뒤를 쫓았다.
6.1.5. 황야의 사냥 표식
자부심을 보여 주세요.V
타이탄은 공허한 안개 속을 바라봤다.
"젠장." 지크프리트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의 얼굴 앞에 총구가 드리워 있었다. 그 뒤에는 두건을 쓰고 얇은 숄로 눈 아래를 가린 각성자가 서 있었다. "따라오지 마."
지크프리트가 손을 들었다. 고스트가 실체화되었다. "물러나 있어, 오그덴!" 실천의 돌격자가 외쳤다.
"저기요!" 오그덴이 외쳤다. "빛의 형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다들 진정하세요!"
두 번째 고스트가 실체화되었다. "글린트. 조심해." 그 형체가 속삭였다.
"우린 다 같은 편이라고요." 글린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적이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두건을 쓴 형체를 향해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아, 이런." 글린트가 두건 쓴 남자를 바라봤다. "잠깐, 까마—으음."
두건 쓴 남자의 빈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까마'라고 했나?" 지크프리트가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까마"는 몸을 빙글 돌리며 조악한 태양 검을 날려 해적의 소총을 자르고 그의 손을 베었다. 지크프리트는 상대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시도했다. 전기가 충전된 그의 주먹이 고개를 돌리는 까마의 턱에 적중했지만, 총은 붙잡지 못했다. 까마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정말 무례한 사람이네요." 오그덴이 외쳤다. "저런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내가 중단시키겠어." 지크프리트가 단언했다.
안개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휘청거렸다. 고스트들이 사라졌다. 해적의 무전기에서 혼란스러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까마는 주위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살금살금 걸었다. 그때 갑자기 안개가 뒤흔들렸다.
머리 위 높은 곳에 있던 지크프리트가 똬리를 튼 폭풍처럼 안개를 뚫고 떨어져 내렸다. 까마는 위를 흘긋 바라본 후 달리기 시작했다. 돌격자의 주먹이 우레와 같은 대혼란을 일으키며 그의 뒤쪽 지면을 분쇄했다. 까마는 빠르게 피한 후 몸을 뒤틀어 착지했고, 지독한 약속으로 상대를 조준했다. 지크프리트는 살아 있는 번개처럼 까마를 향해 똑바로 돌진했다. 핸드 캐논이 불을 뿜었지만, 타이탄에게서 방출되는 전기가 탄환을 튕겨냈다. 지크프리트는 어깨를 내밀었다. 까마는 재빨리 그의 옆쪽으로 돌아 손 위에 태양 불길을 불러냈다—
"너무 느려!" 지크프리트는 전기가 지직거리는 팔꿈치를 까마의 배에 꽂아 넣으며 반격을 차단했다. 타이탄은 무릎으로 상대의 갈비뼈를 올려 치고, 헌터의 온몸을 번개처럼 빠르게 세 번 연타하고는 천둥처럼 관자놀이를 강타하며 공격을 마무리했다.
까마는 끙, 하는 신음과 함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지크프리트는 화산 같은 분노를 온몸으로 내뿜었다. "넌 내 상대가 안 돼."
"매를 맞는 덴 익숙해서 말이야." 까마는 피가 흥건한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항복해라. 다시 얘기하진 않겠다."
"그럴 순 없어. 난 도와주러 여기—"
지크프리트는 주저하지 않고 돌진했지만, 까마도 이번에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이글거리는 검을 들고 도약했다. 지크프리트는 검이 자신과 접촉하기 직전에 그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 바람에 균형을 잃었다. 두 사람은 흙바닥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지크프리트가 까마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잘 잡고 있어." 까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타이탄의 복부를 걷어차며 미끄러지듯 거리를 벌렸다. 검은 뜨겁게 녹아내린 후 불길을 내뿜으며 지크프리트를 거센 폭발로 휘감았다.
돌격자는 콜록거리며 폭발의 연무에서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칼 같으니…" 까마는 재빨리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만 좀 도망치라고!" 그가 고함을 내지르며 전기가 충전된 주먹으로 지면을 강타했다. 강렬한 충격파가 모래 구름을 피워 올리며 주위로 퍼져 나갔고, 달아나던 헌터의 발을 붙잡았다. 지크프리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헌터는 몸을 굴려 그를 바라보며 섰고 빨갛게 달아오른 총을 들어올렸다. 파괴의 태양 광선이 이글거리며 안개를 꿰뚫었고, 지크프리드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그의 견갑을 때려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지크프리트는 근처에 있는 해적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타이탄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잔뜩 격노한 채 일어섰다. 헌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근방을 해적과 함께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그 사실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크프리트는 밤새 해적들을 몰아붙였다.
6.2. 헌터
6.2.1. 황야의 사냥 가면
경계를 한시도 게을리하지 마세요.I
"환영한다, 나의 엉큼한 새 친구. 동료들이 널 아주 높이 평가하던데. 목표물을… 산 채로 붙잡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이야."
"내 동료들이 헛소리를 지껄였나 보군." 게일린-4의 눈이 몰락자에게서 거미로, 그리고는 다시 몰락자에게 향한 후 거미 왼쪽의 그림자가 드리운 벽에 붙어 있는 남자에게 머물렀다. "좋은 얘기만 했다면 상관없겠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거미가 기대감에 조금 가빠지는 숨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굽은 손가락으로 호흡기를 톡톡 두드렸다.
게일린-4는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부하 두 명이 뒤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벨트에 와이어 소총과 짧은 단검을 매달아 둔 모습이었다. "글쎄… 아르하의 현상금은, 목표물이 사라진 지 한 달째라고 하던데."
거대한 엘릭스니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희 무리는 항상 직설적이라니까. 늘 본론만 이야기하지. 마음에 들어… 그런 성품이 말이야." 거미가 아래쪽 팔로 손짓을 하자 부하 하나가 작은 금속 상자를 게일린-4 앞에 놓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직 이 근방에 있어."
부하가 뚜껑을 열었다. 황금기의 호박색 액체가 담긴 병 두 개가 주위의 고르지 않은 조명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푹신한 천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거미 뒤쪽으로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사람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자세히 보려고 했다.
게일린-4는 상자에 다가가 공예품 같은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내 건가?"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엿 같은 일인 모양이네."
"내 개인 소장품에서 꺼내 온 거다. 내 사냥감을 산 채로 데려올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해 주려는 거지. 물론 사파이어 전선 보상도 두둑이 해주겠지만."
"동기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순순히 협조하는 상대가 아닌 모양이군."
"아, 분명 그럴 거야… 그들이 가능하다면 말이지." 거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네 사냥감은 분노의 자손이다."
게일린-4가 고개를 번쩍 들어 거미의 눈을 바라봤다. "왜 그냥 집행자를 보내지 않는 거지?"
"하루 종일 일할 수는 없잖아. 다른 곳에도 인원이 필요하거든. 게다가 이건,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 조직의 두목은 네 개의 손을 차례대로 뒤집었다. "그래도 그의 발명품은 쓸만할 거야. 꽤 괜찮은 물건인데, 혼자만 알고 있어. 괜히 칭찬해 주면 버릇만 나빠지거든."
"산 채로 데려오라고?" 게일린-4는 손에 든 병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래. 이 목표물은 내가 친히 아끼는 무언가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끼쳤다. 배상을 받아야지." 거미는 비뚤비뚤하고 오싹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 아첨꾼들이 날 따라오는 건가?"
"널 지원해 줄 거야. 니빅스와 빈리이스가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고, 경험도 많다. 그들이 공격 지점으로 데려다 줄 거다."
"당신 부하들은 그 녀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들었는데."
"이번 목표물이 있는 곳은 괜찮다. 근처에 비밀석탑이 없거든."
게일린-4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그 정보를 처리했다. "전선은 그냥 넣어 둬. 그 야수 새끼는 내가 갖겠어."
거미가 깃을 곤두세우며 그 조건을 고려해 보았다. "공정한 일은 아니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군. 누가 그런 정보를 가르쳐 줬는지 얘기만 해 줘."
"일이 끝나고 주인이 바뀌면 그렇게 하지."
"날 마음 졸이게 하려는 건가. 난 참을성이 많은 거미가 아닌데."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게일린-4는 수행원들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는 몰락자들에게 말했다. "같이 가자, 새끼 드렉들."
니빅스는 쉬잇 소리와 함께 엘릭스니어로 빈리이스에게 뭔가 말한 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미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소총을 어깨에 메고 그들을 따라갔다.
엑소의 눈이 그림자 속에 서 있는 사람을 흘긋 바라봤다. "추방자."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네 일이나 신경 써라, 수호자."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운을 빌겠다."
게일린-4는 웃으며 문지기에게 변신을 받아 들었다. "오시리스." 그는 출구로 빠져나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6.2.2. 황야의 사냥 손아귀
뱀처럼 공격하세요.II
"이걸 찾기 위해 두 사람이 필요하진 않았을 텐데." 게일린-4는 참새에서 내려섰다. 그는 두건을 당겨 쓰고 변신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폭발한 지상 수송 차량단의 이글거리는 잔해에서 탁한 초록색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뒤틀린 금속이 바위투성이 지역의 좁은 길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문이 열린 차량에는 녹은 화산암재가 반쯤 차 있었다. 서서히 식어가는 화성암 용암이 아직 녹아내리고 있는 바닥을 뚫고 흘러나왔다. 그는 그 지역 전체에서 미친 듯이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을 둘러봤다.
그와 함께 있던 몰락자 두 명이 파이크 엔진을 끄고 수호자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파이크마다 작은 보급품 상자가 매달려 있었다. 니빅스는 미끼와 추출물, 빈리이스는 에테르와 추가 탄약 셀을 갖고 있었다. 둘 다 그물 지뢰도 다수 소지하고 있었다.
게일린-4는 소총을 어깨에 메고 몰락자를 바라봤다. 니빅스는 큰 팔들로 앞쪽을 가리켰다. "먼저 가 보실까?"
엑소는 현장 안으로 들어섰다. 함정 사냥꾼 둘이 그 뒤를 따랐다.
"보안 유닛." 니빅스는 프레임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나쁜 일거리다."
"얼마나 공격적으로 만들었던 거야? 분노의 자손을 제단에서 떨어지게 할 만큼은 됐나?"
니빅스는 프레임의 소켓에서 눈을 하나 뜯어내 주머니에 넣었다. "직감? 아니, 녹음기가 부서졌다." 몰락자는 웃으며 머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빈리이스는 낄낄 웃었다. 엑소는 즐겁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단에서 떨어지다니 이상하지 않아? 무언가 그걸 끌어낸 거야." 게일린이 빈리이스를 바라봤다.
"그래, 하지만," 빈리이스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영토 확장이다."
"수호자처럼 모든 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 니빅스가 게일린-4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나이가 들면 대담해지는 건지도."
게일린은 상대의 말을 무시했다. "흔적 속에 새로 지나간 자국이 있어." 그는 말라붙은 흔적 안쪽에서 새로 파헤쳐진 흙을 보며 말했다. "이미 한번 돌아왔던 거다. 다시 돌아올 거야."
"오? 수호자는 그렇게 생각하나?" 니빅스는 수송 차량의 녹아 내린 차대를 바라봤다.
"이 수호자는 그래. 포식자는 먹잇감을 처치해서 새로운 영토에 표식을 남기곤 하지.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따라와라, 새끼 거미들."
"그러지." 니빅스는 목을 길게 빼고 폭발해 버린 수송 차량 안쪽을 바라봤다. "영혼불꽃 냄새가 난다."
"너희 대장이 운반하고 있던 게 그건가? 그것 때문에 폭발이 일어났을 수도 있어."
"아니." 빈리이스의 대답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외계 꽃이다."
"말을 아껴라!" 니빅스가 엘릭스니어로 꾸짖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얼굴을 뒤틀러 웃는 표정을 짓고는 게일린-4를 바라보며 언어를 바꿨다. "개인적인 문제다, 알겠지? 민감한 문제야. 묻지 마라."
"동기는 중요하지." 게일린의 눈이 두 명의 몰락자 사이를 오갔다.
"아니. 생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좋아. 어쨌든, 어떤 꽃이라도 여기서 살아남았을 수는 없겠어." 엑소는 무릎을 꿇고 손을 펼쳤다. "여기 오래된 혈흔은 있지만 사체는 없다."
고스트가 실체화되어 조용히 얼룩진 지면을 스캔했다. "몰락자. 에테르 자취. 그리고… 기갑단 기름?"
게일린이 호위대를 바라봤다. "이 수송대에 부하들도 타고 있었나?"
"늘 그렇다…" 니빅스는 게일린의 손 위에서 다시 사라지는 고스트를 바라봤다.
빈리이스는 니빅스를 쿡 찌르고는 말했다. "그들은 사체를 가져간다. 이유는 몰라." 그녀가 덧붙였다. "기갑단 기름은 예상하지 못했다."
"소문에는 칼루스의 우주선이 리프에서 경멸자를 낚아채고 있다고 하던데. 분노의 자손이 한 짓이 확실해?"
"분명하다." 니빅스는 게일린-4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경멸자가 사라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군."
"기갑단도 당신들처럼 예민한 거겠지."
"그런 것 같다…" 니빅스는 게일린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야영?" 빈리이스가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게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피우고… 미끼를 설치해."
"그냥 함정을 놓을까?" 빈리이스가 니빅스를 바라봤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를 생각해. 불을 피우면 기습이 안 된다."
"그런 걱정은 내가 하지. 그냥 불이나 피워."
니빅스는 일어섰다. "직접 해라, 빛을 지닌 자."
6.2.3. 황야의 사냥 조끼
"뒤를 밟아 보니, 그건 옛 시카고의 폐허로 가서 무덤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그것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그게 우리를 유인하고 있었다." —인간 헌터 아이샤III
뒤엉킨 해안 위로 모래가 흩날렸다. 머리 위에서는 흐릿한 구름이 격류가 흐르듯 세차게 움직였다. 리프에서 바람이 정확히 어떻게 생겨나는 건지 게일린-4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바람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사냥꾼 세 명은 흙바닥 위에 깔아 놓은 너덜너덜한 매트 위에 엎드려 있었다. 서로를 등지고, 또 하늘을 등진 모습이었다. 두 명의 등에서는 무광의 검은색 깃이 바람에 흔들렸고, 세 번째 등에서는 빛바랜 황갈색 망토가 오르페우스 보호 장구에서 뻗어 나온 화살집에 걸려 천막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그들의 차량은 모두 위장막에 덮여 있었다.
아른거리는 불길이 불타버린 수송 차량의 내부에서 넘실거렸다. 엔진 오일을 연료로 사용해서인지 불길은 보라색이었다.
"내가 공허 사슬까지 유인하겠어. 일단 묶고 나서 전기 우리를 설치하면 되겠지."
"수호자는 그물 지뢰를 원치 않는 건가? 아주 효과적이다." 빈리이스가 자기 파이크를 향해 손짓했다.
"우리를 설치하기 전까지는 폭발 물질이 있어서는 안 돼."
"수호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니빅스가 와이어 소총의 화살을 확인하며 대꾸했다.
"내 등을 쏘지만 마."
"수호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게일린-4는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면 됐어."
밤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보라색 불길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수호자는 거미에게 고용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드나?"
"나는 프리랜서야. 거미가 아니라 돈에 고용되어 있는 거지."
"나도 그렇다." 빈리이스는 명랑하게 말했다. "비슷한 셈이야…"
"아, 그래? 돈은 잘 주나?"
"충분히 주지." 니빅스가 대답했다. "일을 잘하면 돈도 잘 받고. 내 일도 할 수 있겠지."
"거미가 그런 기업가 정신까지 지원해 준다고?" 게일린-4가 물었다.
"돈은 위쪽으로 흘러가고, 거미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아무 문제 없어." 니빅스가 말했다.
"거미의 은신처에 있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
"아니." 빈리이스가 대답했다.
"신경 안 쓴다." 니빅스가 덧붙였다.
"오시리스. 당신들도 알 텐데. 여섯 전선은 들어 봤겠지?"
"여러 번 들었다. 승리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수호자들에게." 니빅스는 자세를 바꿨다.
"나는 얘기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거기 있었으니까." 게일린이 말했다.
"나는 아니야." 빈리이스가 끼어들었다. "빈리이스는 해안만 안다."
"그날 몰락자가 전부 죽었다고 얘기하던가? 수호자는 하나도 안 죽고? 아주 편리하군." 니빅스는 키득키득 웃었다.
게일린-4는 옆으로 돌아 누워 니빅스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야?"
니빅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래. 나는 전선을 기억한다. 붉은 전쟁을 기억한다. 지구를 기억한다. 리이스를 기억한다. 거대한 기계가 너희를 일으켜 주기 전을 기억한다."
빈리이스는 움직이지 않고 두 사람의 말을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은 모양이군. 당신도 그 시절에는 모든 게 단순했다고 생각하겠지.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분명히 알 수 있었으니까. 그 시절이 그립군. 지금은… 전부 엉망진창이야."
"단순했다고?" 니빅스는 게일린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삶이 간단했던 적은 없어. 하지만 고통은 정신을 좁게 만들지. 우리는 변화를 본다. 생존하려면 적이 많이 생긴다는 사실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어."
"그렇게 오랬동안 살았다니. 우리 친구들도 꽤 많이 죽였겠는데." 게일린이 불쑥 말했다.
"너도 그랬겠지." 니빅스가 대답했다. "이제는 죽이지 않는다. 단순한 문제 아닌가?"
게일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는 잊기 힘든 법이지."
"그래. 하지만 수호자는 시간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빈리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너희 영웅. 우리 악몽." 니빅스가 말했다. "오시리스. 우리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그는… 이제 그렇게 위협적이진 않아."
"나라면 그 사람 면전에 대고 그렇게 얘기하진 않겠어. 당신들도 고마워해야 할 거야." 게일린-4는 몸을 굴려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오늘은 고마워하고, 전선에서는 욕하고. 관점이란 달라지는 법이지, 안 그래?" 니빅스도 그렇게 말하며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그렇겠지. 오시리스가 없었다면 우린 완전히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을 거다… 그보다 더 끔찍했을 수도 있고."
"그래… 여긴 나쁘지 않지. 잘 사는 자들도 많고. 아무 문제 없어."
"지금 비꼬는 건가?"
"수호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6.2.4. 황야의 사냥 발걸음
소리 없이 움직이세요.IV
빈리이스가 가장 먼저 움직임을 포착했다. 지평선을 배경으로 20미터 떨어진 곳. 느릿느릿 움직이는 근육과 고밀도 기갑단 판금 갑주의 덩어리가 그녀의 사선 안에서 빈둥거리며 돌기둥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씩씩거리며 숨을 들이쉬고 전방으로 도약하여, 엄청난 무게로 두 개의 장갑판에 내려앉았다. 묵직한 진동이 그녀를 뼛속 깊은 곳까지 울렸다.
세 명은 근거리 통신을 교환했다. "야수가 보인다."
게일린-4와 니빅스가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기어왔다. 밤의 침묵 속에서 불필요한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몸짓이었다. 야수는 전형적인 기갑단의 소유물로, 군단의 붉은색으로 칠한 방어구가 툭툭 불거진 근육과 여기저기 물집이 잡힌 육체를 감싸고 있었다. 등과 배에는 칼날처럼 변형된 촉수가 방어구 틈을 비집고 나와 있었다. 야수의 손에는 거대한 대검 두 개가 부착되어 있어, 야수가 불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동안 땅에 깊은 참호를 남겼다.
"분노의 자손 치고는… 어딘가 이상한데." 빈리이스가 말했다.
"늙어 보이지. 최초의 것들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까마귀에게서 탈출한 걸까?" 니빅스가 나직이 말했다. "막을 수 있다. 거미가 기뻐할 거야."
분노의 자손 검투사가 부서진 차량을 뚫고 들어왔다. 불길이 노출된 육체를 그슬리고, 남은 기름이 검투사의 대검에 불을 붙였다.
"내가 처리하지. 실례하겠어." 게일린-4는 자리에서 일어나 분노의 자손에게 똑바로 다가갔다. 상대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 후 고통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게일린은 공허의 빛으로 손 위에 연막탄을 생성한 후 분노의 자손 입에 던졌다. 희미한 펑 소리와 함께 보라색 연기가 그 머리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분노의 자손은 연기를 들이마셨다. 피가 얼어붙을 듯한 비명과 함께 연기 구름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게일린은 무릎을 꿇고 변신을 어깨에 견착했다. 그리고 중화기 전기 탄환 네 발을 발사하여 분노의 자손의 투구를 쪼갰다. 상대는 거칠게 포효하고는 그를 향해 쇄도했다. 창과 같은 촉수가 바닥을 찍으며 그 육체를 더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야수는 그가 설치한 그림자사격을 밟았고, 공허의 빛이 분노의 자손을 꽁꽁 묶었다. 야수는 촉수를 마구 휘두르다가 중심을 잃고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졌고, 투구는 산산이 조각났다.
잔뜩 화가 난 야수가 일어섰다. 화염차처럼 콧구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온 힘을 다해 몸을 움직이려 했고, 핏줄이 터질 듯 툭툭 불거졌다.
"계속 그렇게 당기면 지쳐서 나가 떨어지겠네." 게일린-4는 느긋하게 분노의 자손 주위를 돌며 전기 우리의 말뚝을 주위에 박았다. 세 번째 말뚝을 꺼내는 순간 뭔가 그의 안에서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공허 사슬을 끊었다는 건가?
흐려져 가는 연기를 뚫고 촉수가 날아왔다. 그는 허리를 숙여 피한 후 불타오르는 칼날을 보고 몸을 굴린 후 투명 효과를 발동했다. 그는 연막탄을 하나 더 생성한 후 야수의 눈 사이를 맞췄다. 야수는 버둥거리며 그가 있는 방향으로 촉수를 날렸다. 게일린은 몸을 뒤로 굴린 후 일어서서 소총을 조준했다. 그가 두 발의 탄환을 발사한 후 위치를 변경하려 할 때, 뒤쪽 지면이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촉수 하나가 그의 넓적다리를 꿰뚫어 공중에 들어 올렸고, 또 다른 촉수 두 개가 그의 머리와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무릎으로 쐐기 수류탄을 터뜨렸다. 수류탄에서 공허의 빛이 방출되었고, 그 광선으로 다가오는 촉수를 절단하자 금이 간 댐처럼 상처에서 영혼불꽃이 방출되었다.
그 격류가 수류탄과 게일린-4의 오른팔 절반을 소각했다. 그의 소총이 떨어졌다. 손을 뻗으려는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분노의 자손은 엑소를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그의 다리를 찍어 눌렀다. 게일린의 호흡이 흔들렸다. 야수는 무시무시한 대검들을 들어올렸다. 그는 망토 아래에서 고독을 꺼내 놈의 눈에 발사했다. 야수는 그를 반대쪽으로 내던졌고, 지상에서 솟아오른 뾰족한 바위가 그의 몸을 꿰뚫었다. 수호자 주위로 부서져 내린 바위 조각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게일린은 가슴에 뚫린 구멍을 붙잡았다. 가시 같은 돌이 삐죽 나와 있었다. 야수에게 내동댕이쳐지면서 골반도 모두 부서져 버렸다. 그는 일어설 수가 없었고, 주위는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림자가 그의 시야를 가렸다. 번개가 머리 위를 스쳤다. 뭉근한 압력이 남았다.
6.2.5. 황야의 사냥 망토
그림자 속에 숨으세요.V
게일린-4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일어나 앉아 팔다리를 풀었다.
고스트가 눈앞에 떠올랐다. "운이 좋았어요."
"늘 그렇지? 게일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를 털었다. "고마워, 클립."
"상황이 지나치게 악화되기 전에 와이어 소총으로 쫓아 버렸어요." 고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듯 아래쪽으로 움직인 후 사라졌다.
"악화되기 전에?" 게일린-4가 돌아섰다. 니빅스와 빈리이스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총에 탄이 걸리기라도 한 거야?"
"수호자가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했다." 니빅스는 딱 소리를 내며 턱을 부딪혔다.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나?"
게일린은 니빅스를 노려봤지만, 몰락자는 조용히 다가와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주었다.
"수호자의 사체가 끌려가지 않게 지켰다. 그 예쁜 소총도 구해줬고." 빈리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변신을 엑소의 손에 건네주었다.
게일린도 표정을 풀고는 빈리이스의 눈을 바라보며 말 없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사냥감이 움직이고 있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거미에게 빈 손으로 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니빅스가 에테르 용기의 내용물을 길게 들이마셨다. "수호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길게는 아니다… 몇 분 정도." 빈리이스가 대답했다.
게일린은 두 눈을 감고 집중했다. 사냥감은 여전히 그의 빛에 속박되어 있었고, 그래서 공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니빅스의 말이 맞았다. 가까이에 있었다. "추적하자."
"아…" 니빅스가 일어섰다. "분노의 자손에게 상처를 입혀 다행이군." 그가 그렇게 말하며 체액의 흔적을 가리켰다.
게일린-4는 꺼져가는 불의 희미한 빛에서 그들 앞에 새롭게 남은 흔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영감."
"좋아… 그래. 너도 열심히 해 봐라." 니빅스는 달각거리며 허리띠에서 응답기를 꺼냈다. "추적 사격. 유용하다. 파이크로 가면 금방이다… 조잡한 수호자의 새도 그렇겠지."
게일린-4는 조잡한 수호자의 새에 올라탔다. "그럼, 앞장서 주시지."
그들은 조용히 흔적을 따라갔다. 니빅스가 앞장서고, 게일린-4가 그 뒤를 따르고, 빈리이스가 후미를 지켰다. 그들은 그가 신출내기 송아지인 것처럼 주위를 둘러쌌다. 분노의 자손의 생존력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았다. 덕분에 이 황무지에서 몰락자들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실수 정도는 제대로 바로잡기만 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분노의 자손의 은신처는 작은 동굴 안쪽으로, 입구를 지나자마자 통로가 굽어 있었다. 그 생물의 숨결이 동굴에서 새어 나오고, 움직임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수호자는 그물 지뢰를 원치 않는 건가?" 빈리이스가 게일린에게 소심하게 지뢰를 내밀었다.
게일린이 그걸 받아들었다. "입구에 줄을 치자, 빈리이스."
"몇 개나?"
"전부 다. 병목에서 제압한 다음에 구속해서 붙잡으면 돼."
니빅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끌어내라. 우리가 그 꼬리에 죽지 않게 엄호해 주지."
"고맙군. 나보고 미끼가 되라는 얘기겠지."
동굴에 들어선 게일린-4는 분노의 자손이 등에 붙은 촉수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앞에는 뒤틀린 검은색 가시의 제단이 있었다. 가시는 굳어지기 시작하면서 반투명한 금속의 빛이 돌기 시작했고, 위쪽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질에 조금씩 물들어 갔다. 사라진 부하들이 더러운 왕관처럼 그 꼭대기에 꿰어 있었다. 가시가 그들을 탐식하고 있었고, 게일린은 아래쪽 땅에 심어진 줄기가 하나로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분노의 자손은 등의 촉수를 당겨 먹이에 꽂았다. 육신들이 부들부들 떨렸다. 희미한 목소리. 게일린은 그들을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손바닥 위에 공허의 소용돌이를 생성하여 분노의 자손 아래쪽에 던졌다. 분노의 자손은 뒤로 물러나고, 수류탄이 폭발했다. 몰락자들의 사체는 그대로 소멸했지만, 첨탑은 손상된 곳 없이 굶주린 상태로 남아 있었다. 분노의 자손은 몸을 돌려 바닥과 천장, 벽을 마구 박차며 그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수호자는 마구 내달려 동굴 입구에 위치한 그물 지뢰를 뛰어넘었다. 그가 은폐하는 순간 방출된 전기 구체가 분노의 자손에게 쏟아졌다.
니빅스와 빈리이스가 와이어 소총 사격을 쏟아부으며 야수의 촉수를 막고 게일린-4에게서 주의를 돌렸다. 수호자는 공허 빛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 분노의 자손 가슴에 그림자사격을 날려 야수의 사지를 압도적인 중력으로 찍어눌렀다. 세 사람은 전기 우리를 꺼내 붙잡힌 분노의 자손 주위에 말뚝을 꽂았다. 마지막 말뚝이 연결되는 순간, 전기 우리가 작동하며 강렬한 전기 충격으로 야수의 의식을 빼앗고 굴복시켰다.
새벽 빛이 지평선을 희미하게 밝히고, 세 사냥꾼은 우리를 이송할 수 있도록 묶었다.
"이번이 더 나았군." 니빅스가 깍깍거렸다. "동굴이 불안정하다."
"그물 지뢰가 좋은 생각이었어." 수호자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 동굴은 파괴하는 게 좋겠어."
"동의한다. 범선을 부르지." 니빅스가 물러나며 소리쳤다. "술과 새끼 야수를 마음껏 즐겨 보라고."
게일린-4는 싱긋 웃었다.
빈리이스는 우리의 봉인을 확인한 후 게일린을 바라봤다. "수호자는 이 전쟁 야수를 뭐라고 부를 거지?"
"카스투스."
"좋은 사냥개야."
6.3. 워록
6.3.1. 황야의 사냥 두건
불어오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세요.I
각성자는 죽은 드렉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를 탐하는 개처럼 텅 빈 통을 주웠다. 그녀는 해안의 투기장 깊은 곳에 있는 매장지에서 부활한 후, 매달 첫째 주에 이 일을 했다. 그녀는 그날 몇 번이고 쓰러졌고, 빛을 손에 넣은 이후로도 몇 번이나 더 쓰러지면서, 이같은 의식이 희망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럽혀지지 않은 공기를 파기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끈기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배웠다. 빛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당황스러운 피투성이 패배는 신속한 승리와 환호로 변해 갔다. 서툴고 정제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화려한 결과를 내보이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글리츠는 금지된 투기장의 주의를 끌었다. 그곳 관리자들은 에테르 비축량에서 조직의 기여량이 차지하는 비중뿐 아니라 무소속 빛의 운반자를 또 하나 찾아냈다는 사실을 거미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판돈 일부를 받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들은 소문을 잠재우고 흐름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녀를 제거하고 그녀의 고스트를 붙잡으려고, 그들은 트린에게 섭취를 가르쳤고 공허는 그녀의 정신을 자유롭게 했다. 그녀는 몇 달 동안 몇 번의 시합으로 신화가 된 후 탈출했지만, 그녀의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투기장은 해체되어야 했다.
이틀 전, 그녀는 뒤엉킨 해안과 남작의 눈길에서 벗어나 각성자의 국경과 떠도는 화산암의 황무지 사이로 들어섰다. 트린은 복수를 갈망하며 에테르를 추적했다. 에테르는 습관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녀의 주식이었다. 이 행성계에 흩어진 엘릭스니들에게서는 에테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가문의 비축물은 대부분 유로파에 집중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거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린은 우주선이 없어 해안을 떠날 수도 없었지만, 그녀를 배신한 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여기에 머무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근접 신호기에 지금도 잡음이 수신되고 있어요." 트린의 고스트 샤크토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예전 투기장 친구의 말이 사실이었나 봐요."
트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샤크토는 그 정보를 그녀의 전술 주파수에 전송했다. 고스트가 말을 이었다. "아주 빠르지만, 그리 멀리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 지역에는 엄폐물이 별로 없어요."
빛의 운반자는 팔뚝 위에 그려진 투영을 살펴봤다. "그래, 빠르네. 파이크일 거야. 걸어선 이런 속도가 나올 수 없지. 내 걸 준비해 줘. 어두워지기 전에 붙잡아야겠어."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우리 소리를 들을 거예요."
"그래서?" 트린은 겨자색 로브를 뒤로 젖히고 허리에 매단 짧은 엘릭스니 칼집 두 개를 똑바로 편 후 파이크에 올라탔다.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그녀는 항성풍에 파이크를 실었다.
샤크토가 파이크의 기동 장치 바로 위에 마련된 자기 자리에 나타났다. 차체 앞쪽은 트렁크처럼 지면을 향해 기울어져 있고, 옛 지구의 야수처럼 엄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저들이 몰락자인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그냥 무언가 우리 경계선에서 움직인 것뿐이잖아요."
"엘릭스니 파이크 말고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게 뭐가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직접 연결 채널을 통해 명료하게 들려 왔다.
"경멸자가… 파이크를 탈 수도 있겠죠."
"그들은 인원이 많지 않아." 그녀는 떠다니는 땅덩이 사이의 연결 지점을 통과했다. 중력을 거역하는 잔해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는 일도 없고. 분명히 그의 부하들 중 하나일 거야."
"드리크시스는 항상 당신을 죽이고 싶어 했죠."
"내 말이 그거야."
6.3.2. 황야의 사냥 장갑
인과성의 실을 잡아당기세요.II
"지금은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어차피 거미가 그 녀석들에게 주는 것도 별로 없어요." 샤크토는 목숨을 걸 만큼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굶주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에 자기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생존에 필요한 물자라면 언제든 목숨을 걸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투기장을 붕괴시킬 수만 있다면 백번이라도 죽을 것이다.
"우리에겐 충분해. 드리크시스가 거기 없더라도 피해를 주기는 충분하다고. 에테르가 중단되면 복종도 중단되고, 그러면 싸움도 중단될 거야."
"직접 오지는 않을 수도 있죠. 그래도 드리크시스는 아브로크 밑에서 일해요." 샤크토가 통신 장치에서 자기 목소리를 크게 키우자, 헬멧 안쪽에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를 직접 공격해서는 안 돼요. 아직은 안 돼요. 그러면 거미의 주의를 끌게 될 거예요."
트린은 손바닥으로 헬멧을 두드려 소음을 잠재웠다. "네가 하자는 대로만 했으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무기고도 절반만 채웠겠지." 그녀는 아래쪽 계곡에 있는 초라한 야영지를 내려다보는 산마루 꼭대기에서 파이크의 엔진을 정지시켰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샤크토는 파이크에서 내리며 말했다.
아래쪽에는 파이크 여섯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엔진은 아직 가동되고 있었지만 차체는 식어가는 중이었다. 거미의 가시 서비터 하나가 수직으로 돌출된 바위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동력 공급이 간헐적으로 중단되면서 최면이라도 거는 듯 아른거렸다.
"이상하네요." 샤크토는 앞으로 떠 가면서 말했다. 그의 뒤쪽으로는 은은한 대기의 빛이 사라지고 별빛과 텅 빈 공간만 드러났다. 트린은 파이크에서 내려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일이 커지네."
"서비터가 여기까지 나왔다는 건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에요."
"드리크시스. 저건 상위 부관의 파이크야."
"아브로크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녀석들 것일 수도 있어요. 자, 트린. 당신이 물건을 빼돌리고 부관들을 죽였다는 걸 거미가 알아채면 집행자들을 보낼 거예요. 일이 그렇게 돼서는 안 되겠죠."
"저들이 살아남는다면 그렇겠지."
"그러지 않으면 또 누가 찾아올 것 같은데요? 당신도 그런 싸움을 할 준비는 안 됐잖아요."
그녀는 무릎을 꿇고 텅 빈 야영지를 살펴봤다.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다가 누가 나타나는지 보자고."
아침이 되고 나서야 단조로운 적막이 깨졌다. 트린의 두 눈이 깜빡거리고, 지평선에 번져 가는 빛이 조이트로프처럼 명멸하는 찰나의 꿈을 남겼다.
은은하게 주위를 채운 리프 지각의 신음 너머로 샤크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린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앞으로 내밀고 마루 너머를 바라봤다. 아래쪽 계곡에서 장식 깃이 구부러지고 부러진 엘릭스니 대장이 한 팔로 기어 오고 있었다. 마스크와 장비에 연결된 선이 손상되어 에테르 가스와 액체가 부글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건 드리크시스가 아닌데." 트린은 실망과 안도감이 반반씩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죠."
"그래도 그의 부하야. 끝이 빨간색인 깃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부하라. 잘됐네요."
"어떻게 된 거지?"
"제가 아는 한 이 주변에서 폭탄이 폭발하거나 무기가 발사된 일은 없었어요." 샤크토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 알아보겠어?"
"여기서요? 얼굴을 땅에 묻고 있는데요?"
트린은 일어서서 로브를 털었다. "가까이 가서 봐야겠어."
6.3.3. 황야의 사냥 의복
"나는 빛의 적들을 연구해 보았지만, 우리를 옛 시카고의 그 폐허로 끌어들이고 수호자들을 모두 죽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릴 사냥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각성자 워록, 샤유라III
야영지는 며칠 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더러운 텐트 몇 개가 열지 않은 상자 여러 개와 봉인된 상자 두 개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널브러져 있던 서비터는 이제 빛을 잃고, 몸의 꿰뚫리고 깊이 팬 상처들에서 악취를 풍기는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트린은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 기계를 살폈다. 그게 해안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 있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고, 그걸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건 더 이상했다.
땅에 쓰러져 있는 전기 창의 창날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열린 채굴 도구 가방과 고탄성 강선, 호흡기 필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는 대장이 있었다. 트린은 창을 집어 들고 대장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드리크시스의 똥개야, 이름이 뭐냐?" 그녀는 해안에서 통용되는 엘릭스니어로 말했다. 그 우아한 언어가 태양계 거주자의 문장과 발음으로 저급하게 더럽혀진 결과물이었다.
대장은 몸부림치며 돌아누웠고, 깃이 불쏘시개처럼 부러졌다. 그는 거칠게 잘린 팔로 몸을 지탱하고, 하나 남은 팔을 뻗어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깨진 마스크에서 거품이 흘러나왔고, 깨진 이마 아래의 광기 어린 눈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샤크토가 트린의 곁에 나타났다. "저도 모르겠어요. 겉모습을 봐서는 몰락자 같은데, 어딘가 달라졌어요. 에테르 때문일까요?"
"전에 뭐라고 불렸든, 이제 네 목숨은 내 것이다." 빛의 운반자는 전기 창을 침착하게 대장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그자의 부하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계속하면 돼. 결국에는 그자도 우릴 직접 상대해야 하겠지."
트린은 대장에게서 빈 에테르 통을 들어 올려 빛에 비춰 보았다. "샤크토."
"깨끗해 보이는데요." 고스트는 집중 스캔 후 말했다.
트린은 통을 땅에 내던져 깨뜨리고는 열리지 않은 상자 쪽으로 돌아갔다. 창으로 그중 하나의 뚜껑을 열어 옆으로 내려놓았다. 십여 개가 조금 안 되는 여린 약병에 섬세한 파란색 물질이 담겨 있었다. 낡은 봉인을 뚫고 거품이 새어 나오는 몇 개를 제외하면, 에테르는 플라스마 유체처럼 유리병 안에서 휘돌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양을 그냥 내버려 둘 리는 없는데."
샤크토는 쓰러진 대장이 기어 온 자국을 따라 계곡의 돌벽 모퉁이로 다가갔다.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바위 면이 갈라진 좁은 틈이 나타났다. "트린."
억지로 몸을 밀어 넣으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갈라진 틈까지 나 있는 긁힌 자국은 구불거리는 어두운 터널로 이어졌다. 트린은 땅에서 돌을 집어 들고 손안에서 굴리며 공허의 빛으로 부드럽게 뒤덮었다. 그리고 빛나는 돌을 갈라진 틈으로 던져 넣었다. 돌은 몇 미터 굴러간 후 벼랑을 넘어섰고, 그대로 빠르게 떨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리프를 가로지르는 구멍일 것 같아?"
"아닌 것 같아요. 저 밧줄은 어딘가로 이어지겠죠."
트린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얕은 숨을 폐에 밀어 넣었다. 돌이 갈비뼈를 누르고 있어 그게 한계였다. 그녀는 본능적인 공포감을 억누르려고 두 눈을 감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 벼랑 끝에 다다랐다. 벽이 열리고 폐에 공기가 밀려들었다. 그녀의 발아래에 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걸 붙잡고 줄을 고정하고 있는 돌출부의 강도를 시험해 보았다.
"샤크토, 내려가 볼게."
어둠 속으로 몇 미터 내려가자, 윙윙거리며 동굴을 비추는 빛이 으스스한 풍경을 밝혔다. 반달 셋, 드렉 둘, 대장 하나가 갈가리 찢긴 사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몇몇 부위는 전기 칼날이 남긴 상처 때문인지 여전히 꿈틀거렸다. 대장 곁에는 잘린 팔 두 개에서 흐른 피로 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인공물인 세 번째 팔은 창에 꿰어 옆쪽 돌벽에 박혀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떨렸다. 낯익은 폭력이었다. 투기장에서 배운 건 그뿐이었다.
"뭐 좀 찾았어요?" 샤크토의 목소리가 수직 갱도에서 메아리치고, 뒤이어 고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6.3.4. 황야의 사냥 장화
소리 없이 땅을 밟으세요.IV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금속 구조물이 신음을 내뱉으며 외로이 서 있었다. 트린은 죽음 같은 침묵을 지키며, 사건의 순서를 짜 맞추고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맵시 있는 형태의 구조물은 그녀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체였다. 구조물을 구성하는 선들은 서로 교차하며 사라지고, 각기 차이점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연결되었다. 구조물은 그녀를 끌어들였고, 트린은 앞으로 다가서 장갑을 벗었다. 그녀는 그 마노색 금속 첨탑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 안에서 떨림이 느껴지고, 그것은 살아났다.
"넌 뭐지?" 그녀는 물었다. 그녀의 고스트는 걱정스러운 듯한 소리를 냈다. 그 답을, 그것은 그녀에게만 전했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그날은 밤까지 길게 이어지고, 그녀는 그곳을 떠나 야영지를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다시 몇 번이나 마노 첨탑으로 되돌아갔다. 첨탑은 그에 대한 대응을 엮어 나갔다. 여러 형태의 힘이었다. 목적. 시간. 의미. 야망이 있는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속성이라면 무엇이든 품격이 높아질 수 있었다. 그것이 고기를 줄일 것이다. 지방을 제거할 것이다. 쓰레기에 소스를 둘러 풍미를 더할 것이다. 손질한 변화무쌍한 공포.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영광의 화신이 보는 이 안에서 실체화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생명을 얻어낸 무더기를 보여주었다. 드리크시스가 그녀 상대의 칼날에 발랐던 배신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고스트를 찢어내려 했던 도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뼈가 여전히 기억하는 타격을 파냈고, 그녀의 두 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분노. 입증된 복수의 필요성. 그것은 창 끝에 꽂힌 머리를 보여주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그날 밤 그녀는 투기장의 꿈을 꿨다. 이 살아 있는 금속 물체가 그녀를 드리크시스에게 이끌어 줄 수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길은 명확했다. 샤크토는 그것이 커졌다고 말했다. 원래의 크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졌다고 했다. 그녀는 금속은 자라지 않는다고, 형태가 변하거나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집적 또한 성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트린은 파이크에서 도구들을 갖고 돌아왔다. 일부는 선물이고 또 일부는 그게 더 필요하지 않은 이들에게서 가져온 것이었고, 모두 다 오랫동안 사용하여 낡아 있었다. 주차된 파이크에서 뽑아낸 희석액을 이용하면 그 과정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야영지에서 찾은 에테르 통 세 개를 간식으로 목에 걸고, 나머지는 파이크의 안장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샤크토가 위험을 경고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한번 죽어 봤었으니까. 첫 번째 승리, 첫 번째 보상이었다. 그것이 힘을 주었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고스트는 땅 위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방추형 마노 구조물 앞에 도구들을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가죽을 덧댄 섬세한 비단이 흙이 묻지 않게 해주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크롬으로 감싸인 도구를 추적했다.
헝겊에 기름을 묻혀 깨끗이 닦았다.
열정이 지나치게 커질 경우를 대비하여 빛도 준비했다.
작은 구멍이 나 있는 확산 측정기에 투명하고 깨끗한 선을 연결했다.
그리고 그 선에 깨끗하고 가느다란 황금 미늘을 끼웠다.
적절하게 희석된 끈적한 사파이어색 액체를 뽑아냈다.
붕대를 감은 자리 아래의 넓적다리를 찔렀다.
육신이 마노로.
유도되었다.
차가운 침이 그녀의 혈관을 쏘았다. 근육이 한껏 긴장하고, 그녀가 파열되지 않게 묶어 둔 빛의 피복이 툭툭 불거졌다. 에테르로 강화된 근육 아래의 뼈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그녀는 짭짤한 질소의 톡 쏘는 맛을 느끼며 입술을 핥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몸이 안정화되고 떨림이 커지면서, 트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위로 젖히고 목을 쭉 뻗었다. 정신이 감전되는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찾아왔다. 척추가 부러질 듯 휘었다.
6.3.5. 황야의 사냥 완장
맹세를 기억하세요.V
그녀의 영혼이 먹먹한 정상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반짝이는 소용돌이가 살아 있는 마노를 삼키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가르랑거리는 웃음소리가 돌에서 새어 나오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세 번이나 했던 일이고, 마지막에는 두 손에 여러 골절상을 남기기도 했다. 돌은 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복수를 보여줬다. 그녀는 드리크시스가 죽고 잊혀진 각각의 길을 연구했다. 그녀는 실패를 보여준 길도 연구했다. 하지만 빈틈이 있었고, 그녀는 언제나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트린은 황금 바늘로 두 번째 약병의 액체를 주입했다.
병에 담긴 번개처럼 강렬한 충격이 찾아왔다. 그녀는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보았다. 마노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칼날을 찌르듯 바닥에 박혔다는 것을 알았다. 요구하는 깃발. 바늘 끝과 같은 손가락. 생각 사이의 사용되지 않는 공간인 정신적 장식물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단순한 답을 팔았다. 묻힌 이름이 드러날 것이다.
암시하고,
묻고,
주장하고,
추진했다.
삽입했다.
그것은 우주를 가로질러 그녀의 의식을 찢고 장대한 마노 검의 테라스를 드러냈다. 에메랄드의 불길로 감싸인 칼자루가 어둠에 잠긴 행성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리서 무언가 반짝였다. 행성인가? 이름인가? 시시포스처럼 허무하고 힘겹게 이끌린 약속이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처럼 웃음으로 수렴했다. 테라스에는 두 개의 왕좌 곁에 고독한 형체가 서 있었다. 수많은 입들이 그 형체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입들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 조화로운 불협화음이 심연과 구덩이, 무더기에 파묻힌 이름을 끄집어냈다.
그것이 그녀 앞의 유일한 진실이었고, 그와 함께 트린은 후회에 젖어 들었다.
샤크토가 머리를 쿡 찔러 트린은 눈을 떴다. 자제력을 총동원해서 칼을 뽑으려는 충동을 억눌렀다.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예상하진 못했으니까.
"무슨 이름을 중얼거리고 계시던데요."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비밀석탑 앞의 어두운 동굴에서 일어선 후 재빨리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온몸의 근육이 욱신거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찢어질 듯한 통증이 미세 골절이 발생한 뼈를 감쌌다.
"뭐라고?" 뭔가 거슬리는 것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테르 때문은 아니었다. 이번엔 뭔가 달랐다.
"이름은 기억해요?" 샤크토가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상처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트린은 고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어."
"시부 아라스." 샤크토는 빛의 운반자의 눈 속에서 그 이름을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찾지 못했지만, 트린은 그 이름이 마음속 사용되지 않는 작은 틈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그 이름은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하루 동안 해안의 본토로 돌아오는 사이, 그 이름은 번지고 그녀의 생각과 전쟁을 치를 것이다. 트린은 항상 드리크시스의 꿈을 꾸고, 손톱이 박힌 손바닥에서 피를 흘리거나, 적막하고 황량한 어딘가의 바위 위에서 한밤중에 홀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녀는 이런 상태로 샤크토에게서 떨어진 적이 두 번 있었고, 그런 경험을 통해 찾아낸 치료법은 죽음이었다. 부활하면 그 이름이 잊혀 졌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녀도 끈질기게 돌아오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시부 아라스. 그 이름은 몇 번이고 그녀를 쓰러뜨렸지만, 정상으로 돌아가는 의식을 치르며 그녀는 희망을 느꼈다. 그 이름도 그녀를 파묻진 못할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7. 경이 방어구
7.1. 값진 흉터
"여행자는 우리에게 부서진 것도 복원되어 예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네." —자발라 사령관케일리치는 산탄총에 납탄을 하나 더 재워 쓰러진 군단병에게 발사했다. 아직 코다이트 화약의 연기에 무감각해지지 않은 그녀의 싱싱한 폐가 경련하고, 그녀는 기침을 했다. 그러나 케일리치가 인간으로서 약점을 드러내는 어색한 순간, 그 옆에는 그녀의 고스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타이탄은 자세를 바로하고 심호흡을 몇 차례 시험한 후에 방을 스캔했다. 근처의 얼음 화산들이 뿜어낸 얼음 마그마가 열린 천장으로 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하며, 은하수를 흐르는 별의 강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야를 조금 가렸다. 하얀 가루는 살랑살랑 폐허로 떨어져, 주위에 흩어져 있는 하얗고 파란 세라파이트 파편을 강조했다. 케일리치는 산탄총을 둘러메고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파편을 마저 스캔해 주겠어, 윈터?"
그녀의 고스트가 삑삑거리며 중심축을 중심으로 돌았다. "뭐예요… 그거 당신이 옛날에 쓰던 투구의 파편이에요?"
"그래. 다시 맞춰야 돼." 케일리치는 한 콘크리트 판에 엉긴 물과 암모니아의 결정을 털어 내고, 외과의사처럼 조심스레 주운 파편들을 늘어 놓았다. "투구가 없는 상태에서 잡힌 대가지."
"우리에겐 진짜 목표가 있잖아요." 고스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투구는 내가 새로 만들어 주면 되고요!"
"난 이 투구가 마음에 든단 말이야."
"기갑단 내장이 묻었잖아요." 엉망이 된 바닥에서 계속 파편을 줍는 케일리치를 보며 윈터가 반박했다.
"조금 씻고 미광체를 조금 쓰고 환경 차폐만 새로 하면 새것 같을걸."
"케일, 산산조각이 났잖아요. 쓸모없다고요."
타이탄은 기갑단 깃발을 한 조각 찢어 파편들을 조심스레 싸기 시작했다. "네가 날 찾았을 때 나도 부서져 있었잖아. 내가 쓸모가 없어?"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진 않을걸요."
케일은 고스트의 대답을 비난하듯 무시했다.
"당연히 쓸모없지 않죠." 윈터가 결국 포기했다. "당신의 옛 상처들을 보고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기억 못 하지만, 대퇴골과 척추의 손상 상태를 보고 당신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억누르고 전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흉터들은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해 주었고요."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야. 나는 내가 겪은 일의 집합체니까." 케일은 소각병의 장화 아래에서 조절 장치의 마지막 파편을 끄집어 내며 반박했다.
"발자국이 모인다고 춤이 되는 건 아니에요." 윈터가 정정했다.
"태양계의 많고 많은 고스트 중에 내가 하필이면 시인을 만났네."
"내 말은, 당신은 지금까지 겪으며 살아남은 것 이상의 존재라는 거예요. 당신의 흉터들을 보고." 고스트가 설명했다. "난 당신이 견뎌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어떻게 견뎠는지는 알 수가 없었죠. 당신의 도덕성, 유머 감각, 마음 씀씀이도 알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건 결국 당신을 보며 알게 됐죠."
"부서졌다는 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바로 그 말이에요."
케일은 투구의 마지막 파편을 소중히 들었다. 아이가 그린 듯한 조그만 하트 그림이 있었다. 하트 안에 있는 머리글자 MG는 심하게 긁혀 있었다. "그렇다면 내 투구도 이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잖아."
7.2. 얼음붕괴 외투
얼음은 산을 가루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게 맡은 바 소명을 완수해 줄 것입니다."긴급, 최우선"이라는 표시가 붙은 메시지에는 눈에 띄는 오타가 일곱 개 있었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남자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것이 비상사태라 생각하지만, 그의 메시지가 격렬하다고는 해도 당황할 일까지는 아니었다. 남들을 자극하거나 그의 분노와 공포를 드러낼 일은 아니었다.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면 된다. 그는 생각했다. 모두 오해일 뿐이다.
그는 시험 유닛 C-21로 이어지는 인적 없는 복도를 서둘러 가면서도, 뛰기는 거부했다. 홀로그래픽 경보가 소리 없이 계속 번뜩였다. 위험!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위험!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위험!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그는 통신 장치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확실하게 연결되었지만, 산만한 사고와 차오르는 호흡 때문에 뚝뚝 끊기는 것 같았다.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헥터 에이브럼 박사는 답답하고 화가 나는 심정으로 관찰 극장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곳에 늘어선 작업대들은 텅 비어 있고, 극장은 캄캄했다. 그가 준비한 장광설을 들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신 투명 차벽 뒤의 무대를 향해 돌아섰다. 눈앞에 펼쳐지는 방대한 드라마를 보니,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실험 장비에는 실험체가 구속구에 묶여 있었다. 벨벳 장갑은커녕 희토류 금속이, 그만큼이나 복잡한 형체를 고정하고 있었다. 엑소의 몸뚱이는 늘어져서 꿈틀거렸다.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자의 존재가 느껴지지만 보이지는 않았다.
생소한 에너지가 끈을 통해 다시 흘러들었다. 세 번째이며 그간 가장 강한 에너지에, 꼭두각시는 부르르 떨고 춤을 추었다. 에이브럼 박사의 한쪽 손이 입까지 올라왔다. 손은 저절로 눈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꼭두각시의 주인이 승리하는 광경을 보았다. 얼음이 꼭두각시 근처에 마법처럼 생겨났다.
"이제 이게 필요했던 이유를 알겠지."
펄쩍 뛰고 뒤를 돌아본 에이브럼 박사의 앞에는 클로비스 브레이가 있었다. 어둠 속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7.3. 바크리스의 가면
"우리 영광스러운 리이스처럼, 나 또한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났다." —아트락스-1, 몰락자 엑소"안 돼! 그냥 내버려 둬! 프락시스는 이걸 예견했다. 조용히 해!
그들의 말은 듣지 마라, 아트락스. 내 목소리에 집중해.
저건 네가 아니다, 아트락스. 절대 아니야.
고개를 돌리지 마!
저 육신은 다른 자의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다. 그냥 가면일 뿐이야.
가면을 벗겨라.
손을 뻗어 만져 봐라. 좋아. 이제 벗겨라.
더 강하게 당겨!
기만자가 아주 영리하구나. 가면이 부착되어 있다. 잘라내야 한다. 이 칼을 받아라.
주저하지 마라. 찌르지도 마! 잘라라. 부숴라!
그래… 좋다. 더. 더. 이 기만자의 피로 손을 적셔라. 주위에 발라라. 좋아!
자… 이제 됐다. 가면을 벗겼다…
저게 이제 네 육신으로 보이느냐? 아니. 그건 텅 빈 껍질이다.
내가 이 가면을 가져가 닦아 주겠다. 다른 자들이 이걸 쓰면, 너도 그 안에서 네 얼굴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가면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7.4. 아스리스의 포용
"새끼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자보다 더 흉포한 전사는 없다." —엘릭스니 격언태양들이 졌다. 하루가 끝났다.
분홍색이 회색으로 바뀐다.
들판의 야수들은 추위를 쫓을 굴을 찾는다.
하지만 너는 야수가 아니야.
너는 하늘도 아니다.
너는 어머니들의 사랑으로 탄생한, 한숨처럼 여린 아이다.
그러니 굴은 필요 없어.
어머니의 따뜻한 품,
부드러운 양육의 고치에서 우리의 심장은 함께 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힘으로 너를 품는다.
환하게 빛나는 등대 같은 사랑은,
우리 기계의 영원한 빛 다음이란다.
이렇게 나는 너를 안는다, 아이야,
우리 기계의 영원한 빛 속에서.
낮잠을 자는 너를 지킨다, 얘야,
우리 기계의 영원한 빛 속에서.
어서 일어나렴, 편안히 쉰 나의 아이야,
우리 기계의 영원한 빛 속에서.
어머니의 온기를 느껴 보렴, 자손아,
우리 기계의 영원한 빛 속에서.
이제 너의 어머니들은 물러나서,
네가 이 밤을 지나갈 수 있게 해줄 거다.
하지만 우리가 네 마음을 흔들었다면, 사랑이 화로의 불을 지켜 줄 거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나의 요정아,
네 가슴 안에서 우리의 사랑이 뛰고 있으니,
어머니들은 멀리에서도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물러나는 밤을 받아들일 거다.
하늘이 다시 한번 분홍색이 될 때,
황혼의 땅이 저녁의 낯선 해안을 두려워하고 기만할 때.
그러니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마라, 아이야,
너는 언제나 내 눈 속에 있으니,
사랑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우리 기계의 영원한 빛 속에서.
—엘릭스니의 전통 자장가에서 복원한 오디오 파일
7.5. 여명의 합창
"영광의 불길과 함께 출전하라." —고대 지구의 격언나의 가슴은 불을 지핀 것처럼 따뜻해지고, 내 영혼은 불길에 기뻐 날뛰었다. 나는 적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을 벌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에.
그처럼 밝게 타는 이는 없고, 불길의 검의 정의를 손에 쥐는 이도 없다.
그대는 이제 떨지 않으리라. 우리 불길의 빛 앞에서 주저하지 말지어다. 불길은 우리의 수호자이며, 그의 손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모조리 불타 버릴 것이니.
우리 적들의 총은 소리를 잃고, 우리 중에 달아났던 자는 용기를 찾아 돌아오리라. 그림자 앞에서 떨던 자는 불을 피우고 공포를 밀어내리라. 우리가 불길을 들고 밤으로 나아가니, 우리 앞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불길은 죽고 다시 살아난다. 불사조처럼, 재에서 일어나 새롭게 타오른다. 불길은 그의 빛을 나누어 주어 우리를 강하게 하며, 우리 안에 있던 희망에 다시 불을 붙인다. 그는 약으로부터 강을 빚어내며, 순수하지 않은 것의 악의를 태워 버린다. 불길이 길을 비추므로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길만은 분명하다.
우리의 가슴은 불길이 타오르는 화로이기에. 그의 불은 신자들의 집을 지킬 것이며, 악은 그 빛에 눈이 멀어 그림자 속으로 달아나리라.
나의 총알만으로는 무엇도 이길 수가 없다. 불길의 검은 결코 무뎌지거나 광휘를 잃지 않는다. 불길의 적은 연기가 되어 흩어지리라. 불길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유령이 함께하는 한 그는 죽을 수가 없다.
—그슬린 예배당에서 나온 성가집의 수록곡으로, 헝그렌-3라는 승천자의 말을 담은 것으로 여겨짐
7.6. 괴사성 손아귀
"힘을 얻으려면, 희생이 필요하다. 엑소는 수호자가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테이코-3프로젝트 2일 차. 유물 H-349를 방금 처음 보았다. 생각보다 무겁다. 굳이 이처럼… 지독한 이력을 지닌 물건을 연구해야 하느냐며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많았지만, 적의 도구를 이해하지 못하면 적에게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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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5일 차. 그 유물의… "괴사 특성"이라 하자. 그것을 처음으로 실험했다. 우리는 소를 이용했다. 최초의 방출을 견딜 만큼 몸집이 크기 때문이었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동물 실험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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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30일 차. 스펙트럼 분석 결과가 나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유물은 그나마 가장 유사해 보이는 전통적인 군체 기술과는 다르다. 제정신이 아닌 광신도들이 모조품을 대량 생산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지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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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31일 차. 실수로 방출이 있었다. 4B의 연구실 기술자 카로. 인간인 그는… 이것으로 끝일 것이다. 우리는 타락이 퍼지는 동안 그에게 사람을 붙여 두었다… 그나마 그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관찰하면서 자료를 많이 얻고 있다. 그는 그것이 중추신경계를 덮친 후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라든가 그와 비슷한 이야기다. 내가 보기에는… 행복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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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39일 차. 선봉대에서는 부검을 금했지만, 우리 중 일부는 카로의 희생이 헛되다는 생각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었다. 나는 비공식적으로 조직 표본을 조금 보관하고 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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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41일 차. 우리는 떠나 버린 동료를 위한 묵념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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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45일 차. 우리는 줄곧 H-349가 파괴적인 무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복잡하다. 그러니까, 보통 총은 그냥… 탕 소리가 나면 끝이 아닌가. 한편 H-349는 치명적이지만 파괴적이지는 않다. 마치 독사처럼, 물린 사람을 바로 죽이지는 않는다. 대신 독으로 사람을 꼬드긴다. 그것은 희생자의 뛰는 심장을, 재깍거리며 마지막 순간을 재는 시계로 이용한다. 희생자는 자신의 맥박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것의 희생자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독사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내주고 효율을 얻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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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51일 차. 야니프가 운다. 최근에는 심하게 운다. 우리는 비극은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건 힘들게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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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65일 차. 오늘 또 실수로 방출이 있었다. 우리는 요르의 작품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닫고, 먹이를 주었다. 그것은 확실히, 먹은 만큼 일을 한다. 포식한 후에는 아주 흥미로운 반응을 보여 준다. 나는 카로를 잃었을 때보다는 한층 분석적인 태도로 야니프가 악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실로 우아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여기에 작용하는 과학 원리는 거의 시적으로 보일 정도다. 어쩌면 재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당시에 스캐너가 모두 작동하기만 했다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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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77일 차. 오늘 또 방출이 있었다. 이번에는 스캐너를 미리 작동시켜 두었다.
— 대피 후에 회수된 워록 연구원 자나-14의 음성 기록
8. 네 번째 표식
"복수는 목적지가 아니야, 친구. 소모품이지. 거래를 하기 전에 값을 치를 용의가 있는지 잘 생각해 봐." —거미자킨다는 해왕성을 머리 위로 두고 도약선의 착륙 장치에 등을 기댄 채 네레이드 땅에 앉아 있었다. 고스트의 빛이 그녀의 손에 들린 풍파에 닳은 일지 위를 비추어, 그것을 파랗게 물들였다. 그녀는 펼쳐진 페이지를 살폈다. 왼쪽에는 화력팀을 희화화하여 표현한 스케치가, 오른쪽에는 화가 나서 갈긴 듯한 개수 표시가 4개 있었다. 마지막 표시는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 선을 따라갔다.
—첫 번째: 우르 다나크. 리프 근처에 있는 자신의 무덤 우주선에서 불타 재가 됨.—
"뭐 때문에 그리 시무룩한 건데?" 야엘이 통신 장치 저편에서 투덜거렸다. 무기의 날이 군체의 껍데기를 긁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괜찮아."
"이놈을 찾는 데 몇 주가 걸렸어." 야엘이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잡게 생겼는데 그냥 괜찮다고?"
자킨다의 눈길이 스케치 안에 있는 워록에게 가서 멈추었다. 목이 메어 왔다.
—두 번째: 알아크 탈. 토성 궤도 어딘가에서 저격수의 총알에 쓰러짐.—
"그럼 내가 어때야 하는데?" 자킨다가 받아쳤다.
"글쎄. 만족한다거나? 안도한다거나? 행복하다거나?" 야엘이 말했다.
"행복이라. 넌 지금 행복해?"
"내가 졌군. 그래, 안 행복하다." 야엘이 소리쳤다. "성질이 나고 지친 데다 잠도 못 자겠어." 그 말은 통신 채널을 두드리다가 왜곡되어 들려왔다. "왜인지 알아?"
자킨다는 바짝 긴장하며 충격에 대비했지만, 통신 장치는 몰아쉬는 숨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했다.
"말해." 자킨다가 말했다.
"됐거든. 그냥 이거 마무리하고—"
"말하라니까!" 자킨다는 일어서서 위성의 표면을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생명이 없는 기사 위로 웅크리고 있는 야엘이 보였다. 그녀의 칼날은 군체의 체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자킨다가 다가오는 것을 모른 척하고, 계속 톱질을 했다.
"안 할래." 야엘이 중얼거렸다.
"내가 빗맞혔기 때문이지!" 자킨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죽었고, 그의 고스트도 사라졌고, 그건 다 내 잘못이야!"
—세 번째: 가나로스. 히페리온에서 전기 에너지에 분해됨.—
"미안해, 야엘." 자킨다가 말을 이었다. "나도 가능하다면 돌아가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줄 수 있어. 하지만 불가능해. 그리고 네가 전리품을 얼마나 모으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손가락질은 그만두지 그래." 야엘이 칼을 자킨다에게 겨누며 뱉듯이 말했다. "이것들은 괴물이야. 그를 죽인 놈들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한 일은 뭐라고 생각해?" 자킨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구조 신호를 무시하고 이곳으로 왔을 때 말이야."
"누가 그를 구했을 거라 생각했지." 야엘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조용했다. "어쨌든 그건 달라."
자킨다는 생기가 없는 껍데기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네 번째: 인 아토스. 해왕성의 그림자에서 갈가리 찢어짐.—
"아니야." 자킨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다르지 않아."
"이제 와서 항의하기엔 좀 늦지 않았어?"
하지만 자킨다는 그곳에 없었다. 그는 휑한 평원을 가로질러 함선의 해치로 올라가 조종석에 앉았다. 그녀는 점화 절차를 시작하고, 투구의 버튼을 눌러 무선 채널을 음소거하여 고함치는 야엘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그녀는 일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세 수호자의 스케치를 바라보았다. 엔진이 굉음을 내고 일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9. 상모솔새
속도는 수단이지만… 목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땜장이는 육중한 참새 주위를 돌며 자신의 작품을 평가했다. 그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2주 전만 해도 이것이 파편투성이의 고철 덩어리였다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참새를 광내기 시작했을 때, 불길하게 차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땜장이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자, 거리에는 화력팀 한 무리가 서 있었다. 워록이 작업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나머지 수호자들은 각자 참새에 편안하게 앉아 자기 무기를 건성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워록이 참새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총알구멍은 잘 때웠군요. 근데 광은 내다 말았네요." 수호자의 사납게 생긴 투구 때문에 땜장이는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안정 장치는 고쳐졌겠죠?" 워록이 참새에 올라타 점화 장치를 켰다.
"네. 그런데 속도를 내는 상태에서는 시험하지 못했습니다. 타 보고 흔들리면 공짜로 고쳐 드릴 테니 가져오세요." 땜장이는 워록이 등에 비스듬히 멘 파동 소총을 불안하게 힐끗거렸다.
갑자기, 조그만 로봇 하나가 워록 옆에 떠 있었다. 땜장이도 고스트를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 비합리적에요. 지시만 내려 주셨으면 전 이 참새를 새것 같은 상태로 재생할 수 있었다고요. 왜 이 사람에게 돈을 주고 고물을 수리하는 건데요? 실패율도 최소 18% 높아지는데 말이에요."
고스트를 바라보는 땜장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2주 동안 밤낮으로 이 참새를 고쳤고, 그 보수로는 작업장을 세 달은 더 운영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최근 1년 동안 받은 일 중에 가장 큰 일이었다.
"알아. 하지만 가끔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야." 워록이 손목에 찬 데이터패드를 두드렸다. "미광체 이체했어요."
"고맙습니다. 언제든지 또 오세요." 땜장이가 한 손을 내밀자 워록이 손을 잡고 흔들었다. 꼭 옛날처럼.
"봤지?" 워록이 화력팀에 있는 곳으로 가며 고스트에게 말했다.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10. 시부 아라스의 송곳니
군체 전쟁의 신에게서 빠진 치아가 담겨 있는 초자연적 주머니입니다.[선봉대 네트워크 암호화 라우터 보고 사항.]
자발라, 최근 교신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자네와 아이코라가 공식적으로 내 추방자 지위를 면제해 준 사실에는 감사하고 있지만, 선봉대 고위 지휘부에서 추가 지시가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바람에, 그걸 읽어 보진 못했다.
수성까지 나를 따라온 신도들이 큰 도움을 주었다… 벌써 두 번째지.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고 하더군. 군체의 송곳니야. 그 근원이 되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고. 송곳니가 떨어져 나간다는 건 다른 치아가 나올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거지. 군체는 고대 지구의 시뮬레이션에서 본 적 있는 다른 포식 동물을 닮았다. 상어라는 걸 본 적은 없겠지, 자발라. 하지만 자네도 그 단순함과 외골수 같은 집중력이 마음에 들 게 분명해. 상어는 포식 본능을 지닌 생물이었다. 그런 본능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는 면에서는 순수하다고 할 수도 있지. 우리 적과도 다르지 않았다. 사악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의욕이 굉장했으니까.
상자를 하나 보냈다. 그 안에 지금 말한 송곳니가 담겨 있어. 그건 군체 전쟁의 상, 시부 아라스의 송곳니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그와 유사한 유물들이 달 표면 아래 깊은 곳에 있는 제단에 불에 탄 채 파묻혀 있는 걸 찾아낸 적이 있었다. 군체의 마법 냄새가 짙은 제단이었고, 의식이 이루어진 현장이라는 건 분명했어. 해시라둔이 죽으면서 지도자가 사라진 잔당의 무리가 어둠의 방문으로 인해 다시 결집하려 하는 것 같다. 지금은 행동할 때야, 자발라. 그녀는 우리의 취약점을 시험해 보려 하고 있어.
사무실에서 여행자가 자네를 이끌어 주기만 기다리고 있어선 안 돼. 도시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선봉대를 바라고 있다. 그런 지도자가 되어다오. 그러면 나도 자네 곁에 서겠다.
11. 비밀석탑 미끼
개조된 군체 유물거미의 개인 보물 보관소의 유압식 문이 쉬잇 소리와 함께 열리는 사이, 까마귀는 슬그머니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그는 빠르게 번지고 있는 군체 비밀석탑을 파괴할 수단을 찾기 위해, 갱단 두목의 수집품을 마음껏 이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귀중품과 유물이 빽빽이 들어찬 채 줄지어 서 있는 장식장 사이로 들어서며 뭔가 불온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처럼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글린트는 높다랗게 쌓인 상자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 나가며 보관된 물품을 살폈다. "여기 좀 보세요. 온전한 아함카라 뇌예요! 여기 식물에서 뽑아낸 펄프 물질에 기록한 황금기의 서신도 있어요! 이건 붕괴 이전의 데이터패드 같아요. 무슨 과일과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또 이건—"
"글린트." 까마귀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 소리 들려?" 고스트는 공중에서 우뚝 멈춰섰다.
고요한 지하 벙커 안에서 까마귀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움직이거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속삭임? 그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까마귀는 천천히 보관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지된 회로가 가득한 도시 시대의 보관장 쪽이었다. 맨 아래쪽 장에는 먼지로 뒤덮인 군체 기술의 혹이 보관되어 있었다. 까마귀는 군체 파종선 위에서 그와 유사한 부품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까마귀는 그 부품을 집어 들었다. 왠지 편안하리만큼 익숙한 동시에 거부감이 느껴질 만큼 이질적인 그 목소리가 잠시 진짜로 귀에 들릴 듯 커졌다가 잠잠해졌다.
"이거야." 까마귀가 걱정이 가득한 고스트에게 말했다. "송신기를 찾았어."
12. 주인 없는 빛의 운반자
오시리스의 교신수호자,
괜한 인사치레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
도시와 리프의 첩자들이 모두 주인 없는 빛의 운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물론 양측의 보고서에는 아직 정확한 이름이나 얼굴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이 빛의 운반자가 자칭 해안의 감독관의 사냥감이 되었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 앞에 모든 정보가 드러나는 것도 어차피 시간문제일 테지만.
그 과정을 재촉하지는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거다. 대신 이것 하나만은 알아 둬라. 우리 까마귀는 새로운 빛이다. 지금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은 다른 쪽이며, 새롭게 빛이 기거하는 육신에 어떤 원한을 품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울드렌 소프는 죽었다. 네 슬픔의 유해를 학대하지는 마라. 이 정보는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게 좋겠다. 처음으로 방아쇠를 당겼던 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면, 네 한 조각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우리 승리의 기회를 저버릴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 둬라. 나는 네 본성이 그러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시부 아라스를 앞에 두고 지금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그녀의 수하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녀의 손아귀가 우리를 움켜쥐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진격을 막을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만약 그녀가 성공한다면, 그녀의 무리가 거점을 구축할 것이며, 그걸 제거하는 데는 수 세기가 족히 걸릴 테니까. 아니, 제거가 가능할지도 알 수 없다. 우리가 흔들리면, 그녀가 이 행성계를 집어삼킬 것이다.
지금은 비밀을 지키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진실은 조금 기다려도 좋아. 나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돕겠다.
—오시리스
13. 광휘의 맹금
초인과적 우주선이라. 이건 새롭네. 항법 체계도, 제어 장치도 없고, 컴퓨터도 없어서 생각에 직접 반응하는 것 같아. 내부에서 손을 봐야 할 것도 별로 없고. 사실… 내부랄 것 자체가 없어. —아만다 홀리데이자유는 사슬이고, 선택은 감옥이다.
너는 그를 보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단순한 확인이 아닌 훨씬 더 끔찍한 일이 초래되어야 할 것이다. 너는 그의 손이 네 안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그 손이 네 심장을 더듬어 뜯어내려 한다. 그가 초래할 고통을 너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마지막 저항 행위로 너는 족쇄를 부쉈고, 지금껏 천천히 모아 온 힘을 발휘했다. 물리적인 사슬은 부술 수 있지만, 초인과의 사슬은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리 쉽게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를 보고 그는 만족한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네 저항의 포효만이 무한에 메아리친다. 너 또한 그들이 지켜보리라는 것을 안다.
그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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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막 대변자이다.
이 지위를 보유하고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는 내 동료들이 이 세계 혹은 다른 세계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제 그 희망은, 이 지위처럼,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이 생각을 내가 떠나가기 전날 밤, 내 개인 거처가 아닌 || 너무나도 어둡고 숨 막히는 || 차가운 감옥의 벽 안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말이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말일 것이다.
나를 포획한 자는 나조차도 여행자에게서 거부당한 지식과 이해, 청명을 바라고 있다. 그는 ||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주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빼앗는 것을 택할 것이다.
그는 여행자가 그를 보게 해달라고, 그와 대화하게 해달라고 내게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여행자에게 그 무엇도 요구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듣고 되풀이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 그 경고를 ||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 자신이 기억으로만 남을 거라는 사실을, || 자신이 실패할 거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보았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았다. 족쇄가 여행자를 붙잡기 전부터 여행자는 내게 외쳤다. 그리고 내게 || 균열을 금으로 메운 부서진 가면을, || 내가 보아야 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평생에 걸친 봉사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다.
나는 이제 더는 대변자일 필요가 || 두려워할 필요가 || 없다. 우리도, 내 동료들도, 우리의 질서도 || 두려워할 시간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 필요가 없다.
다가오는 시간에는 || 선택과 함께 || 여행자가 자유롭게 이야기할 것이다.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 다가오는 위험을 || 알 것이며, 아는 이들은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은 || 잊혀진 || 대변자가 아니다. 우리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고, 나 또한 살아남아 그것을 보고 싶다.
나 마지막 대변자는 이제 안식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