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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안동별궁 安洞別宮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 한성부 북부 안국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3길 4) | |
설립시기 | 1881년 | |
해체시기 | 1936년 |
<colbgcolor=#bf1400> 충청남도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경내로 옮겨 복원한 안동별궁의 현광루와 경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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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시대의 별궁. 구 풍문여자고등학교 자리[1]에 있었다.정식 명칭은 '안국동별궁(安國洞別宮)'이었으며, '동별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름 발음이 같은 안동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2. 역사
원래 이 자리는 명당으로 유명해[2] 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 사용한 땅으로 세종 때에는 왕자 영응대군의 대저택이 있었으며 세종은 1450년(세종 32년)에 이곳에서 승하했다. 1471년(성종 2년)부터는 연경궁(延慶宮)으로 불리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기도 했다. 월산대군이 그 집 안에 정자를 하나 세웠는데 성종이 직접 풍월정(風月亭)이란 이름을 내려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인조 때에는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그 남편 영안위 홍주원[3]의 집이 되어 크게 넓어졌는데, 그 무렵 헐었던 인경궁의 남은 자재 약 170칸 분을 옮겨 규모를 키웠다. 이후 홍주원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더욱 명당으로 여겼다. 숙종 때에는 이를 사들여 막내 아들 연령군의 집으로 삼기도 했다.[4] 철종 즉위 후에는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신주를 모시는 공간이 되었다. 신주는 고종 즉위 후인 1869년(고종 6년)에 누동궁으로 옮겨졌다.19세기 이후 임금이었던 헌종과 철종이 후사가 없었던 반면, 적장자를 얻어 매우 기뻤던 고종은 원자의 왕세자 책봉 및 가례소를 마련하기 위해 1879년(고종 16년) 11월에 이곳을 본격적으로 왕실 직속 별궁으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다. 고종은 단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왕실 의례를 행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궁의 규모를 꽤 크게 지었다. 1881년(고종 18년)에 완공했고 안국방 소안동에 있다 하여 '안국동 별궁'이라 했다. 일상에서는 줄임말인 '안동별궁'으로 많이 불렀다.
1882년(고종 19년) 2월, 왕세자 이척(순종)과 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의 가례를 여기서 올렸다. 하지만 순명효황후는 1904년(광무 8년) 사망했고, 1906년(광무 10년) 황태자 이척은 새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와 2번째 가례를 치렀는데 그때 가례도감을 설치한 곳 역시 안동별궁이었다.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안동별궁 전경을 찍은 사진 |
안동별궁 건물 자체는 일부 남아있었다. 그래서 1940년대에 사동궁을 매각한 의친왕 가족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은 그때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풍문여중고는 원래 별궁 땅에다가 지은 학교여서, 그 학교와 내가 살고 있던 별궁 사이에는 담이 하나 막혀 있었을 뿐이었다.
이해경 著, 《나의 아버지 의친왕》#
이해경 著, 《나의 아버지 의친왕》#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학교 건물로 쓰일 당시의 안동별궁 현광루[6] |
3. 건물들의 수난
<colbgcolor=#bf1400> 풍문여고 내에 있던 안동별궁 건물 |
<colbgcolor=#bf1400> 정화당 |
<colbgcolor=#bf1400> 한양컨트리클럽에 있을 당시 현광루와 경연당 |
<colbgcolor=#bf1400> 정관루 |
그나마 앞서 말한 건물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고종실록》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정상루(定祥樓)'의 경우 어디 있는지 모른다. 만약 남이섬 정관루가 만약 안동별궁 건물이 맞다면, 정상루가 옮겨와 정관루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 2017년 3월에 강남구 자곡로 152로 이전[2] 그 운현궁의 북서쪽,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다.[3] 혜경궁 홍씨의 6대조.[4] 원래 연잉군이 갖고 싶어했는데 숙종이 무시하고 연령군에게 주었다고.(...)[5] 일제강점기 광산업으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 친일부호. 김구 선생에게 경교장을 마련한 그 인물 맞다.[6]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7]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애인 장정이가 마담으로 있었다는 곳.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그곳 맞다.[8] 민영휘의 손자. 민덕기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