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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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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慶熙宮 | Gyeonghuigung
주소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101,174㎡
지정연도 1963년 1월 18일
건축시기 조선 시대, 1623년
링크 공식 홈페이지
파일:숭정전 일곽.png
<colbgcolor=#bf1400> 현재 남아있는 경희궁 전경
파일:attachment/KHpalace.jpg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헐려 사라지기 전의 경희궁 규모
1. 개요2. 상세3. 역사
3.1. 조선 후기3.2.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3.3. 대한제국3.4. 일제에 의한 잔여 전각 이건3.5. 서울고등학교 터3.6. 발굴 조사 및 복원 시작3.7. 계속되는 훼손
4. 대중교통5. 기타6. 건축물

[clearfix]

1. 개요

<colbgcolor=#bf1400>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경희궁 영상 - 〈아름다운 우리의 궁 경희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 사적 제271호이다. 광해군 재위 기에 새로 지은 3궁(인경궁, 자수궁, 경희궁[1]) 중 한 곳이며 인조 시기부터 철종 시기까지 이궁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정궁 및 이궁 중 유일하게 원형의 95%가 파괴된 상황으로,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 및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궁궐의 대부분이 헐렸다.

2. 상세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서울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가장 많이 파괴된 궁궐이다.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일반에게는 일제에 의해 훼철된 것으로 흔히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후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 <경희궁은 살아있다>에서는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전각을 대부분 해체했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 이 사실이 대중에게 처음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광복 후에도 경희궁 터 위에 있던 서울고등학교의 존재 때문에 한동안 복원이 시도되지 못했다. 서울고등학교는 1909년 일제 고위층 자제들을 위해 설립된 경성중학교 건물을 해방 이후인 1946년 김원규 초대 교장이 재건하여 서울공립중·고등학교로 설립한 학교였다. 그러다가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당시 강남구 서초동으로 이전한 후에야 경희궁 터의 본격적인 유적 발굴과 복원이 가능해졌다. # 그러나 경희궁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에 경희궁 터를 소유하고 있던 서울특별시가 그 자리에 서울특별시교육청,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을 지어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서울시는 잔여 경희궁 터를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땅값이 너무 비쌌던 데다가 경희궁 부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매각에 실패했다. 이후 일부 부지는 서울특별시가 민간에 매각해 거액을 들여 인수하지 않는 한 현재 경희궁의 본래 규모 복원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남은 전각이 적고 협소한 탓에 조선 5대 궁궐 중 인지도가 가장 낮다. 〈1박 2일〉의 서울특별시 문화유산 특집에서도 5대 궁궐을 문제로 내자, 다른 4개의 궁은 어렵지 않게 맞혔으나 경희궁에서 다들 헤맸다.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이나 역덕후가 아닌 이상 다른 일반인에게도 사정은 비슷할 듯. 훼손이 너무 심하다 보니 책에 따라선 4대 궁을 먼저 묶은 뒤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터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서울의 5대 궁궐로 불리는 궁궐 중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은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에서 관리하지만 경희궁은 서울시의 서울역사박물관이 관리하고 있어 그 본래 위상에 걸맞은 관리를 받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이곳에서 3D 복원된 경희궁의 가상체험을 할 수 있다.

3. 역사

3.1. 조선 후기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2]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철종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고종 즉위 직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3.2.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3]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65년(고종 2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고종 5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한 후 경희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했고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기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성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는 1883년(고종 20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4]
파일:P1060512.jpg
<colbgcolor=#bf1400> 1901년(광무 5년)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5]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

3.3.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시 황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 영역을 북서쪽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에 따라 경운궁과 경희궁 궁역의 거리가 가까워졌다.[6] 고종은 아관망명 직후 경운궁과 경희궁을 중건하려고 했으나 예산의 부족으로 경운궁만 중건한다. 1898년에는 경희궁 침전 권역에 황학정을 세워 전통 궁술의 맥을 이었다. 경운궁 확장 공사가 1차로 끝나가던 시점인 1901년(광무 5년)에 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홍교[7]라는 다리가 세워졌다. 당시 경희궁 영역에는 전각 5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홍교로 덕수궁과 연결된 덕분에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에서 국가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특히 대부분의 전각이 철거되어 넓은 공터가 있었던 덕분에 관병식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한했을 당시 이곳에서 관병식과 활쏘기 훈련을 참관하기도 했다. 1904년 고종이 재위 40주년을 맞이했을 당시에도 이곳에 외국 귀빈들을 초청해 군기분열 행사를 열 계획이었으나 콜레라의 창궐과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재위 40주년 기념 행사가 완전히 취소되면서 군기분열 행사 역시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1907년(융희 원년) 고종강제퇴위당하고 새로 즉위한 황제 순종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덕수궁은 황궁의 지위를 상실했고, 경희궁 사용 빈도 또한 현저히 줄어들다. 일제신문로의 교통 흐름을 막고 있던 홍교를 1908년(융희 2년)에 철거했다.
파일:서대문 운교.png
<colbgcolor=#bf1400> 경운궁과 연결했던 운교.[8]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3.4. 일제에 의한 잔여 전각 이건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면서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더불어 경희궁도 조선총독부 영향력 아래로 놓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 경희궁 권역 내에 남아 있는 전각은 5개에 불과했다. 이는 일제가 간행한 '경성부사'와 이전에 조선에서 간행한 '경복궁연건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파일:경성중학교 경희궁 1915년 서울역사아카이브.jpg
<colbgcolor=#bf1400> 1915년 경성중학교의 모습[9]
1910년 11월에는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 동남쪽에 있는 공터로 이전해 왔다. 1915년에는 신문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정문인 흥화문을 남쪽으로 이건했다.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전각들을 순차적으로 매각했고, 이후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흥화문은 다시 경희궁으로 되돌아 왔다. 동국대학교에서 절로 전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은 노후화 등의 이유로 인해 경희궁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복제하여 복원시켰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매입한 후 현재의 위치(동국대학교)로 옮겨서 법당으로 마개조하여 사용했다. 참고로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10] 광복 이후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흡수되었고, 조계종에서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를 세우면서 동국대학교의 법당 '정각원'으로 사용했다. 1976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안타깝게도 정문인 흥화문박문사[11]에서 매입하여 산문으로 활용했는데, 이곳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제거된 일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사찰이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 자리에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1974년 서울시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1988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원래 흥화문 자리에 구세군회관이 들어선 관계로 개양문이 있던 자리로 이건되었다.

경희궁 외조 남쪽문인 개양문은 남산에 있는 일본사찰 서본원사에 매각되어 정문으로 쓰였다가 이후 경성방송국을 거쳐 1964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정문인 대성문으로 사용되어 1960 ~ 1970년대 성균관대학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차량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976년 석조교문으로 바뀌었고, 이후 서울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이는 서울역사박물관측의 조사 내용인데, 일부에서는 1904년 ~ 1905년에 촬영하여 《꼬레에 에 꼬레아니》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개양문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경복궁 중건 때 소실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1930년대 초에 이르러 경희궁 전각은 100% 완전히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1943년 ~ 1944년에는 비행기를 이용한 폭격에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인 융복전회상전이 있던 위치에 방공호를 설치했는데, 인근의 경성중학교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대규모로 축조했다.[12] 지상부는 폭격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3m에 달하는 콘크리트 외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형 돔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으며, 지하 2층 터널형 구조이다. 총 면적은 1379m²로, 길게 뻗어나 있는 통로 양옆으로 방 10여 개가 나란히 있다. 한반도까지 태평양 전쟁 전선이 확대되지는 않아서 이 방공호가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다. 경희궁 회상전 문서에서 방공호의 외부 모습을 볼 수 있다.

3.5. 서울고등학교 터

경희궁 부지에 일제가 지은 경성중학교는 광복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되었고, 이로 인해 경희궁 복원이 어려웠다. 1980년 서울고를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경희궁 복원이 가능해졌지만, 정부와 서울시, 교육청 등이 경희궁을 복원해야 할 자리에 떡하니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을 건립했다. 때문에 현재 경희궁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1980년 강남개발계획에 따라 도심부의 명문고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서울고등학교서초구로 이전했다.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사가자마자 서울특별시에서는 그 부지의 서쪽 구석에 서울특별시교육청 신청사를 신축했으나, 나머지 부지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기까지 약 20년 간 그냥 공터로 방치되었다. 서울특별시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알짜배기 땅인 서울고등학교 부지의 매각을 시도했으나 선뜻 그 땅을 사겠다고 나서는 민간기업이 없었다. 땅값이 100억 원이 넘어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앙 정부와 서울특별시에서는 현대건설에 이 땅을 사라고 권유했다. 현대건설은 "별 생각 없지만 정부가 권유하니 인수하겠다"는 태도로 이 땅을 구매한다.

서울고등학교서초구에 새 교사를 짓고 이전해간 것은 1980년 신학기부터였고, 현대 측에서는 구 교사자리에 '인력개발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현대그룹의 사원연수원으로 활용했다. 이 때 이미 현대그룹은 이곳에 28층짜리 대형건물을 지어 그룹 본사의 사옥 겸 외국 바이어 전용호텔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대규모 현대사옥이 들어선다는 것을 일반시민이 알게 되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도 반대의견이 중론이었고, 서너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으레 화제가 되었고 한결같이 '시민을 위한 공원화'를 주장했다. 이렇게 반대여론이 압도적이었던 것에 대해 손정목서울특별시청 내무국장은 자신의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통해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이 기저에 깔려있었다고 분석한다. 정치 이야기는 함부로 할 수 없었지만, "현대로부터 땅을 빼앗아 공원으로 만들어라"는 소리는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잡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답답하고 울적한 심정을 해소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론이 들끓자 현대그룹은 사옥 건설 계획을 보류하고 관망세로 전환한다. 서울특별시는 궁지에 몰렸다. 이 때 과천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 예술의전당을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대한민국 경찰청 신청사를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성난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기관도 강력하게 추진을 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런 여론의 성화 때문에 1980년대에 해당 부지는 사실상 공터로 방치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서울시 한복판 광화문 사거리 바로 옆에 광활한 공터가 펼쳐져(방치되어) 있는 것을 매우 의아해하기도 했다.

3.6. 발굴 조사 및 복원 시작

1985년 1월 서울특별시장을 비롯한 서울특별시 간부들이 주요업무계획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다가오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한 민심수습책을 논의했고, 그 방안의 하나로 경희궁 터 공원화 계획이 거론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서울고등학교 부지를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현대건설로부터 다시 경희궁 부지를 취득했고, 그 대신 서울시는 매립한지 얼마 안 된 구의지구(강변역 일대)의 택지 5만평을 현대건설에 주었다. 현재 강변역 일대의 빽빽히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경희궁의 흔적인 셈.

서울특별시는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조성계획'을 세우고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1985년과 1987년 1,2차 발굴 조사를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했으며,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3차~7차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에도 발굴 조사를 계속 진행했다.

1,2차 발굴 조사를 실시한 단국대학교 박물관은 월대석을 노출했고, 당시까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어계는 숭정전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한 애초의 추정과 달리 숭정전은 옛 서울고등학교의 신관 건물이 아니라 식당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발굴 결과 및 문헌 고증을 거친 경희궁 전각 복원 사업도 시작했다. 1987년에 우선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 및 복원했다. 다만 원래 위치에 이미 구세군회관이 들어섰기 때문에 서쪽으로 100여 m 가량 옮겨 복원했다. 1991년에는 숭정전을, 1998년에는 자정전과 회랑을, 2000년에는 태령전과 그 일곽을 각각 경희궁 내에 복원했다. 그리고 2002년에 숭정전 주변부 복원을 완료하여 경희궁을 시민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이후로 2017년 현재까지 경희궁 복원 사업은 상당히 지지 부진하여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그런데 하필 경희궁 부지에 서울역사박물관(구 서울시립박물관)이 1997년에 들어서서 또한 아파트 때문에[13] 당분간 더 이상의 복원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보고 주변 건물을 먼저 철거하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2004년 이후로 복원은 중단된 상태다. 기사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서로 배째라면서 예산을 안 주고 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내전에 해당되는 곳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복원이 재개된다 해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할 확률까지 생겼다.

복원된 현재의 경희궁 부지는 서울 궁궐치고는 상당히 협소한 편인지라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쉽게 둘러볼 수 있다. 비탈이 많아 이동이 쾌적한 편은 아니지만 말이다.

숭정전에서는 〈대장금〉, 〈화성에서 꿈꾸다〉, 〈명성황후〉, 〈왕세자 실종사건〉 등의 사극 뮤지컬도 '고궁 버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올라온다. 야외이기도 하고 애초에 공연장이 목적인 장소가 아닌지라 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밤하늘 아래에서 보는 뮤지컬은 최소한 분위기가 제법 난다. 또한 문화재 보호를 위해 주요 고궁에서의 사극 또는 드라마 촬영을 엄격하게 제한하자 사실상 신축이라 상대적으로 연혁이 짧은 경희궁이 촬영 장소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에 나오는 황궁도 사실 이곳에서 외부 장면을 촬영했다.
<colbgcolor=#bf1400> 위는 동국대학교 정각원(본래 숭정전) 천장의 용이고
아래는 새로 복원한 숭정전 천장에 달린 용이다.
2013년에 복원한 숭례문의 용 그림이 문제가 되면서 경희궁 숭정전 용도 덩달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위쪽 사진의 용은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로 쓰이고 있는 본래의 숭정전 천장에 달려있는 것이고, 아래쪽 사진의 용은 옛 숭정전 자리에 새로 복원한 건물의 천장에 달아놓은 것이다. 현재 경희궁에 복원해둔 숭정전 용 조형물은 장난감 같이 조잡하게 제작되었다는 평이 많으며, 천정의 그림과 다른 조형물 역시 원형과 전혀 다르게 만들어져 비판받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 1월 27일에 문화재청에서 2014년에 다시 복원사업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복원 작업에는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가 공동으로 참여하며, 예산도 국비 70%, 시비 30%를 투입하며 2023년까지 진행한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서울특별시에서 제작한 종합정비계획안에 따르면 2035년 이후를 목표로 경희궁 전체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출처

우선 2016년 말에 경희궁 옆에 있었던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이 철거가 되고, 그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의 주차장이 들어서고, 지금의 주차장 자리는 발굴을 통해 복원을 시도할 예정이다. 또한 방공호도 철거하고, 2025년까지 흥화문 등도 고쳐 짓는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 등은 2026년부터 장기계획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기사

그리고 해가 지나면서 위의 발표 역시 그냥 말잔치로 끝났다. 당연히 복원 사업은 없고 관련 부서 직원들도 내용을 모른다.

3.7. 계속되는 훼손

광복 이후에 특히 서울특별시에 의한 훼손이 현재진행형이다. 정부에서 유적이 발굴된 때에 한해서라도 해당 사유지를 매입해 보존했어야 하나, 어떠한 보존조치도 이뤄지지도 않았고 조선 전기 유적까지 사라져버렸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유적 위에다가 원래 전각을 복구하면서 유구 파괴가 생긴 것도 아니고, 다른 용도로 건물을 신축하며 기존의 유구를 모두 폐기한 것이다.

현재 경희궁 터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 기상청(일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복지재단 등의 공공기관과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 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등의 민간 건물이 들어서 있다.

특히 서울시는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적된 1980년 이후에도 경희궁 터에 서울특별시교육청(1981년), 서울시립미술관(1988년), 서울역사박물관(2002년[14]), 서울복지재단 등을 짓는 만행을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기존 경희궁 유적과 유구에 대한 발굴과 보존 조치를 거의 취하지 않아 유적지가 파괴되는 믿기 어려운 짓을 저질렀다.

1980년 드디어 서울고등학교강남으로 이전했고 이로서 그동안 요원했던 경희궁의 복원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서울시는 곧바로 재빨리 경희궁 터 서쪽부지를 서울특별시교육청에게 떼내주었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은 경희궁역 내 서북쪽 땅에 청사 및 부속 건물들을 신축한 후 1981년 이전해 들어왔고 현재까지 사용 중에 있다.

서울고등학고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에도 서울특별시는 경희궁 터 한복판에 위치한 옛 서울고 본관 건물을 경기고등학교처럼 동문들의 압력 때문인지 철거하지 않고 있다가 1988년 개축하여 서울시립미술관을 개관했다.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이 서소문 본관으로 이전하면서, 경희궁 내 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6년 말에야 미술관 분관이 철거되었고,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 유적 발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서울시는 경희궁 터 동남쪽 구역에 서울역사박물관 건축을 추진했다. 아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부지에 건물을 올려 2002년 완공되었다.

1998년 9월 ~ 11월 신문로2가 1-107, 108번지에 "서울 교원복지회관 신축공사"가 진행되었다. 공사에 앞서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진행한 조사에서 남서쪽 지역에서 적심석 총 14기, 북쪽 끝부분 중앙에서부터 서쪽으로 지정석으로 보이는 잡석군과 적심석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석재 1기, 그리고 장대석 6기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유적의 보존도 이뤄지지 않았고 공사를 허용해 경희궁 유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서울교총빌딩이 건축되었다.

2003년 10월 신문로2가 1-335에 "서울 신문로2가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가 진행되었고,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와편 및 전 등이 출토된 건물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역시 유적은 파괴되었고 출판사 일조각 사옥이 건축되었다.

2005년에는 사직동 9-1 일대에 사직1구역 도심재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 경희궁 관련 궁장,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나 산지형까지 깎아 원지형을 훼손하면서까지 아파트 건축이 진행되었고 현재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복토보존 후 사업시행을 했다고는 하나 지형 자체가 파괴되었고, 고층 아파트가 건립되어 원형은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 위치한 다른 공동주택 시설인 파크팰리스,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 단지는 경희궁의 궁역이 아니지만 풍림스페이스본의 경우 경희궁의 직접적인 궁역이며 유적까지 확인됐으나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그대로 공사가 진행됐다. 현재 풍림스페이스본 106동 일부, 104동 일부가 경희궁 궁역이다.

2008년 8월 ~ 12월 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신문로2가 1-176번지 일원 발굴조사 진행했다. 조사결과,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문화층과 조선 전기 문화층이 중첩되어 확인되었다. 조선 전기의 유구는 건물지 1동이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문화층의 유구는 건물지 1개소와 주거지 또는 여막 등으로 추정되는 수혈 6기, 그 밖의 수혈 40여 기가 확인되었다. 역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아산정책연구원이 건축되었다.

2009년 10월 ~ 12월 재단법인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신문로2가 1-158번지 내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조사결과, 유구는 건물지 1동, 구상유구 1기, 방형전 유구 1기, 축대 및 배수로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와전류와 자기류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안내판 하나만 만들고 유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통일교 재단 사옥이 건축되었다.

2013년 신문로2가 1-124번지 어린이집 건축 부지에서 조선전기 건물지가 출토되었으나, 완전히 파괴한 채 건물이 신축되었고 현재 현대해상어린이집이 운영중이다. 특히 현대해상은 외부에 유적이 출토되었다는 안내판을 설치하겠다고 했으나 말만 그랬을 뿐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4. 대중교통

수도권 전철의 경우 5호선 서대문역이 가장 가깝다.

5. 기타

6. 건축물

사진 설명
파일:Heunghwamun.jpg
흥화문(興化門)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에 단층 구조로 다른 궁과는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뜯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엉뚱한 곳의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원래자리에는 흥화문터를 알리고 있는 안내비석이 서 있고 그 바로 뒤 금천교와 서울역사박물관이 있어 거기서 부터 숭정전까지 거리로 경희궁의 규모를 가름할 수 있다.
파일:숭정문.png
숭정문(崇政門)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파일:gyeonghuigung06.jpg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세워졌으나 1926년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했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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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의 몇 안남은 전각들조차 훼손될 때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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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령전(泰寧殿)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때 같이 매각되었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이 전각의 뒤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큰 바위가 있는데 서암(瑞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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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호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3년 말경[15]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 전신국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만들었다고 하며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했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2003년에 방공호를 폭파철거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전시(戰時)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개조하려고 했고, 명지대학교에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2004년에 연구용역팀이 역사현장으로 보존하자고 피력하여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협의를 했으나 예산 문제 등으로 수년간 미루다가 뜻을 못 이뤘다.(#) 2013년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발표하며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라 밝혔다가, 돈이 많이 든다며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냥 방치된 상태. 대중에게는 MBC 느낌표의 위대한 유산 744434를 통해 처음 알려졌으며, 해당 시설에 방문한 시민의 블로그 게시물을 보면 대충 만든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1] 초창기에는 경덕궁. 후술하겠지만 영조 때 이름이 바뀌었다.[2] 경희궁의 원래 이름[3] 1860년(철종 11년)에 철종이 경희궁에 6개월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경희궁의 마지막 사용 기록인데 적어도 이때까지는 경희궁이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4] 1900년대 초까지의 사진상으로 보이는 남아있던 전각들을 나열해보자면, 정문인 흥화문과 금천교. 정전인 숭정전. 편전으로 많이 활용된 흥정당. 중궁전(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회상전이 전부이다.[5] 사진엽서 전체의 모습은 이 링크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6] 경희궁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과 구세군 회관 아래쪽 신문로까지 포함하고 있었고, 대한제국 시절 경운궁의 부지도 지금보다 북서쪽으로 더 넓었기 때문에 경희궁과 상당히 가까웠다.[7] 무지개다리라는 뜻이다. 운교라고도 불렀는데 이 쪽은 구름다리.[8] 사진 출처: 국가유산청[9] 뒤에 약간 보이는 건물이 바로 숭정전이다.[10]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11]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12] 다만 경성중학교 재학생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국의 청소년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만든 것이다.[13] 장락전 부근의 방대한 권역은 현재 전부 민가가 들어서 있다.[14] 개관 기준. 준공은 1997년에 했다.[15] 당시 경성중 학생이던 최준희의 2003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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