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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1:46:06

사카모토 류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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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사카모토 류이치
[ruby(坂本, ruby=さかもと)][ruby(龍一, ruby=りゅういち)] | Ryuichi Sakamoto
파일:EA0DF46F-3F76-4017-ACAF-250677E1DBE1.jpg
출생 1952년 1월 17일
도쿄도 나카노구
사망 2023년 3월 28일 (향년 71세)
도쿄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부모 아버지 사카모토 카즈키(1921~2002)[2]
어머니 사카모토 케이코(1925~2010)[3]
자녀 장녀(1972~)[4]
장남 야노 후타(1975~)[5]
차녀 사카모토 미우(1980~)[6]
차남 소라 네오(1992~)[7]
학력 세타가야구립 소시가야 초등학교 (졸업)
세타가야구립 치토세 중학교 (졸업)
도쿄도립 신주쿠 고등학교 (졸업)[8]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 / 학사)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음악연구과 작곡전공 / 석사)
직업 음악가,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 피아니스트, 키보디스트
레이블 일본 컬럼비아(1978 - 1979)
알파 레코드(1978 - 1983)
MIDI / SCHOOL(1984 - 1986)
CBS 소니 / TERRAPIN(1987)
버진 레코드(1989 - 1991)
도시바 EMI(1993)
포 라이프 레코드 / güt(1994 - 1997)
워너 뮤직 재팬(1998 - 2006)
commmons(2006 - 2023)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파일:유튜브 아이콘.svg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파일:시나 웨이보 아이콘.svg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어린 시절3.2. 활동3.3. 사회적 행보3.4. 사망
4. 음악 스타일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5.2. EP5.3. 사운드트랙
6. 필모그래피7. 오토바이오그래피8.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9. 다른 아티스트와의 관계10. 사건사고 및 비판
10.1. 과거 인성 논란10.2. 오야마다 케이고 옹호 논란10.3. 유희열에 의한 표절 논란에 대한 입장
10.3.1. 개요10.3.2. 정황
11. 여담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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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작곡가이자 뮤지션. 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영화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골든글로브상그래미 어워드[9]를 수상한 인물이자 아시아 최초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자다.


2. 이름

坂本龍一는 일본인의 인명이므로 일본에서는 당연히 '사카모토 류이치'라고 읽지만, 서양에서는 일본인들의 해외 진출시 또는 서구권에 본인들을 알리던 관례대로 성씨와 명을 도치시킨 ‘류이치 사카모토’로 소개되었고, 이 이름이 한국에도 그대로 소개되어 아직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서양식 표기대로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부른다.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활동이나 영화 음악 등으로 먼저 이름이 알려진 서구권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도 별 고민없이 서양식 표기를 사용했던 것.[10] 비슷한 예로는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음악가 구라모토 유키 역시 '유키 구라모토'로서 훨씬 많이 알려져있다.[11]

네이버에 '사카모토 류이치'라고 검색해도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등재된 프로필이 표시되며 요즘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여전히 많은 언론사에서 그의 이름을 다룰 때 '류이치 사카모토'로 표기하는 곳이 많다. 정식 수입 개봉된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역시 공식 자료의 모든 곳에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이름과 성씨가 거꾸로 쓰여져 있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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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월 17일 도쿄 나카노구 출생. 아버지는 출판사의 편집자였으며, 장서와 클래식 LP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다녔던 유치원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이것이 즐거워서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고 한다. 4살에 작곡을 시작해서 11세 때인 1963년 도쿄예술대학의 음악 교수에게 클래식 작곡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중학교 때 우연히 포스트모던 연주회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받았었다고 하며[12] 백남준의 작품 등 다양한 포스트 모던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13]

1971년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주어진 조건대로 곡 하나를 작곡해야 하는 시험을 고작 1시간 만에 끝내고 나가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입학한 후 작곡과는 전형적인 클래식 분위기 일색이라 어울리지 못하였고 미술학부 친구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놀아다니기 시작해서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아티스트들과 교류를 넓히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흔적으로 전위파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타카하시 유지(高橋悠治)가 쇤베르크베르크, 베베른의 피아노곡 전곡을 1977년에 일본 콜럼비아에서 녹음할 때 쇤베르크의 초기 습작인 '여섯 곡의 피아노 연탄곡집'에서 타카하시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한 것이 있다.

3.2. 활동

솔로 데뷔전인 1976년 부터 슈가 베이브 출신의 오오누키 타에코, 야마시타 타츠로 등 여러 아티스트들의 세션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츠치토리 토시유키와 같이 녹음한 Disappointment-Hateruma가 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앨범이다. 솔로 데뷔 이전에 1978년 도쿄에서 열린 우주 박람회의 기념 앨범인 '宇宙(1978)'를 제작했으나, 신디사이저 음색과 다큐멘터리 멘트를 조합해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작업물에 가깝고, 수록된 곡도 자신의 곡이 아닌 Joe Meek의 'Telstar'라는 곡을 커버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도 앨범 한 구석에 조그맣게 올리는 데 그쳤다. 이후 1978년, 제대로 된 솔로 앨범인 Thousand Knives[14] (풀 앨범)를 내 주목을 받는다. 타이틀 곡인 Thousand Knives는 이후에도 각종 YMO 라이브 버전 (예시 1 예시 2 예시 3 예시 4)이나 YMO 앨범 버전, 피아노 연주곡 버전 (# ##) 등등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우려먹힌다.

이 앨범을 발매한 뒤, 당시 이미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유명세를 쌓고 있던 호소노 하루오미, 타카하시 유키히로 등과 알게 되었을 때, 사카모토 본인은 팝[15]에 문외한이라 그들과 어울리면서도 왜 그들이 유명한지 전혀 몰랐었다고 한다. 원래 친했던 둘의 앨범에 참여를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오가다 우연히 앨범을 만들자고 이야기가 나와 함께 음악을 만들게 되니 그게 Yellow Magic Orchestr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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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호소노 하루오미,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 YMO 활동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16]

사실 일본에서는 큰 반향이 없었으나, 레코드 회사에서 이들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밀어주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영국 등 서구 각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당시로써는 매우 진보적인 전자음악이었고, 음악 전반에 깔린 팝과 락큰롤의 느낌, 동양인이 하는 최신 현대 음악에 대한 신비감이 섞여있었기 때문인지 서구에서 대히트를 치게 된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소식을 계속해서 자국민에게 전했고, 몇 달 후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들은 국민 아티스트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때 느닷없이 국민적 인기를 얻게 된 탓에 인기에 대해 아무 면역(?)이 없던 YMO 멤버들은 집 밖에만 나가도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엄청 시달렸고, 특히 사카모토 류이치는 대인기피증까지 앓았었다고 한다.[17] 호소노나 타카하시야 YMO 이전에도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편이였으니 그렇다쳐도 Technopolis를 작곡하며 YMO 데뷔를 성사하였던 사카모토는 YMO로 갑자기 유명해졌으니…[18]

당시 가장 큰 히트를 친 곡은 단연 Behind the MaskRydeen[19], Technopolis, Tong Poo. Behind the Mask는 마이클 잭슨이 가사를 덧붙여서 앨범 (시기 상으로 하필이면 세기의 앨범인 Thriller였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에 리메이크되어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하나 모종의 이유로 빠졌고[20] 이후 에릭 클랩튼이 락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것이 널리 알려졌다. 마이클 잭슨 사망 후 유작으로 발매된 앨범에 댄스풍으로 재차 어레인지된 버전이 들어갔다.[21] 전자음악과 마찬가지로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전자게임을 뮤직비디오로 활용한 Computer Game도 유명하다.

YMO 막바지에는 J-pop 분위기의 가벼운 곡들을 많이 냈으며 보컬로도 활동하여 당시 일본에서 요즘 가장 귀여운 아저씨들로 불렸다고 한다. 다양한 리메이크가 된 君に、胸キュン의 오리지널 뮤직비디오를 보면 상당히 맛간 느낌으로 역시 천재는 범상치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노래 자체가 흥겹고 귀엽기에 이후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된다. 이 곡 외에도 YMO 뮤직비디오 대부분이 말 그대로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준다.

YMO 활동으로 유명해지자 영화배우, 광고 모델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특히나 주목할만한 점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1983년 작품 <전장의 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Merry Christmas Mr. Lawrence)>에서 주연을 맡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와 공동으로 주연한 이 영화에서 그는 일본군 장교로 나오는데, 데이비드 보위와의 격렬한 키스신(!)도 등장한다. 사카모토는 영화에 출연하는 조건으로 영화의 음악도 맡았는데, 그의 음악활동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오리지널 스코어[22] 작곡 작업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23] 영화의 메인 테마곡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영화보다 유명해져서 사카모토나 영화를 몰라도 이 음악만큼은 모두가 알 정도다.[24] 한국의 경우에는 영화 내용이 문제[25]가 되어서 정발되지 않았기에 영화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음악 자체는 여러차례 대중매체에서 재생되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듣게 되면 '어 그거!'할만큼 은근 인지도가 있는 명곡이다.
파일:6908C456-8629-4919-A878-A400FB4B61E7.jpg파일:45046F64-2513-45C8-9293-60DF516ABB3F.jpg
<전장의 크리스마스>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화룡점정으로, <마지막 황제>의 OST를 통해 오스카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마지막 황제>에서도 직접 극중 인물을 연기했다.[26] 배역은 푸이만주국을 배후 조종한 아마카스 마사히코 예비역 일본 육군 대위로 분했다.[27] 테마곡 Last Emperor와, Rain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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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출연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테마곡을 맡기도 했다. 말 그대로 월드 클래스 뮤지션. 근데 의외로 게임 음악에 여러차례 참여 했는데, 89년도 PC엔진판 천외마경을 비롯한 여러 게임 음악을 맡았고, 드림캐스트를 처음 구동하면 골뱅이 로고와 함께 흘러나오는 오프닝 콘솔 뮤직도 그의 작품이다. 'L.O.L.: Lack of Love'에서는 OST와 함께 시나리오 라이터도 맡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에 참여한 일은 거의 없으나, 단 하나 왕립우주군에서만 참여해 음악을 맡았다.[28] 위에서 설명한 YMO 시절 '君に、胸キュン'의 수많은 리메이크 곡 중 하나는 마리아 홀릭 1기 엔딩에도 쓰였고, 이로 인해 오덕계에서도 YMO가 주목을 받게 된다. 이외에도 그나 YMO의 곡들이 리메이크된 경우는 많다.

2013년 5월에는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과 함께 16년 만에 오케스트라 협업 공연을 선보였다. 약 1년 뒤인 2014년 4월 역시 Playing the Orchestra 2014를 성황리에 마쳤지만, 같은 해 7월 10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인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며 당분간 음악활동을 중지할 것을 밝혔다.[29]

2015년 암 투병 이후 첫 복귀작을 발표했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어머니와 살면'의 OST라고 한다.

2015년 8월 30일 일본 국회 앞에서 아베 신조 정부가 추진 중인 안보법안 반대 시위에 참가하며 오랜만에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설을 통해 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격려하고, 헌법과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아주 중요한 시기에 함께 행동하겠다고 했다. # 위안부 관련해서도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며, 이를 보고 극우단체에서는 재일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일본 지지통신 11일 보도에 따르면 사카모토 류이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2015)'에서 음악을 담당해 골든글로브상 최우수작곡상 후보에 올랐으며 독일의 음악가 알바 노토와 수상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고 한다. 알바 노토와 사카모토 류이치는 이전부터 공동으로 앰비언트 뮤직을 작업하며 앨범도 여러 장을 발표할 만큼 음악적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2021년 1월 21일 본인의 웹페이지를 통해 직장암 투병 사실을 밝혔다. 두 번째 암투병이며 성공적으로 수술은 마쳤으나 앞으로 활동으로 인한 장거리 여행은 어려울 것이라 언급하였다. #

2022년 6월 7일, 문예지 ‘신초’에 자신이 시한부 상태임을 밝혔다. 문예지에 류이치는 직장과 간 두 곳, 림프로 전이된 종양, 대장 30cm를 절제했다고 밝혔다. 암 판정 후, 치료하지 않으면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며, 수술은 예정시간 8시간을 넘은 20시간에 달했다고 한다. 류이치는 “수술이 아닌 투약 방식으로 통원 치료를 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며 “남은 시간 속에서 음악을 자유롭게 하며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30]

파일:skmt.jpg

2022년 12월 11일-12일에 일본의 웹사이트 MUSIC/SLASH를 통해 오랜만에 온라인 피아노 솔로 콘서트를 갖는다. 제목은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 보통은 실시간 라이브 공연을 있는 그대로 방송했지만, 최근 건강 상태가 악화되면서, 지난 9월 몇 차례에 걸쳐 녹화를 마무리했다. 이것은 그 영상의 편집본이며, 이를 위해 뉴욕에서 영화 전문 스탭이 소집되었다. 12월의 인터넷 송출 이후 극장판으로 재편집되어 전세계에 필름 마켓에도 오를 계획이다.

이번 12월 11일에 MUSIC/SLASH를 통해 전달되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온라인 피아노 솔로 콘서트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는 사실상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외적인 마지막 연주 모습이 될 것이다. 보도자료를 통해 본인이 직접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코멘트를 한것이 보도자료에서는 꽤 가볍게 다뤄졌고, 이를 기사화 한 언론사들 역시 저마다 그의 코멘트를 각자 다른 무게로 해석하고 받아 적었는데, 현지 스탭들이 전해온 이야기에 따르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멘탈 컨디션 부분에서는 괜찮아 보이지만, 전과 다르게 너무나 수척해진 모습에 놀랐고, 그만큼 체력이 약해진 것이 눈에 띄게 보여서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일본의 뉴스 등을 통해 전해져왔다.

2022년 10월까지도 새로운 작품을 출시하긴 하지만, 대부분 2, 3년 전에 이미 제안 받았던 것들의 마감분이며, 그외 과거 작품들의 리마스터링 재발매, 아울러 그동안의 활동 전체를 회고하는 회고집 출간을 예정하는 등 살아 있을때 신경 써서 챙겨 볼 수 있는 건 다 마무리 짓고 가겠다는 의지가 여러 곳에서 엿보인다. 이런 경향은 과거 한국에서 사카모토 측과 업무를 경험해본 회사들의 이야기에서도 예를 들 수 있다. 사카모토 측은 일본에서 발매된 자신의 음반, 책이 한국에서 라이센스화 되는 것을 비롯하여, 한국에서만 특별히 발간되는 책이나 기타 상품들이 출시하는 경우 본인들의 기준에 만족할때까지 하나 하나 꼼꼼히 시간을 들여서 확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외 지역에서 발매될 경우에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오랜 시간 동안 재활용 종이를 사용해서 상품을 제작해왔기 때문에 환경 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 선을 지킨 용지를 사용해서 제작을 했는지, 콩기름 잉크를 사용해서 인쇄를 했는지 확인을 한다든지. 또 일본어를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을 했는지 확인도 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전문가를 불러서 검수를 진행한다고. 그래서 다른 해외 뮤지션들보다 국내 발매가 좀 더 늦어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는 생을 마치기 전까지 충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마감해두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3.3. 사회적 행보

음악 활동 외로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나 말년에는 환경 보호와 사회 운동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유명세에 시달린 탓에 평소 조용한 사생활을 추구했지만, 인류 보편적 생존의 조건을 뒤흔드는 문제에 대해선 오히려 유명세를 통해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31]

고등학생 때에도 일본 사회주의 운동에 감명받아 전공투로 학생 운동에 참가해 바리케이드 봉쇄를 결행하기도 했고, 대학 시절에는 타케미츠 토오루를 비방하는 과격한 전단을 뿌리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2] 1997년에는 일본의 음악 저작권이 JASRAC가 독점 관리하는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제도권의 움직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또한 1999년에 제작한 오페라 'LIFE'를 계기로 환경과 평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기 시작하며, 잔여 지뢰 제거 활동을 위한 자선곡인 'ZERO LANDMINE' 등을 발표하기도 했고, 미국 9.11 테러를 주제로하는 논고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 내적으로는, 2004년에는 음악 평론가인 다카하시 켄타로와 영국 출신의 DJ 피터 바라칸 등과 함께 공동 성명을 내어, 일본 국회에서 심의되고 있던 '음악 레코드의 환류 방지 조치'에 반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2006년 PSE법 반대 서명 운동'의 경우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고, 같은 해 '아오모리현 핵처리 시설 설립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반핵운동에도 주도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반핵 운동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더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33]

파일:사카모토 류이치 평화헌법 수정반대 시위 연설.png
또한 헌법 9조의 개정에 강하게 반대하며 일본 내 사회적 화두인 부부별씨(夫婦別氏) 제도의 도입에 찬성했다. 2015년부터 아베 신조 정권이 강하게 밀고 나갔던 집단 자위권과 평화 헌법 개정에 대해 시위에 참여하는 등 비판하는 행보를 보였다. #

그외에 상기할 점으론, 매크로바이오틱(전체식)의 실천자이기도 하며 채식주의자이기도 하다. 과거 중단한 적이 있었지만, 2014년 암 진단 이후 본인의 라디오 방송에 다시 복귀하면서 비건(완전채식주의자)이 되었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

평소 수많은 자선 콘서트와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3.4. 사망

2023년 3월 28일 오전 4시 32분 오랜 투병 생활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일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며칠이 지나 2023년 4월 2일, 일본의 신문사 스포니치 아넥스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지난 3월 28일 도내 병원에서 향년 71세의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인은 2020년 6월부터 투병한 직장암.기사 트위터

결국 본인의 인터뷰대로, 지난해 12월 11일 열린 「Ryuichi Sakamoto:Playing the Piano 2022」 피아노 솔로 콘서트가 마지막 공연이 됐다. 암투병 사카모토 류이치, "마지막 콘서트 될지도" 사망 후에는 일본에서도 소식이 알려진 후 주요 뉴스로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고, 한국에서도 주요 언론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다.

솔로 정규 앨범은 1월에 발매한 12가 마지막이 되었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일본 영화) 사운드트랙과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의 솔로 스튜디오 앨범 D-DAY의 9번 트랙 Snooze가 유작으로 세상에 나온다.

2023년 3월 29일 교도통신 보도에 의하면 「음악 제작도 어려울 정도로 기력·체력 모두 감쇠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편지를 보내는 것 이상의 발신이나 행동은 어렵다고 합니다.」라고 전했는데, 이 기사가 나올 시점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사망으로 동년 1월 세상을 떠난 타카하시 유키히로에 이어 YMO의 두 번째 사망자가 되었으며, 이제 YMO의 생존자는 팀 내 최고령 멤버인 호소노 하루오미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4. 음악 스타일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클로드 드뷔시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시에 많은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자서전에서는 한때는 진지하게 자신이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믿었을 정도였다.[34] 실제로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바흐의 곡으로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의 기악곡 여러 곳에 바흐와 드뷔시의 음악적 구조가 발견된다.

이 외에도 고전음악을 바탕으로 한 음악학도답게 많은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다양한 나라들의 민속음악에도 관심이 많고 자신의 음악에 접목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마지막 황제의 사운드트랙 제작 당시 의뢰를 받고 중국으로 날아가기 전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OST인 만큼 구할 수 있는 중국 음악의 음반을 모조리 구해서 공부하고 갔다고 자서전에서도 밝힌 바 있다. 한국의 민속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아주 오랫동안 교류하는 국악인들이 많이 있다.

재즈, 탱고, 보사노바, 영화음악을 비롯해 일렉트로니카와 월드뮤직[35] , 뉴에이지, 힙합까지 아우르는 음악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싫어하는 음악으론 헤비메탈, 비주얼계를 꼽았다. 헤비메탈에서 더 마니악한 데스메탈은 들어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며 비주얼계는 촌스럽다는 것이 이유. 젊은 시절에는 컨트리 뮤직, 하와이안 음악을 싫어했는데 나이를 먹어가고 하와이를 직접 방문해보면서 좋아졌다고 한다.

영화음악에서 대표곡이 많은데, 영화 'The Sheltering Sky'의 동명 테마곡 The Sheltering Sky, 영화 '철도원'의 테마곡 Popoya, 영화 '바벨' 중에 나오는 Bibo No Aozora[36]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많은 YMO 곡들의 실질적인 작곡가여서, 대표곡들은 YMO 시절부터 엄청나게 많다. YMO 시절 곡들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연주한 곡들의 느낌도 각별한데, 각각의 원곡과 피아노 편곡 중 하나씩만 알고 있기에는 대단히 아쉬울 것이다. 인기있는 필수적인 몇 곡만 들어보고 싶다면 Self-Portrait(페이지 상단의 곡), Technopolis, Tong Poo, Energy Flow, Tibetan Dance,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등. 아마도 그의 곡 중에 제목을 몰라도 어느 한 곡 정도는 들어봤다 싶을 것이다. 은근히 한국의 광고 음악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아는 곡도 있을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 있어했고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벌인 쪽은 전자음악, 환경음악 쪽이다. Async와 영화음악 중에서 베스트를 추려 3인조 실내악 편성으로 편곡한 1996이 있다. 솔로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경이로우면서 아름다운 앙상블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 솔로 연주는 BTTB나 Playing The piano가 유명하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5.2. EP

5.3. 사운드트랙

6. 필모그래피

7. 오토바이오그래피


GQ JAPAN의 전편집장 스즈키 마사후미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담이 자서전 형식으로 출판된 책이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은 작가 본인과 관계 소속사와 출판사의 첨삭을 거쳐 기획되는 형태인데, 오토바이오그래피는 인터뷰어가 추가되어 기획과 첨삭을 함께 하며 인터뷰어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인터뷰어 지승호가 신해철 등과 이런 형태의 작업을 해왔는데, 차이가 있다면 지승호와 신해철이 함께한 '쾌변독설'에서는 지승호의 존재가 드러나있고, 사카모토 류이치의 책은 스즈키 마사후미의 존재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지승호의 작업은 그래서 오토바이오그래피보다는 인터뷰집에 해당한다.)

이례적으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수 있을까'에서 스즈키 마사후미 본인의 후일담이 담긴 챕터가 마지막으로 실려있다. 이는 이 책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사실상 마지막 책이기 때문에, 그가 죽기 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대화를 하고 또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듣고 지켜본 타인, 인터뷰어이기 때문에, 그가 경험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작성 된 내용이다.

모두 출판사 신쵸의 기획으로 수록 내용 일부는 신쵸의 월간지에서 미리 공개됐고, 추가 내용이 더해져 단행본으로 나왔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이후 14년만에 두번째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수 있을까'가 출간됐다.

8.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



한국에 <Ryuichi Sakamoto Social Project, Korea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 가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2010년 12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실험 프로젝트 「skmtSocial Project 사카모토 소셜 프로젝트(통칭, #skmts)」가 본래 명칭이며, 여기에 Korea를 붙여, 한국 관객에게 보다 집중된 정보를 제공하고자 일부 팬이 자원해서 만든 정보 채널이다. 현재는 <itmusiccreative 잇뮤직크리에이티브>라는 곳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사카모토 류이치의 각종 소식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전달하고 있다. 오랜 팬이 운영하는 채널이며, 이것을 계기로 사카모토 류이치와는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파일:2011skmt.jpg

이들이 처음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월 9일 사카모토 류이치의 단독 콘서트 <Ryuichi Sakamoto|Playing the Piano - Korea 2011>가 계기였는데, 그 때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의 내한 일정을 공연 기획사 측에서 제대로 전달 하지 않아서, 팬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컸다. 이를 염려한 일부 팬들이 공연 기획사측과 협의하여 사카모토 류이치의 각종 일정 전달 받아 이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각종 SNS등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는 홍보 일정의 하나로 가수 윤상이 진행하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했었고, 이 날 방송에서 윤상은 직접 이들의 블로그를 언급하기도 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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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류이치 사카모토 트리오 내한 공연 <Ryuichi Sakamoto Trio Tour 2012|Japan & Korea> 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업무 일부에 참여한다.

파일:LIFELIFEposter.jpg

시간이 흐른 뒤 2018년 서울 회현동 Piknic 에서 열린 사카모토 류이치의 특별전 [RYUICHI SAKAMOTO: LIFE, LIFE] 에서 이들 프로모션에 함께 참여해줄것을 제안, 사전 준비 일정에 참여한다.

파일:piknic2023.jpg

사카모토 류이치의 사망 직후 출간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가 한국의 위즈덤하우스에서 한국어판으로 발간되었다. 본 책의 출간을 기념하여, 위즈덤하우스측에서 출간 기념 추모전을 기획했고, 이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전시공간 Piknic에 제안하여 성사되었다. 추모전은 2023년 7월 13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동안 진행됐다. 추모전 소식을 알리는 보도자료가 처음 공개된 당일, 위즈덤하우스와 류이치사카모토소셜코리아측에서 이 내용이 선공개되었다.

이렇게 입소문 난 추모전은 후반부로 가면서 관객이 증가. 추모전은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2잇뮤직크리에이티브가 운영하는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의 SNS 채널은 해당 링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9. 다른 아티스트와의 관계

10. 사건사고 및 비판

10.1. 과거 인성 논란

사카모토 류이치는 말년에 온화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YMO 등으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사카모토는 현재의 사카모토와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위화감이 느껴지는 인성 문제들을 몇몇 일으킨 바가 있다. 이러한 한 때의 모난 인성은 YMO가 해체하고 난 뒤부터 서서히 유해지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10.2. 오야마다 케이고 옹호 논란

2021년 9월 21일 본인과 오랫동안 교류했던 오야마다 케이고가 자신의 학교폭력 사실에 대해서 트위터로 장문으로 사과한 내용에 대해서 사카모토 류이치는 본인의 인스타그램으로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앞으로도 그의 음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발언했다가 비난하는 댓글을 여럿 받았다.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오야마다 케이고는 학창시절에 장애인 동급생을 학대하고, 거기서도 모자라 그 후 성인이 되어서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자신으로 인한 피해자를 무시하고, 대중 앞에 대놓고 자신의 악행을 무용담 늘어놓듯 하고, 나중에 그것이 자신한테 크게 불리해지고 나서야 사과한 사람인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그러한 사람을 옹호하는 발언은 크게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로부터 불과 얼마전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장 모리 요시로의 '여성 이사가 많아지면 회의가 오래걸린다'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성차별적인 발언이라며 트위터를 통해 강도 높은 비난을 하며 사퇴를 요구했던 사람이, 정작 그보다도 더 심한 오야마다의 논란에 대해서는 어줍잖은 쉴드를 치는 모습에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10.3. 유희열에 의한 표절 논란에 대한 입장

10.3.1. 개요

2022년 6월, 한 네티즌에 의해 가수 겸 작곡가 유희열이 소속사 안테나, 그리고 SK디앤디의 'episode'가 함께한 프로젝트 '생활음악'에서 발표한 곡 《아주 사적인 밤》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와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소식은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고, 곧바로 유희열은 안테나의 공식 SNS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사과문에서 유희열은 후속 조치를 마련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고, 그 며칠이 지나는 동안 또 다른 표절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2022년 6월 14일, 사카모토 류이치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SNS채널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을 통해 본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잇뮤직크리에이티브가 '유희열의 <생활음악>에 대한 입장문'을 게재한다.
유희열의 <생활음악>에 대한 입장문 (2022. 6. 14)
먼저 유희열 씨의 작품에 관련하여 진심 어린 메시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얼마 전, ‘누군가 당신의 ‘Aqua’라는 곡을 표절했다’고 한국의 한 유튜브 링크를 통해 제보 받았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와 우리 직원들은 즉시 두 곡의 ‘유사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적인 분석의 과정에서 볼 때 멜로디와 코드 진행은 표절이라는 논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저희는 종종 전 세계의 팬들로부터 유사한 제보와 클레임을 많이 받기 때문에 법적인 조치가 필요한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각 사례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검토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위와 같은 이유로 유희열 씨의 곡은 어떠한 표절에 대한 법적 조치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본 사안을 제보해 주신 팬 여러분과 이 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유희열 씨의 솔직한 의도에 감사드립니다. 두 곡의 유사성은 있지만 제 작품 ‘Aqua’를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법적 조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악곡에 대한 그의 큰 존경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많은 것을 배운 바흐나 드뷔시에게서 분명히 강한 영향을 받은 몇몇 곡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흐나 드뷔시와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오해는 말아주세요.

모든 창작물은 기존의 예술에 영향을 받습니다. (책임의 범위 안에서) 거기에 자신의 독창성을 5-10% 정도를 가미한다면 그것은 훌륭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것이 나의 오랜 생각입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만드는 모든 음악에서 독창성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예술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희열 씨와 팬분들의 아낌없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유희열 씨의 새 앨범에 행운을 기하며 그에게 최고를 기원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



저희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모두 유희열 씨의 새 앨범 발매와 성공을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길…
추가적인 사항이 있을 시에는 언제든 연락 부탁드립니다.

10.3.2. 정황

본 입장문은 사카모토 류이치 측에서 직접 발표한 공식 입장문이 아닌 개인적인 메시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한창 논란이 이어지던 끝에 유희열이 KBS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하차를 하고 방송가에서 사라지게 되면서, 해당 논란은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번 일에 대해 찜찜함을 버리지 못한 몇몇 언론사 관계자들이 화제성이 줄어든 후에도 잇뮤직크리에이티브의 관계자와 연락을 시도한 끝에 몇 가지 설명은 들을 수 있었으나 현재로써는 외부에 언급을 자제하길 요청하고 있다. 그 외 자세한 건 유희열 표절 논란 참조.

11. 여담



[1] 코로나 사태로 2019년도에 열릴 시상식이 2020년으로 미뤄졌다[2] 가정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였고, 사카모토 류이치의 연예계 활동에 대해서도 오히려 "내가 너 딴따라나 해라고 음악학교 보낸줄 알아?"라고 못마땅하게 여겨서 부자간 갈등을 일으켰고, 연예활동에서 성공한 이후로 축하받을 때에도 "저놈은 저놈이고, 저는 저입니다"라면서 여전히 나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후 발견된 일기에서는 오히려 아들의 탄생을 반기고 YMO의 일정을 세심하게 챙기는 등 아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음이 드러났고, 이를 안 류이치는 결국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3] 결혼전 성은 시타무라(下村)[4] 대학 시절 결혼했다 이혼한 첫째 부인과의 사이 소생[5] 둘째 부인 야노 아키코가 데려온 양아들[6] 야노 아키코 사이 소생[7] 매니저 소라 노리카와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 그 후에 야노 아키코와 별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2006년에 이혼하였다. 그 후 정식 배우자는 없지만, 소라 네오가 태어날 때부터 소라 노리카와 동거하며 지냈다.[8] 동급생으로 시오자키 야스히사 전 관방장관이 있다.[9] 제31회 그래미 어워드 "마지막 황제"로 수상[10] 일본에서는 공문서를 포함하여 일본인의 씨명을 로마자로 표기할때는 서양식인 이름-씨 순서로 사용하는 것이 공식이었다. 2019년에서야 이 원칙이 폐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적으로는 자신들의 씨와 이름명을 이름-씨 순으로 표기하는 예가 여전히 많다.[11] 비단 이런 문제는 일반인들만이 아닌 일본문화에 친숙한 사람들조차도 일본어를 잘 모르던 시절 패키지 등에 이름이 영어로 쓰여진 것을 보고 그 순서대로 이름을 익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유명한 게임음악가 코시로 유조같은 경우나 ZARD처럼 이름이 아닌 유닛명으로 활동하는 경우 그쪽에 큰 관심이 없을 경우에는 대체로 이름-성 순서로 기억해버리기 쉽다.[12] 도쿄도립 신주쿠 고등학교 재학 당시 고등학교 전공투를 결성했고, 무려 바리케이트 봉쇄를 단행한 바 있다.[13] 사카모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을때, 배철수는 “같은 연배인데도 너무 다른 환경에서 풍족하게 자란 그가 부럽다”고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 시기에 대한민국은 후진국에다 독재국가였던 반면, 일본은 이제 막 선진국으로 진입할 시기에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으니, 그러한 감정은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1960년대 일본인들은 당대 한국인보다 무려 5배나 잘살았다.[14] 앨범 풀네임이 'Thousand Knives Of Ryuichi Sakamoto'라서,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이 앨범의 제목을 'Thousand Knives of' 까지만 표기하는 OME스런 경우도 있다. 앨범의 타이틀 곡 첫머리에서 사카모토가 읊는 음성변조된 한시는 마오쩌둥정강산 투쟁을 두고 지은 시 《水調歌頭·重上井岡山》인데, 이후 싱글컷되면서 시 낭독은 빠졌다. 이 외에도 마지막 트랙 The End of Asia에서는 동방홍의 선율이 어레인지되어 활용되는 등, 앨범 전반에 걸쳐 당시 사카모토가 품고 있던 중국 문화에 관한 관심이 녹아있다.[15] J-Pop을 비롯한 영미권 팝음악 전반.[16] 1983년 12월 '산개' (YMO는 해산을 스스로 이렇게 불렀다) 라이브 때의 모습이다.[17] 전자음악 관련해서 그룹 내 영향력이 컸기 때문도 있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얼굴이 남자답게 잘생기기로 유명해서 특히나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자주 시달렸다고 한다.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던 젊은 시절의 사카모토는 이를 매우 힘들어했다.[18] 이상의 개인력은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서 참고하였다. 흥미로운 내용이 더 많이 담겨있으니 천재의 삶을 알고 싶다면 자세한 것은 자서전을 참고할 것.[19] 이 곡은 YMO의 다른 멤버인 타카하시 유키히로가 작곡하였지, 사카모토의 곡이 아니다.[20] 사카모토 본인 말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에 대해 잘 모르고 딱히 팔고 싶은 생각이 크질 않아서 생각없이 라이선스 비용을 크게 불렀더니 그냥 포기했더란 말이 있다. 곡이 들어갈 뻔했던 MJ 앨범이 그 Thriller였으니 이후 그냥 제발 넣어달라고 할 걸 많이 후회했다고 농담삼아 한 이야기. 다른 썰로는 앨범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가 앨범이 너무 댄스곡 투성이라 완성도를 위해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21] 마이클 잭슨의 초기 데모는 Thriller가 발매된 지 40년이 지나서야 오래 전부터 돈독에 오른 소니 뮤직에 의해 공개되었다. Behind the Mask (Mike's Mix)[22] OST의 하위개념으로, 영화나 TV 드라마 등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창작 배경음악을 말한다.[23] 정작 영화음악은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서 프로듀서 제레미 토머스의 추천으로 시민케인을 보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레이션이나 멜로디를 참고한 게 아니라 어떤 부분에 음악이 들어가고 어떤 타이밍에 사라지는가, 즉 영화음악과 영상과의 관계를 유심히 보았다고.[24] Croatian Rhapsody로 유명한 막심 므라비차가 이 곡을 커버한 것도 매우 유명하다. 그 외에도 로튼 그래프티, 우타다 히카루, FACT(밴드) 등의 아티스트들이 커버를 하기도 했다.[25] 축약하자면, 어느 강제징용 된 조선인 군속이 소속 부대에 수감되어있던 연합군 포로들 중 한 명과 눈이 맞아서 사고를 쳤다가 걸려서 처형(할복)당하는 부분. '군인'과 '포로'라는 단어에서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듯이 남성들끼리 일어난 일이다. 애초에 영화 전체가 지금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발표된 1980년대에는 문제가 안 될라야 안 될 수가 없는 동성애를 영화 내에서 중요한 장치로 매우 진하게 깔고 있는데다가, 전술한 '조선인이 부당하게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전개' + '조선인이 동성애를 저지르는 전개'에 당시는 일본문화가 개방될 수 없던 상황이라는 압도적인 쓰리 콤보 때문에 당연히 한국에서 정발이 될 리가 없었다.[26] 음악을 맡기려는 감독에게 무슨 호기였는지 배역을 맡겨주면 한다고 했다고. 나중에 연기도 너무 어렵고 곡도 잘 안나와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27] 한국어 더빙판에서는 이정구가 이 배역을 맡음.[28] 이 때 가이낙스에서 보내준 콘티를 보고 프레임 단위까지 타이밍을 맞춰서 OST를 썼는데, 정작 완성된 영화는 콘티와는 상당히 다르게 편집되어서 장면과 음악이 전혀 싱크가 맞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29] 다만 담배가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데 공연 영상을 보면 연주를 하며 담배를 피우거나, 인트로 영상에서도 피우는 모습이 보이는것을 보아 실제로 흡연자인 모양이다. 인터넷에도 흡연 장면이 꽤 있다.[30] 같은 YMO의 멤버였던 타카하시 유키히로도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NHK 홀에서 9월에 라이브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한 달 정도 지난 7월 12일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뇌종양 투병 사실을 공개하면서 공연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31] picnic 사카모토 류이치 전시회[32] 본인의 인터뷰[33] 관련 인터뷰[34] 2008년도 인터뷰에서 밝히길 14살 즈음에 드뷔시의 환생임을 반쯤 믿으며 그의 싸인을 연습해보는 정신이 좀 이상한 아이였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거칠고 반항적이었던 청년기적 인성과 여성편력도 닮았으며, 말년에 성품이 온화해진 것도 비슷하다.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결말이나 끝내 그도 드뷔시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5] 특히, 대학시절부터 민속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고 학위를 받은만큼 전 세계의 민속 음악들과 전자음악을 결합한 실험적인 음악들이 많다. 인터뷰 때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은 뉴욕 바로 옆에 있는 것 같고, 일본 팝 음악은 마치 아랍 억양처럼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듯, 두 가지 이상의 문화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의 국악에도 엄청 관심이 많다. 윤상의 음악에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음악적인 다양한 시도가 많다.[36] 영화 속에 포함된 건 피아노 & 바이올린 어레인지 버젼. 원곡은 힙합 느낌이고 스스로 노래도 불렀다. 또한 Trey Songz가 부른 Can't Be Friends의 샘플 원곡이기도 하다.[37] 지구촌에 매설된 지뢰들을 제거해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하지 말자는 취지의 기획앨범이다. 참여진만 해도 그 면면이 화려한데, 일본 측 아티스트들만 해도 UA, 테루(GLAY), CHARA, 사쿠라이 카즈토시, SUGIZO 등이 참여하는 등 일본음악 매니아들이 들으면 군침을 흘릴 구성. 해외 참여진도 브라이언 이노, 한국의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등이 참여하는 등 그 면면이 화려하다.[38]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담당한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영화다.[39] 2022년에 진행 된 온라인 콘서트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를 영화화 시킨 작품[40] '해리 호소노와 옐로 매직 밴드'나 '호소노 하루오미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등의 명의를 썼다.[41] 사카모토 류이치의 Self-Portrait 역시 다카하시의 드럼.[42]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사망 직전 부쩍 마른 모습, 그리고 그의 요양 생활을 함께 해온 아내 키요미 다카하시의 사진이 올라와있다.[43] 관련기사(일문)사카모토 류이치 사거, 젊은 시절은 운전수를 때리거나 차기도 해 "죄송합니다"[44] 2004년 출연했을때 좌중을 압도하는 화려한 입담을 선보였다. 해당 방송에서 MC 스나이퍼와 콜라보한 undercooled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45] 원래는 m-flo의 Verbal과 작업을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46] 한국 공연시 특별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유희열이 피아노 연주를 대신하여 지상파 방송에서 공연한 버젼도 있다. 유희열도 사카모토를 매우 좋아하기에 이뤄진 퍼포먼스라고 함. 실제로 내한 공연에 유희열을 포함한 여러 아티스트가 다녀갔다.[47] 일본이나 영미권에서는 주로 40~50대의 중년 남성들이 그의 팬인데, 한국에 와서 봤더니 10대부터 30대에 이르는 젊은 사람들이 싸인회에 와 줄 서있는 걸 보고 여러 가지 의미로 감격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90년대 말에 개방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중년들은 이 사람을 알기가 어렵다.[48] 본인이 근황올림픽에서 상황을 밝혔는데, 친분있던 작곡가가 시상식 당일 오전에 부탁받아 참석했는데, 당시 대본은 물론이고 어떠한 가이드도 없는바람에 수상소감에서 축하합니다라고 짧게 말했고, 본인이 누군지는 밝혀야 할꺼같아서 가수겸 탤런트 한사랑입니다로 말했는데 무명 연예인 홍보를 하러 내보냈다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49] 실제로 보고 충격받을 사람들을 위해 내용을 요약하자면 여장하고 아카시야 산마를 덮치는 그런 내용이다.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나 방송에서 딜리버리 헬스(출장 성매매)로 개그를 치는 모습은 한국인이 보기엔 꽤 충격적일 것이다.[50] 어쩌면 이러한 관심 때문에 하츠네 미쿠 오케스트라라는 YMO 커버 앨범도 정식으로 허가를 내준 것으로 보인다.[51] 참고로 작사는 유키코의 같은 소속사 선배 마츠다 세이코(Seiko 명의로 참여). 화려한 작곡진과 절정에 이른 유키코의 인기로 커리어 처음으로 오리콘 1위를 차지하나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극단적인 선택을 해 동시에 마지막 1위 곡이기도 하다.[52] 참고로 사카모토 류이치 역시 나카모리 아키나의 Everlasting Love, NOT CRAZY TO ME 등의 악곡을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