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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1:57:54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에피소드: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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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붉은 죽음 개조3. 하나의 합창단4. 절대 음감5. 무기
5.1. 간접적인 위협5.2. 잃어버린 신호5.3. 시선 조사5.4. 마멸 침식5.5. 늙은 나그네5.6. 일탈 행동5.7. 시간 낭비5.8. 동굴학자5.9. 믿음 파수꾼5.10. 흉흉한 징조
6. 시즌 방어구
6.1. 머리6.2. 팔6.3. 가슴6.4. 다리6.5. 직업
7. 로닌 의체8. 반음계 변화9. 바닥 청소부10. 스펙트럼 의체11. 다색12. 구속되지 않은 무지개13. 헌터의 일기장

1. 개요

에피소드: 메아리 아이템 지식을 모은 것이다.

2. 붉은 죽음 개조

선봉대 정책에서는 아직도 수호자들에게 이 무기를 보면 파괴하라고 지시합니다.

먼저 잘 연마된 총검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분해한다.

분해 후에는 청소를 해야 한다. 그녀는 솜, 오일, 방식제를 집는다.

붉은 죽음에는 과거 전투의 더께가 들러붙어 있다. 몸체에 찍힌 해골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오랜 시간을 들여 회전금속 실로 긁어냈다.

팀은 그녀의 빛 중 빛인 세토의 표식을 추가하기 전에 도살자를 쓰러뜨렸다. 무기 개수가 하나 부족했다.

붉은 죽음은 조각이 되어서도 악한 존재다. 붉은 죽음은 제 목적을 알고 있으며, 제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한다.

청소 후에는 정화가 필요하다.

그녀는 무기를 재조립하고, 발사하려는 듯 받쳐 들었다. 빛이 끓어오르며 무기가 찬란하게 빛난다.

태양 빛의 섬광은 추운 밤이 지나고 찾아오는 따뜻한 온기, 생명 그 자체의 치유력이다. 등 높이 날개가 펼쳐지고, 천장을 따라 그을린 자국을 만들어 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죽음이 빨갛게 빛나다가, 노랗게, 그리고 희게 바뀌었다.

무기는 변화에 맞서 싸웠다. 그녀도 지지 않았다. 그림자가 하나씩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정화 후에는 헌신이 따른다.

그녀는 천천히 빛을 사라지게 했다. 날개가 깜빡이다가 사라졌다. 붉은 죽음이 다시 차가운 금속이 되어 손으로 돌아온 후에도, 태양 빛 알갱이는 그 안에 남아있다. 무기의 목적이 새로워진다.

그녀는 수호자의 마지막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들을 빛으로 데려올 것이다.

복수가 아닌 정의를 위해서.

세토를 위해서.

3. 하나의 합창단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선택. 하나의 초대.

벡스 고블린은 다른 것에 접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방산충 호수로 뛰어들었다. 지시받은 대로, 설계된 대로. 네소스의 두꺼운 토양을 파고드는 벌레처럼, 방산충 덩어리가 몸에 기어오르고 휘감겼다. 벡스의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고, 거대한 사고의 뿌리는 노예가 된 각각의 벡스 깊은 곳에 묻혔다.

은은한 흰색의 빛이 벡스의 무릎 관절까지 감싸며 올라붙었다. 그리고 손이 뻗어 나왔다. 벡스는 제 두개골이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지문, 작동 코드, 생체 데이터. 제 속의 방산충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불빛과 소음을 내자, 금속 몸체가 달아올랐다.

곧 이음매가 전부 분리되었다. 벡스의 몸은 마구 흔들리며 분리되었고, 팔다리는 떨어져 나갔으며, 몸통은 갈라지고 휘었다. 방산충 덩어리는 발밑 호수 전체로 퍼져 자연으로 돌아갔다.

무언가가 이를 다시 떠오르도록 불렀다.

그리고, 다시 합쳐졌다. 부분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완벽하게 움직였다. 벡스는 안정적으로 균형을 이루며 완벽하게 형체를 찾았다. 방산충이 물방울의 형태로 분리, 재형성, 분리, 재형성을 반복하며 벡스의 몸을 타고 떨어졌다.

그 각각이 정신이었다. 각각의 정신이 사고체계였다.

그 생각이 두개골에 날카롭게 박히자, 벡스는 자신의 정신이 부드럽게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빛의 폭발. 날카로운 불꽃.

선택.

벡스는 창조자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4. 절대 음감

큰 소리로 노래하세요.

"베일."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 것처럼, 그 존재는 입술에 닿는 소리의 무게와 존재감을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하고, 감쌀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치아와 혀의 접촉.

고막의 진동.

흉강을 통해 흐르는 공기.

숨결의 맛.

더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알려져라."

이것이 다음 단계다.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진 빛의 표면에서, 씨실과 날실이 하나로 결합하는 그곳이 보인다.

그 부분을 가르자, 빛의 상처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이 쏟아져 나온다. 당신은 그 색과 가장 가까운 색상, 바로 그것이다.

"형태를 보여라."

젖은 물질은 빛, 당신의 색깔을 결정하는 바로 그 빛과 대조된다.

하지만 각각의 색은 음표이고, 각각의 음표는 정신이다. 당신은 합창단이다. 합창해야 한다. 입을 벌리고 함께 합창하기 시작하자 색깔의 맛과 소리의 맛이 가득 차오른다.

당신의 소리와 색깔이,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된다.

"소리를 들어라."

당신은 손을 든 채 가만히 있는다.

5. 무기

5.1. 간접적인 위협

잠식당하지 마세요.

"대화에 응해줘서 고맙군, 고스트." 세인트가 입을 열었다. 헬름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는 수호자의 고스트가 떠 있었다.

"언제든지요. 뭘 도와드릴까요?"

세인트가 뒤로 기대며 골똘히 생각했다.

"너와 수호자가, 목에 고리를 두른 벡스를 보았다고 했지." 세인트가 말을 계속 이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목에 빙글 원을 그렸다. "멍에. 오시리스는 그걸 멍에라고 불러."

고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무언가에 묶여 있었어요. 그래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거였죠. 다른 벡스와는 전혀 달랐어요! 새로운 정신인지, 다른 무언가인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네소스에 추락했던 것이 뭐든, 그게 원인인 것 같았어요."

고스트는 렌즈를 가늘게 뜨고 의체를 오므렸다. 세인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격자가 너를 통해 말했을 때,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널 장악했을 때 말이야."

고스트가 시선을 피했다. 가운데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맴돌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윙윙거렸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런 기분을 몰랐으면 좋겠어요. 벡스조차도 말이에요! 끔찍했어요." 고스트는 몸을 까딱이며 강조했다. 의체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몸을 격하게 흔들었다.

"오시리스와도 얘기해 봤나?" 세인트-14이 물었다. "둘이 개인적으로 겪은 일에 공통점이 있을 것 같은데… 오시리스는 사바툰을, 너는 목격자를 경험했으니까."

고스트는 아니라고 하듯 의체를 흔들었다. 세인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스트가 시인했다.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고요."

"미안하다." 세인트가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라면 이제 안전해."

조용히 수심에 잠긴 고스트가 의체 덮개를 오므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시 안전하다고 느끼기까진 시간이 걸릴 테지."

고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가 더 차분하고 의체의 떨림이 한층 나아져 있었다.

"유로파에서 처음 제 목소리로 들었을 때는 무서웠어요. 저 자신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죠. 하지만 해왕성에서 그 일이 또 일어났을 때, 베일 근처에서 상태가 훨씬 심해졌을 땐… 차라리 수호자가 절…"

세인트는 침묵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는 격려의 의미로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소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고스트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니길 바라야지." 세인트가 답했다. 세인트는 손을 뻗어 고스트의 의체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하지만 그저 벡스일 뿐인걸! 장담컨대 무서워할 것 없어."

5.2. 잃어버린 신호

"전 지나치게 평화롭고 조용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안전장치

화력팀은 네소스의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열린 동굴을 따라, 네소스의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전장치는 로컬 피드를 통해 팀원들의 위치를 추적하며 탐사 과정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본 것을 함께 보았고, 그들이 들은 것을 함께 들었다.

화력팀원들은 모두 극기심이 넘치는 사람들 같다고 안전장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들 말이 별로 없었다. 어떻게 보면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이 침묵을 채워야 할 것만 같았다. 모두를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 말을 많이 한 것은 아닐까? 안전장치는 자신이 기록한 모든 화력팀 피드를 리뷰하면서, 떠오르는 수천 가지 질문을 동시에 처리했지만, 사실은 모두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네 모습을 좀 봐." 그녀는 제 프로세서에 과부하를 주는 수많은 질문의 결과를 제쳐놓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불안에 시달리는 인공지능이라니. 황금기에나 일어날 수 있었던 우스운 일이었다.

"전방에 대규모 벡스 부대가 집결해 있어요." 안전장치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화력팀은 확인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알림과 질문들이 마구 떠오르자 안전장치는 그리로 신경을 돌려 하나하나 검토하고 하나하나 폐기했다.

지금쯤이면 화력팀이 벡스와 교전을 끝냈겠지. 안전장치는 생각했다. 그러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통신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걱정이 된 그녀는 화력팀장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알아보려고 했지만, 고르지 못한 네트워크 연결 때문에 미지의 동굴 속 깜깜한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피드 연결이 끊어지다니, 마치 수프 그릇을 떨어뜨리는 것 같은 일이었다. 안전장치가 이렇게 설명하자, 아이코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주제를 바꾸었었다. 승무원들이 살아있었을 때, 안전장치는 그들이 수프 그릇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자주 봤었다. 그릇을 기울여 수프가 그릇 가에 가까워지면 조심스럽게 기울기를 조절해 가며 마셔야 했다. 뜨거운 수프가 피부에 튀면 승무원들 입에서는 고통에 식식거리는 욕설이 튀어나왔고, 그릇이 뒤집혀 바닥에 뒹굴면 다들 화들짝 피하곤 했다. 쏟고 나면 더 이상 수프가 아니다. 닦아내야 할 액체일 뿐이다. 삭제해야 하는 불완전한 데이터의 얼룩 같은 것이었다.

이번 상황은 수프가 너무 기울어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안전장치는 센서를 조정하고 매개 변수를 넓혔다. 데이터 스트림의 균형도 맞췄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화력팀장님," 안전장치가 외쳤다. "헬름과의 업링크를 다시 연결해 주세요!"

시각 자료가 덜덜거렸다. 밀려오던 잡음의 파도가 텅 빈 잿빛 소음의 벽으로 사라졌다. 공황에 빠지기 시작했다.

"화력팀장님." 안전장치가 소리쳤다. "응답하세요!"

응답은 없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멍하니 있었다.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 잠시 식식거리는 잡음이 느껴졌다. 전력이 급증한 뒤 꺼졌다. 데이터 얼룩과 빈 피드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저기요?" 텅 빈 피드 속에서 안전장치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응답이 없었다. 조용히, 그녀는 침묵과 어둠에서 벗어나 다시 밝은 조명과 익숙한 기계음이 들리는 헬름으로 돌아왔다.

5.3. 시선 조사

"몰락자들 대화가 많이 잡혀요. 기갑단 대화도요. 그리고 몰락자-기갑단 대화도요. 제가 꿀잠이라도 자고 있었다면, 분명 엄청나게 거슬렸을 거예요!" —안전장치

지다르는 산마루 끝에 쭈그리고 앉아, 네소스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에는 그가 주시하고 있는 동굴 입구가 있었다. 오늘 처리하려 했던 벡스보다 훨씬 많은 벡스가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서는 군단병 예르그가 바위에 기대고 앉아, 방어구의 내부 영양 공급 소켓에 팩을 끼우고 있었다.

지다르는 에테르 마스크의 흐름을 높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에테르를 마실 때마다 눈이 더 밝게 빛났다.

그는 예르그의 커다란 무릎을 쿡 찔렀다. "혹시 먹을 거 없어?" 그가 조심스럽게 울루란트어로 물었다.

예르그가 헬멧 아래로 빨대를 쭉 빨며 지저분한 소리를 냈다. "내 주스는 못 준다."

그는 역겨운 듯 고개를 저었지만, 다시 예르그를 툭툭 쳤다. 예르그가 반격하며 밀자 지다르의 온몸이 옆으로 흔들렸다.

"너희 우주선의 새 병사들은 뭐야? 비쩍 말라 작대기 같은 걸 들고 있던." 그가 물었다.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 볼 때마다 소름 돋거든."

"어, 그렇긴 해." 지다르가 맞장구쳤다. 나중에 마실 분량을 남기기 위해, 그는 에테르 마스크의 흐름을 다시 낮추고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았다. "어, 이 미행성, 참 그렇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식을 망치려고 자꾸 이러는 건가?"

"그냥 대화하는 거잖아! 나도 휴식이라고." 지다르가 언어 실력을 뽐내고 싶어도, 자랑할 상대가 있어야 했다.

그들 한참 아래에 남아 있는 방산충 호수 가운데서 거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호수의 수위는 계속 천천히 낮아지고 있었다. 호수가 완전히 마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다르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은 벡스가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예르그가 파우치를 크게 한 입 빨았다. "행성은 변하면 안 돼. 이건 옳지 않다. 옛 황제의 포도주를 찾자고 이곳을 부쉈는데 벡스 괴물이 들어 있었다! 행성에 괴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다. 행성이 괴물이 되어선 안 되지." 예르그가 머뭇거렸다. "만약 예전에 군단병 몇 명이 포도주를 시도했다면? 단지 황제에게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을까? 그건 괴물 포도주였나?"

어쨌든, 예르그가 주스를 권유하지 않은 것에 안심한 지다르는 지평선을 살폈다.

멋진 파이크를 탄 세 명의 수호자가 물이 빠지는 호수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예르그가 지다르를 세게 밀쳐 몸을 엎드리게 했다.

그들은 눈이 하나 달린 드론을 어깨 위로 띄우고 있는 수호자들이 동굴에 들어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여기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의 순서가 바뀌고 있다. 저놈들이 맨 위에 있지." 지다르가 투덜거렸다.

예르그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휴식은 포기한다. 여기서 나가자. 엘릭스니들이 말하는 그… '다수 보안'이라는 거겠지."

"그래." 지다르는 굳이 단어를 고쳐주지 않았다.

5.4. 마멸 침식

발밑을 조심하세요.

몰락자 정찰병이 네소스 표면에 새로 생겨난 틈 아래로 잽싸게 뛰어들어, 발톱으로 바위를 잡으며 내려갔다. 이상 현상이 네소스에 미친 영향으로 새로운 터널과 동굴이 생겨났다. 칼릭스 남작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동굴을 탐사하고 파악해야 했다.

드렉이 그 일을 맡은 것이었다.

그는 매끄러운 터널을 따라 빠르게 미끄러지며 내려가다가, 노출된 바위 돌출부로 몸을 던져 돌을 붙잡고 시커먼 틈 위에서 하강을 멈췄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돌은 더 각진 모양이 되었다. 곧 그는 벡스가 우글거리는 커다란 공간을 발견했다. 드렉은 동굴 벽면에 납작하게 몸을 붙이고 관찰했다.

미노타우르 하나와 하피 열댓 마리, 고블린 한 무리가 함께 뭔가를 하고 있었다. 미노타우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기계 손가락 사이로 빛의 고리가 솟아올랐다. 그는 벡스의 테라포밍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 광경에 두려움과 경외감이 들었다. 벡스는 거대한 단상과 돌기둥을 세우고, 큰 금속 원반과 하얗게 빛나는 빛의 차원문을 구현하고 있었다. 행성의 중심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교하게 각진 일련의 흔들리는 플랫폼이 드렉 앞에 형체화되었다. 드렉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올라서서 새로 생겨난 돌덩이 뒤에 숨어 벡스를 더 자세히 염탐했다.

자신의 임무를 기억한 드렉은 몸을 돌려 발아래 암석 틈새에 신호기를 심었다. 그러자 틈새가 쩍 갈라지면서 암석 일부가 떨어졌다. 신호기가 동굴의 측면에 부딪혀가며 끝없는 공허 속으로 요란스럽게 굴러떨어졌다.

벡스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하나씩,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렉의 발아래 플랫폼이 희미한 흰색 격자 빛을 내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플랫폼에서 뛰어내려 재빨리 동굴 벽에 붙었다. 등 뒤의 암석이 크게 흔들리더니 갈라지듯 열렸고, 그는 새로 생긴 틈새로 떨어졌다.

드렉은 허둥지둥 일어섰지만, 미노타우르가 다시 손짓하자, 돌 틈은 굳게 닫혀버렸다.

5.5. 늙은 나그네

걱정하지 마세요.

자발라 사령관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아니었지만, 실은 부드러웠다. 그는 뜨개질바늘을 맞물려 달각거리며 빠르고 고르게 뜨개질을 했다.

이 바늘을 다음 구멍에 넣고, 다음은 두 칸 뛰어넘고, 실을 두 번 감아 다시 뜨고.

너무 오래전에 떠 본 패턴이라 손의 기억이 희미해져 있었다. 자발라는 머릿속에 다시 패턴이 자리 잡을 때까지 집중해야 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 도안을 훑어보았다. 소매 부분에서 코를 늘려야 하자, 치수를 제대로 잰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너무 느슨한 것 같았다. 옷의 목 부분이 걱정될 정도로 넓었다.

고음의 기계 소리가 들리고, 눈가에서 흰 빛이 번쩍이자 그의 고민도 멎었다.

자발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옆에 있던 콘솔이 다시 깜박이며 일련의 데이터를 띄웠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뜨개질 거리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아이코라?" 자발라가 부르자, 홀로그램 프로젝터의 영상이 지직거리며 아이코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발라," 아이코라가 따뜻하게 말했다. "뜨개질을 다시 시작하셨나 보군요."

"그래. 네소스에서 방금 알림을 받았는데—"

"세인트와 안전장치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안전장치?"

"네, 그 안전장치요."

선봉대 사령관은 초조하게 검지에 털실을 감았다. 그의 손짓에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나 곧 그는 실을 느슨하게 풀고 뜨개바늘을 쥔 손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유능한 손에 맡겨두도록 하지. 손이 아니라 프로세서라고 해야 하나."

"그렇죠."

책망하는 듯 말하면서도, 지직거리는 영상 속 아이코라가 미소를 지었다. 자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말해 주세요." 아이코라가 덧붙였다.

"무엇을?" 자발라가 묻자 아이코라가 턱짓으로 뜨개질감을 가리켰다.

"제 스웨터가 언제 완성되는지요."

자발라가 미소 지었다.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침묵이 흘렀다. 자발라는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마디 사이에 다시 뜨개바늘을 쥐었다.

바늘을 다음 구멍에 넣고, 다음은 두 칸 뛰어넘고, 실을 두 번 감아 다시 뜨고. 그는 다시 머릿속을 패턴으로 가득 채웠다. 아이코라라면 이 색을 마음에 쏙 들어 할 것이었다.

5.6. 일탈 행동

생각을 행동으로, 위협을 전투로.

칼릭스 남작은 범선의 지휘 갑판에서 의심이 담긴 눈초리로 네소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 뭔가 있다." 칼릭스가 음산하게 말했다. "벡스는 그것에 반응하는 거다. 행성 전체가 그것에 반응하고 있지."

옆에 있던 반달은 명령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옆에 있는 콘솔로 몸을 돌렸다.

그는 가문의 원로 엘릭스니가 앙심 가득한 쉿쉿거리는 목소리로 "거대한 기계"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그 존재에게서 무언가가 분출되었고, 빛의 호를 그리며 네소스로 내려오는 모습을 땅거미 가문 청소부들이 목격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선봉대 통신은 거의 뚫을 수 없었지만, 엘릭스니들은 단어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상 현상."

칼릭스가 발톱 하나를 콘솔 스크린 위로 긋자, 데이터 문자열이 그 선을 따라 번쩍였다. 궤도 변화. 지진 외란. 더 큰 문제는 벡스 터널을 기어다니는 수호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중요한 정보를 훔치는 것 같았다. 부서진 우주선 잔해에 있는 그 하찮은 인공지능은 전술 작전에 기계의 자손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가문의 통신이 교란되고 청소부 작업까지도 방해를 받아 생명과 자원이 낭비되곤 했다.

엘릭스니 남작이 휙 몸을 돌렸다. 뒤에 있던 드렉들은 그의 시선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남은 두 팔을 쭉 뻗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고, 안절부절못하며 아래턱뼈를 딱딱 부딪쳤다.

"우리를 준비해라." 칼릭스가 외쳤다. "지뢰 장전!" 드렉들이 허겁지겁 뛰쳐나가 명령에 따랐다.

"계획이 있으십니까?" 옆에 있던 반달이 물었다. 칼릭스는 한 손을 소각 대포의 포신 위에 얹었다.

"벡스를 잡아서 놈들의 정신을 분해하고, 놈들이 뭘 알고 있는지 찾아내도록. 머리가 둥글거나, 목에 빛을 두르고 있는 놈들을 찾아. 그들이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다. 이 상황, 이 '이상 현상'… 우리가 먼저 알아내야 한다."

5.7. 시간 낭비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냅니다.

"밴시, 친구!" 세인트-14이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총제작자는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세인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 기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밴시는 세인트를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세인트, 언제 돌아오셨나요?"

"아아." 세인트가 대답했다. "오늘 막 왔지. 잠시 네소스에 다녀왔어."

"아뇨, 제 말은…" 밴시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네요, 네소스. 요즘은 선봉대에서 네소스로 보내나 보죠?"

"그렇지. 이리 와. 이야기 좀 하자고."

타이탄은 작업대에 있는 밴시에게 손짓했고, 둘은 함께 전망대를 향해 걸었다. 아래로는 도시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세인트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네소스를 깨우고 변화시키고 있는 이상 현상을 찾는 중이야. 아이코라가 조사 중이지.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

세인트가 주먹으로 전망대 난간을 두드렸다.

"그뿐만이 아니야! 벡스는 이상하게 행동하고, 방산충은 행성 속으로 이동하고 있어. 아주 안 좋지. 아이코라는 이상 현상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더군."

"벡스가 걱정되시나요?" 밴시가 물었다.

"그래." 세인트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벡스뿐만이 아니야. 우리 머릿속에도 방산충이 있잖나, 엑소 형제. 명료함과 어둠. 딥스톤 무덤. 그 모든 것이 여전히 우리의 일부지. 벡스들이 이상하게 행동한다면, 우리에게도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

"글쎄요." 밴시가 입을 뗐다. "제가 네소스에 갈 것도 아닌데요."

"그래, 안 가는 게 좋지." 세인트가 작게 웃었다. "별로 관광할 만한 곳은 아니거든! 안전장치가 반겨준다고 해도 말이야."

"안전장치요?"

"어, 그래. 황금기 인공지능이지. 재잘재잘 말이 많아.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아, 기억이 나는군요. 그래요. 케이드가 얘기해준 적이 있습니다. 전…"

밴시가 생각에 잠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케이드는 돌아온 거죠? 당신처럼."

세인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랑은 달라."

"아…"

밴시가 말꼬리를 흐리며,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더 이상 여행자는 없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색채의 소용돌이에 혼란스러워했다. 세인트는 그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알아차리고, 밴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타이탄이 위로하듯 밴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밴시." 세인트가 다정하게 말했다. "천천히 받아들여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와 함께 여기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으니 좋군. 자주 같이 오자고."

밴시가 머리를 흔들고 미소를 지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세인트.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5.8. 동굴학자

"인간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빛의 가문 서기 아이도

"세인트-14? 오시리스?"

아이도는 데이터 패드 더미를 움켜 안고 탑 격납고에 있는 타이탄과 그의 파트너에게 다가갔다. 세인트는 떠나는 수호자 무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아이도가 다가가자, 근처의 비둘기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다.

"빛 속에서 여러분을 반깁니다." 그녀가 얼른 인사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도 인사를 전합니다."

"안녕, 아이도!" 세인트가 따뜻한 인사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이도는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연습했던 말을 꺼냈다.

"네소스에 화력팀을 파견하고, 안전장치라는 이름의 황금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코라 레이의 보고서를 읽어보았는데—"

"아이코라의 보고서는 어떻게 입수했지?" 오시리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이도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질문을 피했다.

"벡스 네트워크를 스캔할 때 더 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도록 안전장치의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제가 융합자는 아니지만, 혹시 수호자들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아이도." 세인트가 다정하게 달랬다. "네소스는 민간인이 갈 곳이 아니다."

오시리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이도가 발끈했다.

"제 능력은 이미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아이도는 그 말이 진실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소스에서는 아버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에라미스가 다시 돌아와 그녀를 지켜주리라는 기대는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방랑자가 준 아이디어겠군." 세인트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이도의 노골적인 실망감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벡스는 위협적인 존재다, 아이도 아가씨." 세인트가 다정하게 달랬다. "내 친구의 딸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위험에 빠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심심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녀가 분개했다. "돕고 싶을 뿐이에요."

"탑이나 엘릭스니 구역에서도 충분히 도울 수 있지." 세인트가 대꾸했다.

"하지만—"

"허락할 수 없어." 세인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오시리스가 세인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시리스가 엘릭스니에게 말했다. "사실 난 서기 아이도 네가 헬름에 있어 주길 바란다. 네가 제안한 강화법이 효율을 높일 수 있다면, 최대한 빨리 안전장치와 논의해 봐야 할 거야."

"아!" 아이도는 뭘 선택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이도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 다음 말을 조심스레 고르는 동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안전장치는… 착합니까?" 아이도가 물었다. "뭐랄까… 상반되는 정보들을 들었는데요."

세인트도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아이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세인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직접 보면 알게 될 거야."

5.9. 믿음 파수꾼

흔들리지도, 부서지지도 않기를.

접근: 제한
해독 키: 73XK5V2PG1$AUN-326
보고서 #: 18020-VIP-2029
요원: IKO-006
제목: 엘릭스니 구역 VIP

1. VIP #1889, 전에는 뒤엉킨 해안의 남작으로 알려졌고 그 이전에는 늑대의 가문 라키스로 알려진 엘릭스니 구역 내 거미, 그리고 VIP #4143, 빛의 가문 서기관이자 "빛의 켈" 미스락스 VIP #3987의 딸인 아이도, 이 둘의 내부 통신을 도청한 기록임. VIP #2029 함선강탈자 에라미스에 관한 대화.

2. #4143과 #1889 사이의 통신은 봇차 구역의 단말기와 #4143이 소유한 개인 데이터 패드 간의 암호화 연결을 통해 진행되었음. 액세스는 어렵지 않았음. 향후 외부 데이터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보안 프로토콜을 검토하고 #3987에 보고해야 함.

3. 대화 내용은 이하와 같음. 배경 소음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주석으로 추가 설명됨.

SPI: 서기님이로군.
EID: 안녕하세요, 거미.
SPI: 자, 인사말은 그만하면 됐고…

참고: 녹음에서 2초간 희미한 소음과 불명료한 소리가 포착됨. 크고 무거운 물체 여러 개가 타일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로 추정됨.

EID: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닙니다.
SPI: 내 알 바 아니다. 네가 뭘 하려는지 안다. 흔적을 제대로 감추지 못했더군. 네가 에라미스의 행방을 조사하는 걸 선봉대가 좋아하진 않을걸.

참고: 대략 3초 동안 아무 소리도 포착되지 않음.

EID: 으음… 선봉대는 당신이 하는 일도 좋아하진 않을 겁니다! 그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SPI: 하! 협박은 처음인가 보지? 아주 엉성하군, 꼬마 서기. 이럴 때는 지나지 않았어? 나도 널 진심으로 걱정해서 이러는 거라고.

참고: 1초 동안 VIP#4143의 짧고 큰 웃음소리가 포착됨.

EID: 그럴 리가—
SPI: 믿든 안 믿든 알아서 하고. 왜 에라미스를 찾지? 말했잖나, 에라미스는 듣고 있지 않아.
EID: 에라미스켈은 지지하던 세력을 다수 잃고—
SPI: 그래, 그래, 자기 가문이 난장판이 되었지. 그리고 뭐?
EID: 저는 그저—
SPI: 또 시작인가?
EID: 저는 그저—!
SPI: 사라졌어. 이번엔 영원히. 가문도, 목격자도 관련 없지. 내가 듣기로는 시부 아라스조차도 그녀를 포기했다고 하더군.
EID: 바로 그래서 제가—
SPI: 너희 아버지가 네 집착에 대해서 나한테까지 말했던 거, 알고 있나? 널 말리고 싶지만, 네가 말을 안 들을 거라고 하더군.
EID: 네? 하지만 에라미스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는데!
SPI: 그 빚은 이미 갚았어. 포기해라, 아이도! 한심할 지경이군. 에라미스는 네게 관심도 없다. 언제나 그랬지.

참고: 11초 동안 VIP#4143이 낸 고음의 식식거림과 간간이 딸깍이는 소리가 포착됨.

SPI: 너어— 난—
EID: 당신은 타인들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겠지만, 저는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 변화도 일으킬 수 없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에라미스도 그걸 알아야 해요. 저는 계속 이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참고: 2초 동안 VIP#1889의 필터링 된 긴 한숨 소리가 포착됨.

통신 종료.

4. #4143의 개인 기록을 계속 모니터링하는 것이 좋을 듯함. 승인되지 않고 감독받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의 가문과 접촉하게 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

5. 추가적으로, 엘릭스니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더 자세한 문화적 배경은 EKS-443에게 문의 바람.

메시지 종료

5.10. 흉흉한 징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녀.

지지자.

에리스 몬은 두 장의 카드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램프의 날카로운 불빛 아래에 놓인 카드 앞면이 빛났다.

에리스의 변형이 종결된 후에도, 속삭임의 덱은 한가해지지 않았다. 가끔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찾아와 카드를 뽑곤 했으며,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새로운 생각의 관점을 품고 돌아가곤 했다. 지금은 그게 덱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복수에 만족한 카드들은 더 이상 속삭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스는 군체 주문이 여전히 그들의 존재와 엮여 자신을 흔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수행자들에게 카드는 그저 평면적인 그림이자 더 깊은 의미를 암시하는 힌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덱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이제 에리스는 무시무시한 변형 없이도 카드를 읽을 수 있었다.

사바툰과 시부 아라스. 도대체 어디로 도망갔을까? 무슨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자매는 다시 한번 불화로 엮였고, 사랑과 논리의 자연적인 결속은 회복되었다.

에리스는 두 카드 옆에 세 번째 카드를 놓았다.

선각자.

이 모든 상황에서, 아직 자신의 역할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끝으로 카드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곧 찾아올 것이었다.

에리스는 아주 잠시 제 발톱의 형태를 기억했다. 손에 쥐었던 군체의 힘. 무엇보다도, 시부 아라스가 왕좌에서 쫓겨났을 때 느꼈던 공포와 두려움, 비통한 감정.

느낌이 증발했다. 카드에 그려진 얼굴들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중 셋이 다시 한번 결합했다. 에리스 몬, 사바툰, 시부 아라스. 카드는 대립과 동지애를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시부 아라스는 제 자매를 불렀었다. 그것은 아직도 유효한가?

그녀는 마지막 카드를 집었다.

애가.

오릭스의 얼굴, 그의 드레드노트, 그의 논리와 법칙. 그림자가 너무 길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들 곁에 머물고 있는 바로 그 유령.

그녀는 잠깐 긴장하며 각 카드를 집어 덱에 돌려놓기 전에 카드 앞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6. 시즌 방어구

6.1. 머리

정면 승부를 펼쳐라.

카이아틀 여제는 헬름의 창밖으로 희미한 빛을 내며 일렁이는 여행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화의 신호인 것 같기도, 위험의 신호인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여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안전장치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여기서 뵙네요."

몸을 돌린 카이아틀 여제가 단말기로 다가가, 인공지능이 지휘본부에 접속하게 해 준 장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인공지능인가." 카이아틀이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엑소더스 블랙에 있던. 안전장치, 이런 식으로 선봉대와 소통하는가 보군."

"정답이에요!" 안전장치가 재잘거렸다. "어서 오세요, 여제님. 반가운 방문이네요!"

카이아틀은 환영에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들었다. 인공지능이 깜박거리며 연달아 낮은 경고음을 울린 뒤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저한테 또 탱크를 겨눌 생각은 아니시죠? 아니면 그때로 충분했나요?"

인공지능의 비아냥에 카이아틀은 엄니를 드러냈지만 대꾸하진 않았다.

"사과하러 오신 것도 아닌 것 같네요."

"그렇다." 여제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사과는 하지 않겠다. 내가 네소스에 간 것은 선봉대와 동맹을 맺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였다. 그들이 반응하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네, 그러시겠죠." 안전장치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전략적인 행보였다." 여제가 덧붙였다. 단호했지만, 안전장치를 달래는 듯한 어조였다. 안전장치가 밝게 대답했다.

"굉장히 무례했어요!"

카이아틀이 생각에 잠겨 툴툴거렸다. 안전장치가 잡음 조절 장치를 지직거리며 이 소리를 따라 했지만, 여제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래." 여제가 입을 열었다. "인정하지… 우리가 무례했다."

안전장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카이아틀은 다시 말하기 전에 목을 가다듬고, 방에 널려 있는 연구 표본들을 훑어보았다.

"당시 스캔 결과, 착륙 지점 근처에 큰 난파선이 있었다. 네 존재를 감지하기는 했지만—"

"무시했나요?"

"그래." 그녀가 인공지능 콘솔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무시했다. 네가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

"여제님의 판단이 옳았어요!" 안전장치가 수긍했다. 그러고는 다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제가 당신을 막을 수 있었을 리 없죠."

카이아틀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할 때마다 의견에 따라 목소리가 변하는군. 그건—"

"짜증 나세요? 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아니." 여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갑단에 내려오는 전설과 비슷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두 얼굴을 가진 전사. 한쪽 얼굴은 혀가 없고, 다른 쪽 얼굴은 엄니가 없었지."

카이아틀이 고개를 저었다. 안전장치가 흥미를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건 외교술에 관한 우화지… 외교술의 한계도 알려주고."

안전장치가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하는 동안, 카이아틀은 어떤 목소리가 대답할지 궁금해졌다.

"제 예의 필터 때문이에요." 안전장치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이 필터가 오래 가질 않아서 목소리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흠. 그 필터가 작동하지 않을 때만 본심을 말하는 건가?"

"그런 셈이죠, 여제님."

카이아틀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군."

6.2.

단단히 쥐어라.

세인트-14이 벡스 고블린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자, 녀석의 금속 팔다리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세인트가 한쪽 무릎을 쿵 꿇으며 자신의 단단한 허벅지에 몸부림치는 벡스를 메다꽂자 가슴께의 방산충 심실이 부서졌다.

벡스의 눈에서 붉은빛이 깜빡거리다 꺼지자, 축축한 방산충 액체가 세인트의 부츠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만족하며 일어나 죽은 프레임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봤어?" 세인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녀석의 무게를 이용해서 죽이는 거?

"와우." 통신 너머로 들려오는 낮은 안전장치의 목소리는 감명을 받은 듯했다. 세인트의 시각 자료는 정말 놀라웠다. 안전장치는 필터를 조정해 목소리 톤을 밝게 바꿨다. "다시 보여주세요!"

"항상 이렇게 놈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면 탄약을 절약할 수 있어 좋지." 세인트가 손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벡스를 으깨면 기분이 좋거든!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돼!"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안전장치가 재잘거렸다. "격렬한 표현을 하는 동안에도 사회화 필터를 어떻게 이렇게 길게 가동할 수 있는지 궁금한데, 동력 전달의 비결이 있나요?"

세인트가 헬멧을 벗자 통신이 그의 신체에 붙은 엑소 이어피스로 끊김 없이 전송되었다. "무슨 뜻이지?"

"더 쉽게 말해 볼게요." 안전장치가 대답했다. "프로세스의 몇 퍼센트 정도를 긍정적인 가치관 유지에 할애하고 있나요?"

세인트는 네소스의 노출된 암맥을 곁눈질하며 손으로 헬멧을 빙글빙글 돌렸다. "안전장치."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떼자 안전장치가 냉큼 말을 잘랐다.

"어, 알았어요." 그녀의 말투에서 눈알을 도르륵 굴리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제 말은, 뭐랄까, 항상 기분이 좋으시잖아요. 분명 즐거운 감정을 보관하는 저장소를 오버클럭했거나 그런 거겠죠?"

세인트가 빙긋 웃었다. "엑소는 인공지능과는 다르다. 나는 그냥 나야, 안전장치. 나다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지 않지."

"오!" 잠시 생각한 안전장치가 외쳤다. "정말 멋진 느낌이겠어요!" 그녀의 밝은 목소리에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는 좀 다르다는 거, 이해한다." 세인트가 헬멧을 달래기라도 하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대화하기 위해 굳이 전력을 더 쓸 필요는 없어."

통신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안전장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인트 유닛?"

"왜?"

"켈에게 박치기 한 적 있어요?"

세인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워낙 박치기를 많이 해서 말이야!"

"파일을 확인해 보고 있는데, 어, 정말 그렇네요." 세인트가 갖고 있는 방대한 업적의 바다를 훑어보며 안전장치가 동조했다. 전부 그가 싸우는 모습의 시각 자료였다…단 하나만 빼고.

"이상하네요… 세인트 유닛, 작년에 사바툰의 왕좌 세계에서 미완성 단독 작전을 수행했다는 내용의 선봉대 네트워크 미승인 보고서가 있어요. 이 보고서에 따르면—"

"누가 만든 보고서지?" 세인트가 물었다.

안전장치가 선봉대 네트워크 프로필에 접속하자 계정 플래그가 주르륵 나타났다. "정보를 거의 알 수 없도록 보안된 _MRU_라는 계정이 이 사건을 직접 보고했다고 적혀 있어요."

"푸하." 세인트가 무시한다는 듯 콧바람을 뿜었다. "시스템에 있는 보고서 전부를 믿을 수는 없지." 그는 헬멧을 다시 쓰고, 벡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반짝이는 방산충 개울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전장치는 세인트의 말투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갑자기 대화를 불편해하는 듯한 느낌이 났다.

아마도 다정함 할당량이 부족해졌나 보다, 안전장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6.3. 가슴

하나의 숨결.

"안녕하세요, 아이코라! 당신과 논의하고 싶은 주제가 있어요."

아이코라는 헬름에 서서 인공지능 프로세서의 불빛이 깜박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전장치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물론일세. 뭐가 궁금하지?"

"케이드 유닛에 대한 건데요, 창백한 심장에서 아이코라가 그를 만났던 일 말이에요."

"그렇군." 아이코라가 딱딱하게 말했다. "예의 필터를 작동시키지 않아도 괜찮다네, 안전장치."

"민감한 주제라는 걸 알아서 아이코라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 예의 필터가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 것 같긴 하네요. 바로 작동을 중지시킬게요."

아이코라는 손을 뻗어 뒷짐을 지고 잠시 침묵하며 안전장치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어… 케이드 유닛은 어땠나요? 예전과 똑같던가요?"

"그래." 아이코라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네."

"다시 만나서 반가우셨겠군요."

안전장치의 목소리에서 어쩐지 실망감이 느껴졌다.

"처음엔 힘들었네. 다시 만나니 케이드를 잃었을 때의 감정이 다시 올라오더군." 아이코라는 조심스레 다음 말을 골랐다. "케이드가 죽었을 때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대의 반응은…" 아이코라가 망설이면서 잠시 말을 멈췄다.

안전장치의 인터페이스가 깜빡거렸다. 침묵 속에 담긴 자괴감이 아이코라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한참 후 다시 입을 연 인공지능은 거의 속삭이듯 중얼댔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어요. 감정을 처리하는 데 문제가 있었어요." 안전장치가 인정했다. "아마 알고 계시겠지만요."

아이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힘들 때가 있지. 슬픔에 잠겨 있을 때는 좋은 모습을 보이기 힘들 수도 있다네."

아이코라의 귀에, 작은 윙윙 소리와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내부 팬이 쉬익거리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 입을 열자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승무원을 잃었을 때, 제 '최고의 모습'도 잃었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안전장치가 인간이나 프레임이었다면, 아이코라는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네."

인공지능이 한숨을 쉬었다. 아이코라는 그것이 단지 의사소통을 쉽게 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보단 나았다.

"케이드 유닛은…" 안전장치의 목소리가 차츰 작아졌다. 아이코라는 차분히 기다렸다.

"케이드는 승무원들이 전부 죽은 후 저를 찾은 첫 번째 사람이었어요." 안전장치가 말을 이어갔다. "절 여러분 모두에게 소개해 주었죠. 절 다시 쓸모 있게 만들어 줬어요. 그래서 케이드가 죽었을 때 전… 패닉에 빠졌죠. 여러분 모두를 잃은 것 같았어요. 뭐, 실제로도 그렇게 된 셈이었죠."

이번에는 아이코라가 자괴감을 느꼈다.

"미안하군, 안전장치. 이제 다들 여기 있다네."

"네에." 안전장치가 따뜻하게 대답했다.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6.4. 다리

입장을 분명히 해라.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던 헬름의 프레임 중 하나에게 안전장치가 신호를 보냈다. 프레임은 고개를 들어 인공지능의 콘솔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친구." 안전장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프레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장치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오른쪽을 보라고 지시했다. 벡스 두개골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수호자가 남겼어요." 무언의 질문을 던지는 듯한 프레임의 반응에 안전장치가 대답했다. "방금 전송되어 왔죠. 연결을 좀 도와줄 수 있나요?"

프레임은 부드럽게 삐빅거린 뒤,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굽혀 생경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무거웠지만, 프레임은 몸을 기울여 안전장치가 살펴볼 수 있도록 벡스 두개골을 들이댔다. 목이 깔끔하게 잘려져 있고 눈알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온전한 두개골이었다.

"상태가 좋은데요." 안전장치가 말했다. 프레임이 두개골을 연구 책상으로 가져와 벡스의 머리 안쪽 포트에 복잡한 전선망을 연결했다. 눈에 불규칙한 불빛이 깜박거렸다. 안전장치의 불빛도 함께 번쩍거렸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전장치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벡스 두개골이 번쩍이며 쉿쉿거리는 소리가 잠시 났지만, 안전장치가 재빨리 코드를 입력하자 조용해졌다. 눈의 불빛이 다시 깜박이더니, 차차 희미해지다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고마워요, 친구!" 안전장치가 프레임에게 밝게 말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프레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녹음되어 있던 "천만에요!" 하는 소리를 재생한 뒤 비켜서서 다음 명령에 대기했다.

안전장치는 벡스에 집중하며 녀석의 정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무력화된 벡스에게 명령 프롬프트를 줄줄이 입력했다. 그러자 세 겹으로 암호화된 데이터에 즉시 접근할 수 있었다.

그 데이터로는 부족했다. 네소스의 내부 도식을 발견하긴 했지만, 꼼꼼한 스캔을 통해 이미 파악한 정보였다. 벡스의 시스템은 침입에 대한 면역 반응으로 쓸모없는 데이터를 반사적으로 생성해 내고 있었다. 그녀는 벡스 정신 더 깊은 곳으로 침투하면서 쓸모없는 데이터를 삭제하는 서브루틴을 입력했다.

더 깊은 터널들이 보였다. 터널의 크기와 내부의 방산충 양도 보였다. 이 벡스 유닛이 당시 건설 일부를 감독하긴 했지만, 이미 수 세기 전 일이었다. 행성은 변했다. 새로운 통로가 뚫리고, 확장되고, 길이 바뀌었다. 그들은 더 깊이 들어갔다. 그녀는 벡스를 읽어내는 데 애를 먹었다. 안전장치 내부에 쓸모없는 데이터가 점차 가득 차올랐다. 벡스 유닛이 그녀를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강행하던 안전장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벡스는 안전장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 벡스 정신과의 연결이 끊긴 상태였다. 이 벡스는 독자적으로 개별 데이터를 수집하고, 해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벡스 정신이 내린 명령이 아닌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접속 불가.

안전장치가 물러났다.

안전장치는 자립적 데이터 패킷이 자동으로 재빠르게 열려 실행되는 모습을 놀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안전장치의 하드 코딩된 방어 메커니즘이 시스템을 닫으며 일순간 침입 스크립트를 차단했다.

"연결 분리해요! 분리해요!" 안전장치가 외치자, 프레임이 두개골로 달려가 연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선을 뽑아냈다.

오랫동안 정적이 흐르고, 냉각 팬의 부드러운 소음만 흘렀다.

"흠, 별로… 잘 되진 않았네요. 솔직히 좋지 않아요." 안전장치가 말했다. "선봉대엔 비밀로 해주세요, 알겠죠?"

"알겠어요! 알겠어요!" 프레임이 짹짹거린 뒤, 벡스를 가져가 폐기했다.

6.5. 직업

진정한 의도를 보여라.

"안녕하세요, 세인트 유닛! 최근 제가 고립되어 있던 기간에 발생했던 사건들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세인트-14은 안전장치가 말할 때마다 불빛이 신나게 깜박거리는, 헬름에 있는 안전장치 단말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이지." 세인트가 흔쾌히 대답했다. "목격자와의 전투는 우리를 이상한 곳으로 수도 없이 이끌었지. 이상한 동맹도 많이 맺었다."

엑소는 의자를 끌어당겨 안전장치 옆에 앉았다. 그는 승리의 제스처로 두 손을 꾹 쥐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여행자 안으로 들어가는 차원문이 첫 번째 큰 문제였지.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목격자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어. 수많은 수호자와… 민간인을 잃었지."

목격자를 쫓다 희생된 목숨들에 대한 생각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인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던 중, 슬론 부사령관이 돌아왔고, 더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는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 타이탄 바다에 뛰어드는 수많은 노력을 한 끝에 그 존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

안전장치가 고음의 삑삑거리는 소리를 연달아 냈다. "그러네요! 당시 수호자들이 네소스를 더 자주 방문했었죠."

"낚시하러 말이지." 세인트-14이 조금 김빠진 목소리로 동조했다. "하지만 이 존재는, 아흐사라는 원시 벌레였는데—"

"물고기가 있어요? 호수에요? 방산충 호수 말인가요?"

세인트가 한숨을 쉰 뒤, 머리를 흔들고 말을 이었다.

"그래. 여하튼, 아흐사가 차원문을 통과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바툰을 지목했지. 물론 당시에 사바툰은 이미 죽은 뒤였어. 그런데 사바툰의 고스트 임마루가 오더니, 시부 아라스를 먼저 쓰러뜨려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런 뒤에야 사바툰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물고기가 몇 마리나 있나요?" 인공지능이 불쑥 물었다.

"어… 잘… 모르겠는데." 세인트가 당황했다. "많이 있겠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세인트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애꿎은 손가락이 무릎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 이후에 우리는 군체와 사바툰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에리스와 아이코라에 의지하게 되었다. 에리스는… 의식을 행했어. 직접 군체 신으로 변하는 의식이었지!"

세인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났다. 헬름 바닥에 의자 다리가 긁히면서 끼기긱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는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뒤, 목을 가다듬고 다시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누가 물고기를 좀 잡아줄 수 있나요? 어항도요."

세인트가 말을 잃고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수호자에게 부탁해 보지 그래." 세인트가 조급하게 말했다. "그래서 시부 아라스는—"

"물고기에게 붙이기 좋은 이름 목록을 정리했어요!"

"그거… 좋군, 안전장치. 어쨌든, 에리스가 시부 아라스를 추방하고 사바툰이 부활했어! 그리고 살아난 사바툰은 차원문을 통과하는 법을 알려줬지! 하지만 우리는 꿈의 도시의 위대한 아함카라, 리븐과 거래를 해야만 했고—"

"다시 낚시 얘기로 돌아가면 좋겠는데요…" 안전장치가 쾌활하게 끼어들자 세인트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7. 로닌 의체

방랑 고스트에게 적합합니다.

"정말 짜증 나 미칠 것 같군!" 오시리스는 회의실 창문으로 도시를 내다보며 식식거렸다. 도시 외벽의 수리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음흠." 탈룰라가 한쪽 다리를 의자 팔에 걸친 채 앉아 손톱을 뜯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전에도 이런 장황한 불평은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오시리스는 창문에서 시야를 거두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행동 방침을 제시할 때마다, 내 성질을 긁어. 너도 봤지. 매번!"

"너와 세인트가 서로 투닥거리는 걸 좋아하긴 하지." 탈룰라가 무심하게 대답하자 오시리스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는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는 것 같더군." 오시리스가 회의실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날 의도적으로 쳐다봤다고 말했었나? 내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던 거지."

"그냥 경청하고 있었던 거겠지." 탈룰라가 정곡을 찔렀다.

"아니다!" 오시리스가 우겼다.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거나 계속 자세만 바꾸더군. 어떻게 반박할지 계획을 짜고 있었던 거겠지. 내 말에서 틀린 부분을 찾으려고."

"그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 같네." 탈룰라가 짚어주었다.

"그쪽이 그렇게 만들잖아.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어! 날 방해하는 걸 즐기는 게 분명하다."

그제야 탈룰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아주 잘하고 있네."

"내 말이!" 오시리스가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왈칵 분노를 쏟아냈다.

불평은 계속되었다. 탈룰라는 오시리스가 지난 몇 달 동안 세인트-14에게 당한 사소하고 성가신 일을 시시콜콜 털어놓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오시리스!" 탈룰라가 목소리를 높여 오시리스의 불평을 잘랐다. 오시리스는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네 입으로 하는 말 좀 들어 봐."

워록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탈룰라는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지."

탈룰라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그가 계속 거슬리지."

세 번째 손가락이 올라왔다. "그런데도 피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못 해."

그녀는 세 손가락을 흔들며 아무 말 않고 그가 생각하게 내버려두었다. 오시리스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가 팔짱을 꼈다. 탈룰라가 웃었다.

"모르는 척 마."

오시리스가 눈을 껌벅였다. "뭐라고?"

"더 얘기해줘야 한다고? 좋아. 너희 둘은—"

오시리스가 곧장 손바닥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탈룰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진 모르겠지만," 오시리스가 탈룰라의 의견을 묵살했다.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탈룰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해결해. 두 사람 때문에 회의가 한 시간씩 길어지고, 가운데 낀 내 시간만 낭비하고 있으니까."

오시리스가 째려봤지만, 탈룰라는 무시하고 일어나며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오시리스의 표정이 한층 더 경멸을 띠었다.

그녀는 회의실을 나가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잘 해봐."

8. 반음계 변화

헤아릴 수 없는 변화.

"고맙다." 세인트-14은 곧이어 어조의 변화 없이, 가볍게 한 마디를 더했다. "사랑한다."

회의실은 조용했으나 수호자 피드를 띄우고 있는 단말기에서 조용히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오시리스가 한 것이라곤 평소처럼 그날의 전술 보고서들이 담긴 데이터 패드를 책상에 앉아 있는 세인트에게 건네준 것뿐이었다. 그의 파트너는 오시리스가 앞에서 빤히 쳐다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데이터를 확인했다.

"…뭐라고?" 오시리스가 잘못 들은 것처럼 물었다. 그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세인트…"

그는 세인트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때까지 이 엑소의 정확한 감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안다 해도 그런 표현으로는 아니었다. 타이탄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나 때문에 놀랐나?" 세인트가 물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낀 걸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게 진실이야, 오시리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지."

"난…." 오시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너무 팽팽히 이어져서 세인트가 말을 꺼내 끊어야 할 정도였다.

세인트는 놀라워하며 웃었다. "그 대단한 오시리스가, 말을 못 하고 버벅거리다니!"

오시리스는 그를 보았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눈빛에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곧 엑소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오시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워록은 그 손을 잡았다.

"네 마음이 내킬 때 말해 줘. 너도 그런 기분을 느낄 때 말이지."

그는 오시리스의 손을 한 번 꼭 쥔 뒤 놓아주고는 보고서 업무로 돌아갔다.

오시리스는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사소한 행동을 했다. 너무 사소해서 행동하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여태까지의 그런 작은 행동과 감정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 두 번 생각하지 않았던 세인트의 조그마한 선의들, 다정함.

어쩌면 그것들이 그의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9. 바닥 청소부

꽉 잡으세요.

헌터는 숨을 고르며 한쪽 팔을 머리 위로 뻗었다. 좁고 거친 동굴 벽에서 돌부리 하나를 찾아 꽉 잡은 뒤, 몸의 근육을 긴장시켜 온몸을 들어 올리고는 균열 사이로 들어갔다. 랜턴이 열렬히 빛나며 주위를 비추자 그녀를 감싸듯 에워싼 돌덩이 사이로 암흑 속으로 열린 틈을 볼 수 있었다. 저 암흑을 통해 이 동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몇 시간째 바위 위를 긁어대고 있었다.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고, 한 손으로 몸을 질질 끌며, 또 바위 속의 틈을 비집고 다녔다. 움직일 때마다, 헌터는 이 바위들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좁혀드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다시 한번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앞으로 1인치를 더 나가기 위해 손가락을 느슨하게 풀며 손바닥을 밀었다. 왼쪽 팔이 좁은 통로에 갇혀 고정되어 있었지만 오른쪽 팔은 움직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 더 들이마셨다. 산소 수치는 괜찮았다. 아직은 익사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 끼어 버렸다가는 정말 익사할지도 몰랐다.

이 헌터는 이틀 전, 안전장치도 해석할 수 없었던 기이한 신호를 따라 네소스 아래의 침수된 동굴로 잠수해 내려왔다. 행성의 지각 표층이 변했고 새로운 길이 열렸는데 일부는 벡스 우유로 범람했고 일부는 행성의 자연적인 수원으로 채워졌다. 이 동굴은 두 번째 사례에 해당했다. 깊이 잠수해 내려와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안전장치와의 연결이 끊겼다. 하지만 헌터는 멈추지 않았고, 이내 수중 동굴 벽에 난 틈을 통해 물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충분히 틈이 넓었다. 충분히 몸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몇 시간 전이었다.

다시 한번 몸을 앞으로 당겼다. 머리 위로 팔을 당겨 틈새로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바위가 몸을 죄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동굴은 그녀가 이곳에 영원히 갇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스트가 아무리 살려낸다 해도 반복해서 죽기만 하는 꼴이 될 것이다. 돌로 된 관에 갇힌 채.

헌터는 팔을 들어 올려 틈의 모서리를 쥐었다. 왼쪽 팔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두 팔이 모두 자유로워지자, 그녀는 죄어드는 바위로부터 몸을 피하며 물속으로 움직였다.

다시 암흑이 펼쳐졌다. 랜턴 불빛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확신은 없었으나 그녀는 위로 떠올라 가며 올려다보았다. 흰 불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수면이었다. 또 다른 동굴이었다. 그리고 공기가 있었다. 헌터는 위로 솟구쳐 헤엄쳤고, 수면을 박차고 올랐다. 툭 튀어나온 바위 조각이 보였다. 그것을 잡고는 몸을 일으켜 지하 호수에서 빠져나왔다.

눈을 들자 빨간 눈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금속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줬다.

10. 스펙트럼 의체

개인 일지 0002 AS

그렇게 오랜 기간 헤매며 시간을 보낸 뒤에도, 물리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기록을 작성하는 것은 최소한 하루하루를 추적하는 데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를 재시작한 이틀 후, 나의 중요성을 느끼기 위해 던지는 나의 보잘것없는 농담도 그럴 것이다. 나의 기원후…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내가 알았던 인간 중 최고의 인간을 무시하고 버렸다. 바보 같고 텅 빈 기분이다. 내 어리석음의 광대함과 자학성에 겁이 났다. 항상 그녀가 날 따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바보 같다.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정말로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버텨야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와 미래를 향해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혼자가 아니다. 벡스의 끔찍한 존재를 보완해 줄 새로운 동료가 있다. 그는 차분하고 안심이 된다. 긍정과 안내가 필요할 때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준다. 그리고 정말이지 놀라운 건 생물적, 문화적으로 놀라운 차이가 있는 기원이다. 나는 우리의 동반관계가 지속되길 바란다.

그럼에도, 전과 같지는 않다.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슬픔을 느낀다. 물어보고 싶은 질문도, 하고 싶은 농담도 있다. 계속해서 세상이 끝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되기 시작하자… 이미 세상은 끝난 것 같았다.

11. 다색

개인 일지 0031 AS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하려면 인류 전체가 필요한가? 황금기 성공의 주역은 인간이었나, 여행자였나?

나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많은 종들이 여행자의 존재에 혜택을 받았다. 인류도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은 붕괴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야망을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다른 종도 그러했으나, 인간의 끈기란 우리 종의 제일가는 강점이다. 그런데 왜 해내지 못하는 걸까? 나의 가설은 그것이 진정한 기술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행성 그 자체를 재형성할 수 있는 힘을 이용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게 되는 그때 서야, 그들은 안심하고 과학을 다시 한번 바꿀지 모른다. 당연히도 이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나,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4중주 연주를 하는 데 합창단은 필요하지 않다. 과학에 투신한 자들, 활발한 연구,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자격을 충족하는 이들도 물론 있겠지, 또 복제가 불가능한 정도의 월등함을 지닌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재능 있는 소수에게 어떤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까? 그들의 세계를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빚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벡스는 바로 이런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명의 발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토록 간단한 힘을 활용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인공지능의 위험을 감수하는가? 동맹과 함께 조사한 관련… 연구의 결과, 이는 성공적인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방산충은 여전히 가장 쉬운 대상이고, 그 각각의 정신 또한 하찮기 그지없다. 그들은 무수히 많으나 연결되어 있는 덕에 단순하다. 더 복잡한, 다른 정신들의 경우는 좀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 허나 나는 가혹한 현실이 낯설지 않다. 시행착오는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나의 질문에 대답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전체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인은 반드시 필요하다.

12. 구속되지 않은 무지개

개인 일지 0025 AS

베일 접촉 이전의 철학에서 다루는 보편적인 이해와는 달리, 개인의 특성은 측정이 가능하다.

개성을 결정하는 것은 벡스가 무한 확률 테스트를 통해 수학적으로 정의한 우리들의 현재 시간대에 있는 존재의 주요 상태 내의 의식이다. 벡스를 통한 나의 여정과 승천으로 증명된 것처럼, 다른 존재 상태를 통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향을 받은 전체가 주된 의식일 때에만 진정한 통과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일 것이다.

벡스는, 심지어 이곳의 오래된 벡스조차도 미래의 가능성을 결정하기 위해 기존의 존재를 복제하는 데 특화되어 있으나, 기원한 시간대를 우선으로 두는 것은 논리적일 뿐이며, 이 복제본들은 원본, 하나의 영역과의 연결, 중요한 시간대를 공유하지 않는다.

최우선 과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결과를 생각해 봐라! 각각의 복제본은 어떤 면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문제가 없었고, 어떤 면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모든 복제본은 테마 변주곡처럼, 원본에 명확하게 응답했지만, 라흐마니노프가 쇼팽처럼 연주할 수는 있더라도, 쇼팽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명확한 매개변수가 있다. 기억, 개인적 신념, 측정 가능한 요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익숙함이라 하면 도플갱어를 예로 들 수 있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기이한 불쾌한 계곡. 그것들은 부자연의 극단이며, 우주의 질서에 정면으로 반한다. 파라미터의 바깥으로 떨어지는 그것은 신뢰할 수 없는 쌍둥이이며, 자연스럽지 않다. 진짜가 아니다. 지속될 수 없다.

나는 내 가설을 믿는다. 내가 아는 것을 알고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최우선 과제는 계속될 것이다.

13. 헌터의 일기장

여행자의 빛이 현실로 만든 기억의 모음집입니다.

"몇 번의 인생을 살았나요?"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대답은 항상 달라진다.

대부분의 고스트들은 그들의 수호자가 부활하기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 이렇게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빛의 운반자는 고스트가 그들을 전장에서 살려낸 횟수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삶을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이 질문에 가장 답하기 어려운 건 케이드-6 같은 엑소들이리라.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그의 일기장에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케이드-6는 멘토인 안달 브라스크의 모습을 일기장에 스케치로 남겼고, 그걸 본 선댄스는 "전혀 닮지 않았어요."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케이드는 선댄스도 그려주었다. 의체의 각도와 일출과 일몰에 반사되는 빛의 굴절까지 정확하게 그렸다.

온갖 선봉대 서류를 주제로 쓴 시도 한 편 있지만, 그 아래에는 자신은 시인이 못 되며 앞으로도 절대 되지 않을 거라는 주의문이 같이 적혀 있다.

반쯤 기억나는 황금기 시절 꿈에 대한 이야기와, 실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두려운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한 페이지를 꽉 채우고 있었다.

기념품 또한 일기장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거나 붙어 있었다. 라면 쿠폰. 대령의 깃털. 시로와 한때 공유했던 덱에서 훔친 카드. 탑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선댄스와 도망쳐 숨곤 했던 최후의 도시 외곽의 산에서 자라난 야생초들. 가끔 케이드는 일기장에 끼워져 있던 말린 나뭇잎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부스러뜨리곤 했다. 나뭇잎 냄새에 그의 마음이 아렸다.

까마귀는 궁금하긴 했지만, 케이드가 몇 번의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그 일기장은 어디에서 났으며, 왜 이 창백한 심장 안에 같이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이 질문을 하면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대화하게 될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아직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당신에게 건넨다. 쥘 만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