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불멸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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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멸의 이순신 속의 시대 구현 오류를 다룬 문서.아래는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오류들이다. 제작 시스템적 한계나 드라마의 예산적 한계도 있고, 쌓인 노하우도 적고, 이런저런 재현을 납득이 갈만하게 해줄 전문가도 공짜로 일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제작 과정에서 천 사람이 한 마디 씩만 해도 천 가지가 되는 수많은 피드백(혹은 불평)을 최대한 수용하려 노력한 흔적도 보이기 때문에 개선된 점도 많다. 그리고 아래에 나온 오류들 중에서 일부는 이후 다시 보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전문가의 말을 빌려 몇몇 미스를 인정하며 짚고 넘어가기도 했다. 또한 드라마를 제작하던 1990년대 말 ~ 2000년대 초에는 아직 이순신 관련 연구가 부실하여 취득할 수 있던 정보의 양이 2020년대인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자문을 맡은 사람들의 편향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고, 그때에는 정설로 통하던 학설들이 새로운 발견이나 연구로 인해 오류로 밝혀진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현대인 천재론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드라마적 허용을 감안해도 심각한 오류를 저지른 다소 좋지 않은 사례들은 앞으로 영원히 까일 것으로 보인다. 원균 맹장론은 말할 것도 없고, 거북선 침몰 사건 등 심각한 오류가 여럿 있었다. 오죽하면 김명민의 연기만으로 모든 걸 다 덮었다라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종영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재현을 철저하게 무시해서 전설이 된 작품"이라는 뼈있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2. 대표적인 오류
- 원균 미화
이 드라마 최대의 미스. 제작진이 원균맹장론을 미는 사기꾼에 홀라당 속아넘어가 희대의 졸장 원균을 개념찬 인물로 설정해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제대로 된 전문가에게 지적을 받은 제작진이 이를 고치려 들었지만 이미 원균=정상인으로 기본 설정을 깔아버린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균이 뒤늦게 찌질이로 전락한 이후에도 원균 담당 배우가 주연급인 최재성이다 보니 명연기로 본의 아니게 미화가 되었고, 칠천량 해전 참패도 부하고 뭐고 단신으로 런하다 죽은 걸 패전에 대한 죄책감과 우치적 등 부하들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며 죽은 것으로 미화했다.
- 거북선 침몰
거북선 테스트에서 침몰 같은 사건은 없었다. 충격을 먹은 사람들이 많아서 당시에도 여러 언론에서 언급할 정도로 말이 많았다. 임진왜란 7년 내내 이순신 휘하에서 전사한 병사가 100명이 채 안 되는데 거북선이 한 번 가라앉아서 200명 가량이 죽었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지경. 관심이 있었던 시청자들은 격분하여 줄줄이 항의글을 남겼다.
이 부분은 실제 역사에 창작 요소를 다소 무리하게 섞어넣는 윤선주 작가 특유의 문제점이다. 만약 거북선 침몰이 진짜로 있었다면 이순신은 여기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변수에 따라서는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비전투 희생자를 최소화하여 좋은 평가를 받는 이순신을 모독하는 내용인 셈이다. 윤선주 본인은 극적 효과를 명목으로 거북선 침몰을 묘사했지만, 그래놓고 거북선 침몰 이후의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기는커녕 감성팔이로 퉁치는 내용으로 나간 탓에 작가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는 비판까지 받았다.[1]
- 명량 해전에서 철쇄설 채용
KBS 역사스페셜에서 철쇄설이 등장한 이후 떡밥이 됐는데, 쇠사슬을 치는 것 자체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2] 명량 철쇄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조선 시대의 기록인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만 당장 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고 수백 척이나 되는 배와 해류를 철쇄와 인력으로 버틴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 원균의 충직한 수하이자 이순신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인물로 우치적(이재포 분)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사실 우치적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도 울며 전송하며 노자를 보탤 만큼 이순신과 친한 인물이었다. 칠천량 해전 이전에 순천 부사로 재직해서 직책상 원균과 가까이 지내야 했던 경우[3]는 있었지만, 충무공의 백의종군 시기의 일기를 보면 순천 부사 우치적이 초계로 자주 찾아와 원균의 망령됨을 하소연 하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러니 굳이 따지면 이영남처럼 원균 수하에 있었지만 이순신과 더 친하고 원균을 까는 캐릭터여야 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원균의 북방 시절부터 충직한 심복으로 등장해 원균의 막장행보에 부하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홀로 원균을 따르는 심복이 되어버렸다. 결국 원균이 죽고 나서야 그의 유지를 따라 이순신의 충직한 부하가 된다는 설정으로 심한 왜곡을 저질러 버렸다. 여러모로 원균 맹장설을 억지로 드라마에 끼워 넣으려는 시도에 희생된 듯.
- 원작소설의 영향으로 압도적인 병력차를 뒤집고 적을 물리친 녹둔도 전투가 졸지에 패전, 이순신 최대의 콤플렉스로 둔갑했다. 선조가 직접 일반적인 패전과는 다르다고 마무리하고 넘어갔음에도 패전이라고 하면서 이순신에게 패전지장의 낙인을 찍는다. 기록에는 10명 전사했다고 되어 있지만 여기선 연출을 중요시해 임진왜란 체험판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거대한 스케일이 된 건 덤이다.
- 이순신 자살설 채용
이순신의 자살설을 채용했다, 노량해전 출정 전 권준과의 대화에서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라고 발언하며 자살설을 채용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도 안된다, 당장 사천해전에서 부상을 당해도 적을 섬멸하기 위해 끝까지 전장을 지킬만큼 적을 철저하게 섬멸하는것에 전심전력을 다했던 인물이 이순신이고 사적으로는 어머니와 작은아들의 원수인 왜군들을 이순신은 결코 곱게 보내줄 마음이 없었기에 노량해전을 택한 것이다 또한 전투중 총 사령관이 전사한다면 그 전투는 패배라는 것을 이순신이 결코 모를 일이 없다[4], 더욱이 자신을 보좌하고 있는 조카를 비롯한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여러 장수들이 있는데 갑옷을 벗고 앞으로 나선다면 그들이 대신 맞을 우려도 있고 설령 맞는다고 해도 사천해전처럼 부상당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이 모든 리스크를 간과한 채 성급하게 자살할 만큼 이순신은 결코 가볍게 음직일 인물이 아니다. 당장 옥포해전에서 호령했던 물령망동정중여산을 떠올려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물론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이 자살설이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동서고금 전쟁의 영웅이 군주나 대신들에 의해 모함당하거나 참소당해 토사구팽 당하는 일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번만번 양보해서 설령 자살할 마음을 품었더라도 이순신의 성격상 그의 마지막 전쟁은 왜군의 침략 전진기지였던 부산포에서 후퇴하는 본대를 막는 전장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정했을 것이고 그러면 노량해전이 아닌 제 2차 부산해전이 이순신의 마지막 전장이 되어야 그래도 봐줄만 하다.
3. 자잘한 오류
- 조총의 성능이 반자동 소총 정도는 되는 듯한 묘사가 종종 보인다. 5초에 한번 쏘는 건 기본이고 연발 사격도 심심찮게 하며, 심지어 조총만 들고 적진에 돌격해 총검술의 돌려 쳐 동작을 정확히 구사해 적을 제압하기도 한다.[5] 이렇게 백병전에서 적을 제압하면 거기다 대고 총을 쏘는 것으로 마무리. 제작진이 몰랐다고 하기엔 조총 심지가 타들어가는 모습이 여럿 있었고, 전투에서도 조총병들이 한번 쏘고 물러나면 다른 조총병대가 나와서 쏘는 방식으로 장전 모습을 가리긴 했다. 사소하긴 하지만 조총의 발사 효과음도 옛날 서부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경박한 빵야빵야 소리다.
- 20화에서 문정왕후가 1556년에 죽었다고 자막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1565년에 있었던 일이다. 다만 이는 그냥 오타일 것이 이순신의 당시 나이는 만 20살인데 1565년이어야 맞기 때문. 1556년이면 10대 초반의 어린아이다. 1556년은 그저 1565년을 오타낸 것을 수정하지 못하고 방송에 내보낸 것.
- 대포의 반동이 없다. 지적을 받고 중반부 이후 방영분에서는 대포 발사 후 뒤로 튕기지만, 노하우가 없어서인지 딱 봐도 포가 발사되면 엑스트라가 뒤로 포를 당기는 것이 보일 정도로 어색했다. 그마저도 반동이 일어나는 장면과 없는 장면이 혼용되어 나온다. 아무 영화만 봐도 대포의 반동은 다 구현을 할 만큼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보니 아쉬운 부분.
- 포탄이 폭발한다. 그 당시 조선군의 총통은 비격진천뢰와 같은 일부 무기 이외에는 운동 에너지만으로 적을 살상하는 쇳덩어리 포탄이 쓰였다. 지적이 여러 번 들어왔는지 중반부 이후 방영분에서는 포탄이 폭발하는 대신 우레탄 파편(?)이 튀기 시작했다.[6] PD의 인터뷰로 보아 재현과 시각적 연출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후자를 택한 듯하다. 정확한 재현을 한다면 폭발하지 않는 대부분의 포탄들 사이에 폭발하는 포탄이 조금씩 섞여 있는 모습으로 나오는 게 더 정확하며[7]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방패와 함체를 깨부수는 쇳덩이 포탄과 왜병들을 노리기 위한 조란환 등을 섞어서 발포하고 여기에 화공까지 끼얹으며 방패판을 깨부수면서 왜병들을 저격하고, 거기에 불을 지름으로써 왜병들이 불을 끄게 행동을 강요하는식으로 공격했다.[8]
- 대장군전 역시 4화에서는 현대 미사일처럼 폭발하지만, 104화에서는 그 질량으로 적선에 구멍을 뚫어 물이 새어들어오는 장면으로 바뀌었다.[9]
- 55~56화에 나오는 수군 폐지론은 윤휴의 백호전서에 근거한 것인데, 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는 등 신빙성이 조금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사실이라고 해도 이순신이 장계 하나 올리니 조정에서 옳다고 여겨 그대로 두었다고 되어 있을 뿐이지, 이순신이 말을 잡아타고 한양까지 올라가서 선조에게 대든 적은 없다. 이순신이 항의하자 선조가 진짜 칼을 뽑으려 하는 모습도 조선 국왕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다이묘들에게서 볼 수 있을 법하다.
- 57화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한양에선 조선 건국 200주년을 맞아 잔치를 여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세자빈이었던 공회빈 윤씨가 사망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장례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정황상 세자빈이자 선조의 법적인 형수의 장례문제 때문에 200주년이고 뭐고 잔치를 열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10] 일부러 태평성대인 점을 강조하여 갑자기 닥치는 일본의 침략을 부각시키는 의도인 듯.
- 황진이 이치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황진이 전사한 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였다. 비중이 엑스트라 수준이라 굳이 멀쩡한 사람 미리 죽일 이유는 없었는데 아쉬운 부분이다.
- 39화에서 황윤길과 김성일의 직책을 각각 '첨지중추부사', '부사' 라고 표기했는데, 한 쪽은 조선에서 현재 지내고 있는 관직이고 하나는 통신부사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인 이유는, 통신사직은 일시직이었고 첨지중추부사와 같은 관직은 상설직으로서 서로 겸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첨지중추부사', '사성' 이라고 표기하거나 '(통신)정사', '(통신)부사' 라 표기했어야 한다[11]. 또 본작에서 성격이 다소 괄괄한 것으로 묘사되는 김성일이 황윤길에게 하오체를 쓰는데, 당시 황윤길은 정 3품, 김성일은 종 3품이었고 나이도 황윤길이 두 살 위였던데다 정사가 부사보다 엄연히 높은 자리이므로[12] 존대를 하는 것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 도도 다카도라가 극중에서 처음 나오는 장면에서 그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획해 온 판옥선을 살피고 있고, 와키자카가 그에게 다가가며 "정해년에 포획해 온 것이지요" 라며 말을 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일본인인 와키자카가 간지를 쓰고 있다는 것.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일본은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그냥 형식상 제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상당히 폭넓게 쓰이고 있었다.[13] 즉 실제로 와키자카가 저런 말을 했다면, "대정(덴쇼) 15년에 포획해 온 것이지요" 라고 해야 했다.
-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된 소 요시토시와 겐소 등이 광해군과 몰래 만나 조총의 성능을 시연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광해군과 그를 수행하는 내시는 물론 유성룡까지도 총의 성능에 크게 놀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해당 장면 바로 이전에 선조가 말했듯이 당시 조선에는 조총보다 크고 위력도 강한 총통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놀랄 이유는 없었고 크기는 작아도 소승자총통이라는 소형총통도 개발은 했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조총에 대해 잘 모르기는커녕 위력은 분명 강력하지만 장전하는 데 오래 걸리며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가 짧다(조총은 50보. 활은 100보라는 식으로 표현이 많다.) 단점이 있음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14]. 실제로 백성들과 말단 병사들이나 조총(일명 불방맹이) 소리에 놀랐지 지휘관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다.
- 가상 인물인 조수창이 관복을 입는 장면에서 좌수영 지휘관들과 병졸들, 같은 도편수들에 이르기까지 '천출이 어찌 관복을...!' 이라는 식으로 반발하고 이순신이 수군만의 과거를 치러 병졸들을 군관으로 삼으려는 대목에서도 선조를 비롯한 대신들이 뒤집어지는데, 실제로는 아무리 천민이라도 공을 세우면 그만큼 대접을 하고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조사해서 상을 내리는 게 조선 사회였다. 세종 대에 장영실을 호군으로 임명하는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도 '태종 때부터 천민으로서 호군 이상의 관직에 제수된 경우 많습니다' 라는 말이 나왔고, 이 외에도 실록에서 免賤이라고 검색하면 관련 기사가 수백 건 나온다[15]. 즉 조정에 보고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철릭부터 입힌 것이 문제라면 모를까 일단 허락만 떨어진다면 건조장에 임명을 하든 어디 만호로 임명을 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고, 이순신이 병졸들을 군관으로 임명한 것도 엄연히 선조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광해군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신임 통제사 되자마자 '천출들에게 입혔던 관복 즉시 회수해!' 라고 소리지른 원균의 명령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16]. 또한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든 과거를 치를 자격이 있었다. 수군의 병졸들이 비록 칠반천역(七般賤役)이라 하여 천시되는 계층이었지만 이들도 엄연히 양인이었으며, 천민은 수군이든 육군이든 애초에 군역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과거를 치른다는 묘사는 당시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권관과 같은 초급 지휘관을 확보하는 것이 대단히 절실했을 것이므로 수군만의 과거 시행은 극중 묘사처럼 지탄받기는커녕 오히려 권장받을 만한 일이다.
- 몇몇 해전에서 참전하지도 않았던 장수들이 참전하는 것으로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노량 해전에 멀쩡히 싸우고 있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전투하고 있는 가리포 첨사 이영남, 충청 수사 권준[17], 순천 부사 우치적이 있다. 그 와중에 짤린 사람은 이운룡[18]인물 구도상 이순신의 라이벌 와키자카 야스하루나 심복인 이영남, 권준, 우치적이 중요한 전투에서 빠지면 이상하니 일부러 넣은 모양이다.
- 조선 북부 지방의 장면에서 수군들이 나온다. 그냥 포졸복을 입히면 될 걸 괜히 수군복장을 입혀서 내보낸 촌극. 문제의 장소인 녹둔도는 원래 정규군이 항시 주둔하는 곳이 아니고 인접한 병력이 파견되는 곳으로 녹둔도를 포함하여 조산보 관할 구역 내의 조선군은 육군 토병 48명에 남도에서 파견되는 부방군 30명을 합쳐 육군 78명이 항시 배치되며 이는 녹둔도 전투 당시 기준의 편제표이다.
- 육군 영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수군 총대장으로 둔갑한다. 애초에 일본군에는 해군 영주, 육군 영주 이런 개념 따윈 없었다. 다만 당시 왜군의 다이묘들 중에서 그나마 해적출신인 구키 요시타카나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해군 영주라고 불러도 맞긴 하지만 왜국의 전국시대 대부분이 육상전이었다. 시마즈 가문이 당시 서쪽 다이묘들 중엔 제일 유명하고 용맹해서 총대장으로 지목한 듯. 다만 시마즈가 전력 대부분을 노량 해전에서 잃은 건 사실이다. 시마즈 군은 본디 육군인데, 일본 자체가 섬나라라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면 육군이라고 해도 상륙함이 있어야 하고, 이에 따라 전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시마즈는 퇴로를 열다가 노량 해전에 적장을 잘못 만나서 패배한다.
- 한국 사극의 고질적 문제점인 총사령관이 적진에 뛰어들어 무쌍 찍기도 여전하다. 이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그렇다고 쳐도, 다 늙어서 김완이나 어진이 종종 걱정하기도 하는 어영담을 무슨 황충으로 만들어 놓더니 노회한 조정 대신인 이원익이 무쌍을 찍는 정신나간 연출도 나온다(...). 울산성 전투에서 류성룡이 칼질을 하는 장면을 내보내지 않은 것이 진심으로 다행.
-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함선 거의 전부가 격침당한 것으로 나온다. 명량 해전 직후 함대를 재건하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던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따져봤을 때 실제로는 조선의 함선 대다수가 격침당했다기보다 그냥 버려지거나 뿔뿔이 흩어졌다고 보는 게 정설이지만 본작에서는 죄다 분멸된 것으로 묘사했다.[19] 또한 일본군의 포격에 침몰한 배도 족히 수십척으로 보이는데, 당시 왜선의 설계 자체가 함대간 포격전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점은 작중에서도 수차례 언급되는 걸 보면[20] 수없이 떨어지는 포탄은 살짝 과한 감이 있다. 그러나 와키자카가 "기만술에 기습 포격전!!" 드립을 치면서 이순신에게 당한 방식을 그대로 조선수군에게 돌려 준다는 컨셉을 잡았으니 이를 위한 연출로 보는 게 맞으며 나중에는 "우리 일본군의 방식"이 있다면서 도선 후 몰살시키고 불을 싸지르는 장면이 나왔으니 조선 함대를 대부분 격침하는 것 자체는 가능한 것처럼 묘사되었다. 역사적 사실과 들어맞지 않아서 문제지.
- 마지막 화에서 류성룡이 광해군에게 징비록을 바치면서 전란을 잊지 말고 강한 나라를 만들 것을 당부한다. 문제는 징비록은 1604년에 완성된 책인데, 광해군에게 징비록을 건넨 시점은 류성룡이 사직하고 이순신이 노량에서 대기하던 바로 그 시각이라는 것이다.
- 일본 활을 거꾸로 들고 쏘는 장면이 있다[21].
- 조선 관료들이 일본어 능력자도 아니니 일본 장수들을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불렀을 텐데, 대부분 일본식으로 불렀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고니시 유키가나, 가토 기요마사를 수길, 행장, 청정이라고 잘만 불러놓고 후반부에는 히데요시, 고니시 유키나가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기 때문. 그래서 99화부터 104화까지는 1~4화에 나왔던 장면을 재활용한 부분과 새로 촬영한 부분이 섞여 나온 99~104화에서는 이순신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서행장을 섞어 쓰며,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경우에는 협판안치라고 부르는 부분이 한 번도 없다[22].
- 휘하 장수들이 이순신을 부르는 호칭이 '장군' 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란 전에는 좌수사 영감이라고 잘만 불러 놓고[23] 갑옷을 입으니까 장군으로 호칭이 바뀌는가 하면 가선대부와 정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으면 대감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극중에서 이순신을 대감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단 한번도 없다.[24]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무관을 '장군' 으로 지칭하는 것은 큰 결례이다. 이 또한 위에서 나온 현대인들의 시점에서 벌어진 경우다. 통제사가 되기 전에는 영감으로 불렸다가 나중에 통제사가 된 후 대감으로 불리는 식으로 나오는 게 옳으며, 일반 백성들이나 병사들 정도는 장군이라고 부를 법 하다고 보기도 하나 백성이라면 모를까 병사가 자기네 총사령관이 평소에 어떻게 불리는지 모를 리가 없다.
- 77회에서는 이억기가 원균에게 자신의 경력에 대해 "홍철릭을 입고 장군으로 칭해진 지 수삼년" 이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붉은색 철릭이 고위 장교들의 복장으로 정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보다 한참 뒤인 영조, 정조 때다. 또 바로 위에 쓰여 있듯 장군이라는 칭호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수사나 병사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경우, 77회는 부산포 해전 즈음이므로 아직 서기 1592년인데 이억기가 전라우수사가 된 것은 바로 지난 해인 1591년이었다. 즉 "장군(영감)으로 칭해진 지 수삼년" 이 아니라 "장군으로 칭해진 지 이제 1년" 이라고 해야 한다.
- 나고야가 잘못 나와 있다. 일본군의 본진이 있는 히젠 나고야를 오와리의 나고야로 인식하여 화면에서 나고야 성을 비출 때 오와리의 나고야 성을 영상에 띄우고, 전략회의 장면에서도 나고야를 언급하며 오와리 나고야가 있는 일본 중부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일본군의 본진이 있던 곳은 규슈 히젠에 있는 나고야로 코앞에 대한해협이 있는 곳이며, 일본 중부의 나고야와 히젠의 나고야 간 거리는 서울-부산 간 거리보다도 멀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일본에서 조선으로 쳐들어 가는데 보급선을 최단거리로 짤 수 있게 규슈에서 출발하는게 합리적이지 굳이 먼거리를 돌아서 갈리가 없다.
- 6대 국왕이었던 단종 임금이라는 명칭이 불쑥 튀어나오는데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된 것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백 년 뒤인 숙종 24년(1698년)의 일이다. 단종과 더불어 김종서 또한 만고의 충신으로 표현하는데 김종서가 역적에서 충신으로 복관된 것은 이로부터 거의 150여년 뒤인 영조 시기이다. 즉, 선조 시기인 이 시대에서 단종은 아직 노산군이었고 김종서는 역적이었으므로 명백한 오류. 선조는 단종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고 단종에 대한 동정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한 남효온의 육신전을 보고 역정을 냈다.
그냥 단종과 그의 신하들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말지 그랬냐?[25]
- 이덕형이 이항복을 부를 때 '오성' 이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오성'은 이항복이 받은 군호인 '오성 부원군'에서 딴 것일 뿐, 호가 아니다. 이항복의 호는 '백사' 이므로 정상적이라면 '백사'라 불렀어야 한다. 오성과 한음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징비록에서는 이항복이 백사 이항복으로 나옴으로써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되었다.
- 거제 현령 안위를 비롯한 충무공 휘하 장수들의 임관 시기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드라마의 묘사를 보면 거제 현령 안위는 칠천량 해전 이후, 명량 해전 직전에 조선 수군에 보직 발령을 받고 다시 수군 통제사에 기용된 이순신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행동하며 자기 소개를 하는데, 어이없게도 안위는 이순신의 파직 이전에 이미 임관하여 부산 왜영에 불까지 지른 인물이다(...)[27]
- 작중의 국왕 선조의 위상이 지나치게 낮다. 예를 들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몽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격군장 마영갑이 선조를 비롯한 양반 사대부 계층을 아주 대놓고 까내리는 장면이 있는데, 격군장이고 뭐고 일개 병졸이 이러는 것은 21세기 현재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16세기 조선인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작중에서는 선을 넘기는 했지만 이해는 된다는 투로 송희립이 "영갑아!" 하고 한 마디 하고 마는데, 실제로 그랬다면 너 미쳐도 단단히 미쳤냐고 할 상황이다. 또 부산포 해전 즈음에서의 이영남을 비롯해 "어명이 잘못됐습니다" 라는 대사가 몇 번 나오는데, 조선 시대의 어명은 잘못될 수가 없고 일단 따르고 보는 것. 정말로 따르기 어렵다면 최대한 존중하며 따르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맞는 것이었다[28]. 특히 압권인 대목은, 이순신의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약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낙안 군수 신호가 조정에 올리던 세금을 제멋대로 약재로 바꾸어서 통제영으로 돌아간 것. 작중에서는 이것이 무슨 구국의 결단인 것마냥 그려지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선조가 격분하는 것을 위인이 조금 모자라서 그런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건 구국의 결단이 아니라 그야말로 공금 횡령이다. 작중에서 선조나 원균의 입으로 묘사되듯이 약재를 내리든 약재를 살 돈을 내리든 선조가 판단을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일이며,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말년에 불명예 제대를 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사약을 마시게 될까 참수를 당하게 될까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이런 면에서는 극작가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것이 눈에 보이는 원균과 그 측근들의 생각이 당시 조선인의 것에 훨씬 가깝다.
- 바로 위 문단의 연장선상에서, 국왕의 당연한 권한인 인사권이 무시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가령 어영담이 광양 현감으로 임명되는 대목을 보면 관직도 없는 일개 촌노인이 전라좌수사의 삼고초려에 응해서 등용되는 것인데, 그를 현감으로 삼으라는 국왕 선조의 교지가 없다면 현감은커녕 군관도 될 수가 없다. 반면 극중에서는 교지가 내려지는 등의 절차가 통으로 잘려나갔다[29]. 이 밖에 가상 인물 조수창을 전라좌수사 마음대로 건조장으로 임명하는 대목이나 통제사가 된 원균이 출신 성분이 낮은 자들을 병졸로 강등시키라고 명령하는 장면도 실제 조선 왕조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세 경우 모두 선조나, 하다못해 병조판서에게 장계를 올려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들이다.
- 비중 있는 조연을 맡은 배우들의 애드리브에도 문제가 있다. 가령 87화에서는 마 군관(마영갑)을 비롯한 병졸들이 일본에 파견됐던 통신사를 수행하여 돌아오는 부분이 있는데, 감시초소에서 배가 돌아오는 것을 본 정대만이 '영갑이 성... 아니아니, 마 군관님 아녀?!' 라고 외친다. 그런데 마영갑이 군관으로 임명된 것이 84화였으니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불과 얼마 전으로 느낄 수 있는데, 85~86화에서 전염병 에피소드가 다루어진 뒤 87화가 시작될 때 '1596년 8월 8일(2년 후)' 라는 자막이 뜬다. 즉 정대만은 두 달도 아니고 2년 동안 마 군관이라는 칭호가 입에 붙지 않은 셈. 또 칠천량 해전이 다루어진 92화에서 정대만은 이순신이 복직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수창과 마영갑 등과 짧은 만담을 하는데, 문제는 해당 화 초반에 짝보가 전사하는 신이 나온 것이다. 몇 년간 단짝이었던 녀석이 안 보인다면 곧바로 수소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다 당시 조선군은 승선한 상태가 아니라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한편 97화에서 살아돌아온 김완은 99화에 왜교성으로 진군할 때 일본군과 오랜만에 붙게 됐다며 흥분하는데, 99화 초반에 절이도 해전이 벌어진데다 왜교성 공격도 다섯 번째라는 내레이션이 나왔기 때문에 오랜만 운운하는 것은 배우의 실수라고밖에 볼 수 없다.[30]
- 원래 명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했어야 할 요시라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본국으로 도망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니시 유키나가 밑에 종군하며 마지막회까지 출연한다. 심지어 이순신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로 오기도 한다.
- 조선군의 갑옷 문제. 여러 견해가 많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조선군은 갑옷이 아예 없고 군복(잘 알려진 "포졸복")만 입고 있지만 일본군은 죄다 갑옷을 빠방하게 착용하고 있다.[31][32] 다만, 그 당시 서양에도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군복을 통일했던 나라가 없던 것을 상기하자. 임진왜란기 갑옷의 비율은 미지수라는 것이 정답이고, 이 때까지 찰갑이 주류였다가 실전 경험으로 주류가 두정갑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정도이다. 당장 승정원일기에 이순신이 당시 수군이 갑옷을 다 벗고 싸웠는데 왜 입히냐고 말하는 기록도 있어서 기록이 상충된다. 고로 이 드라마에서 포졸복을 입힌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선택에 불과할 뿐이다. 동시에, 갑옷이 있었어도 오히려 갑옷을 벗고 싸웠다고 하는 것이 더 옳다. 이런 상황에서 의복 재현은 가장 가까운 시대의 자료과 그 당시 다른 국가들의 복식과 비교해가면서 맞추는 것이므로 포졸복으로 해도 비판할 여지는 없다. 물론 갑옷 보유량을 보았을 때 병사들이 갑옷을 기피했을 수는 있지만 이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아무도 안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약 무기가 일반화된 조선 후기의 그림을 가지고 이 시대를 그리는 것은 좀 무리이다. 조선군이 갑옷을 많이 입고 다녔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지만 시대상이나 전투 방식상 아예 안 입었을리도 없다. 즉, 일본군과 조선군의 갑옷 비율이 지나치게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은 옳은 지적이 될 수 있다. 많은 지적을 받았는지 이후 같은 작가의 사극 대왕 세종에서는 조선군이 환골탈태한다.[33]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등 기존의 임진왜란 배경 사극에서 흔히 범했던 오류인 두석린갑의 등장도 그대로 답습했다. 두석린갑을 고위 장수가 입는 것 자체는 맞는 것이지만 두석린갑은 조선 후기에 생겨났으므로 임진왜란 배경 사극에는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34] 일본군의 복장 역시 틀린 부분이 많은데, 장군들의 갑옷은 기존의 임진왜란 배경 사극처럼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 갑옷이 난무한다.[35] 이에 대해 태클이 들어왔는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갑옷은 본디 헤이안 시대풍의 갑옷이었다가 이후 전국시대 풍의 뿔 갑옷을 입게 된다. 명나라의 경우 병사들의 갑옷은 잘 재현됐지만 장수들의 갑옷은 기존 KBS 대하드라마에 나온 후삼국시대, 고려, 고대 및 중세 중국 갑옷이 나오는 오류가 있었다.
- 무기 비율은 일본군은 원거리-조총, 근접-일본도로 통일했으며 조선군은 원거리-활, 근접-당파
명나라는 언월도이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옛날 군대의 주 무기는 창이였으며, 일본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군 역시 절반 이상이 창으로 무장했지만 드라마에서는 죄다 일본도만 들고 나오며, 창은 공들여 만든 1~4화에서 몇번 나오고 활 역시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명량 해전 즈음에서야 쓴다. 셀제론 조총비율이 10분지 1이었다. 또한 조선군도 활만 쓰지 않고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조총 비율을 늘려갔지만 여기선 조선군이 조총을 쓰는 장면 따윈 절대 나오지 않고, 칼도 부산 해전쯤 되어서야 쓴다.[36] 일본군의 활과 창은 후반부에 비로소 비중이 늘어나긴 했지만 조총과 일본도에 비해 존재감이 적은 건 여전하다. 훗날 징비록에서는 일본군이 창을 사용하는 장면이 불멸의 이순신 때보다는 많이 나왔으며(칼을 더 많이 사용하긴 하지만), 조선군 또한 당파가 아닌 장창을 쓴다.
- 해전이 벌어지면 수군 장수들이 치어리더가 된다. 수군이라는 특징 덕에 지휘관이 최전방에서 칼질하는 병폐를 답습하지는 않았지만, 전투 와중에 한다는 말이 방포하라~! / 단 한 명의 적도 살려보내지 마라~!!라는 것 뿐이다. 실제 전투 상황에서는 단순한 용어로 명령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명령이라는 것도 "적선의 하단을 겨냥하라!" 라든가 "적의 기함에 집중 포격하라!" , "적장의 대장선을 집중 포격하라~!" 등 전술 상의 지시지 응원은 아니다.[37] 영화 명량을 보면 지휘관들이 여기보단 훨씬 바빠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어이없는 응원을 하면서 지휘봉을 놔두고 시종일관 위험천만하게 칼을 뽑아 휘두른다. 갑판 밑의 격군들을 제외하고도 수십 명이나 되는 전투인원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데 그 좁은 배에서 쓸데없이 칼을 휘두르면 아군을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도 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너무 광인으로 묘사해놨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딱히 문제있는 연출은 아닌 것이, 처음에는 위엄있는 관백의 모습과 망상을 그대로 드러냈고 부산 해전 이후 이에야스에게 능멸을 당하자 그날 밤에 미친듯이 분노하는 걸 시작으로 점점 맛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도요토미의 생각은 일본 학자들조차 의문을 제기하는 판국이고 정벌이 실패하면 제일 타격이 큰 사람조차 히데요시니 이순신에게 부들대는 것도 납득이 된다. 펄펄 날뛰는 것으로 왜곡을 따지자면 오히려 본작 찌질이의 끝판왕인 선조 쪽이 더 억울할 것이다.
- 다른 일본 영주들이 수군 총대장인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이순신에게 패한 직후 구루지마 미치유키에게 개갈굼당한다.[38] 일본의 영주간에 세력차가 있는 것을, 중앙 집권적 국가와 그 역사에 익숙한 한국에서 이해하지 못했거나 드라마의 특징상 나온 케이스인 듯하다. 만약에 군소영주인 구루지마가 히데요시를 직접적으로 섬기는 도도한테 이런 짓했으면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다카토라가 영지가 컸던 강력한 영주는 아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1인자였고, 히데나가 사후에도 그 재능을 높게 본 히데요시가 직접 발탁해서 멍청한 조카에게 붙여 줄 정도로 능력있는 사람인데 반해 미치유키는 걍 듣보잡이었다. 당시는 일본이 통일되긴 했어도 안정되지 않은 시대라 구루지마 같은 약소 다이묘는 강대 다이묘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뿐만 아니라 와키자카의 휘하에 있는 도공인 장평이 도도와 동감하자, 와키자카의 세력이 무서워서 감히 장평의 말에 뭐라고 토를 달지 않는 이중성도 있다.[39] 차라리 구루지마가 도도 앞에서는 겉으로나마 예의바른 모습을 보이면서 도도가 없을 때 도도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식으로 묘사하는 게 나았을 듯하다.
- 작중에서도 언급이 되었고 이후 조선 통신사들도 기록을 했던 바와 같이[40] 전근대 일본은 조선에 비해 검을 훨씬 중시했고, 따라서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래도 일본군이 조선군에 비해 백병전에 더 능하다고 할 수 있는데[41] 임진왜란 당시의 연출을 보면 경험이 없는 신병인 조선 병사가 일본군과의 백병전에서 막상막하로 싸운다. 이순신이 아군의 백병전 능력에 우려를 표하면서 정운 등 수하 지휘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격전 위주의 전술을 채택하게 된 주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막상 붙어 보니 막상막하라면 조금 애매하지 않은가.[42]
- 한산도 대첩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전라좌수군 함대의 배후를 기습하도록 선단을 따로 편성하고, 조선군의 배후를 공격했음을 CG로 보여주며,[43] 이 장면에서 부관인 송희립은 매복에 걸렸다고 호들갑을 떨고, 이순신은 당황한 표정으로 후퇴를 명한다. 하지만 정작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합류하여 학익진을 펼친 이후 나오는 전장 CG에서는 매복 선단 자체가 사라져 있는데,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왜 증발해 버렸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본대에 합류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차피 다 합쳐서 정면을 공격할 것이었다면 정작 매복이란 것을 왜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이 일본 수군의 매복 장면은 조선 수군이 일시적이나마 수세에 몰린 상황을 역전시켰다는 느낌을 주려고 넣은 내용으로 보이나,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 형성을 위한 후퇴 자체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고, 송희립도 이순신도 매복에 당황하여 후퇴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판옥선이 일본군 함선보다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매복이 실제로 있었다면 이상 전라좌수군이 사방에서 공격받게 되어,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뒤늦게 합류하더라도 학익진을 펼 수가 없고, 실제로 한산도 인근 해역에는 일본군의 매복에 대하여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되치기 매복을 할 만한 장소도 없으며,[44] 사서에도 일본군의 매복에 관한 서술은 없다. 결국 일본 수군의 매복 장면은 그냥 작가가 쓸데없는 내용을 추가하여 사실감을 떨어뜨린 것에 불과하다.
- 함대 간의 거리에도 문제가 좀 있다. 총통의 사거리가 1km정도 된다고 극 중에서 언급했으며 판옥선의 길이가 20m 좀 넘는 걸 생각해 보면 양 함대의 거리는 1km는커녕 200m정도밖에 안 되는 걸로 보인다. 유효 사거리를 감안해 좀 더 접근했다 쳐도 200m는 와키자카가 도선해서 모조리 도륙하는 그림이 나왔을 듯. 이 부분은 사실성을 살린답시고 안택선과 판옥선간의 거리를 500m ~ 1000m로 설정했다면 배가 너무 작아보여 재미가 없었을 것이니 그럴만 한 연출이라고 보면 될 듯.
(반론) 위 내용은 과거의 통념에 입각한 서술이기는 하나, 이를 오류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1km는 천자총통의 유효사거리가 아니라 최대사거리인데, 역사상 어떤 전투에서도 최대사거리에서 전면사격을 개시한 예는 없다. 명중률이 형편없어져 화약과 포탄의 낭비이기 때문. 일본군 주력 전투선인 세키부네의 길이가 10~20m 가량이고 기함급인 아타케부네의 길이가 30m 가량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1km 거리에서 이를 명중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명중률이 어느 정도 담보되는 거리는 200~300m 남짓이고, 최대한으로 보더라도 400m 이하였을 것이다. 드라마 방영 이후 그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한 수조규식에도 적선이 200보(步) 내로 접근하면 총통으로 사격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장전속도를 높이거나 드라마에서 나온 것과 같이 평저선인 판옥선의 특징을 이용한 선체 회전사격[45]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물론 이 드라마 제작 당시에 수조규식의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아 이를 참고해서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위 화면의 내용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총통이 많이 동원된 것도 사실이지만, 활도 많이 쓰인 만큼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교전을 벌였다고 봐야 한다.
- 전라 좌수영 지휘관들에 비해 전라 우수영이나 경상 우수영 지휘관들이 너무 적게 나온다. 이순신이 직접 통솔했던 전라 좌수영 소속 인물들의 비중이 대단히 높은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전라 우수영이나 경상 우수영 측은 인물 자체가 많이 나오지를 않아서[46] 삼도 수군이 죄다 모인 자리에서도 절대 다수가 전라 좌수영 소속이다. 하다못해 엑스트라들이라도 주욱 앉혀놓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칠천량 이후 조선 수군이 이순신 아래에 완전히 결집되었을 때에도 전라 우수영과 경상 우수영은 찬밥 신세인데, 당상관인 경상 우수사 무의공 이순신이 신병들을 접수하는 잡일을 맡는 모습을 보여준다[47]. 그리고 충청 수사 권준이나 경상 우수사 이순신이 두석린갑이 아니라 두정갑을 입고 나오는 것도 차별대우를 받는 부분이다.[48]
- 일본 수군이 보유한 전선들은 고바야부네(小早船), 세키부네(関船), 아타케부네(安宅船) 등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작은
어선연락선을 제외하고는 죄다 아타케부네만 나와서 해전이 항상 판옥선과 아타케부네만 싸운다. 실제 일본군의 주력은 판옥선보다 작은 세키부네였으며 극 중 일본군 주력인 아타케부네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49] 정확히 말하자면 세키부네 자체는 본작에도 많이 나오긴 했으나, 세키부네에 탑승한 일본 병사들의 모습을 자세히 찍기 위한 세키부네 세트장을 따로 만들지 않은 탓에[50] 세키부네를 멀리서 촬영한 모습은 많이 나오면서도 세키부네를 타고 해전에 임하는 일본 병사들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으며, 해전에 임하는 일본 병사들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된 일본 군함은 모두 아타케부네였다. 물론 실제로도 정유재란 때는 판옥선에 대항하기 위해 아타케부네가 많이 투입되긴 했으나, 그래봤자 세키부네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편이었다. 다만 마지막회에서 이순신을 조총으로 쏴 죽인 일본군 병사는 세키부네를 탄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본작에서 모든 세키부네들이 판옥선 및 아타케부네와 같은 크기로 묘사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세키부네들도 사이즈가 들쭉날쭉하기도 했다. 문제는 당시 수군들이 왜군 함선들을 보는 족족 깨부숴서 그걸 왜에서 생산량을 따라 가기가 힘들었다. 오죽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이 직접 군선 건조에 개입했겠는가? 더군다나 아타케부네의 디자인 또한 다양성이 없는데, 실제 전국시대 일본에 존재했던 아타케부네는 대형화된 세키부네 위에 집 한 채가 있는 듯한 매우 화려한 디자인도 있었던 반면 불멸의 이순신의 아타케부네는 세키부네 위에 작은 누각이 있는 형태만 나왔다. 세키부네의 크기가 들쭉날쭉했던 것처럼 아타케부네 또한 망루의 크기와 디자인이 제각기 달랐는데,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것을 지나치게 일관성 있는 디자인으로 묘사해버린 것이다.
- 부산포 해전에서 녹도 만호 정운이 함선에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몸으로 막아 전사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실제로는 상륙하여 돌격하던 도중에 머리에 총을 맞고 전사했다는 것이다. 정운의 장례식이 나오고 그의 기일이 부산 시민의 날로 제정되었다는 자막까지 나오는 걸 보면 의도적으로 그의 희생을 부각시킨 듯.
-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직접 칼을 뽑고 싸우면서 적장을 베어 쓰러뜨리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순신이 직접 검을 휘두를 정도는 아니었다는 비판이 있으나 난중일기에 쓰인 표현으로 보아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일이라는 반박도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이순신이 벤 것으로, 실제로는 모종의 이유로 죽어서 떠내려 가는 걸 항왜 준사가 발견하고 김돌손이 건져낸 뒤 구루지마의 모가지를 썰어 장대에 내걸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오류가 맞다. 이 역시 표현을 위한 허용으로 봐야 하는데, 단순 전투가 아닌 칼부림을 하면서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세상의 모순과 인생의 역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다가 적장과 함께 모두 베어버리고 승리를 얻는 감동적인 장면이기 때문.
- 명량 해전에서 난중일기의 기록으로 미루어봐서는 상당한 시간을 이순신의 상선 혼자 싸운 것으로 추정되지만, 극중에서는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명량 해전에 참가하지도 않은) 권준, 우치적, 이영남 등 몇몇 부하들이 처음부터 같이 죽기로 싸운다. 이 세 장수는 드라마상에서 이미 이순신과 죽음을 함께 할 정도로 돈독한 신뢰 관계를 쌓은 사이인데 이런 자들까지 뒤에서 놀고 있으면 드라마의 방향과도 맞지 않기 때문에 이순신과 처음부터 같이 싸우는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 안위, 김응함 등은 실제 역사대로 초요기가 올라간 뒤에야 합류한다.
-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대결을 벌이지만 실제로 와키자카는 노량 해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주인공과 시종일관 대립하는 인물이 필요한 것으로, 그 인물을 와키자카로 정하여 각색한 부분이다. 근데 이 각색은 10년 후인 징비록에서도 거의 고쳐지지 않았다. 다만 징비록에서의 와키자카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영남과 동귀어진이 아닌 영혼까지 탈탈 털려 멘붕 상태가 된 채로 철군하는 것이 다른 점. 이후 임진왜란 1592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량 해전에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어 불멸의 이순신 및 징비록에서의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되었다.
- 본작에서 묘사된 노량 해전의 명나라 수군에도 시대 구현 오류가 많다. 실제 역사에서 진린은 왜군에게 포위당하여 위기를 맞았다가 이순신에게 구출되는데 드라마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해전에서 전사한 등자룡이 드라마에서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있다.
- 왜군이 총통을 함포로 달아서 쓴다. 조선 수군이 총통을 쏘면서 왜군이 조총으로만 반격하는 게 그림이 영 안나오는지 왜군도 총통을 쏘는 장면을 넣었지만, 작중에서도 배가 약해서 다수의 총통을 쓰기 어렵다고 보고하는 장면도 나오고 나름 배를 새로 건조하는 장면도 보이지만 실제로는 왜군은 전쟁 끝까지 화포를 운용하지 못했다.[51] 세키부네는 삼나무로 만든 반면 참나무나 소나무 등 단단한 나무로 만든 판옥선과 비교하기에도 당장 판옥선으로 들이받아도 세키부네가 박살날 정도다.[52] 왜군이 함포를 운용하면서 함대를 만들었다면 명량 해전의 승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며, 전국시대의 승자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부나가도 불교세력인 혼간지(本願寺)를 공격할 때에 모리 가문을 등용하고 나중에는 지마 해적의 구키 요시다카까지 등용했었지만 신통찮았기 때문이다. 이때 노부나가는 발상의 전환으로, 크고 거대한 군선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결과 오오아타케부네(大安宅船)을 건조했고, 이 배로 혼간지세력을 몰아냈다고 한다.
- 우치적과 함께 사극 최대 피해자 2호는 바로 윤두수(정동환 분)라는 얘기가 있다. 유능한 장면은 아예 안 나오고 부정적인 씬만 나와서 이미지를 깎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직 생활 초부터 뇌물을 받아서 탄핵된 기록이 있는 데다가 원균을 고금에 둘도 없는 명장이라고 하기도 하고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건 물론 제멋대로 장문포 해전을 기획하여 다 말아먹거나 조정에서 이순신을 못마땅해하는 선조에게 편승하여 전시에는 지휘관을 바꾸면 안 되지만 이순신은 반드시 체직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그것도 정확한 근거조차 없이 그저 김응서 같은 잡신(雜臣)의 말만 듣고 저렇게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 이후 비보를 접한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주장을 하는 등[53] 삽질을 워낙 많이 하긴 했지만 관료로서는 유능한 인물이였는데 그저 사악한 권신으로 묘사되었다.[54]
- 일본 무장들이 서로를 "가토 장군", "고니시 장군" 등 '장군' 이라는 칭호로 부르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일본에서 장군(將軍)은 쇼군, 즉 세이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 征夷大將軍,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 1명 뿐이며, 겐지(源氏)의 후예가 아니면 감히 쓸 수 없는 호칭이었다. 만약 극중에서처럼 서로를 장군으로 부른다면 이는 반역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면하기 어려운 중죄에 해당했다. 그 히데요시마저 쇼군을 칭하지 못하고 공경의 양자가 되어 관백을 칭했다. 물론 극중에서 나오는 일본어는 "하이", "하"
, 빠가야로밖에 없으며 일본사람들도 죄다 한국말을 쓰기 때문에[55] 굳이 일본어까지 제대로 번역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장군 호칭을 쓴 모양.[56] 이 또한 위에서 나온 현대인들의 시점에서 벌어진 경우.
- 도도 다카토라가 엄청 중후한 인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주인을 7번 바꾼 걸로 유명하고[57] 도쿠가와 이에야스한테 붙어 많은 공을 세우지만 이에야스조차 너무 아첨이 심해서 마음에 안든다고 할 정도였다. 이는 실책이라기 보다는 도도가 딱히 누구에게 아첨할 만한 상황 연출을 할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배역을 맡은 최동준 씨가 무게감 있는 연기를 많이 해서 생긴 오해로 보인다.
- 듣보잡에 가까운 일본 무장들은 마치 일본에서 대단한 위치에 있는 것 마냥 설명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참전한 높은 위치에 있던 무장은 드라마에선 잘 언급되지도 않던 우키타 히데이에[58], 코바야카와 타카카게[59], 모리 데루모토[60], 시마즈 요시히로[61], 도도 다카토라[62][63], 쵸소카베 모토치카[64] 등으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띄워준 장수들은 신인 무장 or B급 무장이었다. 가토나 고니시, 구로다 등등은 전쟁에서 잔뼈가 굵긴 했지만 A급은 아니었고 오히려 당시 잘나가는 신예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진정한 A급 이상은 다테 마사무네와 이 당시 일본 전체 최강자인 혼다 타다카츠, 그리고 그 혼다의 주인인 S급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하지만 혼다는 자신의 주인을 따라서 아예 임진왜란 자체를 불참했고 다테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고는 하지만 참전한 전투가 고작 제2차 진주성 전투 정도에 불과했으며, 때문에 여기서 띄워준 장수들 항목에는 와키자카나 고니시보다는 전술한 도도 다카토라나 시마즈 요시히로가 들어가야 맞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계승했기도 했지만, 반대로 전부 휘어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 진주 대첩에서 전사한 김시민은 시체 아래에 있던 왜병에게 저격당하는 것이 아니라 분전 중에 총 맞고 쓰러지는 것으로 나온다.
- 명군이 인식과는 달리 전황의 반전에 기여를 했으나, 여기서는 긍정적인 부분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전투를 기피하거나 백성들을 약탈하는 등 부정적인 요소만 나타난다.
시대를 앞선 드라마
- 부산진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정발은 흑의 장군 즉, 검은 갑주를 입고 부산진 방어에 참전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아무나 돌려입는 청색 갑옷이다. 10년 후 징비록에서는 검은 갑주를 입고 나타난다.
- 왜란 전 수군의 훈련 상태가 개잉여로 묘사된다. 수군은 육군과 달리 함선 위에서 전투를 치르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훈련의 난이도가 육군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그래서 수군에서 생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육군에 지원하겠다는 생각에 수군 입대를 피하려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이순신이 지휘봉을 잡게 된 뒤 조선 수군의 전력이 크게 증가한 것은 맞지만 드라마에서 표현된 것처럼 노도 제대로 못 다루는 격군과 화포 장전도 모르는 포수 같은 잉여들은 아니었다. 부임 당시 병사들의 군복도 없거나 12척 있어야 할 배가 꼴랑 두 척밖에 없다는 암담한 상황을 잘 묘사한 건 좋았는데 살짝 오버한 셈이다.
- 윗 항목의 연장 선상으로, 정운 같은 보수적(?)인 무장들은 화포 위주의 전략을 치욕적으로 생각하는 묘사가 있고, 권율이나 이순신 같이 혁신적인 인물들이 화포를 앞세우는 전략으로 성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화포라는 무기는 이미 최무선이 한반도에서 자체개발을 시작한 이후로 이미 검증받은 무기였다. 비록 생산 비용이 높고, 조선 자체가 6진을 필두로 국경이 안정화되자 확장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던 조선이었기 때문에 전술전략 면에서 혁신이 느렸다 뿐이지, 기능면에서는 꾸준히 개량이 이루어졌고, 이미 서양의 화승총에 대한 지식도 갖추어졌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운같은 인물은 지식으로서 화포를 다룰줄만 알지, 이런걸 왜 써야 하나 한숨쉬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일본군이 혁신적으로 화승총의 발포간격을 줄이는 전략을 개발했기에 조총이 임진왜란 초기에 효과적이었을 뿐이지, 조선의 무장들의 조총의 기능적인 분석 자체가 고리타분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난중일기를 보면 승전마다 노획품에서 조총도 상당히 중요한 품목으로 이름에 오르는 것을 보아, 한창 전시 상황이었을 당시에는 조선 수군도 조총의 확보에 열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무장들은 확실한 직업군인으로서 서양의 기사들과는 조금 맥락이 달라, 어느정도 전쟁에 대한 로망은 없는 부류에 속해있었다, 쉽게 말해, 더 효과적으로 이길 수단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입을 하려는 인물들이었지, 전사의 어쩌구 따져가며 물불 가리던 종류는 아니었다는 말.
- 노량 해전 당시 이미 짤린 인물들이 그 직책을 그대로 역임하고 있다. 정운의 후임 녹도 만호인 송여종도 등장하지 않는 걸 보면[65] 새로운 인물을 캐스팅하기에는 여건이 맞지 않은 듯 하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쌍벽 수준의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히데요시의 띠꺼운 부하 정도로 묘사되고, 복속된 다이묘라 하더라도 가신과는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의 제1 가신"이라는 대사까지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에게 후사를 부탁했지만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그냥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빡치게 하는 바람에 홧병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 걸로 묘사된다. 물론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가 뒤통수 쳐버린 것은 사실이며, 위에서 보듯 이를 암시하고 있다.
- 분명 웅치 전투를 조선군의 패배로 묘사하고 내레이션이 "패배했다"고 말하는데 이치 전투 승리 후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에서 나오는 해설은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를 세트로 묶어서 승리했다고 말한다. 비록 웅치에서는 밀렸지만 이치에서 공세를 막아내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전술적 승리를 말하는 듯.
- 이순신과 진린의 첫 대면도 오바. 이순신이 품계상 상급자이기 때문에 때리거나 모욕을 줄 처지가 아니었다. 물론 명나라 장군들이 천장이라고 기고만장하여 자신보다 높은 품계의 조선 관료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지만 최소한 이순신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다. 만약 진린이 이순신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다면 그 즉시 난중일기에 진린을 까대는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66]
- 고니시 유키나가가 흔히 알려진 붉은 십자가 깃발을 사용한다. 원래 고니시가 붉은 깃발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주교 금지령으로 임진왜란 시기에는 십자가 깃발을 사용하지 않았다.
- 도도 다카도라 등 일본 다이묘들이 망원경으로 조선 수군을 관측하는데, 망원경은 1608년에 발명되었으므로 1592년에 이걸 사용하는 건 명백한 오류이다.
뭐, 어때. 휴지도 있는데
- 조선군의 훈련 모습 중에는 시대와 맞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현대 대한민국 국군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한 장면들이 있어서 유머 소재가 되기도 했다. 뜀걸음은 그렇다 쳐도 유격 훈련에 각개전투, 원산폭격, 구형 막사식 내무반 생활 등등.
- 드라마의 초반부 방영분에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정작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어떠한 사서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로도 계속 살아서 벼슬을 했다.
탄금대 전투에서는 기병이 포졸복을 입고 나온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기병은 일반 잡병과는 격이 다른 고급 병력으로, 의병도 아닌 관군이. 그것도 고급 병력인 기병이 갑옷도 입지 않고 배를 드러냈다는 것은 대단히 비상식적이다. 말을 먹이고 관리하는 데 비용이 한두 푼 들어가는 데 아니었던데다, 말의 기동력과 공격력을 살려 긴급하거나 중요한 임무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말을 타는 기수를 훈련하는 데에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고대로부터 말을 탄 병사는 그 자체로 정예병이었으며, 그에 따라 철저히 무장했다.
- 잘못된 유언
드라마에서 이순신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단 한명의 조선 수군도 동요해서는 아니되니.... 나의 죽음을....적에게....알리지 마라..!"
여기에서 문제는 "적에게" 라는 부분. 실제로 기록된 이순신의 유언은 "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라 적이니 아군이니 하는 부분은 없으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총사령관의 죽음을 적에게 말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3.1. 옥에 티
- 어떤 화에서 현대의 건물이 나온 적이 있다.
-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한산도 본영을 청야하는 장면과 우치적이 초계로 이순신을 찾아와 무릎을 꿇는 장면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기사 장면들의 핵심에는 큰 문제가 없는데, 본영을 청야할 때도 날발이 화면에 잡혔고 초계의 이순신 옆에도 그가 있었기 때문. 한산도에서 초계까지 실제로는 직선거리로 약 90km다. 이 부분이 기사화되자 제작팀에서 해명하기를 A/B팀(부안/한국민속촌)으로 나눠서 촬영하다 보니 생긴 실수였다고 한다.
[1] 덧붙여 거북선을 두 번째로 만들어 진수하기 직전에 이순신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면서 축문을 읽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의 발성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일단 유세차(維歲次)라는 발음부터 제대로 못 냈고, 영상에 보이듯 장중하게 끌면서 읽어야 하는데 배우 자신이 제사에 참석한 경험이 한 번도 없는지 이 부분이 전혀 안 되어 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성악을 불러야 하는데 배에 힘을 전혀 안 주고 대중가요 부르듯이 대강대강 넘겨버린 격.[2] 명량 해협의 폭이 3백 미터가 채 되지 않는데,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750미터짜리 만을 쇠사슬로 틀어막은 사실이 있다.[3] 이순신이 파직당하기 전의 직책은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으므로 교체된 원균 또한 전라좌수사 직을 겸임했다. 칠천량 해전 당시 경상우수사는 배설이 맡았다.[4]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지휘체계가 세분화 되어 있어 총사령관이 갑자기 지휘불능이 된다고 해도 일본의 경우처럼 바로 퇴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군사들의 사기와 승리의 기세에 크게 영향이 가므로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5] 현역 복무 시절 총검술을 배웠던 엑스트라들이 총을 드니 자연스럽게 연기했던 모양이다. 돌려 쳐 동작은 개머리판으로 적의 안면부(혹은 상체)를 가격하여 내상을 입히는 동작이다. 그런데 화승총은 개머리판이 없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조총은 개머리판이 없는 산탄총처럼 손잡이만 있는것을 뺨이나 가슴에 견착하고 쏜다.[6] 화약이 터지는 곳에 우레탄 덩어리를 배치해 같이 터지게 했다.[7] 부산포 해전에서 잘 표현하였다.[8] 이미 4화 노량해전에서 구현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안 나왔다. 단순히 밤에 불지르면 눈에 잘 띄니 이렇게 한 거 같긴 하다 포탄이 폭발하긴 하나 사실 야간에 우레탄 백날 튀어봤자 하나도 안 보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9] 실제로 대장군전을 획득한 구키 요시타카가 있다보니 현대까지도 전해지고 있다.[10] 이후 선조와 대신들이 피난 가고 한양이 혼란스런 와중에 공회빈 윤씨의 시신이 사라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나중에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가 시신을 찾도록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11]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요컨대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이 대표, 외교부 차관이 부대표를 맡은 외교 사절단이 미국에 파견됐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외교부 장관, 외교부 차관이라고 부르거나 대표, 부대표라고 하지, 한 쪽은 장관, 한 쪽은 부대표라고 일컫지는 않을 것이다.[12] 이것도 그냥 형식상. 또는 문서상 높은 것이 아니라, 각종 의전에서 정사가 더 높다는 것을 여러모로 볼 수 있다. 가령 정사를 다른 말로 상사(上使)라고 부르기도 했고, 에도까지 오가는 행렬 내내 정사와 그 수행원들이 가장 선두에 섰다.[13] 임진왜란이 끝나고 불과 9년 뒤에 파견된 통신사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통신사가 들고 온 외교 문서를 받은 일본은 답서를 써서 통신사 측에 들려 보내야 했다. 그런데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첫 통신사다 보니 각종 외교 의전이나 절차나 형식 등등을 처음부터 다시 마련해야 했고(계속 바뀌었는지라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1636년 4차 사행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것들이 일단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보니 답서에 년도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도 문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명의 연호를 쓸 것이냐 일본 자신들의 연호를 쓸 것이냐였는데, 명의 연호를 쓰자니 일본이 명의 조공국이 아닌 상태에서 명 연호를 쓸 수는 없었고 일본 연호를 쓰자니 통신사 측이 반발할 것이 뻔했기 때문. 결국 잠시 고민하던 일본은 간지를 써서 주었고 통신사도 문제 없이 받아들였는데, 일본 연호가 거의 쓰이지 않는 허울이었다면 명의 연호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지 일본 연호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14]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조선이 맥을 못 추고 무너진 건 조총이라는 무기를 잘 몰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총병들을 몇 부대로 나누고 순서대로 총을 쏘도록 해 장전이 오래 걸린다는 약점을 보완하는 전술 때문이었다.[15] 이 "수백 건" 가운데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만 들자면 중종 대의 정막개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반역 모의가 있음을 사전에 알고 고변한 공을 인정받아 정 3품 상호군에 제수되었는데, 장영실도 대호군까지 올랐을지언정 상호군에는 임명되지 못했다. 다만 반역 모의를 고변해 고위 관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한다면 이후에 거짓 고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데다 정막개 자신의 성격이 워낙 개차반이라 결국 관직을 박탈당하긴 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건 "천것에게 고위직을 주면 안 됩니다" 가 아니라 "역적 모의를 고변한 공으로 고위직에 앉혀서는 앞으로 비슷한 사례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였다는 것. 다시 말해 이런 우려는 천민이라도 공을 세우면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뒤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16] 작중에서 이순신을 "무군지죄(無君之罪)를 저지른 죄인" 어쩌고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이거야말로 임금을 무시한 죄다. 회수를 정말로 하고 싶다면, 광해군이나 그에게 인사권을 위임한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서 군관 누구누구 등은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어서 저러저러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해야 한다.[17] 권준은 칠천량 이후 충청 수사로 임명되어 한양 수호를 임명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 전투부터는 참가한 적이 없었지만 여기서는 선조에 대한 분노로 복직을 거부하는 권준을 이순신이 직접 설득해 데려가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충청 수영은 삼도 수군 통제영 휘하로 편제되어 있어서 지휘를 받긴 하지만 칠천량 이후에도 해전에 참가했다고 묘사한 것은 오류.[18] 배우의 사정으로 캐릭터가 중간에 통째로 증발했다.[19] 따라서 명량 해전 이후 흩어졌던 함선들을 긁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건조를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명군 도독 진린의 환영연 직후 진린이 부관에게 '함대 재건 속도를 볼 때 허리띠를 졸라매고 뛴 것이 분명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나 사로병진 작전 당시 조선 수군을 그렇게 빨리 재건할 수 있느냐는 명군 지휘관의 물음에 이순신이 '흩어진 배들을 모으면 된다' 가 아니라 '군사들과 백성들의 열의가 때로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대목 등이 그렇다.[20] 그래서 배 선두에 2문 설치하는게 최대치였다.[21] 와키자카와 가토가 궁도를 하면서 잡담하는 장면인데, 일본 활은 긴 방향을 위로 가게 잡아야 하는데 구조를 이해를 못한 것인지 긴 방향을 아래로 가게 해서 마치 박격포(...) 쏘듯 곡사로 과녁을 향해 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대관절 어떻게 조준하는지 궁금할 지경[22] 고증을 더욱 치밀하게 하자면 "풍신수길, "소서행장" 이라고 하는 것도 틀렸고, "평수길", "평행장" 이라고 불러야 한다. 조선에서는 일본 측에 성씨가 藤, 源, 平, 橘 넷이 전부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1617년 조선통신사가 남긴 기록에도 당시 조선에 '平調興' 이라고 알려졌던 일본인 柳川調興을 만나고 나서 柳川이 성씨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調興의 별호(別號)이다'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록에도 풍신수길이라고 나오는 기사는 3건에 불과한 반면 평수길로 나오는 것은 85건에 달한다.[23] 조산보 만호 시절의 이순신 또한 작중에서 만호 나으리라고 불렸다.[24] 이순신이 옥포해전 승리로 가선대부까지 올라간 뒤 통제사로 제수되었기 때문에 '통제사 대감' 이 맞지만 다들 통제사 영감이라고 한다. 물론 파직 후 복직했을 때에는 선조가 정헌대부 품계는 빼고 통제사 관직만 돌려줬기 때문에 '통제사 영감'이 맞긴 하다. 간혹 정3품 품계명이 '절충장군' 이기 때문에 정3품까지를 '장군' 으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 근거도 없는 소리다. 이렇게 치면 '조선 국왕' 은 '전하' 가 아니라 '국왕' 으로 불러야 한다.[25] 사실 빼도 아무 문제가 안 되는데, 단종 이야기 자체가 한산도 해전이나 명량 해전 등 굵직한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나온 게 아니라 극중의 가상 인물인 청향이 윤두수에게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들을 아껴줄 것을 부탁하며 꺼낸 것이기 때문이다.[26] 병조판서로 전라 감영을 방문하여 권율에게 지휘권을 부여할 때도 모르는 척 한다. 이 때는 여러 장수들이 모인 자리이므로 그럴 수도 있어 보이나, 류성룡과의 대화는 공적인 대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1 대화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아무리 봐도 이상해 보인다.[27] 안위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 전공 때문에 오히려 이순신은 선조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순신은 안위의 전공을 선조에게 보고하였는데, 정보의 혼선으로 안위의 전공이 사실이 아니라는 잘못된 보고가 올라 오자 선조는 '이순신이 전공을 탐하여 허위로 보고해서 조정을 속였다'며 비난했다. 이후에 안위의 전공이 사실임이 밝혀지자 이번엔 '이순신이 부하 장수의 전공을 가로챘다'며 말을 바꾼다. 근데, 정보 혼선이라고 보기에는 이순신을 까내리기 위해 육하 원칙도 무시한 반론을 통해 정치적 단합을 하였음을 인증한 대표적 인물이 다름아닌 이원익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조가 안위에게 상을 주지도 않았다.[28] 멀리 갈 것 없이 비슷한 시기에서 예를 하나만 들면, 선조는 원균에게 공신 작위를 내리는 일을 강력히 밀어붙였으나 이에 따르는 신하는 하나도 없는 실정이었다. 즉 극중에서처럼 왕명을 거부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원씨에게 공신 작위는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무공신 1등에 종 1품 숭록대부의 품계가 내려졌는데, 이는 선조에게 동조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왕명이라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으므로 정말 최소한으로 붙여 준 것이다.[29]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볼 수도 있긴 한데, 극중의 묘사만 보면 삼고초려를 하니 그냥 곧바로 현감이 된 듯한 모양새다. 또 실존 인물 어영담은 포작 일 따위를 한 적이 없다.[30] 실제로 절이도 해전은 잠깐 묘사되었기 때문에 화면에 김완이 비치지 않았고, 앞선 네 번의 공격도 내레이션으로만 나왔다.[31] 흔히 갑옷설은 일본에서 그려진 조선역해전도나,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 묘사하는 조선군은 단단한 가죽갑옷에 유럽인과 같은 철모를 쓰고 있다고 한다." 라고 하는데, 조선군 갑옷설의 대표적인 근거 사료의 저자인 프로이스는 조선에 넘어온 적도 없고, 조선에서 전해온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믿는다면 탄금대 전투의 조선군은 7만명이고 2차 평양성 전투도 일본군이 승리했으니 후퇴했을 뿐이다. 고로 조선군 갑옷 문제는 상당수 역덕후들의 '희망' 때문에 감정적으로 기록을 취사 선택한 감이 크다. 오히려 사극에서 포졸복은 조선 후기를 베이스로 하면 옳다. 조선 후기의 숱한 풍속화, 행차도, 전투도 모두가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 전기는 다르지 않냐고 할 수 있는데, 전기는 남은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32] 조선 전기의 군복 재현은 대왕 세종 문서 참고.[33] 문제는 대왕 세종의 배경인 조선 초기는 두정갑이 조선 중기 이후만큼 보편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찰갑 계열 갑옷을 착용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 배경 사극에서 갑옷 재현을 제대로 하자면, 두정갑이 나오긴 하되 대체로 찰갑이 가장 많이 나오고 여기에 경번갑도 섞여 있는 식이 되어야 한다.[34] 사실 두석린갑 자체가 실전용이 아닌 의장용이었으므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 후기 배경 사극에서도 군사훈련 같이 실전이 아닐 때만 두석린갑을 입고 반란 진압 같은 실전에서는 두정갑을 입는 게 옳다. 실제로 조선 후기가 배경이면서 두석린갑이 나오는 사극인 이산의 경우 군사훈련 장면에서 두석린갑이 나오는 건 맞지만, 정순왕후와 최석주가 이끄는 반란군이 두석린갑을 입고 나오는 건 틀렸다.[35] 세월이 흘러 대왕 세종의 대마도 정벌 장면에서는 반대로 당시 일본이 무로마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 갑옷이 나오는 시대 구현 오류를 범했다. 소 사다모리가 가신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소 사다모리 옆에 전국시대 인물인 가토 기요마사의 갑주가 있고, 전투 장면에서는 소 사다모리가 무로마치 시대 갑옷이 아니라 전국시대 갑옷인 도세이구소쿠를 착용하였다. 대마도 병사들도 전국시대 아시가루들이 쓰던 삿갓형 투구인 진가사를 썼다.[36] 이순신이 전리품으로 조총을 입수해 군졸들이 분해, 연구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긴 했는데 그게 끝이었다. 굳이 조총을 연구할 것도 없이 승자총통 같이 소형무기도 있긴 했다.안 나왔지만[37] 임진년에 벌어진 몇몇 해전을 보면 적함의 하단을 노리라는 지시가 몇 번 나오기는 하는데, 갈수록 빈도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38] 패장이라고 고함을 빽빽 지르는 건 기본에 뺨따구를 때리거나 빠가야로 드립까지 친다.[39] 당시 기준으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영지가 3만석으로 도도 다카토라 2만석, 가토 요시아키 1만 5천석, 미치유키 3천석보다 더 많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도도의 영지가 32만석으로 크게 커진다.[40] 가령 임진왜란 이후 파견된 최초의 통신사가 일본의 조총과 검을 구입하고자 했다는 기록이 있다.[41] 일본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칼질에 능할 수밖에도 없지만, 군공을 세워서 출세를 하던게 당시 일본의 실정이기도 했다.[42] 물론 신체조건은 조선군이 대체로 더 좋은 편이었고 드물게 편곤 등의 무기로 일본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은 병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43] CG상으로는 거의 포위상태에 가깝다.[44] 만약 그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잘 숨어 있다가 일본 수군 매복선단을 통과시킨 다음 다시 매복을 하였다는 것이 되므로, 이순신이나 송희립이 당황할 이유가 없음은 마찬가지가 된다.[45] 위 수조규식에도 타수가 배를 부려 주위를 돌며 선회하면서 각 면에 장착된 화기를 적에게 일제 사격한다(舵手制船旋回周轉,使各面所藏火器向的齊放)라는 문구가 나온다.[46] 경상 우수영은 한백록, 우치적, 기효근, 1597년 이후부터 이영남 외에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전라 우수영은 한 술 더 떠서 이억기와 황세득 외에 나오는 인물이 없다.[47] 극본 작가인 윤선주가 감성팔이를 잘 한다니 이쪽에 맞추어서 해석하면, 이 장면은 나대용이 수군에 자원하면서 한때 마찰을 빚었던 무의공과 나대용이 감동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이다. 다만 이런 구도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접수 일은 군관이 하고, 무의공은 옆에서 뒷짐이나 지면서 적당히 무게를 잡아도 되고 접수가 잘 되고 있나 잠깐 시찰을 왔다는 등으로 설정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극중에서 충무공은 임진왜란 발발 이전부터 여기저기 순시하는 모습이 많이도 나오는데, 무의공은 순시를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48] 일단 두석린갑은 의장용이지 실전용이 아니며 조선 후기에 비로소 생겨났다는 사실에는 잠시 눈을 감고 작중에서의 묘사만 보자고 하면, 칠천량 이전까지 경상 우수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모두 전라 좌수사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두석린갑을 입고 나왔었다. 그런데 명량 이후부터 이순신 이외의 수사들이 만호, 부사급보다는 격이 높지만 두석린갑보다 격이 낮아 보이는 두정갑을 입고 나오니 일관성이 없다.[49]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을 보면 조선 배(판옥선) 하나, 일본 배(아타케부네) 하나 만들어놓고 거기서 줄창 촬영했다. 그러니 판옥선과 아타케부네만 나올 수밖에.[50] 불멸의 이순신에서 군함 세트장은 용도별로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해변에 정박되어 있거나 바다 위를 항해하는 군함의 모습을 찍기 위한 것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군함을 탄 수군들의 모습을 자세히 찍기 위한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판옥선, 거북선,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모두 만들어졌지만 후자는 유독 세키부네만 빠져 있었다.(거북선의 경우 윗부분이 철판으로 밀폐된 덕에 KBS 사옥 안의 실내 세트장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51] 따라서 본작에서 왜군이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총통을 쓰는 모습도 육상전 한정으로만 나와야 했다. 부산포 해전 장면에서 왜군이 총통을 쓴 건 실제 역사에 맞는 내용이므로 왜군이 해상전에서 총통을 쓰는 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부산포 해전은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해상전이었던 반면 왜군의 입장에서는 육상전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해상전(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노량 해전 등)과 동일선상에 놓기 힘들다.[52] 1636년 통신사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던 황호 같은 경우도 일본의 전함을 보고 '만듦새가 경쾌하고 정묘하기는 하나 튼튼하지는 못하여 우리 배가 들이받으면 부술 만 했다' 라고 기록해 놓았다.[53]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히기는 싫으나 딱히 대안도 없으니 병력을 분산시켜서 다 털리자는 것이다.[54]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을 보면 윤두수의 부음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사람은 오늘날 쉽게 얻을 수 없다. 지나간 임진년 무렵에 만약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면 우리들은 이미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요사이도 자못 공평한 의론을 주장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이 된 것도 운수이니 어찌하겠는가."라고 안타까워했다는 글이 남아 있다. 출처[55] 비슷한 경우의 사극이 전세계적으로 많긴 하다. 중화권 사극에서 한족이 아닌 몽골계, 퉁구스계, 한국계, 일본인 등 이민족 황인 캐릭터가 중국어를 쓰는 것과 영미권 사극에서 비영어권 백인 캐릭터가 영어를 쓰는 게 대표적이다.[56] 46화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도도노에게 '그는 나의 주군이자 그대의 숙부이신 노부나가 공께서도 매우 아끼셨지...' 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대본 작가의 입장에서는 '오다 장군' 이라는 식으로 쓰자니 어색하여 '노부나가 공' 이라고 했겠지만, '기요마사 공', '유키나가 공' 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재현이라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대목.[57] 막판에 히데요시에게 항명하고 도쿠가와한테 붙는 듯한 모습이 나온다. 그 다음 씬에서는 히데요시가 피를 토하며 사망.[5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일본군 총사령관.[59] 오대로의 일원[60] 오대로의 일원[61]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시마즈가의 당주[62]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1인자이자 종오위 하 사도노카미[63] 도도 다카토라뿐만 아니라 위에서 설명했듯이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당시 일본에서 참전한 높은 위치에 있던 무장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 24만석이었는데 반해 도도 다카토라는 이요 7만석에 불과했고, 비록 나이는 도도 다카토라가 더 많았지만 석고와 지위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더 우위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도 다카토라는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1인자였고,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1인자였다.[64] 명실상부한 시코쿠의 패자[65] 89화에서 기존의 지휘관들이 사직서를 내고 새로운 지휘관들이 부임해 오는 자리에서 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녹도 만호 송여종입니다!' 가 첫 대사이자 마지막 대사라, 엑스트라나 다름없다는 것이다.[66] 진린이 합류한 시접이 명량 해전 이후였기 때문에 굉장히 인상깊게 생각했을뿐더러, 이순신 역시 진린을 크게 대접하고 수급 40개를 진린에게 그대로 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이순신에게 합류하기 이전에 진린이 어땠냐면, 맘에 안든다고 한 조선 관리를 말에 매달아놓고 질질 끌고 돌아다녀서 거의 죽일 뻔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