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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3:43:55

키타큐슈 감금 살인사건

마츠나가 후토시에서 넘어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의 시작3. 오가타 준코 학대4. 토라야 부녀 감금 살인 사건5. 여성 감금 폭행 사건6. 오가타 일가 감금 사건
6.1. 오가타 일가 연쇄살인 사건
7. 토라야 딸의 탈출과 재감금8. 발각9. 사건의 수법과 살인 방식10. 재판 과정11. 뒷이야기

1. 개요

北九州監禁殺人事件

파일:attachment/kita_murder.jpg

방송에서 보여준 관계도

1996년부터 1998년 사이에 마츠나가 후토시(松永太)의 지시로 오가타 준코(緒方純子) 외 일가족이 저지른 연쇄살인 사건. 피살자는 전직 경찰관 토라야 쿠미오와 오가타 일가족 6명이다. 법적으로는 고문치사한 오가타 일가족의 가장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이 살인죄로 인정되었다.

범인은 철두철미한 수법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자파살인이라는 평도 있다. 범행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에 키타큐슈 지역에서만 알려졌으며 그나마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사건의 전모가 퍼져 나가면서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알려졌다.

2. 사건의 시작

이 사건의 주범인 마츠나가 후토시는 1961년 4월 28일 후쿠오카현 코쿠라시에서 태어난 남자였다. 마츠나가는 학교에서 괜찮은 성적과 잘생긴 외모에 매력적인 성격 탓에 인기가 좋았으나 실제론 어린 시절부터 매우 반항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번번이 학교 규율을 어겨 문제를 일으켰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던 탓에 교사들로부터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고등학생중학생임신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정학 처분을 받고 19살 때 결혼했다. 부모가 이불 사업을 했기 때문에 가업을 물려받아 1983년에 "월드"라는 회사를 차려 이불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사장으로서 보통의 사업가와는 다른 막장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소비자에게 싸구려 이불을 고가로 강매하는가 하면 직원에게도 할당량을 강제로 부과하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본인의 기분이 나쁘면 직원을 방음 처리된 방에 가두고 전기 충격을 가하는 등의 믿지 못할 폭행과 폭언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직원은 감히 퇴사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가 "나한텐 야쿠자가 있어. 사표? 쓰기만 해봐. 내가 야쿠자 시켜서 너랑 너네 가족들 다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라고 협박을 가한 탓이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중에도 가정폭력과 다른 유부녀와 관계를 맺는 막장 행각을 벌이기도 했는데 9명의 주부들과 불륜 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한다.

공범 오가타 준코는 마츠나가보다 1살 아래인 1962년생으로, 당시 단기 대학을 나와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본인의 부주의로 유치원생 한 명이 작은 사고를 입게 되는데, 문제는 그 유치원생의 아버지가 지역 야쿠자였고 준코는 지속적으로 야쿠자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80년, 졸업 앨범을 보던 마츠나가는 동급생이었던 오가타 준코가 눈에 들어와 즉각 전화를 걸었고, 이런 그녀의 상황을 단숨에 파악해 고민 상담 등을 해주었다. 준코도 점점 그런 그에게 의지하게 되며 두 사람의 관계가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결국 준코는 그가 결혼을 한 유부남임에도 불륜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후 준코는 마츠나가의 사무실에서 숙식까지 하게 된다.[1]

3. 오가타 준코 학대

준코가 마츠나가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의 부모인 오가타 타카시게와 오가타 시즈미는 마츠나가의 재산 현황 및 경력 등을 파악한 뒤[2] 마츠나가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자 마츠나가는 직접 타카시게와 시즈미를 찾아와 예의 바른 청년의 모습을 보이면서 말발로 두 사람을 완전히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 준코와 마츠나가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그녀가 우연히 예전에 사귄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내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마츠나가는 이때부터 그녀를 마구 폭행하고 학대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준코에게 이전에 쓴 일기장을 모두 가져오라고 한 뒤 일기장을 보면서 내용을 캐묻고 폭행을 가했는데 폭행이 지속되자 괴로워진 그녀는 어떻게 하면 날 믿겠느냐고 하소연했지만 마츠나가는 "담배로 너의 팔뚝을 지져서 내 이름을 새겨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태연하게 지껄였고 결국 그대로 해야만 했다.[3]

마츠나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1985년 2월 부모님의 집에서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자살 기도 이후 마츠나가는 더욱 그녀를 학대하면서 아예 친가에서 나오게 하고 유치원 교사 일도 그만두게 하며 주위 사람들과의 연락도 끊게 만들었다. 심지어 당시 마츠나가는 아직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일로 인해 그녀는 마츠나가에게 절대 복종하는 상태가 되었고 이는 더 큰 불행을 낳았다.

4. 토라야 부녀 감금 살인 사건

마츠나가가 하던 이불 판매 사업은 견디다 못한 고객과 직원이 경찰에 고발하면서 1992년 7월에 막을 내렸고 마츠나가는 사기죄와 공갈 협박죄지명수배를 당했다.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한 틈을 타 도피하던 중 1996년 1월 마츠나가는 이전에 가짜 회사를 차리자고 자신에게 제안했던 전직 부동산 회사 직원 토라야 쿠미오를 떠올리고 준코와 함께 키타큐슈시에 몰래 숨어들어가 토라야 쿠미오와 그의 17살 된 딸[4]납치했다. 이후 토라야가 저지른 사소한 범죄를 약점 삼아 이를 이용해 토라야를 학대하고 고문했는데, 마츠나가는 토라야를 욕조에 묶어두고 전기고문을 하는 것을 가장 즐거워했다고 한다.

2월 26일 학대와 고문에 시달리던 토라야가 사망하자 마츠나가는 준코와 토라야의 딸에게 토라야의 시신을 훼손할 것을 종용했고 두 여자는 시신을 훼손한 뒤 바다에 갖다 버렸다. 마츠나가는 토라야의 딸에게 토라야가 사망하기 직전에 토라야의 팔을 살점이 뜯어져 나갈 정도로 아주 세게 물도록 한 뒤에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이는 시신 훼손과 더불어 토라야의 딸에게 아버지의 학대에 가담했다는 죄 의식을 심어주려는 목적이었다. 이후 토라야의 시신을 훼손한 뒤 유기했다는 점과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정신적으로 학대를 가하는 인간 말종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토라야의 딸은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무기력해졌고 마츠나가는 그녀를 계속 감금하고 감시했다.

5. 여성 감금 폭행 사건

토라야 사망 이전에 토라야를 통해 한 유부녀를 알게 되었던 마츠나가는 교토대학 출신의 카와이 학원 강사로 자신을 위장한 뒤 그녀와 사귀게 되었고 3살이었던 자신의 작은 딸과 함께 마츠나가, 준코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는데 1996년 12월 30일부터 1997년 3월 16일까지 마츠나가와 준코가 그녀와 작은 딸을 방에 감금하고 매일 폭행했으며 총 560만 엔을 갈취했다.

3월 16일 새벽 폭행을 참다 못한 그녀가 2층 방의 창을 열고 밑으로 뛰어내려 탈출하자 마츠나가와 준코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고 남겨진 그녀의 어린 딸은 어차피 증언을 할 수 없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그녀의 전남편 집 앞 대문에 버려두었다.

그래도 이 시점까지는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5] 않았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6. 오가타 일가 감금 사건[6]

마츠나가의 연쇄살인극은 이간질로부터 시작되었다.

토라야를 살해한 뒤에도 마츠나가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는지 준코를 오이타현 유후인쵸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게 했는데 이 기회를 틈타 준코는 마츠나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낌새를 눈치 챈 마츠나가는 준코에게 토라야를 살해한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냐며 협박해 준코를 다시 자신이 살던 맨션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1997년 4월 마츠나가를 견디다 못한 준코가 도망치자 마츠나가는 준코를 붙잡기 위해 준코와 자주 만나던 준코의 여동생 오가타 리에코의 귀에 들어가도록 '마츠나가가 자살했으며 이미 장례까지 마쳤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이 헛소문은 리에코의 귀에 들어갔고 리에코를 통해 마츠나가가 죽었다는 헛소문을 들은 준코가 안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런 준코 앞에 나타난 것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마츠나가였다.

차라리 이때 도망쳤던 준코가 경찰에 자수해 범행에 대해서 실토했다면 이후 일어날 더 큰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이미 마츠나가에 의해 정신적으로 함락된 상태였던[7] 준코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츠나가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게 된다. 마츠나가는 더더욱 준코가 자기 옆 외에는 갈 데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유후인쵸에 있던 준코의 직장의 사장이나 동료에게 준코가 갖은 험담을 퍼붓는 전화를 걸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후 마츠나가는 준코의 부모와 여동생을 준코의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면서 불러냈고, 준코가 토라야의 시신을 훼손하고 시체유기를 했다는 것을 빌미로 도피 자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돈을 뜯어내기도 했으며 준코의 아버지인 타카시게에게 토라야 살해 현장의 배관을 교체하도록 해서 증거 인멸 공범으로 만들었다. 준코의 부모와 여동생이 이때 옳은 길을 선택해서 경찰에 신고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그들은 '가족이 살인을 했다는 이유로 세상에 드러나서 체면이 깎이고 싶지 않다'는 잘못된 생각을 해 버렸고[8] 그 대가로 참혹하게 파멸했다.

언니의 문제 때문에 준코의 여동생 리에코가 자꾸 집 밖으로 나돌자 리에코의 남편인 오가타 카즈야는 리에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츠나가는 카즈야가 그런 의심을 한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는데 이전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카즈야가 장인 타카시게에게 땅을 받기로 했었으나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과 리에코가 낙태를 한 경험이 있다는 것 등 민감한 사생활과 가정사를 캐내어 교묘하게 장인과 아내에 대한 의심하도록 카즈야를 부추겼다. 이에 카즈야는 점점 장인과 아내에 대한 의심이 커져 갔고 마츠나가는 마치 좋은 이해자인 양 "당신은 속아서 결혼한 거야. 속인 건 그 새X들이니까 마구 쳐갈겨도 상관없어" 라며 조언하는 척 폭력을 부채질했다. 결국 카즈야는 마츠나가의 꼬드김에 넘어가 사실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장인, 장모와 아내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즈야가 마츠나가에게 리에코가 방에 더블 사이즈 침대를 두어서 방이 비좁아졌다고 푸념하자 마츠나가는 되려 리에코 편을 들면서 카즈야를 몰아세웠다. 믿었던 마츠나가가 이렇게 나오자 당황한 카즈야는 마츠나가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이를 이용해 마츠나가는 카즈야에게 토라야 살해 현장의 욕실 타일을 새로 바르게 하여 증거인멸에 가담시켰다. 이후 마츠나가는 카즈야에게 증거인멸에 가담한 것을 교묘하게 주기적으로 언급하여 카즈야에게 공범 의식을 심어주었고 카즈야로 하여금 오가타 일가를 감시하도록 해 저항이 나오지 않도록 만드는 치밀한 행보를 보였다.

카즈야의 "아이들을 놔두고 고쿠라(키타큐슈)에 온 게 걱정이다"라는 입방정을 들은 마츠나가는 8월여름 마츠리를 핑계삼아 카즈야의 큰 딸 아야와 작은 아들 유키를 자신들이 있는 고쿠라의 멘션으로 데려온 뒤 다니던 초등학교어린이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카즈야의 일가 4명은 서류상으로는 구마모토현 타마나시로 이사를 간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고쿠라에 살고 있었다.

아이들까지 모두 손아귀에 넣은 마츠나가는 오가타 일가를 마음껏 이용했다. 카즈야는 아예 마츠나가에게 면허증 열쇠를 맡기고 필요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필요한 돈도 일일이 마츠나가에게 보고해 돈을 받고 차용증을 써야 했다. 쿠루메시로 갈 때도 카즈야는 마츠나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일일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보고해야 했다. 자금이 부족해지자 타카시게에게 농협 대출을 받게 하고 시즈미는 소비자 금융에서 돈을 빌렸으며 리에코와 카즈야는 사표를 쓰고 퇴직해서 퇴직금을 받아 고스란히 마츠나가에게 갖다 바쳤다. 이런 일련의 행보에 다른 친척이 의심을 품게 되자 아예 절연장을 보내서 고립시켜 버렸다. 더 이상 돈을 빌리거나 마련하기 어려워지자 마츠나가는 오가타 일가 6명을 전부 감금한 뒤 고문을 가해 서로가 말하는 것을 들려주었다. 마츠나가에게 약점을 잡혀 놀아나게 된 오가타 일가는 서로 싸우고 의심하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이들은 완벽하게 마츠나가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마츠나가가 일가족의 심리를 완전히 장악한 방법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가스라이팅 수법이다. 살인까지 저지른 그는 그중에서도 매우 질 나쁜 악성에 해당한다.
①러브바밍(love bombing, 애정공세): 타깃이 원하는 모습으로 접근한다. 장점이나 재능에 대한 찬사, 친밀하고 다정한 언행, 선물 공세 등등은 덤. 처음에는 멈칫거리다가도 곧 마음을 열고 신뢰하는 단계를 거쳐 그를 소울메이트라 여기는 기점(起點)에 도착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누군가를 외면하긴 쉽지 않다.

②평가 절하(Devalue): 마음을 나누고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태도가 돌변한다. 갑자기 차갑게 굴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묘하게 깎아내리기도 하고, 찬사를 퍼붓던 장점을 단점으로 폄하한다.
타깃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고민한다. 원인을 찾지 못하면 애먼 자신을 성토하고 자책한다. 조종당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친구 관계를 끊으라면 끊는다. 그의 짐을 모두 이고 지고 시녀처럼 따라다니면서도 무시당하기 일쑤다. ‘나는 너를 너보다 더 잘 알아’라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그런 것 같다. 그가 말하는 내 모습이 진짜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다 타깃이 이 관계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먹고 피하기 시작하면 이런 징후를 귀신같이 포착한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잘해주기 시작한다. 딱 '아,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다정했지'하는 달콤한 추억을 복기시킬 만큼만.

③스미어 캠페인(smear campaign, 중상모략): 타깃은 헌신하다 헌신짝이 된다. 그는 주변에 타깃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이간질도 서슴지 않는다. 온갖 모략과 거짓말로 타깃을 쓰레기 혹은 스토커로 만들어 놓는다.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얻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평판을 방어하면서 타깃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왜 버리느냐고? 이제 더 얻을 게 없거든.출처
마츠나가는 오가타 가족에게 좋은 이해자인 척하면서 사생활과 가정사를 캐냈고(①), 이에 타깃이 넘어가자 갑자기 돌변하며 몰아세워 당황하게 하여 무슨 짓에든 복종하게 만들었으며(②), 온갖 강요로 직장 사직, 등교 거부, 의절까지 하게 만들면서 일가족을 집 밖의 누구도 '이제는 정나미가 떨어져 더 신경쓰기도 싫은 쓰레기들'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고립시킨 뒤 금전을 갈취하다가, 더 뺏을 것도 없어지자 엽기적이기 그지없는 짓들을 시작하며 하나하나 죽여가면서(자세한 것은 후술) 처참하게 버려갔다(③). 소름돋을 만큼 패턴이 일치한다.

6.1. 오가타 일가 연쇄살인 사건

이후 마츠나가는 본격적인 살인 행각에 들어갔다. 일단 기준은 마츠나가의 범행이다.[9]

6, 7번째 범행은 아이들을 죽인 것이 특징인데 정상적인 의사 표현 능력 및 상황 판단력이 전무한 3살짜리 아이는 살려준 것과 대조된다. 5살, 10살짜리 아이는 범행을 어느 정도 진술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총 7명이었던 오가타 일가 중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애초에 마츠나가의 공범격이었던) 준코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다만 같이 동거하던 토라야의 딸은 죽이지 않았고 범행에도 가담시키지 않았다.

7. 토라야 딸의 탈출과 재감금

한편 17살 때 최초로 부친인 토라야와 함께 감금된 후 몇 년 동안이나 마츠나가에게 잡혀 있던 토라야의 딸[A]2002년 1월 30일에 마츠나가의 감시가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키타큐슈에 살던 토라야의 부모(즉 토라야의 딸에겐 조부모) 집으로 도망쳤는데 조부모의 집에서 약 보름 정도 생활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국민건강보험에도 가입하는 등 생활의 기반을 쌓아 갔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마츠나가와 연애 중이던 그녀의 큰어머니가 그녀의 행방을 마츠나가에게 알렸고 마츠나가는 바로 조부모의 집에 쳐들어와 그녀를 다시 납치해갔는데 다시 잡혀간 그녀는 전기 고문을 당하거나 펜치로 꼬집어 살점을 닥치는 대로 뜯어내는 등 학대를 당했지만 위험 인물이라는 게 명백해져 제거해야 하는 상황임에도[13] 그동안의 행태와 달리 무슨 생각에서인지 마츠나가는 죽이지 않은 채 가둬 놓기만 했다. 그녀는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혀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도망을 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다.

8. 발각

2002년 3월 6일 토라야의 딸이 조부모 집에 몰래 전화를 걸어 자신이 감금된 곳을 알리면서 도움을 청했는데 전화를 받은 조부모가 경찰에 신고했고 다음 날인 3월 7일 경찰이 마츠나가와 준코를 체포했다.

체포 당시 마츠나가와 준코는 모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자신들의 신원도 밝히지 않았으나 준코가 가지고 있던 사진첩으로 이들의 신원이 드러났다. 경찰은 이 사건을 마츠나가와 준코가 토라야의 딸을 감금한 사건으로 분류했지만 토라야의 딸이 본인의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자백하면서 수사 방향은 살인 사건으로 바뀌었다. 경찰은 살해 현장으로 의심되는 곳의 배관까지 잘라서 수거된 DNA 감정을 의뢰했으나 건진 게 없었다. 마츠나가가 치밀하게 모든 피해자들의 시신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배관과 타일을 바꿔 버렸기 때문이었으며 설령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범행 발생부터 발각 시점까지 무려 4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도무지 물적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마츠나가는 설령 물적 증거가 있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살해한 것이 아니라고 우길 참이었다.[14]

그런데 준코가 마츠나가를 배신하고 자백했는데 마츠나가의 지시에 의해서 7명이 살해됐고 자신도 그 중 일부에 가담했으며 시신은 모두 바다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비록 물적 증거는 없었으나 오가타 일가가 학대를 받으면서 작성한 사실 확인서나 시체를 토막내는 데 사용한 톱과 날의 구입 일자를 알 수 있는 영수증, 마츠나가가 살던 맨션의 다른 거주자의 증언 등 정황상의 증거들이 차곡차곡 모였다.[15]

마츠나가가 토라야의 딸을 살려둔 이유도 후에 밝혀졌는데 마츠나가는 토라야의 딸에게 4명의 아이를 돌보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이 아이들 중 2명은 마츠나가와 준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고[16] 나머지 두 아이는 쌍둥이로 다른 여성의 가정불화를 이용해 맡은 아이들이었다. 토라야의 딸은 모든 진상이 드러나면서 마츠나가와 준코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사체유기죄로 형사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마츠나가는 토라야의 딸이 온갖 고문에 딱히 반항도 하지 않았고, '설마 빨간줄에 패륜아 낙인까지 찍혀가며 경찰에 진술을 하겠느냐'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피해자로는 마츠나가가 사기죄로 지명수배 되자 마츠나가의 강요로 함께 도피 생활을 하던 '월드'의 전(前) 직원이 있었는데 이 직원은 학대를 견디다 못해 결국 도망쳐 버렸다. 마츠나가의 체포 이후에도 이 직원은 '마츠나가를 다시 대면하기도 싫다'면서 피해 진술을 거부해 이 직원을 학대한 혐의는 기소되지 못했다.

마츠나가의 동창생인 여성도 있는데 역시 유부녀였던 그녀는 결혼을 미끼로 마츠나가에게 1,160만 엔을 뜯겼고 1994년 3월 오이타현 벳푸만에서 투신자살했다. 그녀의 1살 된 딸도 죽었는데 겉으로 보면 사고사지만 워낙 그 과정이 부자연스러워 피살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기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토라야의 딸이 돌보던 쌍둥이 아이들의 엄마도 있는데 마츠나가는 이 여성을 풍속점[17]에서 일하게 하면서 양육비 명목으로 2,500만 엔을 뜯어냈다. 중범죄와의 연관성은 전무했고 그녀도 피해 진술을 거부해 이 건도 기소는 되지 않았다.

9. 사건의 수법과 살인 방식

10. 재판 과정

준코는 토라야와 자기 아버지의 피살에 상해치사를 주장했고 조카 남매에 대해서는 살인 혐의를 인정했으며 3건의 살인은 마츠나가의 지시에 의해 이미 피살된 사람들이 저질렀다고 진술했지만 마츠나가는 7명의 죽음에 대해서 무죄를 주장했다. 일본 사법 체계상 범인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 때는 분리심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준코가 "마츠나가 그 사람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고 주장해 병합심리가 계속 진행되었다.

마츠나가는 "토라야와 타카시게의 납치 및 고문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살해는 전적으로 준코의 짓이고, 오가타 일가의 죽음은 자신과는 무관하다. 내가 7명을 죽일 동기가 어디 있냐? 나는 토라야와 타카시게의 사망 현장 외에는 있지도 않았다. 타카시게의 살해 직전에 아이들은 여관으로 옮겼기 때문에 아이들은 타카시게의 살해를 보지 못했다."면서 살인죄와 상해치사죄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고 "시즈미와 리에코가 자신과 성적 관계를 맺고 있어서 모녀지간에 날 두고 싸움을 벌인 결과로, 나는 휘말린 것뿐이다."라는 진술도 해 방청객의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마츠나가의 진술 중에는 "타카시게의 회사 설립은 빚이 많아서 무리였다, 무직 상태이던 리에코가 빚을 어떻게 지나, 타카시게의 살해를 목격한 덕에 토라야의 딸이 사건 경위를 소상히 진술한 거다."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도 많아서 본인이 재판 진행 중에 진술을 번복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하며 7명을 살해한 잔인무도한 범행임에도 태연하게 마치 만담을 하는 듯한 말투로 진술해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고 한다.[23]

1심 재판에 화상회의 방식으로 증언한 토라야의 딸은 "나에게는 마츠나가와 준코가 모두 악마로 보였습니다. 내게 원수를 갚는 길은 저 둘에게 사형이 내려지는 것 뿐입니다."라고 진술했고 1996년부터 1997년 사이에 감금당했다가 탈출했던 여성은 역시 화상회의 방식의 증언을 했지만 마츠나가가 전기 고문을 가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신적 충격으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여 재판장이 잠시 정회(停會)를 선언해야 했다. 재판이 속개된 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발 마츠나가를 죽여주세요."라고 겨우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리에코의 시어머니(즉 카즈야의 어머니)도 법정에 증인으로 나서서 준코를 노려보면서 "죽은 우리 손녀가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 애까지 낳았다는 네 년은 아무 느낌이 없었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2005년 3월 2일 검사는 최후 진술로 "선악 개념이 없는 입안자 마츠나가와 오로지 충실하게 실행한 실행자 준코는 차바퀴의 양쪽 축이라 할 만한 관계로 전락했다. 희대의 연쇄대량살인으로 두 피고의 죄는 일본 범죄사상 최악의 중대한 범죄다. 돈줄로서 이용 가치가 없어진 피해자들을 입을 막고 7명을 말살한 귀축(鬼畜)의 소행을 저지른 두 피고인에게는 극형을 가하는 게 마땅하다."라며 두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했으며 마츠나가와 준코의 관계를 채찍질하는 마부와 달리는 말에 비유하기도 했다.

2005년 9월 28일 1심 재판부인 후쿠오카 지방재판소는 판결로 "마츠나가의 증언은 서로 불일치하며 모순이 많기 때문에, 마츠나가의 지시에 의해서 5명이 살해되고 1명은 직접 살해했으며 1명이 사망(상해치사)한 것이 인정된다. 준코는 마츠나가의 지배 때문에 서로 적대시했던 토라야의 딸의 증언과 그 내용이 일치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의 증언도 기꺼이 하고 있는 점[24], 아버지는 소생시키려고 했다는 정황이 인정되어 상해치사가 인정되지만, 토라야의 경우는 명백한 살인이다."라고 평가하고 조카 남매에 대한 살인도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두 사람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마츠나가는 항소했고 준코는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며 판결에 승복하려고 했으나 폭력 및 지배 구조 문제 때문에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마츠나가와 동일하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변호인단의 설득에 항소에 동의했다.

2심에서는 준코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변호인단은 준코가 가정폭력성폭행 피해자로서 마츠나가에게 복종하게 된 것인 만큼 감형해달라는 논지를 폈는데 이에 호응해 성폭행 피해자 단체에서 준코의 감형을 탄원하는 탄원서가 올라오기도 했다.

2007년 9월 26일, 후쿠오카 고등재판소는 마츠나가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하는 원심을 유지했지만 준코는 카즈야가 전직 경찰관으로서 두 건의 살해에 가담한 점, 그리고 폭력으로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닌 점과, 비록 검거된 이후라고는 하지만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자신의 범행을 반성하는 점, 세 건의 살인은 준코가 가담한 것은 아니므로 정신이상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사형을 반드시 선고해야 하는 나가야마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점 등을 들어 기존 판결을 파기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마츠나가는 다시 항소했고 준코는 검찰이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2011년 12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마츠나가와 검찰의 항소 모두를 기각하면서 마츠나가와 준코의 형이 확정되었다. 최고재판소는 준코에 대해서도 "사형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장기간 학대를 당했다는 점에서 지시에 순응적일 수밖에 없는 심리 상태였다는 점과 나가야마 기준상 반드시 사형에 해당하지는 않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에 적극 협력해서 진상을 밝히게 된 것으로도 (교화 여지가 있으므로) 생명을 박탈하여, 사회로부터 영구적으로 격리시킬 이유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한 최고재판관은 "오가타 준코 피고인의 사정이 딱하다는 점은 인정되며, 모든 것을 피고에게 유리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흉악한 범죄의 중대성을 감안한다면, 이런 경우는 안타깝지만 부득이하게 사형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마츠나가 후토시는 사형이 확정된 상태로 구치소에 수감 중[25]이며 오가타 준코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토라야의 딸도 범죄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이쪽은 준코와 달리 명백하게 강요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불가항력에 의한 범행으로 인해 기대가능성이 없어 처벌을 면했으며 2011년 범죄 피해자에게 주는 배상금을 수령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11. 뒷이야기


[1] 나중에 본처가 이 모습을 보게 되었고 도망칠까 생각도 하였지만 혹시나 마츠나가에게 아이를 빼앗길까봐 주저했다고 한다. 마츠나가는 사무실에서 종종 본처와 준코를 같이 폭행하였는데, 본처는 매우 반항적이었던 반면 준코는 이때도 소리도 내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본처는 1992년 1월, 결국 아이와 함께 도망쳐 경찰서에 가정폭력으로 마츠나가를 신고했고, 소개된 상담소로 피신했다. 마츠나가는 소재파악을 시도 했지만 시청에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은 채 아이의 전학을 특별히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고, 두달 만에 이혼이 성사되었다. 직후 후술할 지명수배까지 떨어지며 다행히 그녀는 완전히 마츠나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본 사건이 알려지고 난 후, 그녀는 나와 아이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준코를 버렸고 그 때문에 준코가 마츠나가에게 끌려다니게 되었다며 준코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2] 반대로 마츠나가 측도 오가타 일가는 물론 시즈미 본가의 재산까지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3] 마츠나가가 오른쪽 가슴에 담배로, 오른쪽 허벅지으로 이름을 새기라 명령했다는 설도 있다.[4]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5] 토라야 쿠미오는 살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이 마츠나가의 진술이다. 다만 법정에서는 미필적 고의로 살인죄가 인정되었다.[6] 이 문단은 마츠나가와 준코의 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므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다.[7] 실제로 이런 사례는 꽤 많이 나타난다. 프랑스연쇄살인범 미셸 푸르니레의 아내 같은 경우도 연쇄살인 행각을 중간에 막을 수도 있었지만, 이미 상습 학대로 인해 정신적으로 장악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결국 그 대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오스트리아의 범죄자 요제프 프리츨의 범행이 수십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가족이 사실상 프리츨의 노예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8] 사실 일본은 범죄자들의 가족들이 겪는 이지메가 매우 심해서 평생을 숨어 살거나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보니 가족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죄가 없던 사람들까지 또다른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9] 준코는 토라야에 대한 살인을 포함해 2번, 6번, 7번 범행에 가담하여 3건의 살인과 1건의 상해치사가 인정되었다.[10] 준코가 살리려 했다고 말했고 마츠나가도 살해 의도를 부인했기 때문에 이 사건만 상해치사로 처리되었다.[11] 진술에 의하면 준코가 등으로 몸을 눌러 붙이는 사이에 카즈야가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한다.[A] [13] 실제로 마츠나가는 오가타 일가의 살해를 목격, 가담한 아야를 증거인멸 목적으로 살해한 바 있다.[14] 실제로 그가 직접적으로 죽인 적은 없다.[15] 준코는 "차라리 감옥 생활이 더 편하다"면서 "교도소는 식사도 할 수 있고, 화장실에도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독서할 시간도 있다"고 말했다.[16] 각각 장남 1993년 1월 24일생, 둘째 아들 1996년 5월 29일생. 마찬가지로 이 아이들 역시 전기 고문과 식사 제한 등의 학대를 받았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학교도 병원도 갈 수 없었다.[17] 일본에서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게를 이렇게 말한다.[18]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초 단 1초를 당하는 것만으로도 눈 앞이 하얘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고, 환부는 시커멓게 불에 탄 것처럼 되었으며, 뭐라고 형용할 수조차 없는 작열감에 온몸이 꼬이며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마츠나가가 이들에게 가한 전기 고문은 최대 30만 볼트에 육박했다고 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400볼트의 테이저건만 맞아도 한 방에 기절해 버리는 인간이 어떻게 30만 볼트의 초고압에 밥 먹듯이 고문을 당하고도 쉽게 죽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사실 고통의 정도가 아닌 사망율에서는 전압 그 자체보다는 전류의 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정전기는 그 전압이 2만 볼트에 이르지만 전류량이 10조분의 1와트 정도에 지나지 않아 그냥 일시적으로 조금 따가운 정도다. 반면 전류의 양이 많아지면 400볼트의 테이저건에도 사람이 죽는 사고가 미국에서는 매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즉 전류의 양만 일정하게 조절한다면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지옥 같은 고통을 계속적으로 가하면서 살아 있게 할 수 있다.[19] 3살짜리 아이에게까지 손을 댄 이유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복종하는 효과를 노리기 위해 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20] Behavior Control, Information Control, Thought Control, Emotion Control. 행동통제, 정보통제, 사고통제, 감정통제.[21] 사기꾼들의 말이 논리적이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달변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이 차지하는 비중이 7%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93%는 목소리 톤과 표정, 태도, 분위기, 눈빛, 제스처 등의 신체 언어로 전해진다. 이들은 피해자를 꼬드기기 위해 자신감 있는 태도와 매력적인 모습을 연출하는데 이러한 비언어적 요소들이 말의 내용보다 더 크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22] 사이코패스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연쇄살인마토막 살인만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사기꾼 등 경제사범들의 수가 훨씬 많은데 형량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기 때문이다. 유영철이나 강호순과 같은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들은 신문지상에서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지만 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들은 현실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이다.[23]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을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하거나 재판관들이나 배심원들이 자신을 어떻게 여길까 하는 부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장난하는 것처럼 법정에 서는 바람에 사람들의 분노를 사서 형이 더 늘거나 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이코패스도 어린아이를 죽이는 일은 거의 없는데, 거부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어차피 신고나 증언을 해 봐야 신빙성이 없어서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24] 이것이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25] 일본의 사형 제도는 죄질이나 확정 시간대와 무관하게 무작위로 집행 명령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아서 의외로 빨리 집행될 수도 있긴 하다. 대표적인 예로 묻지마 살인가나가와 마사히로는 불과 3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26] 참고로 살육에 이르는 병은 19세 미만 구독불가 딱지까지 받았는데 이 책은 안 그랬다.[27] 부모의 체포 당시 초등학생이었으며 인터뷰 당시에는 2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