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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판 문서를 읽기 전의 주의사항
이하의 비판을 읽기 전에 동의보감이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지어진 책임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서양 의학도 과학화를 거쳐 현대의학으로 정립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예컨대 아래에서는 동의보감이 수은 등 중금속 처방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서양 의학도 19세기까지는 수은을 치료제로 이용했으며, 기초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어서 수많은 환자를 2차 감염으로 사망케 하던 수준이었다. 심지어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현대 의학의 이름으로 코카인, 메스암페타민, 아편같은 각종 마약이 일반인에게 처방되곤 했다.즉 아래의 비판점들이 지금 시점에서 유효하기는 하지만, 현대 의학과 동의보감을 비교하여 한 쪽을 깎아내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 단지 현대 과학의 성과와 방법론을 무시하고 수백년 전에 쓴 의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추종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면 되는 것이다.
2. 인용의 오류
동의보감 문서의 특징 문단에서 설명했듯이 동의보감은 인용 출처를 철저하게 밝혔는데, 문제는 인용의 오류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자세히 찾아보면 황제내경의 문구는 물론이고, 의학입문의 내용조차도 잘못 적은 경우가 있다. 의학입문은 동의보감 저작 당시엔 명나라에서 들여온 의서 중에서 나름 신간이었다.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최신간서적은 공정현의 만병회춘이다.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출전들이 너무 방대한데다가, 최근까지조차도 그 원전들을 구할 방법조차 막막한 까닭에 후학들이 과연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비교 검증할 엄두도 못내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중국이 대다수의 고전 의서를 온라인 문서화한 덕분에 오류 발견이 매우 쉬워졌다. 한편으로는 출전 자체가 아예 세상에서 없어졌거나 애매해서 특정 서적으로 확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3. 한의학 정체와 동의보감
'너무 뛰어난 나머지' 후대에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이 사상의학이라는 개념을 새로이 들고 나오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의학 이론의 발전에 장애를 가져왔다. 실제로 동의보감 이후에 한국 한의학은 어느 정도 정체 상태였다. 동의보감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경악전서 기반의 처방이나 온병학 등은 한국에서 비중이 상당히 작은 편이다. 동의보감의 양이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에 그 가격과 부피 면에서 접근성이 떨어져 방약합편과 같은 요약집이 나오는 등, 당시 한의학은 그 발전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동의보감 믿고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매너리즘이 생긴 건 사실이다. 너무 동의보감만 들먹이는 탓에 "한의학은 1610년 이후로 정체돼있는거 아닌가?" 하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당시 한의학의 정체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적잖은 양의 문서가 소실되었다는 것과, 조선 시대 후기의 국력 쇠퇴 등의 시대적 요소 역시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조선 초기의 의방유취, 향약집성방과 조선 중기의 동의보감은 모두 국책 사업으로 제작했던[1] 엄청난 분량의 백과사전식 의서였다. 또한 중국의 최신 의서들을 심혈을 기울여서 반영하였다. 동의보감에서는 1575년 간행한 이천의 의학입문, 1587년 간행한 공정현의 만병회춘을 인용한다. 불과 십 몇 년의 시간차가 있을 뿐이다. 허나 동의보감 이후의 관찬 종합의서는 1799년 정조가 명하여 동의보감을 요약할 목적으로 간행한 제중신편과 대한제국 멸망 직전인 1906년 고종 무렵의 의방촬요 정도뿐이다. 조선 후기는 더이상 관찬 종합 의서를 발간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
조선은 제도적으로 백성이 개인적으로 외국에 드나들거나, 무역하는 행위를 제약했다. 수입된 것이라면 의학 서적은 물론이거니와 약재조차도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전혀 유통시킬 수 없는 사회였다. 동의보감이 쓰인 시기는 역사상으로 중국의 명청교체기였고, 사대주의에 입각한 조선 지식인들이 오랑캐(청나라)의 학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던 것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조선의 지식 풍토가 경색되어가는 와중에도,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는 조선이 제중신편을 발간했던 시점보다 앞선 1782년, 거대한 규모의 서적 정리 사업인 사고전서를 이미 완성해 놓았다.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실학) 학자들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분명히 최신 의서를 들여왔었을 텐데도 제중신편에는 1624년 간행한 경악전서까지만 반영되었다.
또 국토가 좁고 4계절이 뚜렷한 조선의 상황과, 외기(外氣) 중심의 의학으로 발전 방향을 잡은 중의학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견도 있다. 이제는 점차 열대화가 되어가는 한국 기후를 볼 때 사고의 중심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온병학을 점차 강조하는 추세이다.
4. 재료 문제
보통의 의서가 확실한 치료 방법에 중점을 두는 반면 동의보감은 일반 백성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에 중점을 두어 약효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즉 동일한 병에 대해 보통의 의서가 값비싼 약재를 쓰는 확실한 약제법을 제시한다면 동의보감은 약효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산이나 들에서 쉽게 구할 수 있거나 약방에서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먼저 제시한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약재를 혼합했을 때 더 효과가 뛰어난 경우에도 가급적이면 단일 약재나 재료 배합이 적은 치료법을 우선시한다.재편집되면서 지나치게 국산 약재로 대체하는 것을 선호한 나머지 일부 약재의 기원이 불분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지만 안 그런 경우도 있다는 게 문제이다.
5. 이상한 처방
중금속 관련 처방은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어쩔 수 없는 오점으로 남는다.[3] 예컨대 수은을 장복하면 귀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있는데, 수은 중독이 되면 환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 사회에서 수은은 서양에서는 모든 금속의 시작이자 연금술의 핵심금속으로, 동양에서는 도교의 연단술의 재료로 취급받을 정도로 신비하게 취급받았다. 당시로서는 중금속의 체내 축적이나 중금속 중독 등의 개념이 없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좋은 게 아니다.그 외에도 예를 들자면 매우 많다.
- 부부가 서로 사랑하게 하는 처방(=원앙 국을 먹거나 뻐꾸기 머리뼈를 차고 다니면 된다)[4]
-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살리는 처방, 목매 죽은 사람 살리는 처방
- 딸 아들 가려 낳는 방법 6가지(예 : 월경 끝나고 1일, 3일, 5일, 7일, 9일 홀수날 수태하면 아들 낳는다.[5]
- 아들 낳는 방법 : 월경이 끝나고 1일, 3일, 5일…… 홀수 날 수태하면 아들, 남편의 오줌에 담가둔 계란을 먹으면 아들, 좌로 누워 수태하면 아들 등), 또는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방법 등[6]
- 가위에 눌린 사람에게 불을 비추거나 앞에서 갑자기 부르면 죽을 수도 있다. 이때는 오직 그 사람의 발뒤꿈치나 엄지 발가락 발톱 근처를 아프게 깨물어 준다.[7]
- 원숭이가 말을 하게 하려면 수은을 먹이면 된다.
- 악몽을 예방하는 법 : 호랑이 해골로 만든 베개를 베고 잔다.[8]
- 주술도 나온다. 목에 가시 제거법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무당이 외우는 주문을 외우라고 한다.
- 매 맞을 때 덜 아프게 해주는 처방 : 이 약의 이름은 '기장산(奇杖散)'이라는 약인데 백랍 1냥을 얇게 썰어 사발에 넣고 따뜻한 술에 우려서 먹으면 된다고 한다. 여기서 백랍이란 재료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꿀벌의 벌집을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물푸레나무의 진액을 말한다. 기장산을 만드는데 쓸 백랍은 후자를 말한다.[9]
집대성 및 재편집의 성격이 강한 동의보감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저자인 허준이 저런 걸 다 믿었다고 생각하진 말자. 심지어 딸 아들 가려 낳는 방법(전녀위남법)은 후술했듯이 조선 시대에도 안 믿었다. 당장 동의보감에선 귀신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현대 분석결과 이는 환청과 환각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며, 조선 때는 이미 성리학이 진하게 녹아들어간 사회적 배경이 있으므로 공자가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 것처럼 동의보감은 귀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에 대해 변호를 해 보자면, 당시는 기술력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고 죽음의 기준도 현재처럼 '동공반사가 없고, 심정지 및 사후경직이 보인다'는 객관적인 죽음의 판정이 어려웠다. 따라서 심장이 멈추거나 손을 떨구거나 하면 죽음으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보통 심정지가 일어나도 일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손을 떨구는 것도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상술한 과정 이후에도 당사자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때 일반 사람들에게 "아 죽은 사람이 살아났구나" 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괜히 옛날에 땅에 묻을랬다가 되살아났다는 경우가 많았다는 데는 이유가 있다.
5.1. 전녀위남
동의보감에는 소위 '아들 낳는 법'이라고 알려진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전녀위남법을 기록한 것은 동의보감이 처음이 아니며, 1434년(세종 16)에 노중례가 편찬한 태산요록(胎産要錄)과 이를 언해하여 1608년(선조 41) 간행된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에도 실려 있고, 심지어 1433년(세종 15)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에는 거꾸로 딸 낳는 법인 '전남위녀법’도 소개되어 있다.그러나 이러한 처방들은 조선 시대의 의관들도 믿지 않았다. 아래는 승정원일기의 영조 8년 11월 14일 기사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진부한 약재라 해도 효과가 아주 뛰어난 경우가 있으니, 노년의 팔미원(八味元)과 부인의 태산약(胎産藥: 임신/출산시 복용하는 약)이 다 뚜렷한 효과가 있음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의가(醫家)의 남녀의 성별을 바꾼다는 설(전녀위남)은 거짓입니다만, 양태(養胎: 임신의 조리) 같은 경우에는 분명 효과가 있지요. 옛말에 태임(太妊: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께서 태교를 하셨다 하는데, 태교도 효과가 있으니 약을 써서 양태(養胎)를 하는 것이 어찌 효과가 없겠습니까.”
송인명이 말하기를, “의가(醫家)의 남녀의 성별을 바꾼다는 설(전녀위남)은 거짓입니다만, 양태(養胎: 임신의 조리) 같은 경우에는 분명 효과가 있지요. 옛말에 태임(太妊: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께서 태교를 하셨다 하는데, 태교도 효과가 있으니 약을 써서 양태(養胎)를 하는 것이 어찌 효과가 없겠습니까.”
어의 6명과 고위 관료들이 모여 왕의 진료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놓고 전녀위남을 거짓이라 하고 있고, 이에 딴지를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5.2. 투명인간?
잡방문에 은형법(隱形法)이라는 처방이 있다. 개의 담(膽)을 포함한 세 가지 본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효과는 '隱形(직역: 형체를 숨김)'이라고 되어 있다. 이 처방을 KBS 스펀지에서 '투명인간이 되는 법'으로 해석하여 실험했지만이를 두고 세간에는 동의보감에 '투명인간이 되는 법'이 있다고 회자되었다. 그런데 우석대 한방병원에서는 동의보감이 인용한 원전(原典)을 고증하여 이 처방이 실은 안구의 염증성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동의보감의 '투명인간이 되는 법'은 진짜일까?[10] 참고. 여기서 개의 담은 눈의 고름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고 나머지 본초는 항염증 작용이 있다. 따라서 '隱形'이란 시야를 막는 고름을 없애는 걸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환자의 입장에선 눈 뜨면 장애물이 계속 '보이는' 셈이기 때문. 요즘의 감각으로 보면 은형법 같은 말이 썩 좋은 표현은 아니나 예전에는 전대의 표현을 고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그대로 썼다고 한다. 조선왕조실톡 261화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
6. 의사와 한의사 간 논쟁
6.1. 의사들의 입장
동의보감에는 아주 황당한 처방이 많이 존재한다. 한의학적 설명의 한계인 듯하다. 올바른 처방이냐, 아니냐가 문제이다.먼저 과학적 방법론의 문제가 있다. 현대 의학과 차이를 보면 현대 의학에서는 아무리 히포크라테스가 서술했다고 해도 '그건 잘못이다.'라고 아주 단순하게 선을 그어 버린다. 잘못은 잘못이지, 변호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의학은 과학적 관점에서의 명백한 잘못도 잘못이라고 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과학은 비판을 적극 수용하고 실험하고 검증한다. 그러나 한의학은 이러한 비판을 거부한다. 그러나 올바른 신념을 가진 의사 혹은 과학자라면 아무리 보기 싫은 비판이라도 그 비판을 남겨두고 재비판하는 방법을 일반적으로 택해야 한다. 논쟁과 토론으로 살아남아야 올바른 지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허준이 황당한 내용은 믿지 않되 집대성의 성격상 기록만 해 두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문제가 된다. 정말 허준이 믿지 않았는데도 처방을 기록했다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지가 문제가 된다. 또한 한의사들은 허준이 믿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허준은 믿었다. 심지어 주술까지 수록했다. 허준을 변호하기 위해 허준은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았을 거라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동의보감에 어떤 내용을 믿을 것이고, 어떤 내용은 믿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동의보감에는 위의 예 외에도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다. 심지어 정액을 혈액으로 만드는 법도 있고, 엄마 배 안의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처방도 있다.
해부학, 생리학 면에서도 문제가 된다. 한의학은 현대 생물학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장부론을 논하고 있다. 음양 오행에 억지로 맞추는 비과학적 시각이 한의학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그리고 많은 한의대에서 아직까지도 동의보감 원전 수업을 열면서 교육한다. 적어도 의대 본2 ~ 3에서 라틴어 원전을 직접 인용한 책으로 임상 수업을 하지는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6.2. 한의사들의 입장
동의보감에 황당한 처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이건 대부분의 한의사들도 인정을 한다.동의보감은 애초부터 허준이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조선에 존재하고, 또한 이루어지고 있던 모든 처방들과 당시로서는 모든 부분에서 관련된 말 그대로 민간요법이나 주술적 요법까지 전부 다 체계화하여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발간된 책이다. 이것을 위하여 당시 조선과 중국의 거의 모든 주요 의서들을 수집하는 것은 물론, 조선의 각 군현에서 이루어지던 민간요법이나 주술 요법까지 전부 다 체계화하여 기록해야 했던 것이 바로 허준이 어의로서 총 지휘하던 동의보감 편찬 작업이었다. 따라서 허준은 동의보감을 지을 때 의서에 있던 텍스트를 그대로 옮겨와 출처를 표기하며 처방에 기록하고 체계화했다.
허준이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편찬 목적은 조선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한의학적 처방은 물론 각종 기타 등등의 민간, 주술 요법까지 총동원해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예를 들어 경옥고에 대한 처방을 동의보감에서 소개할 때는 이걸 매일 먹으면 360세 까지 산다고 적혀있는데, 이걸 허준과 당대 임금 및 관료들이 믿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동의보감 잡방에는 불 피우는 방법, 자석이 남쪽을 가리키는 방법, 옷에 묻은 기름때 제거하는 방법들도 있다. 한마디로 뭔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것, 혹은 누군가가 그것을 위하여 사용한다고 말한 모든 잡다한 것까지 수록한 것이다.
민간요법과 주술 요법을 정리한 책이기 때문에 주술 내용이 책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음이 번잡할 땐 불경이나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그것 둘 모두를 수록하면 수록자는 불교와 기독교 모두를 믿는단 말인가?
'음양오행에 억지로 맞추는 시각' 역시 그러하다. 당연히 한의학의 역사에서 적어도 최근 100년을 제외한다면 한의학은 지금의 자연과학적인 시각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병이라는 현상에 한의학적 치료술기인 침구학과 각종 처방을 사용하고 이에 대한 효과와 치료경과 관찰이 이어지면서 현재의 한의학 치료술기와 처방들이 경험론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다. 여기에 음양 오행이 사용된 것이야 당시로서는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 음양 오행론이라는 세계관 철학뿐이었으니 당연했다. 또한 한의학은 과학적 통계론과 접근 방법을 거부한다는 것 역시 이건 일부 의사들의 착각이다. 최근에는 한의학에 대한 논문들도 많이 출판되고 있으며 객관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한의대에서 원전학으로 동의보감을 교육한다는 것이 시대 착오라는 주장은 애시당초 '원전학'의 개념조차 이해 못했기에 나올 수 있는 비판이다. 애시당초 '원전학'은 수천년간 축적되어 오면서 쌓인 텍스트가 수록되어 있는 의서들을 읽고 이해하거나, 혹은 의서를 저술한 저자의 의도, 역사를 이해하거나 파악하기 위해 가르치는 과목이다. '임상'으로 쓰이는 '임상 과목'과는 그 목적부터 완전히 다른 과목이라는 의미이다.
동의보감이 원전 수업에 쓰이는 이유는 근대 이전 역사를 통틀어 한국에서 저술된 의서, 혹은 의학 백과사전 중 동의보감이 향약을 가장 많이, 또한 제대로 수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전 수업은 의서에서 무작위로 추출된 예문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주된 과정이다. 요약하자면 실제 임상에서 사용하라고 있는 '임상 과목'이 아니라, 어떤 의서라도 읽고 판단하여 정보를 선택하거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원전학이고, 그 원전학의 교재로 쓰이는 것이 동의보감인 것이다. 한의대 교육 과정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가 깔려있기에 가능한 비난이다.
앞선 주석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많은 한의대에서 동의보감을 정식으로 교육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전국 12개 한의과대학 중 동의보감이 아예 과목으로 개설된 곳은 대구한의대학교, 대전대학교, 우석대학교, 세명대학교뿐이다. 그나마도 대구한의대와 우석대학교는 '전공선택'으로 동의보감이 개설되어 있는 형편이며, 대전대학교는 아예 Reading & Comprehension이라는 이름으로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대문짝만하게 표방하고 있으며, 전공으로 매 학기 1학점 씩 여러 학기에 걸쳐 배우는 것은 세명대가 유일하다. 그나마도 세명대 역시 대전대와 동일한 개념으로 동의보감을 교육하고 있다. 게다가 한의대마다 할당된 인원들을 생각해보면 동국대학교, 동의대학교, 원광대학교 그리고 경희대학교가 빠진 것부터 한의대생 다수는 동의보감만을 따로 배우는 과목과 스치지도 않는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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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찬(官撰)[2] 조선 후기의 쇠퇴는 전란, 붕당, 봉건제라는 사회 제도의 한계 외에도 당시의 이상 기후 문제를 감안해야 한다. 소빙하기가 심각했던 17세기에는 전세계적으로도 흉작, 대기근, 전염병이 빈번했는데 조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현종 때에는 경신대기근, 숙종 때는 을병대기근이 있었고, 영조 25~26년과 정조 23년 때는 대규모의 역병이 있었다. 온돌의 보급과 무분별한 삼림 벌목, 농경 지력의 쇠퇴 또한 이와 유관하다. 소빙하기가 점차 물러나던 시기조차도 순조 9년, 순조 16년에 각각 화산 폭발(탐보라 화산 참고)에 기인한 북반구의 이상 기온 저하로 흉년이 발생했고, 이후 홍경래의 난과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연결된다. 순조 20년에는 전국에 수해가 발생했고, 순조 21년에는 1차 콜레라 판데믹이 중국을 거쳐서 조선에 퍼져 사망자가 속출했다. 철종 10년에는 3차 콜레라 판데믹이,고종 32년에는 5차 콜레라 판데믹이 조선에 전파되었다.[3] 물론 도교 자체의 결함이긴 하다[4] 당연히 의약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런 행동을 굳이 찾아서 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부부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강하게 있는 것이니 통계적으로는 개선된 사례가 더 많을지 모르지만, 의서에 쓰일 내용은 아니다.[5] 당시에는 출산 전에 딸과 아들을 구분할 방법도 없었고, 현대 의학으로도 임신 전 성별을 선택할 방법은 없다. 즉, 여전히 부친 측 정자에 들어 있는 성염색체에 운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6] 역시 미신이다. 오줌에 담가둔 계란 같은 방법은 암모니아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7] 물론 몸에 자극을 가하면 가위 눌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굳이 엄지발가락을 강조할 이유는 전혀 없다.[8] 악몽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심리 불안이므로, 강한 동물의 상징 등을 가까이 하므로써 호랑이 같은 강한 동물이 나를 지켜준다는 심리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일종의 토테미즘을 통한 심리학적 치료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영유아 관련 학문 혹은 매체에서 등장하는 '애착인형'도 이와 같은 논리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9] 이론상으로는 물푸레나무 진액에 정말로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성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 약을 먹는다고 해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쌩쌩한 정도는 절대 아니다.[10] 우석대학교 부속한방병원 한방내과 장인수, 2016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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