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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02:03

마자파힛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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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파힛 제국
ꦤꦒꦫꦶꦏꦫꦗꦤ꧀ꦩꦗꦥꦲꦶꦠ꧀
ᬧ᭄ᬭᬚᬫᬚᬧᬳᬶᬢ᭄
파일:마자파힛 제국 국기.png 파일:Surya_Majapahit_Gold.svg
국기[1] 국장[2]
파일:Majapahit_Empire.svg
파일:Majapahit_Expansion.gif
강역의 변화를 나타낸 지도. 제국의 최대 판도는 15세기였다.
1293년 ~ 1527년
위치 자바섬,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3]
수도 마자파힛[4](1293~1478)
다하[5](1478~1517)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만달라 체제
인구 3,500,000명(추정)
국가 원수 마하라자[6]
언어 중세 자바어(공용어)
산스크리트어(제례언어)
민족 자바인(주류 민족)
다양한 동남아시아 토착민
종교 힌두교, 불교, 다양한 지역별 토착 신앙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293년 건국
1527년 멸망
통화 물물교환, , 케펭[7]
면적 1,200,000km² (15세기)
성립 이전 싱하사리 왕국
멸망 이후 드막 술탄국
현재 국가
[[인도네시아|]][[틀:국기|]][[틀:국기|]]

[[말레이시아|]][[틀:국기|]][[틀:국기|]]

[[필리핀|]][[틀:국기|]][[틀:국기|]]

[[싱가포르|]][[틀:국기|]][[틀:국기|]]

[[브루나이|]][[틀:국기|]][[틀:국기|]]

[[동티모르|]][[틀:국기|]][[틀:국기|]]
언어별 명칭
자바어 ꦏꦫꦠꦺꦴꦤ꧀ꦩꦗꦥꦲꦶꦠ꧀(Karaton Mojopahit), ꦗꦮ(Jawa)
발리어 ᬧ᭄ᬭᬚᬫᬚᬧᬳᬶᬢ᭄
인도네시아어 Kemaharajaan Majapahit
산스크리트어 विल्व तिक्त (Wilwatikta)
한자 滿者伯夷 (만자백이) | 爪哇 (조와)
영어 Majapahit Empire
한글 마자파힛 제국 | 마자파히트 제국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건국 과정2.3. 전성기2.4. 레그렉 전쟁
2.4.1. 배경2.4.2. 결과
2.5. 명나라의 개입2.6. 크르타부미 반란2.7. 드막 술탄국과의 경쟁2.8. 제국의 소멸
3. 사회와 문화
3.1. 산스크리트화
4. 화기: 쳇방5. 통치 기구
5.1. 관료와 행정 단위5.2. 본토 행정5.3. 속령
6. 법률: 《쿠타라마나와》7. 군주 목록8.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1293년부터 1527년까지 현재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영토를 지배한 중세 후반기 동남아시아의 해상 대제국이었다.

본디 인도네시아 일대는 섬이 많아 일찍이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등장한 곳이 아니었다. 4세기 경에 들어서야 인도의 영향을 받아 힌두-불교계 소왕국들이 탄생했고, 이후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 일대에는 차례로 타루마 왕국, 순다 왕국, 마타람 왕국, 크디리 왕국, 싱하사리 왕국 등 여러 왕국들이 등장해 인근 수마트라 섬과 패권을 겨뤘다. 그러던 중 싱하사리 왕국이 후-크디리 왕국에 의해 멸망하자, 싱하사리 왕국의 신하이자 국왕의 사위였던 '라덴 위자야'가 원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후-크디리 왕국을 무너뜨린 다음 원나라의 뒤통수를 치고 자바 섬을 장악하니 이것이 곧 마자파힛 제국의 시작이었다.

마자파힛 제국은 명재상 가자 마다와 명군 하얌 우룩의 시대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1300년대 후반 마자파힛 제국은 자바 섬을 넘어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보르네오, 술라웨시, 말루쿠, 서뉴기니, 심지어 민다나오까지 정복한 해양 대제국으로 뻗어나갔다. 중국-동남아-인도-아라비아-튀르크와 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엄청난 번영을 누렸던 것이다.

하지만 마자파힛 제국도 명군이자 정복 군주였던 하얌 우룩 왕 사후 점차 쇠락했다. 자바 극동부의 주권을 두고 '레그렉 전쟁'이 터지면서 마자파힛의 국력은 수직하락했고, 명나라 제3대 성조 영락제의 최측근 환관이었던 정화가 마자파힛 제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믈라카 술탄국과 화교 무슬림들의 독립을 지원하면서 국력에 치명타를 입었다. 특히 정화의 대원정으로 이슬람의 동남아시아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힌두교를 믿고 있었던 마자파힛 제국의 힘은 날로 약해지면서,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제국의 내전은 끊이지 않았다. 1468년에 터진 대귀족 크르타부미의 반란으로 나라가 반토막이 났고, 어찌어찌 1478년, 제국을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자파힛 제국의 힘은 이전과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약해졌다. 크르타부미 반란의 여파조차 제대로 회복한 것이 아니어서, 경쟁에서 밀려난 크르타부미의 아들 라덴 파타가 자바 중부의 드막 지방에 독자적인 술탄국을 세우고 마자파힛 제국을 압박하면서 나라는 더욱 빠르게 망해갔다. 마자파힛 제국은 새롭게 유입된 포르투갈의 힘을 빌려 드막 술탄국을 견제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마자파힛 제국은 1527년 최후의 거점이 드막 술탄국에게 함락당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마자파힛 영주의 후계자들은 동쪽으로 달아나 1908년 시점까지 자바섬 동쪽의 발리섬을 지배했으며,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타지역과는 달리 이슬람화되지 않고, 힌두교 문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전성기 때의 위엄이 대단했기 때문에 마타람 술탄국, 파장 술탄국, 드막 술탄국 등 여러 이슬람계 술탄국들도 자신들이 마자파힛 제국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내세웠을 정도였으며, 훗날 네덜란드에 맞서 활동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들도 마자파힛 제국을 롤모델로 추앙했다. 또한 그 영향으로 현대 인도네시아의 국기와 표어, 국장에서도 마자파힛 제국의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마자파힛은 스리위자야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는 영광스러운 옛 역사를 상징하고 있으며, 당연히 인도네시아 역사 교육 과정에서 중요하게 가르친다.

2. 역사

2.1. 배경

인도네시아 지방은 수없이 많은 열도와 군도로 이루어진 지형이었기에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일찍 등장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국가의 모습을 이루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고대에 이미 문명을 이룩한 인도에서 온 상인들의 영향으로 점차 초기적인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드디어 인도네시아 지방에도 인도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아 힌두교불교를 신봉하는 소왕국들이 하나하나 세워지기 시작했다.

비옥한 농토와 풍요로운 기후로 인도네시아의 알짜배기 땅이나 다름없었던 자바섬에도 여러 소왕국들이 솟아났다. 그중 제일 먼저 등장한 왕국은 300년대 중후반에 세워진 타루마 왕국이었다. 초기적인 국가 형태를 이룩한 타루마 왕국은 7세기 경 약화되더니 순다 왕국갈루 왕국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은 원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나라였기에 왕들이 서로의 왕위를 겸하거나 싸우는 등 투닥거리면서 살았는데, 그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전설적인 영웅이었던 산자야였다. 산자야는 순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 순다의 왕위를 물려받은 다음, 갈루 왕국마저도 통합한 이후 세력을 규합한 뒤 멀리 자바 섬 중부로 이주해 마타람 왕국을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마타람 왕국 내부에는 2개의 세력이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은 인도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를 믿는 세력과 불교를 믿는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중 시바 신을 믿는 힌두계는 초대 국왕 산자야의 가문인 산자야 왕가였고, 불교계는 사일렌드라 왕가[8]를 중심으로 뭉쳤다. 마타람의 개국 시조였던 영웅 산자야가 승하하고 왕위를 물려받은 파낭카란 왕은 사일렌드라 왕가 출신이었다.[9] 이후 사일렌드라 왕가는 쭉 마타람의 왕위를 이어갔는데, 전성기 시절에는 자바 섬의 힘을 등에 업고 저 멀리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까지 뻗은 스리위자야의 왕을 겸하며 연합 왕국을 구성해[10] 찬란한 동남아시아 문화의 꽃을 피우기까지 했다. 그 유명한 보로부두르프람바난 사원 등이 지어진 것도 이 시대였다.[11]

하지만 838년 사일렌드라 왕가 출신의 사마라퉁가 왕이 승하하자 마타람-스리위자야 왕국은 바로 무너졌다. 사마라퉁가 왕은 자바 섬과 힌두교도들을 잠재우기 위해 산자야 왕가 출신의 부마였던 라카이 피카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했는데, 이미 사일렌드라 왕가가 뿌리깊이 자리잡은 스리위자야 왕국 측에서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일렌드라 왕가는 스리위자야로 완전히 넘어가 자바 섬의 산자야 왕가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자바 섬에 남은 라카이 피카탄과 그 후계자들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나름 평화를 구가하다가, 929년 화산 폭발과 스리위자야 왕국의 끝없는 침략 및 역병 등을 피해 마타람 왕국의 중심지를 자바 섬 동부로 이전했다. 이 시대 이후의 자바 왕가, 즉 산자야 왕가를 이샤나 왕가라고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마타람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국과 200년 동안 투닥거리며 싸우다가[12], 결국 스리위자야 왕국의 지원을 받은 영주 우라와리가 1016년 마타람 왕국의 수도였던 와투갈루를 불지르고, 다르마왕사 국왕을 죽이면서 몰락했다. 이 참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르마왕사의 조카이자 발리의 왕자인 아이를랑가[13]가 겨우겨우 마타람 왕국의 잔존 세력을 규합해 카후리판 왕국을 세웠다. 아이를랑가는 1045년 카후리판 왕국을 동쪽은 장갈라 왕국, 서쪽은 크디리 왕국으로 쪼개고 승려로 출가했다. 이후 크디리 왕국은 동쪽의 장갈라 왕국을 병합하고 자바 중동부를 차지하는 주요 세력으로 재부상했는데, 크디리 왕국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도중 종교계의 지원을 받은 영주 켄 아록이 1222년 크디리 왕국을 몰아내고 싱하사리 왕국을 세웠다. 이 싱하사리 왕국의 왕가인 라자사 왕가가 곧 훗날 마자파힛 황가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2.2. 건국 과정

1222년에 건국된 싱하사리 왕국은 다른 자바계 왕조들에 비해 상당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특히 수백 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수마트라섬의 왕조들과의 국력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크르타나가라(크르타느가라) 왕 치하에서는 수마트라를 침공하는 말라유 원정을 펼쳐 수마트라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다르마스라야 왕국(스리위자야 왕국의 후계 세력)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놓기까지 했다. 팽팽하게 이어진 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의 세력 경쟁에서 무게추를 압도적으로 기울여놓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1284년에는 발리를 정벌해 발리의 여왕을 자바로 압송했으며, 순다 왕국, 보르네오, 말루쿠 제도 등 수많은 지역에 원정대를 보내거나 사절을 파견했다.[14]

싱하사리 왕국은 명군이었던 크르타나가라의 통치하에서 인도네시아 군도 각지로 팽창 정책을 펼치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북쪽에서는 세계 최강국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이 보낸 몽골군이 무서운 속도로 기세를 올리며 아시아를 무자비하게 정복하고 있을 때였다. 쿠빌라이 칸은 싱하사리 왕국도 원나라의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기 위해 맹기(孟琪)라는 관리를 보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크르타나가라 왕은 쿠빌라이를 모욕하기 위해 맹기의 얼굴을 달군 쇠로 지지고, 도둑에게 내리는 형벌처럼 귀를 자른 후 쫓아내 버렸다. 격노한 쿠빌라이 칸은 대부분 남송인으로 구성된 30,000명의 병사와 1,000척의 함선, 1년 치의 보급품을 준비하며 거대한 규모의 대싱하사리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1291년, 싱하사리 왕국의 크디리 영주 자야캇왕[15]이 크르타나가라에게 반란을 일으켜 크디리 왕국[16]을 세웠다. 이에 크르타나가라의 사위였던[17] 라덴 위자야가 북쪽에서 쳐들어온 크디리 군대를 격파했으나 남쪽 방면에서 기습해 온 자야캇왕이 무방비 상태였던 수도 쿠타라자에 입성하면서 라덴 위자야의 승리는 무위로 돌아갔다. 크르타나가라 왕은 자야캇왕에게 살해당했고, 자야캇왕은 싱하사리 귀족들의 불만을 억누른 채로 왕좌에 올랐다.

자야캇왕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목숨이 간당간당해진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 섬 동부 수므늡 지역의 지배자였던 아랴 위라라자(Arya Wiraraja) 공의 도움을 받아 마두라 섬으로 겨우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목재 자원이 풍부했던 자바 동부의 타릭 지역을 지배하게 된 라덴 위자야는 숲을 개간하고 도시를 세웠는데, 지역의 '마자'라는 과일이 쓴 맛을 냈다고 해서 이름을 '쓴 마자', 즉 마자파힛이라 짓게 되었다. 바로 이곳이 훗날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강대국이 되는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 즉 현대의 트로울란(Trowulan)이었다.

파일:Fleet_of_Kublai_Khan.jpg
인도네시아 열도를 지나는 쿠빌라이 칸의 대함대.

이후 자야캇왕은 라덴 위자야를 사면했고, 라덴 위자야는 일시적으로나마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척을 했다. 한편 당대 최강국이었던 원나라는 일개 동남아시아의 국가가 왕조 교체가 되든 말든 착실히 자바 원정을 준비했다. 한•몽 혼성의 군대 20,000명과 1,0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취안저우를 출발한 원나라 함대는 베트남과 참파의 해안을 따라 무서운 기세로 남진해오면서 말레이 반도를 지났다. 여러 지역의 군주들은 몽골 군대의 위세에 겁을 먹어 조공을 바치고 복속했으며, 몽골군은 다루가치들을 남기며 마침내 멀리 떨어져 있는 자바 섬까지 근접했다. 자야캇왕 왕에게 도전했으나 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던 라덴 위자야가 몽골 해군의 접근 소식을 들은 것이 이때였다. 복속하는 것을 대가로 몽골 제국군과 동맹을 맺은 라덴 위자야는 자야캇왕 왕을 쳐부수기 위해 군세를 모으고 몽골군에게 자바의 지도를 넘기는 등 적극 협조했다.

격전의 날에 라덴 위자야군을 선제공격하려던 자야캇왕 왕의 크디리 군대는 강력한 몽골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가하면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몽골-라덴 위자야 연합군은 다하 전투에서 30,000명의 군세로 100,000명에 달하던 자야캇왕 왕의 대군을 분쇄했고, 2,000명이 훨씬 넘는 수를 사살하며 익사시켰다. 자야캇왕 왕은 자신의 궁전으로 도망쳤으나 몽골군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승리를 거두자 라덴 위자야는 조공을 준비하겠다는 명목으로 마자파힛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원나라 장군 시비와 원나라 군대에 복무했던 위구르인 장군 예케 메세는 라덴 위자야가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했으나 유독 한족 장군이었던 고흥(高興)만은 이에 반대하고 다른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이 경고는 사실이 되었다.

두 명의 장군이 이끄는 200명의 최정예 병사가 라덴 위자야의 초청에 따라 조공을 받기 위해 비무장 상태로 마자파힛으로 왔다.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라덴 위자야는 몽골의 뒤통수를 치고 호송대를 공격해 무찔렀으며, 나아가 기습 공격으로 몽골군 본대마저 패퇴시켰다. 정예 군인이 3,000명 이상 숨진 사건이었기에 원나라는 극도로 분노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결국 군인과 전리품을 수습해 퇴각했다. 원나라 군대도, 싱하사리 왕국도 사라지자 라덴 위자야는 이 권력 공백을 틈타 자바에서 세력을 넓혀 1293년 마자파힛을 수도로 하는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마자파힛 제국이 되는 것이다.

2.3. 전성기

라덴 위자야는 1293년 11월 10일 마자파힛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자바의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하자마자 민심을 잠재울 목적으로 싱하사리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크르타나가라의 딸 4명과 모두 혼례를 치렀고, 수마트라의 말레이계 왕국이었던 다르마스라야와도 결혼동맹을 맺어 정치적인 안정을 꾀했다. 다만 라덴 위자야는 즉위 후에도 딱히 평화롭게 살지는 못했는데, 그가 가장 신임하던 최측근 3명이 합심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나니 사실은 재상직을 맡고 있었던 마하파티 할라유다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진상이 드러나면서 2차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라덴 위자야는 1309년에 세상을 떠났다.

라덴 위자야 국왕이 붕어하자 그와 다르마스라야 왕국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자야나가라(자야느가라)[18]가 마자파힛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자야나가라의 치세는 부왕 라덴 위자야의 치세보다도 더 혹독했는데, 온갖 종류의 반란들이 나라 곳곳에서 터져나왔던 탓이 컸다. 심지어 1319년에 터진 쿠티족의 반란때는 수도 마자파힛과 궁궐을 반란군들에게 빼앗기고 총신인 가자 마다와 호위병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도망쳐나오는 치욕을 당할 정도였다. 참고로 능력이 넘치는 신하 그 자체였던 가자 마다는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왕을 작은 마을에 숨겨놓은 다음, 수도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보고 귀족들이 반란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동원해 반란군들을 깨부쉈다. 가자 마다 덕에 수도를 되찾은 자야나가라는 그에게 감사의 뜻으로 높은 관직을 수여했다.

사실 자야나가라가 이렇게 반란에 시달리고 평이 안좋은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자야나가라는 잔혹한 인물이었고 특히 제 이복누이에게 손을 대는 등 사회적으로 욕을 처먹을만한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 이복남매 간의 근친상간을 극도로 경계하던 자바 원로회의에서는 당연히 뒤집어졌지만 자야나가라는 이마저도 무시하고 일을 벌였다고 한다. 이복누이 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아내와 딸들에게도 손을 대서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자야나가라는 1328년 주치의였던 탄카에게 살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왕이 탄카의 아내를 성적으로 학대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죽였다고 한다. 이후 가자 마다가 암살자인 탄카를 즉결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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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의 전성기 시절 복원 모형도.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이라 현재는 일부 벽돌탑을 제외하면 남은 것이 없다.

왕이 죽어버렸으니 원래는 왕의 계모이자 왕실에서 가장 항렬이 높은 가야트리 라자파트니가 섭정을 맡아야 했지만, 그녀가 이미 불계에 출가해버렸기에 그녀 대신 그녀의 딸인 기타르자가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녀의 왕명 풀네임은 '트리부완노퉁가데위 자야위슈누와르다니'였다. 어쨌든 기타르자 여왕은 1336년에 선왕의 총신이자 최고로 유능한 신하였던 가자 마다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가자 마다는 재상직에 임명되자마자 대외적으로 뻗어나갈 것을 천명했다. 그는 사방으로 함대를 보내는가 한편 1342년에는 직접 발리섬을 공격해 1년 만에 수도 베둘루를 함락시켰다. 발리 왕을 사로잡아 죽인 가자 마다는 원정대를 보좌한 장군이었던 아리아 다마르의 형제들에게 발리의 지배권을 나누어주고 속국으로 삼았다. 기타르자는 가자 마다의 충실한 보좌를 받으면서 1350년까지 재위하다가, 그녀의 모후가 사망하자 미련없이 아들인 하얌 우룩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마자파힛 제국은 제4대 하얌 우룩 왕의 재위기에 황금기를 맞았다. 재상 가자 마다가 총지휘하고, 제독 음푸 날라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 원정으로 마자파힛 세력은 기존의 자바 섬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술라웨시섬, 술루 제도,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를 비롯, 뉴기니섬의 서해안 지역까지 이르며 그 영토가 가히 현대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북쪽으로는 저 멀리 필리핀, 서쪽으로는 수마트라섬의 끝자락, 동쪽으로는 뉴기니섬 서쪽 일부까지 장악하면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해상 대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14세기 황금기에 마자파힛 제국은 중국-동남아-인도-아라비아-튀르크와 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마자파힛의 궁정어인 자바어로 수많은 시와 연대기가 쓰였으며, 자바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막대한 양의 토기, 두상, 반신상, 부조로도 당시 마자파힛의 부를 가늠할 수 있다. 번영 속에서 문화 예술도 꽃피웠는데, 《판지 설화》 등을 테마로 여러 장의 화려한 그림을 연속적으로 교체하며 설명을 곁들이는 와양 베베르(wayang beber) 극은 마자파힛 시대에 정립되었으며,[19] 가믈란 음악, 각종 와양 극, 자바 무용 양식 역시 상당 부분 마자파힛 시대에 그 원형을 두고 있다.[20]

2.4. 레그렉 전쟁

2.4.1. 배경

마자파힛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하얌 우룩 왕은 1389년에 붕어했다. 하얌 우룩 왕이 사망한 후부터 마자파힛 제국은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하얌 우룩의 사후, 15세기 초 자바 극동부의 주권을 놓고 벌어진 레그렉 전쟁(Perang Paregreg, 1404~1406)은 광대한 제국에 내재되어 있었던 고질적인 분열 문제를 드러냈다.

하얌 우룩 시대에 위라부미 지방을 포함한 자바 극동부는 이미 웡크르 공 위자야라자사(Wijayarajasa, Bhre Wengker)가 마자파힛 제국 산하의 반독립적인 군주로 지배하고 있었다.[21] 이 세력을 마자파힛의 동부 황실, 또는 동마자파힛이라고 한다. 위자야라자사는 초대 국왕이었던 라덴 위자야의 막내딸 라자데위 공주와 결혼하여 황실의 일원이 된 크샤트리아였고, 하얌 우룩 시대에는 황실의 큰어른으로 동부에서 나름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위자야라자사는 마자파힛의 중앙정부에 따르기는 했지만, 마자파힛 제국의 제위에 대한 야심도 어느 정도 있었던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아내였던 라자데위 공주 역시 최고위급의 황족으로 권세를 누렸으며, 하얌 우룩 치세에는 황실 7인회('삽타프라부')의 일원일 정도로 나름 권력도 있었다.

하얌 우룩 사후, 마자파힛 제국의 정통 왕위는 하얌 우룩의 조카였던 위크라마와르다나에게 넘어갔다. 한편 동마자파힛에서 위자야라자사가 1398년에 사망하자 위자야라자사의 손녀사위이자 양자였던 위라부미 공(Bhre Wirabhumi)[22]이 위자야라자사의 동부 세력권을 계승했다. 당시 위라부미 공은 라슴 공작 인두데위[23]의 딸 나가라와르다니(Nagarawardhani)[24]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런데 위자야라자사 치세 말부터 차기 라슴 공위를 두고 서마자파힛(중앙)과 동마자파힛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동마자파힛은 인두데위의 딸 나가라와르다니를 차기 라슴 공작으로 밀고 있었고, 서마자파힛의 제5대 왕 위크라마와르다나는 자신의 부인(황후)이었던 쿠수마와르다니(Kusumawardhani)에게 라슴 공작위를 주려고 했다. 즉 둘 모두 나름의 명분은 있었다.

문제는 위크라마와르다나 왕이 밀고 있었던 황후 쿠수마와르다니가 일찍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후 1390년대 말 라슴 여공작 인두데위가 죽자 난처해진 위크라마와르다나 왕은 제3의 인물인 며느리, 즉 자신의 아들이었던 투마펠 공의 부인을 라슴 여공작으로 임명했다. 동마자파힛의 위라부미 공이 보기에는 이는 동마자파힛을 무시한 처사였고, 1402년 무렵 이 문제 등으로 위라부미 공은 위크라마와르다나 왕과 언쟁을 벌였으며, 결과적으로 양측의 사이는 크게 나빠졌다. 1403년, 급기야 위라부미 공은 독자적으로 군비를 증강하며 중국 세력에 우호적으로 접근하는 동시에 위크라마와르다나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결국 1404년 마자파힛 황실과 동마자파힛 간에 내전이 터지니 이를 '레그렉 전쟁'이라고 부른다.

2.4.2. 결과

위크라마와르다나가 이끄는 서마자파힛의 중앙군대와 위라부미 공이 이끄는 동마자파힛 군대는 격렬한 내전을 벌였다. 여러 전투에서 서마자파힛과 동마자파힛 모두 승리와 패배를 경험하며 2년 동안 벌어진 레그렉 전쟁은 왕자 투마펠 공의 활약으로 마침내 서마자파힛의 승리로 끝났다. 레그렉 전쟁을 기록한 역사서《파라라톤》에 따르면 전쟁 종반 투마펠 공이 이끄는 중앙군이 동마자파힛의 궁전을 점령했고, 궁전을 버린 후 도주한 위라부미 공은 라덴 가자(Raden Gajah)에게 붙들려 참살되었다고 한다.

2년에 걸친 전란이 끝나고, 마자파힛 제국은 재통일되었다. 그러나 레그렉 전쟁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단순한 지방이나 속령의 반란이 아니라, 중앙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한 권위가 있었던 동마자파힛이 중앙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분열로 인해 중앙 정부의 권위는 상당히 실추되었고, 광대한 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방 귀족들이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독립할 기회를 활발히 노리기 시작했으며, 외곽 속령들도 이탈할 조짐을 보였다. 그야말로 마자파힛 왕가의 권위를 땅바닥까지 추락시킨 엄청난 내상을 안겼던 것이다.

제5대 위크라마와르다나 시대까지만 해도 마자파힛 제국은 여전히 싱가포르, 파가루융(수마트라 서부) 등 외곽 지역으로 원정을 벌였고, 승리하거나(싱가포르)[25] 패배하기도 했지만(파가루융)[26], 결과적으로 15세기 중반이 되면 자바 섬 바깥에 소유했던 외부 섬 속령들은 대부분 이탈한 것으로 추정된다. 굳이 '추정'이라고 적는 이유는 15세기 초반 및 중반에 관해 자바에서 기록된 사료들은 꽤 있으나, 대개 저자가 친숙한 자바 내의 일에 관해서만 기록을 남겼고[27], 팔렘방, 잠비, 발리, 마두라 등 주요 지역을 제외한 해외 속령과 자바의 관계는 오늘날에는 해당 지역의 기록이나 유물, 비문 등 정황 증거로 추정하는 것이 한계이기 때문이다.[28][29]

2.5. 명나라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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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대함대. 명나라가 정화를 통해 믈라카 술탄국 등 이슬람 세력들을 도와주고, 마자파힛 제국을 견제하면서 힌두계 마자파힛 제국은 치명타를 입었다.

참고로 위크라마와르다나 왕 시절의 마자파힛 제국이 치명타를 입은 예상치 못한 이유에는 명나라라는 초대형 변수가 존재했다. 동마자파힛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일부러 저 멀리 중국의 명나라와도 친교를 맺으려고 시도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동마자파힛을 방문하려 시도했던 인물이 정화의 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였다. 정화는 명나라 사신단을 동마자파힛으로 보내 조공을 받으려했는데, 이 과정에서 명나라 사신단이 예상치 못하게 내전에 휩쓸리면서 170여 명의 중국인들이 살해당했던 것이다. 보고를 전해들은 영락제는 격노했고, 60,000타힐의 황금을 요구했지만 내전으로 돈이 쪼달리던 위크라마와르다나 왕이 지불 가능한 액수는 기껏해야 10,000타힐이 한계였다. 영락제는 훗날 배상금을 깎아주었지만 그 사건으로 마자파힛 제국의 위신에 치명타를 입은 건 변하지 않았다.

명나라 대함대를 이끌던 정화는 꾸준하게 마자파힛 제국에게 타격을 입혔다. 당시 말레이 반도 중계 무역의 최고 중심지였던 믈라카 지방도 이때 떨어져 나갔다. 당시 믈라카 지방에는 스리위자야 왕족의 후손을 자처하던 싱아푸라 왕국의 마지막 왕 파라메스와라가 자리를 잡고 믈라카 술탄국을 막 세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존에 믈라카 일대를 지배하던 마자파힛 제국 측에서는 파라메스와라의 행동이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기막히게 나타난 인물이 명나라의 정화였다. 마자파힛 제국에서 떨어져나갈 기회만을 노리던 믈라카 술탄국은 정화에게 막대한 선물을 안기면서 중국의 호의를 샀고,[30] 그 대가로 마자파힛 제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얻어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정화가 팔렘방 일대의 화인(華人) 무슬림 세력의 독립마저도 지원하면서 마자파힛 제국의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영향력은 확연히 줄어들고야 만다.

사실 꾸준하게 동남아시아 정세에 관여하며 명나라가 마자파힛 제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킨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당대 마자파힛 제국의 해상 패권이 지나치게 강력했기에 명나라가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던 것도 있었다. 정화의 함대와 명나라의 막대한 지원을 통해 들어선 믈라카 술탄국의 위세가 강해지면서 인도네시아 일대에 이슬람의 유입이 일어났고, 명나라가 수마트라 섬 북부에 일부러 무슬림-중국인 커뮤니티들을 우후죽순 박아놓고 개종시키면서 힌두계 마자파힛 제국의 입지는 날로 좁아졌다. 명나라가 개입한 이후 마자파힛 제국은 팔렘방, 잠비, 인드라기리 등 옛 스리위자야계 도시들 몇 개를 제외하면 수마트라 섬 대부분에서 세력을 잃고 쫒겨났다. 1430년대에 들어서는 심지어 마자파힛 제국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자바 섬 북부인 스마랑, 드막, 투반, 암펠 등지에도 중국계 무슬림들의 거주지가 생겨났다. 무슬림들의 세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마자파힛 제국의 국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내전에 시달리며 마음 고생을 하던 위크라마와르다나 왕이 1429년에 붕어하자 제6대 왕위는 딸 수히타(재위 1429~1447)에게 넘어갔다. 수히타 여왕은 옛 동마자파힛의 반란자였던 위라부미 공의 딸이 낳은 두 번째 왕녀 출신으로, 1427년에 이스칸다르 샤와 결혼했다. 이스칸다르 샤의 형제이자 클란탄 지방의 술탄이었던 사딕 무하맛 샤가 1429년에 승하하자 이스칸다르 샤가 클란탄의 왕위를 물려받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수히타의 치세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게 없다만 굳이 꼽자면 자바 극동부 블람방안 지방이 마자파힛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등이 있다.[31] 수히타는 1447년에 붕어했고, 그녀의 남동생이었던 크르타위자야가 제7대 왕위에 올라 1451년까지 다스렸다. 크르타위자야가 별 업적 없이 1451년에 붕어하자 라자사와르다나가 제8대 왕으로 즉위해 1453년까지 마자파힛을 다스렸지만 그 역시 별다른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2.6. 크르타부미 반란

라자사와르다나 왕이 1453년에 붕어하자 3년 동안 제국에 왕이 없는 공위 시대가 이어졌다. 왜 공위시대가 그것도 3년 씩이나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위 계승을 놓고, 후계자들 사이의 지독한 갈등이 워낙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56년, 크르타위자야 왕의 아들이었던 웡크르 공 기리샤와르다나가 제9대 왕으로 즉위했다. 기리샤와르다나 왕이 1466년, 즉위 10년 만에 붕어하자 수라프라바와가 제10대 왕위를 물려받았다.

한창 수라프라바와 왕이 마자파힛 제국을 다스리던 15세기 중반, 불안정한 제국은 다시 한 번 분열되었다. 1468년에 유력한 대귀족이었던 크르타부미 공(Bhre Kertabhumi)이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수도인 마자파힛을 점령하고 제11대 왕을 자칭했던 것이다. 이를 크르타부미의 반란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수라프라바와 왕은 수도 마자파힛을 버리고 자바 섬의 내륙도시인 '다하'(Daha)[32]로 도망쳐 망명 수도를 세웠다. 크르타부미 공은 기존 수도인 마자파힛을, 수라프라바와 왕은 새 수도인 다하를 중심으로 나라를 나누어가지면서 마자파힛 제국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수라프라바와 왕은 마자파힛을 수복하지 못한 채 1474년까지 다하에 머무르다가 아들 라나위자야(기린드라와르다나)에게 제12대 왕위를 물려줬다.

제국이 서로 반쪽으로 갈려서 싸우고 있는 틈을 타 마자파힛 제국의 속국들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나갔다. 특히 명나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세력을 크게 키웠던 믈라카 술탄국이 큰 문제였다. 15세기 중반 경 이미 말라카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믈라카 술탄국에게 빼앗겼고, 믈라카 술탄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마트라섬에까지 영향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자파힛 제국 역시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크르타부미 공은 어떻게든 제국을 부여잡아보기 위해 무슬림 상인들에게 무역 특권을 부여했고, 상인들이 마자파힛에 충성을 유지하는 대신 자바 섬에까지 통관을 허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땜질 처방이었을 뿐, 결과적으로는 무슬림 상인들이 자바에 활발히 유입되며 이슬람교가 더욱 빠르게 확산되면서 힌두교 중심의 마자파힛 제국이 더욱 약화되는 역효과만을 불러일으켰다.[33]

다하에서 힘을 기르던 라나위자야는 1478년 마침내 수도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을 부자 전쟁(父子 戰爭, Perang Sudarma Wisuta)이라고 부른다. 결국 우다라 장군이 이끄는 다하군이 수도 마자파힛을 함락시켰고, 크르타부미 공은 마자파힛의 궁궐에서 살해당했다. 크르타부미는 아들이자 드막 지방의 군주였던 라덴 파타에게 원조를 요청해놓은 상태였으나, 라덴 파타의 지원군이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별 쓸모는 없었다. 라나위자야는 이렇게 마자파힛 제국을 재통일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크르타부미 공의 아들이 다스리던 드막 왕국은 이 부자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독립해 떨어져 나갔고, 자바 북부와 서부에서 점점 더 교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무슬림 상인 집단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마자파힛 정통성의 근원인 힌두교-불교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2.7. 드막 술탄국과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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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파힛 제국의 수도였던 마자파힛 유적의 전경. 목조 건물이 대다수였기에 현재 남은 것은 벽돌로 만든 탑들 일부를 제외하면 없다.

부자 전쟁이 벌어진 1478년부터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은 더 이상 수도 기능을 하지 못했고, 망명 수도였던 다하가 사실상 마자파힛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기능했다. 그 많던 식민지와 속령들도 다 떨어져 나가면서 마자파힛 제국은 다하와 인근의 자바 중동부 지역만을 실질적으로 영유한 군소 세력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이유로 1478년을 제국으로서 마자파힛의 붕괴 시점으로 잡는 역사가도 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마자파힛 제국 후기의 정치사는 매우 불명확해지게 된다. 《바밧 타나 자위》 등 공식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자바 역사서는 1478년 이후, 주로 드막 술탄국을 새로운 자바의 중심 세력으로 서술하며 드막과 마자파힛(잔존 다하 정권) 간 전쟁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파라라톤》도 마자파힛 제국 말기에 대한 서술은 매우 빈약하다. 따라서 1478년 이후 벌어진 약 50년 동안의 일들 중 많은 부분은 트로울란(마자파힛)과 드막 등지에서 개별적으로 기록되어 곳곳에 흩어진 지방 연대기나 당대에 관해 언급하는 중국계, 포르투갈계 사료에 의존해 재구성하는 실정이다. 다만 드막 술탄국과 마자파힛 제국이 치열한 경쟁을 계속했음은 틀림없다. 대략적인 재구성은 이하와 같다.

부자 전쟁의 승리로 마자파힛 제국을 재통합하는가 싶었던 라나위자야 왕도 편안한 말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1498년 대재상이자 2인자 격이었던 우다라가 라나위자야 왕을 무력화시키고 스스로 최고 권력자가 되었기 때문이다.[34] 이 틈을 놓칠 드막 왕국이 아니었다. 아버지 크르타부미 공의 죽음으로 칼을 갈고 있었던 드막의 라덴 파타는 마자파힛 왕에 대한 상징적인 신하 관계마저도 청산하고, 마자파힛 제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자파힛 제국의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만성적인 전쟁을 겪어 민심이 뒤숭숭했을 뿐더러 왕권 교체로 내부도 어지러웠던 것이다. 결국 우다라는 라덴 파타 아래에 굴복했고, 해외 속령들 대부분을 드막에게 넘겨주는 등 드막 왕국의 명백한 우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서쪽에서는 포르투갈이라는 신흥 세력이 등장해 1511년 믈라카 술탄국의 수도인 믈라카까지도 점령하면서 그 힘을 떨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라덴 파타 아래에서 시달리던 우다라가 포르투갈이라는 신세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건 당연지사였다. 우다라는 1510년대 초중반에 걸쳐 포르투갈측과 접선을 시도했고, 포르투갈을 사주해 드막 술탄국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포르투갈이 마자파힛 제국과 연합하는 듯한 뉘앙스를 취하자 불안해진 라덴 파타는 마자파힛 제국을 완전히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라덴 파타는 1513년 1월, 팔렘방과 즈파라(Jepara)에서 편성한 100척의 함대에 5,000명의 드막 군사를 태우고, 사위인 파티 우누스(Pati Unus)[35]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여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공격했으나, 말라카 함락에는 실패했다.[36] 1517년에는 라덴 파타의 드막 군대가 우다라의 마자파힛 군대를 다시 한 번 꺾고 수도 다하마저도 함락시켰다.[37]

다하 점령 이후 라덴 파타의 거취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어떤 사료에서는 라덴 파타가 그저 마자파힛을 버린 후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드막 지역으로 돌아갔다고 기술되어 있는 반면, 다른 사료에서는 프라부 우다라가 라덴 파타의 봉신이 되어 그의 막내딸과 결혼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자바 섬의 오랜 내전은 라덴 파타가 이끄는 신진 이슬람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이 내전은 마자파힛 제국의 분열을 회복 불가능하게 장기화시켰고,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경우는 많이 다르지만 마자파힛의 오도아케르라고 할 수 있을 라덴 파타는,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518년에 승리의 만족감 속에 드막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승리자 라덴 파타는 크르타부미 공의 아들로서 마자파힛 왕족이었으므로, 원하면 권신이었던 프라부 우다라를 몰아내고 합법적인 제국의 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라덴 파타는 그저 드막의 군주로 남았고, 라나위자야와 달리 새로운 마자파힛의 마하라자로 즉위하지는 않았다. 우선 라덴 파타는 선조들과 달리 무슬림이었으므로, 오래된 힌두-불교 구체제의 군주를 자칭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의 정당성을 깎아먹고 본거지였던 드막의 지지 기반을 약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16세기 초 시점 잔존 마자파힛 세력은 더 이상 해양 제국이 아니라 다하와 인근만을 영유한 군소 세력이었고, 이미 드막은 구 마자파힛 영역을 일부 계승한 새로운 해양 제국이 되어 있었으며,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의 해안 지역은 활발히 이슬람화가 진행되는 중이었다.[38] 따라서 당시 마자파힛의 왕위는 해외 속령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때 쓸 근거로 사용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2.8. 제국의 소멸

드막에게 얻어맞은 채 극도로 약화된 마자파힛의 잔존 세력은 완전히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멸망하기까지 드막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불과했다. 마자파힛의 잔존 세력은 드막의 새로운 군주였던 트릉가나(재위 1521~1546)의 원정으로 더 쪼그라들다가 1527년[39] 전후 트릉가나의 마지막 원정으로 완전히 드막에 흡수되었다. 1520년대 마자파힛의 군주 또는 실권자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다. 1517년 이후에도 마자파힛 잔당의 일부, 특히 투반[40] 등의 세력이 자바 중·동부에 남아 있었고, 라덴 파타의 드막 세력권을 계승한 군주들이 계속해서 이들을 공격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마자파힛의 후계자로 정통성 있는 군주를 내세워 '마자파힛'의 후계 세력을 자칭할 능력이나 의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바 측 기록은 마자파힛 잔당의 소멸을 1527년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미 자바 중부 및 동부의 정치 중심지는 1517년 이후 드막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세계 일주를 하며 남긴 기록에서, 1522년 시점에 드막의 군주 우누스(Pati Unus, 재위 1518~1521)가 1521년에 사망했으며, 그는 기존 마자파힛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썼다. 이것은 피가페타 본인이 자바에 체류하며 본 것이 아니라 선원들에게 들은 간접 정보가 직접 출처이므로 정확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를 통해 외부인이 관찰하기에 1520년대 초에는 이미 마자파힛 잔당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1510년대 및 1520년대 마자파힛 잔당(다하/투반 정권)의 역사는 기록 부족 및 상충으로 상당히 불명확하다. 그러나 자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사료 및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성인 전승 등을 종합해 보면 마자파힛과 드막의 말기 전쟁사를 약간 재구성해볼 수 있다. 《히카얏 하사누딘》등의 기록을 따르면 다음과 같다. 1524년에 마자파힛과 드막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드막의 이맘이자 드막 원정군을 이끌었던 장군 수난 응우둥은 마자파힛 편에 선 라덴 파타의 동복동생이었던 트룽 공작(adipati Terung) 라덴 쿠센[41]에 의해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죽은 수난 응우둥의 아들 수난 쿠두스(Sunan Kudus)[42]가 지휘한 1527년의 원정에서 드막군은 승리를 거두어 최종적으로 마자파힛을 멸망시켰고, 라덴 쿠센은 이번에도 마자파힛 편에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수난 쿠두스는 포로로 잡힌 적장 라덴 쿠센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를 융숭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밧 드막》이나 《바밧 마자파힛》 등의 지역 연대기(babad)에 따르면 수난 응우둥과 라덴 쿠센 사이의 전투와 수난 응우둥의 전사는 1520년대가 아니라 50년 전인 1470년대, 내전인 부자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히카얏 하사누딘》에 등장하는 마자파힛과의 전쟁에서 1524년에 사망한 드막 대성원의 이맘은 정확히는 라마툴라 공으로, 일반적으로는 수난 응우둥과 동일시되지만, 행적이 유사한 다른 장군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한편, 수난 응우둥의 아들인 수난 쿠두스는 이슬람 성인으로서 어느 정도 전설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실 마자파힛과의 전쟁보다 드막 대성원의 이맘이자 드막 군주의 고문으로서 16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행적[43]이 유명한 인물이다. 《바밧 타나 자위》에 따르면 드막의 마지막 군주였던 아랴 프낭상이 권좌에 오르기 전에 수난 쿠두스의 지지를 받는 등, 수난 쿠두스가 적어도 16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살아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대 인물의 일반적인 수명을 고려할 때, 16세기 전반에 수난 쿠두스가 마자파힛과 드막 간의 전쟁을 종결지은 장군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수난 응우둥=라마툴라 공'일 경우 《히카얏 하사누딘》의 기록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기는 하다.

마자파힛 최후의 거점이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최후까지 마자파힛이 투반, 다하 및 중부 자바 일부를 보유하며 다하를 수도로 유지하다가 다하가 점령됨으로써 멸망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최종적으로 투반만이 구 마자파힛 잔당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가 투반이 점령됨으로써 마자파힛이 멸망했다는 설이다. 확실한 건 1510년대 이후의 마자파힛 제국은 소규모 잔존 단체 수준으로 몰락한 채 남아있다가 이슬람 세력에게 자연스럽게 흡수되면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후의 자바 지역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득세했으며, 동부의 블람방안 왕국을 제외하면 힌두-불교계 세력의 입지는 사라지게 된다.[44] 드막 술탄국이 트릉가나 시대에 사실상 마자파힛의 계승 세력으로서 자바 전역과 수마트라 동부, 보르네오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트릉가나 사후 드막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동남아시아를 주름잡는 대세력으로서의 드막 술탄국은 결국 계승 분쟁과 내분으로 채 100년을 못 가고 16세기 중반에 허망하게 붕괴했으며, 이후에는 반튼 술탄국, 치르본 술탄국, 파장 왕국, 칼리냐맛 왕국, 수라바야 공국 등으로 자바 각지가 쪼개졌고 이외에도 수많은 도시가 저마다 독립성을 주장했다. 긴 분열의 끝에 드막 술탄국의 후계 세력들 가운데 마타람 술탄국(1587~1755)이 자바의 패권을 획득하고 자바를 거의 통일하는 데까지 갔으나, 마자파힛 제국이 세력을 확장했던 14세기와는 달리 지방 세력과 유럽 세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마자파힛과 같은 수준의 해양 대제국으로는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네덜란드에 종속되기에 이르렀다.

3. 사회와 문화

자바 섬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받아들였다. 다만 인도의 힌두 계급 요소와 문화는 자바만의 오랜 독자적인 역사가 진행되면서 자바의 실정에 맞게 상당히 변형된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물론 힌두교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기에 이에 따라 의례 참여 방식, 의복, 예법, 언어 사용 양상 등의 사회 관습을 통제하는 상당히 복잡한 규칙이 생겨나 사회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사회 계층 자체의 경계와 상하 관계는 인도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자바 섬에서는 시바, 비슈누, 브라흐마를 비롯한 다양한 힌두 신격을 모셨지만 외래 신들 외에도 힌두교 전래 이전부터 자바 지역에서 숭배되던 다양한 토착 신격이 자바 힌두교 문화에 편입되어 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힌두교 종파 가운데는 시바파 힌두교가 주류였는데, 자바에서는 주로 시바의 아바타라바타라 구루(Batara Guru)라는 신을 신들의 왕국을 다스리는 군주인 최고신으로 숭배했다. 자바식 시바파 힌두교 체계에서 브라흐마와 비슈누는 인드라(바타라 인드라), 바유 등과 함께 바타라 구루의 자식으로 여겨졌다. 자바의 토착 신격 가운데는 시간을 신격화한 거대한 파괴의 신 바타라 칼라나 구름을 다스리는 교사들의 신 바타라 삼부, 달의 여신 데위 라티[45] 등이 있었다. 순다 지역에서 냐이 포하치 상향 아스리라는 이름으로 숭배된 쌀과 풍요의 여신 역시 자바 지역에서 데위 스리로 숭배되었다. 후대의 마타람 술탄국(1587~1755) 시대부터 유명해진 남해의 여신 냐이 라라 키둘[46]과 북해의 여신 데위 란자르 역시 그 원형은 마타람 시대 이전부터 존재하던 자바 토착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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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타란 사원 수쿠 사원. 마자파힛 시대의 보기 드문 피라미드형 사원이다.
자바 섬에서는 각기 믿는 종파에 따라 다양한 연례 행사가 열렸다.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에는 시바파 힌두교뿐 아니라 불교, 비슈누파 힌두교 사원과 성직자가 존재했으며, 이미 14세기에 수도 마자파힛에서 이슬람교도가 상인 또는 주민으로서[47] 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러 목적으로 출가하여 수도 생활을 했는데, 이는 왕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양한 남성과 여성 수도자회가 있었고, 일시적인 수도 생활을 끝낸 후 속세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자바 지역에서는 고대와 중세에 일상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관한 문헌이 작성되고 공예품, 석상, 테라코타 등의 유물이 만들어졌는데, 이에 기반하여 오늘날 의복, 관습, 예법, 의례 등에서 결혼과 섹슈얼리티와 같은 주제에 이르기까지[48] 중세 자바인의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다.

최근에는 여성사 측면에서도 자바 고대사 및 중세사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일대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남편과는 다른 독립적인 경제권을 갖는 일이 드물지 않았는데, 마자파힛 제국 시대의 자바 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907년에 자바[49]에서 반포된 한 칙령은 사망한 부인의 채무에 대해 무지한 남편은 부인의 부채를 대리 상환할 필요가 없다고 규정했다고 한다.[50]

주로 수도 마자파힛(트로울란) 근처를 중심으로 하여 동부 자바 전역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힌두-불교 사원 건축물 또한 많은 경우 마자파힛 시대의 것이다. 보로부두르로 잘 알려진 고대의 마타람 왕국 이후 자바에서는 마타람의 것에 비할 만한 대규모의 사원 건축이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다. 다만 마자파힛 제국 시대에 들어서 워낙 번영도가 높았기에 마타람 왕국 시대에 비견될만한 작품들 몇몇이 탄생하긴 했다. 파나타란 사원은 예외적으로 넓은 부지에서, 마자파힛 시대인 14세기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주로 증축된 대규모 사원으로(최초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정교한 부조는 자바식 힌두-불교 시각 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밖에도 다양한 마자파힛 시대 사원들이 남아 있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것들이 많은데, 특징이 뚜렷한 두 사원만 예로 들어 본다. 자바 중부의 수쿠 사원은 15세기 전반[51]에 세워진 사원으로, 고대 마타람의 보로부두르 이후 자바에서 극히 드문 피라미드 모양의 사원이며, 해발 1186m의 라우(Lawu)산 사면에 위치한다. 츠타 사원도 라우산 사면의 해발 1495m에 위치하며, 다른 유명한 자바 사원들과는 달리 자바 고유 모티브의 활용이 돋보인다. 또 츠타 사원은 마자파힛 세력이 쇠퇴하던 말기인 1479년 무렵 건축된 것으로, 자바 중·동부에서 마자파힛 시대의 마침표를 찍는 사원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3.1. 산스크리트화

자바 문화권(자바, 마두라, 발리 및 수마트라 일부)의 고대사와 중세사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 중 하나는 산스크리트어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자바어 문학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고 난 후 중세 무렵에 교양어의 지위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이는 가령 상좌부 불교의 성전어인 팔리어가 근대 초기까지도 토착어와 함께 단순 교양어가 아닌 실질적인 문어로 사용된 미얀마스리랑카의 사례와는 대조적이다.

분명 4세기부터 몇 세기 동안 인도네시아 군도(자바, 남서부 및 동부 보르네오, 남부 및 서부 수마트라, 발리)와 말레이 반도(주로 크다 지역)에서 출토된 비문의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인 경우가 많았고, 종교적인 목적으로 산스크리트어 문헌이 다수 군도로 수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은 많지 않지만, 자바에서는 자생적인 산스크리트어 문헌이 비문이 아닌 서적의 형태로도 어느 정도 작성되었다.

그러나 9세기 말부터 13세기 말 중부 및 동부 자바에서는 고대 자바어가 문어로서 공적, 사적 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산스크리트어의 입지를 대체해 간 것으로 보인다. 자바어 문학은 이 시기에 산스크리트 문학의 모방과 내적 혁신을 거쳐 융성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지역의 비문에 자바어가 아닌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되는 사례는 극히 희귀해졌으며 특히 산스크리트어 단독으로 쓰인 사례는 찾기 어렵다. 1280~1460년경, 즉 싱하사리 왕국 후기와 마자파힛 제국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비문에 다시 산스크리트어가 어느 정도 쓰였지만, 중세 자바어의 지위는 이미 공통 문어로서 확고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상대적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보다 많은 산스크리트어 비문이 출토된 같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캄보디아참파 왕국과도 대조적인 것으로, 요하네스 더카스파리스(Johannes Gijsbertus de Casparis)의 1991년 추계에 따르면 당시까지 발굴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지역 고대 산스크리트 비문의 수는 산스크리트어가 단독으로 쓰인 경우만 계산할 때 약 60기 정도에 불과했다고 하며, 약간의 만트라나 종교 논문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운문 형식이었다고 한다. 종교적, 학술적 목적의 산스크리트어 교육 자체는 계속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지만[52], 그 질에는 지역마다 편차가 있었다. 가령 마자파힛 제국 시대의 자바어로 된 <윙운피투 비문>(Prasasti Wingun Pitu, Prasasti Waringin Pitu, 1447)에 삽입된 산스크리트어 운문은 순수하고 문법적으로 정확한 산스크리트어로 된 반면, 파가루융 왕국[53] 초기인 14세기 수마트라 서부에서 파가루융의 창업 군주였던 아디탸와르만에 대해 쓰인 비문의 산스크리트어는 문법이 맞지 않는 조악한 문장으로 쓰였다.[54] 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도네시아 군도의 산스크리트어 비문은 문법적으로는 흠결이 없는 편이었으며, 많은 경우 산스크리트 작시법의 규칙까지 엄격하게 따르고 있었으므로 비문법성에 관한 한 파가루융계 초기 비문이 오히려 예외적인 편에 속한다.[55]

4. 화기: 쳇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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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방 포의 모습.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마자파힛 제국은 쳇방(cetbang)이라는 이름의 대포를 생산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한 국가였다. 쳇방은 청동제 후장식 대포였는데, 동아시아의 불랑기포와 유사한 형태였다. 포신은 주로 오늘날 자바 동부 보조느고로군(Bojonegoro)의 라작웨시(Rajakwesi) 지역에서, 흑색화약은 스와탄트라 빌룰룩(Swatantra Biluluk) 지역에서 생산해 만들어 썼다.

자바 지역에 화기가 처음 전래된 것은 1293년 쿠빌라이 칸의 원정 과정에서였다. 중국으로부터 화기 기술을 습득한 후 늦어도 14세기 중반 하얌 우룩의 전성기에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한 마자파힛 제국은 이 쳇방 포를 육상전에서 사용하여 자바 섬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구축했으며, 자바식으로 개량된 정크선 함대에 장착해 군도 전역을 정복하고 해양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유명한 하얌 우룩 시대의 마자파힛 해군 제독 음푸 날라(Mpu Nala)가 특히 쳇방 전술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푸 날라의 초기 원정인 1357년 숨바와 원정 등에서부터 이미 쳇방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명재상 가자 마다가 육성하고 음푸 날라가 이끄는 마자파힛 해군은 수마트라의 고도 팔렘방과 잠비 등 구 스리위자야 왕국[56]의 심장부인 수마트라 핵심 지역뿐 아니라, 보르네오 남부, 숨바와섬을 비롯, 클란탄, 크다, 슬랑오르말레이 반도까지 원정을 나가 마자파힛의 세력권을 넓혔다. 한국의 경우 고려 말에 들어서야 1380년 진포 대첩에서 배에 화포를 장착하고 실제 해전에서 최초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걸 고려하면 사실상 인도네시아의 해군력, 그리고 화포기술이 한국보다도 20년 가까이 앞섰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마자파힛 제국의 쳇방 사용은 세계사적으로도 '힌두계 내지 힌두-불교계' 세력이 화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 가운데 하나라는 의의가 있다. 인도 지역에도 13세기 후반 몽골 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북인도에 화기가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14세기 후반부터는 전쟁에서 화기가 빈번히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기 화기 사용에 앞장선 것은 델리 술탄 왕조바흐마니 술탄국 등 북부-중부 인도의 이슬람계 세력이었으며, 적어도 약 1366년경부터 비자야나가르 제국이 화기를 도입 사용한 것 정도가 예외적이다. 다만 이 '쳇방'이라는 이름 자체가 말레이계 제어에서 유래한 이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총통을 가리키는 중국어 방언 등 동아시아 언어가 차용되었을 수도 있다.

마자파힛 제국이 말기에 접어들어 혼란 와중에 쇠퇴해감에 따라 제국의 많은 화기 기술자들은 자바를 떠나 더 높은 임금과 생활조건을 제공했던 수마트라 섬, 말레이 반도, 필리핀 등지의 새로운 교역 중심지로 이주했다. 16세기에 말레이 반도에 도달한 포르투갈인들이 자바 상인 집단이 반도에 건설한 식민지를 목격하고, 그들이 직접 화기를 생산하며 상선을 보호하고 있다고 보고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자바의 후발 세력인 드막 술탄국 역시 쳇방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쳇방 포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고,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강철로 만든 쳇방을 앞세워 두 차례(1513, 1521)에 걸쳐 포르투갈이 점령한 말라카를 공격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점령에는 실패했지만.[57]

16세기부터 쳇방은 렐라(lela)와 른타카(rentaka)라는 형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렐라는 수마트라 섬, 말레이 반도, 보르네오 섬 지역에서 토착 무역 국가들이 상선단 보호를 위해 사용한 대형 함포였는데, 동시대 유럽 대형 함포에 비하면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른타카는 활강식 총열을 사용하는 선회포로서, 통상 렐라보다 구경이 작고 총열이 길었다. 렐라와 른타카는 16~18세기에 걸쳐 현재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아우르는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토착 세력들에 의해 두루 사용되었다. 심지어 필리핀 지역에서는 19세기 말의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에서 른타카를 활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 통치 기구

5.1. 관료와 행정 단위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인 하얌 우룩 시대의 기록인 《나가라크르타가마》에는 마자파힛의 관료 체계와 행정에 대해 상세한 묘사가 있다. 마자파힛의 국왕(마하라자)은 여러 분야의 내정과 외정을 다루는 내각[58]의 보좌를 받아 집무했으며, 이 외에 고위 왕족이나 왕자들로 구성된 관료단[59]도 있었다. 내각의 일원들 가운데 파티 하망쿠부미[60]는 특히 마자파힛 제국의 고위 관료단을 총괄하는 대재상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고위 황족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유사한 협의 기구인 바타라 삽타프라부[61]도 있었다. 이밖에 대승정[62]종교 사무관[63] 등 특별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료도 존재했다.

수도 마자파힛에 거주하는 국왕(마하라자)은 제국 전체를 다스렸으며, 제국 하위에는 여러 나가라[64]가 있었다. 나가라는 본토(나가라 아궁)에서는 공작 내지 지사(bhra)가 다스렸고, 속령에서는 속왕(rajya, raja)이나 대영주(natha)가 다스렸다. 본토의 '나가라'는 대략 이슬람화 이후의 군(kabupaten)에 대응하는 와텍(watek)들로 분할되었으며, 각 와텍은 위야사(wiyasa)가 장으로서 다스렸다. 와텍 하위에는 루라(lurah)가 다스리는 쿠우[65]가 있었고, 쿠우 하위에는 여러 마을(wanua)이 있어서 촌장(thani)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한편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14세기 전성기의 마자파힛 본토 자바에서는 촌락별로 주민 등록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나름 인구 조사도 시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엄정한 조세와 법 집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마자파힛 시대의 공문서들 중 대부분이 소실되어 당시의 정확한 인구는 추정할 수만 있을 뿐이다.

5.2. 본토 행정

파일:majapahit_provinces.png

마자파힛의 지배 지역은 자바 중동부의 본토[66]와 기타 지역의 속령(이하 절에서 설명)으로 나뉘었다. 마자파힛의 본토 행정 체계는 기본적으로 마자파힛이 계승한 싱하사리의 행정 체계와 대동소이했다. 본토는 공작 또는 지사(Bhra)가 다스리는 여러 지방으로 정연하게 분할되어 있었으며, 각 지방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몇 단계를 거쳐 하위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본토 지방을 다스리는 최고위 관직인 공작은 거의 라자사 황실의 황족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마자파힛 전성기인 14세기에는 수도 마자파힛을 중심으로 한 본토는 수도를 제외하고 12개의 지방으로 분할되었으며, 그 목록과 통치자의 명칭은 이하와 같다. 카후리판과 투마펠 등 핵심 지역의 공작으로 임명될 수 있는 것은 특히 최고위 황족뿐이었는데, 가령 트리부와나 국왕은 재위(1328~1350)하기 전 1309년부터 1328년까지 카후리판 공작이었다.
지역명 설명 통치자
카후리판(Kahuripan) 과거의 장갈라(Janggala) 지역, 오늘날의 시도아르조(Sidoarjo) 카후리판 공(Bhre Kahuripan)
다하(Daha) 과거 크디리 왕국의 중심부 다하 공(Bhre Daha)
투마펠(Tumapel) 과거 싱하사리 왕국의 중심부 투마펠 공(Bhre Tumapel)
웡크르(Wengker) 오늘날의 포노로고(Ponorogo) 웡크르 공(Bhre Wengker)
마타훈(Matahun) 오늘날의 보조느고로(Bojonegoro) 마타훈 공(Bhre Matahun)
위라부미(Wirabhumi) 블람방안(Blambangan) 지방 위라부미 공(Bhre Wirabhumi)
파구한(Paguhan) 파구한 공(Bhre Paguhan)
카발란(Kabalan) 오늘날의 말랑군(Kabupaten Malang)[67] 카발란 공(Bhre Kabalan)
파와누안(Pawanuan) 파와누안 공(Bhre Pawanuan)
라슴(Lasem) 오늘날의 라슴, 름방(Rembang) 라슴 공(Bhre Lasem)
파장(Pajang) 오늘날의 수라카르타 인근 파장 공(Bhre Pajang)
마타람(Mataram) 오늘날의 욕야카르타 인근 마타람 공(Bhre Mataram)

이상의 체제는 가끔 변화하기도 했는데, 가령 1447년의 <윙운피투 비문>(Prasasti Wingun Pitu)에 따르면 당시 공작이 있는 본토의 지방은 자가라가(Jagaraga), 싱하푸라(Singhapura)[68], 클링(Keling) 등을 포함하여 14개가 있었다고 한다.[69] 이를 보면 15세기에 발리(자가라가) 등 일부 속령(만차나가라)이 본토(나가라 아궁)로 편입되었으며, 동화의 정도에 따라 본토와 속령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3. 속령

이상에서 설명한 자바 중동부의 본토(나가라 아궁)에 속하지 않는 모든 지방은 마자파힛 제국의 속령으로 볼 수 있지만, 당대 마자파힛에서 속령은 엄밀히 말해 만차나가라(Mancanagara, 동질적인 속령)와 누산타라(Nusantara, 이질적인 속령)로 나뉘었다. 만차나가라는 자바 문화와의 동화 정도가 높은 속령이었고, 누산타라는 자바 문화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속령이었다. 만차나가라와 누산타라는 중앙에서 임명된 공작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본토로 연공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러나 만차나가라에서는 마자파힛 중앙정부가 보다 긴밀한 관리를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여 무역을 통제하며 세금을 걷기도 했고, 때로 만차나가라로 지방 행정관을 파견하기도 했지만[70], 누산타라는 이와 같은 중앙정부의 직접 통제 대상이 아니었으며, 마자파힛 정복 이전부터 내려온 가문의 지방 영주가 자치를 수행했고, 연공만 바치면 중앙정부의 내정 간섭은 별로 없었다. 속령의 영주가 연공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시도하는 경우에는 반란으로 간주하여 원정군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본토(나가라 아궁) 및 만차나가라(동질적 속령) 외에, 누산타라(이질적 속령)에 대한 제국의 지배는 명목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도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을 제외하면[71] 술라웨시, 말루쿠, 뉴기니 등 현대 인도네시아 동부 권역에 해당하는 누산타라 지역에서는 《나가라크르타가마》 등 자바의 기록 외에 이를 교차 검증할 당대 현지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 이 때문에 정말 마자파힛군의 원정과 복속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산타라 체제하에 있었던 지역의 범위는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오래 누산타라 체제가 유지되었는지 등은 아직 섣불리 확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14세기의 전성기를 기준으로 마자파힛의 만차나가라 지역은 자바 서부, 마두라 섬, 발리 섬, 수마트라 섬 일부(다르마스라야, 팔렘방, 툴랑바왕, 파가루융)가 있었다. 기타의 속령, 즉 술라웨시 섬, 보르네오 섬, 말루쿠 제도, 말레이 반도, 발리 동쪽의 소순다 열도의 속령은 모두 누산타라였다.

6. 법률: 《쿠타라마나와》

인도 전통의 《마누 법전》(Mānava Dharmaśāstra)은 고대부터 자바어로 《마누사나》(Manusana) 또는 《마누파데사》[72]로 여러 차례 번역되어 왔다. 자바에서는 《마누 법전》에서 갈라져나온 토착 법률 전통이 점차 형성되어 갔는데, 대표적인 문헌으로 적어도 12세기부터 《스마라다하나》 등 타 문헌과 비문에 언급되는 《쿠타라마나와》(Kutaramanawa)라는, 《마누 법전》에 바탕했지만 단순 번역에 그치지 않는 자바어 법전이 있었다. 《쿠타라마나와》라는 이름의 문헌들은 여러 차례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12세기 이래 마자파힛 시대[73]까지 자바에서 확실한 법적 권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타라마나와》는 기본적으로 인도 전통의 법전이었던 《다르마샤스트라》의 일종이었으며, 오늘날 남은 것에 다양한 판본이 있다. 《쿠타라마나와》로 불리는 문헌 외에도 고대와 중세 자바에서는 다양한 서적과 칙령, 비문 등의 형식으로 법률 문서가 다수 작성되었으며, 방대한 전근대 자바어 필사본 더미에서 이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마자파힛이 멸망한 후 드막 술탄국과 마타람 술탄국의 법률 체계는 점차 샤리아의 요소를 많이 도입해 나갔지만 마자파힛 법률 전통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자파힛의 힌두 문화를 계승한 발리에서는 19세기까지도 《쿠타라마나와》 등 중세 자바 전통에 기반한 법률 체계가 정착하고 정교화되며 사용되었다.[74]

오늘날 구할 수 있는 《쿠타라마나와》의 가장 흔한 판본은 275개 항목으로 된 것(모두가 규정인 것은 아님)으로, 레이던 대학교가 연구용으로 취득한 발리의 고대와 중세 자바어 필사본 더미에서 용커르(J. J. Jonker)가 발견한 것(1876년, LOr 2215)을 1885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고 편집하여 유럽의 동양학자들에게 널리 알린 것이다. 용커르가 번역한 서적의 표지에는 '쿠타라마나와'가 아니라 단순히 '아가마'(agama)라는 단어만 적혀 있었지만, 다른 판본의 《쿠타라마나와》[75]와 내용이 유사 또는 일치한 것으로 보아 《쿠타라마나와》의 일종임은 분명하다. 이 판본의 《쿠타라마나와》는 인도의 본을 따라 4성 계급(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체계를 사회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으로 서술했고, 이어 다방면에 걸친 법률 규정을 나열했다. 《쿠타라마나와》의 조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형법에 해당하는 범죄와 처벌을 규정한 부분이지만, 민법상법, 즉 재산과 거래, 상속, 결혼, 이혼에 관한 조항도 다수 있다. 대략 항목별로 묶어 정리하면 각 항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각종 벌금에 관한 규정
  2. 여덟 종류의 살인과 그 처벌
  3. 노예의 처우
  4. 여덟 종류의 절도와 그 처벌
  5. 협박
  6. 상거래
  7. 저당
  8. 대금 지불
  9. 지참금
  10. 결혼
  11. 성범죄
  12. 상속
  13. 모욕
  14. 상해
  15. 과실
  16. 싸움
  17. 토지
  18. 명예훼손

조항의 일부를 발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76]
"53. 절도를 저지른 자나 저질러진 절도를 사주한 자에게는 재판관이 국왕을 대리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한 자의 재산은 압류되며, 가족들은 구류에 처하고 가족들에게 10,000냥의 벌금을 부과한다. 절도범의 부인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절도범을 부추겼음이 판명되면, 부인도 함께 사형에 처한다."[77]
"64. 출입 금지된 숲에서 사냥한 자는, 사냥에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4,000냥, 사냥에 성공했을 경우 8,000냥의 벌금을 부과한다. 성공한 경우 벌금에 더하여 사냥감 가치의 2배를 추가로 배상해야 한다."

《쿠타라마나와》 및 다양한 자바어 중세 법률 문헌은 오늘날 다양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군도, 나아가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힌두 법률 전통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자바어 외 다른 언어로 작성된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고전 법전으로는 15세기 전반에 믈라카 술탄국에서 말레이어로 작성된 《믈라카 법전》(Undang-Undang Melaka)이 유명하지만 이것은 이슬람화 이후에 성립된 것이며, 자바어 외 도서부 동남아시아 언어로 된 이슬람 이전 법률 서적으로는 2021년 현재 14세기의 《니티사라사무차야》(Nītisārasamuccaya, 말레이어)[78] 등 극소수만이 현존한다. 그나마 자바어와 말레이어 외 순다어 등 다른 언어로는 15세기 이전의 단편적인 기록들 외에 서적의 형태로는 법률 문헌을 찾기 어렵다.

7. 군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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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라덴 위자야 자야네가라 트리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 하얌 우룩 위크라마와르다나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수히타 크르타위자야 라자사와르다나 기리샤와르다나 수라프라바와
제11대 제12대
크르타부미 기린드라와르다나
인도네시아 대통령 · 말레이시아 총리 }}}}}}}}}}}}

여성 군주의 경우 (女)로 표기. 군주가 아닌 집권자의 경우에는 (*) 표기.
이름 별명/칭호 재위 기간
라덴 위자야 크르타라자사 자야와르다나(Kertarajasa Jayawardhana) 1293~1309
칼라가멧(Kalagamet) 스리 자야나가라(Sri Jayanagara) 1309~1328
기타르자(Gitarja)(女) 트리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Tribhuwana Wijayatunggadewi) 1328~1350
하얌 우룩(Hayam Wuruk) 스리 라자사나가라(Sri Rajasanagara) 1350~1389
위크라마와르다나(Wikramawardhana) 1389~1429
수히타(Suhita)(女) 댜 아유 큰차나 웅우(Dyah Ayu Kencana Wungu) 1429~1447
크르타위자야(Kertawijaya) 브라위자야 1세(Brawijaya I) 1447~1451
라자사와르다나(Rajasawardhana) 브라위자야 2세 1451~1453
공위시대[79] 1453~1456
기리샤와르다나(Girishawardhana)[80] 브라위자야 3세 1456~1466
수라프라바와(Suraprabhawa)[81] 브라위자야 4세 1466~1468[82]~1474
크르타부미 공(Bhre Kertabumi) 브라위자야 5세 1468~1478
기린드라와르다나(Girindrawardhana)[83] (관습적으로) 브라위자야 6세[84] 1478~1498[85] 또는 1527?[86]
프라부 우다라(Prabu Udara)(*)[87] 파티(Patih)[88] 또는 (드물게 오해로) 브라위자야 7세 1498~1517[89] 또는 1518

8. 참고 문헌



[1] 1294년에 작성된 <쿠다두 비문>은 마자파힛 제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라덴 위자야가 '붉은색과 백색 줄무늬를 가진 깃발'을 흩날렸다고 기록했다. 붉은색과 흰색의 조합은 자바 섬에서 가장 신성한 색들의 조합이었다. 이에 근거해서 마자파힛 제국의 국기를 추정해서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국기가 진짜 마자파힛 제국의 국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인도네시아 해군은 마자파힛 군대를 잇는다는 의미로 이 깃발을 선수기로 쓰곤 한다.[2] 수리야 마자파힛(ꦯꦸꦂꦪꦩꦗꦥꦲꦶꦠ꧀)이라 부른다. 마자파힛 시대의 유적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상징으로 중앙의 시바 신을 중심으로 8명의 힌두교 신들이 후광 모습으로 뻗어나가며 배열된 모습이다.[3] 현재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일부 등에 해당.[4] 또는 윌와틱타(Wilwatikta). 현재의 인도네시아 트로울란이다. 마자카르타[90]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는데, '마자파힛 성'이라는 뜻이었다.[5] 옛 크디리 왕국의 수도로, 마자파힛 시대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 15세기 마자파힛 내전의 과정을 거쳐 마자파힛(도시)이 수도의 기능을 상실한 후 다하가 잔존 마자파힛 세력의 사실상 수도가 되었다.[6] 제국의 군주라는 문맥에서 황제로 번역되기도 하나 보통은 대왕으로 번역되는 칭호이다.[7]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만든 인도네시아의 전통 은화로, 섬들 간의 교역에 주로 사용되었다. 케펭(kepeng)은 말레이어/인도네시아어 명칭이며, 자바어로는 피치스(picis)나 고복(gobog)으로 불렀다.[8] 자바 섬 중부의 크두 평원(Dataran Kedu)을 핵심 영지로 하여 출발한 왕가로, 기원으로는 여러 설이 있다. 마타람 왕국이나 스리위자야 왕국의 왕가가 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왕가들 중 하나로 꼽힌다. 발리 섬의 와르마데와 왕가 역시 사일렌드라 왕가의 방계이다.[9] 일반적인 역사 서술은 이렇지만, 산자야도 사일렌드라 왕가에 속했으며, 산자야 왕가라는 별도의 왕가는 없고, 오직 사일렌드라 왕가의 대승불교 분파와 힌두교의 시바파만이 존재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10] 당시 마타람 왕국의 왕은 사일렌드라 왕조 출신의 다라닌드라 왕이었다. 다라닌드라 왕이 어떻게 인접한 스리위자야 왕국을 집어삼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스리위자야 왕국은 세워진지 100년 정도된 국가였는데, 아마 원래부터 스리위자야 일대에 영향을 미치던 사일렌드라 왕가에서 자바의 힘을 등에 업고 스리위자야 왕국의 왕위도 얻어낸 것으로 추정된다.[11] 8세기에서 10세기 초까지 자바에서 힌두교 및 불교 사원 건축이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후에도 이슬람화 이전까지 많은 사원이 세워졌지만 14세기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를 제외하면 이 마타람 왕국에 비할 정도로 위풍당당하고 정교한 사원 건축을 찾기는 어렵다.[12] 스리위자야 왕국을 다스리는 사일렌드라 왕조가 자바 섬을 여전히 자신의 적법한 영토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13] 아이를랑가의 모후 마헨드라다타는 발리 왕의 왕비 겸 공동 통치자로 다르마왕사 왕과는 남매였다.[14] 이때 싱하사리 왕국의 외교 반경은 굉장히 넓은 편이었다. 심지어 바다 건너 먼 베트남 남부의 참파와 동맹을 맺는 등 활발한 외교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15] 자야캇왕의 'Jayakatwang'에서 'wang'은 고유명사의 일부로 을 의미하는 그 '王'이 아니다.[16] 이를 앞서 나온 크디리 왕국과 구별하기 위해 후 크디리 왕국, 제2차 크디리 왕국, 또는 글랑글랑 왕국(Kerajaan Gelang-gelang)이라고 한다.[17] 크르타나가라 왕은 아들이 없었고, 왕의 막내 공주였던 가야트리 라자파트니(Gayatri Rajapatni)가 라덴 위자야와 결혼했다. 가야트리 라자파트니 소생의 공주 트리부와나는 나중에 마자파힛 제국의 제3대 군주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자바에서 가야트리 라자파트니 공주는 미와 지혜를 갖춘 여성의 전형으로 칭송받았다.[18] 자바어 'nagara'는 마인어로 옮겨질 때 'negara'가 되는 경우가 많다.[19] 마자파힛 당대의 도판은 찾기 어렵지만 16~18세기의 와양 베베르 도판은 오늘날까지 남은 것이 많다.[20] 대체로 오늘날과 흡사한 형태로는 근세, 특히 마타람 술탄국 시대에 정립되고, 후계 국가들인 수라카르타 수난국과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정교화되었다.[21] 참고로 위라부미를 포함한 자바 극동부는 예전부터 자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한 지방이었다. 13세기 말부터 마자파힛 제국의 영토였지만, 1316년 자야나가라 왕의 치세 때도 위라부미의 중심지였던 루마장(Lumajang)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당한 적이 있었다. 14세기 중반의 전성기에는 중앙의 권위가 강해 극동부가 반발하지 않았지만, 하얌 우룩 왕이 죽고 나라가 뒤숭숭해지자 바로 반란을 일으켜 들고 일어났다.[22]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23] 앞서 언급했듯이 위자야라자사와 라자데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라슴 공작위를 물려받아 막대한 세력을 누리고 있었다.[24] 나가라와르다니의 친부이자 인두데위의 남편은 마타훈 공 라자사와르다나(Rajasawardhana, Bhre Matahun)였다.[25] 1398년 마자파힛의 원정으로 싱가포르에 존재하던 싱아푸라 왕국이 멸망했고, 그 잔당은 북상하여 믈라카 술탄국을 세웠다.[26] 확실한 문헌 사료는 없지만, 15세기 초의 파가루융 원정에서는 정황상 마자파힛 원정군이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27] 오늘날 보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러 사건에 관해, 예를 들어 자바에서 대규모 화산 폭발이 15세기에 어디서 언제 일어났는지, 또는 군주가 죽은 후 어떤 사원이 그에게 헌정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있는 편이다.[28] 그나마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보르네오 북부 및 남부 등 말레이 문화권에 관해서는 비교적 풍부해지기 시작한 해당 지역의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마자파힛에 관한 직접 기록을 남긴 경우도 소수 있지만, 15세기에 자바와의 정치적 관계가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다. 인도네시아 동부 지역의 사정은 더 나쁜데, 술라웨시 남부, 말루쿠 주요 지역에서는 16세기 이전에 관해 다루는 문헌이 극히 적고, 그나마 토착 왕조의 계보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으며, 발리, 남술라웨시, 말루쿠 일부 외 다른 인도네시아 동부 지역 전체에서는 16세기 이전에 관해 신뢰성이 있는 토착 사료를 기대하기 어렵다.[29] 단, 정치적 관계가 남아 있는 기록상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이 없었음을 뜻하지는 않고, 이에 대한 판단은 신중하게 내려야 한다. 15세기에도 상업적 및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은 확실한데, 이때도 남보르네오(16세기까지 자바의 정치적 영향권에 있었음), 남술라웨시, 말루쿠의 트르나테-티도레 지역으로 자바 상인들이 활발히 방문했고, 이들 지역의 이슬람화에 자바에서 온 선교사가 큰 역할을 했다.[30] 사실 믈라카 술탄국 이전에도 믈라카 일대를 다스리던 팔렘방 측에서는 꾸준히 중국 쪽에 로비를 시도했다.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주원장에게 사신을 보내 옛날 스리위자야 왕국이 그랬던 것처럼 조공을 바치고 보호를 요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마자파힛 제국이 쌩쌩히 살아있을 시기였고, 마자파힛 제국이 믈라카 일대를 속국으로 선언하며 중국의 개입을 사전차단하여 먹히지 않았다.[31] 자바 동부에서 유명한 설화인 《다마르 울란》 영웅담은 구전으로 이어졌고, 근세 이래 다양한 기록과 예술 작품으로 남아 있다. 《다마르 울란》 영웅담의 배경이 바로 수히타 여왕의 치세에 벌어진 중앙정부와 블람방안 사이의 대립이다.[32] 마자파힛 제국이 들어서기 전 크디리 왕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33] 이는 훗날 크르타부미 공이 라나위자야 왕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크르타부미 공이 무슬림 상인들에게 자바의 항구들을 개항한 것에 불만을 품은 기존의 힌두-불교계 귀족들이 크르타부미 공의 뒤통수를 치고 라나위자야에게 붙었기 때문이었다.[34] 라나위자야 왕은 기록에 따라 정확한 실권 상실 및 퇴위 시점, 사망년도가 엇갈린다. 하지만 적어도 1510년대의 사정은 어느 정도 확실한데, 토메 피르스의 당대 기록이었던 《동방지》에서는 1513년 시점 다하[91]의 군주는 바타라 비지아야(Batara Vigiaya)이지만, 정부의 실권자는 파트 암두라(Pate Amdura)였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바타라 비지아야'는 브라위자야(Brawijaya)로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라나위자야, 또는 같은 브라위자야의 이름을 받은 후계자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며, '파트 암두라'는 파티 우다라임이 분명하다. 즉, 1513년 시점에 적어도 명목상의 군주는 라나위자야 또는 그 후계자였고, 실질적인 집권자는 프라부 우다라였음을 알 수 있다.[35] 라덴 파타 사후 드막의 왕위를 계승함[36] 이후 파티 우누스는 실패를 거울 삼아 군도 내에서 선박 건조로 유명했던 술라웨시 섬의 고와 지역에 375척의 선단 건조를 의뢰했다. 그리고 1521년 이 375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말라카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3일 밤낮을 이어진 전투 결과 이번에도 말라카 함락에는 실패했다.[37] 이는 중국계, 포르투갈계 사료 양측에서 교차 검증되는 사건이다. 중국계 사료에 따르면 1517년 라덴 파타가 다하를 직접 공격해 점령한 이유는 다하 정권과 말라카의 포르투갈 세력 간의 협력에 위협을 느낀 것이었다.[38] 힌두교가 유지된 자바 극동부 블람방안 지역, 발리, 롬복 등에서는 마자파힛의 계승 세력이라는 정체성이 잔존했으나, 이들 지역은 군도 교역망에서 비교적 중요성이 낮았다.[39] 종종 1527년을 마자파힛 제국의 최종 멸망 시점으로 잡는데, 이는 자바 측 기록인 《바밧 상칼라》등에 따른 것이다. 이 연대기는 1527년 투반과 다하의 잔존 마자파힛 세력이 드막에 흡수되었다고 기록했다.[40] 자바 북동부의 항구였다. 투반의 영주 일가는 일찍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마자파힛의 중앙정계와 복잡한 혈연 관계망을 형성했으므로 라자사 황가에 여전히 충성했다. 《동방지》에 따르면 1510년대 초 투반의 무슬림 영주는 파트 비라(Pate Vira, 포르투갈어식 표기로 '파티 위라' 정도에 대응함)였다. 파트 비라는 마자파힛군을 지휘하며 당시 드막 산하에 있었던 그레식(Gresik)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이 마자파힛의 그레식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41] 라덴 쿠센 역시 무슬림이었으나 마자파힛에 충성했던 장군이다.[42]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여 드막 대성원의 이맘이기도 했다.[43] 가령 므나라 쿠두스 성원(Masjid Menara Kudus) 건축 등.[44] 그나마 발리에는 힌두-불교계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마자파힛 최후의 귀족들이 이슬람의 침투를 피하기 위해 동쪽 발리 섬까지 넘어가 세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발리 섬을 마자파힛 제국의 문화를 가장 짙게 보존한 섬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45] 찬드라와 별개이나, 데위 라티가 찬드라와 함께 숭배되기도 했다.[46] Nyai Rara Kidul, 마타람과 그 계승국인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군주들의 상징적인 배우자였다.[47] 오늘날 순례지 내지 여행지로 유명한 마자파힛(트로울란)의 트롤로요(Troloyo) 묘지에서는 14세기부터 매장된 19명의 무슬림 이름을 식별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인도 태생의 이슬람 선교사 자말룻딘 후세인 알아크바르(Jamaluddin Hussein Al-Akbar)는 각지를 여행하다가 1376년에 마자파힛에서 사망했다고 한다.[48] 가령 마지막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Creese, Helen. 《Women of the Kakawin World》. New York: Routledge, 2015.[49] 논문에서는 단순히 "자바"라고만 하는데, 마타람 왕국 또는 순다 왕국 시대이다.[50] Barbara Watson Andaya, <Studying Women and Gender in Southeast Asia>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n Studies》4 (2007): 113~136.[51] 입구의 석문에는 1437년으로 적혀 있음[52] 고대와 중세 자바어에서 산스크리트어 외래어는 매우 폭넓게 쓰였으며, 당시 지적 엘리트 그룹에 속한 자바어 텍스트의 저자는 산스크리트어 교육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대 및 중세 자바어 텍스트 가운데서도 산스크리트 문법서나 언어학을 다루는 몇 편의 글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일부 짐작할 수 있다. 인도 언어학을 계승한 자바의 언어학 전통은 인도에 비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그나마 이슬람화 이후 발전이 정체되었다. 그러나 전통 언어학 지식은 이슬람화 이후 19세기까지도 일부 계승되어 《츤티니》(Serat Centhini, 1814) 등에 인용되었다. (Bernard, Arps. "Indian influence on the Old Javanese linguistic tradition." in History of the language sciences: an international handbook on the evolution of the study of language from the beginnings to the present, vol.1 (New York: Walter de Bruyter, 2000), 186-190.)[53] 자바 문화권의 끄트머리에 걸치는 곳으로 명목상으로는 마자파힛의 만차나가라(동질적 속령)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54] 일부 학자는 당시 군도에서 학술적, 종교적 목적으로 간략화된 산스크리트어가 범지역적으로 쓰이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파가루융 초기 비문의 조악한 산스크리트어는 교육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55] 이 절의 내용은 다음 논문에 기반했다. De Casparis, Johannes Gijsbertus. "The use of Sanskrit in inscriptions of Indonesia and Malaysia." in Middle Indo-Aryan and Jaina Studies VII (Leiden: E. J. Brill, 1991), 29-46. 자바 및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작성된 산스크리트 문헌의 간단한 소개 및 고대와 중세 자바 문학의 형성에 미친 산스크리트 문학 전통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Suresh Chandra Banerji, A Companion to Sanskrit Literature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9), 589-592.[56] 하얌 우룩 시대에는 이미 싱하사리 왕국 등 13세기 자바계 세력들에 의해 스리위자야의 계승 세력인 다르마스라야 왕국이 약화되어 멸망 직전이었다.[57] 이후 드막 술탄 트릉가나의 딸인 칼리냐맛 왕국큰차나 여왕(Ratna Kencana, 재위 1549~1579)이 40척의 즈파라 함대를 이끌고 조호르 술탄국의 말라카 공격에 참여(1550)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큰차나 여왕은 1573~1574년에도 3개월 동안 이어진 아체 술탄국의 말라카 대포위 때 300척의 함대와 1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아체를 도왔으나, 결국 말라카 점령에는 실패했다.[58] Rakryan Mantri ri Pakira-kiran[59] Rakryan Mahamantri Katrini[60] Patih Hamangkubhumi, 라크랸 마파티(Rakryan Mapatih)라고도 함[61] Bhattara Saptaprabhu, 7인회, '존엄한 일곱'[62] Dharmmadhyaksa, 종교법관[63] Dharmma-upapatti[64] nagara, '나라'[65] kuwu, 오늘날의 면(kecamatan)에 해당[66] 나가라 아궁(Nagara Agung)[67] 오늘날의 블리타르군(Kabupaten Blitar) 일부도 포괄했을 수 있음[68] 이 싱하푸라는 오늘날 싱가포르 지역에 해당하는 싱아푸라 왕국 지역이 아닌 자바 서부의 지명으로 보인다.[69] 완전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카후리판, 다하, 투마펠, 웡크르, 마타훈, 위라부미, 카발란, 큼방즈나르(Kembang Jenar, 라슴), 파장, 자가라가, 클링, 클링가푸라(Kelinggapura), 싱하푸라, 탄중푸라(Tanjungpura).[70] 지역의 영주는 누산타라처럼 토착 지배 가문이 그대로 세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1] 수마트라(제한적으로 말레이 반도도 포함)와 보르네오의 경우, 마자파힛 이전 시대부터 토착 세력 및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관찰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어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보르네오 북부 브루나이 술탄국의 경우, 중국과 상대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중국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는데, 1370년에는 명나라 사절이 브루나이에 도착했고, 중국인들은 당시 브루나이가 마자파힛 통제하에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명나라와의 직접 접촉에 따라 송렴(宋濂) 등 당대의 중국인들은 브루나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브루나이 왕 마합모사(馬哈謨沙)도 명나라로 사신을 보냈다. 또한 1370년대부터는 브루나이가 명나라로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마자파힛의 종주권을 버렸는지는 다소 불명확하며, 당시 마자파힛과 브루나이의 정치적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사료는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다. 14세기 말에는 명나라가 브루나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관계로 브루나이는 약 30년간 명목상으로만 명나라의 조공국으로 남았다가, 정화(명나라)의 원정대가 해상 원정을 벌이면서 15세기 초에는 잠시 실질적인 명 제국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이 과정은 명나라 측 기록에 의해 상당히 상세히 알 수 있다. 1408년 브루나이의 국왕 카르나[92]가 신하들과 함께 명 제국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와서 영락제의 조정에 입조하고 난징에 머물던 사이 병에 걸려 승하했는데, 그 왕묘가 오늘날 '발니국왕묘'(浡泥国王墓)로 난징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대외 정책이 폐쇄적으로 바뀜에 따라 브루나이는 명나라로 보내는 조공을 끊고 독립적인 행보를 시작했다.[72] Manupadesa, 마자파힛 시대의 명칭이었다.[73] 《나가라크르타가마》와 14세기의 다양한 마자파힛 비문에서 《쿠타라마나와》를 직접 언급하고 있다.[74] 발리에서 자바식 힌두 법률 전통의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Helen Creese, "Old Javanese legal traditions in pre-colonial Bali," Bijdragen tot de Taal-, Land- en Volkenkunde 165 no.2-3 (2009): 241-290.[75] 오늘날 적어도 10종 내외의 판본이 있다.[76] 조항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쿠타라마나와》의 영역 발췌 일부를 중역했다. (링크) 링크에는 일부만 제시되어 있지만, 《쿠타라마나와》 자체는 영어로 완역되어 있다.[77] 이어지는 조항들에서 무거운 벌금으로 사형을 피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절도범은 기본적으로 매우 무거운 벌금에 더해 훔친 물건 값의 2배를 배상해야 한다.[78] 수마트라 서부 크린치(Kerinci)에서 발견된 것으로, 오늘날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다르마스라야 왕국 또는 파가루융 왕국 초기의 법령집이다.[79] 《파라라톤》에 따르면 라자사와르다나 이후 3년 동안 공위가 이어지다가, 웡크르 공 기리샤와르다나가 새로운 군주로 즉위했다.[80] Girisyawardhana로도 씀[81] 싱하위크라마와르다나 또는 판단살라스 공(Bhre Pandansalas)[82] 마자파힛 분열.[83] 라나위자야(Ranawijaya)[84] 라나위자야가 이전의 브라위자야 5세까지와 마찬가지로 '브라위자야'라는 이름을 자칭했는지에 대한 엄격한 문헌 증거는 없으나, 현대 자바인들은 라나위자야를 브라위자야 6세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브라위자야의 이름은 5세로 끝났다고 설명하기는 하지만, 본문 주석에서 소개한 토메 피르스의 《동방지》를 비롯하여 라나위자야 집권기에도 '브라위자야'의 이름이 적어도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85] 우다라의 쿠데타로 명목상의 군주로 남게 됨[86] 마자파힛 멸망[87] 1498년의 쿠데타로 라나위자야 왕에게서 실권을 빼앗았으나, 스스로 제위에 올랐거나 오르려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동방지》에 따르면 적어도 1513년에는 군주가 아닌 파티(대재상)의 위치에서 실권을 행사했다.[88] 대재상.[89] 사실상 이 시점에서 마자파힛 제국 붕괴. 이후 잔존 마자파힛의 강역은 드막 술탄국의 파티 우누스(Pati Unus, 재위 1518~1521)와 트릉가나(Trenggana, 재위 1521~1546)를 거치며 드막 술탄국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