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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3:22:44

백제/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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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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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조
百濟王朝
기원전 18년 ~ 660년
국성 부여씨
창건자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마지막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국호 십제 (기원전 18년)
백제 (기원전 18년 ~ 660년)
군주 직함 대왕(어라하, 건길지) (기원전 18년 ~ 660년)
통치 국가 백제 (기원전 18년 ~ 660년)

1. 개요2. 불행한 왕사3. 가계도
3.1. 근초고왕 이전3.2. 초고왕계3.3. 개루왕계
4. 연표5. 번외
5.1. 백제의 제후왕 및 후작5.2. 웅진도독 대방군왕
6. 《신찬성씨록》의 백제계 성씨7. 기타8. 둘러보기

1. 개요

파일:무령왕 표준영정.jpg
문헌 및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백제 국왕의 복식을 구현한 무령왕 표준영정.[1]

백제에는 677년 동안 군주 31명이 있었고 평균 재위기는 21년이라고 하지만, 삼국사기상 백제 초기 기년은 믿을 수 없고 최대한 인상한다한들 2세기 후반이 거의 상한이니 이러한 계산과 재위기간은 큰 의미가 없다. 굳이 따지면 기년 신뢰도가 그럭저럭 높은 편인 3세기 후반 책계왕 때부터 하는 게 현실적이다.

백제에서 군주들을 생전 이름이 아니라 시호로 부르는 용례는 24대 동성왕 때부터 공식적으로 도입되었고, 그 전의 군주들은 모두 '이름+왕'의 형태로 불렸다. 동성왕 때 시법이 온전히 정착된 것도 아니어서, 27대 위덕왕을 '창왕'이라고 부른 금석문도 발견되었다.

성씨는 '부여씨'인데 줄여서 '여씨'라고도 했다.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은 부여 서씨[2]와 의령 여씨[3]라고 한다.

재위 기간이 가장 긴 군주는 삼국사기상 기록으로는 재위 52년인 8대 군주 고이왕이지만, 영토 확장 기록이 고고학적 기록과 정면 충돌하면서 맞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아예 하남위례성 정도로 유력한 시기(기원후 3세기 중후반)와도 잘 맞지 않아, 큰 신뢰도는 없다고 봐야 한다. 한편 가장 짧게 재위한 군주는 고이왕의 바로 앞 군주이자 고이왕에게 왕위를 빼앗겨서 재위 1년도 못 채운 사반왕이다.

군주들의 재위 기간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교해 굉장히 짧은 편이다. 13대 근초고왕부터 31대 의자왕까지 314년 동안 재위했는데, 삼국사기 기준으로 기계적으로 계산하면 근초고왕부터 의자왕까지 총 17세대로 하여 한 세대당 평균 재위 기간은 겨우 18.47년에 불과하지만 이는 삼국사기 백제사 부분 관련 특유의 세대 오류를 보이는 통계일 뿐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계보가 보다 정확한 것으로 평가받는 《일본서기》 기준으로는 개로왕-문주왕이 같은 항렬, 동성왕-무령왕이 같은 항렬, 위덕왕-헌왕이 같은 항렬로 배열되어 총 14세대가 되므로 평균 22.43년이라는 현실적인 결과가 나온다. 구이신왕-비유왕과 법왕-무왕의 세대수는 정확히 서술되지 않았으므로 제외.

2. 불행한 왕사

한국사의 역대 국가 중 가장 불행하고 피비린내 나는 왕사를 가지고 있다. 백제 역사가 제대로 파악되는 근초고왕 이후부터의 군주들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양대에 걸친 최전성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전쟁이나 반란에 휘말려 시해당했다. 게다가 대부분 군주들의 생년도 불확실하다. 무령왕은 웅진백제에서 즉위한 백제 군주 가운데 유일하게 시해되지 않은 군주로, 중흥에 성공한 무령왕 이후에야 그나마 군주들이 비명에 가는 현상이 줄어들었다.

31명의 군주들 가운데 13명이 단명하거나 암살(추정 포함) 및 폐위되었고,[4] 3명은 전쟁 중 전사했으며,[5] 1명(의자왕)은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기록이 불분명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해당하거나 시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군주는 초기 6명을 제외한 중반기에 몰려 있는데, 중반기에서도 고이왕 - 비류왕 - 근초고왕, 근구수왕 - 전지왕 - 무령왕, 무왕 - 의자왕의 8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주들이 이에 해당된다.

의자왕 때 나라가 멸망한 걸 생각하면 정말 제대로 천수를 누린 군주는 31명 중 고작 8명에 불과하다. 특히 웅진 시절이 심한데,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까지 총 4명 중 천수를 누린 왕은 무령왕 단 하나 뿐이다. 마지막 군주인 의자왕은 참칭왕 부여태, 부흥군왕 부여풍을 비롯한 백제 왕실 및 대부분의 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 당나라에서 생을 마쳤다.[6]

그와 별개로 고구려만큼은 아니지만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들 중에서 60 정도 살거나 60~70대 정도 산 것으로 추측되는 왕들이 여러 명 있는 것으로 보아[7] 같은 혈족이라는 고구려 왕가와 마찬가지로 백제 왕가도 어느 정도의 장수 유전자가 있지 않았냐는 설이 있다. 다만 그렇다고 허구한 날 왕이 살해당했다고 보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8]

3. 가계도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가계도로, 일부는 《일본서기》의 계보를 기입했다. 비록 《일본서기》는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삼국사기》 편찬 당시 존재하는 백제 관련 기록이 적었기 때문에 〈백제본기〉가 부실하고, 《구삼국사》를 인용한 《삼국유사》에서도 백제 관련 기록이 가장 적으며, 현전하는 백제의 금석문도 고구려신라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9] 반면 《일본서기》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일본세기》 등 도래인들이 쓴 사서를 직접 인용했기에 백제 왕력에 한해서는 일반적으로 《일본서기》 쪽이 더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무령왕릉 발굴로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3.1. 근초고왕 이전

0.동명 -.비류
1.온조 2.다루 3.기루 4.개루 5.초고 6.구수 7.사반
11.비류 ?
13.초고
8.고이 9.책계 10.분서 12.

흔히 동명왕은 곧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북방 고리국에서 나와 부여의 시조가 된 동명이라는 인물이 있다. 즉 부여 계승을 강조했던 백제는 고구려 주몽 신화가 아닌 부여 동명 신화를 강조해서 백제 시조 도모왕(都慕王)이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동명왕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백제 역대 군주가 배알한 태조 동명왕이라는 존재가 초대 군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백제 관련 기록에서 직접적으로 동명(東明)이 언급된 것은 《삼국사기》이고 《일본서기》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인물이 언급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귀수왕은 백제의 제16대 군주로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의 10세손이었다. 《삼국사기》에서 14대 군주라고 한 것과 차이가 있는데 2명의 군주가 누락된 셈이다. 일본의 《신찬성씨록》 또한 2명의 군주가 누락되었음을 암시하다. 해당 기록에서는 문주왕을 도모대왕의 24세손, 혜왕을 30세손으로 적고 있는데, 각각 '도모대왕을 기점으로 24대 군주, 30대 군주'로 취급한다면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이는 당시에 구 백제인들이 온조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도모왕을 백제의 태조로, 온조가 주몽의 친자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비류가 주몽의 친자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백제가 주몽을 태조로 모실 이유가 없다.

또한 《제왕운기》는 백제의 군주가 678년간 총 34명이 있었다고 말해, 《삼국사기》의 31명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속일본기》 및 《동사강목》과 달리 동명왕부여풍을 군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데, 《제왕운기》는 온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형인 은조가 5개월 동안 재위하다가 죽고, 온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말한다.[10] 온조왕~의자왕 사이 677년에 1년이 추가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제왕운기》는 비류를 국왕으로 본 것이 맞는 듯하다. 여기에 《토요타씨 족보》에 나오는 진이왕과 섭정인 부여훈해 또는 참칭왕인 부여설례부여태 등 2명을 추가적으로 헤아려 총 34명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건국부터 3세기까지)을 두고 긍정론, 부정론, 수정론이 있는데 그중 수정론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긍정론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 연대와 인물이 모두 실제와 일치한다는 시각인데 고고학 연구를 아무리 거듭해도 백제와 부여와의 관계는 입증이 불가능하며, 기원후 2세기 후반을 넘어서질 못하는데다 당연한 얘기로 중국 사서와도 초기는 교차검증되질 못해 긍정론은 시간이 갈수록 생명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다. 한편 일제 시대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주장한 바 있는 부정론은 이를 아예 허구로 취급하는 것인데 그들이 적어도 당대 기준으로는 나름 정확하고 논리적인 분석을 한 것과는 별개로 다분히 한반도 멸시 사관으로 관점이 일관된데다 부정론의 주목적이 임나일본부 설을 합리화하기 위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어 역시 주의를 필요로 한다.[11]

한편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수정론은 기록의 사건 자체는 사실이되 후대 일을 과거로 소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초기 기록 3종류 중에서도 고구려쪽 초기 기록은 태조대왕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수명을 제외하면 대체로 학계에서 사실로 신뢰받는 분위기다. 다만 백제(온조, 다루, 기루, 개루)와 신라(혁거세, 남해, 유리, 기림, 흘해)의 기록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특히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는데, 그 이전엔 문자로 기록하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제대로 된 역사서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때까지의 과거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신채호의 학설에 따르면 백제의 창업 군주는 온조가 아닌 온조비류의 어머니인 소서노였다.

현대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기원후 2세기 후반 고구려에서 임진강으로 남하했다 3세기 중후반에 한강 일대 위례성으로 다시 남하한 고구려 적석총 세력이 토돈분구묘제 토착 세력을 지배 파트너로 하여 고조선계 및 옥저계 주민을 기층민으로 두고 한성백제를 세운 것으로 확인된다. 적어도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고조선계 선주민이 비록 우선권은 내주었을 망정 엄연히 지배층 중 일부를 차지하여 국정에 참여한 걸 보면 이는 백제만의 특이한 상황이다. 한편 학자들을 당황시키는 또 다른 점은 파면 팔수록 백제와 부여와의 고고학적 연관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 또한 본인들 주장과는 달리 해모수가 시조였을 북부여 고리국과는 전혀 고고학적 연계점이 없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있는 일만 해석 없이 무미건조하게 나열할 뿐이다. 문헌 학자들은 아직까지는 삼국사기 서술을 전면 배제하진 않고 있으나, 적어도 백제사 초기 기년 문제 및 고구려 및 백제의 프라퍼갠다[12]가 과연 사실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꾸로 여전히 큰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13]

일본서기에서 태자 시절 위덕왕이 자신의 성(姓)은 고구려와 같다고 말한 걸 보면 부여씨가 고씨와 친족지간인 건 맞는 걸로 보이는데, 고구려는 고고학적 건국 연대가 역사서와 거의 같기 때문에 온조가 정말 동명성왕의 후손이 맞다면 아들(1대)이 아니라 수세대가 넘는 직계 후손이었거나, 아니면 주몽과 소서노의 아들은 맞지만 신라사에서 성한왕처럼 신라의 건국자는 아니었어도 신라의 최종 왕조가 된 김씨 일가의 선조로 추앙받았듯 초고-근초고왕 계 왕가의 직계 선조로 크게 존중 받았던 인물이라고 볼 수는 있겠다.[14]

다만 여기서 의미심장한 건 두 종류의 백제 건국 설화 중 비류계 전승은 소서노를 강조하면서 주몽을 계보에서 삭제하고 비류와 주몽 모두 우태의 아들이라고 언급하는데, 온조계 전승은 주몽이 비류국왕의 딸과 혼인한 줄거리는 비류계와 같으면서도 정작 소서노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면서 비류와 온조 모두 주몽 아들이라고 하며 은근히 소서노의 비중을 많이 깎아내리고 있음이다.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한 잘못으로 자살해 죽었다는 고인 모독까지 저지르고 있음도 후세인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부분이다. 온조계 설화의 이러한 행동은 아예 소서노와 우태 관련 부분을 전면 삭제해버린 고구려계 건국 사화와 입장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데, 이것의 짐작되는 이유가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의 체면 문제와 직접 맞닿아 있음도 역시 후세인 처지에서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 요약하면 우태, 소서노, 주몽에 대해 비류계와 온조계가 서로 입장이 대단히 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백제 건국 집단이 임진강 일대에 모습을 드러낸 2세기 후반이, 165년 차대왕명림답부에 의해 폐위되고 신대왕이 즉위하는 시기와 비슷한 것도 고려해볼 부분이다. 고구려 왕가는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모두 예씨부인의 아들인 유리명왕의 후손이라 소서노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고구려 왕위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되었던 소서노의 후손이 남하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15] 한편 한성백제 건국에 참여한 부여인 대성팔족 해씨(解氏)와,[16] 고구려 오부의 서부(西部) 소노부(消奴部)가 비류국(沸流國)이라고도 불렸다는 점, 위치상 남하하기 용이한 남부(南部) 관노부(灌奴部)와의 연관성도 제기되고 있다.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초고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왕가였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백제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고이왕 대의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 우수(優壽), 비류왕 대 군주의 동생이자 반역자인 우복(優福), 개로왕 대의 건무장군 우서(于西), 무령왕 대의 달솔(達率) 우영(優永)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에게 세력이 있었을 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씨는 비류시조설에 등장하는 부여 2대 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자 비류(沸流)의 아버지인 우태(優台)와의 연관성이 지적되기 때문에 고이왕계와 초고왕계가 별개라면 우씨는 비류시조설을 내세운 우태와 모종의 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류는 비류왕(比流王)이 모티브라는 가설도 있는데, 비류왕의 동생이 우복이기 때문.

고이왕계가 초고왕계와 다른 왕계가 맞을 경우, 삼국사기에 나오는 부계 일계(一系) 전승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시기(2세기 중후반) 건국된 신라가 서양자 풍습으로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의 3성(姓)이 부계가 다름에도 모계의 일계로 인해 3성 모두 혁거세 거서간의 후예이자 모두 하나의 성으로 인식되었고,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야마토 정권이 2~3번의 왕조 교체를 겪은 끝에 6세기 초 게이타이 덴노를 기점으로 현 왕조가 자리잡혔음에도 모계의 일계로 하나의 일계로 간주되어 만세일계라 불린 것과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17] 예를 들면 아들로 기록되었지만 왕계가 다르다 추정될 경우 사위거나 외가 친척이라는 식.

다만 고이왕계가 정말 초고왕계와 달랐더라도 비류시조설의 우태가 정말로 부여계고 고이왕계가 비류의 후예가 맞다면 고이왕계 또한 한성백제의 또 다른 고고학적 지배 계층인 토돈분구묘계가 아니라 졸본부여 내지는 소노부(비류국) 출신 고구려인이었을 수 있다. 비류시조설에서는 우태를 동부여의 시조인 해부루의 서손이라 칭하기 때문에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비류국은 고구려 초대인 추모왕 대에 고구려가 제일 먼저 복속시킨 나라로 고구려 5부의 소노부(서부)가 되었는데, 백제 비류시조설의 비류국과 한자까지 같기 때문에 연관성이 지적된다.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웠다는 전승처럼 소노부(비류국) 출신인 고이왕계와 주몽의 후손인 초고왕계가 같이 남하해 백제 왕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소서노는 주몽이 졸본에 도읍하여 고구려를 세우기 전 졸본의 전신인 졸본부여의 수장 연타발의 딸이라고 하는데, 대성팔족 해씨가 본래 '부여인'이라고 나오는 점을 고려하면 2세기 후반 임진강 유역으로 남하한 고구려계 세력은 전승에서 소서노로 표현되는 졸본부여계와 대성팔족 해씨, 소노부(비류국) 출신의 비류-고이왕계, 주몽의 후손인 온조-초고왕계로 추정이 가능하다. 전승대로 소서노와 우태의 아들 비류-고이왕계의 선조고, 소서노와 주몽의 아들이 온조-초고왕계의 조상이라면 고이왕계와 초고왕계는 부계로는 부여 시조 해부루/동명왕의 대에서 갈라질 정도로 멀지만 소서노를 매개로 한 인연이 있었고, 그 때문에 차대왕-신대왕 즉위기의 혼란 당시 함께 남하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임진강 일대로 남하한 고구려계 적석총 세력은 압록강 이남 양식을 쓰고 있어 관노부(남부) 출신설이 제기되기 때문에 2세기 후반 이전에 이들이 계루부, 소노부가 아닌 관노부로 소속을 옮겼다 차대왕-신대왕 즉위기의 혼란에 의해 관노부를 떠나 임진강 유역으로 남하했을 수도 있다.[18]

거기다 해부루, 유리명왕(해우류), 대무신왕(해주류)는 사서에서 '성은 해씨이다'가 강조되는 인물들인데, 비류도 전승상 해씨이며 온조왕과 초고왕 사이의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이 이름의 유사성으로 인해 해씨라는 설이 있고 우태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이왕계가 비류와 루3왕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19]

고이왕계가 비류의 후예고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라는 전승이 맞을 경우, 해부루의 서손을 2대가 아니라 먼 후손으로 해석하면 최종적으로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는 가문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 해씨로 이어지는 동성(同姓)이 맞다는 결론이 나온다. 주몽은 고고학적으로 부여 출신이 확실시되며 부여 시조 동명왕의 건국 설화를 그대로 베껴올 정도로 부여 왕가와의 연결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아들일 가능성은 없지만 수백 년의 시간차가 나도 부여 해씨의 분가인 고구려 고씨가 동명왕 대에서 갈라진 부여의 종친이었을 가능성은 있다.[20] 초고왕계가 왕권을 확고히 장악한 이후 백제 왕조의 부여 기원을 강조한 건 단순한 외교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초고왕계와 고이왕계의 왕통을 일원화시켜 기록하기 위해서는 가문이 분리된 시기인 부여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성이 있었다는 뜻도 된다.[21]

3.2. 초고왕계

?
13.초고 14.구수 15.침류 17.아화 18.전지 19.구이신
20.비유
신제
훈해
설례
16.진사 진손 태아랑 해양 오정 미사
진이 나패고 선왕후
마려 우지

3.3. 개루왕계

20.비유 21.경사
22.문주 23.삼근
곤지 25.사마 사아 법사
26.명농 27. 아좌
28. 29.
24.모대 ?[22] ? 30. 31.의자
32.
선광

구이신왕까지는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임이 확실하지만, 다음 군주인 비유왕구이신왕과의 관계가 애매하다. 우선 《삼국사기》에서는 비유왕구이신왕의 아들이라고 써놓았지만 일운으로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했고, 《송서》에서는 비유왕전지왕을,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구이신왕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무령왕동명성왕의 18세손이라고 하는데, 일본 측 기록에서는 비유왕-부여곤지-무령왕의 계보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비유왕동명성왕의 16세손이 되는데 이 경우 《삼국사기》에서 아버지 또는 형인 구이신왕(14세손)과 2세대의 차이가 나게 된다[23]. 따라서 《신찬성씨록》을 신뢰한다면 구이신왕비유왕은 항렬상 형제, 부자뻘이 아니라 조손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같은 시대에 활동한 위덕왕진이왕의 세대차가 무려 5세대 이상으로 벌어지기에, 저 18세손이라는 기록이 정말 직계로 18세손을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 《일본서기》에서 즉위 당시 연소하여 대놓고 섭정인 어머니가 간통까지 할 정도였던 사람이 8년 사이에 손자까지 봤을 가능성은 낮고 일단 《신찬성씨록》 기록상 비류왕비유왕이 직계로 이어진 것은 확실한데 정작 근초고왕비류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꽤 있다. 위덕왕진이왕이 동시기에 활동한 것을 고려하면 전지왕비유왕이 동세대 정도 되었을 것이다.

오우치(大內) 가문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아좌태자와 같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망명해 창설한 가문이었다. 족보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여 아좌태자와의 공통점이 보인다. 참고로 이 족보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즉위한 진이왕의 존재가 언급된다.

한편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선광(扶餘禪廣)이 일본의 지토 덴노로부터 '쿠다라노 코니키시(百濟王)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4. 연표

삼국사기상 기년으로는 한성을 도읍으로 삼은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부정된다. 물론 고고학으로 유력한 3세기 중후반부터 따져도 가장 길긴 하지만, 한성 공함 이후 백제 왕실과 국가에서 경기도 일대는 실지 내지는 변방에 불과해졌기에 경기도 일대에서만 백제성을 찾는 견해는 지양됨이 마땅하다. 백제 같은 경우 3세기 후반 책계왕 때부터 즉위년과 사망년이 고고학 및 주변국 기록과 일치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적어도 계보에서는 신라보다 정확성이 훨씬 못하지만 기년은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정확한 것이다. 백제가 고구려나 중원 정권과 지리적으로 약간 더 가까워 상호접촉이 보다 잦았던 것이 이유로 생각된다.
왕호 재위 기간 비고
《한성백제 시대》 BC 18년 ~ AD 475년 (492년)[24]
1대 온조왕(溫祚王) 온조 BC 18년 ∼ AD 28년 파일:attachment/images_26.jpg
시조
2대 다루왕(多婁王) 다루 28년 ∼ 77년
3대 기루왕(己婁王) 기루 77년 ~ 128년
4대 개루왕(蓋婁王) 개루 128년 ~ 166년
5대 초고왕(肖古王) 초고 166년 ~ 214년 소고(素古), 초고(肖故)
6대 구수왕(仇首王) 구수 214년 ~ 234년 귀수(貴須)
7대 사반왕(沙伴王) 사반 234년 사비(沙沸), 사이(沙伊)
/ 살해 추정
8대 고이왕(古爾王) 고이 234년 ~ 286년 고모(古慕), 구이(久爾), 구이(仇爾)
9대 책계왕(責稽王) 책계 286년 ~ 298년 청계(靑稽), 청체(靑替)[25]
/ 전사
10대 분서왕(汾西王) 분서 298년 ~ 304년 암살
11대 비류왕(比流王) 비류 304년 ~ 344년
12대 계왕(契王) 344년 ~ 346년 요절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년 ~ 375년 초고(肖古), 속고(速古), 배고(背古), 조고(照古)
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375년 ~ 384년 구수(仇首), 귀류(貴流), 구소(久素), 귀수(貴首), 귀수(貴須)
15대 침류왕(枕流王) 침류 384년 ~ 385년 단명[26]
16대 진사왕(辰斯王) 진사 385년 ~ 392년 중국측 정통성 없음
횡사[27]
17대 아신왕(阿莘王) 아신 392년 ~ 405년 아방(阿芳), 아화(阿花), 아미(阿美), 휘(暉)(?)[28]
횡사[29]
섭정 - 훈해 405년 섭정
찬탈 - 설례 405년 찬탈(비정통)
18대 전지왕(腆支王) 전지 405년 ~ 420년 직지(直支), 영(映), 진지(眞支)
19대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 420년 ~ 427년 중국측 정통성 없음
20대 비유왕(毗有王) 비유 427년 ~ 455년 일본측 정통성 없음
살해 추정
21대 개로왕(蓋鹵王) 경사 455년 ~ 475년 개로(蓋鹵), 개루(蓋婁), 개로(盖盧), 경사(慶司), 가수리(加須利)
/ 근개루왕(近蓋婁王)
/ 패전 후 살해
《웅진백제 시대》[30] 475년 ~ 538년 (63년)
22대 문주왕(文周王) 문주 475년 ~ 477년 문주(汶洲), 문명(文明), 모도(牟都)[31], 도(都)[32]
/ 암살
23대 삼근왕(三斤王) 삼근 477년 ~ 479년 임걸(壬乞), 삼걸(三乞), 문근(文斤)
/ 살해 추정
24대 동성왕(東城王) 모대 479년 ~ 501년 마모(摩牟), 대(大), 마제(麻帝), 말다(末多)
/ 모대왕(牟大王)
/ 암살
25대 무령왕(武寧王) 사마 501년 ~ 523년 파일:무령왕 표준영정.jpg
사마(斯摩), 융(隆), 세마(嶋)
/ 사마왕(斯麻王)
《사비백제 시대》[33] 538년 ~ 639년 (101년)
26대 성왕(聖王) 명농 523년 ~ 554년 파일:구세관음상.jpg
명(明)
/ 성명왕(聖明王), 명왕(明王)
/ 패전 후 살해
27대 위덕왕(威德王) 554년 ~ 598년[34] 창왕(昌王)
암살 추정
28대 혜왕(惠王) 598년 ~ 599년 헌왕(獻王)
암살 혹은 단명 추정
29대 법왕(法王) 599년 ~ 600년 효순(孝順)
/ 암살 혹은 단명 추정
불명 - 진이 ?~? 진이(辰爾)
/ 진손왕 현손
《사비-금마저백제 시대》[35] 639년 ~ 660년 (21년)
30대 무왕(武王) 600년 ~ 641년 파일:무왕 표준영정.jpg
무강왕(武康王)
31대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마지막 군주. 당나라로 압송, 병사
백제부흥운동 시기》 660년 ~ 663년 (3년)
참칭 - 660년 참칭
정식 군주로 보지 않음. 당나라로 압송.
32대 풍왕(豊王) 660년 ~ 663년 풍장(豊璋), 규해(糺解)
/ 풍장왕(豊障王)
/ 부흥운동 옹립. 고구려로 도피.

5. 번외

5.1. 백제의 제후왕 및 후작

왕명 인물 임명시기 비고
서하태수(西河太守) 풍야부 450년 북연 황족 출신으로 추정.
우현왕(右賢王) 부여기 457년 백제 왕족.
좌현왕(左賢王) 부여곤지 457년 개로왕의 동생. 동성왕의 아버지.
불사후(弗斯侯) 부여례 미상[37] 개로왕의 사위.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 미상
면중왕(面中王) > 도한왕(都漢王) 저근 미상
490년
팔중후(八中侯) > 아착왕(阿錯王) 부여고(古) 미상
490년
백제 왕족.
매로왕(邁盧王) 부여력 490년 백제 왕족.
불사후(弗斯侯) 부여고(固) 490년 백제 왕족.
광양태수(廣陽太守) > 대방태수(帶方太守) 고달(高達) 490년
조선태수(朝鮮太守) > 광릉태수(廣陵太守) 양무 490년
청하태수(清河太守) 회매(會邁) 490년
매라왕(邁羅王) 사법명 495년 대성팔족 사씨.
벽중왕(辟中王) 찬수류 495년
불중후(弗中侯) 해예곤 495년 대성팔족 해씨.
면중후(面中侯) 목간나 495년 대성팔족 목씨.
낙랑태수(樂浪太守) 모견(慕遺) 495년
성양태수(城陽太守) 왕무(王茂) 495년
조선태수(朝鮮太守) 장새(張塞) 495년

백제의 제후왕은 5세기 중반 ~ 후반인 개로왕, 동성왕 시기에 책봉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이 왕족 부여씨이다. 다만 5세기 후반 동성왕의 제후왕 책봉을 끝으로 백제의 제후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의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제후왕 제도가 폐기된 것인지, 기록이 소실된 것인지는 불명이다.

제후왕의 아들이 백제 군주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부여곤지의 아들인 동성왕무령왕[38]은 각각 삼근왕과 동성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개로왕계와 문주왕계가 각각 한성 함락, 삼근왕의 요절로 단절되면서 당시 살아있었던 곤지왕의 아들들(동성왕, 무령왕)이 왕위에 옹립된 것이다.

5.2. 웅진도독 대방군왕

대수 명칭 재위기간 비고
1대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융 융(隆) 677년 ~ 682년 숭(崇)[39]/
광록대부태상원외경(光祿大夫太常員外卿)에 임명됨. 사후 당나라 장안에 묻힘.
2대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경 경(敬) 690년 ~ ? 부여융의 손자. 측천무후에 의해 임명됨.
?대 백제대방왕(百濟 帶方王) 불명 미상 724년 12월 당나라의 내신(內臣)으로 봉선제 참여.
부여경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음.

나당전쟁에서 웅진도독부는 신라에게 축출당해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677년 당나라는 건안성으로 백제 유민들을 모으는 한편 부여융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하고 백제로 다시 보내려했으나, 부여융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682년에 사망하게 된다. 부여융이 사망한 뒤 측천무후는 그의 손자 부여경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해 왕위를 잇게 했지만 이후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724년 12월, 봉선제를 지낸 기록에 참여한 인물 중 '백제 대방왕(百濟 帶方王)'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적어도 8세기 초반까지는 대방군왕 직위를 가진 인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인명이 적혀 있지 않아서 부여경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부여경이 장수해서 725년 무렵까지 살아있었거나, 부여경 이후에 대방군왕으로 책봉된 인물이 있었을 수도 있다.

6. 《신찬성씨록》의 백제계 성씨

분가가 있는 경우 본가에 볼드체.
성씨명 시조
和朝臣 동명성왕 18세손 무령왕
和連 오소리키왕(雄蘇利紀王). 국주(国主)로 나와있다.
高野造 좌평 여자신
百済朝臣 동명성왕 30세손 혜왕
百済公 동명성왕 24세손 문주왕
酒王
因鬼神感和之義、命氏謂鬼室。폐제 덴표호지 3년에 고쳐 백제공(百済公) 성을 하사받았다.
六人部連
刑部 酒王
水海連 努理使主
誉田天皇[謚応神。]御世、帰化。孫阿久太男弥和、次賀夜、次麻利弥和。弘計天皇[謚顕宗。]御世、蚕織献絁絹之様。仍賜調首姓
調連
民首
調曰佐
伊部造 乃里使主
林連 木貴
直支王[古記云周王。][40]
大石林
林史
大原史 漢人木姓阿留素、西姓令貴
香山連 달솔 형원상(荊員常)
高槻連 달솔 명진(名進)
広田連 辛臣君
石野連 近速王[41]孫憶頼福留
神前連 人正六位上賈受君
沙田史 오보니왕(意保尼王). 정식 군주가 아니라 그냥 국인(国人)이다.
大丘造 速古王十二世孫恩率高難延子
小高使主 毛甲姓加須流気
飛鳥部 国本木吉志
百済王 義慈王
菅野朝臣 都慕王十世孫貴首王
塩君男(大阿郎王三世孫)味散君[42]/智仁君[43]/麻侶君[44]/孫宇志[45]
葛井宿祢
宮原宿祢
津宿祢
中科宿祢
船連
岡原連 辰斯王知宗
三善宿祢 速古大王
錦部連
鴈高宿祢 貴首王
安勅連 魯王
城篠連 達率支母未恵遠
市往公 明王
目図王男安貴
岡連
広井連[46] 避流王
河内連 동명성왕의 아들 음태구수왕(陰太貴首王)
百済伎 동명성왕의 손자 덕좌왕(徳佐王)
広津連 근구수왕
清道連 은솔 納比旦止
広海連 韓王信之後須敬
不破連 동명성왕의 후손 비유왕
麻田連 朝鮮王
春野連 速古王比流王/汶休奚[47]
面氏
己汶氏
汶斯氏
大県史 와토(和徳)
道祖史 挨許里公[48]
苑部首 知豆神
園人首
飛鳥戸造 비유왕의 아들 부여곤지
동성왕
御池造 扶餘卓斤国主施比王
中野造 간솔 答他斯智
真野造 肖古王
枌谷造 堅祖州耳
坂田村主 頭貴村主
上勝 多利須須
不破勝 渟武止等
漢人 多夜加
賈氏 賈義持
半毗氏 사반왕
大石椅立 庭姓蚊尓
末使主 津留牙使主
木曰佐
岡屋公 비류왕
縵連
宇奴首 弥奈曽富意弥[49]
宇努造
波多造 佐布利智使主
薦口造 抜田白城君
為奈部首 中津波手
牟古首 ウ汜吉志
原首 福徳王[50]
三野造 布須真乃古意弥
佐良々連 久米都彦
依羅連 素祢(志)夜麻美乃君
山河連
呉服造 阿漏史
古市村主 虎王
上曰佐 久尓能古使主
信太首 百千
取石造 아마오미(阿麻意弥)
葦屋村主 意宝荷羅支王
大根使主[51]
村主
衣縫 露命[52]

7. 기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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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계절 출판사 《한국생활사박물관》 〈백제생활관〉 편의 파일:external/a1eff547701f6e31d73dc11b95adc65ba9c7954e74b1a35b29a7753e72d36c75.jpg성왕·무왕 표준영정 등 많은 매체에서 백제 국왕의 복식을 붉은색으로 묘사하지만, 《구당서》에 따르면 백제 국왕은 자주색 도포를 입었으며 붉은색 옷을 입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2] 당고종이 백제의 왕자 부여융에게 서씨라는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3] 부여풍의 후손으로 중국에 살던 중 송나라 때 고려로 환국한 간관 여선재(余善才)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4] 사반왕, 분서왕, 계왕,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 비유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5] 책계왕, 개로왕, 성왕[6] 다만 의외로, 나당 연합군에 의한 사비성 함락으로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인 핵심 집단은 만 명에서 만 오천 명으로 어림짐작되는데 의자왕 일가를 비롯한 백제 왕실 직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건안성에 웅진도독부로 배치되어 당나라와 함께 대조영 집단 진압에 나섰다가 패배하여 역으로 대조영 집단에게 흡수되었음이 아이러니함이다. 660년도에 당나라로 끌려갔던 백제 왕족 및 귀족 대부분은 당나라가 아닌 발해에게 흡수된 것으로 최근 밝혀져 있다. 또한 발해 고고학 성과에 의하면 초기 발해의 황후 중 하나가 '韓'씨인데, 그녀가 백제 출신 귀족 한씨의 후손이었을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7] 근초고왕 60~70대 추정, 근구수왕 50~60대, 무령왕 60~61세, 위덕왕 73세, 혜왕 60~70대, 무왕 60대, 의자왕 60대다. 위덕왕과 혜왕도 암살 의혹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고구려만큼은 아니라도 백제 왕권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전성기와 후기에는 당시 기준으로 무난하게 장수한 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도 환갑잔치했다는 걸 생각해보자.[8] 신라에 비해 고구려가 시해당한 임금이 좀 더 있고 백제는 자연사하지 못한 임금이 고구려보다도 많다고 봐야지 늘 많이 죽었다고 보면 안 된다. 책계왕과 분서왕 암살은 백제와 전면전을 벌일 여력은 없었으나 중원 정권의 보호 아래 있는 옛 마한 거수국들은 보호해야 했던, 조위-서진 정권의 고육책이었으며,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은 한성 함락이라는 충격 및 그에 따른 국내 정치 세력 균형 붕괴가 이유지 어떤 체제상 이유가 아니다. 신라 또한 운이 좋아서 그렇지 고(구)려가 두 번이나 대놓고 획책했던 서라벌 점령이 성공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고 소지 마립간 또한 고구려가 암살을 시도한 군주 중 하나였다. 사반왕, 구이신왕, 비유왕은 시해당했을 정황이 대단히 유력하지만 확실하지 않고, 그 기준을 적용하자면 신라 또한 살해당했을 정황이 높은 군주(소지 마립간, 진지왕 등)는 보다 늘어난다.[9] 《삼국사기》를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수서》를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한 〈을지문덕 열전〉에서 어떻게든 좋은 수식어를 넣어 띄워주려는 서술이나, "당태종을 막아낸 영웅의 이름을 모른다는게 너무 아쉽다.", "연남생은 당나라 입장에선 영웅일지 모르나, 우리가 보기엔 매국노일 뿐이다." 같은 사론이 포함된 것만 보더라도 신라 이외의 국가에 대해 깎아내리려고 일부러 악의적인 서술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사기》 항목을 참조.[10] 《제왕운기》 〈백제기〉 주석: 與母兄殷祚南奔立國殷祚立五月而卒.[11] 고로 긍정론이 한동안 한국 학계에서 대세였던 이유에도 이해가 필요하다. 학문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일제 식민사관의 삼국사기 초기 부정론에는 이미 에도 시대부터 일본 국학자들이 주장했던 한반도계 역사 기록 및 연구에 대한 근거 없는 멸시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간신히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해방 직후 한국 역사학자들이 이에 대해 크게 의분을 품었던 건 여러모로 정당했다.[12] 고구려의 고리국 해모수 계승 주장, 백제의 부여 계승 주장[13] 고구려 고씨가 부여를 부정하고 고리국 왕조에서 분가했다 자처한 건 실제로는 부여에게서 무시 받는 걸 피해기 위한 이유며, 마찬가지로 백제 또한 고구려에게 무시 받는 걸 막기 위해 부여 직계를 자처한 게 이유라고 추측해볼 수는 있겠다.[14] 그럼 백제를 2세기 후반에 임진강 일대에서 건국한 자가 누구인지가 문제인데, 구태나 혹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온조나 비류 후손이라고 볼 수는 있겠다. 물론 온조가 주몽과 소서노의 아들이 아닌 먼 후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15] 세계가 구전되는 과정에서 몇 세대가 누락되는 현상은 종종 벌어진다. 예시로 후백제견훤진흥왕의 5대손을 자처했는데 진흥왕의 후손과 견훤의 조상 이씨(李氏)가 통혼한 건 사실이지만 실제 세대는 큰 차이가 있었다.[16] 고구려 출신인임에도 부여인이라 사서에 명시된 것으로 보아 가문의 기원이 부여 왕족인 해씨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2세기 부여에서 압록강 일대로 이주해 고구려의 전신이 된 졸본부여와의 연관성이 제기된다.[17] 현 왕조는 타시라카 황녀를 통해 전대 왕조의 혈통이 이어졌다. 유랴쿠 덴노-사위 닌켄 덴노-외손녀 타시라카 황녀-긴메이 덴노-(생략)-현대.[18] 계루부의 주도권을 유리명왕계가 잡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소서노계가 부를 옮겨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며, 이 과정에서 소서노로 인연이 있는 우태계와 대성팔족 해씨도 소서노계를 따라 같이 관노부로 옮겼다 온조계 남하까지 함께했을 수도 있다.[19] 근초고왕 이래 초고왕계로 왕계가 일원화된 이후 우씨가 사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도 대성팔족 해씨로 성을 바꿔서일 수도 있다. 비류왕 때도 해구처럼 해씨가 있었기 때문에 한성백제 건국 때부터 일관적으로 해씨를 사용한 일족은 있던 것 같지만.[20] 카페 왕조의 분가지만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가 다른 왕조로 구별되는 것처럼 이들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수도 있다.[21] 이렇게 될 경우 소서노의 남편이라 전승되는 우태와 주몽 모두 동성이 되지만 당대 예맥에서 동성혼이 그리 터부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무신왕대소왕의 동생 갈사왕의 손녀인 차비 해씨와 동성혼을 했기 때문에 당대 부여와 고구려 사회에서는 동성혼이 가능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문화적으로 고조선인의 후신인 신라는 골품제 때문에 석씨와 김씨는 동성 근친혼을 자주 했으며 고려 개성 왕씨도 전기에는 근친혼, 후기에는 원친혼(遠親婚)을 많이 했다.[22]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 등이 있었다.[23] 《신찬성씨록》에서 근구수왕동명성왕의 10세손으로 나오고, 《일본서기》에서 근구수왕-침류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의 계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24] 서기 0년이 없으므로 493-1=492년[25] 청체는 출전이 《삼국유사》지만 《삼국유사》에서도 오기라 하였다.[26] 정쟁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27]삼국사기》에서는 사인 없이 그냥 사냥 중 머물던 행궁에서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시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8]진서》에서 386년 백제 왕태자 여휘를 '사지절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386년은 진사왕 2년이지만 진사왕은 침류왕의 동생이었지 아들이 아니었고, 임명 전 관등이 군주가 아닌 왕태자였다는 점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부여휘는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이라는 가설이 있다.[29] 분사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역시 정쟁에 휘말려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왕실 내에 갈등이 벌어져 전지왕 즉위전까지 섭정을 맡았던 부여훈혜가 부여설례에게 죽었다. 부여설례는 군주를 칭한 뒤 아신왕의 태자 부여전지까지 죽이려고 했으나 여론이 동조하지 않아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30] 문주왕 즉위와 동시에 웅진 천도.[31] 이병도는 모도는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의 다른 표기이며 문주왕과 혼동된 것이라 하였다.[32] 모도의 축약 표기.[33] 성왕 16년(538년) 사비 천도.[34] 재위 44년. 향년 73세. 연도 추정과 생몰년이 확실한 백제 군주 가운데는 가장 장수했다.[35] 무왕 40년(639년) 금마저 천도. 단, 완전한 천도는 아니고 대신라전쟁을 위한 별도 조성, 왕권 강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왕, 왕궁리 유적 문서 참고[36] 구당서에 나온 부여풍의 형제 부여용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37] 부여고가 490년 불사후가 된 점을 보면 490년에 후작에서 밀려났거나 사망한 것으로 보여진다.[38] 다만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개로왕이란 설도 존재한다. 항목 참조.[39] 《당회요》 〈백제전〉에서 부여숭으로 등장. 이는 당 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겹쳐서 피휘되었기 때문이다.[40] 林連의 일부 기록에서 등장하는 서술.[41] 근초고왕과 이름이 유사하지만 여기서는 어째서인지 국인(国人)으로 되어있다.[42] 장남. 葛井宿祢[43] 차남. 船連, 宮原宿祢[44] 3남. 津宿祢[45] 中科宿祢. 津連에서 파생되었으므로 마려군(麻侶君)의 아들로 추정된다.[46] 황별씨족 편에서도 등장하는데 시조가 사가 덴노의 아들 미나모토노 마코토이다. 사가 덴노는 어머니가 무령왕의 후손인 간무 덴노의 아들이므로, 避流王은 무령왕의 직계 조상인 비류왕을 뜻함을 알 수 있다.[47] 己汶氏. 일본측 기록에서 奚는 존칭 표기로 자주 쓰였으므로 이름은 그냥 문휴(汶休)일수도 있다.[48] 일단 국주(国主)라고 하여 군주로 나와있다.[49] 弥那子富意弥라고도 쓴다. 국군의 아들(国君男)이라고 한다.[50] 본가인 真神宿祢는 중국계로 분류되어 있고, 분가인 原首는 백제계로 분류되어 있다.[51] 村主[52] 백제의 신(神)이라고 적혀있다. 이 신에 대한 존칭을 나타내므로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은 露이다.[53] 5~6개월 정도 즉위하여 기록이 애매한 사반왕을 빼면 실질적으로 가장 짧게 재위한 백제 군주.[54] 초중기의 군주들은 95세가 넘는 기루왕, 120세가 넘는 고이왕과 110세가 넘는 비류왕처럼 윤색 기록이 많아 믿기 곤란하다.[55] 삼근왕: 465년, 무령왕: 461년 혹은 462년, 위덕왕: 525년. 《일본서기》나 〈무령왕릉 지석〉의 무령왕의 연령기록을 참고해보면, 무령왕은 461년 6월 1일(일본서기) 혹은 462년(무령왕릉 지석)에 태어나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세는 나이가 아닌 연 나이로 나이 계산을 했음도 추정해 볼 수 있으나 연 나이로 나이를 계산했다는 기록이 없다.[56] 삼근왕 14세, 동성왕 33세 추정, 무령왕 60~61세, 성왕 50세 추정, 위덕왕 73세, 혜왕 60~70대 추정, 법왕 30~50대 추정, 무왕 60대 이상(유골 감정 결과), 의자왕 60대 추정. 그나마도 삼근왕과 동성왕은 암살당했고, 성왕은 전사했고, 의자왕은 화병으로 일찍 죽은 걸 감안하면 정상적으로 생존했을 시 더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57] 다루-기루-개루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2세기 후반 임진강에 도읍한 백제가 3세기 중반 강남에 천도한 시기와 비류왕계가 초고왕계로 교체되는 시기가 세대(20년)를 기준으로 하면 맞아떨어지는 편이라, 셋은 하북위례성 당시 실제 왕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58] 정확히 맞지는 않겠지만 120년 안에 8(7)명이 들어가려면 평균 재위기간이 20년이 안 되어야 하고, 사서에 따르면 고이왕은 사반왕의 할아버지뻘인데 사반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1년도 안 되어 왕위를 빼앗겼고, 사서에 나오는 고이왕의 업적과 고고학적 정황을 보면 고이왕의 재위기간이 짧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므로 적어도 구수왕은 그리 오래 재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개루왕도 구수왕 이전의 왕들 중 혼자 40년이 안 되는 것으로 보아 개루왕도 상대적으로 짧았을 것으로 보인다.[59]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제10권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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